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들국화
ㅡ천상병ㅡ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13》
★막걸리
ㅜㅡ천상병ㅡ
나는 술을 좋아하되
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
막걸리는
아침에 한 병(한 되) 사면
한 홉 짜리 적은 잔으로
생각날 때만 마시니
거의 하루 종일이 간다.
맥주는
어쩌다 원고료를 받으면
오백 원짜리 한 잔만 하는데
마누라는
몇 달에 한 번 마시는 이것도 마다한다.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음식으로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때는
다만 이것뿐인데
어찌 내 한 가지뿐인 이 즐거움을
마다하려고 하는가 말이다.
우주도 그런 것이 아니고
세계도 그런 것이 아니고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니다.
목적은 다만 즐거움인 것이다
즐거움은 인생의 최대목표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밥이나 마찬가지다
밥일 뿐만 아니라
즐거움을 더해주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14》
★바람에도 길이 있다
ㅡ천상병ㅡ
강하게 때론 약하게
함부로 부는 바람인 줄 알아도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바람은 용케 찾아간다
바람 길은 사통팔달(四通八達)이다.
나는 나의 길을 가는데
바람은 바람 길을 간다.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15》
★봄을 위하여
ㅡ천상병ㅡ
겨울만 되면
나는 언제나
봄을 기다리며 산다.
입춘도 지났으니
이젠 봄기운이 회사하다.
영국의 시인 바이론도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고'했는데
내가 어찌 이 말을 잊으랴?
봄이 오면
생기가 돋아나고
기운이 찬다.
봄이여 빨리 오라
《16》
★약속
ㅡ천상병ㅡ
한 그루의 나무도 없이
서러운 길 위에서
무엇으로 내가 서 있는가
새로운 길도 아닌
먼 길
이 길을 가도 가도 황토길인데
노을과 같이
내일과 같이
필연코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
《17》
★어두운 밤에
ㅡ천상병ㅡ
수만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온 하늘에,
하나, 둘, 셋, 별이 흐른다.
할아버지도
아이도
다 지나갔으나
한 청년이 있어, 시를 쓰다가 잠든 밤에……
《18》
★오월의 신록
ㅡ천상병ㅡ
오월의 신록은 너무 신선하다.
녹색은 눈에도 좋고
상쾌하다.
젊은 날이 새롭다
육십 두 살 된 나는
그래도 신록이 좋다.
가슴에 활기를 주기 때문이다.
나는 늙었지만
신록은 청춘이다.
청춘의 특권을 마음껏 발휘하라.
《19》
★푸른 것만이 아니다
ㅡ천상병ㅡ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은
자꾸 보고 또 보고 보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외로움에 가슴 조일 때
하염없이 잎이 떨어져 오고
들에 나가 팔을 벌리면
보일 듯이 안 보일 듯이 흐르는
한 떨기 구름
3월 4월 그리고 5월의 실록
어디서 와서 달은 뜨는가
별은 밤마다 나를 보는가.
저기 저렇게 맑고 푸른 하늘을
자꾸 보고 또 보고 보는데
푸른 것만이 아니다.
《20》
★한가지 소원(所願)
ㅡ천상병ㅡ
나의 다소 명석한 지성과 깨끗한 영혼이
흙 속에 묻혀 살과 같이
문들어지고 진물이 나 삭여진다고?
야스퍼스는
과학에게 그 자체의 의미를 물어도
절대로 대답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억지 밖에 없는 엽전 세상에서
용케도 이때컷 살았나 싶다.
별다를 불만은 없지만,
똥 걸레 같은 지성은 썩어 버려도
이런 시를 쓰게 하는 내 영혼은
어떻게 좀 안될지 모르겠다.
내가 죽은 여러 해 뒤에
꾹 쥔 십원을 슬쩍 주고는
서울길 밤 버스를 내 영혼은 타고 있지 않을까?
행 복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편 지
천상병
점심을 얻어 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 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새
천상병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 터에
새 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週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나 무
천상병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썩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 꿈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나는 또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
광화문 근처의 행복
천상병
광화문에,
옛 이승만 독재와
과감하게 투쟁했던 신문사
그 신문사의 논설위원인
소설가 오상원은 나의 다정한 친구.
어쩌다 만나고픈 생각에
전화 걸면
기어코 나의 단골인
'아리랑' 다방에 찾아온 그,
모월 모일, 또 그랬더니
와서는 내 찻값을 내고
그리고 천 원짜리 두 개를 주는데---
나는 그 때 "오늘만은 나도 이렇게 있다"고
포켓에서 이천원을 끄집어 내어
명백히 보였는데도,
"귀찮아! 귀찮아!"하면서
자기 단골 맥주집으로의 길을 가던 사나이!
