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브롱
가느다란 손목으로 육지를 잡고 있는 키브롱반도를 통과하는 길은 좁고, 휴가를 마치고 돌아가는 일요일이라 귀경하는 차량의 행렬이 꼬리를 무나 키브롱으로 가는 차는 없다. 일본의 하코다데 같이 도로 양쪽이 바다라 경치가 좋은 10km의 포도(鋪道)를 달려가니 항구마을인 키브롱이다. 반도의 폭이 좁은 곳은 100m라는데, 원래는 섬이었다가 오랜 세월의 퇴적으로 사주(沙州)가 형성되어 섬이 육지와 붙으면서 반도가 되었다.
이 항구를 찾은 이유는 13km 떨어진 벨일앙메르라는 섬 구경을 하려는 것이었는데, 휴가철이라 가는 여객선의 좌석은 비어있으나 저녁에 나오는 배는 이미 예약이 끝나, 섬 구경은 포기하고 레스토랑에서 홍합요리를 시켜 점심을 대신한다. 항구의 방파제 안은 해수욕장으로 이용하며 수영복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한다. 자그마한 이 항구의 앞바다가 1759년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침공하려던 프랑스 해군이 괴멸된 곳으로, 이후 프랑스의 식민지 확대정책은 빛을 잃었고 역사는 이 해전을 키브롱 해전이라 부른다.
돌아오는 길에 차를 세우고 윈드서핑을 하는 바다를 카메라에 담고 충혼비가 서있는 언덕을 돌아내려 바닷가로 가니 자그마한 동굴이 있고, 동굴의 끝에는 십자가가 불빛을 받고 있다. 양대 대전 때 참전하여 청춘을 나라에 바치고 사망한 이곳 장병을 기리는 애도의 동굴은, 바쁘다는 핑계로 이런 고인들에 대해 무관심과 현충일이 그냥 휴일의 하나로만 아는 아이로 키운 잘못을 반성하게 만든다.
디낭
로마시대부터 육로교통의 요지로 병영이 설치되었던 디낭은 Rance 강을 수상교통으로 남북을 연결하는 요충지로, 9세기에 강 언덕에 수도사들이 자리 잡기 시작하여 11세기에는 베네딕틴 수도원이 건립되었고, 1065년 정복왕 노르망디 공작에게 정복당했다. 1283년에는 쟝 1세는 이 지역을 귀속시키고 3km의 석성(石城)을 건설하여 요새화 하였다. 14세기의 브르타뉴 상속전쟁 당시에 이 성벽은 난공불락의 위엄을 떨쳤다.
이후 해상무역이 활발해지고, 1491년 브르타뉴 공작의 상속녀 안느가 프랑스왕과의 결혼으로 프랑스와의 평화시대가 도래했다가 1532년 프랑스영이 되었다. 철도가 개통된 뒤 항구로서의 역 할은 축소되고 재개발 열풍에 뒤진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되어 도시는 중세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관광도시로서 곽광 받고 있다. 시청 옆 주차장에서 내리면 바로 위가 중앙거리로 가는 길이다.
불성실하게도 지도도 없이 시내구경에 나서 시청 앞 광장에서 직진하여 그냥 걸어서 도시를 구경하는 것이다. 옛 멋이 가득한 골목에는 더워서 그런지 인적도 없고, 나무 기둥으로 틀을 잡고 그 사이를 회벽으로 메운 소위 꼴랑바주식 건물들이 눈에 띈다. 건물의 2, 3층은 1층보다 뛰어나온 이런 가분수 주택은 당시에 1층의 면적을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한데 대비한 편법이었다. 500년이 넘은 이런 건물들은 지금도 생생하며, 이런 북유럽 스타일의 주택으로 보아 아마 북 유럽인들의 침범으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잠시 방향이 헷갈려 길을 헤매다 우뚝한 시계탑 모양이 근사해보여 혹시 기차역인가 하였더니 역시 기차역이다. 유럽 어디나 대중교통의 기본이 기차라, 디낭 역도 외견으로는 멋을 부렸다. 성당이 보인다. 2세기에 건축이 시작된 생 소뵈르 바실리카로 6세기에는 예배당을, 12세기에는 수도원을, 16세기에는 목조문을 추가하여 모든 건축 양식이 혼재된 건축박물관이다. 유감이지만 내부를 보지 못했으나, 백년전쟁 때, 영국군을 무찔렀던 기사 뒤게클랭은 그 공로로 왕족만 묻히는 이곳에 심장을 묻는 영예를 누리고 있다.
