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도에 사는 남자
한 남자가 예순일곱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아내와 며느리들이 차린 소담한 생일상을 받으며 케이크를 자르고 축하주도 몇 잔 마셨다. 손자들은 재롱을 피우며 노래를 불렀고 자식들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라며 용돈을 두둑이 챙겨주었다.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는 답인사를 했으나 속마음은 털어놓지 않았다.
두세 시간이 지난 후, 자식들 가족이 모두 떠났다. 아내도 친구를 만나러 간다며 서둘러 나갔다. 그는 여행용 가방에 몇 벌의 옷가지를 챙겨 넣었다. '섬에 간다. 찾지 마라.'고 적은 메모지 위에 자신의 스마트폰을 올려놓고 집을 나왔다. 가방을 끌고 가면서 약간 망설이기도 했으나 오랫동안 마음먹었던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했다.
통영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창밖을 보다가 회상에 잠겼다. 지금까지의 삶이 도시인들의 생활을 방영한 다큐멘터리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는 30년간 교직과 회사 생활을 했다. 집안의 주방을 책임지면서 수필을 쓰기 시작한 지 10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요리 실력도 어느 정도 갖추었고 수필집도 세 권이나 출간했다. 이제 가족들을 위해 희생과 봉사할 일도 없고, 자신을 위해 투자하고 개발할 정신적 육체적 여력도 없어졌다. 아내와 자식들은 그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제 혼자 살아가야 할 때가 왔다.
지나간 시간을 마음속에 접어놓고 앞으로 닥쳐올 외로운 시간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사는 것보다 사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믿어왔다. 도시나 가정에서 혼자라는 외로움은 고통이지만 외딴곳에 혼자 살면 외로움이 아니라 즐거운 고독이 된다. 고독은 사람들의 기피 대상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목표를 찾게 해주는 나침반이 될 수도 있다. 그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행로를 찾기 위해 섬으로 가고 싶어 했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 프로를 보면서 산으로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이에 심심산골로 들어가 집을 짓고 매일 허드렛일을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차라리 섬으로 들어가 소일거리도 하고 글을 쓸 수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이다. 지인이 없는 곳, 뒤에는 자그마한 산이 있고 앞에는 낡은 어선이 몇 척 떠 있는 포구가 있으면 최적의 장소다. 자연을 즐기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면 진정한 자연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연화도를 선택했다.
연화도(蓮花島)는 통영항 여객선터미널에서 유람선을 타고 뱃길 따라 한 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섬이다. 연화도란 지명은 겹겹이 쌓인 섬 봉우리들의 모습이 연꽃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 크지 않은 섬에는 150여 명의 주민이 옹기종기 모여 산다. '연화사'라는 작은 사찰을 비롯하여 볼거리와 먹거리도 풍부하다. 특히 용이 대양(大洋)을 향해 헤엄쳐 나가는 형상의 '용머리 바위'는 통영 팔경에 속할 정도로 빼어난 절경을 자랑한다.
그는 이미 연화도 여행을 네댓 번 한 적이 있다. 해발 212M의 높지도 가파르지도 않은 연화봉, 바다 풍경을 바라보며 섬을 일주할 수 있는 탐방로, 연화도와 인근 우도를 연결하는 국내 최장 길이(309m)의 해상보도교, 남해안에서 손꼽히는 갯바위 낚시터와 누군가가 방금 빚어놓은 듯한 올망졸망한 바위섬. 선착장 표지석에 새겨진 '환상의 섬 연화도'라는 문구 이외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무엇보다 연화도 주민들의 넉넉한 인심과 따뜻한 마음이 그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는 민박집의 작은 방을 하나 얻어 자취 생활을 하면서 몇 달을 보냈다. 처음 얼마간은 생소하고 어색했으나 모든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해결되었다. 가끔은 오십 대 주인집 남자의 낚싯배에 따라가고, 마을 사람들의 그물 손질을 돕고, 서툰 솜씨지만 해산물 작업에 불려가 함께 일을 하면서 부담 없이 술잔을 부딪쳤다. 글을 쓰다가도 동네 사람이 찾으면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뛰어나갔고 주민들은 그에게 먹거리를 챙겨주며 다가왔다. 그는 점점 연화도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직접 요리를 만들어 식사를 해결할 때가 많지만 영양보충을 위해 단골 식당에 가서 다양한 음식을 자주 사 먹었다. 그러던 중, 식당 주인은 자신들의 빈방에 기거하면서 서빙을 도와달라는 제안을 했고,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급료는 없지만 먹고 자는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 점심시간부터 저녁때까지만 일하기 때문에 한가한 시간이 많았다. 무엇보다 수필을 공부하려는 50대 젊은이들 서너 명과 일주일에 한 번, 영업이 끝난 식당에 모여 토론하고 대화할 수 있다는 게 그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해상보도교가 완공되면서 섬과 섬 사이를 걸어보려는 외지인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지만 관광객들이 연화도를 가장 많이 찾는 계절은 여름이다. 6·7월 두 달 동안 꽃을 피우는 수국을 보기 위해 여행객들이 줄을 잇는다. 연화사에서 연화봉 정상까지의 등산로에 녹색 · 흰색 · 청색 · 자색으로 화장한 수국꽃이 가로수처럼 즐비해 있어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몇몇 사람들은 연화도를 '수국섬'이라 부르기도 한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7월 초, 남자 손님 두 명이 식당에 들어왔다. "어어, 야!" 반갑게 악수와 포옹을 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가깝게 지내던 문우들이었고, 바람도 쐬고 수국도 볼 겸해서 이곳을 방문했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그들을 안내했고, 그들은 계획을 바꾸어 1박을 하기로 했다. 문우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문학 이야기를 나누는 게 너무 즐거워 자신의 애창곡, <귀거래사>를 흥겹게 불러 주었다.
'하늘 아래 땅이 있고 그 위에 내가 있으니, 어디인들 이내 몸 둘 곳이야 없으리.'(하략)
문우들이 떠나고 2주가 채 지나지 않았을 때, 그의 아내가 찾아왔다. 아내는 밤을 새우며 그를 설득했고, 그는 끝끝내 돌아가지 않겠다고 황소고집을 부렸다. 아내가 돌아간 후, 한 달에 두 번 정도 택배가 왔다. 그가 좋아하는 파김치와 나물볶음, 가끔은 곰국이나 장어국이 오기도 했다. 그도 종종 연화도의 싱싱한 해산물을 집으로 보낸다. '조금 힘들어도 외롭지는 않다. 이제, 계속 여기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지금부터 5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 연화도에 사는 그 남자가 나였으면 참 좋겠다.
- 양희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