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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603. [역경의 열매] 김영한 (1-30) 미약한 내게 긍휼과 은총 베풀어 인도하신 하나님
12살 때 동네 아이들과 바다에서 수영하다
익사 직전 구출 받은 주님의 말 없는 간섭
하나님 몰랐지만 신앙의 씨앗 자라고 있어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이 지난 19일 서울 서초구 기독교학술원 집무실에서 미소짓고 있다. 양민경 기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 구절은 내 인생의 나침반이요 좌우명이 된 말씀이다. 내 초중학교 시절은 ‘경외(敬畏)의 씨가 발아(發芽)되지 않은 상태’로 정의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마음속엔 경외의 씨가 있었다. 교회 권사였던 외할머니의 기도가 있어서다.
어린 시절 하나님을 모르고 자란 나는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없이 교회를 다녔다. 당시 동네교회 전도대가 집 근처에 와 전도 찬송을 자주 불렀던 기억이 난다. 그 찬송 소리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골방으로 들어가 기도했다. 예수님의 재림 임박을 느낀 것이다. 어린 마음에도 찬송을 들으니 신성한 것이 느껴졌다. 신성한 것은 심어진 것이다. 돌이켜 보면 외할머니의 기도로 내 마음에 각인된 신앙의 씨앗이 찬송의 영향으로 꿈틀거린 건 아닌가 싶다.
나는 부산 서구 아미동에서 나고 자랐다. 동네 아이들과 같이 여름에 산고개 너머 감천 바닷가로 수영하러 자주 갔다. 초등학교 5학년인 12살 때 나는 여기서 익사 직전 구출 받은 기억이 있다. 지금은 화력발전소가 세워진 용굴은 바위로 이뤄져 놀기 참 좋았으나 수심이 깊었다. 여느 때처럼 수영하며 놀다 사촌 동생이 물에 빠졌다. 그를 건지려고 팔을 내밀었다가 나도 같이 빠졌다. 함께 허우적거리며 익사 직전까지 이르렀는데 그 순간 튜브를 메고 지나가던 어른이 튜브를 던져줬다. 그 튜브를 잡고 머리를 밖으로 내고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이어 사촌 동생도 구출됐다.
그 와중에 바닷물을 많이 들이킨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며칠간 아팠다. 지나가던 어른이 돕지 않았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당시 상황을 회고할 때면 하나님 섭리를 느낀다. 나일강에 버려진 아기 모세가 바로의 공주에 의해 구출된 이야기가 떠오른다.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출 2:10)
당시엔 그저 운이 좋아 살아났다고 생각했다. 교회에 나가긴 했으나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없었다. 신앙이 좋은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내게 교회에 열심히 나가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하나님과 예수님은 내게 하나의 종교적 대상으로 다가왔다. 주일학교 예배에서도 아무런 은혜를 느끼지 못했다. 예배는 그저 하나의 종교적인 의식일 뿐이었다.
이제 팔순이 가까운 철든 눈으로 어린 시절을 회상해보면 익사 직전 구출 받은 건 하나님의 말 없는 간섭이었다. 어린 나를 주님이 돌아보신 것이다. 이런 경험은 초등학교 5~6학년 시절에도 있었다. 성실했으나 반장감은 아니었던 나를 담임교사가 반장으로 임명했다. 더 똑똑한 아이들 가운데 부족한 자를 미쁘게 본 것이다.
토성초등학교와 경남중학교 시절 나는 하나님에 대한 아무런 의식이 없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미약한 나를 알고 긍휼을 베풀어 인도하셨다. 소년인 내가 미래의 위대한 인간상에 대한 상상력과 소명감을 갖도록 해주셨다. 또 주어진 과제와 일에 대한 성실함을 갖춰나가는 등 일반 은총도 베푸셨다.
약력=1946년생, 서울대 철학과 졸업, 독일 하이델베르크대 대학원 신학박사, 숭실대 교목실장,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소장,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 숭실대 초대 기독교학대학원 원장 역임. 현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석좌교수, 숭실대 명예교수, 샬롬나비 상임대표
* [역경의 열매] 김영한 (1) 미약한 내게 긍휼과 은총 베풀어 인도하신 하나님
* [역경의 열매] 김영한 (2) 대를 이은 외할머니 신앙… 눈병 통해 하나님 찾아와
* [역경의 열매] 김영한 (3) 인격적 신앙 가지고부터 늘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노력
* [역경의 열매] 김영한 (4) '하나님 중심의 신앙 실천'에 열정 바친 대학 생활
* [역경의 열매] 김영한 (5) 충현교회 출석… '천국 일꾼' 마음으로 고등부 교사로 봉사
* [역경의 열매] 김영한 (6) 예비하시는 하나님 은혜로 순조로운 독일 유학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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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역경의 열매] 김영한 (2) 대를 이은 외할머니 신앙… 눈병 통해 하나님 찾아와
고1 때 결막염 걸려 인생까지 고민
“기도하고 주님께 모두 의지하라”
가족들 위로와 권유로 주님께 인도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이 회심 이후 즐겨 읽던 외할머니의 낡은 성경책 표지. 오른쪽 사진은 이 성경책 내부 모습으로 왼쪽부터 읽는 ‘세로줄 성경’이다. 김영한 원장 제공
우리 가족의 신앙은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측 교회 권사인 외할머니 신앙이 대를 이어 전해졌다. 나는 부산 동구 범일동 자성대교회 권사인 외할머니가 읽었던 옛 ‘한글 성경’을 매일 읽는다. 외할머니의 신앙은 어머니와 여동생을 거쳐 내게 전해졌다.
하나님은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 시절 찾아오셨다. 17살이었던 경남고 1학년 때 눈에 결막염이 생겨서 고생했다. 시력이 나빠졌고 눈도 따가워 책을 읽을 수조차 없었다. 불안감이 엄습하면서 좌절감이 들었다. 병원 치료는 받았으나 상태는 쉬 개선되지 않았다. 인생의 큰 위기가 닥쳤음을 직감했다.
‘인간은 왜 이렇게 고통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가.’ 인생에 관한 여러 질문이 생기고 만사가 부정적으로 느껴졌다. 당시 내 영적 상태는 다음의 시편 본문과 같았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 107:10~11)
눈병을 넘어 인생까지 고민하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왜 그렇게 고민하고 있냐”며 “하나님께 의지하라”고 위로했다. 여동생도 “기도하고 주님께 모든 아픔을 맡기라”고 권했다. 긴박했던 나는 예배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동네 교회로 들어가 홀로 기도했다. 당시 예배당에는 한쪽에서 성가대가 성가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다른 한쪽 끝에 자리 잡고 홀로 앉아 하나님을 구했다. 하나님이 눈병을 고쳐주고 인생을 인도해주길 간구하는 기도였다.
이 기도로 나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은총을 입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지금도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구세주(요 3:3)라는 참 진리를 시련 가운데 믿은 것이다. 이후 외할머니가 읽던 구약만 남은 옛 글 성경을 읽으며 외할머니의 신앙도 확인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내면적 경험이 있은 뒤로 눈의 결막염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없어졌다. 결막염도 이내 사라졌다. 이와 관련한 시편 말씀도 떠오른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19~20)
이후 친구 소개로 교회 성경 연구 모임에 들어갔다. 거기서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 우리 속에 내주케 하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중생의 도리를 배웠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영적 진리를 배우며 내 속에 있던 하나님 경외의 씨앗이 발아했다. 바람은 보이지 않으나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도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내면에 임재하는 사건이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중생 사건이 내 마음속에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눈병으로 외할머니를 통해 심어진 신앙의 씨앗이 내 안에서 발아하게 했다. 어머니와 여동생의 권유로 예민한 시기의 나를 주님께 인도한 것이다. 되돌아보면 청소년 시절 아픔과 좌절을 겪던 내게 주님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해 방황으로 치닫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3) 인격적 신앙 가지고부터 늘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노력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난 후
매일 성경 읽고 말씀 위주 신앙생활
정통신학 지키려는 목사님 설교 영향
신학 공부해 정통 신앙 소명감 생겨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의 서울대 철학과 재학 시절 모습.
주님은 인생의 여명기인 17세 때 다른 길로 들지 않도록 나를 찾아오셨다. 돌아보면 배후에서 내 인생길을 인도한 게 아닌가 싶다. 내게 청소년 시절 경건의 비밀을 알게 해준 것이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교회를 다니긴 했으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했기에 인생에 관여치 않고 저 멀리 하늘에서 인간을 내려다보는 무심한 분으로만 알았다. 믿음이 없으니 교회 설교도 마음에 전혀 열매를 맺지 못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중생의 진리와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을 알게 된 후에야 나와 우리에게 가까운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신앙’이 생겼다.
‘하나님이 보낸 성령이 우리 속에 내주하며 중생의 삶을 살게 한다’는 건 내게 단순한 지식이 아니었다. 예수님에 대한 인격적인 인정이며 영접이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으로 믿어진 후로 매일 새벽에 성경을 읽었다. 말씀 위주의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주님에 대한 인격적 신앙은 그분이 내려준 ‘성별(聖別)의 은혜’였다. 교회로 나가 혼자 기도하고 부흥집회와 기도원 집회도 다녔다. 1960년대 한국교회엔 심령부흥회와 기도원 집회에서 성령 운동이 힘차게 일어났다. 회심과 치유의 역사, 방언 체험이 일어나는 걸 보며 이런 현상이 신약성경에 기록된 것임을 인정하고 말씀에 입각한 신앙생활에 힘썼다.
말씀에 입각한 인격적 신앙으로 바뀐 뒤로 매일 새벽에 성경을 읽고 기도하니 마음속에 거룩함을 체험할 수 있었다.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앎으로써 영적 힘도 얻었다. 하나님을 알고 자라가는 말씀 신앙으로 자리 잡는 과정이었다. 새벽기도뿐 아니라 철야기도회에도 나갔다. 부산 서구 아미동 성도교회의 ‘기둥 권사님’들에게 여러 권면과 기도를 받으면서 신앙적으로 성장했다. 세속적 욕망에 휩쓸리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을 구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 건 청소년기에 찾아와 준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라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코람데오(coram deo·하나님 앞에서) 신앙’이다. 이는 삶의 매 순간 하나님 면전에 서는 인격적 신앙이다. 삶의 모든 차원에서 함께하는 하나님을 마주하면서 살았던 종교개혁자를 본받아 나 역시 일상에서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노력했다.
주일마다 출석한 성도교회에서 예배할 때 종종 고신대 조직신학 교수인 이상근 목사가 설교했다. 매우 학술적인 설교였으나 정통신학을 지키려는 열정이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량교회에서 들은 한상동 목사의 설교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킨 예수가 중요하다”는 가르침이다.
청소년 시절부터 ‘자유주의 신학이 밀려와 교회를 어지럽힌다’는 설교를 들었다. 신학을 공부해 정통 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소명감이 생겼다. 마음에 심긴 이 소명감은 하나님이 준 것으로 느껴졌다. 신학을 공부하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 일반 학문인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생각도 했다. 청소년기에 인생 방향이 정해진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4) ‘하나님 중심의 신앙 실천’에 열정 바친 대학 생활
말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중생의 은총 이후 신앙생활 나침반 삼아
늘 기도로 학업 준비하며 기독학생회 섬겨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이 1971년 2월 서울 종로구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졸업식 당시 찍은 사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들어가니 기독교학생회가 있었고 복음주의적 보수 신앙을 가진 선배들의 신앙모임도 있었다. 기독 학생들이 매일 강의실에 모여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정오 기도회를 가진 것은 신앙생활에 큰 힘이 됐다. 철학을 전공, 종교학과에서 신학을 부전공하면서 세상 학문 책을 읽기 전에 늘 기도하고 성경을 먼저 읽었다. 당시 종교학과 신사훈 교수의 영향이 컸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마 6:33)는 대학생 시절 나를 붙잡고 미래 삶의 방향을 정해준 말씀이다. 17살 때 중생 체험 이전에는 교회에 나갔으나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신앙이 없었다. 중생의 은총 이후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신앙과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의 나침반이 생긴 것이다. 이 구절은 대학에서 생활하던 젊은 시절 내 열정을 불태우는 영적 활력이 되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문선명 통일교가 대학가에 침투해 원리연구회를 조직하고 전도 활동을 했다. 이때 서울대 문리대 종교학과의 신사훈 교수는 기독 학생에게 정통 신학을 가르쳤다. 미국 드루대 박사 출신의 신 교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능숙했고 바울 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초교파적으로 교회 친화적 신앙 운동을 펼친 신학자이기도 하다. 기독학생회는 그를 강사로 모시고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강당에서 통일교 비판 강연회를 개최했다. 그런데 강연 도중 통일교도들이 똥바가지를 신 교수 얼굴에 뒤집어씌우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통일교 활동을 제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는 ‘주간 잡지’가 젊은 여성의 선정적인 모습을 표지에 장식했다. 서울대 기독 학생은 성도덕을 퇴폐화시키는 이런 행위에 항의했다. 문리대 학생회 이름으로 주간 잡지사의 모든 옐로페이퍼 수십 개를 모아 동숭동 4·19기념탑 앞에서 소각식을 거행했다. 시민들에게 건강한 성도덕 의식을 알리자는 의도였다.
매해 7월 방학 기간 전국 기독 학생을 초청해 서울 광진구 장로회신학대에서 ‘전국 기독 학생 대회’를 개최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내걸고 동료 대학생의 복음주의 신앙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대회 주요 강사는 한철하 아신대 초대학장과 김의환 전 총신대 총장이었다. 당시 서대문에서 순복음교회를 개척해 성령 운동을 한 젊은 목회자인 조용기 목사도 강사로 모셨다. 그는 체험적인 신앙을 설교해 대학생에게 감동을 줬고 훗날 여의도로 이전해 세계적인 교회를 이뤘다.