그 단골집은
얼마 안 떨어진 곳인데
자유당 때 휴간(休刊)당하기도 했던
신문사의 부장 지낸 양반이
경영하는 집으로
셋이서
그리고 내 마누라까지 참석케 해서
자유와 행복의 봄을---
꽃동산을---
이룬 적이 있었습니다. 하느님!
저와 같은 버러지에게
어찌 그런 시간이 있게 했습니까?
"크레이지 배가본드“
천상병
1
오늘의 바람은 가고
내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잘 가거라
오늘은 너무 시시하다. 뒷시궁창 쥐새끼 소리같이
내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2
하늘을 안고,
바다를 품고,
한 모금 담배를 빤다. 하늘을 안고,
바다를 품고,
한 모금 물을 마신다. 누군가 앉았다 간 자리
우물가, 꽁초 토막......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한편 가에서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기 쁨
천상병
친구가 멀리서 와,
재미있는 이야길 하면,
나는 킬킬 웃어 제낀다.
그때 나는 기쁜 것이다.
기쁨이란 뭐냐? 라고요?
허나 난 웃을 뿐.
기쁨이 크면 웃을 따름,
꼬치꼬치 캐묻지 말아라.
그저 웃음으로 마음이 찬다.
아주 좋은 일이 있을 때,
생색이 나고 활기가 나고
하늘마저 다정한 누님같다.
길
천병상
길은 끝이 없구나
강에 닿을 때는
다리가 있고 나룻배가 있다.
그리고 항구의 바닷가에 이르면
여객선이 있어서 바다 위를 가게 한다.
길은 막힌 데가 없구나
가로막는 벽도 없고
하늘만이 푸르고 벗이고
하늘만이 길을 인도한다.
그러니
길은 영원하다.
나의 가난함
천상병
나는 볼품없이 가난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부족하지 않다.
내 형제들 셋은 부산에서 잘 살지만
형제들 신세는 딱 질색이다.
각 문학사에서 날 돌봐주고
몇몇 문인들이 날 도와주고 그러니 나는 불편함을 모른다.
다만 하늘에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가난해도
나는 가장 행복을 맛본다.
돈과 행복은 상관없다.
부자는 바늘귀를 통과해야 한다
넋
천상병
넋이 있느냐 라는 것은,
내가 있느냐 없느냐고 묻는 거나 같다.
산을 보면서 산이 없다고 하겠느냐?
나의 넋이여!
마음껏 발동해 다오.
내 몸의 모든 움직임은,
바로 내 넋의 가면이다.
비 오는 날 내가 다소 우울해지면,
그것은 즉 넋이 우울하다는 것이다.
내 넋을 전세계로 해방하여
내 넋을 넓직하게 발동케 하고 싶다
마음 마을
천상병
내 마음의 마을을
구천동(九千洞)이라 부른다.
내가 천씨요 구천(九千)만큼
복잡다단한 동네다.
비록 동네지만
경상남도보다 더 넓고
서울특별시도 될 만하고
또 아주 조그만 동네밖에 안 될 때도 있다.
뉴욕의 마천루(摩天樓)같은
고층건물이 있는가 하면
초가지붕도 있고
태고시대(太古時代)의 동굴도 있다.
이 마을 하늘에는
사시장철 새가 날아다니고
그렇지 않을 때는 흰구름이 왕창 덮인다.
이 마을 법률은
양심이 있을 뿐이고
재판소 따위로는
양심법 재판소밖에는 없다.
여러가지로 지적하려면
만자(萬字)도 모자란다
복잡하고 복잡한 이 마음 마을이여
새
천병상
저 새는 날지 않고 울지 않고 내내 움직일 줄 모른다.
상처가 매우 깊은 모양이다.
아시지의 성(聖)프란시스코는
새들에게 은총 설교를 했다지만
저 새는 그저 아프기만 한 모양이다.
수백 년 전 그날그 벌판의 일몰(日沒)과 백야(白夜)는
오늘 이 땅 위에 눈을 내리게 하는데
눈이 내리는데......
첫댓글 막걸리를 즐거움을 주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는 시인...
바람에도 길이 있음을 알고 저마다의 길을 가지고 있음을 가르쳐 주는 시인...
하느님을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빽으로 두고 사니 천하에 두려움 없는 행복한 시인...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 한 마리 세가 되는 시인...
천상병은 진정한 자유인,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 걸림없이 세상을 날아 다니는 자유로운 새... 참 부럽다... ^^*...
저는 시인에 대해서는 조금 소홀했는데(소설가 보다), 이번에 많은 공부를 합니다.
시를 중심으로 자료를 찾다보니, 내 마음에 드는 시도 많네요;
이형기 시인은 그의 이름을 들은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했는데 이번에 시를 보니, 딱 내가 좋아하는 시들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