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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Ⅰ 운동-이미지, 들뢰즈
운동-이미지와 그 세 가지 양상 – 베르그송에 관한 두 번째 주석
Ⅰ. 베르그손과 들뢰즈의 운동-이미지
1. 베르그손의 이미지론과 즉각적 운동 이미지
이미지란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이라는 철학의 전통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해낸 베르그손의 도구이자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물질과 정신은 서로 다른 본성을 가진 독립된 실체로 간주되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을 때, ‘나’는 오로지 정신적 존재로서 존재하는 것임을 뜻한다.
반면 나의 바깥에 있는 대상은 그저 물질에 불과할 뿐이다.
베르그손에 의하면 생각하는 나와 그 바깥의 물질, 이렇게 세계를 이원적 체계로 분리하여 사유한 것이 베르그손 이전
까지 철학의 특징이었다.
관념론에서 이미지는 나의 지각이 받아들인 감각 정보를 종합하여 형성한 관념적 표상이거나 이데아 세계의 사본에
불과한 지위를 갖는다.
반면 실재론에서 이미지는 표상이나 사본이 아니라 나의 바깥에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이거나 사물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관념론과 실재론이 공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은 사유하는 나와 나의 바깥이라고 하는
이원적 체계이다.
베르그손은 이미지 개념을 통해 바로 이러한 공고한 이원적 체계를 극복하려고 시도하였다.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맹점은 정신의 주체인 나의 물질성을 망각한 데 있다.
즉 나의 지각, 뇌, 몸 역시 물질로 이루어져 있음을 망각하거나 그것을 등한시 한 데 있다.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은 보다 엄격히 표현하면 사물과 정신의 이분법이 된다.
나의 지각, 뇌, 몸을 물질로 간주하지 않는 전통적 주체에게 나의 바깥에 있는, 구체적 형태를 갖추고 있는 사물이 바로
물질인 것이다.
베르그손에 의하면 이미지들의 총체인 물질은 분명 실재론의 사물과 그리고 관념론의 표상과 다르며, 그 사이에 존재하
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물질은 이미지들의 총체로서 정신과 사물, 표상이 공통적으로 기반하고 있는 것이 된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베르그손의 이미지는 빛이다.
우주 만물이 이미지다.
그렇다면 세계를 표상하는 나의 지각, 뇌, 몸 역시 이미지가 된다.
이미지=물질=빛이다.
이제 나아가 이미지=운동이다.
이미지는 우주에 무한히 펼쳐져 있고 빛처럼 뻗어나간다.
이미지들은 빛처럼 서로 자극하고 반응하며, 작용하고 반작용하며 통과하거나 굴절되며 반사된다.
이것이 이미지의 운동이다.
여기서 운동 이미지가 성립된다.
이런 이미지들 가운데 다른 이미지와 구별되는 한 이미지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의 몸의 이미지다.
베르그손은 이것을 ‘특권적 이미지’라고 명명한다.
여기서 특권적 이미지란 특히 인간이나 동물과 같은 생명체를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체로서 나의 지각은 이미지들의 부분집합에 속한다.
나의 지각 역시 이미지인 것이다.
나의 지각이 이미지라면, 동시에 지각은 운동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즉 지각은 운동-이미지에 다름 아니다.
베르그손의 지각은 매개되지 않는 의식으로 ‘모든 의식은 어떤 것’이다.
즉 지각과 의식이 곧 이미지이고 운동인 셈이다.
여기서 ‘즉각적 운동-이미지’가 성립된다.
그러나 나의 지각은 다른 이미지들을 여과하는 필터의 기능을 한다.
나의 지각은 이미지 실재의 일부를 감하는 감산의 기능을 통해 이미지를 여과하고 필요한 것만 수용하고 반응한다.
이것이 곧 자연 지각의 한계이다.
베르그손은 이러한 자연 지각의 한계를 영화적 지각에서도 본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 같은 베르그손의 이미지론을 영화적 지각에 적용하고, 나아가 영화적 지각을 자연 지각보다 우위에
놓음으로써 영화적 지각과 자연 지각의 동일성보다 차이를 강조한다.
그 이유는, 영화적 지각은 자연 지각처럼 특권적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이미지들을 감산 기능을 통해 여과하는
원리는 동일하지만 자연 지각만큼 감산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영화적 지각은 자연 지각이 지각하지 못한 것도 지각할 수 있다.
자연 지각은 나의 몸에 묶여있기 때문에 한계를 갖지만 영화적 지각, 즉 카메라의 지각은 나의 몸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자연 지각의 조건을 넘는 지각 능력을 보유한다.
그러나 영화적 지각이 초기에는 자연 지각을 모방하였으나 나중에 영화의 발전과 더불어 그 본질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주장은 문제가 있다.
영화적 초기와 그 이후를 나누어 영화적 지각의 본질의 차이를 논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결국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인데, 영화는 비록 인위적으로 운동을 재구성하지만 교정의 과정을 거쳐 즉각적인 운동-
이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결국 들뢰즈의 주장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첫째, 들뢰즈는 사진소와 평균적 이미지를 구분하고 있는데, 그 차이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둘째, 어떻게 어떤 교정 과정을 거쳐 인위적인 가짜 운동이 진짜 운동이 되었는지가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앞의 베르그손의 이미지론을 적용해 보면 우주 만물이 이미지이고 운동이기 때문에 영화에서 가짜 운동과 진짜 운동을
구분하는 것은 자체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2. 들뢰즈의 운동-이미지
들뢰즈는 베르그손의 나의 신체를 중심으로 운동하는 주관적인 이미지 체계와는 달리 나의 신체와 같은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에 작용, 반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 자체가 구별할 수 없는 하나의 집합 안에 있다고 한다.
즉, 나의 신체조차 계속해서 분열과 생성을 반복하는 분자와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 신체뿐만 아니라 무수히
많은 원자를 하나의 실체로서 파악해낼 수 없다.
들뢰즈는 이것을 ‘보편적 변이’의 세계라고 하고 거기에는 축이나 중심, 그리고 상하좌우도 없다고 한다.
“이 모든 이미지들의 무한한 집합은 일종의 내재성의 평면이 되고, 이러한 평면 위에서 이미지는 그 자체가 즉자적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즉자성, 이것이 물질인 것이다.
따라서 이미지와 운동이 동일하기 때문에 이미지가 물질이면 운동-이미지가 물질이 되는 것이며, 이러한 이미지는 실재
의 혹은 현실의 재현이 아닌 실재 그 자체이다.
우리는 운동을 인식하건, 물질을 지각하건, 생성을 사유하건 간에 그 내적인 실재를 파악한다기보다 밖으로 드러난 객관
적인 특징을 인위적으로 모방하고 재구성한다.
베르그손은 1907년 출간된 『창조적 진화』에서 “우리 일상적 인식의 작동방식은 영화적 본성을 가진다”고 말하며, 이것
은 결국 부동적 단면+ 추상적 시간이라는 거짓 운동인 영화적 환영이라 이름 붙이며 비판한다.
그는 영화가 실상은 “초당 24개의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사진소들”과 이 이미지들을 순차적으로 끌어당겨 주는 카메라
또는 영사기 안의 갈퀴 장치로 이루어져서 기계적이고 개별적이며 추상적이고 비가시적인 운동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거짓 운동이라고 하며 우리의 인식, 즉 자연적 지각도 이와 같다고 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영화를 스크린에 투사하는 방식이 인위적으로 재구성했다고 해서 결과도 환영이 인위적으로 재생산된
것이 아니라고 하며, 오히려 환영의 교정으로 봐야 하지 않느냐고 문제를 제기한다.
들뢰즈는 이러한 점에서 베르그손이 현상학과의 차이점을 보인다고 했다.
베르그손은 영화적 지각과 자연적 지각이 같다고 하지만 “현상학은 영화가 오히려 자연적 지각의 조건들과 단절하게 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베르그손이 이미 1896에 출간된 『물질과 기억』에서 움직이는 단면들 혹은 운동-이미지를 발명했다고
하며, 베르그손이 10년 후 자신의 놀라운 발견을 잊어버린 점에 의문을 표한다.
들뢰즈는 베르그손이 비록 『창조적 진화』에서 영화가 “환영을 극으로 치닫게 하는 시도”하고 비판하였지만, 한편으로 『물질과 기억』에서 다룬 논제, 즉 동적인 단면, 시간적 면(쁠랑)들은 예언처럼 영화의 미래 혹은 본질을 예감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베르그손의 일관적이지 않은 관점에 대해 들뢰즈는 사물의 본질은 애초에는 결코 드러나지 않다가 중간쯤에서 그
전개의 와중에서 그것의 힘이 견고해질 때 드러난다고 설명하며, 베르그손이 『창조적 진화』를 쓰던 당시에는 영화가
발전 초기 상태였기 때문에 그가 영화의 본질에 대해 파악할 수 없었을 것이라 옹호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영화가 초기에는 고정된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부동적인 단면 밖에 보여줄 수 없었다면 그 발전 과정에
서 영화의 본질이 만개하기 시작하여 동적인 단면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베르그손의 단면은 부동적인 단면이 아니라 동적이고 시간적인 단면이며 “시간-공간의 블록”이다.
들뢰즈는 동적인 단면의 총체인 내재성의 평면 혹은 우주를 빛이라고 한다.
