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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 새로 읽기 혹은 존재 깨워 내기 이 진 흥 (시인)
<1>
인간은 언어적 존재이다. 로고스(논리)의 언어로 사실을 탐구하고, 미토스(신화)의 언어로 진실을 추구한다. 전자가 과학(학문)의 언어라면 후자는 시(예술)의 언어이다. 과학은 사실을 이해하지만 시는 진실에 감동한다. 또한 전자는 대상을 고정하여 추상화하나 후자는 그것을 형상으로 살려낸다. 과학 언어는 차갑지만 시의 언어는 따뜻하다. 시인은 신화의 언어로 무표정한 사물에 음영을 부여하여 표정을 살려내고 그 이름을 불러서 꽃이 되게 한다. 엉뚱하게도 문무학 시인의 신작시집 《낱말》을 보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문득 전에 읽은 그의 시집 《풀을 읽다》에 수록된 짧은 시 [수평선]이 떠오른다.
단 한 줄 긋는 것으로 이 세상을 다 안는......
[수평선] 전문
바다 위의 수평선을 보고 시인은 누군가가 <단 한 줄 긋는 것으로 이 세상을 다 안는>다고 한다. 이 놀라운 인식은 과학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시적 직관(미토스의 언어)에 의해서만 닿을 수 있는 진실이다. 시인은 바다 앞에 서서 눈앞에 전개되는 무한한 세계와 그것을 하늘과 바다로 양분하는 수평선을 바라본다. 숨이 막히는 장면이다. 그 순간 수평선을 <단 한 줄 긋는 것>으로 보고, 그 수평의 긴 줄이 <이 세상을 다 안는> 것이라고 읽어낸다. 참으로 놀라운 독법(읽기)이다. 그러한 시인의 독법은 이번의 시집 《낱말》의 도처에 드러난다.
‘바다’가 ‘바다’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다 ‘받아’주기 때문이다.//
‘괜찮다’// 그 말 한 마디로// 어머닌 바다가 되었다.
[낱말 새로 읽기․13 -바다] 전문
바다라니......, 일찍이 탈레스가 우주의 아르케를 물이라고 했을 때, 그는 아마도 지중해의 바다 앞에 서서 엄청나게 밀려오는 파도에 압도되어 직관적으로 그런 이해에 도달했는지 모른다. 우리가 바다 앞에 설 때 그것은 대단히 크고 위대한 근원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바다는 모든 것 - 냇물, 강물, 온잦 오물과 인간의 역사까지 -을 모두 그의 넉넉한 품 안에 말없이 받아들인다. 받아들인다는 수용성의 표상이 바다이다.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다에서 어머니를 읽는다. 자식이 아무리 잘못을 해도 다 <괜찮다>고 받아들이는 어머니의 한없는 사랑과 수용성을 바다로 읽는 것이다.
<2>
문무학 시인에게 시작(詩作)은 읽기라고 생각된다. 이전의 시집 제목이 《풀을 읽다》였는데 이번의 시집 《낱말》은 그 내용이 1부 - <문장부호 시로 읽기>, 2부 - <낱말 새로 읽기> 그리고 3부 -<품사 다시 읽기>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읽기>에 집중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로> 읽든, <새로> 읽든, <다시> 읽든 요컨대 시인은 <읽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읽기>는 무엇인가? 시인에게 그것은 글(문자)을 말(음성)로 소리 내어 뜻을 헤아리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 관습적으로 알고 있는 의미를 벗어나 세계와 새롭게 만나는 행위이다.
우리는 매 순간 세계와 만나고 있지만 마치 공기를 의식하지 않고 숨을 쉬듯이 피상적/습관적으로 무심하게 만날(스칠) 뿐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러한 수동적/소극적인 만남을 넘어 주동적/적극적으로 아주 새롭게 만나기를 시도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의 <읽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구태여 <낱말 새로 읽기>라고 한 것은 지금까지 피상적으로 스쳐왔던(meet) 낱말을 이제부터는 <새로 읽기>라는 적극적인 행위를 통해서 참 만남(encounter)의 관계를 이룩하자는 의미인 것이다. 우리에게 낯익은 사물은 그냥 스쳐갈 뿐이지만, 그것을 <시로> 읽고, <새로> 읽고, <다시> 읽는다면 피상적으로 스쳐 지나던 사물/낱말 속에서 아직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다. 쉬클로프스키의 <낯설게 하기>란 것도 자동화된 삶에 충격을 주어 사물과의 신선한 만남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던가? 그런 뜻에서 모든 시인의 시작행위는 세계/언어와의 참 만남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확장해 가는 것이다.