백년전쟁이란 프랑스의 푸아투, 기엔과 가스코뉴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영국이 프랑스 루이 7세와의 전쟁의 승리로, 브르타뉴 지방마저 차지하여 실지로 프랑스 내에 프랑스보다 더 큰 지역을 영국의 세력권에 넣음으로서 불만에 쌓인 두 나라가 시작한 전쟁을 말한다. 1337년 프랑스의 샤를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영국의 에드워드3세는 자신의 어머니가 샤를4세의 누나였음으로 샤를의 사촌으로 왕위를 계승한 발로아 백작보다 자신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합당하다며 왕위계승을 요구했으나 어느 군주가 왕위를 양위하겠는가? 이래서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전투와 화해를 거듭하면서 치른 이 전쟁의 최종 승자인 프랑스는 봉건제도가 무너져 왕권이 확립되었지만, 백년전쟁이라면 생각나는 것이 역사에 회자되는 칼레의 시민과 잔 다르크다.
알다시피, 잔 다르크는, 왕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왕세자 신세로 있던 샤를 7세가 프랑스가 전쟁에서 영국에 몰려 고전하고 있을 때, 문득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흰 갑옷을 입고 나타나 국민들에게 용기를 주어 전쟁의 국면의 프랑스로 기울게 만든 소녀다. 그러나 전쟁의 협상을 바라는 왕의 요구를 무시하고 영국군을 공격하는 등의 행동에 화가 나있던 왕은, 영국군에 포로가 된 잔 다르크의 몸값을 치르지 않아 그녀를 화형 당하게 만들었다. 말하자면 잔 다르크의 영웅적인 행위가 자신의 왕권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이런 비급함으로, 프랑스 인들은 그를 “승리왕”이라는 칭호를 붙이면서도 동시에 “배신자”라고도 부른다.
로댕의 조각으로도 유명한 칼레의 시민이란, 영국의 침공을 11개월 동안 버티다가 칼레가 1347년에 항복을 하자, 그들의 끈질긴 저항에 분노한 에드워드3세는 칼레시민 모두를 몰살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이에 협상 차 방문한 최고의 부자였던 유스타슈 드 생 피에르에게 영국왕은 “가장 명망있는 시민대표 6명이 목에 교수용 밧줄로 걸고 출두하여 도시의 열쇠를 반납한 후 교수형을 받겠다면 학살을 멈출 것이라.”는 제안을 한다.
7명의 시민이 자원하여 1명이 남게 되자, 다음날 아침에 늦게 나오는 사람을 빼기로 했으나, 아침에 나온 사람은 6명이었다. 피에르는 나머지 6명이 용기를 잃지 않도록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 왕비가 임신 소식을 알리며 관용을 호소하자 에드워드 3세는 이들을 참하지 않고 시민들도 모두 살아남게 했으니, 노블레스 오브리제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부자가 되는 것은 절대 혼자의 힘이나 능력이 아니다. 시대 환경과 주위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부자란 탄생될 수 없는 것임을 대부분 부자는 잊고 사는 반면, 피에르는 그것을 알고 있는 선각자였을 것이다.
차로 돌아오면서 약방에서 잘 듣기로 소문난 모기약도 사고 골목을 둘러본다. 저녁때나 되어야 문을 여는 식당들은 닫혀있지만 의자만 먼저 내놓은 골목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적당한 경사로 깊숙이 뻗어있는 저 골목의 카페에서 말하기 좋아하는 프랑스인들이 매일 모여앉아 담소를 나무며 미소를 교환하는 모습이 상상에 잡힌다. 인상주의 화가로 풍경화와 인물화로 당대를 풍미한 폴 세잔은 고향인 이곳에서 생의 2/3를 보냈고, 1906년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폭우에 쓰러져 명을 다 했다 한다.
생 말로(Saint-Malo)
코르세르라고 불렀던 브르타뉴 반도의 항구도시인 생말로는, 12세기에 주교 샤티용이 도둑들의 피난처로 지정하자 범죄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해적의 도시가 되었다. 16세기의 공인된 해적두목 쉬르쿠푸가 영국 장교가 나누었다는 대화는 이미 전설이 되었다. “해적양반, 우리 영국인들은 명예를 위해 싸우는데, 당신들 프랑스인들은 돈을 위해 싸우는군요?”하니, “장교님, 사람은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닌가요?”라 답했다 하니, 현문현답(賢問賢答)이다. 약탈금의 일부를 정부에 바친 공로(?)로 그는 레지옹 드뇌르 훈장까지 받았다 하니, 허가받은 도둑인 셈이다.
또한 19세기 초 Surcoup 라는 해적 두목은 약탈로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3개 대륙에 경상남북도만한 토지를 소유했고 나폴레옹으로부터 해군의 수장이 되어달라는 제안까지 받았으나 거절하여 귀족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당시의 해적들 위세가 짐작이 간다. 수심이 깊은 앞바다에는 암초가 많아 뱃길을 모르면 침범하기가 힘들고, 바로 앞의 작은 섬에 있는 요새와 성벽 따라 도열해있는 대형 대포가 천연의 요새인 도시를 지키고 있다.