결국, 내재성의 평면 위에 있는 운동이 이미지이며 물질이고 빛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아직 어떤 실재를 가지지 않고 평면 위에서 무한히 증식되고 이미지이고 시간과 공간이 무한히 배열된
블록인 셈이다.
베르그손은 이러한 빛이 나의 신체에 반사되어 휘어질 때 변이를 통해 특정한 이미지들이 형상화된다고 한다.
지각-이미지, 행동-이미지, 정감-이미지 등이 그것이며, 이 이미지들은 인간의 지각이 아닌 카메라의 지각을 중심으로
나타난다.
즉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상하좌우의 중심이 없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이미지들이 카메라의 지각에 의해서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들뢰즈는 여기서 영화를 베르그손의 생성의 개념과 동일하게 간주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베르그손이 『물질과 기억』에서 이미 발견했지만, 영화와 연결하지 않은 동적인 단면으로 이루어진
운동-이미지를 제발견하여 영화 이미지에 접목했다는 것을 확인하였고, 이제 영화는 운동-이미지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들뢰즈는 운동에 관한 베르그손의 두 번째 테제에 대한 해석에서도 영화 이미지의 본질을 추출해낸다.
베르그손은 특권화된 순간과 무규정적인 범용한 순간에 관한 자신의 두 번째 테제를 위해 운동에 관한 두 개의 환상에
대해, 즉 ‘고대적 환상’과 ‘근대적 환상’에 대해 논한다.
먼저, 고대적 환상은 운동이 지성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요소들로 이루어진다고 보며 ‘움직일 수 없는 형식들’ 내지는
‘이데아들’에 준거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즉 고대적 환상에서 운동은 한 형식에서 다른 형식으로의 규제된 이행을 뜻하며, 특권화된 순간들과 특권화된 포즈들의
순서를 의미한다.
운동은 특정한 형식들에 대한 변증법적 종합이자 이상적 종합이며, 운동의 최종적인 항이나 정점은 어떤 본질과 정수를
표현해낸다.
반면, 근대적 환상은 운동을 특권화된 순간들이 아닌, 범용한 모든 순간들에 관계시킨다.
운동은 일련의 범용한 순간들의 합으로 재구성되지만, “어떤 형식적인 선험적 요소들(포즈들)로부터 재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물질적 요소들(단면들)로부터 재구성 된다.”
즉 운동에 대한 “관념적 종합”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감각적 분석”을 시도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고대 학문은 자신의 특권적 순간들에 주목함으로써 인식한다고 믿은 반면 근대 과학은 대상을 임의의 순간에
고찰한다.”
이중 운동에 관한 근대적 환상에서는 순간들의 기계적 연속이 특권화된 포즈들의 변증법적 질서를 대체한다.
베르그손의 언급처럼, 시간마저 독립변수로 삼으려는 근대 과학의 열망이 잘 드러나는 것이다.
즉 본질적인 특정한 순간들에 멈추었던 고대 과학과는 달리 근대 과학은 임의의 순간을 무차별적으로 다루는데, 그러나
근대 과학의 고려 대상은 언제나 순간들, 잠재적 정지들, 부동성들에 한정된다.
즉 흐름으로써 고려된 실재적 시간, 존재의 운동성 자체로 고려된 실재적 시간은 근대의 과학적 인식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다.
또한 들뢰즈에 따르면, 이러한 입장은 근대 과학 뿐 아니라 베르그손이 살았던 시대의 예술 장르들, 즉 근대 예술 장르
들에서도 흔히 찾아 볼 수 있다.
회화, 춤, 발레, 마임 등 근대 예술은 특권적 형상이나 포즈들을 버리고 운동을 그것의 내재적인 요소들로 분해, 배분하려
한 것이다.
물론 베르그손이 바라본 것처럼, 영화 역시 이러한 근대 과학적 사유 혹은 환상의 계보를 이어갔으며 다양한 형식과 기술
을 통해 특권화된 포즈들의 변증법적 질서를 범용한 순간들의 기계적 연속으로 대체해내고자 했다.
초창기 영화는 ‘범용한 순간들’간의 관계를 통해, 즉 연속성의 인상을 창조하기 위해 선택되는 ‘등거리 순간들’간의 관계를 통해 운동을 재생산해는 체계에 머물렀던 것이다.
그런데 들뢰즈에 따르면, 초기 영화인들 중 에이젠슈타인은 영화가 고대적 의미의 특권화된 순간들을 창출해낼 수 있다고 주장한 예외적 감독이다.
에이젠슈타인은 영화가 운동의 전개를 통해 어떤 특별한 순간들을, 즉 어떤 위기의 계기나 어떤 정서적인 것을 추출해낼
수 있으며, 정점들을 찾거나 만들어낼 수 있고, 혹은 장면들을 절정으로 밀어붙여 서로 충돌하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들뢰즈는 에이젠슈타인이 말하는 특권화된 순간들도 결국은 범용한 순간들에 해당한다고 본다.
즉 에이젠슈타인의 특권화된 순간들은 특이하거나 비범하게 된 범용한 순간들이며, 고대 예술에서처럼 어떤 선험적 형식
들을 현재화한 것이 아니라 운동에 내재된 범용한 순간들 중 비범하거나 특이한 점을 가진 순간들을 찾아내 드러낸 것이다.
에이젠슈타인은 선험적 형식들의 질서를 하나의 운동 속에서 현동화하는 낡은 변증법 대신 운동에 내재된 평범하고 범용
한 것들의 축적을 통해 특이점들을 생산하는 ‘현대적 변증법’을 따랐을 뿐이다.
무엇보다 에이젠슈타인이 특별한 순간들이라고 말하는 ‘정서적인 것’이나 ‘위기의 계기’는 범용한 순간들의 조직화된 집합
으로서의 유기적인 체계를 전제로 하고 있다.
결국, 들뢰즈는 고대적 환상과 근대적 환상에서 모두 벗어나는 진정한 의미의 운동은 특권화된 순간과 무규정적인 범용한 순간을 모두 내포하고 있는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가령, 운동을 범용한 순간과 관계 지을 경우에도, 운동은 모든 개별적 순간들에서 새로운 것, 비범한 것, 특이한 것을 생산
해낼 수 있다.
즉 모든 범용한 순간은 언제든 특이한 순간이 될 수 있으며, 모든 특이한 수난은 어떤 특별한 형식이나 실재로서 운동에
선재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매 순간마다 범용한 상태로 잠재되어 있다.
들뢰즈는 이것이 운동의 본질일 뿐 아니라 영화의 본질이며 결국 영화적 운동의, 즉 운동-이미지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영화적 운동은 매순간 ‘범용하면서도 특권화될 수 있는 실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운동이며, 운동-이미지는
그러한 이중적 실재의 나타남 그 자체인 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영화는 근대 과학적 사유를 쫓아 거짓 운동을 만들어내는 환상적 장치가 아니라, 자신만의 독자적인 사
유 구조를 통해 운동에 대한 새로운 사유와 새로운 사고방식의 탄생에 기여한, 진정한 의미의 현대적 기계장치이다.
따라서 베르그손의 두 번째 테제는 결과적으로 영화에 대한 다음과 같은 관점을 가능하게 한다.
“영화는 가장 오래된 환상을 위해 완성된 장치가 아니라, 새로운 현실을 완성하기 위한 기관이다.”
Ⅱ. 들뢰즈의 운동-이미지와 그 세가지 양상
1. 이미지와 운동의 정체성
현상학이 자신의 규준으로 삼은 것은 ‘자연적 지각’이라고 부르는 것과 그 지각의 조건들이다.
그런데 이 조건들이란 지각하는 주체의 세계에의 ‘결착’, 세계-내-존재 그리고 저 유명한 명제인 ‘의식은 그 무엇에 대한
의식이다’로 표현되는 세계에의 열림 등을 정희해주는 실존적 좌표들이다.
영화는 주체의 결착을 세계의 지평과 함께 제거해버림으로써 결국 어떤 함축적인 앎이나 이차적 의도성을 자연적 지각의
조건들로 대체시킨다.
영화는 세계를 통해서 비현실을 겨누는 다른 예술들과 혼동하지 않고 반대로 세계 자체를 하나의 비현실이나 이야기로
만든다.
영화와 더불어 세계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가 되며 이미지가 세계가 되지는 않는다.
현상학은 자연적 지각에 우위를 부여함으로써 운동을 여전히 (본질적이라기보다 단순히 실존적인)포즈들과 연결시킨 것
이다.
그리하여 영화적 운동은 지각의 조건들에 불충실한 것으로 비판됨과 아울러 지각되는 것과 지각하는 자, 세계와 지각에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이야기(형식)로서 고양된다.
탈중심화된 물적 상태에서 중심화된 지각으로 이행하는 대신, 영화는 탈중심화된 물적 상태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상태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나타나는 것들의 집합을 이미지라 부르면, 우리는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에 대하여 작용한다든지 반응한다든지
한다고 말할 수가 없다.
완료된 것과 구별될 수 있는 동적인 것도 없으며, 수용된 것과 구분될 수 있는 움직여진 것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은, 즉 모든 이미지는 그것들의 작용이나 반작용과 혼동된다.
그것이 보편적 변주이다.
각각의 이미지는 단지 “우주의 거대함 속에서 퍼져나가는 변형들이 사방으로 가로지르는 경로들일 뿐이다.”
