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순이다. 이직은 더위가 남은 낮 동안은 뜨겁지만, 조석으로 찬 바람이 불어와 마음은 상쾌하다. 둑길을 걸으니 풀 내음보다 농약 냄새가 더 짙게 코에 스민다. 식물도 사람도 약이 뿌려지고 먹어야만 살게 되는 세상이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 몸에도 병도 늘고 식물에 붙어사는 해충의 가지 수도 많다.
풀 이슬에 발이 흠뻑 젖었다. 앞산은 기지개를 켜고 막 잠에서 깬 듯한 기세다. 앞산과 뒷산은 움직이는 동작이 다르다. 뒷산에, 비해 앞산이 더 부지런한 듯하다. 일찍 해를 받고 일어나 막 세수를 한 듯 나뭇잎도 윤기 나고 탱탱하다. 뒷산은 응달이라 나무들이 늦잠을 자는지 미동도 없다.
나는 장미나 라일락 같은 화려한 꽃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잔잔한 들꽃을 좋아한다. 그 들꽃 중 하나가 달맞이 꽃이다.
저만치 노오란 달맞이꽃이 나를 반긴다. 언젠가 내 꽃 이름을 찾다 보니 달맞이꽃이다. 어두운 밤 달을 향해 불을 밝혀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꽃! 왜 하필 내 탄생화가 달맞이꽃일까. 처음에는 ‘기다림’이라는 꽃말에 썩 마음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달빛속에 아름다운 서정이 깃든 꽃이란 생각에 마음이 조금 바뀌었다. 화려하거나 강한 이미지를 싫어하는 S 성미와 닮은 것이다.
달을 언제 쳐다보아도 잔잔한 정이 흐른다. 마치 오냐! ~ 하고 아이를 받아 안은 듯한 어머니 같은 얼굴이다. 때때로 구름에 가렸다가 금세 와 ~ 하고 숨바꼭질하듯 얼굴을 환히 드러내는 친구 같기도 하다.
달빛이 살며시 문풍지 사이로 들어오는 밤이면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마을 동산 뫼똥구리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수없이 바라보던 달. 달 속의 내 유년 시절은 달빛 속에 피어난 달맞이꽃 잔치였다. 별이 한 웅큼 씩 쏟아져 내리는 밤이면 별 만한 조무래기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달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다.
여름 휴가차, 두어 달 여정으로 밀양 어느 산골 작은 수도원에 갔다. 그때 나 자신을 스스로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다.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수도원 뒷길을 걷다가 오두막집을 보았다. 시내가 졸졸 흐르는 언덕 위의 작은 오두막집이었다.
그곳에서 달맞이꽃 같은 한 여인을 만났다. 오십 대 중반에 들어선 그녀는 25세에 달콤한 신혼살림을 차리고 첫아이를 낳다가 산후병으로 수족이 마비되었다. 말도 어눌했다. 제 몸을 스스로 부추겨 밖에 나갈 수 없는, 방안에서 혼자 뒤척이는 처지였다. 그녀는 그 후, 30년이란 긴 세월을 밀양 떡대산 산골 아래서, 친정 노모와 함께 쓸쓸히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밤이면 뜨락에 홀로 달맞이꽃으로 피어나 달을 향해 사랑했던 남편을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녀의 아이가 어느 고아원에서 어떻게 자라 어떤 모습으로 커 가고 있는지 수없이 달 속에 그려보았을 것이다. 긴 여름밤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목줄기를 뽑아 올려, 한 잎 두 잎, 꽃잎을 피워내듯 가련한 몸을 피워내 바라보고 애간장을 재웠을 것이다.
초승달이 뜰 때는 아이를 보름달이 뜰 때는 남편을, 떠올려보았으리라. 언제 온다는 기약이라도 있으면 달 꽃 같은 호롱불을 밝혀서 대문 밖 저만치 서서 맞이할 텐데 남편은 그림자만 남겨놓고 30년이란 세월을 무심히도 가져간 것이다. 백년가약의 굳은 언약이 어두운 그림자에 그렇듯 무참히 깔리고 만 것이다.
나의 외할머니도 달맞이꽃처럼 살다 가셨다. 시집가서 십여 년이 넘어도 아이가 없자 하는 수 없이 과수댁을 외할아버지께 들여보내고 살아 보았지만, 그 어멈에게도 소생이 없었다. 그런 어느 날 외할머니는 딸을 잉태했다. 내 어머니였다. 외할머니에겐 어머니가 천금 같은 자식이었다.
어머니는 외동딸로 곱게 자라 18세에 큰며느리로 시집을 갔다. 황씨댁에 시집간 후에는 고된 시집살이로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혼자 살아가시던 외할머니는 딸이 보고 싶어 때때로 삽짝을 나서 십리 길 산길과 논길을 걸어 고갯마루에 올라앉아, 우리 집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되돌아가시곤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기에 자주 오기에 민망했던, 것이다.
산길을 지나면 두 개의 포강을 지나고 또 들을 지나야 우리 집에 도달하는 그 먼 길 위에다 딸의 모습을 발자국마다 수없이 찍고 돌아갔을 외할머니, 외할머니가 우리 집을 향해 왔다가 돌아 간, 길 위에 짙은 안개가 내려앉고 산길도 안개에 가리어 말이 없었다. 안개 속에서 꽃물을 축이듯 몸을 축이고 쓸쓸히 돌아갔을 외할머니, 외할머니는 먼 노정의 길을 딸을 품에 두고 그렇게 걸어간 것이다.
어느 날 성당에서 성지순례를 갔다. 버스 안에서 내가 기도해야 할 사람들을 한 분 두 분 생각하며 손을 꼽아 보았다. 기도하는 동안 내내 외할머니 모습만 떠올랐다. ‘외할머니는 하늘나라 어는 산골에 달맞이꽃으로 피어나 달빛 아래서, 어머니를 그리며 기다리고 계실까?’ 어느 사이 나도 달맞이꽃을 살며시 가슴에 안고 은은한 달의 풍경 속에 젖어 걸어간다.
개울에서 졸졸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가 들려오고 뻐꾸기는 속절없이 울어댄다. 그녀는 문설주에 기대어 뻐꾸기 소리에 귀 기울이며 오늘도 무슨 생각에 젖어 들까. 꽃이 진 숱한 밤을 얼마나 더 까맣게 태워야 할까.
뒷산은 이제사 기지개를 켜는가 보다. 외딴 마을 개울가 오두막집에 내리는 아침 산그늘이 오늘따라 더 외롭다.
첫댓글 작가님과 달맞이 꽃 참으로 잘 어울립니다. 교만하지 않은 성품과 자세, 그리고 맑고 착하신 성품, 아름다운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