시집 《낱말》에서 시인은 낯익어 친근한 낱말들의 <새로 읽기>를 시도한다. 새로 읽는다는 것은 관습적 읽기가 아니라 새로운 방법/시선으로 읽는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은 처음 보는 것이고 처음 보는 것은 낯선 것이다. 따라서 새롭게 읽기란 낯설게 읽기이다. 시인은 낯익은 언어를 비틀고 뒤집고 쪼개서 그 너머에 있는 낯설고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흔한 시적 기교이지만 특히 문무학 시인은 언어유희(pun)를 통해서 위트와 유머를 유발하고 언어의 지평을 확대한다. 앞에서 예시한 것처럼 [낱말 새로 읽기․13 -바다]에서 시인은 <바다>를 <받아>로 읽고 다시 <받아들이다>로 전환하여 수용성으로 해석하면서 거기에서 어머니의 넉넉한 모성으로 유추해가는 독법을 보여준다. 이런 방법으로 읽을 때 <아니다>라는 부정의 언어는 가슴에 녹아 <안(內)이 되>는 긍정과 수용의 언어가 되고([낱말 새로 읽기․ 38-아니다]), <나쁘다>의 어원을 <나뿐이다>로 슬쩍 바꿔 읽으면 너나 그(타인)를 모르고 사는 게 되어 <나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낱말 새로 읽기․ 55-나쁘다])
이러한 낱말 독법은 시집 도처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낱말 새로 읽기․ 5 -일]은 <일(勞動)>을 서수 <1>로 읽어서 일하는 것이 삶의 첫째(1)라고 해석한다. 또한 <철(鐵)>을 <철(나이 들어 사리를 분별하는 힘)>로 보아서 제 머리만한 쇳덩이 하나 감당하기 어려운 것처럼 철들기의 어려움을 읽고([낱말 새로 읽기․ 6-철]), 새(사이)를 새(鳥)에 연결해서 하늘과 땅 사이를 날 수 있는 새의 자유를 은유하며([낱말 새로 읽기․ 9-새]), 봄(視)을 봄(春)으로 읽어서 생명이 생기하는 봄이 오면 진정으로 봄(볼 것)이 많다는 해학을 드러낸다.([낱말 새로 읽기․ 21-봄])
‘서다’라는 동사를 명사화하면// ‘섬’이 된다// 뭍에서 멀리 떨어져,// 마냥 뭍을 그리는 섬//
사람은// 혼자 서는 그때부터// 섬이 되는 것이다.
[낱말 바로 읽기․7 -섬] 전문
인간은 기어 다니는 동물과는 달리 수평적 대지 위에 수직으로 일어선 직립인(호모 이렉투스)이다. 따라서 선다(直立)는 것은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됨의 모습이다. 아기가 기다가 일어서는 것을 보고 부모가 기뻐하는 것은 일어서야 비로소 한 인격체로 독립해서 걸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스로 혼자 선다(獨立)는 말은 외롭게 선다(孤立)는 뜻의 다른 말이 된다. 여기서 시인은 인간의 고독을 읽는다. 우선 낱말 <서다>의 명사형 <섬(立)>은 발음상 <섬(島)>과 같고, 그것은 <뭍에서 멀리 떨어져// 마냥 뭍을 그리는 섬>으로서 인간이 <혼자 서는(獨立) 그때부터// 섬(孤立)이 되는 것>이라는 비유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일어선(直立) 존재(호모 이렉투스)이지만 스스로 서는(自立) 순간부터 타자로부터 분리되어(孤立) 뭍(타자)을 그리워하게 된다.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인간의 실존인데 그것을 시인은 <섬>이라는 낱말에서 읽어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인은 낱말의 발음을 슬쩍 비틀어서 <가을>을 어머니가 <가실>로 발음하는 것은 이제 <가실 일// 생각하라(죽음을 준비하라)>는 계절(가을)의 암시라고 한다.([낱말 새로 읽기․ 23-가을]) 또한 <끝> 자를 발음할 때는 혀가 입천장에 붙어 <빗장을 닫아> 걸기 때문에 막혀서 소통하지 않게 되는데, 거기서 시인은 <뭣이든/ 통하지 않으면/ 끝날 수밖에 없다.>는 삶의 원리를 읽으며([낱말 새로 읽기․ 1-끝]), <‘밥’자를 읽으며 입술이 꼭 닫>히는 모양에서 먹고 살기의 어려움을 읽는다([낱말 새로 읽기․ 47-밥]).