각각의 이미지들은 다른 이미지들에, ‘그 다른 이미지들의 모든 면’에 대해서, 또한 ‘그 이미지들의 기본적인 부분들을
통해’ 작용하고 반응한다.
“운동들은 이미지일 때 매우 명백하며, 운동 속에서는 거기에 보이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진리이다.”
이 모든 이미지들의 무한한 집합은 일종의 내재성의 면이 된다.
이 면 위에서 이미지는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이미지의 즉자성, 이것이 물질이다.
이미지 뒤에 숨겨져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반대로 이미지와 운동의 절대적 동일성이다.
운동-이미지와 물질-유동성은 엄격히 동일한 것이다.
이 물질적 우주는 기계의 우주인가?
아니다.
왜냐하면 기계는 닫힌 체계들, 접촉의 작용들, 순간적이고 부동적인 단면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닫힌 체계들, 유한한 집합들은 이런 우주 속에서, 이런 면 위에서 잘려 나온 것이다.
이런 우주나 면의 각 부분들의 외재성을 통해 그러한 체계들이나 집합들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우주나 면 그 자체가 그 둘 중 하나는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집합이지만 무한한 집합이다.
내재성의 면은 각 체계의 부분들 사이에서, 그리고 하나의 체계와 다른 체계 사이에서 성립되는 운동(운동의 바깥면)으
로서, 그것은 그 모두를 가로지르며, 그들을 뒤섞고 그것들이 절대적으로 닫히지 못하게 하는 조건을 부과한다.
그것 역시 하나의 단면이다.
그것은 동적 단면이며, 시간적인 단면 또는 시간적인 원근성이다.
그것은 시간-공간의 블록이다. 왜냐하면 매번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운동의 시간이 그것에 속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무한한 일련의 그러한 블록들, 또는 동적 단면들이 존재할 것이며, 그것은 우주의 운동들의 연속성에 상응하는,
[그만큼의 수를 지닌]면의 제시가 될 것이다.
이것은 기계가 아니라 기계주의이다.
물질적 우주, 내재성의 면이란 운동-이미지들의 기계적 배열인 것이다.
여기에 베르그송의 탁월한 선각이 있다.
그것은 즉자적인 영화로서의 우주, 메타시네마이며, 영화 자체에 대해 베르그송이 자신의 공공연한 비판 속에서 제시한
관점과는 전혀 다른 관점을 담고 있다.
그러나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고, 아무에게도 말 건네지 않는 즉자적 이미지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바라볼 눈도 없는데 어떻게 나타남에 대해 말할 것인가?
[이것이 가능한 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이미지들을 실재로서 파악된 사물들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지각과 언어는 실체(실사)와 특질(형용사), 그리고 행동(동사)을 구분한다.
그러나 행동들은 정확히 이러한 의미에서, 이미 운동을 그것이 향하여 가고 있는 잠정적 장소의 관념, 혹은 그것이 획득
하는 결과의 관념으로 대체하였다.
지금으로서는 우리는 운동들만을 알고 있을 뿐이며 아직은 그것들과는 다른 모든 것들과 구별하기 위해 그 운동들을
‘이미지’라고 부른다.
여기서 긍정적 논거는 내재성의 면이 모두 ‘빛’이라는 것이다. 운동, 작용, 반응의 집합은 산재하는 “저항 없이, 손실 없이”
퍼져나가는 빛이다.
이미지와 운동의 동일성은 그 논거로서 물질과 빛의 동일성을 갖는다. 물질이 빛인 것처럼 이미지는 운동이다.
여기에 빛을 정신의 편에 두었던, 그리고 의식을 본래적인 어둠으로부터 사물들을 끌어내는 빛의 다발로 여겼던 모든
철학적 전통과의 단절이 존재한다.
현상학은 아직도 완전히 이 낡은 전통에 편승하고 있었다.
단지 빛을 내적인 빛이라고 하는 대신, 흡사 의식의 의도성이 전등의 빛이라도 되는 것처럼 빛을 외부를 향해 열어놓았
을 뿐이었다(모든 의식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다).
베르그송에게 있어 그것은 정반대이다.
사물들은 그것들을 비추는 아무 것도 없이 그 자체로서 빛나는 것이다.
모든 의식은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물과, 즉 빛의 이미지와 혼동된다.
간단히 말해, 빛이 되는 것이 의식인 것이 아니라 물질에 내재하는 의식인 것이 바로 빛인 것이다.
우리의 실제의 의식이란 단지 불투명성일 뿐이며, 그 불투명성 없이 빛은 “계속 퍼져나가 결코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베르그송과 현상학의 대립은 이런 의미에서 근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재성의 면 또는 물질의 면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운동-이미지들의 집합이며 빛의 선들과 형상들의 모음이고, 일련의 시간-공간의 블록들이다.
2. 운동-이미지와 운동의 통일성, 그리고 표현 이미지
1) 들뢰즈의 쁠랑 개념
들뢰즈는 쁠랑은 ‘데쿠파주’에 의해 한정된 것으로서, “닫힌 체계에서 집합의 요소들 혹은 부분들 사이에서 세워지는
운동 규정”이라도 정의한다.
운동은 대상들 사이의 상대적인 이동 운동이지만 동시에 이 운동은 지속하는 전체의 절대적 변화를 표현하기도 한다.
쁠랑은 지속이라는 전체의 움직이는 단면으로서 전체의 변화를 표현하는 운동인데, 이는 집합의 부분들 사이의 위치
변경과 같은 상대적 변화를 통해 드러난다.
쁠랑은 집합과 열린 전체라는 분리될 수 없는 두 측면을 동시에 드러내 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프레임(닫힌
집합)과 몽타주(열린 전체)를 매개하는 것이라는 추상적 정의가 가능하다.
하지만 쁠랑은 이러한 추상적 정의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 두 측면을 끊임없이 오가는 운동을 통해서 자신의 구체
적인 의미를 발견한다.
쁠랑은 집합을 구성하는 대상들에 따라 지속을 하부 지속으로 나누면서 동시에 이러한 하부 지속들을 하나의 지속 안
으로 재통합한다.
영화의 쁠랑들은 프레임화되어 있는 이미지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운동이 몽타주되어 있는 전체 지속의 변화를 표현하
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발견한다.
영화 전체의 변화가 쁠랑을 통해 표현되는 방식으로 쁠랑들의 연결접속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들뢰즈는 집합의 차원과 전체 지속의 차원을 끊임없이 오가면서 부분들을 전체의 지속에로 결합시키는 나눔과
결합의 운동의 역할을 하는 것은 ‘의식’이라고 하면서, 영화에서 이러한 역할을 하는 쁠랑을 영화적 의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영화적 의식은 감독도 주인공도 아닌 카메라에 의해 절단되는 쁠랑이다.
카메라는 인간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그 탈중심적인 본성 때문에 비인간적이거나 초인간
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들뢰즈는 동적 쁠랑이 영화의 물질적 의식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 준다고 보았다.
뿐만 아니라 동적 쁠랑은 물체나 대상들로부터 운동 그 자체의 본질인 운동성을 추출하여 보여주는데, 영화가 제시해
주는 이러한 운동성이 바로 베르그손이 보여주고자 했던 즉자적으로 운동하는 이미지라고 주장한다.
들뢰즈는 영화가 동적 쁠랑을 통해 즉자적으로 운동하는 이미지를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영화의 고유성을 발견한다.
동적 쁠랑에서 지속하는 전체의 연속적 변화는 쁠랑에 함축되는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시점들로 표현된다.
하나의 쁠랑은 아무리 짧다 하더라도 지속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므로, 하나의 쁠랑 안에서는 연속적인 시점 변경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하나의 쁠랑 안에는 다중 시점이 존재하게 된다.
들뢰즈는 쁠랑의 이런 특성을 입체파와 동시주의 회화와 비교하는 엡스떙의 의견을 참조하여, 쁠랑을 “현란하고, 물결
치며, 변하기 쉽고, 수축성이 있는 다양체의 원근법”, “시간적 원근법 혹은 변조”라고 표현한다.
이는 영화가 부동의 이미지를 생산하는 회회나 사진과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동적 쁠랑은 들뢰즈가 영화를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들뢰즈는 영화를 기본적으로 운동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결국 영화를 분석하기 위한 쁠랑이라는 단위 역시 운동의 관점에서 규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운동의 관점에서 쁠랑을 바라보게 되면 물리적으로 쁠랑들이 단절되어 있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속의
변화를 표현하고 있는 운동의 통일성의 관점에서 쁠랑이 하나의 분절적 운동을 나타내고 있는지 여부가 중요해진다.
들뢰즈가 쁠랑을 한편으로는 쁠랑 내부의 인물들 또는 대상들 사이의 운동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카메라의 운동으로
정의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쁠랑은 운동-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먼저, 고정된 쁠랑이 있다.
여기서 운동은 부분들 사이의 이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만약 쁠랑 내부에 인물들의 이동이 있다면 인물들은 좌우, 앞뒤로 사각의 프레임 내부와 외부로 이동할 수 있다.
인물들은 프레임 내부에서 이동하거나 위치를 바꾼다.
