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봉은 멀리서 바라보기와는 달리.,기암괴석 웅장한 산세. 자칫, 길을 잘못 들면 거미줄 같은 미로 속 바위길에 갇히기 쉽다. 노고단- 돼지령 - 임걸령- 노루목- 반야봉 정상 - 뱀사골 - 와운교.
조선시대부터 오늘날까지.,반야봉 정상 등정로.
조선시대부터 가뭄에 기우제를 올리던 명소.,반야봉. 무당이 속치마를 들어올려 엉덩이를 들어낸.,기우 풍습.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이 반야봉 정상에서 산상 방료 기우.
'천신의 정기' 비가 가뭄에 메마른 대지를 흠뻑 젖게 해달라고.,기우.
조선시대 반야봉 정상을 찾는 것만도 지극정성. 가뭄 속 단비는 농본기 속타는 민중들에게는 생명수. 삼남지방 선정적인 기우 풍습의 산실로 알려진.,반야봉.
그외 산삼캐는 심마니들이 다닌 길이 고작인.,반야봉. 천왕성모 '영원한 젊음의 비결'로도 알려진.,반야봉 산삼. 진시황이 진나라 영토 절반과 바꾸겠다던 불로초.,반야봉 산삼.
심마니 발길조차 끊긴지 이미 오래된.,심마니능선. 옛날이나 지금이나 지리산에서 가장 인적 드믄.,반야봉. 알몸 여인이 무릎꿇고 업드려 천신에게 경배하는듯한 산세.
'반야심경 경전에서 본딴 지명' 반야봉은.,불교 성지. 조선시대 서경덕 남명 등 성리학자에게는.,사상의 산실. 오늘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상징.,<반야봉의 낙조>
...................지리산.................... 현재, 지리산 일주도로는 320km 800 리 우리나라에서 최대 규모이자.,방대한 산.
지리산을 대표하는 3대 봉우리.
제 1 봉 - 천왕봉(天王峰:1,915m) 제 2 봉 - 반야봉(盤若峰:1,732m)· 제 3 봉 - 노고단(老姑壇:1,507m)
그 높이와 관계없이.,지리산에서 제 1, 2, 3 봉
하봉(下峰:1,781m)·중봉(1,875m)·제석봉(1,806m)· 촛대봉(1,704m)·칠선봉(1,576m)·형제봉(1,433m)· 명선봉(明善峰:1,586m)·토끼봉(1,534m) 등
주능선과 거의 수직을 이루면서 남북방향 가지능선 종석대(鐘石臺)·고리봉(1,248m)·만복대(1,433m) 연봉
주능선에서 해발 1,500m 이상 봉우리가 10여 개, 가지능선에서 해발 1,000m 넘는 봉우리가 20여 개, 그밖에 전남북 경남 3도에 걸쳐 85봉이 있는 지리산. .......................................................................
반야봉 일대는 1955년 5월까지 빨치산들의 은둔 항전처. 1948년 10월 여순반란 사건 때 문수골로 진입했던.,14연대. 반선, 뱀사골, 반야봉 일대에서 군경 토벌군에 의해 섬멸된다.
전남 여수에 주둔중이던 국군 제14연대 병력 2천5백여명 그들은 제주 4ㆍ3사태 동족상잔 진압에 파견되는 것을 거부. 그러나, 결과적으로 좌익 세력을 돕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호시탐탐 적화 통일 야욕을 꿈꾸던.,북한 김일성 집단. 4.3제주항쟁, 여순반란사건을 계기로 남침 전 사전공작. 14연대 반란군 및 남한의 좌파 세력을 배후에서 지원한다.
미군정 지원 하에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한 이승만 정권 북한 공산주의 세력의 적화 야욕에 맞서 적극 대응한다. 결국, 동족 간에 피비린내 나는 사상 전쟁으로 번져간다.
좌익과 우익 간 사상 전쟁에 희생양이 된.,14연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빨치산 제 2 병단장, 남부군 사령관, 조선노동당 제5지구당 위원장 이현상.