자유주의 사상에 대항해 하나님 중심 신앙을 실천하는 것은 내 대학 생활의 목표였다. 이를 위해 기독학생회를 열심히 섬겼다. 이렇듯 보수 신앙으로 사상의 방향을 설정한 건 출신 교회에서 배운 칼뱅주의 신앙 덕이었다. 이때의 믿음이 신앙의 울타리 역할을 했다. 1960년대에는 독일에서는 루돌프 불트만의 비신화론 신학,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 등이 신학계를 주도했다. 미국에서는 폴 밴뷰런, 토머스 알타이저의 사신(死神)론 신학, 하비 콕스의 세속화 신학,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종교 혼합운동, 종교 다원주의가 세계 교회를 주도했다. 이에 성경적으로 대응하는 정통 신학이 요청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보수 교회는 독일 신학을 혐오했으나 나는 독일로 가 이들의 철학과 신학을 연구하기로 했다. 이를 공부해 정통 개혁신학을 변호하겠다는 다짐이었다. 독일 유학의 뜻을 놓고 홀로 예배당에서 기도하곤 했다. 독일문화연구원을 다니며 독문 강독과 독일어 회화도 열심히 준비했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5) 충현교회 출석… ‘천국 일꾼’ 마음으로 고등부 교사로 봉사
4학년 때 합동 측 목사후보생 시험 통과
졸업과 동시에 총신대 신학대학원 입학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 장학생으로 유학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이 대학 시절 다니던 충현교회의 현재 모습. 충무로5가에 있던 교회는 1987년 서울 강남구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국민일보DB
21세에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대학을 다니며 충현교회로 출석교회를 정했다. 당시 충현교회는 충무로5가에 있었다. 수천 명이 모여 예배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 측 교단의 대표적 교회였다. 당시 충현교회를 출석교회로 택한 건 내가 머물던 고모 댁이 교회 지척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모가 충현교회에 출석했기에 나 역시 자연스레 충현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충현교회는 이종윤 신성종 이종표 김중석 이성근 오성종 육호기 유창무 목사와 김영삼 김차생 손경수 장로 등의 신앙 인물을 배출했다.
충현교회 담임인 김창인 목사는 말씀에 입각해 쉽게 설교하는 목회자였다. 예장합동에서 존경받는 목회자이기도 했다. 그의 교계 비중은 당시 저동 영락교회의 한경직 목사, 장충동 경동교회의 강원용 목사에 필적했다. 김창인 목사는 본래 예장고신 측이었는데 고신 측이 합동 측과 통합했다 다시 복귀하자 이에 거부하여 합동 측에 남았다.
기억에 남는 일화도 있다. 충현교회에서 ‘전국목사장로기도회’가 있었을 때다. 기도회 휴식시간에 총회 발간 서적을 파느라 강단에서 현금이 오가는 걸 본 김 목사는 “교회당에서 장사한다”고 대로(大怒)했다. 그가 책들이 놓인 책상을 뒤엎은 기억이 선하다. 그만큼 신앙의 담대함과 윤리성에 예민한 목회자였다. 나는 김창인 목사의 설교를 매 주일 들으며 성경대로 믿는 개혁 신앙을 확고히 했다. 하지만 교회 위주의 신앙생활을 강조하는 건 개인주의적 협착성에 머무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적 칼뱅주의는 교회를 중심에 두면서도 교회주의에 매이지 않는다. 나는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신(新)칼뱅주의’로 확장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졌다.
김 목사는 젊은 시절 얻은 폐병과 투병하느라 공부를 많이 하진 못했다고 하지만 말씀을 깊이 성찰하는 그의 설교는 큰 영적 감화력을 줬다. 그는 미국에서 인정받지 못한 신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게 문제가 되자 당회장직에 사표를 내고 근신하는 도덕적 순결성을 보여줬다. 나는 교회 대학부에서 활동하면서 고등부 교사로 섬겼다. ‘천국 일꾼’이란 마음으로 열심히 봉사했다.
대학부 2학년 때 미국 템플대에서 한국교회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개혁신학자 김의환 목사가 대학부 지도를 위해 부임했다. 매일 특강 형식의 강의로 좋은 신앙의 방향을 제시해줬다. 이때 그는 열린 개혁 신앙을 가르쳐줬다. 당시 세속주의와 사신론, 윤성범 감리교신학대 교수와 서남동 연세대 교수의 비성경적 견해를 비판하면서 올바른 개혁 신앙을 논했다. 김의환 목사는 1974년 스위스에서 열린 로잔대회에 한국교회 예장합동 측 대표로 참가했다. 로잔운동이 복음 전파에 우선성을 부여해야 하며 성경의 무오성에 기초한 선교 활동을 할 것을 천명했다.
대학 4학년이 되면서 충현교회 추천으로 합동 측 목사후보생 시험을 쳤다. 주로 성경에 대한 질문이었다. 목사후보생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성경 상식이라 무난히 통과했다. 1971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신대원 첫 학기에 김의환 박형룡 박아론 교수의 강의를 인상 깊게 들었다. 1학기만 수강하고 독일 초청 장학생에 선발돼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성주의에 기운 독일 신학에 대한 보수 교단의 우려에도 그해 6월 7일 독일 유학 여정에 올랐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6) 예비하시는 하나님 은혜로 순조로운 독일 유학 준비
유학 꿈 품고 대학교 1학년부터 준비
문화원 다니며 독문 해석 과정 이수
독일 대사관의 장학생 선발 시험 응시
독일 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최종 선발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이 1971년 언어 연수차 4개월간 체류한 독일 슈베비슈할 가정집 숙소 앞에서 찍은 사진.
하나님은 대학 졸업 후 25세의 나이로 독일에서 유학하도록 길을 열어주셨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독일 유학 준비를 위해 독일문화원에 다니면서 독문 해석 고급과정을 이수했다. 남산에 있는 ‘괴테 인스티튜트’에서 독일어 회화도 익혔다. 당시는 이곳의 문을 연 지 얼마 안 돼 다니는 이들이 적은 편이었다. 독일 유학에 뜻을 품었던 나는 독일어 작문과 회화를 익히는 데 최선을 다했다. 독일어는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했고 대입 시험에서 선택 과목으로 시험을 쳤기에 대학 입학 이후엔 독일 철학 원서를 무난히 읽을 수 있었다.
당시는 해외 유학이 보편화하지 않았던 때다. 독일 유학의 최선의 길은 독일대사관의 장학생 선발시험에 응시해 독일 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선발되는 것이었다. 선발 고시는 적성고사와 면접고사로 이뤄졌다. 적성고사에 응시한 이들은 대체로 나보다 선배였다. 심지어 대학 전임강사도 있었다. 최선을 다했으나 합격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최종 선발을 앞두고 두 후보로 좁혀졌는데 나는 대학 전임강사로 있던 한 선배와 경합했다. 최종 면접에서 선배는 영어로 답했으나 나는 독일어로 열심히 대답했다. 선배는 “네 답변을 들으니 네가 선발되겠다”고 말했다.
요셉이 옥졸에게 은혜를 입고 다니엘이 환관장에게 은혜를 입은 것처럼 독일문정관은 훨씬 나이가 아래인 나를 선택했다. 이렇게 대학 4학년 때인 1970년 가을, 독일 정부 초청장학생으로 최종 선발됐다. 하나님의 은총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대학 4학년 때 학교에서 한 독일 철학자의 내한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독일에서 칸트와 헤겔 학자로 유명한 디터 헨리히(Dieter Henrich) 하이델베르크대 교수였다. 인도네시아 태국 등 동남아시아를 거쳐 일본과 한국을 방문한 그는 서울대 문리대 강당에서 ‘오늘날 독일 철학의 현황’에 관해 강연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해외 석학의 강연을 접할 기회는 드물었다. 헨리히 교수는 한국과 일본의 대학에 독문학과와 독일철학 전공 학과가 있는 걸 보고 “한국과 일본 사회의 계몽성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독일 정부장학생으로 선발된 뒤 나는 헨리히 교수에게 수학(受學)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한국 방문을 계기로 한국을 알게 된 그는 나를 기꺼이 자신의 문하생으로 받아줬다.
당시 나는 내 전공인 독일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이 그분의 연구 분야인 칸트와 헤겔과는 철학의 방법이 다르다는 걸 알지 못했다. 후설의 현상학을 연구하고 싶다고 했는데도 그는 나를 받아준 것이다. 독일로 떠나기 전 이미 독일 대학과 지도교수가 정해졌고 장학금까지 확보됐다. 모든 걸 예비하는 하나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헨리히 교수가 워낙 저명한 대학교수인지라 독일 정부는 나의 하이델베르크대 입학 및 유학 절차를 모두 대행해줬다. 이 덕에 나는 출국 전까지 독일어 회화 준비와 전공 연구에 힘을 쏟을 수 있었다.
주님은 대학 시절 가운데 아름답게 결실할 수 있도록 나를 인도해주셨다. 대학 재학 중 오로지 주의 나라와 의를 추구한 열정에 대해 독일 정부 초청장학생이란 명예를 안겨줬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다른 것도 더해주신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7) 하나님 은혜로 학비 염려 없는 독일 유학 생활
독일 정부가 마련해준 가정집서 지내며
그들 일상생활 체험하고 독일어도 익혀
슈베비슈할서 독어 집중 회화 과정 수강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이 독일에서 유학한 하이델베르크대가 있는 하이델베르크 도시 전경. 산 중턱에 하이델베르크 성이 있으며 아래쪽 오른편에 1563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채택된 성령교회가 보인다. 게티이미지뱅크
1960년대는 신약성경의 신화론과 세속화 신학, 해방신학 등이 주도하던 시절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독일 유학을 준비했던 나는 70년 주한독일고등교육진흥원(DAAD) 장학생 선발고사에 합격하면서 꿈을 실현했다. 이듬해 독일 하이델베르크대에 유학한다는 소식을 접한 충현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은 혹여 내가 신앙을 잃을까 우려하기도 했다.
하이델베르크대는 세계 지성의 전당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는 예수님 말씀에 대한 단순한 믿음, 자유주의 사상에 대항해 성경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품은 꿈의 결과였다.
25세에 난생 처음 외국 항공기를 탔다. 김포공항에서 미국 노스웨스트항공을 이용해 일본을 거쳐 독일 국적기인 루프트한자 항공기로 갈아탔다. 미국 알래스카 앵커리지를 거쳐 북유럽인 스칸디나비아반도 상공을 지나 독일 함부르크 공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슈투트가르트 공항에서 비행기 여정을 마무리했다. 여기서 기차를 타고 2시간 정도 농촌 길을 달려 중세 도시인 슈베비슈할에 도착했다. 처음 해외로 나와 독일 음식과 향기가 낯설어 속이 울렁거렸지만 독일 정부가 마련한 가정집 숙소에 무사히 도착한 것이다.
숙소는 비탈에 세워져 있었다. 훤히 트인 전망이 있는 집으로 눈앞에 평화로운 농지와 가옥들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거실에서 한 층 내려오니 내가 묵을 손님방이 있었다. 집주인 뒬씨 내외는 친절했다. 아침에는 거실에 올라가 이들 부부와 식사를 함께하며 독일 생활에 대한 조언을 들었다. 이때 나눈 대화는 독일어를 익히고 독일인의 일상을 아는 데 도움이 됐다.
슈베비슈할에서 독일어 집중 회화 과정을 수강하면서 동료 수강생과 로텐부르크란 중세 도시에 당일치기 자동차 여행도 다녀왔다. 독일 농촌은 도시보다 더 아름다웠다. 중세 도시의 흔적을 보는 건 유럽을 이해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각국 청년들과의 대화는 한국인이자 아시아인으로서 국제적인 감각을 갖는 첫 계기가 됐다.
4달 뒤 독일어 어학 과정 중급반을 마치고 기차를 타고 2시간 정도 달려 고풍스러운 도시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다. 구(舊)도시 중심으로 라인강 지류 네카어강이 흐르는 이곳은 칼스베르크의 황태자가 첫사랑을 이룬 낭만적 도시다. 구시가에 있는 성령교회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이 채택된 역사적 교회다. 강 맞은편에는 고성(古城)인 하이델베르크 성이 자리 잡고 있다. 대학 본부는 바로 성 아래에 있다. 이곳에 수시로 올라가 산책할 수 있는 전형적인 대학도시였다.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앞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참 귀하다고 느꼈다. 나는 자주 하이델베르크의 성에 올라가 기도하고 사색에 잠겼다.
대학 건물 맞은편 네카어강 근처 산에는 유명한 ‘철학자의 길’이 있다. 교육신학자 코메니우스와 철학자 헤겔, 신학자 폰 라드와 헬무트 틸리케 등이 산책한 곳이다. 이곳에서 수학한 저명한 사상가를 마주하면서 저들을 연구하며 생활하는 건, 정말이지 하나님이 주신 젊은 시절 황금기였다. 학비를 위해 시간제 아르바이트에 나서는 유학생이 적잖았지만 나는 독일 정부 장학금을 받으며 학비 염려 없이 연구와 성경 읽기, 기도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주말에는 한인 간호사를 방문해 함께 성경공부를 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내려준 유학의 은총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8) 조국의 민주화 위해 유학생들 모여 유신반대 성명 참여
공권력 투입 각종 집회 소요 막는 등
대통령 긴급조치령 내려 강압 통치
독일 정부와 시민들에게 한국 국민은
민주주의 염원하고 있다는 사실 알려
독일 현지 교민들과 파독 간호사들이 1966년 1월 31일 독일 프랑크푸르트공항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국민일보DB
독일 유학 중 박정희 정권이 집권 연장을 꾀하여 1972년 10월 유신(維新)을 감행했다. 유신 헌법이 선언돼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정치 활동이 정지됐다. 대통령이 긴급조치령을 내려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를 막고 전투경찰을 투입해 사회 각종 소요를 막으며 강압 통치에 나섰다. 유신 체제는 79년 10월 대통령 시해 사건에 이르기까지 7년간 초헌법적 비상조치로 이어졌다. 우리 정치사에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사건이었다. 유신 체제는 국가 안보와 지속적 경제 성장을 놓고 군사 정부가 감행한 정변이었다.
당시 독일 유학생들은 하루아침에 조국의 국회가 해산되고 야당 의원이 체포, 구금됐다는 기사를 보고 경악했다. 나라 걱정에 빠진 학생들은 해야 할 연구가 많음에도 국내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다. 독일 각 지역 유학생들은 74년 3월 1일 서독 수도 본에 모여 유신반대 성명서를 낭독했다. 서울대 문리대 졸업생들이 신뢰 관계에 있는 선후배에게 연락하며 유신 독재 정권 규탄에 힘을 모았다. 독일 정부와 시민에게 한국 국민이 민주주의를 염원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유학생들은 경제적 여유가 없음에도 본으로 올라가는 차비와 숙박비를 스스로 부담했다. 이때 유신 체제에 반대하거나 대통령의 금지령을 위배하는 자들은 20년 징역에 처한다는 엄격한 금지령이 선포됐다. 유학생들은 이 긴급조치령에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런 정권이라면 조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유신 반대 성명서에 서명한 것이다.