“이러한 변경은 지금 변화하고 있는 그 무엇, 즉 아주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이 집합을 통해 일어나고 있는 전체 속
에서의 질적인 변화를 표현하지 않는다면 완전히 자의적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두 번째의 경우는 카메라 자체의 이동이나 패닝에 의해 운동이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들뢰즈는 프레임 내부의 인물이나 대상의 움직임과 카메라의 이동이 만들어 내는 운동이 “전체의 절대
적인 변화를 표현하지 않는 경우 필연성을 잃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들뢰즈가 쁠랑에 대한 정의를 통해서 이끌어내는 것은 순수한 운동이다. 쁠랑은 순수한 운동을 표현한다.
순수한 운동은 대상의 운동에 의존하지 않고 운동체로부터 추출된 운동성이다.
먼저 카메라의 운동성에 의해, 그리고 몽타주에 의해 쁠랑들을 연결함으로써 순수한 운동이 발생한다.
카메라의 이동에 의해 만들어지는 운동은 인간의 지각이 경험할 수 없는 운동 그 자체를 가능하게 만든다.
인간의 운동은 보행운공이건 신체의 움직임이건 몸을 중심으로 작용하는 중심화된 운동이다.
반면 카메라의 이동 운동은 대상에 종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운동이다.
커다란 운동은 한편으로 한 영화 전체나 어떤 작가의 작품세계 전체를 특징지어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운동은 늘
두 측면과 관계 맺기 때문에) 서명된 어떤 이미지의 상대적 운동 또는 이미지 안의 세부적 부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운동과 공명한다.
그래서 어떤 작품의 특징적인 운동을 통해 작품을 분석하는 양식적 분석은 작품 분석과 작가 연구에 필연적 중요성을
가진다고 들뢰즈는 주장한다.
운동의 스타일을 중심으로 작품을 분석하는 것은 어떤 작가나 작품의 영화적 의식의 궤적을 분석하는 작업이자 그 영화
나 작가의 전체를 밝혀주는 작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서명과도 같은 운동의 스타일 분석은 단지 한 영화에 특징적인 운동을 나타내는 것만이 아니라 서사 구조와 더불어 파악
할 수 있는 영화 전체의 운동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렇듯 어떤 작품에서 특징적인 쁠랑의 구성 방식을 파악하는 것은 그 영화 전체의 이해를 위해 핵심적이라 할 수 있다.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 개념이면서 들뢰즈가 영화를 바라보는 주된 관점을 드러내어주는 쁠랑은 사물들을
하나의 전체로 재결합하고, 사물들 사이에서 전체를 분할하는 끊임없는 운동을 통해 “공통분할개체”를 만들어낸다.
공통분할개체는 차이나는 것들이 균질화되거나 동질화되지 않으면서 하나의 윤곽을 그리며 공속하고 있는 강도적
다양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쁠랑은 지속을 나누고 동시에 결합하는 의식으로 작용한다.
강도적 다양체를 나누고 결합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본성상의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고, 이는 창조와 생성을 가능하게
한다.
다시 말해 쁠랑은 다양체로서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차원들을 함축하고 있으며, 영화적 창조와 생성을 가능하게 하는
의식처럼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2) 프레임과 몽타주, 쇼트와 몽타주
프레임은 부분적인 피사체들을 한정하는 집합이고, 몽타주는 지속하는 영화 전체를 한정하는 관계이다.
부분들은 프레임 속에 놓인 부분들의 부분이고, 전체는 몽타주로 조합된 부분들의 전체이다.
하지만 프레임의 부분과 편집된 부분은 동일한 부분이 아니다.
전자는 공간적으로 구분되는 피사체들이지만, 후자는 시간적으로 지속되는 운동들이다.
지속의 동적인 절단들로 구성되는 전체는 부분들의 집합이 아니라 운동-이미지들의 관계이다.
초창기 영화와 구분되는 본격적인 영화의 숏은 부동적이고 공간적인 컷이 아니라 카메라 워크와 편집으로 지속되는
시간의 동적인 컷이다.
움직이지 않는 부분들 사이의 운동이자 동시에 지속의 변화를 표현하는 운동으로서 숏은 프레임과 몽타주 사이이다.
프레임은 부분의 한정이고, 몽타주는 전체의 한정이며, 숏은 운동의 한정이다.
운동은 부분들 사이 혹은 지속으로서의 전체가 질적으로 변화하는 매순간을 표현하는 운동이다.
부분은 더 작은 부분들로 나뉘거나 더 큰 부분의 부분들이며, 집합은 더 큰 집합에 포괄되거나 다른 집합과 더불어 더
큰 집합을 형성하는 집합들이다.
전체는 매순간 자신의 본성을 변화시켜야 분할될 수 있는 지속이며, 궁극적으로 집합을 닫힐 수 없게 하는 시간이다.
요컨대 전체는 열림이고, 부분들이 닫히지 않게 지속적으로 집합을 연다.
운동은 전체가 부분들 사이에서 분할되도록 하면서 역으로 부분들이 전체 속으로 결합되도록 만든다.
혹은 운동은 “지속이 속성을 변하게 하면서 대상들 속에서 분할하게 하며, 대상들이 스스로 심화하게 하면서 혹은 그
윤곽들을 상실하게 하면서 지속 안에서 결합되게 한다.”
양방향으로 동시에 삼투되는 반투과성 막처럼 숏은 부분과 전체를 서로 이행시키고 전환시킨다.
운동의 운동성은 집합 안이나 집합들 사이의 운동으로 표현되는 전체 속의 변화이다.
숏은 이동카메라를 통해 운동성을 추출한 운동-이미지이며, 몽타주를 통해 추상의 정도가 변이된다.
베르그손은 이미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에서 “선율 한 소절의 통일성”과 같은 운동의 운동성을 제시
한 바 있다.
운동의 통일성은 운동이 지나간 궤적을 표시하는 위치 점들의 양적인 집합이 아니다.
운동의 질적인 종합은 “바로 운동만을 생각할 때, 즉 운동으로부터 이를 테면 운동성을 추출할 때 우리가 운동에 대해
가지는 관념이다.”
베르그손은 별똥별이 밤하늘을 긋는 운동의 찰나나, 눈을 감고 움직였을 때 느낄 수 있는 운동의 질적인 내감을 운동성의
예로 든다.
들뢰즈는 촬영장치, 즉 이동카메라를 통해 동체로부터 운동성을 추출한다.
카메라가 움직이는 순간 카메라 자체가 동체로서 표현하는 움직임의 화면과 대상의 움직임이 내적으로 접촉한다.
숏은 양면의 운동이 접촉한 내면의 이미지, 혹은 연결 부호, ‘-’로 접속된 이미지와 운동의 더블, 즉 운동-이미지이다.
물방울에 맺힌 영상처럼 숏은 자신 안에 운동을 함입한 이미지지만, 물방울은 투명한 유리판 사이의 물기처럼 양면의
운동을 갖는다.
들뢰즈가 프레임을 다섯 가지의 명세(decompte)로 나누는 것은 프레임이 집합으로서의 분할 가능성과 분할개체로서의
속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프레임은 그 구성 요소의 수에 따라 많은 수로, 또는 적은 수로 나누어진다.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에 따라 나눌 수 있으며, 프레임 내부의 구성 요소들의 결합 방식에 따라, 구성 요소를 포착하는
프레임 내부의 각도에 따라 나눌 수 있다.
이와 같은 분류는 모두 세부적인 단위로의 분할과 재분할뿐만 아니라 구성 요소들이 배치되는 방식과 그것들이 가시적
으로 드러나는 방식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프레임을 세부적인 단위까지 분류하는 이유는 “이미지는 보기뿐만 아니라 읽기의 대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
으로는 프레임이 동질적 공간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간은 운동과 달리 무한 분할 가능하다.
프레임은 ‘외화면(hors-champ)’을 가지고 있다.
들뢰즈는 외화면은 부정이 아니라는 점, 즉 외화면이 전체와의 단절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외화면은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프레임은 대상에 대한 일종의 한정이지만 외화면은 사각의 닫힌 한정을 넘어서 “완전하게 현전하고 있는 것을 지시한다.”
외화면은 닫힌 체계가 아니라 언제나 전체, 집합들의 집합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프레임은 외화면을 통해 무한한 연장될 수 있다.
집합으로서의 프레임은 부분을 향해 축소될 수도 있고, 보다 큰 집합을 향해 확장될 수도 있다.
외화면은 화면의 틀로 고정될 수 있고, 마찬가지로 화면의 틀 바깥으로 열릴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외화면은 상대적으로 닫힌 체계를 향하는 경향과 이질적이고 지속적으로서의 전체를 향하는 경향을 나타
낸다.
지속으로서 외화면의 절대적인 측면은 프레임을 닫힌 집합이 아니라 화면 내부의 공간과는 다른 전혀 이질적인 것으로
서의 외부를 지시한다.
“그것은 더욱 근본적인 다른 곳이며 균질적인 공간과 시간의 바깥에 있다.”
외화면은 언제나 전체를 향해 열려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탈프레임이나 실제적으로 타당하지 않는 프레이밍과
같은 경우가 정당화되는 것은 바로 외화면의 이러한 측면에 근거한다.
들뢰즈는 숏과 몽타주의 관계를 철학에서 운동과 (운동을 측정하여 만들어지) 수의 관계에 비유한다.
수는 운동에 의존하면서도 운동으로부터 독립적이다.
다시 말해 ‘몽타주란 때로는 독립적인 축으로서 시간을 간접적으로 재현하는 한편, 때로는 숏내의 운동에 의존하여
단지 그 운동을 측정하고 중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 결론짓는다.