1948년 10월, 여순사건 반란군을 지리산으로 이끈 주역. 1953년 9월까지 6년간 지리산 유격투쟁을 주도했던 인물. 화개장터 앞 섬진강 강변에서 화장될 당시 47세였던 이현상.
충남 금산에서 출생 고창 고등학교 중퇴 서울 중앙 보통고 입학 1927년 보성전문학교 법학과 (지금의 고려대학 법학과 졸업)
과묵했으나 인정 많고 가슴 따뜻한 인물이었다 한다. 상대가 누구든 존대말을 하고,경쟁자를 비방하지 않고 정치적 입지를 위해 모략과 술수를 보인 적 없다고 한다.
혹독한 고문과 회유에도 입을 열 지 않고, 변하지 않는 굳은 신념을 끝가지 지키며, 힘 없는 민중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한 인물.
굶주림,추위에 떨며 생존해야 했던 빨치산들 빗점골에서 5년간 헌신적으로 보살피면서 활동. 이승만 대통령도 사적으로 만나고 싶어했던 인물. .................................................................
남부군 유격대 이현상도 패잔병을 수습해 잠입한 문수골. 그당시 김지회, 홍순석 등이 이끄는 문수골 빨치산은 2천명. 구례읍과 인근마을에서 빨치산의 야간 습격이 잦아지게 된다.
밤이면, 빨치산들이 점령하는 지리산 산간마을 낮이면, 토벌군들이 점령하는 지리산 산간마을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느 편도 들 수 없던 주민들.
1948년 11월 5일 토벌대 주둔, 1949년 4월 18일까지 토벌작전
토벌대의 끊임없는 소탕작전과 빨치산의 반격 빨치산 토벌 작전 일환으로 진행된 거점 분쇄작전 군작전상 지리산 주민들을 강제 이주 시킨., 소개령.
그후 은신처를 찾아서 반야봉으로 들어간, 빨치산 결국, 그곳에서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1950. 6.25 부터 1951. 1.4 후퇴 후 기승을 부린 빨치산.
남한은 임시 수도 대구를 부산으로 긴급히 이전하고 부산 중심 남북 135km 동서 90km 땅이 최후의 결전장 낙동강을 따라 최후의 방어선을 설정한., 미8군 사령관.
"이제는 더 이상 후퇴는 있을 수 없으며 우리는 이제 더 물러설 수 있는 곳도 없다.
우리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한다"
맥아더장군 인천상륙 작전 후 1951. 9.28 서울 수복 중공군과 UN군은 공방전 끝에 휴전 협정을 체결한다. 빨치산은 38선 넘어 도주하려 했지만 휴전선에서 막힌다.
태백산맥을 따라 북으로 가려던 남부군 패잔병. 퇴로가 막혀 덕유산을 거쳐서 지리산으로 잠입 산속에 숨어 게릴라전을 펼치며 살길 찾아 방황
이헌상이 이끈 빨치산 정규군 1,400 여명.,남부군. 남한에 숨어 살며 활동한 저항세력 빨치산들과 합류. 빨치산 비정규군 사상전쟁 저항세력들 중., 리더 박영발.
1954년 반야봉 빨치산 토벌군 수색대 소속 박중사 발에 밟힌건 냄새를 막기 위해 우의로 싼 사람의 변 상황보고 하고 주변을 수색해 찾아냈다는 빨치산 비트 무심코 이끼에 덮힌 바위를 밀어보니 그 안은 동굴. V자 형 천연동굴 입구는 쉽게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하게 이루어져있는 암벽동굴 속이 곧.,박영발 비트.
수색대는 동굴 속 공비 3명을 사살.
그중 하나가 <남로당 총책., 박영발> 1954년 2월 말 토벌대가 사살했다는 설. 그러나, 그 비트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반세기 세월이 흐르는 동안.,잊혀진 비트
1954년 1월 중순에 지리산 뱀사골에서 토벌대와 전투 중 자살 설도 전해져온다. 그는 사살된 것일까? 아니면, 자살한 걸까?