나 역시 당시엔 박정희에 대해 아주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50년이 지난 후 돌아봐도 그의 방법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유신 정국은 7년 후 ‘궁정동 시해 사건’으로 막을 내린다. 한편으로 그는 오늘날 국가 산업화 기틀을 세운 데 기여한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그가 독일에서 조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 지하 갱도 깊은 곳에서 일하는 파독 광부를 눈물로 위로한 사연은 감동을 줬다.
귀국까지 포기하고 유신 반대 성명서에 서명해 우리의 민주화 의사를 발표했는데도 독일 신문은 유학생들의 기대에 호응하지 않았다. 우리의 희생에도 큰 성과가 보이지 않은 것이다. 정치인은 아니지만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자로서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나 역시 서명에 참여했다. 그 결과가 미미한 걸 보고 이제 본연의 처소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캐나다에서 민주화운동에 선봉으로 나선 김재준 목사가 독일에 격려차 왔다. 김 목사는 캐나다와 미국을 중심으로 조국 민주화 운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언어와 태도에서 목회자와 신학자의 모습이 배어 있는 분이었다. 그렇지만 나와는 생각이 달랐다. 나는 민주화보다 한국 사회 복음화가 먼저라고 여겼다. 나 스스로 좀 더 실력을 기른 후에 새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하리라 결정하고 민주화 운동의 지속적인 참가는 유보했다. 하이델베르크로 돌아온 후로는 오로지 대학과 도서관에서 연구에 골몰했다. 또 하이델베르크 시내 로르바하병원과 인근 비슬로흐 지역에 근무하는 한인 간호사들을 방문해 매주 한 번씩 성경 공부를 인도했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9) 독일대학생선교회 집회 참여… 경건주의 전통 체험
종교개혁 완성한단 취지로 기도와
말씀 실천 생활화한 경건주의 운동
이 전통 이어가는 SMD 집회 참석
인격적 신앙 지키는 데 도움받아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은 유학 시절 독일대학생선교회(SMD) 활동에 참여하며 독일 경건주의 전통을 배웠다. 사진은 당시 SMD 단체 사진. SMD 홈페이지 캡처
프랑스가 가톨릭이 주류인 국가라면 독일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영향으로 개신교가 주류인 국가다. 프랑스는 천주교 세력이, 독일은 개신교 세력이 사회를 끌고 나간다. 그만큼 독일에서는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이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만 프랑스에도 ‘위그노’란 개신교인과 개혁교회가 있으며 독일에도 가톨릭이 있다.
독일 개신교에는 주류교회인 루터교와 개혁교회, 연합교회가 있다. 이들 교단 안에는 미국처럼 교파 분열이 없으며 진보와 보수 진영만 있다. 교인들의 신앙 교제와 소명 강화를 위해 진보 진영은 ‘교회대회’(Kirchentag)를, 보수 진영은 ‘공동체대회’(Gemeindetag)를 개최한다. ‘희망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 박사는 교회대회에 속하고, 선교신학자 페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는 공동체대회에 속했다. 진보 진영은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보수 진영은 복음 전도에 우선성을 둔다.
독일의 주류 교회인 루터교는 종교개혁 후 1세기가 지나자 말씀대로 살려는 신앙이 약해졌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17세기에 일어난 신앙 운동이 프랑크푸르트의 필립 야콥 슈페너와 할레의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 중심으로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이다.
18세기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폰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지인 헤른후트 기독교 정착촌의 ‘모라비안 운동’도 이 경건주의 운동의 일환이었다. 경건주의 전통은 종교개혁을 완성한다는 취지로 각 교회 내 신앙 그룹이 만들어져 기도와 말씀 실천을 생활화한 운동이다.
독일 슈베비슈할에서 독일어 회화를 공부할 때 한 독일 가정에 초대받았다. 식사 시작 전 성경 한 장을 다 읽고 마칠 때 다시 성경 한 장 다 읽고 기도하는 모습을 봤다. 이들이 보여준 경건의 열성을 보고 내심 놀랐다. 튀빙겐대 신약학이 오늘날에도 성경적 전통을 잘 이어가는 것도 신학자 요한 알브레히트 벵엘에서 시작한 경건주의 전통이 칼 하임, 오토 미셸, 피터 슈툴마허 등으로 계승됐기 때문이다. 튀빙겐의 벵엘하우스도 영국의 틴델하우스처럼 신학생 기숙사를 마련해 성경 중심의 신앙을 전수하는 전통이 있다.
1949년 설립된 독일대학생선교회(SMD)는 이런 경건주의 전통에서 나온 대학생 신앙 운동이다. 70개 대학지부와 250개 중·고교생 성경모임이 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는 학생들이 기도하는 모임으로 매일 정오 기도회로 모이며 매해 전체 집회를 한다. 나도 SMD의 정오기도회와 경건회에 참석했는데 이들 모임은 인격적 신앙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됐다.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학생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배우더라도 이 경건회의 도움으로 종교개혁적 신앙을 유지했다.
정오기도회뿐 아니라 SMD의 ‘그룹 성경모임’(Gruppenbibelkreis)에도 참석했다. 여러 나라 학생이 모여서 성경을 공부하고 신앙 교제를 갖는 시간이었다. 야외로 나가 등산하고 산책하며 친교를 나눴다. SMD는 독일 교회의 종교개혁 전통과 17세기 경건주의 운동의 유산을 오늘날에도 이어가고 있다. SMD 활동으로 독일 대학 신학부의 자유스러운 학풍 가운데서도 살아 있는 경건주의 전통을 체험했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10) 하나님 말씀으로 낯선 땅에서 외로움 달랜 파독 교민들
하이델베르크 지역 병원 근무 중인
100명이 넘는 우리 간호사와 함께
성경 공부하며 신앙의 교제도 나눠
그 은혜는 힘든 유학 생활 동력 돼
우리 정부가 1960년대 독일에 파견한 광부와 간호사가 벌어들인 외화는 경제 발전의 초석이 됐다. 사진은 1964년 독일의 한 탄광 갱도에서 휴식 중 간식을 먹는 파독 한인 광부들. 국민일보DB
1960년대 경제가 어려웠던 시절 대한민국 정부는 독일의 경제 원조 차관을 받았다. 대신 현지에서 일손이 부족한 광부와 간호보조원을 파견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가 받는 월급에서 국내로 보낸 외화는 가난한 우리나라를 일으키는 종잣돈 구실을 했다.
당시는 우리 경제가 북한보다 힘들었던 시기다.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이 힘들어 다수의 대졸자가 가족 생계를 위해 파독 광부에 지원했다. 간호사 역시 현지 일손이 부족하고 일하기 힘든 직종이었는데 우리 여성들은 독일 병원에서 열심히 일했다. 국민을 일꾼으로 보낸 가난한 나라의 지도자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전용기가 없어 독일이 보내준 비행기를 타고 1964년 독일을 방문한다. 지하 1000m 갱도에서 하루 8시간씩 목숨을 걸고 고된 일을 하는 국민을 본 그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격려했다.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할지라도 후손에게만큼은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열심히 합시다. 나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독일 하이델베르크엔 로르바흐 지역과 교외인 비슬로흐에 병원이 있어 100명 넘는 우리 간호사가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이들과 성경공부를 함께 하면서 신앙의 교제를 나눴다.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나누는 가운데 간호사들은 낯선 땅에서의 외로움을 달랬다.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나 역시 큰 은혜를 받았다. 이는 힘든 유학 생활의 동력이 됐다.
성경공부 모임이 커져 모일 장소를 마련키 위해 로르바흐 병원 원목을 찾아가 병원 내 예배당을 빌렸다. 현재 아신대 은퇴교수인 이동주 당시 전도사와 간호사 송화순 허정심 김은주씨 등과 함께 1973년 12월 세운 하이델베르크 한인교회도 이곳에서 창립했다. 이후 강덕치 집사가 합류했고 미군 군목인 이정일 강도사가 후임으로 왔다. 1980년대에는 유학 온 최종호 경성대 명예교수와 김광채 개신대학원대 명예교수, 김종렬 실천신학대학원대 명예교수와 김희성 서울신학대 명예교수, 이승렬 목사(전 한국기독교사회봉사회 사무총장) 등이 목회를 승계했다.
교회를 인도할 때 영적 체험도 겪었다. 간호사 가운데는 한국에서 열심히 신앙 생활한 이들뿐 아니라 다양한 신자가 있었다. 교회를 출석하지 않고 혼자 성경을 읽는다는 한 간호사가 정신 발작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입원해 병실로 심방을 갔다. 병원 뒤뜰을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던 중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란 찬송가 가사를 흥얼거렸는데 이 간호사가 갑자기 쓰러지더니 “가까이 오지 말라”고 부르짖었다. 안정을 시킨 뒤 병실에 데려다 줬던 기억이 난다. 그 간호사는 병원에서 요양하며 말씀을 읽고 기도 생활을 하면서 회복됐다.
수십 명이 모이는 작은 교회였지만 하이델베르크를 방문하는 한국교회 신앙 지도자들은 대부분 이곳에 들러 성경 공부를 인도하고 설교했다. 총신대 교수 김의환 박사는 1974년 제1회 로잔대회에 참석했다가 하이델베르크 한인교회를 방문해 설교했다. 독일 본대학에 방문 교수로 온 이종성 박사를 모시고 성경 연구 모임과 부흥회도 가졌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 측 교회 출신인 내가 예장통합 측 목사가 된 배후에는 당시 장신대 학장인 이종성 박사와 나눈 신앙적 교분에서 맺어진 결실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도가 있어 가능했던 일로 믿는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11) 신학 연구하며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말씀 체감
신학 배우기 위해 철학 전공 선택 후
세계적 철학·신학자 가르침 받으며 감명
마음에 드는 신학 교수 찾아 다니기도
김영한(왼쪽 두 번째) 기독교학술원장이 1975년 유럽 선교차 독일 하이델베르크를 방문한 김창인 충현교회 목사와 하이델베르크성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독일 병원 간호사로 일하는 하이델베르크 한인교회 성도들도 함께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유산이 곳곳에 있는 독일로 유학을 가보니 자유주의 신학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공부한 하이델베르크대 신학부에는 에드문트 슐링크 등 세계적 루터교 신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정통 신앙을 견지한 경건한 신학자였다. 종교개혁 신앙을 지니고 이곳 신학부에서 묵묵히 공부하고 섬기는 교수와 목회자, 신앙인들을 만났다. 하이델베르크대 신학부 교수 알브레히트 페터스, 마르부르크대 신학부 교수 카를 라초는 독일 루터교 목사요 세계적 조직신학자였다. 이들은 기도하는 학자로서, 먼저 성경 본문과 해설을 읽고 기도한 뒤 강의를 시작했다.
나는 먼저 주전공인 철학부에서 논문을 써 지도교수에게 학문적 검증을 받으려고 노력했다. 나를 지도한 헨리히 교수는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정상급 학자였다.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있어 그와 상담하려면 줄을 서서 오래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헨리히 교수의 연구 분야는 칸트와 헤겔에 이르는 독일 관념철학과 윤리학이었고 나는 후설의 현상학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내 연구 의도를 존중해주며 논문을 읽고 격려해줬다. 이런 분을 만난 것이 은혜였다.
신학을 배우기 위한 방법으로 전공을 철학으로 선택한지라 철학보다 신학부 강의에 더 관심이 갔다. 신학 분야에서 마음에 드는 교수를 찾으려 이리저리 쫓아다니기도 했다. 하이델베르크대 신학부는 구약학이 특히 유명했다. 독일 내 정상급 구약학자인 게르하르트 폰 라트나 클라우스 베스터만, 한스 월터 울프 같은 학자들에게는 수많은 학생이 몰렸다. 독일의 성경 비판적 분위기에 비춰볼 때 이들 신학은 성경에 입각했을 뿐 아니라 교회 친화적이었다. 조직신학부에서는 루터교 정통주의 신학자 슐링크와 페터스 교수가 마음에 들었다. 페터스는 교수로 오기 전 지역교회 목회를 했던 경건한 학자였다. 그의 부인도 신학을 전공했고 학생을 돌보는 신앙과 섬세한 사랑을 지닌 지성적 여성으로 기억한다.
1975년 마르부르크로 가서 라초 교수의 종교개혁 세미나도 참가했다. 라초 교수의 박사후보생 세미나였다. 이곳에서는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를 읽고 토론했다. 내가 바르트 신학의 비역사성을 비판하자 처음에는 듣고만 있던 독일 동료들이 나중에는 점잖게 “당신이 비판하는 바르트가 나치 시절 해임당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고통당한 신학자”라고 말했다. 바르트 신학의 긍정적 측면을 밝힌 이들의 말은 바른 지적이었다.
페터스 교수는 라초 교수와 함께 종교개혁 신학을 새롭게 해석하는 데 앞장서고 있었다. 이들은 바르트와 파울 알트하우스 등이 주창한 현대신학을 소개하고 종교개혁 신학의 관점에서 이를 비판하는 작업을 했다. 신학을 연구하면서 내 인생 좌우명이기도 한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는 말씀을 체감할 수 있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이라는 것이 절실히 느껴졌다. 하나님 나라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이뤄지는 정의로운 은혜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삶의 우선순위가 될 때 부차적인 것은 더해준다는 약속이요 교훈이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12) 하이델베르크대 철학부 이어 신학부까지 박사 학위
철학 박사 취득 후 신학 주전공으로 등록
관심 있었던 ‘조직신학 방법론’ 본격 연구
귀국 전 연구 거듭해 신학박사 논문 작성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오른쪽)은 독일 유학 당시 방학 때마다 신학부 지도교수인 알브레히트 페터스의 자택에 자주 초대받았다. 김 원장은 이들 부부와 학문적 담론을 나누곤 했다.
철학과 지도교수인 디터 헨리히 교수는 칸트와 헤겔 전문가이지만 나는 본래 의도대로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을 연구하고자 했다. 헨리히 교수는 학생의 학문적 의도를 존중했다. 학문적 관용성 의미에서도 그는 큰 학자다.