때로는 독립적이고 때로는 의존적인 몽타주가 숏과 맺는 관계에 대한 그의 설명 기저에는 중요한 전제가 유지되고 있다.
운동이 일어나는 곳은 숏이며, 그 운동이 시간을 간접적으로 재현하는 곳은 몽타주라는 ‘역할의 배분’이 그것이다.
한편으로 운동은 스스로 시간을 간접적으로 재현하지 못한다.
그것은 몽타주의 시간 재현을 위한 재료이며 몽타주로 현실화하는 잠재태이다.
몽타주라는 매개를 거치지 않는다면 운동의 간접적인 시간 재현은 불가능하다.
다른 한편 몽타주는 운동 밖에 있다.
그것은 제 운동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때로는 운동들의 단순한 중계자 역할로 그칠 수 있지만 여하튼
운동 밖에서 시간을 간접 재현하는 특권을 누린다.
쇼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잠재적 몽타주이며 그 사건은 결국 쇼트와 쇼트 사이의 몽타주 효과를 발생시키기 위하여
각각의 쇼트를 추진하는 힘이라고 에이젠슈타인과 들뢰즈는 말했다.
쇼트 내부의 운동은 자기 자신의 독립적인 사건을 구현하고 있다.
쇼트 내부의 사건은 그런 의미에서 이중적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완결적인 운동일 뿐 아니라 그것들이 모였을 때 보다 거대한 운동의 질료가 된다.
결론적으로 몽타주는 쇼트가 운동인 것처럼 그 자체가 운동이며, 쇼트는 몽타주가 뭔가의 특정인 것처럼 다른 것의 측정
일 수 있다.
들뢰즈의 표현대로라면, 시간이 간접적으로 재현되고 ‘유출’되는 틈바구니는 ‘운동-이미지’들을 잇는 몽타주일 뿐 아니라,
쇼트 내부의 제 위치 사이의 틈을 잇는 ‘운동-이미지’자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3. 운동-이미지와 그 변주
쁠랑의 불특정한 점들에 작용과 반응 사이의 틈인 간격이 나타난다.
생물들은 “그들에게는 무관심한 외부의 작용들 중 일부가 자신들을 횡단하도록 내버려두며, 그 외의 다른 것들은 고립
되어 그 고립 자체에 의해 지각으로 변한다.”
이것이 바로 틀잡기(cadrage, framing)의 작업이다.
일어난 특정한 작용들은 틀에 의해 고립되고, 이로써 그 작용들은 이미 앞질러 예상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실행된 반응들은 더 이상 일어난 작용들과 즉각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간격 덕분에, 지연된 반응들은 그 요소들을 선별하고 그 요소들을 조직할 시간을, 또는 단순히 수용된 자극을 연장함으
로써만 결론내릴 수 없는 새로운 운동 안에 그 요소들을 통합할 시간을 갖게 된다.
예측하기 어려운 또는 새로운 무언가를 제시하는 이러한 반응들은 엄격히 말해 ‘행동’이라고 불러야만 할 것이다.
그래서 생 이미지는 “수용된 운동과의 관계 속에서는 분석의 도구가 되며, 실행된 운동과의 관계 속에서는 선별의 도구
인 것이다.”
이러한 특권이 수용된 운동과 실행된 운동 사이의 틈이나 간격이라는 현상에만 의거하므로 생 이미지들은 운동-이미지의, 중심이 부재하는 우주 속에서 형성되는 ‘불확정적 중심들’이 될 것이다.
생 이미지란 어쩔 수 없이 불확정적 중심 혹은 검은 화면이다.
그로부터 중요한 결과가 파생된다. 이미지의 지시관계의 이중의 체계, 이중적 체계의 존재가 그것이다.
사물과 사물에 대한 지각은 동일한 사물, 동일한 이미지이지만 지시관계의 두 가지 체계 중 어느 한 편과 관계를 맺고 있다. 사물은 즉자적인 상태의 이미지이며, 그 이미지에 전적으로 작용을 가하는, 그리고 그 이미지가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다른 모든 이미지들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사물의 지각은 그것(동일한 이미지)을 틀짓고 그것의 부분적 작용만을 포착하며 간접적으로만 그것에 반응하는
또 하나의 특별한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는 동일한 이미지이다.
우리는 사물을 지각하면서 우리의 필요에 따라 관심을 적게 끄는 것은 적게 지각한다.
필요나 이해관계란 우리의 수용적 면에 의거해 사물로부터 포착하는 선과 점들, 그리고 우리에게 가능한 지연된 반응을
통해 우리가 선별하는 행동들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주관성의 최초의 물질적 순간을 정의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그것은 감산적 방법이며, 사물로부터 이해관계가 없는 것을 뺀다.
그러나 역으로, 사물 자체는 즉자적으로 스스로를 지각으로서 나타내야 한다.
완전하고 즉각적이며 모호한 지각으로서 말이다.
사물은 이미지이고, 이런 점에서 스스로를 지각한다.
그리고 그것에 작용이 가해지고, 모든 면 위에서 그리고 모든 부분들 속에서 그 작용에 반응하는 만큼 사물은 다른
모든 사물들을 지각하는 것이다.
영화는 운동-이미지의 첫 번째 체계인 보편적 범주, 총체적이고 객관적이며 모호한 지각에 합류하려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그것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간다.
지금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사물들과 혼동되는 총체적이고 객관적인 지각으로부터 단순한
생략이나 감상에 의해 사물과 구분되는 주관적 지각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단일 중심의 주관적 지각이 바로 우리가 고유한 의미에서 지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운동-이미지의 첫 번째 전신이다.
그것을 불확정적 중심과 결부시킬 때 그것은 지각-이미지가 된다.
운동-이미지들의 우주가 자기 안에 중심을 형성하는 특별한 이미지들 중 하나와 결부될 때 우주는 안쪽으로 휘어져 그
중심을 둘러싸면서 스스로를 조직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세계에서 중심으로 이동하지만, 세계는 곡선을 취하여 주변이 되고 지평을 형성한다.
우리는 지각-이미지 안에 머물고 있으나 마찬가지로 이미 행동-이미지 안으로 들어가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지각은 단지 이 간격의 한 편일 뿐이며 행동은 또 다른 한 편이다.
우리가 행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불확정적 중심의 지연된 반응된 것이다.
내적 만곡에 의해 사물들은 내게 이용 가능한 면들을 뻗어오고, 동시에 행동이 된 나의 지연된 반응은 그것들을 이용할
줄 알게 된다.
거리란 바로 주변에서 중심으로 뻗어 있는 선이다.
사물들을 그것들이 있는 곳에서 지각함으로써 나는 그 사물들이 나에 대해 갖는 ‘잠재적 작용’을, 동시에 내가 그 사물들
에 대해 행사하는 ‘가능한 행동’을 파악한다.
그러므로 간격이라는 동일한 현상이 내 행위 속에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되고, 나의 지각 속에서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지각이 공간을 마련하는 것과 행동이 시간을 마련하는 것은 정확히 같은 비율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운동-이미지의 두 번째 전신이다. 그것은 행동-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느끼지 못한 채 지각에서 행동으로 옮아간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과정은 우리에 대한 사물들의 잠재적 작용과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가능한 행동이 비롯되는
우주의 휘어짐, 만곡이다.
이것이 주관성의 두 번째 물질적 측면이다.
그리고 지각이 운동을 ‘실체들’과, 즉 움직이는 것이나 움직여지는 것으로 쓰여질 단단한 대상들과 결부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은 운동을 하나의 항이나 가정된 결과의 윤곽이 될 ‘동작’과 결부시킨다.
그러나 간격은 두 면-경계, 즉 지각적인 면-경계와 행동적인 면-경계의 특화로만 정의되지는 않는다.
그 사이의 것이 있다.
감화작용은 그 간격을 채우지도 메꾸지도 않으면서 단지 점하는 것이다.
그것을 불확정한 중심, 즉 어떤 점에서 혼란스런 지각과 주저스런 행위 사이에 있는 주체 안에서 떠오른다.
그것은 주체와 대상의 우연한 일치이며 혹은 주체가 스스로를 지각하는, 아니면 자신을 체험하거나 ‘안으로부터’ 느끼는
방식이기도 하다(주관성의 세 번째 물질적 측면).
감화작용은 운동을 체험된 상태로서의 어떤 특질과 결부시킨다.
사실상 거리 덕분에 지각이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포착하거나 반영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그냥 흘려보낸다고 믿는
것은 불충분하다.
분명 우리가 흡수하거나 굴절시키기는 하지만 지각의 대상이나 주체의 동작으로 변형하지는 않는 외재적 운동들의
일부가 있다.
그것들[외재적 운동들]은 오히려 순수한 특질 속에서 주체와 대상의 일치를 가리킬 것이다.
그것이 운동-이미지의 마지막 전신인 감화-이미지이다.
바로 감화작용 안에서 운동은 이동이기를 멈추고 표현의 운동, 즉 어떤 부동적인 요소를 동요시키는 단순한 경향인
특질이 된다.
결국 특별한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불확정적 중심과 운동-이미지들을 다시 연관시키게 되면 그것들은 세 가지 종류의
이미지들로 구분된다.
지각-이미지, 행동-이미지, 감화-이미지가 그것이다.