.....박영발(朴榮發 , 1913년 ~ 1954년)..... 일제 강점기와 미군정 시기 사회주의 운동가 경북 봉화 출신으로 한국 전쟁 유격전을 지휘
1930년대 봉화 지역을 중심으로 좌익 항일 운동
1940년대 만주에서 항일 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고문을 받아 1945년 경에는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1945년 태평양 전쟁후 미군정 초기에 좌익 운동이 활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서 토목노조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에는 남조선로동당을 창당하여 간부가 되었다.
남로당 활동이 불법화되면서 1947년 경에 월북하였고, 박헌영 추천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
1950년 조선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남하하였을 때 합법적으로 결성된 조선로동당 전남도당 위원장에 올랐다. 인민군이 후퇴하자 김선우와 함께 전남지역 유격전을 지휘했다.
박영발은 이현상의 남부군 활동을 견제한 인물 1951년에 남부군의 이현상이 제안한 유격대 개편안을 방준표와 함께 반대하는 등 이현상과는 대치되었던 인물
1953년에 이현상이 사망하기 직전 제5지구당이 해체될 때 이현상을 비판하여 평당원으로 강등시키는데 중요한 역할. 1954년 2월 지리산 뱀사골에서 토벌대와 전투 중 사살되었다.
정확한 사망 시점과 경위에 대해서는 증언이 다소 엇갈린다. 토벌대를 이끈 백선엽은 그를 정신력이 대단했던 인물로 평가
2003년 평양 애국렬사릉에 이현상, 방준표과 함께 박영발의 가묘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
...............백선엽 장군(1920년생)..................... 32세 최연소 참모총장, 33세 우리나라 최초 4성 장군 6.25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한미동맹 용어., 첫 사용자 아이젠 대통령을 만나 방위조약 체결을 요구 한것이 시발
주한 미군 사령관이 부임 하거나 이임 할때 인사말 "존경하는 백선엽 장군님" 이라고시작하는 독특한 전통 담당 직원들의 필수 연수 코스가 한국의 백장군 찾아뵙기.
주한 미군 장군 전원이 참석하는 6.25 전쟁 전적지 견학에는 백선엽 장군을 초대 한다.
백선엽 장군은 6.25 전쟁 60주년을 맞아 국내 첫 명예 "원수" 로 추대 될 예정이다. ........................................................
박영발과 함께 일했던 박남진 씨 증언을 바탕으로 소년 빨치산 출신이었던 김영승(73세)씨가 찾아냈다. 박영발 비트 위치를 증언한 박남진 씨(84. 54년 12월 체포)
...............박남진 씨., 증언 내용...................... 1953년 9월 18일 이현상 남부군 사령관이 빗점골에서 사망하자 박 위원장의 보위대가 반야봉 아래 암벽지대에 비트를 마련했다. 그해 10월 말부터 다음해 2월 박 위원장이 사망할 때까지 4개월 박위원장 일행이 이용했던 빨치산 전남도당 지휘본부로 알려졌다.
이현상 남부군 사령관은 비교적 건강한 체력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임시 비트를 이용한 반면, 박 위원장은 일제로부터 받은 고문후유증 때문에 한쪽 다리가 불편해 비트 중심으로 활동을 펼쳤다.
하여, 김선우 남로당 전남도당 부위원장은 박위원장을 대신해 전남 유격대를 이끌었고 박 위원장은 이곳 비트에서 조국출판사를 운영 유인물 등을 찍어내며 지휘부 역할을 수행했다.
이 동굴에서 박 위원장 이외에 연락병, 여성비서, 보위병, 무전사, 견습 무전사, 의사, 간호사 등 8명이 거주했던 곳.
일반인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교묘한 V자 형 천연동굴 V자 오른쪽 꼭지점에서 중앙을 향해 2.3m를 타고 내려가 다시 3.2m쯤 되는 왼쪽 석벽을 타고 올라가야., 동굴 입구 ...............................................................................
