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들의 기도(수요 기도회)에 처음 보는 남자분이 찾아왔다. 작은 교회에 한 사람이 오면, 3년 가뭄 후에 내리는 비처럼 반갑다. 정현종 시 <방문객>이 딱 내 마음을 대변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기도회를 마치고 어떻게 오셨는지, 어디에 사시는지, 이름은 무엇인지를 지나친 친절로 물었다. 하늘이 보내준 기회를 잡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기회는 위기였다. 그가 한 첫 말은 이랬다. “목사님, 초면에 질문이 있는데요. 주보에 왜 헌금자 명단을 올려야 합니까?” 초면에 대놓고 불만을 던졌다. 받은 질문이기에 답변했다. 헌금의 투명성을 위해서 어쩌고 저쩌고를 말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에게 작은 교회 목사의 답변은 씨도 먹히지 않았다. 자신만의 답을 가지고 있었고 성경적인 논증으로 헌금자의 명단은 주보에 올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은 대체로 맞다. 나의 말도 틀리진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은 나에게 비수였다. “성경대로 하지 않는 목사는 삯꾼입니다.” 이 말로 내 마음은 싸늘해지고 살가죽엔 닭살이 돋았다. 화가 났다는 말이다. 이유는 내 마음을 들켜버렸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는 <내가 되어가는 순간>에서 말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바로 그 사람에게서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보고 증오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 안에 없는 것은 우리를 자극하지 않는 법이다.” 딱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나는 그에게서 나를 보았다. 자기만 옳은 이상적 관념주의자 말이다. 이상적 관념주의자는 항상 옳은 말을 한다. 하지만 자신이 한 말을 삶에 담아내지 않는다. 말은 거룩하고, 삶은 거지같다. 나는 이런 사람이 정말 싫다. 그래서 나는 나를 싫어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영직의 <행동 뒤에 숨은 심리학>에서는 한 설문 내용을 기록한다. “여기 고위 공직에 출마한 세 사람의 후보가 있다. 여러분은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A 후보: 젊어서부터 술, 담배, 마약을 했던 불량 소년이었다. 숨겨둔 여자와 자식이 있었다. 나중에는 다리가 불편해서 휠체어에 의존해야 했다.
B 후보: 어려서부터 말썽꾸러기 학생이었고 낙제생이었으며, 사관학교도 3수 만에 들어갔다. 줄담배를 피우고 술고래였으며, 괴팍한 성격이어서 사람들이 가까이하기를 꺼렸다.
C 후보: 독실한 신자였고 금욕주의자, 채식주의자였다. 술과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으며, 애국심이 강해서 전쟁에 나가 훈장을 받기도 했다.
설문의 결과는 C 후보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다. A는 루스벨트, B는 처칠, C는 히틀러였다. 편견은 한 사람을 전체로 보지 않는 것이다. 자기 눈에 틀린 한 가지로 인간 전체를 판단하는 게 편견이다. 그래서 편견을 가지면 고집이 세진다. 자기만 옳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자기만 옳은 사람이란 확신이 든다. 성도들이 말없이 들어주니 자신은 완전하고 무결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영성이 익어갈수록 지적은 줄고, 지지는 늘어간다. 지적하자면 하늘의 아들인 예수도 얼마든지 지적할 수 있다.
예수 믿는 할머니에게 안 믿는 할머니가 말했다. ‘예수란 양반이 여자를 밝히더구만.’ ‘어떤 놈이 그런 소리를 하던가?’ ‘성경에 나와 있던디.’ ‘성경 어디에?’ ‘그 양반 뻑하면 마르다하고 마리아 집에 가고, 죽었다가 살아나서도 지 애미보다 막달라 마리아란 지집을 젤 먼저 만나더구만.’ 예수 믿는 할머니는 화를 품고 기도한다. ‘주님, 행실을 조심하셨어야죠. 들키지나 말던가. 제가 주님 때문에 창피해서 교회를 다닐 수가 없습니다.’ 그때 예수의 음성이 들린다. ‘미안하다, 그때 내 나이가 삼십 대라서.’ 지적질엔 예수님도 무너진다.
주보에 헌금자 명단을 빼야 한다는 남자에게 나는 답했다. “맞습니다. 집사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도 더 성경적으로 목회하겠습니다. 집사님도 지금 하신 말씀을 삶으로 연결시켜 주십시오.” 그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다. “저도 부족합니다. 말씀대로 살기가 힘들더군요.” 나는 그의 마지막 말이 좋다. 자신을 돌아본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에게 물어보지 못한 말이 하나 있다. “그게 그렇게나 중요한 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