그리고 특별한 이미지 혹은 임의적 중심으로서의 우리 각각은 오로지 이 세 가지 이미지들의 조합, 즉 지각-이미지,
행동-이미지, 감화-이미지들의 견고한 통합체인 것이다.
들뢰즈에게 지각은 베르그손을 따라 생명체인 “살아 있는 이미지가 반사하는 이미지”로 규정된다.
세계는 이미지들의 작용과 반작용들의 집합이다.
그 중 인간 혹은 신체라는 이미지는 작용에 대해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선택적으로 반작용한다.
‘뇌는 스크린’이라는 말도 이래서 생겨난 것이다.
여기서 세계라는 이미지가 인간이라는 이미지에 작용하여 나타난 것이 지각-이미지이고, 이 지각이라는 자극에 대한
반작용이 행동-이미지이다.
그러나 행동은 선택적으로, 다시 말해 일정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서, 즉 기다림과 망설임 뒤에 이루어진다.
자극에 대한 반작용을 유예할 때 나타나는 설렘 혹은 괴로움과 같은 정서가 감화-이미지이다.
들뢰즈는 베르그손의 이미지 존재론을 영화에 적용하여 영화의 이미지도 똑같이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는 바로 영화가 인간의 신체와 똑같은 방식으로 세계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와 세 이미지의 관계는 동등하지 않다.
왜 그런가?
베르그손이나 들뢰즈에게 지각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가장 단순하게 말한다면 사물로서의 지각이 첫째이고 인간의 지각의 의미에서의 지각이 둘째이다.
첫째 형태의 지각은 서로간의 작용과 반작용 속에서 존재하는 사물들 자체다.
이때 사물들은 객관적이고 즉자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지각한다.
둘째 형태의 지각은 인간이라는 특권적 중심에서 성립하는 지각으로서 주관적이고 부분적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영화는 자연적인 주관적 지각을 그 모델로 삼지 않는다.
영화는 그 중심들의 이동성과 그 프레이밍의 가변성에 힘입어 항상 중심과 프레임이 부재한 광대한 영역들을 복원하게
된다.”
그래서 영화는 일반적으로 위의 첫 번째 형태의 객관적 지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나 그 운동-이미지는
다시 이런 객관적 지각으로부터 단순한 생략이나 감상에 의해 단일중심의 주관적 지각으로 나아간다.
들뢰즈에 따르면 영화에서의 지각-이미지는 이렇듯 양면에 걸친 성격을 갖는다.
이는 영화가 인간의 지각보다 더 뛰어난 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영화가 인간의 지각과는 달리 두 시점, 화법 등을 자유롭게 오감으로써 우위에 서 있다는 점인데, 장 미트리의 ‘양방향
화면’의 개념이나 파졸리니의 ‘자유간접담론’의 개념에서 보듯 영화적 지각-이미지는 시점이나 화법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영화적 이미지는 존재론적으로 개념적 인식이 보지 못하는 내재성의 평면을 드러내는 데 탁월하다.
운동-이미지의 세 번째 항이자 주관성의 세 번째 물질적 측면인 감화작용은 지각 대상이나 주체의 행동으로 변형되지
는 않는 운동-이미지의 일부다.
그것은 ‘순수한 특질 안에서의, 주체와 대상의 일치’를 가리킨다.
이것이 운동-이미지의 세 번째 분화인 감화-이미지인데, 이것은 지각-행동 체계에 필수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감화-이미지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이 클로즈업이다.
클로즈업은 얼굴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좀 더 분석적으로 보면 감화는 전혀 다른 두 특성을 갖는데, 첫째는 뭔가를 반영하는 고정적 통일체의 특성이고 둘째는
강렬한 표현적인 운동들의 특성이다.
이는 사람의 얼굴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얼굴은 일정한 윤곽을 가진 자신의 고정된 모습을 담고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체의 다른 부분들의 운동을 표현하기
도 한다.
얼굴에 대한 클로즈업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얼굴 그 자체가 클로즈업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클로즈업이나 감화이미지의 관점에서 볼 때 영화에서 얼굴은 전자의 성격을 지닌 반성적 얼굴이 선호
되는가 하면, 후자의 성격 즉 표현주의적이라고 할 강렬한 얼굴이 선호되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가는 항상 반성적 얼굴이나 강렬한 얼굴 가운데 하나를 선호한다.
그리피스가 전자를 대표한다면 에이젠슈타인은 후자를 대표한다.
클로즈업에서 대상은 더 큰 어떤 집합으로부터 떼어내진 것이 아니고 부분의 확대도 아니다.
감화는 대상을 “시공간적인 모든 좌표로부터 추상화시켜서” 그것을 실체의 상태로까지 끌어올린다.
그렇기에 클로즈업에서 나타나는 얼굴을 대할 때 우리는 공간을 느끼지 않는다.
배경이 사라지고 공간 감각이 소멸되는 것이다.
배경과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인물의 행위와 사건을 이해할 수 있는 지평이 사라짐을 뜻한다.
그러한 지평이나 좌표가 프레임에서 사라지면 우리의 익숙한 인식과정은 결국 행위의 무능력으로 이어지게 된다.
달리 말해 영화에서 전체 공간에 대한 조망을 가능케 하는 마스터 쇼트가 제공되지 않고 클로즈업만이 주로 사용된다면
우리는 내러티브의 이해에 상당한 답답함을 느낄 것이고 행위로 이어지는 맥락을 찾지 못하게 될 것이다.
클로즈업이 가져오는 약화된 공간구성 즉 무규정적 공간은 이미지의 탈중심성을 가져온다.
공간에 대한 익숙한 이해 대신에 미세한 무한, 미시적 익명의 흐름이 새로운 사유대상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감화-이미지나 클로즈업에 대한 독특한 분석은 들뢰즈가 현대영화에서 미세한 분할이나 무한에 대한 사유의
계기를 찾아낼 수 있게 한 중요한 요소였다.
베르그손의 논의를 바탕으로, 들뢰즈는 운동이란 기본적으로 “공간 속에서의 부분들의 전이”이자 동시에 “전체 속에서의
질적인 변화”라고 정의한다.
혹은 그에 따르면, 부분들의 전이 운동은 그 자체로 전체 속에서의 질적 변화를 표현한다.
들뢰즈는 이를 위해 몇 가지 예를 드는데, 가령 원자운동은 실체의 모든 부분들 간의 상호작용을 뜻하지만 동시에 전체
속에서의 에너지의 가감, 교환, 변동 등을 의미한다.
또 언급한 바 있는 설탕물의 예에서 설탕 입자들이 서로 떨어져 나와 물속을 떠도는 것은 부분들의 ‘전이운동’에 해당되
지만 동시에 이 ‘전이 운동’은 전체 속에서의 변화, 즉 유리컵에 담긴 내용물의 변화를 가리킨다.
즉 설탕 덩어리를 포함하고 있는 물에서 설탕물로의 ‘질적 이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움직일 수 없는 단면들의 합으로
이루어지는 운동은 ‘환상’을 나타내지만 움직일 수 있는 단면(즉 운동)으로 이루어지는 질적 변화는 ‘실재’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전체는 이와 같이 끊임없이 내적 전이 운동과 질적인 변화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으며, 따라서 언제나 열려 있는
것이자 본성이 항상 변화하는 것이고 새로운 무언가를 발생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열림이자 변화로서의 전체는 그 자체로 지속하는 어떤 것인데, 가령 하나의 생명체나 우주 자체도 닫힌 전체가 아니라
열린 전체에 해당한다.
따라서 전체는 집합과 다르다.
집합은 인위적으로 닫혀 있고 각각의 부부들 및 단계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전체는 항상 열려 있고 분할의 매단계마다
질적인 변화를 겪는다.
전체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분들을 갖지 않으며, 진정한 전체란 분할할 수 없는 연속성에 가깝다. 또 집합은
공간 속에 존재하지만 전체는 지속 속에서 존재하며, 그러므로 전체는 변화하기를 멈추지 않는, 스스로를 부단히 창조
하는 지속 그 자체이다.
따라서 실제 운동은 구체적으로 지속하면서, 지속 그 자체를 통해 움직일 수 있는 단면들로 이루어진 전체의 열림을
지향한다.
4. 반대의 증거
어떻게 우리를 우리로부터 해체하고 그 다음 우리 자신 역시 해체할 수 있을 것인가?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고 베게트는 선언한다.
“지각하는 일과 지각되는 일의 행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베게트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요람에 누었을 때의 고정성, 죽음, 암흑, 인물의 운동과 수직적 자세의 상실 등은 주관
적인 결말에 불과하다.
그것은 더욱 심오한 목적에 비하여 그 수단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류 이전의, 우리 자신들의 새벽 이전의 세계로의 재합류에 대한 것이다.
거기서 운동은 반대로 보편적인 변주의 체계 하에 속해 있고 빛은 항구적으로 퍼져 나가므로 드러날 필요가 없다.
이렇게 행동-이미지, 지각-이미지, 감화-이미지의 소멸을 진행시키면서 베게트는 빛나는 내재성의 면 쪽으로, 물질 및
물질이 발생시키는 운동-이미지의 우주적 물결 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세 가지 이미지의 변형들로부터 어머니인 우주적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는 모든 종류(운동-이미지, 행동-이미지, 지각-이미지, 감화-이미지)의 변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시간-이미지들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운동-이미지들 자체 간의 비교 또는 지각, 행위, 감화라는 세 가지 변형들의 조합이 그것들[시간의 간접적 이미지]을 만들어내는 한, 시간의 간접적인 이미지들은 항상 존재할 것이다.