그는 독일의 신칸트주의자 파울 나토르프의 책을 내게 주면서 이를 연구할 것을 권했다. 나토르프는 마르부르크대 철학부 교수로 신칸트주의를 표방하다 말년엔 인식론적 초절주의(超絶主義)로 나간 사상가다. 나는 ‘후설 현상학과 나토르프 신칸트주의 인식방법’을 연구했다. 연구 초점은 ‘추론적 반성’인가 ‘선험적(先驗的) 직관’인가 하는 문제였다. 후설의 직관에 의존한 인식 정초(定礎)도 궁극적으로 추론적 반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걸 주장했다. 후설이 주장하는 선험적 순수 직관이란 매개된 것으로 절대 인식이란 불가능하다. 신칸트주의가 말하는 인식이란 끊임없는 자기 추론으로 되돌아가는 인식의 한계성을 지적했다. 이 박사 논문은 1974년 11월 통과됐다. 이후로는 신학을 주전공으로 등록하고 종교개혁 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내가 신학 분야에서 관심이 있던 건 ‘조직신학 방법론’이었다.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의 종교개혁적 사유의 핵심은 말씀에 입각한 계시적 사유이자 신앙을 우위로 한 사유다.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게 있다. 한국에선 루터를 종교개혁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루터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종교개혁 신학을 새롭게 정립한 대신학자’였다. ‘루터 없는 칼뱅의 기독교 사상은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학부 지도교수인 알브레히트 페터스에게 자주 칼뱅을 말하자 그는 빙그레 웃으며 “칼뱅은 루터의 제자”라고 말한 적도 있다. 1483년생인 루터는 1509년생인 칼뱅과 26년의 나이 차가 있다. 칼뱅의 기독교 강요는 루터의 사상을 조직적으로 정리한 것임을 독일에서 실감했다. 이들의 종교개혁적 사유는 네덜란드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와 독일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 등에게서 ‘계시 의존적 사유’로 표현됐다.
나는 신학 박사 논문에서 “현상학적 사유는 선험적 사유로서 ‘유아론적 이성’ 일변도의 사유”라고 규정했다. 현상학적 환원(現象學的 還元)이란 대상 지향적 사유에서 대상 사유적 자아로 되돌아옴이며 이는 자아 중심적 사유다. 성경은 자아(Ego)를 버리라고 말한다. 십자가 사건은 자기를 부인하고 못박는 것이다. 나는 이를 신학적으로 적용해 현상학적 환원을 ‘신학적 환원’(theologiche Reduktion)으로 변형했다. 신학적 환원은 자아 중심적 사유에서 말씀 중심적 사유로 전환하는 것을 뜻한다.
1977년 귀국 전까지 연구를 거듭해 신학박사 논문을 작성했다. 숭실대에서 6년간 강의한 후 안식년을 얻은 나는 다시 하이델베르크대로 가 이 논문을 제출했다. 1년간 논문을 계속 수정해 83년 12월에야 신학박사 논문이 통과됐다. 그러고 나서 이듬해 2월 구약학과 신약학, 교회사와 실천신학 네 분야의 구두시험을 거친 후 신학박사 학위증을 받았다. 하이델베르크대 철학부에서 1974년 철학박사(Dr.phil.)를, 같은 대학 신학부에서 10년 만에 신학박사(Dr.theol.)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 은혜였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13) 해외 선교 시작한 충현교회… 통역과 안내로 봉사 사역
덴마크 스웨덴 지역 교회 방문하는
출신교회 담임목사의 안내 부탁받고
한 달 동안 함께하며 설교 통역 도와
이를 계기로 독일 선교사 파송 시작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이 벨기에 루뱅대 내 후설 자료 보관소의 중세 교부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
독일로 유학 온 이래로 아무 연락이 없던 충현교회에서 1975년 기별이 왔다. 김창인 목사가 덴마크 스웨덴 지역 교회를 방문해 설교하니 설교 통역과 선교 여행 안내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을 접하면서 한편으로 기뻤다. 충현교회가 해외로 눈을 떠 세계 선교를 시작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다른 편으로는 생소한 장소와 장거리 이동이 부담됐다. 내가 있는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덴마크 코펜하겐역까지 마중 나가는 건 부산에서 만주 지역까지 올라가는 셈이다. 그렇지만 출신 교회 담임목사가 요청한 것이라 “기꺼이 가겠다”고 답했다.
그해 7월 나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코펜하겐까지 기차로 이동해 김창인 목사를 마중했다. 한 달 가까이 그의 설교 통역자로 활동하며 함께했다. 실제 이를 계기로 충현교회는 해외 선교에 눈을 떴다. 이듬해 1976년 교회는 육호기 목사를 독일 선교사로 파송했다. 김창인 목사는 유럽 현지에서 오순절 계열인 하나님의성회가 국제적 관계망이 튼튼한 걸 보고 이 교단을 인정했다.
유럽 상황은 장로교가 절대다수인 한국교회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내가 하이델베르크대에 유학 중이던 1970년대 초반에 최자실 목사가 독일 하나님의성회 소속 교회에 초청받아 방문한 일이 있다. 나 역시 이 부흥회에 참석해 그분이 여성 부흥목사로서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을 지켜봤다. 당시 최 목사는 순복음 신학에 입각한 설교를 했고 깨끗한 처신을 하신 분으로 기억한다.
충현교회가 선교사 파송을 위해 연락한 북유럽 지역 교회는 하나님의성회 소속이었다. 스칸디나비아반도 지역 교회는 대부분이 루터교회다. 당시 한국 장로교는 루터교와 전혀 행정적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스칸디나비아 지역 하나님의성회는 국제적인 연락망이 있어 한국 장로교 선교부와도 연결돼 있었다. 충현교회는 이들과 협업해 해외 선교에 나선 것이다. 김창인 목사는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이며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의 주관자”라는 종교개혁적 설교를 했다. 그의 설교는 독일어로 번역된 뒤 다시 덴마크어나 스웨덴어로 2중 통역됐다. 그의 영성 있는 사도적 복음은 이 지역 성도에게 감동을 줬다.
김창인 목사가 귀국한 지 1년 후 충현교회 지원을 받은 육호기 선교사가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 측 유럽 선교사로 파송됐다. 당시 예장합동 선교부는 독일 교회와 아무런 협력관계가 없었다. 그야말로 공중에서 낙하산으로 투입되듯 온 것이다. 그를 맞이하는 독일 교회 파트너도 전혀 없었다. 나는 아주 난감했다. 예전보다 약세라고는 하나 독일 교회는 한국인 선교사를 받아들일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었다. 물론 육 선교사는 독일인 선교보다는 한인 유학생과 간호사, 광부를 대상으로 활동하고자 했다. 나는 5년간 친분을 쌓아온 독일 지인들과 교섭해 일단 그가 비스바덴 지역 독일 교회에서 한인을 위한 예배를 인도하도록 조치했다.
육 선교사가 독일에서 자리 잡은 1977년 여름, 나는 6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독일 정부는 철학박사 논문 통과까지 독일에서의 모든 생활비를 지원했다. 귀국 시기가 다가오자 감사하게도 귀국 여비와 논문 출판 비용까지 지원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 6:33)는 말씀이 나에게 이뤄진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함은 항상 좋은 삶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14) 6년 유학 마치고 귀국… 32세 나이로 숭실대 교목 실장에
서울대기독교동문회 선배들 추천으로
기독교 대학인 숭실대학교 교목 맡아
학교 기독교 정신 잘 계승하리라 결심
출석 교회도 예장통합 소속으로 옮겨
김영한(왼쪽) 기독교학술원장이 충현교회 대학부에서 만난 김의환 전 총신대 총장과 함께 1974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찍은 사진. 유학을 마치고 숭실대 교목에 부임한 김 원장은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교회와도 인연을 맺는다.
6년 만에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나는 어디서 일할 것인가를 두고 기도했다. 김창인 충현교회 목사와 교우들에게 먼저 인사하고 다음에는 서울대기독교동문회(서기동)를 찾았다. 초교파 기독인 모임인 서기동은 1959년 세워진 기독인 동문회다. 법대 출신인 박인각(광림교회 장로·전 국회의원), 문리대 출신 장하구(향린교회 장로·종로서적센터 대표), 어윤배(새문안교회 장로·전 숭실대 총장) 등이 초창기에 활동한 인사였다. 해마다 신앙지 ‘서광(曙光)’을 내며 성탄절 축하예배, 야외예배를 함께 드린다. 작지만 오래 지속해서 결속된 모임이다. 나는 여기서 김영재 김명혁(합동신학대학원대) 이형기(장로회신학대) 손봉호(고신대) 교수, 김상복 할렐루야교회 원로목사 등과 교제했다.
이 가운데 특히 당시 숭실대 교수인 고범서 조요한 어윤배 등이 교회 친화적인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인품이 훌륭하고 영향력이 큰 총장급 교수였다. 내가 대학 재학 당시 서울대는 서울 동숭동에 학교가 있었기에 숭실대가 기독교학교인 줄은 알았지만 잘 아는 건 아니었다. 이런 내게 교수인 이들 선배가 숭실대 교목으로 일하라고 추천해줬다. 숭실대는 이전에 교목을 맡았던 이가 안식년으로 간 뒤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아 교목 자리가 빈 상태였다.
이때 숭실대 이사장은 일신방직 회장인 김형남 박사였다. 김형남 이사장은 면접 자리에서 온유하게 “교목 일을 충실히 맡아달라”고 당부했다. 당시 숭실대는 김형남 김창호 김영호 등 일신방직 일가와 인연이 있었다.
학교 채플 인도와 기독교 교과목 강의는 교목실장이 하는 중대한 직무였다. 숭실대는 신앙 열정이 있는 젊은 학자이자 목사를 구하고 있었다. 이때 나를 조요한 어윤배 교수가 추천한 것이었다. 귀국 후 나는 총신대에서 디트리히 본회퍼 등 현대 신학자를 강의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에 당시 이종성 학장의 요청으로 장신대에서 졸업생 필수 과목인 현대신학도 가르쳤다. 1970년대 후반만 해도 해외 박사 취득자가 흔하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내가 맡은 ‘현대신학 강의’는 두 학교 신학생의 환호를 받았다.
총신대와 장신대에서 강의했으나 어느 학교에서 일해야 할지는 정해진 바가 없던 상황이었다. 종합대학은 신학대학보다 더 넓은 시각으로 철학과 신학을 학문적으로 살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신학대가 아닌 기독교대학인 숭실대를 택한 이유다. 특히 숭실대는 윌리엄 베어드(한국명 배위량) 선교사가 평양 사랑당 서재에서 시작한 선교 학교로 일제의 폐교 위협에도 신사참배에 반대한 민족대학이다. 이런 학교의 정신에도 감동했다. 이 선교 학교의 기독교 정신을 잘 계승하리라고 결심했다.
그렇게 나는 32세의 나이로 숭실대 교목실장에 임용돼 1978년 2월부터 교목실로 출근했다. 당시 고범서 숭실대 총장은 미국 명문 밴더빌트대 신학대에서 기독교윤리학을 연구한 분이었다. 숭실대 임용은 학자와 교수로서 살고자 했던 내 인생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숭실대는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측 학교였다. 숭실대 교목이 되는 건 내 소속이 기존에 신앙생활을 해왔던 예장합동에서 예장통합 측으로 옮겨지는 걸 의미했다. 출석 교회도 예장통합 교단 소속 교회로 옮겼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15) 예장통합 서울남노회 가입… 목사고시 통해 교목 자격 갖춰
숭실대학교 교목으로 일하기 위해선
예장통합 측 노회의 목사 안수 필요
장신대 1년 수료, 목사고시 합격 후
상도교회 봄 노회서 목사 안수 받아
김영한(오른쪽 두 번째) 기독교학술원장이 1980년 서울 상도교회에서 목사 안수 서약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숭실대는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측 교육기관이기에 교목으로 일하기 위해선 통합 측 노회의 목사 안수가 필요했다. 총회 규정에 따르면 해외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장로회신학대에서 1년간 이수하고 목사고시를 통과해야 한다. 나는 이 규정대로 절차를 밟았다. 예장통합 서울남노회 가입에 도움 준 교회는 숭실대 인근 남현교회였다.
당시 장신대 학장인 이종성 박사에게 귀국 후 인사를 드렸다. 이종성 학장은 신학대학원과 목회연구과 3학년 학생에게 현대신학을 강의해줄 것을 제안했다. 훌륭한 인품을 지닌 학자인 이 학장과 박창환 교무처장은 해외에서 돌아온 젊은 학자를 기꺼이 환영해주고 통합 측 교단에서 일하도록 길을 열어줬다. 나는 1978년 신대원 3학년에 편입해 3학년 과목을 전부 수강하고 2년 뒤 통합 측 목사고시를 봤다. 대학 교목실장으로서 업무가 많은 데도 장신대에서 강의하고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숭실대 본부와 총장실에서도 편의를 봐줬다.
장신대 신대원 졸업반에서 현대신학을 강의했을 때 내 나이는 32세였다. 칼 바르트에서 위르겐 몰트만에 이르는 현대신학을 정통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강의하는 수업이었다. 독일에서 갓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젊은 학자의 수업에 좋은 반향이 있었다. 당시 강의 자료는 훗날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1984)란 책으로 출간됐다. 2003년 개정증보판까지 나왔다. 강의는 바르트의 신학 혁명에서 시작한다. 19세기 인간 이성에 근거한 자유주의 신학이 발흥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 등을 유발한 군국주의에 따라 유럽 문명의 낙관주의는 무너진다. 바르트는 이 상황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성경 주석을 ‘로마서 강해’란 저서로 출판했다. 여기서 바르트는 ‘인간은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하늘과 땅, 영원과 시간 사이에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다’고 선언했다.
장신대에서 1978년부터 1년 수학을 마치고 수료증을 받았다. 숭실대가 소속된 예장통합 서울남노회를 거쳐 예장 통합 측 목사고시위원회에 이를 제출했다. 목사고시 응시 허락을 받아 1980년 이에 응시했다. 당시 ‘외국 박사는 목사고시에서 낙방하더라’는 소문이 있어 우려가 됐다. 미국 프린스턴대 교회사 박사인 한태동 연세대 교수도 첫 응시에서 낙방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조심스레 준비했다. 구약과 신약성경의 주석 문제에 대한 글과 설교문을 쓸 때도 전통적 견해에 따라 평범하게 글을 썼다. 필기고사에도 무난하게 응시해 큰 문제 없이 목사고시에 합격했다.
그해 서울 상도교회에서 열린 봄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당시 노회장 이순경 목사는 목사 임직에 있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설교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이 말씀은 평생 내 목사직에 따라오는 하나님 말씀이다. 후배 목사에게도 권면할 때 “항상 자신의 소명을 각성하라”며 들려주는 말씀이다.
