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추위가 계속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이곳 월정리 사제관 밑에 있는 연못 세 개가 다 꽁꽁 얼었죠, 눈까지 하얗게 쌓였고요.
그렇지만 밖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유리창 밖으로 보는 주변 환경은 아름답습니다.
겨울은 겨울대로, 사실 사시사철 아름다운 것이죠.
다만 산에 있는 산짐승들이 좀 걱정이 됩니다.
고라니 새끼도 먹을 것이 없는지 자꾸 사제관 쪽을 기웃 기웃거리는데 저도 특별히 줄 게 없어 좀 안타깝습니다.
배티성지에 있을 때는 고라니 다니는 길에 사료가 젖지 않게 간단하게 지붕을 씌우고
그 밑에 큰 통에 고라니 먹으라고 사료를 놓은 적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가축 먹는 사료를 좀 사다 놓을까 하다가, 또 그러다 보면 전국에 있는 고라니가 월정리로 다 모이면,
고라니 사목을 같이 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일이 더 커지겠다는 생각도 들고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추위입니다.
오늘은 아담과 하와 이야기 두 번째입니다.
2장 9절에 ‘야훼 하느님께서는 보기 좋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그 땅에서 돋아나게 하셨다.
또 그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돋아나게 하셨다.’
16절과 17절을 보면 또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마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하느님께서 많은 나무를 심어놓고 다른 것은 다 따먹게 했는데,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 열매는 따 먹지 말라 하십니다.
그런데 17절을 보면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지 말라는 얘기는 없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고 하시죠,
이 죽음은 영적인 죽음이겠죠, 육적인 죽음이 아니라.
그리고 생명나무를 따먹지 말라는 말은 없어도, 선악과를 따먹고 나면 자동적으로 생명나무는 따먹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은 두 나무의 열매를 따 먹는 것을 금지한 셈이 되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여러분들 마음속으로 ‘금한다’할 때 ‘금(禁)’의 한문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금할 금(禁)’ 자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아십니까?
위가 나무 두 개, 나무 두 개가 수풀 림(林)이죠. 그리고 그 밑에 가르칠 시(示), 알게 할 시.
그 두 글자가 합쳐져서 금지한다고 할 때 ‘금(禁)’이 됩니다.
저는 어느 날 ‘금할 금(禁)’ 자를 보다가 무릎을 딱 쳤어요. 잔머리가 돌기 시작하는 거죠.
이거 선악과와 생명나무 얘기하는 거 아니야?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 이 두 개가 맨 위에 올라가 있고, 그 밑에 가르칠시, 보게 할 시, 자가 밑에 있다.’ 이겁니다.
옳거니! 저는 제가 어마어마하게 큰 것을 발견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감탄했죠.
‘두 그루의 나무가 가르치고 있다.’
금지한다는 뜻의 ‘금(禁)’의 기원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참 신기했습니다.
성경에 두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을 금지했다.
그런데 한문의 금(禁)지도 나무 두 개를 알게 하다, 보게 한다.
어떻게 이렇게 연관성이 있을까?
여러분들 참 재밌지 않습니까, 저만 재밌는 겁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금하셨으나
그 나무에 열매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는 생명나무에 열매를 따 먹는 길까지 끊기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금(禁)이라는 글자가 성립된 그 본래의 뜻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성경에 나오는 두 나무의 열매를 따 먹는 것을 금하는 것과 연결해 보면 참 재미있는 글자라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하와는 왜 그 나무 열매를 따 먹었습니까?
답은 나와 있죠.
뱀에게 유혹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뱀의 유혹은 정말 교묘하고도 빈틈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악마의 유혹은 하와를 유혹했던 것처럼 정말 정교하고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으면서,
자기는 빠져나가게끔 만드는 아주 교묘한 술책을 쓴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피정 때 그런 얘기를 드리죠.
악마는 분위기를 만들어 놓는다고 그랬습니다. ‘죄에 빠질 수 있는 분위기’
그 죄에 떨어지는 것은 개개인의 의지입니다.