특히 행동-이미지는 필름 누아르에서는 그에 따른 특수한 한경을 필요로 하게 되고 권총강도 장면에서는 꼼꼼하게 분할
된 행동에서 이상[적 형식]을 찾게 되기에 이른다.
이에 비하면 서부극은 행동-이미지를 제시할 뿐 아니라 거의 순수한 지각-이미지도 제시한다.
그것은 행동의 서사극만큼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극도 된다.
어떤 영화도 단 한 종류의 이미지들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또한 우리는 세 가지 변형들의 조합을 편집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 중 어느 한 측면에서 이루어진) 편집은 운동-이미지들의 상호 간 배열인 셈이다.
결국 한 영화 작품은 최소한 그 가장 단순한 특성들 속에서 항상 한 가지 이미지 유형의 우세를 보여준다.
우리는 그 우세한 유형에 따라 행동적, 지각적, 감화적 편집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종종 그리피스가 바로 행동의 편집을 만들어냄으로써 편집을 창안하였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드레이어는 감화의 편집, 감화의 구도를 다른 법칙들에 의해 발명하였다.
베르토프는 지각적인 편집의 발명자일 것이다.
이 세 가지 변형에 공간적으로 한정된 세 가지 종류의 쁠랑을 대응시킬 수 있다.
전체화면(long shot)은 무엇보다 지각-이미지일 것이고 중경화면(medium shot)은 행동-이미지일 것이며, 근접화면은
감화-이미지일 것이다.
그와 동시에 에이젠슈타인의 지적이 따르면 이 운동-이미지들 각각의 영화의 전체에 대한 관점, 전체를 파악하는 방식
이므로 근접화면에서는 감화적이 되고 중경화면에서는 행동적이 되며 전체화면에서는 감화적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화면들 각각은 공간적이기를 멈추고 스스로 영화 전체에 대한 ‘읽기’가 되는 것이다.
【질문】
1.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은 보다 엄격히 표현하면 사물과 정신의 이분법이 된다.
~ 베르그손에 의하면 이미지들의 총체인 물질은 분명 실재론의 사물과 그리고 관념론의 표상과 다르며, 그 사이에 존재
한다.
그렇다면 이제 물질은 이미지들의 총체로서 정신과 사물, 표상이 공통적으로 기반하고 있는 것이 된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베르그손의 이미지는 빛이다.
우주 만물이 이미지다.
그렇다면 세계를 표상하는 나의 지각, 뇌, 몸 역시 이미지가 된다.”
→ ‘서양의 형이상학, 특히 근대를 연 데카르트 철학의 기본은 세계를 정신과 물질로 이원화한 것이다.
자연 안의 모든 존재는 정신이거나 물질 둘 중 하나인 것이다.
정신은 사유를 속성으로 하고 물질은 연장을 그 속성으로 한다.
정신은 자유 의지를 가지나, 물질은 필연의 자연 법칙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정신과 물질의 일부인 육체를 가진 존재다.
그러나 한 인간 안에 자유 의지와 필연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질문에 데카르트는 결국 답을 구하지 못하는 모순에 빠진다.’
그런데 위(첫 단락)의 설명대로라면 물질이 이미지의 총체로서 정신과 물질(사물)을 다 아우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것은 곧 서양 철학에서 말하는 실체, 즉 신이라는 말인가.
이미지가 어떻게 사유와 연장을 속성으로 하는 정신과 물질을 다 포함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니면, 이미지는 곧 빛으로서 운동이라고 하는데 ‘이미지=물질=빛으로 이미지=운동’ 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면 이미지가 연장을 속성으로 하는 물질일 뿐인가?
즉자적인 존재로까지 묘사되는 부분에서는 이미지가 곧 빛으로서 신의 지위까지 격상되는 것 같은데, 베르그송과 들뢰즈로 이어지는 이 ‘이미지’의 정의가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2. 들뢰즈는 사진소와 평균적 이미지를 구분하고 있는데, 그 차이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3. 어떻게 어떤 교정 과정을 거쳐 인위적인 가짜 운동이 진짜 운동이 되었는지가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앞의 베르그손의 이미지론을 적용해 보면 우주 만물이 이미지이고 운동이기 때문에 영화에서 가짜 운동과 진짜 운동을
구분하는 것은 자체 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1. 운동에 관한 논제들 –베르그송에 관한 첫 번째 주석
1. 첫 번째 논제: 운동과 순간
베르그송은 운동에 관하여 세 개의 논제를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 논제에 의하면 운동은 그것이 가로지른 공간과는 분명 다르다.
가로지른 공간은 과거이고 운동은 현재이므로 가로지름(parcourir)의 행위인 것이다.
지나온 공간은 그냥 나누어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무한히 분할 가능하다.
반면 운동은 나누어지지 않거나 매번 나뉠 때마다 그 속성을 변화시켜야만 한다.
운동이 가로지른 공간들은 모두 하나의 균질적이니 공간에 속하지만 운동들은 이질적이고 서로 환원될 수 없다.
운동은 항상 둘 사이의 틈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그러므로 파악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아무리 시간을 나누고 또 재분할하여도 소용없다는 것이다.
운동은 항상 구체적 지속 속에서 이루어지며 개개의 운동은 자신의 고유한 질적 지속을 갖게 될 것이다.
1907년의 『창조적 진화』에서 베르그송은 이 잘못된 공식에 영화적 환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영화는 실상 두 개의 상보적 소여물들과 함께 작동한다.
즉 우리가 ‘이미지들’이라 부르는 즉각적 단면들이 그 하나이고, 장치(카메라 혹은 영사기) ‘안’에 있으며, 〔카메라 혹은
영사기〕와 ‘더불어’ 이미지들을 차례로 지나가게 하는 비인간적이고 단일하며 추상적이고 비가시적인 또는 지각 불가
능한 운동 혹은 시간이 또 다른 하나이다.
영화는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짜 운동을 가져다주며, 그 자체가 가짜 운동의 전형적 예이다.
우리는 사물이나 사람들이 막 무언가를 시작할 때 항상 스스로를 은폐하도록 강요되며, 또 그렇게 하도록 운명지어져
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물의 본질은 애초에는 결코 드러나지 않다가 중간쯤에서, 그 전개의 와중에서 그것의 힘이 견고해질 때 드러난다.
영원성의 문제 대신 ‘새로움’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철학을 변화시켰던 베르그송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예컨대 그는 생의 새로움이 초기에는 나타날 수 없는 이유를 처음에는 생이 물질을 모방하도록 강요당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영화도 처음에는 자연적 지각을 모방하도록 강요되지 않는가?
영화의 진화, 영화의 본질 또는 새로움의 정복은 편집, 이동 카메라, 영사에서 분리된 촬영의 해방을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이로써 공간적이고 부동적인 쁠랑(plan)은 공간적 범주이기를 멈추고 시간적 생성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단면은 부동의 것이 아닌 동적인 단면이 된다.
2. 두 번째 논제: 특수한 순간들과 불특정한 순간
근대 과학혁명은 운동을 특수한 순간들이 아닌 불특정한 순간과 연관시킴으로써 이루어졌다.
운동의 재구성이 이루어지더라고, 그것은 더 이상 형식적이고 초월적인 요소들(포즈)로써가 아니라 물질적이고 내재
적인 요소들(단면)로 이루어졌다.
운동에 대한 인지적 종합 대신 감각적 분석이 이루어졌다.
영화란 불특정한 순간에 의거해서 연속성의 인상을 부여하기 위해 선택한 등간격의 순간들에 의거해서 운동을 재생산
하는 체계이다.
불특정한 순간이란 다른 순간으로부터 등거리에 있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화란 운동을 불특정한 순간과 연관지음으로써 재생산해내는 체계라고 정의한다.
영화는 공간과 시감의 함수이며, 사전에 연출되도록 주어진 형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내재적이고 비범한 요소들 속
에서만 분해될 수 있는, 매 순간마다 이루어지는 연속성인 것이었다.
3. 세 번째 논제: 운동과 변화
순간이 운동의 부동적 단면인 것처럼, 운동은 지속, 즉 전체 혹은 어떤 전체의 동적인 단면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운동이 훨씬 더 심오한 그 무엇, 즉 지속 혹은 전체 안에서의 변화를 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속이 변화라는 사실은 지속에 대한 정의의 일부분이다.
베르그송의 세 번째 논제에서 다음과 같은 유추를 제시한다:
부동적 단면들 동적인 단면으로서의 운동
――――――――― = ――――――――――――――
운동 질적인 변화
이 정도의 차이로 왼쪽의 관계는 환영을 나타내고 오른쪽의 것은 현실을 나타낸다.
옛 철학자들은 전체는 주어지지고 않고 주어질 수도 없다고 했지만 베르그송은 다르다.
전체가 주어질 수 없는 것은 전체가 개방이며 그 속성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계속 새로운 것을 솟아나게 하는, 다시
말해 지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체를 정의해야만 우리는 그것을 관계라고 정의할 것이다.
관계는 사물들의 속성이 아니며 관계항들의 바깥에 있다.
또한 관계는 개방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영적 또는 정신적 실존을 나타낸다.