한 시절 프랑스 최대의 항구로 이름을 떨쳤으나 지금은 항구 겸 휴양도시로 몽셀 미셸로 가는 길목에 있는 프랑스 4대 휴양지의 하나로 인기를 누리는 인구 7만의 생말로 부둣가에는, 비릿한 바다냄새가 바람을 탄다. 6세기에 수도원을 세운 주교의 이름인 성(聖) 말로가 도시명이 되었다는데, “내 생에 일주일만 남았다면 생 말로에서 보내겠다.” 앙드레 말로의 말은 생 말로를 이야기 할 때 빠지지 않는 칭송이다.
주차장에서 5분 걸어서 구 도시로 들어가는 성벽 문을 지나있는 호텔에 짐을 던지고 성벽 길 산책을 나간다. 바다와 면한 성벽 길은 12세기에 시작하여 18세기까지 확장을 계속한 것으로, 관광객들이 생 말로를 찾는 목적 중 하나가 이 성벽 길 산책에 있다. 14-17세기에 화강암 바위섬에 축성 한 성벽의 북동쪽 모서리에는 4개의 원형 탑과 바다와 면한 성벽의 “항해사박물관” 앞에 세워진 자크 카르티에의 동상이 대서양을 응시하고 있다. 그는 16세기에 캐나다를 발견한 영웅으로 시신은 퀘벡에서 생 말로로 옮겨져 생뱅상 성당에서 영면하고 있다.
성벽 앞 넓은 모래사장은 둑을 막아 해수를 가둔 1.000여 평쯤으로 보이는 에메랄드 빛 수영장으로 2층의 점프대에서는 다이빙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싱싱하다. 물어보니 조수의 차이가 만조 시에는 수영장이 잠겨 간조 때만 이용한다고 한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8-9m에 달해 성 앞 바다에 방파제로 박아 넣은 굵은 나무말뚝이 파도를 막으며 성벽을 보호한다.
성벽을 돌아가는 끝자락에는 정박한 배를 보호하는 긴 방파제가 바다로 뻗쳐있다. 폭도 넓어 사람도 방파제 끝의 등대까지 왕래를 한다. 좌측으로 도니 항구다. 몇 개의 요트정박장에는 요트가 즐비하고 여객선도 정박해있다. 대형 크루즈선도 입항한다는데 오늘은 뵈지 않는다. 한 바퀴 도는데 30분 쯤 걸리는 성벽돌이를 마치고, 저녁으로는 유명하다는 카프에 대신 호텔에 맛 집을 물어 스테이크 잘하는 집으로 가서 7시 open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맥주를 곁들여 스테이크를 맛보았는데 신명나게 요리를 하는 모습이 낙천전인 주방장의 콧소리에 비해 맛은 그저 그렇다.
해 뜨기 전의 명경 같은 약 1.000으로 보이는 해수욕장
다음날 새벽, 죽여주는 일몰에 비해 일출은 어떠한지를 보기 위해 혼자 다시 성벽으로 간다. 이번에는 반대로 우측방향으로 성벽에 올라서니, 인적 없는 바다는 해뜨기 전인데도 어둡지가 않다. 이런 적막 속에 성벽 길을 독점하고 해풍으로 가슴을 채우면서 어제 본 방파제로 가려고 계단을 내려가니 문이 잠겨있어 바닷가로 내려간다. 만수(滿水)인 수영장은 고요하고 모터보트가 갈매기 나르는 해변은 가른다.
다시 올라온 성벽에 앉아 동이 터오기를 기다린다. 동녘은 벌겋게 물들더니만 해가 이마를 내밀며 어둠을 깨치니 성벽은 번쩍이기 시작하고 객은 깨어나는 새벽을 렌즈에 담는다. 해돋이 장면을 보면 누구나 태양신을 모시게 되나, 생말로의 일출은 최고라는데 비해, 일출은 어디서나 비슷하다.
성벽에서 약 300m 앞에 떠있는 것 같은 그랑베 섬은 간조 시에는 물길이 열려 걸어갈 수 있는데, 이 섬의 샤토브리앙 동상에도 저 아침 해가 인사를 하겠지? 왕당파정치가이며 작가인 샤토브리앙의 묘소와 동상이 저 섬에 있다는데 만조(滿潮)라 바라보기만 한다. 그의 소망대로 외딴 섬에 묻힌 그를 추모한 국왕은 “바람소리, 파도소리 외는 아무 것도 듣지 않겠다.”는 묘지명을 새겼단다.
첫댓글 발길 닿는 곳마다 섬세한 표현에 감탄합니다.감사합니다.고맙습니다.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