서울남노회 회원이 된 지 올해로 44년 차다. 그간 관악노회와 동남노회가 분립돼 나갔다. 서울남노회에는 인품이 훌륭한 회원이 적잖고 분위기도 좋아 은퇴목사로서 그대로 적을 유지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16) 삼위일체 유일신 신앙 지킨 숭실대 정신 유지 솔선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반대해 폐교한
전통 이어 채플과 기독교 교육 필수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수와 교직원도
기독교 가치관 구현될 수 있도록 도와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이 1980년대 숭실대 교수를 대상으로 한 수양회에서 설교하는 모습.
1982년 숭실대 문리대 조교수이자 교목으로 임용되면서 나는 비로소 ‘기독교 대학’의 본질이 새롭게 다가왔다. 기독교 대학처럼 미션스쿨(Mission School)은 건학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정기적인 채플(대학 예배)을 실시하고 기독교 과목(기독교·성서개론, 기독교 사상사 등)을 교양 필수로 이수하도록 한다. 전교생이 전공과 관계없이 이를 필수로 이수해야만 졸업할 수 있다.
나는 ‘채플 자유화’나 기독교 과목을 타 교양으로 대체하는 요구는 기독교 대학의 사명에 배치되는 것으로 여겼다. 특히 숭실대는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에 반대해 폐교한 전통이 있다. 이런 정신에 따라 채플과 기독교 과목 교육을 철저히 지도해 전통을 유지하고자 했다.
숭실대는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고등교육기관이다. 기독교 중산 계층이 다수 거주했고 기독교가 크게 번성했던 평양에 1897년 설립됐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1862~1931·한국명 배위량)는 부산의 초량교회와 대구 계명학원을 세운 뒤 평양 사저에서 숭실학당을 시작했다. 오늘날 숭실대의 전신이다. 미국과 캐나다 선교사의 의료·학교 선교는 교회 개척과 함께 이들 사역의 주축이었고 이는 한국의 근대화를 앞당겼다. 숭실전문으로 발돋움한 학교를 졸업한 동문 가운데는 한경직 강신명 방지일 목사와 박형룡 박윤선 박사 등 기독교를 선도하는 탁월한 지도자가 적잖다.
숭실대에서는 매주 수천 명에 달하는 전교생의 채플을 인도하고 교양 필수로 기독교 과목도 가르쳐야 했다. 이를 위해 여러 기독교 과목을 강의할 교수를 초청해야 할 책임도 내게 있었다. 여기에 매주 교직원 예배도 인도해야 했다. 교직원 예배는 학교의 정신을 되새기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새롭게 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초창기에는 조찬 예배로 시작했으나 수요일 정오 예배로 옮겼고 점차 정착됐다.
전교생을 대상으로 채플을 운영하며 기독교 과목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기독교 학교를 유지할 수 없다. 교수들이 기독교적 가치를 강의와 삶으로 보여줘야 한다. 학생과의 대면 봉사에 종사하는 교직원도 기독교 가치관이 반영된 삶을 살아야 한다. 이럴 때 학교 행정에서 기독교 가치관이 구현되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8년 신사참배 반대로 학교가 문을 닫은 사건은 종교적인 조처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삼위일체 유일신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학교 문까지 닫음으로써 숭실대의 정체성을 보여준 것이다. 폐교 단행은 오늘날까지 숭실대의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숭실대 교목실장을 지내면서 주일엔 영락교회에 출석했다. 이때 교회의 요청으로 교회 대학부에서 성경공부를 지도했다. 성경공부는 당시 여러 사회·신앙적 이슈를 신학적으로 해설하는 방향으로 진행했다. 서울대 나학진 교수가 대학교 3학년 학생을, 나는 4학년 학생을 담당했다. 이때 영락교회 대학부에서 활동했던 학생 가운데는 훗날 기독교 전공 교수가 된 후학이 여럿 나왔다. 최태연(백석대) 소기천(장로회신학대) 은퇴교수 등이다. 이들이 기독교 가치관을 지닌 훌륭한 교수로 활약했음은 물론이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17) 신학과 없는 숭실대… 하나님이 이곳 보낸 사명 깨달아
기독 역사 깊은 학교에 학문적으로
기독교 변증하고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 전공학과와 신학대학원 없어
해마다 개설 시도… 설립 20년 걸려
김영한(오른쪽 두 번째) 기독교학술원장이 1994년 2월 숭실대 제21회 교수 수양회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기독교 대학의 채플은 교양 필수과목으로 운영하는 게 효과적이다. 의무 채플을 싫어하는 반응도 있지만 훗날 대학 시절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는 제자도 꽤 됐다. 졸업생끼리 학창 시절 추억을 떠올려보면 채플 시간을 자주 언급하곤 했다는 것이다. 이때 졸거나 혹은 다른 생각에 사로잡혔다가도 스쳐 지나가는 강사의 말이 마음에 새겨졌다는 간증도 접했다. 다만 출결 관리는 탄력적으로 운영했다. 출석 횟수가 모자란 학생을 무조건 탈락시키기보단 봉사에 참여하도록 안내했다. 채플 취지를 살리면서 학생과도 소통하는 지혜로운 방법이라 생각한다.
교회 설교가 성도에게 구원의 복음을 알리는 것이라면 대학 채플의 설교는 이와 더불어 기독교 가치관을 가르치는 역할을 한다. 채플 설교와 함께 성경과 기독교개론 등의 강의로 학생에게 기독교 가치를 알려주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이들 수업과 설교에 임하는 내게 나침반이 됐다. 숭실대에서 34년 봉직하면서 이 구절을 학문적으로 해설한 저서도 냈다. ‘기독교개론’(1996) ‘21C 세계관과 개혁신앙’(2006) ‘기독교 세계관’(2009) ‘포스트모던 시대의 세계관’(2009) 등이다.
아울러 기독교 가치관 전수에는 각 전공의 기독 교수가 인도하는 성경공부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 학생들은 목회자가 신앙 이야기를 할 때보다 전공 교수가 간증할 때 더 귀담아듣는다. 당시 김영호(영문과) 어윤배 박종삼(사회복지학과) 김영훈(법학과) 고재귀(물리학과) 교수가 인도한 성경연구반이 잘 운영됐다. 이들 교수의 신앙이 활동적이어서 학생들에게 잘 어필했다.
미국 대학의 경우는 릴랜드 라이큰 휘튼대 영문학 교수를 꼽고 싶다. 우리말로도 번역된 라이큰 교수의 책 ‘기독교문화관’은 내용이 훌륭해 당연히 기독교 전공 학자가 쓴 것으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평신도 교수였다. 그의 또 다른 책인 ‘청교도 이 세상의 성자들’ 역시 청교도의 삶을 예로 들며 이 세상에서 기독교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그의 저서는 기독교 세계관 분야에서 참고할 만한 좋은 지침서다.
독일에서 귀국 후 숭실대에 교수로 부름을 받아 교목 일을 하면서 놀란 게 있다. 이 역사 깊은 학교에 학문적으로 기독교를 변증하고 성경과 기독교 세계관을 연구하는 신학과와 신학대학원이 없다는 것이었다. 1897년 창립된 기독교 대학인 숭실대는 신학과가 없음에도 후발주자인 연세대와 이화여대에는 모두 기독교 신학을 다루는 전공 학과와 신학대학원이 있다.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낸 사명이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고 폐교한 숭실대가 기독교와 성경을 연구하는 전문 학과와 대학원이 없는 건 이 전통에 합치하지 못한다고 봤다. 그렇지만 신학과와 신학대학원을 설립하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당시 수도권 대학 정원 내에서 학생 수를 확보해야 해 기존 학과에서 인원을 떼어오는 구조인지라 신학 전공의 정원 확보가 쉽지 않았다. 정원을 감축하려는 기존 학과를 찾기 어려워서다. 매해 신학과와 신학대학원 개설을 시도했으나 내외 여건으로 여의치 못해 결국 이를 설립하는 데 20년이 걸렸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18) 학생은 물론 교수와 직원들 모두 기독교 이념으로 무장
매주 채플 6회 인도, 기독학생회 지도
각 기독 대학 교목과 협력 학원 선교
교수 신앙 수양회로 여러 전공 교수 간 인간적 친목과 신앙 소통의 장 만들어
김영한(원 안) 기독교학술원장이 1980년대 초 인천 무의도에서 열린 수련회에서 숭실대 기독 학생들과 찍은 단체 사진.
교목으로 매주 채플을 6회 인도하고 기독교 과목을 기획하며 기독학생회를 지도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채플에는 교계 초교파 지도자를 초청했다. 특히 한경직 강신명 림인식 박조준 김동익 김선도 최훈 목사 등이 자주 숭실대를 찾아 말씀을 증거했다.
기독 학생과의 신앙 교제와 학원 전도는 즐거운 일이었다. 학생들은 교목실의 지도를 잘 따라줬다. 학생회관 5층의 학생회실에서 매주 예배를 드렸는데 학생들은 스스로 간증과 찬양을 하고 외부 강사를 모셔 말씀을 듣기도 했다. 다양한 교회와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등 여러 선교단체에서 모인 이들이었기에 기독학생회는 ‘기독인연합회’로 불렸다. 이단을 제외한 학생 모임은 모두 기독인연합회에서 연합해 활동하도록 권했다.
한국기독교대학교목회에선 연세대 이화여대 계명대 등 각 기독 대학 교목과 협력해 학원 선교에 나섰다. 교목회는 매년 여름 각 대학 기독 학생이 함께 참가하는 하기 캠프를 열었다. 한번은 충남 대천해수욕장에서 해당 캠프를 개최했는데 이때 신앙이 좋고 성격도 발랄한 한 계명대 학생을 만났다. 나중에 그 학생은 미국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에서 선교학을 전공해 교수가 됐다. 김승호 한국성서대 교수 이야기다.
기독 대학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선 대학교수와 직원이 기독교 이념으로 무장해야 한다. 나는 매주 수요일 오전 이들과 교직원 예배를 드리면서 함께 신앙을 키워나갔다. 교수 신앙수양회는 초창기엔 서울교육문화회관(현 더케이호텔서울)에서 모였으나 차츰 야외를 선호해 설악산으로 갔다. 오전에는 신앙 강좌를, 오후엔 등산을 했다. 저녁엔 단과대별로 모여 친교 및 토의 시간도 열었다. 교수 신앙수양회는 여러 전공 교수 간 인간적 친목과 신앙 소통의 장이 됐다.
숭실대의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건학이념은 ‘진리와 봉사’다. 나는 한국에서 기독교 대학이 성공적으로 안착했다고 평가한다. 선교사의 교육선교 일환으로 세워진 숭실대 연세대 이화여대 계명대 등 기독교 대학은 국가 근대화 과정에서 제 역할을 했다. 특히 숭실대는 일제강점기 청교도 신앙을 가진 미국 선교사 조지 섀넌 매큔(한국명 윤산온·1873~1941) 학장이 동방요배를 거부하고 학교 문을 닫은 역사가 있다. ‘진리와 봉사’라는 건학 이념에 충실했던 것이다.
기독교 대학의 채플은 일반대에선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제도다. 그렇기에 지원서에 채플 수강 의무 조항을 반드시 명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건학이념을 지키다 혹여 행정소송을 당해 학교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어서다. 채플에 참석한 학생 가운데는 졸거나 집중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기도 한다. 나중에 살펴보니 이런 상황에도 설교나 강의가 들려 시나브로 기독교 가치관에 젖어 든 제자들이 꽤 됐다. 심지어 채플 출석을 거부했던 졸업생 가운데는 채플에서 들었던 강사의 간증이나 합창단 찬양에 감동해 기독교에 호감이 생겼다는 경우도 꽤 된다. 그렇기에 채플은 학생의 기호에 맞는, 청년층과 소통이 잘 되는 강사를 섭외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지만 내용은 단순 교양 강의를 넘어 신앙적 가치를 전달해야 한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19) 숭실대가 명실상부한 기독교 대학임을 널리 알려
숭실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장 맡아
신앙강좌·기독교문화학술강연회 시작
기독교주제학술대회·신학세미나 열어
국내외 기독교학자들에게 인정받아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이 1995년 아시아기독교대학협회 강사로 인도네시아 페트라기독대를 방문해 교수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모습.
숭실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는 교회사학자이자 사학과 교수인 김양선 목사가 설립했다. 김 목사가 한국기독교박물관과 함께 숭실대에 기증해 대학교 소유가 됐다. 나는 1986년부터 두 차례(1986~1989, 1991~2003) 숭실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장을 맡았다.
이때 나는 숭실대가 명실상부한 기독교 대학임을 알리기 위해 신앙강좌와 기독교 문화 학술강연회를 열었다. 첫 신앙강좌는 86년 ‘한국 기독교와 신앙’이란 주제로 개최됐고 이듬해 책으로 출판됐다. 한국 기독교 신앙의 근본은 청교도적 복음주의이며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도 이는 위대한 유산이라는 것이다. 기독교문화포럼은 98년 ‘사이버 문화와 기독교 문화전략’이란 주제로 처음 열렸다. 이때 강의와 2003년 제6회 ‘영상으로 본 문화’ 등도 책으로 나왔다.
87년엔 기독교 주제 학술대회를 열어 국내외 기독교 학자를 대거 초청했다. 격년 주기로 14년간 8차례 열린 기독교 문화 및 신학 국제학술대회 내용으로 논문집도 냈다. 이때 초청한 국내 학자는 차영배 김의환 이종성 김영재 이장식 박봉배 김명혁 손봉호 등이다. 해외 학자로는 미국 신학자 칼 헨리, 독일 신학자 알브레히트 페터스, 뉴질랜드의 브루스 니콜스 등을 초청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기독교 신앙’이란 주제로 95년 열린 제4회 학술대회에는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리츨과 홍콩의 카버 유 등을, ‘21세기 시대정신과 개혁신앙’을 주제로 한 2000년 제7회 행사에는 독일 신학자 미하엘 벨커, 호주의 피터 해리슨 등을 초청했다. ‘21세기 기독교 문화와 복음주의 신앙’을 주제로 2001년 열린 제8회 학술대회에도 저명한 해외 학자가 한국을 방문해 논문을 발표했다. 이런 학술 활동은 신학과가 없는 숭실대가 97년 교육부에 기독교학 대학원 인가를 받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전국 목회자를 대상으로 하는 신학 세미나도 시작했다. ‘창조적 목회와 성경해석’을 주제로 93년 첫 세미나를 열어 2009년에 이르기까지 총 16회 개최했다. 이 세미나는 매년 2월 전국적 규모로 개최했다. 국내 목회자에게 숭실대가 기독교 대학이라는 걸 널리 알리는데 기여한 행사였다. 이 행사 역시 기독교 문화 및 신학 국제 학술 심포지엄과 함께 숭실대 기독교학 대학원 설립에 기반이 됐다.