묘향암이 저만큼 보일 때 함박골로 내려가야 하는 길. 박영발 비트로 가는 길목 입구.
해발 1500m에 위치한 암자.,묘향암 '해발 1450m' 법계사보다 더 높은 위치. 반선-심마니능선-반야봉- 묘향암-삼도봉
지리산 종주 능선에서 벗어난 묘향암 가는 길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곳에 위치. 지리산 매니아들이 하룻밤 묵어가기 위해 찾는 곳.
길 없는 길.. 엉클린 나무.. 흔적없는 바람.. 이낀 묻은 바위.. 발길을 붙잡는 넝쿨..
'박영발 비트 '., 가는 길.
(이런 길을 하룻밤 사이에 내달려 다녔다니 요즈음 생각으로는 그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거대한 암반 사이에서 나오는 한기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만한 돌틈. ㄱ자로 꺽여 낮은 포복으로 이어진 굴.
듬성듬성 버려진 전선 짝 없는 검정 고무신
깨어진 빈 병 녹이 낀 폐건전지 몸체 사라진 밧데리
(어떻게 이 좁은 공간에서 7~8 명이 동거할 수 있었을까?) (무엇이 그들을 이런 산속, 비좁은 돌 틈으로 내몰았을까?) (비트 속 오싹한 냉기 만큼이나 가슴 속 한쪽이 눅눅해진다)
'그들은 음습한 비트 속에서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운걸까?'
비전향 장기수들의 모임인., 통일광장 지리산 역사기행에 참가해 탐사했던., 비트.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박영발 위원장의 은신처
박영발 비트는 2005년 2월에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광주지역 인터넷신문 <시민의 소리>가 최초로 보도.
조선출판사를 운영하며 북에서 내려온 지령을 담아 유인물을 만들 때 사용한 등사기가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50년 전 주인을 잃은 고무신 한짝. 지리산 능선, 골짝 돌부리 풀뿌리마다 붉은 피로 물들이며 흙 한 줌으로 변해간 동지들이여...”-옛 동지 추모 위령제 글에서 -
지금은 백발이 성성한 빨치산 출신 옛 동지들.
빨치산 당사자들과 공작원 출신 비전향장기수들, 시민사회단체 50 여명은 지리산 성산재 고개에 모여 뱀사골 인근 반야봉 함박골 박영발 비트를 찾아갔었다
연로해 산을 오르지 못하는 원로들은 성산재에 남아 심장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지리산을 바라다 보았다. 비트 안에는 아직도 그당시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유품들
그러나, 70대 후반의 고령 빨치산 출신들. 약 2시간 가량을 걸어 임걸령 샘까지 동행.
반야봉 중간 허리 노루목에서 삼도봉으로 가는 길목 함박골’
묘향암 스님들 만이 다니는 인적이 뜸한 산길이., 함박골.
함박골로 들어서려면 이 길 막다른 곳에서 방향을 돌려 수풀이 우거진 오른쪽 험한 비탈길로 내려가야만 하는데, 산을 잘 타지 못하는 몇몇 일행은 발길을 돌려야 만 했다.
김영승, 기세문, 양희철 선생 등 젊은 층 비전향장기수들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 권오헌 회장, 전국연합 노수희 의장, 그리고 광주지역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20명은 수풀을 헤치고 썩은 나무를 치워 길을 만들어가며 함박골 비탈길을 내려갔다.
날쌘 동작으로 산비탈을 내려가는 김영승 씨를 따라 사납게 돋은 풀이 정강이를 베는 지도 모르고 약 40분 정신 없이 걷자 비트로 사용한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치처럼 엉킨 수풀이 시야를 가려 동굴이 아니라 보통 검은 빛깔의 큰 바위라고 생각될 정도의 비트. 53년 10월부터 54년 2월 22일 사살될 때까지 은신처
그후 반세기 세월이 흐르는 동안 세인으로부터 잊혀진.,박영발 비트 2005년 2월 그 모습을 드러낸.,비트.
