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인간극장이 사람을 울렸습니다.
원기라는 10살짜리 소년의 이야기가 방송되었습니다. 앳띤 초등학교 학생인데 몸의 나이가 80살이랍니다. 조로증에 걸린 아이의 이야기였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는 모습인데, 그 부모님들은 그대로 모든 것을 세상에 노출 시켰습니다. 그런데 감동적이었습니다.
원기가 너무 명랑합니다. 학교생활도 그렇게 적극적일 수 없습니다.
공기를 하는 데 손이 작아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다시 도전합니다. 될 때까지 도전합니다.
가정 분위기가 얼마나 화기애애한지 모릅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보통 소아 조로증에 걸린 아이들은 잘 해야 15년이나 17년 정도를 산다고 하니까 원기의 인생은 이제 5년이나 많으면 7년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가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원망하거나 불평한 겨를이 없습니다.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즐겁게 살기로 작정한 것은 가족 모두가 현실을 그대로 받아 들이면서 부터였다고 합니다.
원기 아빠는 서울 어느 교회 부목사님입니다.
그는 탄식하며 왜 이런 일이 내게 있어야 하느냐고 울부짖기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자, 그리고 그 다음을 생각하기로 하면서부터 마음에 평안이 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원기 아빠는 말합니다.
“한 지중 아래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날마다 확인하고 깨닫습니다.”
원기 엄마가 추수감사주일날 교회에서 간증하다가 울고 말았습니다.
원기 엄마가 원기에게 설명합니다.
“원기야, 엄마가 슬퍼서 운 건 아니야. 원기에게 미안해서 운거야.”
그 대목에 가서 가슴에서 울컥 뭐가 올라왔습니다. 그 바쁜 와중에도 원기 엄마는 인형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37살 된 젊은 엄마의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 나왔습니다.
“몸이 바빠야 마음이 평안해지잖아요. 몸이 편하면 마음이 불편해져요.”
인간 극장을 보면서 원기네 이야기 속에는 참으로 엄청난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심각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고난을 유익으로 바꾸는 공식을 이미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고난이든지 고난이라는 이야기 속에는 유익이라는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고난이라는 이야기를 유익으로 바꾸는 공식 첫 번 째는, 말할 것도 없이 원기네가 이미 터득한 ‘현실을 빨리 인정하고 받아 들이기’였습니다.
고칠 수 없다면 받아들일 것입니다.
둘 째 공식은 고난 때문에 내가 작아지고 나를 낮추는 일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신8:2)
셋 째 공식은 그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가서 그 율례를 배우는 일입니다.
원기네가 그런 고난 속에서도 그렇게 명랑하고 밝게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세 번 째 공식 때문이었습니다. 그 일을 축복으로 유익으로 바꾸는 절대적인 공식이 그 일 때문에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일이니까요.
시편 119편 71절은 늘 품에 품고 다녀야할 요절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만난 다음엔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고난은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난은 또 다른 이야기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원치 않는 고난을 만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고난 이라는 이야기 속에는 또 다른 놀라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은 유익이 되는 것이지요.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