숭실대에 몸담은 동안 아시아기독교대학협회(ACUCA) 강사로 선정된 것도 기억에 남는다. 95년 3월부터 4주간 대만 푸런대 둥하이대, 홍콩 링난대, 인도네시아 페트라기독대 파라향가톨릭대 등을 방문했다. 같은 해 6~7월엔 일본 국제기독교대학(ICU) 난잔대 도시샤대, 필리핀 라살대 센트럴필리핀대, 태국 파얍대 등에서 ‘현대신학과 개혁신학’ ‘기독교 문화’를 강연했다. ACUCA 소속 대학을 순방하며 다시금 느낀 게 있다. 한국 내 기독교 대학의 활동은 성공적이라는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20) 안식년 통해 신학 연구·출판 등 귀한 충전의 시간 가져
교수의 연구 활동 지원 많은 숭실대
재직 동안 4년 반의 해외 연구 허가
첫 안식년 때는 신학 박사 논문 완성
두세 번째엔 더 깊이 있는 신학 연구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이 안식년 기간 연구한 책 ‘하이데거에서 리꾀르까지’로 1989년 열암학술상을 수상하는 모습.
기독교 정신을 토대로 세워진 숭실대는 교수의 연구 활동을 지원하는 학교다. 학교는 내가 재직하는 동안 4년 반의 해외 체류 연구를 허가했다. 타 대학에 비교할 때 연구 여건이 좋은 학문적 분위기가 조성돼 있었다.
당시 강신명 총장의 허락으로 2년간의 첫 안식년을 독일 하이델베르크대와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에서 보냈다. 이 기간을 지난 6년간 준비했던 신학 박사 논문을 지도교수의 조언을 받아 수정, 제출하는 시간으로 활용했다. 하이델베르크대 신학 논문이 통과된 게 바로 이때다. 이후 미국 장로교 신학의 본산지인 프린스턴대에서 1년간 개혁신학을 연구하며 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조요한 총장의 허락으로 얻은 두 번째 안식년에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와 미국 예일대를 찾았다. 1년여의 영국 생활은 유서 깊은 교회사 현장을 방문하며 영국 청교도 신학을 깊이 체험하는 기회였다. 미국 예일대 신학부에서는 이곳에서 수학한 미국 신학자 조너선 에드워즈의 사상 및 청교도 신학을 연구할 수 있었다.
2004년에 맞은 세 번째 안식년에는 독일 보훔대와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를 찾았다. 1년여의 기간 중 보훔대에서 6개월을 지내면서 함부르크 등 독일 북쪽 지역의 종교개혁 현장을 둘러봤다. 그러고 나서 다시 대서양 건너의 미국 프린스턴대로 돌아와 6개월간 지내며 개혁신학에 더 깊이 천착했다.
안식년 기간에 연구한 내용을 정리해 1987년 ‘하이데거에서 리꾀르까지’를 펴냈다. 현대 해석학의 방향을 소개한 이 책으로 열암학술상을 수상했다.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에서 출발한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현상학적 사유를 해석학적 사유로 전향하게 된 과정을 밝혔다. 하이데거 이후에 독일 철학자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와 위르겐 하버마스,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와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에 이르는 필자의 사상 편력을 담았다. 리쾨르에 와서 철학적 해석학은 완성된다고 봤다. 1991년 출간한 ‘한국기독교 문화신학’은 네덜란드 수상이자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칼뱅주의 사상을 수용해 문화 변혁까지 이르는 사상으로 발전시키자는 착상으로 쓴 책이다. 한국 기독교가 칼뱅주의를 교회 테두리 안에서 협착하게 이해하는 걸 넘어서자는 취지였다.
1999년 한국장로교출판사에서 펴낸 ‘21세기와 개혁신학’ 1~3권으로는 숭실대에서 ‘교수저작상’을 받았다. 이 시리즈의 제1권 ‘21세기와 개혁사상’에서는 21세기 정보·세계화 시대의 도전 가운데 기독교 지성과 복음주의 신앙, 교회와 신학의 과제를 제시했다. 제2권 ‘포스트모더니즘과 개혁신학’에서는 종교 다원주의와 다양성 및 해체성이 특징인 포스트모더니즘을 정의하고 성경의 영감과 권위, 무오를 중시하는 개혁 신학의 과제를 논했다. 마지막 권인 ‘개혁신학의 현대적 이해’에서는 후기 현대주의 도전에 직면한 정통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복음화론 무속비판 철학 영성론 생태론 종말론 등 주요 교리를 다뤘다.
은퇴를 앞두고 연구 업적이 훌륭하고 강의에 충실했다는 공로로 2011년과 2012년 ‘숭실 펠로우십 교수’로 선정되는 영광도 안았다. 이후 1978년부터 34년간의 교수 활동을 마감하고 2012년 정년 퇴임했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숭실대에서 인생 황금기를 바쳐 봉사하고 건강하게 퇴임할 수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21) 한국복음주의협의회와 AEA에서 신학위원장으로 봉사
2002년 위촉 2018년까지 16년간 활동
‘열린 복음주의’ 종교개혁 전통 이으며
2008년부턴 AEA 신학위원장도 맡아
김영한(오른쪽 네 번째) 기독교학술원장이 경기도 청평의 한 쉼터에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임원들과 함께한 모습.
1978년 아시아로잔대회에 참석한 당시 한국 대표단이던 박조준 목사와 한철하 박사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한복협) 설립을 위한 준비 모임을 가졌다. 여기엔 조종남 정진경 임옥 김명혁 목사 등 복음주의 인사도 함께했다. 1981년 3월 17일 아세아연합신학원에서 한복협 창립총회를 열고 박조준 목사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박 목사가 초대회장이었으나 목회에 전념해야 하는 관계로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활동이 전개되진 못했다. 한국교회가 부흥하고 복음주의 운동이 확산하고 있었으나 협회 본부가 이를 결집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미국에서 10년 넘게 복음주의 신학을 공부하고 아퀴나스신학원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연구로 교회사와 역사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김명혁 목사가 발 벗고 나섰다. 이종윤 목사가 초기 총무로 봉사한 데 이어서 1984년부터 지속해 봉사했다. 온건 중도 성향의 목회자와 지도자가 참여해 결속력을 다졌다. 김 목사는 20년 이상 총무 역할을 맡아 한경직 정진경 임옥 김창인 최훈 목사 등 각 교단 어른을 연결하는 접촉제 역할을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한복협은 한국교회 공적 기관의 위상을 갖게 됐으며 복음주의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영락교회 충현교회 신촌성결교회 등을 거점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임원교회(강변교회 신촌성결교회 한국중앙교회 온누리교회 등)를 순방하면서 조찬기도회와 발표회 등을 열며 지속적인 모임을 열고 있다. 한복협은 발표 내용에 있어 정평이 나 있고, 동시에 균형 잡힌 교회 연합운동으로도 자리 잡았다.
2002년 김명혁 목사가 한복협 회장을 맡고 나는 신학위원장으로 위촉을 받아 그해부터 2018년까지 16년을 봉사했다. 한복협의 목적은 ‘열린 복음주의’다. 종교개혁 전통을 계승하되 교회 안에서만 충실한 기독교인이 아닌 하나님 주권 신앙을 갖고 세상에 나가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네덜란드의 복음주의 개혁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칼뱅주의는 좋은 지침이 됐다. 숭실대 재직 시 콘퍼런스에 초청했던 독일 신학자 알브레히트 페터스와 디트리히 리츨, 크리스천 링크와 미하엘 벨커, 미국 신학자 칼 헨리와 캐나다의 스탠리 그렌츠, 영국의 데이비드 퍼거슨, 뉴질랜드의 브루스 니콜스 등도 한복협 강단에 서는 등 열린 신학 포럼을 추구했다. 이들은 학문적 탁월함은 물론이고 복음주의 노선에 있는 명망 있는 국제 기독교 지도자였다.
2008년부터는 아시아복음주의연맹(AEA) 신학위원장으로 8년간 봉사했다. 세계복음주의연맹(WEA) 국제회장을 역임한 김상복 목사께서 AEA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고 나는 신학적 분야에서 자그마한 역할을 했다. AEA에서 활동하다 보면 한국교회의 위상이 특히 두드러진다. 한국이 동남아시아나 중국, 일본보다 늦게 기독교 선교를 받았지만 존 네비우스 선교사가 주창한 ‘네비우스 정책’이 한국교회에서 제대로 구현되었다는 점이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로부터 독립해 자립(自立) 자치(自治) 자전(自傳)을 실행하는 교회가 됐다. 규모의 성장과 함께 선교적 교회로도 성숙해간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22) 한국개혁신학회장 맡아 교계 공적 학술회로 발전시켜
20여 신학대 교수 30여 명 모여 창립
유럽의 개혁신학 전통을 한국교회와
신학에 소개·발전시킬 목적에서 출범
28년간 100회 이상의 학술대회 열어
김영한(왼쪽 네 번째) 기독교학술원장이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국개혁신학회 신년하례회에서 역대 회장단과 함께한 모습.
한국개혁신학회는 1996년 숭실대에서 나와 차영배 김영재 이형기 안봉호 김의원 이상직 권호덕 정일웅 김희성 송제근 김영선 이승구 등 20여 신학대 교수 30여명이 모여 창립했다. 정통 개혁신학을 추구하되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중심의 협소한 개혁주의 이해와 활동을 확장해 영국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의 개혁신학 전통을 한국교회와 신학에 소개하고 발전시키자는 목적에서 출범한 단체다. 나는 창립 학회에서 초대 회장으로 선출돼 4대 회장까지 7년간 봉사했다.
역대 회장은 이상직(호서대) 정일웅(총신대) 권호덕(백석대) 심창섭(총신대) 김영선(협성대) 주도홍(백석대) 김재성(수도국제대학원대) 이승구(합동신학대학원대) 이은선(안양대) 소기천(장로회신학대) 이경직(백석대) 교수다. 회원 간 유대가 끈끈해 임기 후에도 전임 회장들이 학회에 참가한다. 교단을 넘어 학문적 교제를 나누고 소통하는 화합의 장이다.
한국개혁신학회는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의 종교개혁 전통, 특히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도르트 신조를 계승한다. 여기서 나온 개혁교회와 루터교, 연합교회 전통 및 청교도 신학 전통을 연구해 창의적으로 계승하고자 한다. 정통 개혁주의를 추구하되 열린 신학적 유연성을 발휘하는 걸 권장한다. 하지만 복음주의 좌파의 ‘열린 유신론’(open theism)이나 ‘유신진화론’(theistic evolutionism)에 대해선 비판적 견해를 표명했다.
복음주의 좌파 신학자 클락 피녹이 주장한 열린 유신론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간 이성의 자유의지를 위해 제한한다. 인간의 죄를 어찌할 수 없는 무능한 하나님으로 전락시킨다는 게 학회의 지적이다. 또 포스트모던 신학의 인간 자유의지 남용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올해 서울신학대 유신진화론 논쟁에 대해선 학자의 양심의 자유는 옹호하면서도 과학의 성과를 성경 위에 두는 태도에 대해서는 거부했다. 신학적 이성주의에 대해 제동을 걸고 성경 계시 의존 사색(biblical revelation-relied thinking)의 창조론을 강조하는 성명서도 발표했다.
2024년에는 학회지 ‘한국개혁신학’이 학술진흥재단 우수학술지로 선정됐다. 학회는 매해 10월 학술대회를 열고 학술상 수상을 하고 있다. 2020년 우병훈(고신대) 2021년 조용석(안양대) 2022년 이은선(안양대) 2023년 박찬호(백석대) 한상화(아신대) 교수 등이 이 상을 받았다.
28년의 역사를 지닌 한국개혁신학회는 100회 이상의 학술대회를 열며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한국기독교학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공적 학술회로 발전했다. 여기엔 한국교회 부흥과 함께 이를 뒷받침하는 장로교와 성결교 감리교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등 초교파 동료 신학자를 길러낸 하나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23) 질병 통해 나를 낮추고 더 성숙하게 만드신 하나님
혈변 본 후 병원 찾았다 대장암 진단
다행히 림프 전이 되기 전 수술 받고
다시 건강 허락한 하나님 은혜에 감사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이 1992년 10월 숭실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원이 주최한 행사에서 ‘생태계 보전과 한국 기독교’를 주제로 강연하는 모습. 이로부터 4년 뒤 대장암이 발병했다.
50세에 접어든 1996년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는 질병이 찾아왔다. 바쁜 일정에 쫓기는 때라 건강에 대해 과신하면서 지냈다. 두 차례 장거리 운전을 한 뒤 화장실에 들렀는데 변기에 검붉은 피가 섞여 있는 것을 봤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따로 검진하진 않았다. 암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았고 일정이 바빴던 터라 치료 시기를 6개월 이상 놓친 것 같다.
집 근처 병원에 가보니 의사는 직장에 혹이 보인다고 큰 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받아보라고 했다. 대장의 혹에 대한 진단서를 들고 인하대병원을 찾았다. 내시경으로 들여다 본 담당 의사는 당장 입원하고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림프에 전이되기 직전 수술을 받아 다행이었다. 모든 스케줄이 순식간에 중단됐다. 당시는 숭실대 정규 수업 외에도 새문안교회의 언더우드 강좌 강연 약속이 잡힌 상태였다. 학교 수업과 외부 강연 스케줄을 취소하고 여러 검사를 마친 후 수술에 들어갔다. 강연은 취소할 수 있었으나 학교 수업은 3주나 휴강할 수 없어 숭실대 제자인 최태연 박사에게 부탁했다.
종양 제거 수술 후 2주간 회복 기간을 보내야 해 총 3주를 병원에서 지냈다. 나중에 아내를 통해 대장암 3기 말이란 진단이 나왔음을 들었다. 네덜란드에서 공부했던 선배 강유중 박사도 대장암으로 일찍 별세한 일이 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관함을 믿으면서도 암으로 생명이 스러지는 걸 보며 인간의 무력함을 절실히 느꼈다. 암이 전이되기 전 수술을 받게해 준 주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다.
