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모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섭리하시고 마련하신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성모 마리아를 잉태 순간부터 원죄의 물듦에서 보호하시고 흠도 티도 없는 거룩한 삶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는 성모님께는 큰 은총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을 합당하게 모실 수 있도록 주님께서 손수 이루신 일이기에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을 찬송할 일입니다.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또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그분의 거룩함을 닮아야 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뜻하신다고 하더라도, 그분께서는 사람에게 주신 생명 다음의 가장 큰 은총인 ‘자유의지’에 따라 사람의 순종과 수고가 없으면 이룰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가브리엘 천사의 메시지와 성모님의 모습을 통해서 그 두 가지를 모두 증언하고 있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 주님께서 함께 하신 이, 하느님의 총애를 받은 이,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한다(루카 1,28-30)’고 하더라고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위로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덮는다’고 하더라도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면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시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하시려고 하더라도 사람이 그런 그분께 믿음과 순종의 삶으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가난해지고 말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뜻에 따라 존재하기 시작하고 존재하며 그 존재를 완성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 어떤 누구도 무의미하거나 실수나 착오로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이란, 그리고 삶의 성숙이란 ‘창조주 하느님께서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하느님의 사람이며 자녀가 되게 하시려는 그 좋으신 뜻(에페 1,4)’을 체험하고 깨닫는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는 독서로 들은 창세기 원조(元祖)들의 과오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영원을 살면서 평화와 행복을 누리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힘과 의지로 하느님처럼 되어 보려는 교만과 욕망을 불러일으킨 악의 유혹에 넘어가는 일이 그것입니다.(창세 3,5-6)
그러나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은 변함이 없이 계속 진행형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전능은 바로 그 진행형에서 드러납니다. 그 어떤 죄도 하느님의 뜻을 가로막거나 포기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이는 사람의 이해와 생각과 능력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어느 순간에도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당신의 그 좋으신 뜻을 포기하거나 멈추지 않으십니다. 하느님 자비의 샘은 마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악에서도 선을 이루시는 하느님(가톨릭교회 교리서) 곡선으로도 직선을 그으시는 하느님’이 계시되고 체험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나약함과 죄라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원죄(原罪)’를 비롯하여 우리의 죄는 ‘복된 탓’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 참으로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와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자신 스스로도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답게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으로 살려고 애쓰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자비롭고 사랑스럽습니다. 바로이것이 죄에 대한 하느님 은총의 신비입니다.
자비의 특별 희년을 시작하는 오늘! 바로 그러한 하느님을 깊이 묵상하며 자신을 그분의 넘치는 자비와 사랑의 빛으로 조명해보았으면 합니다. 하느님은 절대로 우리를 향한 그 좋으신 뜻을 포기하거나 멈추지 않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