비트로 들어가려면 높이 3m 가량의 미끄러운 벽을 타고 내려가거나 동굴 아래 하수관 모양의 터널을 지나야 한다. 표준 성인 남성이 낮은 포복 자세로 기어가기에 알맞은 크기.
좁은 틈새 사이를 두고 구분된 주거 공간과 통신 공간
통신용 공간은 성인 남자 2명이 누울 수 있을 정도였다. 간이 사다리를 타고 동굴안 은신처로 올라가자 컴컴한 어둠 50년을 묵은 듯한 퀴퀴한 냄새와 함께 온 몸을 휘감는 한기.
초여름인데도 은신처 안에 들어가자 하얗게 입김 2평 가량 공간에 허리를 펼 수도 없는 낮은 천장. 토벌대 수류탄에 맞아 여기저기 무너진 돌무더기.
무전을 하는데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깃줄 흰색 주사용 앰플, 깨진 갈색 병, 깡통, 50여 개 배터리 그리고 바닥이 반으로 갈라진 고무신 한 짝
치료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사약
이 굴은 박영발 위원장을 호위하고 있는 보위대가 반야봉 허리를 훑어 발견한 동굴로 8명의 거주공간. 박영발 외 무전사, 여성비서, 견습무전사 의료병 등
북측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지령 등을 모아 유인물 제작. 비트에서 10여m 떨어진 곳에는 구들장 아궁이 주거공간 아궁이에 불을 지펴 천막 치고 겨울을 지낸 곳인듯 보인다.
동굴을 나와 50m 내려가니 3층으로 쌓아올린 구들장터’ 구들장터에서 오른쪽 10m 지점에 불을 땐 아궁이도 발견.
아궁이에 불을 때면 돌과 흙이 달아 따뜻해진다. 여기에 천막을 세우면 추운 겨울도 지낼 수 있다. 구들장터에선 인쇄하는데 사용했던 등사기도 발견.
등사기와 함께 발견된 잉크통에는 검은색 잉크 고스란히 담겨있어 일행을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모든 생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빨치산의 유골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토벌대가 시신을 산내면 초등학교에 전시후 빨치산 포로을 불러 신원을 확인하고 처분한 탓.
54년 2월 22일, 동굴을 발견한 군경이 던진 수류탄으로 동굴 안에서 죽었으며 박영발 여성비서 이정례 만 생존.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사경을 헤매다 보위대에게 발견.
이정례는 이후 화개재에서 빨치산 활동 중 뱀사골에서 잠복한 토벌대에게 사살 당한다.
매일 토벌대의 동태를 감시하던 보위대는 55년까지 전라도 조계산에서 싸우다 전멸.
"두 번 다시 비극적 역사 되풀이되지 않기를..."
지리산에 울려 퍼진 살아남은 빨치산의 노래 마치 50년 전 그 때로 돌아간 듯 굳은 표정들. 동지들의 흔적들을 어루만지며 기억을 반추했고 청년들은 경건하게 구들장 위에 제사상을 차렸다.
굴비, 완두콩밥, 돼지고기, 과일, 떡 등 정성스럽게 마련한 음식이 올라간 제사상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지리산에서 숨을 거둔 넋들을 위로하려는 듯. ‘백두산 불로초’ 술이 그 넋들에게 바쳐졌다.
김영승 씨는 박영발 위원장의 비트 외에 백운산, 지리산 문수골, 피아골, 천왕산골, 장흥 유치내산 등에 숨겨진 비트를 찾고 있다.
이제 전국에 확인된 빨치산 생존자는 30 여명,
물론 전력을 숨기고 사는 빨치산까지 포함되면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들 대부분 70 - 80세 사라져가는 반쪽 역사를 복원할 시간은 많지 않다.
사회적 여건이 성숙될 때까지 동굴 개방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동굴에서 발견된 유품들은 그대로 두어 역사기행을 위해 비트 방문객에게 전시할 계획.
위령제를 마치고 일몰시간 전에 하산하기 위해 일행은 서둘러 3시간 30분 만에 노고단에 도착.