암과의 투쟁에서는 그간 읽던 신학책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삶과 죽음의 문턱을 드나드는 이 기간엔 성경 말씀과 기도만 도움이 됐다. 특히 이 말씀이 와닿았다. “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하게 하시며 내 날을 짧게 하셨도다.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나이다.”(시 102:23~24) 암을 앓다 보니 암환자를 심방하거나 만날 때 깊이 위로할 수 있게 됐다. 하나님은 질병을 통해 나를 낮추고 성숙하게 하셨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시 107:10~11)
50년간 건강에 대해선 전혀 의식지 않고 살아왔으나 암 수술로 입원하고 보니 새로 생명을 받은 것처럼 느껴졌다. 새 삶을 허락한 하나님 은혜에 감사했다. 암은 향후 5년간 재발하지 않아야 완치된 것이라는 주치의 설명을 듣고 6개월에 한 번씩 병원에 가 검진을 받았다. 6개월마다 10번 병원을 다녔는데 의사가 이상없다고 할 때마다 감사가 나왔다. 5년 후에도 재발하지 않아 암에서 해방됐으나 건강에는 주의하게 됐다.
대장암 수술 후 25년이 경과한 지난 2021년, 서울대병원 강남보건원에서 아내의 권유에 마지못해 CT촬영을 했는데 초기 신장암이 발견됐다. 의사의 지시에 따라 제거 수술을 받았는데 25년 전보다 의술이 발전해 한 주 만에 정상 생활로 복귀했다. CT촬영으로 신장암을 조기에 발견하고 로봇 수술로 이를 제거한 데 감사하는 마음뿐이다. 육신 대신 주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24) “주여, 숭실대에 신학과·신학대학원 설립되게 하소서”
대장암 수술 후 병상에서 간절히 기도
숭실대 봉직 이유인 ‘신학 전공 설립’
하나님 응답받아 재직 20년 만에 이뤄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오른쪽)이 1998년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 예배를 드리는 모습.
1996년 인하대병원에서 대장암 수술 후 병상에서 간절히 기도한 게 있다. “숭실대에 신학과와 신학대학원을 세우기도 전에 데리고 가시나이까. 주여! 주님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다음 해인 1997년은 숭실대 설립 100주년이었다. 학내 백주년기념관에서 연 기념식에 참석하면서 다시 한번 기도했다. “주여, 이 대학의 정신이 되는 신학과와 신학대학원이 설립되게 하소서.”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고 건학 이념인 기독교 정신을 가진 숭실대에 신학연구기관이 없는 건 학교의 정신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신학 전공 설립이 내 봉직 이유였다.
하나님은 우리 간구를 들으시고 그분 뜻을 이루실 때 주변의 환경을 적합하게 조성해 준다. 예상치 못했던 좋은 일이 생겼다. 단설 대학원을 설립하고자 하는 국내 뜻있는 인사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김영삼정부의 교육부에서 단과대학 없는 단설대학원 설립 인가법을 통과한 것이다.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했다.
개인적 친분이 있던 이명현 전 교육부 장관을 이삼열 철학과 교수와 함께 찾았다. 이 전 장관에게 숭실대에 기독교학대학원이 있어야 할 필요성을 설득했다. 그러면서 그간 숭실대기독교문화연구소에서 개최한 목회자 세미나와 기독교문화 강좌, 국제 기독교 문화 및 신학학술대회를 개최한 자료를 제출했다. 이 전 장관은 담당자에게 내용을 잘 검토하라고 지시한 뒤 내게 물었다. “학부가 없는 기독교학대학원이 세워지면 누가 책임지고 이끌고 나가겠는가.”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명료히 대답했다. “제가 책임지고 할 것입니다.”
그해 가을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인가가 나왔다. 숭실대를 향한 하나님의 높은 뜻이 부족한 사람을 통해 20년 만에 이뤄진 것이다. 드디어 내가 숭실에 온 하나님의 뜻이 이뤄졌다. 암 투병 중 병상에서의 기도와 절규를 듣고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신 것이다. 생애 중 가장 보람을 느낀 시간이었다. 이런 노력의 대가를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고 그래야 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그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말씀이 이뤄진 것으로 믿었다. 하나님은 항상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사용한다.
교육부가 인가한 기독교학대학원에는 신청한 대로 4개 학과 허가가 나왔다. 나는 초대원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설립자로서 숭실의 신학은 숭실의 창립자인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의 네비우스 정신에 입각한 선교 신학을 계승하고 평양 숭실의 졸업생이요 한국 개혁신학의 정립자인 박형룡 박윤선 한경직 강신명 방지일 목사의 신앙과 신학을 계승하는 것이라 천명했다. 기독교신학과는 내가, 기독교문화학과는 박용우 교수, 기독교사화학과는 이삼열 교수, 목회상담학과는 박종삼 교수가 주임을 맡아 특색 있게 이끌어나갔다. 각 학과에 15명을 정원으로 출발했다.
숭실대에 재직한 지 20년 만에 기독교학과와 기독교학대학원이 설립됐다. 이후 이들 전공이 뿌리내리는 데 14년을 봉직했다. 2007년부터는 이효계 총장의 열정에 힘입어 박용우 김영종 교수, 김경완 전도사의 협력으로 교내에 숭실대학교회를 시작했다. 은퇴할 때까지 5년을 이 교회 담임목사로 예배를 집례했고 교제도 나눴다. 숭실대에서 1978년부터 2012년까지 총 34년을 봉직하게 해준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한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25) 한국기독교철학회 회장 맡아 2006년부터 6년간 봉사
1998년 서강대서 회원 20여명 모여 창립
다양한 주제를 기독교적 관점 연구 발표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가운데)은 숭실대 재직 중 한국기독교철학회 활동에도 힘썼다. 사진은 김 원장이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졸업 감사예배와 사은회에서 동료 교수들과 함께한 모습.
한국기독교철학회(한기철)는 1998년 4월 서강대에서 회원 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됐다. 나와 손봉호(서울대) 김성진(한림대) 강영안(서강대) 교수 등이 주축이 됐다. 우리 세대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할 땐 신앙적 사유를 전혀 배제하고 철학을 배웠다. 일반 대학 철학과에 종교철학이 있긴 했으나 해당 시간은 인도철학이나 불교철학에 자리를 내주곤 했다.
하지만 한기철이 창립하면서 일반 철학의 영역에서도 신앙적 진리를 담은 주장을 펼 수 있는 사유적 공간이 마련됐다. 한기철에서는 철학 인공지능 윤리 경제 등 다양한 주제를 기독교적 관점으로 연구해 발표했다. 복음주의적 신앙을 가진 학자가 모인 경건한 분위기 또한 한기철의 특징이다. 항상 시작과 끝을 기도로 마친다. 토론 내용과 분위기도 신학회에서 하는 것처럼 경건했다. 정통 기독교 신앙에 가깝고 친숙한 모임임을 느낄 수 있는 학회였다.
나는 2006년부터 2012년까지 6년을 회장으로 봉사했다. 역대 회장으로는 손봉호 김성진 강영안 신상형 강학순 박창균 이경직 양성만 최태연 교수가 수고했다. 현재는 김종걸 교수(침신대)가 봉사하고 있다. 정기철 신응철 최한빈 교수도 이사로 섬기고 있다. 최태연 김종걸 정기철 교수는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 전공자로서 기도하는 학자들이다.
학회에서는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타자철학’이 에드문트 후설이나 마르틴 하이데거의 자아중심적 철학에 대한 대안으로 논의됐다. 내 관점에선 기독교 철학은 좁은 의미에서 기독교 관점의 인식론이다. 넓은 의미에서 기독교 세계관학으로 나아가야 한다. 기독교 철학은 로고스(이성)의 원천을 추구하기에 궁극적으로는 궁극학으로 나아간다고 본다.
학회 출판물로는 2005년 회원학자들이 공저한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IVP)이 있다. 한기철은 한국철학회 내 한 분과로 참여하고 있다. 일반 철학을 수용하고 그 지식의 기초 위에서 성경적이고 신앙적 지식과 사유를 추구한다. 한국 철학의 태두(泰斗)라 불리는 박종홍 전 서울대 교수는 말년에 기독교 신앙으로 귀의해 강신명 새문안교회 목사에 세례를 받은 뒤 별세했다. 김태길 전 서울대 교수 역시 말년에 기독교 신앙에 귀의했다. 중세철학을 강의한 김규영 전 서강대 교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내가 은사로 모신 조가경 전 서울대 교수도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분이었다.
진정한 철학은 ‘무전제 사유’나 ‘무신론’에 그치지 않는다. 무신론은 허무주의로 끝나고 만다. 범신론은 ‘모든 것이 신’이라고 보기에 결국은 운명에 내맡기게 된다. 진정한 철학은 모든 것의 의미를 인정하는 근거인 ‘인격적인 창조자’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현재 104세로 건강하게 공적 활동을 하고 있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기독교 사상 전도사’라고 할 정도로 교회에서 신앙 강좌를 하며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 은총에 대해 역설하는 1세대 기독교 철학자다. 김형석 교수는 기독교를 “축복의 종교”로 정의하며 기복을 추구하는 재래 종교와 차별화한다.
학술지 ‘기독교철학’은 연 2회 발간한다. 최근엔 학진 등재후보지가 됐다. 신앙을 가진 젊은 학자가 학문적으로 신앙적 진리를 펴나갈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는 의미다. 이 배후에는 기도하며 세속 사상과 성별 되고자 했던 한국교회가 있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26) 기독교학술원 2대 원장으로 섬기며 개혁신학 계승 발전
성령 사역 인정하는 성경적 영성운동이자
개혁신학 정립과 계승 발전이 창립 목적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앞줄 오른쪽 네 번째)이 2009년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제12회 학술대회 후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 기독교학술원 제공
숭실대 재직 중인 1982년 2월 차영배 총신대 교수가 연구실을 방문했다. “성령 사역을 인정하는 개혁신학을 정립하자”는 제안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동의한 나는 기독교학술원을 창립을 준비했다. 창립위원으로는 나와 차영배(총신대) 오성춘(장신대) 이재범(순신대) 교수가 참가했다. 김종혁 평택대 교수는 1990년대에 참여했다. 초대교회 이후 성령의 지속적 사역을 인정하는 성경적 영성운동이자 교회 친화적 정통 개혁신학의 창의적 계승 발전이 우리의 창립 목적이다. 초대원장인 차 교수는 82년부터 97년까지 섬기고 총신대 총장 취임 후엔 대표를 지냈다. 그 이듬해부터 나는 2대 원장으로 섬기고 있다. 취임 첫해부터 학술원 공개강좌를 매월 개최했다.
무엇보다 기독교학술원은 목회자가 말씀과 성령이 균형 잡힌 개혁신학으로 성도를 훈련할 수 있도록 건전한 성령신학과 영성신학 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82년 서울 창신교회에서 목회자 세미나를 개최했다. 삼위일체론 기독론 성령론 교회론 기독교 영성론 등을 주제로 강의했고 네덜란드 개혁신학자도 초청해 학술원 교수들과 함께 강의하는 자리도 마련했다. 미국 신학자 벤저민 워필드가 주장한 ‘은사중단론’에 대해 성령의 지속적 사역을 인정한 영국의 복음주의 설교가 마틴 로이드 존스의 계시 의존 신앙과 사색(revelation-relied faith & thinking)을 계승·발전시키자는 의도였다.
학술원 고문으로는 림인식 민경배 박조준 최복규 김영재 성기호 한철하 박봉배 조종남 김명혁 박사 등 개신교 주요 학자와 목회자 원로를 모셨다. 초창기 연구위원으로는 박형용(합신대) 정일웅(총신대) 김중은(장신대) 이수영(새문안교회) 오영석(한신대) 김균진 이양호(연세대) 김홍기(감신대) 교수 등이 활동했다. 2009년부터는 오성종 교수(칼빈대 신대원장)가 교무부장에, 박봉규 목사가 사무총장으로 섬기고 있다. 현재 상임이사로는 나를 비롯해 여주봉 이재훈 오성종 박봉규 김윤태 윤상문 정기영 박명룡 임우성 목사가 섬기고 있다.
2016년부터는 온누리교회 후원으로 ‘영성신학 수사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교부의 영성을 연구하면서 수련하는 과정이다. 8학기를 이수하면 학술원 명의 수사증을 수여한다. 2024년 현재까지 6명의 수사를 배출했다.
기독교학술원은 성령 사역의 지속론을 천명한다. 성령의 역사가 초대교회 이후 중단된 게 아니라 복음 전도와 선교가 이뤄지는 현장에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증언하고자 했다. 그 구체적인 실례가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이다. 17세기 경건주의 운동과 18세기 모라비안 운동, 존 웨슬리의 부흥 운동과 미국 뉴잉글랜드의 1차 대각성 운동이 그랬다. 19세기 미국의 찰스 피니를 중심으로 한 2차 대각성 운동과 20세기의 미국 아주사 거리의 부흥 운동, 한국의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과 1970년대 대부흥 운동도 마찬가지다.
이외에도 기독교학술원은 교계의 여러 사역을 지원하고 있다. 창조과학회와는 학문적 유대를 갖고 창조론을 옹호한다. 하나님 창조에 관한 과학적 증거를 연구하는 이들의 활동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목회자의 영적 쇄신을 위한 자리도 마련했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27) 기독교학술원 영성아카데미 영성신학 수사과정 개설
성결 순종 섬김 실천 추구하고
그리스도와 연합 실천 목표로…
8학기 이수할 경우 수사 학위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앞줄 가운데)이 2012년 서울 종로구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기독교학술원 30주년 영성포럼 국제학술대회’에서 국내외 학자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모습.
기독교학술원은 2016년 영성아카데미 영성신학 수사과정을 개설했다. 교수진은 복음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신학자로 총장급 학자이자 목회자로 구성했다. 차영배 박봉배 조종남 이종성 박창환 김명혁 박조준 최복규 김영재 박사 등이 깊은 신앙과 덕성을 갖춘 강의를 했다. 기독교학술원의 영성 추구는 성결 순종 섬김 실천이다. 실천 목표는 그리스도와 연합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영성신학 수사과정은 3가지 목표를 추구한다. 첫째 개혁신학의 영성을 전인격적으로 탐구하고 죄를 죽이고 새사람을 입는다.(고후 5:17, 롬 8:13, 엡 4:24) 둘째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을 추구하며 성결 순종 섬김을 실천한다.(롬 6:6, 갈 2:20, 빌 1:20) 셋째 삶의 전 영역 가운데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한다.(마 6:33, 고전 10:31, 고전 3:23)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좇아야 한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 5:16) 그 방법으로는 첫째 서로 존중하고 가르침에 순종해야 한다. 둘째 원내에서 침묵하며 대화 시 덕담한다. 셋째 쉬지 않고 기도하며 노동과 봉사를 실천한다.
