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창회 리더스포럼에 참석하여 이정동 교수의 강의를 듣고 그날 선물받아 읽은 책인데 나에게 새로운 감동을 주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과 관련한 문제는 그동안 크게 관심갖는 분야가 아니었다. 그래서 지식이 일천하다. 그런데 이 강의를 듣고 나서 새로운 느낌을 받게 되었다.
혁신적 개념설계의 씨앗이 되는 최초의 질문은 ‘기존 분야에서 모범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과는 다른 규범을 제시하려는 뜻이 담긴 질문’이다. 따라서 그 해법을 찾는 데도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최초의 질문은 ‘답이 정해지지 않은 질문’이다. 설명되지 않던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 논리의 빈 부분을 채우려고 하거나 서로 다른 이론의 충돌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최초의 질문에 해당한다. 업계에서 통용되는 로드맵을 벗어나는 목표를 제시하거나 시장을 새롭게 정의하는 것이 최초의 질문이다.
인텔이 반도체 제국을 이루는 데는 저마다 기능이 다른 칩들을 통합할 수 있겠느냐는 최초의 질문이 있었고, 우주 시장의 개척자로 불리는 스페이스X에는 1단 로켓을 재사용할 수 있겠느냐는 최초의 질문이 있었다. 이 밖에도 즉석 사진, 넷플릭스, 인터넷 등 혁신의 사례로 꼽히는 것들이 탄생할 때는 어김없이 최초의 질문이 있었다.
결국 (1)도전적인 ‘최초의 질문’을 제기하고,
(2)그에 대한 답을 찾아 작은 것에서부터 버전을 빠르게 높이는 ‘스몰베팅’,
(3)최적의 답을 위해 외부의 지식과 시각을 도입하는 ‘오픈 네트워킹’,
(4)시행착오의 경험을 쌓아 가는 ‘축적 시스템’,
(5)매 단계의 ‘철저한 실행’을 통해 기술혁신이 완성된다.
그런데 제조, 소프트웨어, 제약 등 여러 산업 분야에서 그리고 벤처기업, 연구소, 대기업 등 규모와 지향이 다른 여러 조직에서 공통적으로 독창적인 개념설계를 못 하는 이유 중 으뜸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최초의 질문의 부재다. 10여 년간 휴대전화 시장 점유율 세계 1위를 지키다 스마트폰이 등장한 뒤 몰락한 노키아가 주는 교훈이 있다. 노키아에서는 비용이 많이 필요하고 위험부담도 크다는 이유로 스마트폰에 대한 최초의 질문 제기가 저지되었다. 기회가 많을수록 위험부담이 크기 마련이고 그래서 더욱 외부와 손을 잡으면서 스몰베팅으로 작지만 빠른 버전 업을 실행해야 하는데, 아예 질문이 나올 분화구 자체를 막아 버린 것이다. 끊임없이 업계의 룰을 갈아 치우는 세계적 기술 선도 기업에는 도전적인 최초의 질문이 넘쳐 나지만, 한때 혁신의 제국이었어도 최초의 질문이 없으면 소리 없이 스러진다. 예외가 없다.
기술 패권과 기술 주권 경쟁의 숨 가쁜 전개는 기술 선진국들이 저마다 내놓은 최초의 질문이 충돌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혁신적 기업이 최초의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핵심 기술을 만들어 내면, 그것을 중심으로 글로벌 가치사슬이 급속히 재편된다. 지금 세계는 가치사슬의 대혼란을 겪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같은 단기적 원인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디지털과 그린이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 전쟁 같은 새판 짜기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우리도 산업과 기술의 각 부문에서 크고 작은 최초의 질문을 던지고 해법을 찾아 대체 불가능한 퍼즐 조각을 많이 갖는 것이다. 고유한 최초의 질문이 없으면 전략 기술이 생길 수 없고, 전략적 자립성이 있을 수 없다. 전략적 자립성을 가진 국가들이 서로 등을 기대고 설 때 상호적 기술 주권이 생긴다. 이때 비로소 이인삼각처럼 서로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관계가 형성되고, 그 안에서 경제 안보도 가능해진다. 이인삼각에서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도 같이 넘어지고, 퍼즐 판에서 대체할 수 없는 조각이 사라지면 가치 없는 그림이 된다는 것을 모두 알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을 비롯한 4차 산업혁명이라는 범용 기술이 등장할 때 국가의 책임이 막중하다. 기술혁신 역사의 교훈은 4차 산업혁명 기술이 각 부문에 도입되어도 한동안 생산성 역설, 즉 그 효과를 보지 못하는 기간이 지속되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생산성 역설을 빠르게 극복하는 국가가 새로운 범용 기술 시대를 이끄는 기술 선도국으로 부상하리라는 것이다. 결국 사회 곳곳에서 새로운 범용 기술을 염두에 둔 도전적 최초의 질문이 많이 나오도록 장려하고, 많은 실험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한국의 궁극적인 지향이 그저 돈이 많은 고소득 국가일 수 없다. 저마다 자신만의 재능을 발견하고 역량을 스케일업하면서 성장해 나가는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으로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