여기서 더 나아가 시인은 우리 한글문자의 상형을 쪼개고 뒤집고 비틀어서 새로운 의미를 읽어낸다. 예컨대, [낱말 새로 읽기․ 15-흙]에서, <흙>자를 하늘(ㅎ) + 땅(ㅡ) + ㄹ, ㄱ(뿌리)로 해체해 보임으로써 흙은 <천지를 다 안고 있다>고 하고([낱말 새로 읽기․ 15-흙]), <응>자는 바로 놓거나 뒤집어 놓아도 변함없이 같은 <응>자가 되어 균형이 맞고 긍정이 되는 것이고([낱말 새로 읽기․ 37-응]), <곰>은 <문>자를 뒤집은 것으로서 <곰>같은 뚝심이 있어야 <문(文>’에 비로소 닿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며([낱말 새로 읽기․ 41-곰]), <논(沓>자를 뒤집을 때 <국(國)>자가가 되는 것도 농자천하대본이라는 농경사회의 정신이 바탕 됨을 암시한다.([낱말 새로 읽기․ 42-논]). 또한 옷을 입다가 거울을 보면 거기 비친 자신의 머리와 목과 양팔과 양다리의 형상이 마치 <옷>이라는 글자 형상과 꼭 닮았다며 <체경 속으로/ 자막처럼 스쳐가는> 그 모습에서 세상에 잠시 살다 갈 자신의 모습을 읽어낸다.([낱말 새로 읽기․ 46-옷])
‘나’/ 자는 밖을 향하고/ ‘너’/ 자는 안을 향하여서// 나의 밖이/ 너의 안이고/ 너의 안이/
나의 밖인데// 하나씩/ 점을 지워야/ 통할 대로/ 통한다.
[낱말 새로 읽기․ 31-나와 너] 전문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대상과의 관계는 달라진다. 마르틴 부버는 나와 세계와의 관계를 <나와 너(I-You)>, <나와 그것(I-It)>으로 구분하고, 대상을 너로 인식할 때는 인격적인 관계가 이루어지지만, 대상을 <그것>으로 하면 도구적인 관계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시인은 <나와 너>의 관계를 한글(문자)의 상형에서 <나>자와 <너>자를 비교하여 새롭게 밝혀낸다. 우선 두 글자는 동일한 자음 <ㄴ>에 모음만 <ㅏ>와 <ㅓ>로 다르다. 그런데 <ㅏ>와 <ㅓ>는 동일한 모음 <ㅣ>에 단지 점( ․ )이 안쪽에 있느냐 바깥쪽에 있느냐에 따라 구별된다. 여기서 시인은 <나-너>의 관계를 새롭게 읽어낸다. 즉 <나>는 모음 <ㅣ>에 점이 밖을 향해 있고 <너>는 그것이 안을 향해 있어서 나의 밖이 너의 안이고 너의 안이 나의 밖이므로 결국 나와 너는 한 몸의 서로 다른 방향인데, 그 지극히 작은 점 하나만 지우면 서로 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너>인 우리들이 서로 반목하고 다투는 것은 <나-너>라는 인격적 관계를 지극히 작은 점 하나의 위치 때문에 <나-그것>의 도구적 관계로 격하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임을 암시한다. 이처럼 시인이 <나>와 <너>라는 간단한 글자의 모양에서 본질적인 인간관계를 읽어내는 것은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3>
시인은 신화의 창조자이다. 괴테의 말처럼, 시인이 아니라면 누가 올림포스에 신들을 살게 하겠는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시인은 미토스의 언어로 사물에 음영을 부여하여 표정을 살려내고, 그 이름을 불러서 그것을 꽃으로 피워내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의하면 시의 근원은 시인이고 시인의 근원은 시이며, 시는 역사적 민족의 원언어(Ursprache)라고 한다. 시가 원언어라면 언어의 본질은 시의 본질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고, 언어는 시의 활동영역이므로 결국 시의 근원인 시인은 모국어의 파수꾼이 된다. 모국어는 민족의 자생력이자 정체성이므로 그것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시인에게 부여된 가장 신성한 사명이며 자랑이다. 바로 이런 사명감을 자각하는 데서 문무학 시인의 [낱말 새로 읽기]는 출발한다. 그리하여 그는 모국어의 낱말을 하나하나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본다. 지금까지 피상적으로 스쳐 만났던 낱말에 다가서서 그것을 비틀고 쓰다듬고 뒤집으면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여 읽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환언하면 객관적인 기호로서의 낱말에 따뜻한 신화의 옷을 입혀서 삶의 음영으로 새롭게 존재를 깨워낸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존재를 깨워내는 시인도 현실의 세계에서는 일상인이다. 강물에 떠내려가는 나뭇잎처럼 허우적거리며 피동적인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한없이 천상을 그리워하면서도 동시에 지상적인 욕망에 붙들려 허우적거리는 이율배반의 존재이다. 여기서 문무학 시인은 자신의 삶을 <앉지도/ 서지도/ 자빠지지도 못하여/ 간신히/ 세상 붙들고/ 허둥>거리며 추는 춤이라면서 그것을 <엉거주춤>으로 읽고 있다. 이러한 다소 해학적인 독법을 통해서 시인은 모국어의 낱말/정신을 하나하나 새롭게 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엉거주춤’은 신명나는/ 그런 춤이 아니지// 앉지도/ 서지도/ 자빠지지도 못하여// 간신히/
세상 붙들고/ 허둥거린/ 내 춤이지.
[낱말 새로 읽기․ 61-엉거주춤] 전문 - (끝)
(열린시학, 2009/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