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웅산과 천왕산
지난 번 한식 때 이천 모가면의 장인, 장모님 산소에 성묘 갔다가 셋째 동서와 개웅산을 가기로 하였다. 서울에 있는 산은 웬만큼 돌았고, 또 서울시 경계를 이루는 능선도 거의 다 걸어보았는데, 동서를 보는 순간 동서의 집 뒷산인 개웅산을 아직 가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난 것이다. 개웅산은 동네 사람들이나 올라가는 야산이지만 그래도 안 가본 산이고, 동서와 함께 산을 걷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싶어 오늘(2010. 4. 28.) 개웅산을 찾아나선다.
개봉역을 내리니 도순이 형님이 내가 약속한 음식점을 찾지 못할까봐 역 광장까지 나와 계신다. 형님과 함께 간단히 점심을 먹고 산을 오르려했는데, 음식점에는 처형과 처조카 부부까지 나와 있다. 부부가 같이 선생을 하는 처조카 부부도 뜻하지 않게 만나니 반가움이 더하는 것 같다.
아구찜을 맛있게 먹고 식당문을 나와 거리를 걷는데, 오래간만에 이 동네에 오니 거리 모양이 좀 바뀐 것 같다. 지상의 남부순환로는 철거되고 지하로 달려가기 위해 공사중이다. 전에 이곳에 오면 남부순환로의 장벽에 의하여 시선까지 차단되어 남부순환로의 이쪽과 저쪽 동네는 옆에 그런 동네가 있었냐는 듯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별개의 동네였는데 지금은 서로가 마주 보며 마음만 먹으면 건너올 수가 있게 되었다. 요새 자전거 도로도 점점 늘어나는데, 이렇게 차가 우선인 세상에서 사람이 우선인 세상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형님네 동네 골목길을 오르는데 담벼락에 동판으로 ‘깨끗한 골목길’이라고 붙여놓은 것이 보인다. 주택이 많고 골목길이 많은 구로구에서 깨끗한 골목길을 만들기 위하여 이런 운동도 벌이고 있구나. 전에 이 골목길을 지날 때에는 길에 떨어진 휴지를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깨끗한 골목길’답게 휴지 한 장 보이지 않는다. 이런 깨끗한 골목길은 일본에서나 볼 수 있을 줄 알았더니... 형님 얘기로는 이 골목 사람들이 ‘깨끗한 골목길’을 유지하기 위하여 아예 청소부까지 고용하여 계속 골목길을 쓸고 닦는다고 하네.
2:20경 주택가를 벗어나 개웅산으로 들어서니 이미 녹색물이 노란물을 밀어내고 있는 개나리가 양옆에 도열하여 우리를 맞이한다. 콘크리트 포장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군부대 정문이 막아선다. 이 조그만 산에도 아직 군부대가 버티고 있구나.
길을 돌아나와 이제 제대로 된 등산로로 오르는데, 길옆에 이해인 수녀의 ‘제비꽃 연가’ 시가 제비꽃 사진을 배경으로 쓰여 있다. “나를 받아 주십시오... 당신이 가까이 오셔야 내 작은 가슴 속엔 하늘이 출렁일 수 있고, 내가 앉은 이 세상은 아름다운 집이 됩니다.... 나를 받아 주십시오.” 이해인 수녀님의 시는 언제보아도 참 맑다. 수녀님의 고운 심성이 시에 그대로 담겨 있기에, 이렇게 산에 오를 때 보이는 시중에 이해인 수녀님의 시가 많은 것이리라.
한쪽 길가에서는 한 어머니가 아이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그런데 이 꼬마 녀석들은 평범하게 찍히는 것은 싫다며 눈을 쫑긋하거나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는 등 사진 모델에 열심이다. 하하! 녀석들! 이런 녀석들이라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카메라를 들이대겠다. 해발 125m 밖에 안 되는 산이니, 천천히 걸었는데도 벌써 정상이 눈앞이다. 우리는 정상을 눈앞에 두고 개웅산 반대편 사면을 삼각형 모양으로 돌아서 정상에 오르기로 하였다.
길을 따라 2부 능선까지 내려가 다시 천천히 오르는데 약수터도 있다. 나는 관악산 약수터에서도 음료수 부적합의 경고판을 본 적이 있고, 또 구로공단이 가깝지 않느냐는 선입견에 이곳 약수터도 당연히 부적합으로 생각하며 안내판을 보는데, ‘어? 적합이라고 되어 있네?’ 약수터를 지나 오르는 길 가운데 나무 밑에 이건 뭐야? ‘어? 이런 곳에 고사리도 있네?’ 도심 한가운데의 야산이라고 하여 은근히 얕보았더니, 개웅산은 도심의 혼탁함을 저 멀리 밀어내고 순수함을 지켜내고 있구나.