비전향장기수들의 모임인 통일광장이 주최한 지리산 역사기행에 참석한 시민단체와 옛 빨치산 피아골 부근 산장에 여정을 풀고 옛 전우들과 해후.
저녁 9시부터 시작된 모임에서 빨치산 출신들은 자신들이 활동한 지역과 당시 전투상황을 소개했고 빨치산들이 즐겨 부르던 태백산에 눈 나린다를 합창.
......태백산맥........... 태백산맥에 눈 내린다. 총을 들어라 출정이다. 눈보라는 밀림에 우나 마음속엔 피 끓는다.
높고 높은 산을 넘어 어둠에 뭍혀서 사라진 길을 열고 빨치산이 원수를 찾아서
령을 내린다 령을 내린다 령을 내린다 ...............
빨치산들이 출정 전 불렀던 노래이다. 오늘 나가면 과연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순간...총을 멘 빨치산들은 죽음을 눈앞에 둔 마지막 심경을 달랬던 노래
사전모임에는 전남도당에서 활동했던 정운창 (77,)씨 남편따라 입산 이현상 부대에서 활동한 이옥자(78) 여인. 그 부부 빨치산이 참석해 여러 참석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비전향 장기수였던 김용선 씨의 아들 김병제 씨 전라도당 빨치산이었던 양혜정 씨의 아들 양근서 씨 빨치산 후손들도 현장 답사를 함께 해 눈길을 끌었다.
........................빨치산 [partisan]........................... 프랑스어 동지 또는 당파라는 뜻말 parti에서 유래되었다. 비정규군의 별칭.스페인어에서 유래한 게릴라(소규모 전투).
정규군과는 별도로 적의 배후에서 통신소, 기지, 병기·연료·탄약 물자를 저장하는 곳, 교통의 요지 등 경비 허술한 곳을 주로 공격.
빨치산은 일반 민중 속에 숨어 활동하며. 일반 민중의 협조가 없이는 활동이 안되며, 활동지역 지형 특색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항일무장투쟁을 하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전후 반(反)공산주의 빨치산과 공산주의 빨치산으로 나뉜다. 1950. 6·25 전후에는 지리산 부근을 근거지로 활동했던 공비.
6·25 전쟁 중 후방교란 목적으로 다양한 게릴라전 국제 연합(UN)군 승리로 전쟁이 끝나자 괴멸되었다. .....................................................................
전쟁은 이기는 쪽에서 승리로 끝나는 것만은 아니다. 지나간 반세기 간 우리나라 민족이 겪어 온 분단의 아픔. 전쟁 유가족, 이산 가족에게는 치유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그러한 아픔과 고통이 회복되어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쟁이.,끝난다. '박영발 비트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지리산 바른재(한신)능선(음정-비린내골- 바른재-백무동) 지리산 그 아름다운 능선과 계곡에.,피가 얼룩졌던 시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산중에서 방황하면서 죽어갔다.
그로부터 반세기 세월이 흐른 후, 사랑도 미움도 환희도 분노도 없이 역사의 강물 위로 세월은 흘러간다.
1949년 이래 5년간 1만 7,17회 교전에서 피아 2만명이 죽어간 그 능선과 계곡들. 요즘 테마여행을 위한 관광코스로 탈바꿈
지리산 빨치산과 토벌대의 이동루트 경남은 관광상품으로 개발할 계획이다.
고증을 통해., '산청 함양 하동'군에서 20곳의 빨치산 관련유적을 찾아낸 경남 2013년까지그 일대를 주제공원으로 꾸민다.
'빨치산 루트' 6개 노선, 34km 관광코스 옛 빨치산과 토벌대들이 옛싸움터를 증언
노고단- 반야봉- 삼각고지- 덕평봉- 세석평전 -삼신봉 - 천왕봉 - 왕등재로 이어지는, 지리산 주능선 계곡 곳곳에 남아있는, '빨치산 비트' 흔적
인민재판 즉결처형장.,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하정계곡 남로당 경남도당과 빨치산의 야전병원, 암반굴 아지트, 방앗간 등이 있던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등 빨치산 거점.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 사살된.,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등, 격전지.
