증언(證言) - [36]
강정자 (姜禎資) - 말씀따라 모든 사연 뒤로하고
3. 문둥병 환자를 만남
1 내가 중학교 때 아버지는 수산조합장을 맡고 계셨다. 아버지가 발령이 나는 대로 부모님은 거처를 옮겨 포항과 영일군 감포에서 지내셨다.
2 우리는 할머니와 경주에서 지내며 방학이 되면 부모님이 있는 곳으로 다니러 갔다. 부모님이 감포에서 지내실 때 그곳에 놀러 갔는데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3 부모님이 외출하시고 혼자서 집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부모님이 빨리 오신 건가?” 생각하며 현관으로 나가 문을 연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4 문 앞에 눈과 코가 심하게 일그러진 문둥병 환자 두 명이 서있던 것이다. 예상 밖의 일에 너무 놀라 정신이 없었다.
5 허겁지겁 부엌으로 가 눈에 보이는 곡물을 한 바가지를 퍼서 부어주고는 문을 닫으려는데 손이 떨려 문을 못 닫고 서 있었다. 그러자 그 문둥병 환자가 나를 보며 “다 같은 사람인데…”라고 하고서 발길을 돌렸다.
6 그 한 마디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성 프란체스코처럼 사람을 사랑하겠다고 해놓고 내가 사람을 무시한 것이었다. 똑같은 사람이라는 말은 내 머릿속을 쉴 새 없이 맴돌았다.
7 눈을 감고 있어도, 뜨고 있어도 문둥병 환자들이 보였다. 심지어 꿈속에도 나타나 나를 쫓아다녔다. 나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8 그 일을 겪은 후 나라는 존재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왜 태어났을까? 왜 살아갈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하지만 하루 종일 고민을 해봐도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9 큰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네가 철학가야?, 종교가야?” “여자가 그렇게 고민하면 시집도 못 간다!”라며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언니가 하는 말은 귀에 들리지 않고 나의 고뇌는 깊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