이번에 나타나는 것은 류시화 시인의 시 ‘새와 나무’
여기 바람 한 점 없는 산 속에 서면
나무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뭇가지 하나만 흔들린다
그것은 새가
그 위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별일 없이 살아가는 뭇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나는 지금 흔들리는가, 고요히 명징의 세계에서 관조하고 있는가? 3:25경 개웅산 정상에 서니, 남쪽에서는 목감천이 올라와 안양천을 만나기 위하여 바로 개웅산 앞에서 왼쪽으로 돌아가고 있고, 목감천 왼쪽 천변에선 광명 스피드돔의 은빛 지붕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저 스피드돔 안에서는 지금도 한창 경륜으로 열을 올리고 있을까?
남동쪽으로 광명시가지 건너편에는 도덕산 - 구름산 - 서독산 - 수리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다. 재작년 5월에 저 도덕산에서 출발하여 수리산을 향하여 나 홀로 허위허위 달려나갔지. 그 때 길 없는 숲속으로 들어가 휴대용 내비게이션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길을 찾아 나오기도 하고... 도덕산 너머로 보이는 보다 덩치가 큰 산은 당연히 관악산이겠지?
목감천 오른쪽으로는 수리산을 거쳐 올라오는 한남정맥이 양지산을 지나 할미산에서 손을 이쪽으로 뻗는 한편, 방향을 인천 쪽으로 틀어 소래산으로 가고 있다. 삼각형 모양의 소래산은 어디서든 주변 산에서 자기 모습을 금방 도드라지게 보이게 하기에, 여기서도 소래산은 금방 자기 여기 있다고 손짓한다. 소래산을 지난 한남정맥은 인천을 품에 안으며 계양산에서 한 번 더 높게 솟은 후 야산이 되어 김포평야를 조용조용 나아가다가 강화대교 옆에서 문수산으로 한 번 더 고개짓을 하고 서해로 사라지지.
소래산에서 눈을 오른쪽으로 돌리니 계양산 또한 저 멀리서 금방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인천의 한남정맥을 하루 종일 걷던 것도 재작년이었던가? 몸을 뒤로 하니 오류동 시가지 건너 매봉산과 서울과 부천의 경계를 이루는 야산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눈짓한다. 개봉동이라는 동네 이름도 개웅산의 ‘개’와 매봉산의 ‘봉’이 합쳐져서 된 것이라던가?
개웅산은 125m밖에 안 되는 야산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이 산에서 봉화를 올렸다 하고, 3.1. 운동 때도 마을 주민들이 이 산에서 봉화를 올리며 일제에 항거하였다고 한다. 일제 시대에는 이곳 개웅산 산기슭에서 온천물보다는 조금 온도가 낮은 온수가 나와 일본인이 오류장이라는 요정을 지었고, 이 오류장은 이광수의 소설에도 나온다고 하네. 어떤 소설에 나온다는 얘기지?
근처의 구로구 온수동도 바로 더운 물이 나온다고 하여 온수동이 아닌가? 세종실록에도 온수동에 온수가 나온다고 하여 수맥을 제대로 찾아보라 하는데도 이곳 백성들이 제대로 찾으려고 하지 않아 명령불복종으로 이 지역의 도호부를 폐하고 현으로 강등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고 한다. 백성들로서야 온수가 나와 봤자 오히려 피부병 환자들 몰려오고 온천 개발하여 관리도 제대로 못하면 되레 농사에 피해나 주고 관리들 등살도 더 심해질 테니 온수 찾는 것이 탐탁지 않았을 것. 요즈음도 온천을 찾는 사람들이 이 일대를 탐사하고 있지만 아직 경제성 있는 온수는 찾지 못하였다는데, 그 옛날 백성들이 꼭꼭 숨겨놓았나?
이제 나는 건너편에 보이는 천왕산까지 가보기 위해 형님네 식구와 작별하고 올라올 때와는 반대쪽 사면으로 내려와 천왕역에서 길을 건넌다. 길 건너편 천왕산 자락에는 서울도시개발공사에서 한창 장기 임대아파트 공사중이다. 길가 비닐하우스 유리문에 빨간색 페인트로 구호가 적혀있다. ‘투쟁 없이 쟁취 없다.’ ‘투쟁하는 철거민이 철거에서 해방된다.’ 여기도 예외는 아니군. 재개발 지역마다 나타나는 사업시행자와 철거민과의 갈등. 이런 갈등이 용산 철거민 사태에서는 사람들의 죽음을 불러냈지. 투쟁과 갈등이 없는 재개발이란 이상향에서나 있는 얘기인가?
빨간색 구호가 쓰인 문 옆에는 ‘화장실, 여성 동지는 천왕역으로’ 열악한 비닐하우스를 대책위원회 사무실로 쓰다보니 여성의 생리해결은 근처 천왕역에서 해결해야 하는군. 좀 불편하긴 하겠지만 위원회 사무실의 화장실보다는 천왕역 화장실이 훨씬 깨끗하고 위생적이겠지.