‘부동적 단면들 + 추상적 시간’은 사실상 부동적인 단면들을 부분으로 갖는, 그리고 어느 하나의 추상적 시간에 입각해
계산된 연속적 상태들을 부분으로 갖는 폐쇄집합들을 가리킨다.
반면에 ‘실제적 운동→구체적 지속’이란 지속하는 어느 한 전체의 열림을 가리킨다.
이때 이 전체의 운동들이란 닫힌 세계를 가로지르는 수많은 동적인 단면들이다.
운동은 어떤 의미에서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대상이나 부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속 또는 전체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속으로 하여금 속성을 변화시키면서 대상들 속에서 분할하도록 하며, 대상들로 하여금 스스로 심화하면서
또한 그 윤곽들을 상실하면서 지속 안에서 결합하게 한다.
운동은 대상들 사이에서 성립되며 그 대상들을 운동이 표현하는 변화하는 전체와 연관시키는데,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결론을 말하면,
1. 즉각적 이미지들, 즉 운동의 ‘부동적 단면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2. 시간적 지속의 동적인 단면들인 ‘운동-이미지’들이 있다.
3. 마지막으로 운동 말고도 그 너머에 시간-이미지, 즉 지속-이미지와 변화-이미지, 관계-이미지, 부피-이미지 등등이
있다.
2. 화면틀과 쁠랑, 화면잡기와 데꾸빠주
1. 첫 번째 단계: 화면틀, 집합 혹은 닫힌 세계
우리는 화면잡기(cadrage)를 이미지 안에 현존하는 모든 것- 배경, 인물, 소도구-을 포함하는, 상대적으로 닫힌 그러한
체계의 한정이라고 부를 것이다.
화면틀은 많은 수의 부분들- 다시 말해 부분집합에 포함되는 원소들-을 가진 집합을 구성한다.
우리는 그것들의 명세를 만들어볼 수 있다.
그 부분들 자체가 이미지 안에 들어 있다.
야콥슨은 이것을-‘대상-기호들’이라고 불렀고, 파졸리니는 ‘영화소들’이라고 불렀다.
이미지는 보기뿐만 아니라 읽기의 대상이기도 한 것이다.
화면틀은 소리 정보뿐 아니라 시각 정보도 기록하는 함축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한 이미지 안에서 거의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읽는 법을 잘 모르기 때문이며, 포화상태
만큼이나 희박한 상태를 잘 감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화면틀은 평행선이나 대각선으로 이루어진 공간구성으로, 그것을 점하는 이미지의 덩어리와 선들이 균형을 이루는
수용체의 구축과 불변하는 요소로서의 그것들의 운동 등으로 설정된다.
화면잡기란 제한적이다.
그 개념에 따라 한계들은 수학적이거나 역학적인 두 가지 방법으로 생각될 수 있다.
물체들에 선행하여 본질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이거나 혹은 기존 물체의 힘이 갈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으로서 말이다.
화면틀은 그것이 분리와 동시에 결합을 행하는 체계의 부분들에 대해 기하학적이거나 물리적인 것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화면틀은 더 이상 기하학적인 분할의 대상이 아니라 물리적 단계변화의 대상이다.
따라서 전체집합의 부분들은 모두 활발한 부분들로서의 값을 갖게 되고, 전체집합 자체는 일종의 혼합체처럼 모든 부분
들을 통해, 모든 빛과 그림자의 단계들을 거치면서, 모든 반명반음 상태의 명도단계들을 띄게 된다.
전체집합은 분할되는 것도 분할되지 않는 것도 아닌 ‘분할개체’이다.
영화이미지는 항상 분할개체적이다.
따라서 화면틀은 이미지의 탈영토화를 확고히 한다.
다음으로 화면틀은 화면잡기의 각도와 연관된다.
빠스칼 보니체르는 기울어진 원근이나 역설적인 화면각도와 전혀 다르면서 이미지의 또 다른 차원을 나타내는 이러한
비정상적 시점들을 가리키기 위해 ‘탈화면틀’이라는 매우 흥미로운 개념을 만들어냈다.
일종의 분할구도이다.
그 외에 틀-바깥이 있다.
틀-바깥은 부정이 아니다.
‘서로 이어지게’ 할 때 그러하다.
틀 바깥은 들리거나 보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완벽하게 현전하고 있는 것을 지시한다.
화면틀은 움직이는 차폐물처럼 작용하는데, 이 차폐물에 의해 전체집합은 화면틀이 소통하는 더욱 넓고 균질적인 집합
으로 연장되거나, 때로는 그림의 틀처럼 한 관계항을 따로 떼어내어 고립시키고 그 주변공간을 중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물질의 분할가능성은 부분들이 다양한 집합들 속에 포함됨을 의미하는데, 이 집합들은 부분집합들로 끊임없이 더 잘게
나눠지거나, 그 자체가 훨씬 더 큰 하나의 집합의 부분집합들이며, 이는 무한히 반복된다.
이것이 바로 물질이 닫힌 체계를 구성하려는 경향 및 이 경향의 미완을 통해 규정되는 이유이다.
탈화면잡기는 실용적으로 타당화되지 않지만 바로 이 두 번째 측면에 그 존재이유를 갖고 있다.
이미지가 닫힌 공간이 되어 이차원으로 환원되면 될수록 그것은 사차원인 시간, 오차원인 ‘정신’, 그리고 잔다르크나
게르트루드의 영적 결정에로 자신을 여는 데 더욱 적합하게 된다.
2. 두 번째 단계: 쁠랑과 운동
데꾸빠주는 각 쁠랑의 한정이며, 쁠랑은 닫힌 체계 안에서 집합의 요소들, 혹은 부분들 사이에서 성립되는 운동의 한정
이다.
운동은 전체의 어떤 변화 혹은 그 변화의 어느 단계나 양상을 표현한다.
그것은 부분들 사이의 관계이면서 전체의 감화작용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쁠랑에건 존재하는 두 개의 축이다.
제 요소들이나 부분집합들 사이에서 [쁠랑에 의한] 상대적 수정을 도입하는 공간 속의 집합들과 연관된 축이 그 하나
이고, [시간적] 지속 안에서 [쁠랑을 통해] 절대적 변화를 표현하는 전체와 연관된 축이 다른 하나이다.
왜냐하면 쁠랑이란 한 측면에서 다른 측면으로의 이행, 두 측면 사이의 환기, 배분, 그 두 측면의 항구적인 전환 등을
끊임없이 확보할 때에만 그 구체적인 정의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쁠랑은 운동-이미지이다.
그것은 운동을 하나의 변화하는 전체에 연결시키므로 지속의 동적인 단면이다.
영화적 지각은 연속적으로, 단 하나의 운동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 운동의 정지까지도 운동에 통합될 수 있는 부분이며 즉자적인 떨림일 뿐이다.
이렇듯 운동들의 동적인 단면을 만들어냄으로써, 쁠랑은 변화하는 하나의 전체의 지속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미지 안에서 집합을 구성하는 물체, 부분, 양상, 차원, 거리, 각각의 물체들의 위치 따위를 끊임없이 변주시킨다.
하나는 다른 하나에 의해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순수한 운동이 집합의 요소들을 잘게 분할하여 서로 다른 공통분모를 지닌 순수한 운동이 집합의 요소들을
잘게 분할하여 서로 다른 공통분모를 지닌 것들로 변주시키기 때문에, 그리고 그 운동이 집합을 분해하고, 재구성하기
때문에, 그것은 근본적으로 열려 있는 어떤 전체와 연관되며, 이 전체의 고유성은 끊임없이 ‘생성하거나’ 변화하거나
지속하는 것이다.
3. 운동성: 몽타주와 카메라의 운동
쁠랑이란 근접화면에서 원경에 이르는, 카메라로부터 어떤 거리에 있는 ‘공간적 단층’을 가리키는 독특하게 공간적인
한정을 뜻한다.
따라서 운동은 따로 드러나지 않으며 동적 대상 및 이동수단의 구실을 하는 요소, 인물, 사물들에 여전히 종속되어 있다.
전체는 근본적으로 집합과 혼동된다.
즉 고유한 의미에서의 변화나 지속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의내릴 수 있다.
초창기 이미지, 즉 운동 속의 이미지란 결국 [그것이 머물던] 상태보다는 [그것이 나아가려 하던] 경향에 의해 더 잘
정의되었다.
공간적이고 고정된 쁠랑은 순수한 운동-이미지를 부여하는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러다가 깊은 심도를 지니고 있으며 고정되어 있거나 이동하는 긴 지속적 쁠랑인 ‘쁠랑-세깡스’로 발전한다.
이러한 쁠랑은 그 자체 내에 근접화면에서 원경에까지 이르는 공간의 모든 단면을 동시에 포함하지만, 그것을 쁠랑이
라고 규정해주는 통일성 또한 지니고 있다.
그 외 어떤 심도나 중첩, 또는 후퇴도 수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의미의 쁠랑은 통일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운동의 통일성이며, 동시에 그에 모순되지 않는 상관적 다중성을 내포한다.
그런 고작해야 우리는 그 통일성이 다음과 같은 이중적 요구를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즉 그것은 영화의 전반에 걸쳐 전체의 변화를 표현하며, 각 집합 속에서의 혹은 한 집합에서 다른 집합으로의 부분들의
전위를 한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