이레니우스와 테르툴리아누스, 안토니우스와 암브로시우스, 요한 크리소스톰과 아타나시우스 및 카파도키아 교부(성 바질, 니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아우구스티누스, 히에로니무스 등 동서방교회 교부의 영성을 연구하면서 이들의 경건과 기도, 삶을 배운다. 교부들은 수도원에서 성결 순종 섬김의 삶을 일상에서 실천했다. 수도원 영성은 중세 기독교 영성이 로마 가톨릭의 교황 중심 성례전주의에서 벗어나 성령과 말씀 중심의 영성을 형성하도록 이끌었다.
마르틴 루터와 울리히 츠빙글리, 장 칼뱅과 존 녹스, 존 오웬과 존 웨슬리, 리처드 백스터와 마틴 로이드 존스, 제임스 패커와 존 스토트, 빌리 그레이엄 등 종교개혁자와 청교도 영성가의 영성을 연구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도 추구한다. 영성의 길은 세상의 성공과 출세를 추구하는 영광의 길이 아니다. 죄의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이다.
영성의 길은 현실 도피가 아니다. 날마다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다. 학술원이 발행한 영성신학 총서는 ‘개혁주의 영성의 기초’(제1권)와 ‘관상 기도, 성령의 은사, 방언’(제3권), ‘교회갱신, 예수 영성, 올바른 예배, 새벽기도’(제4권), ‘자살대책, 화평운동, 방언연구, 성령세례’(제5권) 등이다. 올 7월엔 ‘제1회 말씀, 기도 목회 세미나’도 시작했다.
기독교학술원은 은사를 인정하나 은사주의를 추구하지 않는다. 기적이나 신비를 인정하나 기적주의나 신비주의를 추구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자가 추구한 말씀과 성령의 균형 잡힌 영성을 추구한다. 수사과정 지원 목회자는 학력 수준이 대체로 높아 석사 과정은 물론이고 박사 학위자도 적잖다. 기독교학술원은 8학기를 이수할 경우 이들에게 수사 학위를 준다. 영성 단련이 목적이기에 제도적 과정을 넘어서고자 함이다. 현재까지 이 과정을 마치고 배출한 수사는 6명이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28) 개혁주의이론실천학회인 ‘샬롬나비’ 창립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이 지난해 10월 경기도 과천소망교회에서 열린 ‘제52회 월례포럼’에서 발언하고 있다. 샬롬을꿈꾸는나비행동 제공
개혁주의이론실천학회인 샬롬을꿈꾸는나비행동(샬롬나비) 설립 제안은 내가 발제한 ‘존 스토트의 사회문제 이슈’ 세미나에서 나왔다. 개혁 신앙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소명을 지닌 단체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뜻있는 목회자들의 기도 가운데 샬롬나비는 2010년 서울 신반포중앙교회에서 창립했다. 경기도 과천소망교회와 서울 동산교회를 중심으로 모이며 결의를 다짐하고 있다.
샬롬나비는 기독교 시민단체로 다음을 천명했다. “교회는 정의와 양심의 최후 보루이면서 극빈층과 사회 낙오자에게 사다리를 제공하는 사회 안전망 역할을 해야 한다. 샬롬나비는 이와 함께 극단적인 양극화와 보·혁의 이분법적 구조 속에서 침묵하는 중도의 생각을 드러내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파편적으로나마 실현하고자 현실 사회에 적극 참여할 것이다.”
샬롬나비는 ‘모든 문제는 나에게서 비롯된다’는 사고와 책임 윤리로 세상에 하나님의 평화를 실현하는 이상을 꿈꾸며 자신부터 개혁하기 위해 출범했다. 학회 활동의 중심을 실천에 두고 사회 변혁에 나서겠다는 의미다. 이 단체의 중심 단어는 ‘나비’다. 숲속 나비의 펄럭임이 대양에 폭풍우를 가져오듯 개인들이 신앙의 실천으로 결집하면 거대한 사회 변혁 효과가 있을 것이란 의지를 담았다. 구약에서 회개와 변화를 촉구했던 ‘예언자’가 히브리어로 ‘나비’인 점도 고려했다. 교계 주요 인사도 샬롬나비에 동참하고 있다. 고문에 김명혁 김상복 목사, 민경배(서울장신대) 박봉배(목원대) 손봉호(동덕여대) 전 총장 등이 이름을 올렸다.
샬롬나비 학술지는 2011년 창간호부터 올해 제27호까지 발행됐다. 제목으로 시대와 신학의 흐름이 반영돼 있어 여기 옮겨보고자 한다. 창간호 제목은 ‘선진 한국과 기독교의 역할’이며 제2호는 ‘공정사회를 위한 기독교의 역할’, 제3호는 ‘사회정의와 기독교’다. 이듬해 발행한 제4~5호에선 ‘경제정의와 기독교’ ‘교육개혁과 기독교’를 다뤘다. 2013년 펴낸 제6~7호엔 ‘한국교회의 개혁’과 ‘한국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논했다.
2015년 제8~10호에선 ‘세습 문제와 건강한 목회 지도력 계승’ ‘세월호 참사가 주는 교훈’ ‘대형교회와 소형교회의 상생’이 주제였다. 2016년에 이르러는 제11호에서 ‘동성애 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를 논했다. 제12~13호는 2017년 발행했는데 ‘한국 근·현대사 어떻게 볼 것인가’와 ‘고령화의 시대 한국교회’를 조명했다. 제14호를 맞은 2018년엔 ‘바람직한 지도자상(기독교적 관점)’을, 이듬해엔 ‘동성애, 과연 인권인가’를 다뤘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로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와 기독교’ ‘대한민국의 미래와 교회’ ‘교회와 정치’ ‘코로나 이후 우리 사회와 한국교회’ 등을 조명했다. 올해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과 기독교’와 ‘4차산업혁명 시대 AI와 기독교’를 주제로 발행했다. 샬롬나비 동지들과 이은선 편집위원장 및 이일호(칼빈대) 소기천(장신대) 김윤태(백석대) 교수 등 역대 사무총장이 헌신한 결과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29) 교회 넘어 사회 향한 개혁 실천 운동 펼치는 ‘나비행동’
이론 정립과 실천 주안점 둔 ‘샬롬나비’
한국 사회와 교회 향한 10대 과제 선정
시민운동으로 잇는 실천강령도 제정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왼쪽 세 번째)이 샬롬나비 학회원들과 지난 5월 서울 영등포구 광야교회를 방문해 어르신과 노숙인을 대상으로 한 점심 배식 봉사에 나선 모습. 샬롬나비 제공
샬롬을꿈꾸는나비행동(샬롬나비)은 이론 정립과 더불어 실천에 주안점을 둔다. 한국 사회와 교회를 향한 10대 과제를 선정하고 자기 개혁에서 시작한 ‘나비 행동’이 시민운동으로 이어지도록 실천 강령을 제정했다.
샬롬나비 운동의 신학적 근거는 ‘열린 개혁신학과 신칼뱅주의’다. 열린 개혁신학이란 생각이 다른 상대를 적으로 간주하는 게 아니라 그와 대화하고 공감하며 공통점을 찾는다는 의미의 칼뱅주의다. 교회에 국한한 신앙 운동이 아니라 교회에서 세상으로 확산하는 신앙 운동이란 뜻도 담았다. 네덜란드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칼뱅주의처럼 칼뱅주의를 기독교 세계관으로 실천하는 성경적 문화 변혁 운동이다.
먼저 한국 사회를 향한 개혁 과제는 ‘신뢰 공동체 건설’이다.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란 성경 말씀에 근거한다. 한국 사회를 향한 10대 과제는 나눔 돌봄, 약자 세움, 상생 공영, 자유 민주, 선진 도덕, 생명 존엄, 생태 보존, 세계 평화, 경천 박애, 정의 실현이다. 개인이 실천하는 ‘나비 행동’은 일상 속 운동을 지향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분야의 실천 과제를 마련해 실례를 제시하고 학술지를 발간하며 뜻을 함께하는 단체와 연대해 문화변혁 운동을 벌이고자 한다.
한국교회를 향한 10대 과제는 ‘화평공동체’를 추구하는 것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에 근거한다. 세상을 섬기자, 가난한 자를 돌보자, 소외자의 안식처가 되자, 성화(聖化)를 생활화하자, 정의의 보루 되자, 사랑 공동체 되자, 말씀 공동체 되자, 성령 공동체 되자, 샬롬 공동체 되자, 세계 복음화하자 등이 주요 주제다. 샬롬나비는 ‘학회가 상아탑 안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갈등과 분열의 역사를 극복하고 보다 행복한 사회를 꾸릴 기반을 구축하는 일에 앞장서고자 한다.
시민윤리 실천강령으로는 ‘감사하고 나누고 섬기자’로 정했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살전 5:11)는 말씀에 바탕을 둔다. 실천윤리는 힘써 일하고 범사에 감사하자, 배려하며 함께 나누자, 사랑하며 서로 섬기자 등으로 구체화했다. 종교개혁자가 강조한 삶의 소명의식에 칼뱅주의자의 청교도 정신을 바탕으로 했다.
샬롬나비는 우리 사회의 기독교적 양심을 대변하고 선진 사회를 꿈꾸는 건전한 시민양식을 결집해 젊은 세대도 규합하고자 한다. 실천 윤리는 ‘겸손하고 정직하며 검소한 삶을 살자’다. “참되며…경건하며…옳으며…정결하며…사랑받을 만하며…칭찬받을 만하며…”(빌 4:8)란 말씀에 힘입어 겸손하고 정직하며 검소하고자 한다.
샬롬나비는 지난 14년 동안 매주 월요일 논평을 발표했다. 이은선 안양대 명예교수가 위원장으로 헌신하고 있다. 샬롬나비는 지난 2010년부터 세간에 발표한 10년간의 논평문을 모아 2020년 ‘샬롬나비 논평문집’을 발간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인자와 정의에 입각한 예배와 선교, 화평 공동체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동시에 한국 사회는 제헌 헌법 정신에 따라 자유 민주주의 정체성과 상생 공영 공존의 신뢰공동체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천명했다. 화평 공동체와 신뢰 공동체는 하나님의 인자와 공의가 이뤄지는 사회다.
***[역경의 열매] 김영한 (30·끝) “여호와 하나님 나라 위해 목숨 다해 섬기고 싶다”
독일서 신학 공부하며 틸리케 영향
한국교회와 신학계 신앙 선배들에게
신앙 목회 등 배우며 큰 영향 받아
숭실대 34년 재임 동안 230편 출간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이 최근 서울 서초구 기독교학술원 집무실에서 그간 집필한 저서를 설명한 뒤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찬양하는 신학을 하기 위해 철학을 공부했다. 그렇기에 내가 추구한 철학은 본래부터 신학적 철학이다. 기독교 철학이란 계시적 사유에서 전개하는 신앙 우위적 사유다. 기독교 신학과 그 사유적 본질에서는 다르지 않고 단지 대상의 차이만 있다.
조가경 교수에게 수학한 서울대 철학과 시절 현상학적 사유에 대한 독일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다. 현상학적 사유는 편견을 제거하고 ‘사상 그 자체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현상학적 사유는 유아(唯我)론적 사유 차원에 그치고 타자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진 못한다. 프랑스 기독교 철학자 폴 리쾨르는 인간 사유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죄성을 인정하면서 현상학적 사유를 해석학적 사유로 전환했다. 그는 성경 말씀으로 인간에게 다가오는 하나님 계시에 대해 열려 있었다. 철학은 ‘초풍성의 법칙’(law of superabundance)을 제시하는 계시를 통해 풍성해진다.
나는 독일에서 신학을 공부했으나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엔 동의할 수 없었다. 내 저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바르트 신학에는 구체적인 역사가 없고 성경의 영감설이 주관적이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인격적 관계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가 원리적으로 이해되며 예정론을 보편 기독론적으로 해석한다. 바르트가 독일 본대학교 교수 시절 학생이었던 복음주의 조직신학자 헬무트 틸리케는 바르트의 신학에 대안을 제시했다. 틸리케는 ‘개신교 신앙’과 ‘기독교 윤리학’ 등의 저서에서 현대 신학 속 ‘데카르트적 사유’의 한계성을 지적하며 말씀에 대한 성령론적 반성으로 계시적 사유를 제시했다. 나는 틸리케의 신학과 윤리로부터 사유의 영향을 받았다. 저서 ‘헬무트 틸리케’가 그 연구의 작은 결실이다.
한국교회와 신학계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한국 복음주의 신앙 선배인 박형룡 목사의 정통 개혁신학과 박윤선 목사의 계시 우위의 사유, 한경직 목사의 청교도적 포용 목회, 김창인 목사의 효성 신앙 목회 등이다. 신학자 차영배에게는 순수한 성령론적 사유를, 박조준 목사에겐 청교도 신앙 목회를 배웠다. 오늘날까지 42년간 기독교학술원에서 봉사할 수 있던 건 1982년 당시 차영배 총신대 교수께서 숭실대로 찾아와 후학에게 “성령을 인정하는 정통 개혁신학을 해보자”는 다정한 권유에 기인했다. 이에 동의해 기독교학술원이 오늘에 이르렀다. 매 학기 기독교학술원에서 영성 강의를 해온 김명혁 목사는 올해 2월 미자립교회에 설교하러 가다 교통사고로 별세했다. 김 목사는 신행일치의 순교적 삶을 보여준 귀감의 선배였다.
숭실대에서 1983년부터 34년간 봉직한 나는 2012년에 정년퇴임을 했다. 재임 동안 출판한 논문은 ‘현상학과 신칸트주의’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철학의 가능성 근거와 과제’ 등 230편이다. 편역서는 ‘루터신학 개요’, 편저는 ‘기독교와 문화’ 등 20여권이다. 단행본은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하이데거에서 리쾨르까지’ ‘포스트모던 시대의 세계관’ 등 23권이다. 정년 퇴임 후 12년이 훌쩍 지나 이제 팔순(旬)을 내다본다. 앞으로도 이 말씀을 새기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목숨 다해 섬기고 싶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시 103:2,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