경남은 이들 유적지를 발굴하기 위해 2011년 11월 군별로 고증위원회를 구성.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이들과 토벌대에 참가했던 이들로부터 증언을 듣고, 각 경찰서에 남아 있는 관련기록을 면밀히 조사.
그당시 빨치산 전사(戰史) 편찬 임무를 맡았던.,이태 빨치산 200 인 활동 기록을 딸에게 물려준 자료도 활용. 유적지 확인 과정에서는 아이러니컬한 장면도 빚어졌다.
1950년대 '적'으로 총부리를 겨눴던 옛 빨치산 전사들. 당시 토벌대 참가자들이 함께 옛 격전지를 찾아다니며 피비린내 나는 옛 기억을 더듬으며.,빨치산 루트를 답사
'남부군'작가 이태씨가 남긴 기록이 큰 도움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 솔밭 아래., 40여기 무덤 빨치산이 주민에게 구덩이를 파게한 뒤 집단 학살 훗날, 시신 연고자가 나서지 않아 마을 주민들이 수습
그러나, 마을 주민들조차 전혀 알지 못했던.,집단 학살. 군자리 아랫마을' 삼정리 하정계곡도 인민재판 처형장. "계곡 바위 아래마다 송장썩는 냄새 때문에 코가 아팠다"
빨치산 비트는 하동 함양 산청 3개 군에 산재 유적지 대부분 기존의 등산로와 동떨어져 있어 강행군을 한다고 해도 하루 2, 3 곳을 보기 어렵다.
산청군 관계자 - "등산로 주변이나 별도의 장소에 유적들을 모형으로 복원해놓고 그 가운데 관광객이 직접 가보고 싶은 곳만 가보게 하는 방안을 검토 중".
덧 말.
박영발 비트를 찾아낸.,'옛 소년 빨치산' 김영승 1954년 3월 전남 광양 백운산 옥룡골에서 붙잡혀 총 35년 9개월간 복역한 후 1989년 9월에 출소했다.
'비전향 장기수 모임' 통일광장에서 활동하며 빨치산 유적지를 탐사한다.
.............김영승 증언.................
"1953년 9월 중순 백운사네 있었을때 전남 빨치산 사령관 김선우 동지와 같이 박영발, 이현상 동지를 만나 하룻밤을 잤어."
"박영발 동지를 보위하고 뱀사골로 넘어왔어. 이현상 동지는 1953년 9월 18일 빗점골에서 매복에 걸려 일행 10명 중 한 사람만 남고 희생.
이현상 동지는 거기에서 돌아가셨고 박영발 위원장은 토끼봉 비트로 모셨어.
토끼봉 임시 비트에 머물며 박영발 보위대 동지들이 반야봉 산중 허리를 전부 다 뒤져서 발견한 천연동굴. '1953년 10월경 ~ 1954년 2월 22일' 그곳에서 살았어.
그 안에 무전사, 간호사, 4명이 있었는데 족적이 발견되어 그날 모두 다 희생된거야. 비트 안에서 조국출판사를 만들어 등사했어.
거기서 북조선 방송도 다 들어 그 방송을 듣고 등사를 하는거야 출판물로 각도에 알리는 일을 한거야."
거기에 박영발 위원장 비서였던, 이정례 동지.
수류탄이 안에서 터져 사경을 헤메고 있었는데 이주현 동지가 밥해가지고 오다 발견해 살아났어. 그러나, 화개재를 넘다 토벌대를 만나 둘 다 죽었지.
동굴 옆에 구들장터가 있어 토벌군이 없을 때 살던 곳이야. 거기서 살아남은 동지는 약 60명.
그후 전라도 조계산 야산으로 들어갔어. 1955년 마지막까지 토발군과 싸우다 전멸. .......................................................
♨출처/산사모 2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