그리고 개개인의 선택입니다.
악마는 우리의 의지와 선택까지 가지고 마음대로 놀 수가 없다는 얘기죠.
창녀 집이 쫙 있는데 그 앞을 지나가는 남자가 그 창녀 집에 들어가고 안 들어가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선택입니다.
의지에 달린 겁니다.
그래서 사탄은 죄에 빠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놓습니다.
하와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런 방법을 써서 유혹합니다.
그리고 이 하와에게 했던 방법 그대로
지금까지도 악마는 우리에게 죄에 빠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고 빠져들기만을 기다립니다.
3장 1절에 보면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이 너희더러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하나도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되,
죽지 않으려거든 이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5절에 보면 뱀이 힘을 줘서 얘기하죠.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 열매를 따 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
참 기가 막힌 유혹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 줄 알았는데, 뱀의 이야기는 ‘절대 안 죽어,’
안 죽을뿐더러 어떻게 된다고요? 하느님과 같아질 것이다.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만큼 선악과 열매를 따 먹는데 꿀처럼 단 유혹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서에 뱀은 단 한마디도 ‘먹어 봐’ 이렇게 하질 않습니다.
하와는 나중에 ‘뱀이 나를 꼬였습니다.’라고 했지만,
뱀은 ‘나는 먹으라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한 적이 없다.’ 이렇게 변명할 수 있게 교묘하게 유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탄은 유혹을 직접 하지 않고 유혹당할 분위기를 늘 마련해 놓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유혹이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혹을 당하지 않는 인생은 없습니다.
하지만 죄에 빠지는 것은 결국 본인 자신이지 누구 탓을 할 수가 없습니다.
유혹에 떨어지는 것은 본인 탓입니다.
창녀촌 앞을 지나가도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거기에 발을 디뎌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물건이 아닌 것을 정직하게 물건 주인을 찾아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자기 것인 양 ‘인 마이 포켓’(in my pocket) 하는 사람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유혹은 흘러넘치고 있지만 유혹 한가운데 있어서도 의연한 사람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 타락의 이야기를 읽고 불가사의한 일이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은 어찌해서 먹어서는 안 되는 나무를 그곳에 만드셨을까?’
두 번째는 ‘생명의 나무, 다른 말로 이 지혜의 나무 열매는 누가 먹는 것일까?
지금 생명의 나무라고 얘기했지만, 더 정확히 얘기하면 이 두 나무 열매는 도대체 누가 먹는가?’
열매는 먹혀야만 하는 이유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겁니다.
선악과를 우리는 지혜의 나무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나무 열매에 대한 설명은 성경에 사실 없지만. 무지하게 중요한 나무는 확실합니다.
선악과 열매를 따 먹으면 생명의 나무 열매에도 접근 못 하게 했기 때문에 그렇죠.
아무튼 처음 구약 성서를 읽으면서 이 두 가지 답 없는 질문을 혼자 계속 헤매다 보니까 머리가 빠개질 듯이 아팠습니다.
‘보기에도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열매 맺는 나무를 동산 한가운데 심어놓고 이것만은 먹지 말아야 한다.’
이 말씀은 좀 심한 말씀이 아닌가,
그뿐만 아니라 그 열매를 먹으면 죽게 되는 위험한 나무를 무엇 때문에 거기에 두셨느냐 이겁니다.
이 뜻을 당시 어린 나로서는 알래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따라오는 또 한 가지의 질문은 이런 거였죠.
하느님이 인간을 만드셨는데, 만드셨을 때
100% 하느님에게 순종하는 마음만 주셨다면 아담과 하와는 금단의 열매를 먹지도 않았을 터인데 왜 그런 마음을 줬을까?
지금은 누구나 갖는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거기에 대한 답은 신학 공부를 하면서 하나하나 깨우쳐지게 됐죠.
하느님은 자유 의지를 가진 자로서의 인간을 만드셨다는 겁니다.
