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 아궁이에 불을 때 본 사람은 그 느낌을 안다. 불이 타는 아궁이를 볼 때마다 나는 기분이 그리 좋을 수가 없다. 이유를 굳이 말하자면 오관을 자극하는 본능적 쾌감 때문이다. 불붙기 시작할 때의 시각적 즐거움에다, 나무 타는 소리가 경쾌하고, 매운 연기마저 거슬리기는커녕 옛날에 맡았던 고향의 향취 같아 마음이 따뜻해진다. 손재주가 없는 탓에 불붙이다 꺼지는 게 일쑤지만, 아궁이에 불을 붙이고 타는 불을 보는 것은 무엇보다 행복하다. 행복이란 말을 이런 데 가벼이 써도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온종일 아궁이에 불만 땠으면 좋겠다. 작가 이효석은 생활인으로서 현실을 충실하게 살기 위한 방편으로 낙엽을 태웠다지만, 나는 그냥 좋아서 태운다.
아궁이 불은 추운 날에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끌어모아 언 손을 녹이기도 하고, 옻가지 잘라 닭백숙을 만들 때도 여기에 끓여 먹어야 더 맛이 있다. 도자기 굽는 가마나 땀을 내는 찜질방이 다 이것을 개량한 것에 불과하다. 이만하면 아궁이 불을 칭송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또 생각이 많은 사람에게는 정신적 안정감을 제공하고, 깊은 산속 작은 암자에 혼자 기거하는 스님에게 구도자의 깨우침을 주는 것도 아궁이 불이다.
우리 집 아궁이가 있는 장소는 아름다운 공상 속으로 나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작은 방석만 놓인 오래되고 협소한 공간이지만, 이 앞에서의 공상은 꼬리를 물고 나래를 펴서 늘 즐겁다. 제우스신으로부터 불을 훔쳐 인류에게 문명을 전한 프로메테우스의 혼이 서려 있어 본능적인 이끌림이 더하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불꽃 속에는 과거의 미래를 윤색하며 종횡무진 아무 데에도 생각이 얽매이지 않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힘이 있다. 아궁이가 있는 시골집 마을은 부산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 걸리는 멀지 않은 거리지만, 도시와 절연된 그 숲속에는 파랑새가 살고 있다.
시골 일이 아직도 서툴러 어정거리다 오는 게 다반사지만, 주말에 청도 가는 게 기다려지는 걸 보면 나도 마음만은 시골 체질인가 보다. 여섯 살까지 고향 제주도에서 살다가 일곱 살 되는 해에 부산 와서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기억이 희미한 어릴 적 6년 세월 중 하필 아궁이 불이 내 마음에 각인되어 유전인자처럼 떠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세월과 더불어 다 날아간 유년의 기억이지만, 어머니와 나란히 앉아 시골 부엌에서 부지깽이로 불을 때던 그 장면만은 아직 또렷하다. 불꽃 속에 어머니의 사랑이 숨어 있어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아마도 모성애와 고향은 세월이 가도 따뜻하게 남아 있는 가슴속 소중한 불씨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이 든 이제는 그 불씨마저 조그맣게 사그라져 고향도 어머니도 뇌리에서 희미해지고, 고향이 아닌 타향의 시골에서 어머니가 아닌 아내와 앞으로의 생활을 준비하고 있다. 어릴 적 추억의 편린들이 조각조각 쌓이고 부피를 더해 언제부터인가 시골행을 꿈꾼 계기가 된 것도 같다.
엊그제 약국에서 필요한 서류를 찾다가, 손이 가지 않는 맨 밑의 책상 서랍에서 청도의 등기부 등본을 발견했다. 청도행을 결심하고 시골집을 산 지가 벌써 십수 년이 흘렀구나 하는 생각에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한 편으로는 삶의 방식을 바꿔보려 했던 그때의 내 결정에 대하여 스스로 기특한 기분도 드는 것이었다. 아직 처음의 결심을 행동으로 완전히 옮기지는 못하고 주말에 왕래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지만, 오래지 않아 시골로 터전을 옮겨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세월과 들고나며 숨바꼭질하다 보니 어느새 노년에 이르러 버렸다. 무디어진 독수리 부리처럼 흘러버린 세월의 끄트머리에서 이제 무슨 성공을 기대하랴만, 작은 성취감이 따르는 미래는 늘 꿈꾼다.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 데 평생을 다한 타샤 튜더도 되었다가, 전국을 유람하는 여행 작가가 되어 역사 속이 한 사람이 되어 보기도 하고, 클래식에 능통한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가 되는 것을 상상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일생을 다해 이룬 그들의 성취물이 가볍거나 쉬울 리가 없다. 다만 소박하고 좋아하는 일들이라 잘하면어느 하나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꿈과 소망을 갖고 살려 한다.
시골에 정착하게 되면 사람과 부대끼는 생활이 아니라 한가하고 고독한 나만의 삶을 살았으면 한다. 그때는 너무 부지런하고 현실적인 사람보다는 안개처럼 속이 불투명하고 느릿한 사람이 친구로 생겼으면 좋겠다. 차이콥스키 비창의 주인공이 되어 비장하고 감동적인 삶을 살며 감정의 호사를 누리고 싶다. 나이도 잊고 젊은 감성을 지니고 건강하게 살다가 여생을 마칠 수 있을까.
인간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이질적인 개인이 서로 만나 결사체를 이룬 것이 현대 사회다. 나도 남들처럼 여기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여태 사회 일원이 되어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은 생각의 물줄기도 바꾸었다. 젊을 때는 몰랐는데 아무래도 나에게는 고독하고 조용한 유전자가 내재해 있는 게 분명하다. 불은 문명의 시작이었지만, 오늘의 나는 오히려 문명을 등지기 위하여 아궁이 불을 찾는다. 누가 뭐라 하든 행복하고 싶어 사는 존재가 인간일진데, 시간이 늦게 가는 시골에서 몸과 마음이 건강한 채 아무와도 비교하지 않고 재미있게 놀고 싶다.
도시에서 시골로 거처를 옮기는 것은 인간 사회에서 자연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물질 만족의 욕구로부터 정신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변화이며, 복잡함에서 단순한 생활로 바뀌는 것이기도 하다. 아궁이 불 앞에 앉는 것은 은둔이라기보다는 나이에 맞춰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진실한 내 삶을 찾아가는 여정이라 하고 싶다.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다들 살아가지만, 울타리 밖 고독한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삶의 재미를 나도 약간 알 수 있을 것 같다면 지나친 자만일까.
5월 하순 청도의 태양 열기는 반소매를 입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뜨겁다. 그러나 이곳 산촌의 밤은 차다. 지금도 나는 아궁이 앞에서 잠자리를 데울 장작을 때면서 정착하는 데 좀 늦어지고는 있지만, 시골 생활은 멋진 선택이었다고 중얼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