한창 아파트 공사중이다보니 천왕산으로 오르는 들머리를 금방 찾을 수가 없다. 조금 헤매다 길 없는 곳을 그냥 가로지르니 겨우 길이 나타난다. 천왕산을 오르면서 뒤를 돌아보니 개웅산 위로 여객기가 날아가고 있다. 김포공항에서 뜨고 내리는 비행기의 항로가 개웅산 위로 지나가기에 이곳에서는 비행기를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오르다보니 웬 아줌마들이 길 옆 관목에서 열심히 잎사귀를 따고 있다. 궁금하여 물어보니 홋잎나물이란다. 새잎이 돋아 잎이 말랑말랑한 이때에 따다가 나물을 해먹으면 그 맛이 그만이란다. 그런데 홋잎나물의 줄기는 넓적하면서도 얇은 면이 줄기 중심을 따라 길게 올라가면서 중간 중간에 잘려있다. 그래서 이름도 화살나무다. 아닌게 아니라 활 시위를 먹이는 화살처럼 보인다. 그런데 지나가는 아저씨 왈, “아줌마! 남들 보라고 심어놓은 나무 잎을 그렇게 다 따 가버리면 어떻게 해요!” 그렇지? 다른 사람들 위해서 좀 남겨둬야겠지?
4:23경 해발 145.6m의 천왕산 꼭대기에 올랐다. 아까 개웅산에서 보이던 소래산과 계양산은 천왕산에 오니 그만큼 더 가까워 보인다. 남쪽에서는 한남정맥의 구릉들이 천왕산으로 올라오고 있어, 나는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더 전진해본다. 건너간 봉우리에서 보이는 맞은편 봉우리는 서울시와 경기도의 경계에 서있는 건지산. 이왕이면 경계에 서고 싶으나 형님과 골프연습장에서 만나기로 하였기에 눈으로만 달려가보고 돌아선다.
올라온 곳 반대편 사면으로 내려가니, 어? 웬 철길? 철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산책 나와 오가고 있다. 이 철길의 끝은 어디인가? 오류동역에서 갈라져 나온 철길은 부천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KG케미칼로, 또 하나는 군부대로 연결된다고 하네. 예전에는 그래도 화물을 실은 기차가 자주 오갔다는데 지금은 1주일에 몇 번 오갈까? 그것도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철길 주변에는 아파트도 있고 철길을 따라 주택이 늘어선 곳도 있어 아이들은 철길에 나와 놀고 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산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기차가 나타나면 어떡하지? 기차가 나타나도 워낙 천천히 달린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철길에 붙어 사람들이 살고, 또 사람들이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는 서울의 유일한 철길이기에 사진 동호회에서 이곳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나도 철길을 따라 걷고 싶은 욕심이 안 생기는 것은 아니나, 형님과의 약속 때문에 멀리 사라져가는 철길을 쳐다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맞은편 야산으로 올라선다. 능선을 올라 걸어가는데 왼쪽으로 울타리가 있고 울타리 너머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행을 표현한 청동부조가 띄엄띄엄 서 있고, 그 너머 아래로 조그만 운동장 가에는 성모마리아도 서있다. 성공회 대학교라고 한다.
1914년 강화에서 성미카엘 신학원으로 개교한 성공회 대학교는 1956년 이리로 이사와 1994년에는 신학교에서 대학교로 승격하였다는군. 전에 강화읍네의 고려궁성 터를 보러 가는데 궁성터 옆에 한국 최초의 성공회 성당이 기와 건물로 서 있어 인상 깊던 것이 기억난다. 아마 성미카엘 신학원도 그 성당 근처에 있지 않았을까? 성공회 신학원은 일제 시대 때 신사참배에 반대한다고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되는 아픔도 겪었다는군. 당시 천주교나 많은 개신교 교회가 일제의 강압에 굴복하였는데 성공회 신학교는 올바른 신앙의 지조를 지켰었구나.
4:58경 야산에 바짝 붙여 지은 동보아파트 구내로 내려온다. 아파트를 지나 나올 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아파트 단지 바로 옆에는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을 지닌 유순정의 묘가 있었다. 유순정은 연산군 때 이조판서로 있다가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1등 공신으로 책록되어 청천부원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유순정은 문신이지만 성종 때 북방의 야인 정벌에 공을 세우고, 중종 때도 도원수로 출전하여 삼포왜란을 평정하였다는군. 그런데 중종실록에는 유순정의 흠에 대해서도 나온다. ‘뇌물을 좋아하고 만년에는 여색에 방탕하여 탕약을 즐겨 먹다가 실명하여 천명대로 살지 못하였다.’ 이런 이야기가 있는 묘라면 지나가는 길에 안내판이라도 달아놓으면 좋으련만...
이제 아파트 단지를 나와 동도센트리엄 골프클럽으로 향한다. 등산 차림으로 골프클럽에 들어가면 남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하여튼 오늘도 서울 서남부의 야산을 등산하면서 비록 운동량은 부족하였지만 오래간만에 형님네와 같이 산길을 걷고 숨어있는 항동철길도 알게 되어 또 한 번의 보람찬 하루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