뭘 가진 자? 자유 의지를 가진 자로서의 인간 창조를 하셨다는 겁니다.
인간을 틀에 끼워 놓은 것 같이 하등의 자유도 없는, 본능만 존재하는 것으로 만들어 놓았더라면 확실히 문제는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자유가 없는 쪽이 좋았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금단의 나무 열매가 없었더라면,
또는 왜 우리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느냐 등 불평을 계속해서 늘어놓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스꽝스러운 얘기죠.
그건 마치 뭐와 같습니까?
상점에서 도둑질한 어떤 여인이 뭐라고 변명했느냐?
‘도둑질할 수밖에 없잖아요.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이 저렇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어떻게 도둑질 안 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우리들은 크건 작건 궤변을 잘하는 존재들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같이 현명해지고 싶은 불손하고 교만한 소원을 가지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 결과 얼마나 현명해졌을까요?
‘그들은 자기들이 벗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렸다. (3장 7절)’
선악과를 먹고 갑자기 IQ가 뛰어 천재가 된 것도 아니고 초능력이 생긴 것도 아니었습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에 했던 그들의 첫 번째 액션은 뭐냐?
허둥지둥 무화과나무잎으로 치부를 가린 겁니다.
처음에 깊은 뜻을 생각하지 않고 읽었을 때는 어떤 우스운 생각이 들었느냐?
아! 이것이 바로 바느질의 시작이었구나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렇지만 잘 읽어보면 벗은 것이 부끄러웠다고 얘기 나오죠.
무화과나무잎으로 가린 것은 허리둘레뿐이지 가슴과 배는 드러낸 그대로였습니다.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벗은 것이 부끄러웠으면 가슴이 드러난 것도,
배꼽을 내놓은 것도 같이 부끄러워했어야 할 터인데, 왜 앞만 가렸을까?
무화과나무잎은 뭐로 잘랐을까?
젖을 안 가리고 배꼽을 안 가리고 밑에만 가렸다는 얘기입니다.
갑자기 이 얘기하니까 어디서 들은 그런 얘기가 나오는데,
목욕탕에서 불이 났을 때 뛰쳐나오는 모습이 나라별로 다르다고 그럽니다.
옷을 벗은 채로 밖으로 나올 때 미국 사람들은 아랫도리만 가리고 나오고,
일본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가슴 쪽을 가리고 나온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목욕탕에서 불이 났을 때 어디를 가려는 줄 아십니까?
눈만 가리고 나온다고 합니다.
내가 안 보이면 다른 사람도 나를 못 보는 걸로 아는 거죠.
좀 썰렁한 농담이었지만 갑자기 그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아무튼 저는 이렇게 하나하나 깊이 들어가면서 왜 무화과나무로 밑만 가렸을까,
사실은 위쪽도 부끄러운 부분인데.
부끄러운 부분이기 때문에 우리 가리고 옷을 입고 살지 않습니까?
눈코가 부끄럽지 않죠? 하긴 눈코를 가리면 숨을 못 쉬어 죽죠.
이것에 대한 답은 다음 시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궁금하고 감질나시더라도 참으세요.
아무튼 2장과 3장을 여러분들 나름대로 한번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궁금한 거 있으시면 계속 의문점을 좀 만들어 보십시오.
이건 왜 이랬을까?
저는 아까 중학교 때 그 두 가지 점이 몹시 궁금했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처음 성경을 읽을 때가 중학생 때였는데 펼쳐 읽으면서 두 가지,
왜 그 나무 두 개를 왜 만들었냐?
그리고 그 나무에서 나오는 열매는 도대체 누가 먹는 열매냐?
그리고 세 번째로는 지금 얘기한 것처럼 왜 밑만 가리고 위는 안 가렸을까?
우문은 없습니다. 어리석은 질문을 통해서 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 추위 조심, 감기 조심하시고, 성경은 다음 주 수요일, 주일 강론은 성탄절에 만나겠습니다.
여러분들 영원에 영원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강의를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