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낭도(狼島)의 봄
이리를 닮았을까? 여우를 닮았을까? 출발하면서 내내 머릿속에 머무른 것은 이 두 가지 생각뿐이었다. 낭만 낭도!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막연히 70년대의 통기타 추억, 향촌동 주점 골목 ‘고구마집’ 이층이 생각났다. 흐릿한 유신 시절, 막걸리 한 주전자에 번데기와 고구마 안주를 앞에 놓고 상다리가 부러지게 젓가락 장단 맞추던 한 시대의 낭만이 떠올랐다.
낭도 문학기행 길이다. 여수 남서쪽에 살포시 엎드린 낭도는 이름만으로도 호기심과 설렘이 깃든 매력적인 섬이다. 섬 모습이 여우를 닮았기에 이리 랑(狼)을 써서 낭도로 불렀다고? 여우를 닮았으면 여우 호(狐)를 써서 호도라 해야지 왜(?)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그분들의 마음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지도를 펴 놓고 모습을 그려보았다. 이리저리 돌려보았으나 여우나 이리나 모양이 비슷하기에 무어라 꼬집어 말하기가 어렵다.
네 시간 남짓 달렸을까? 차창 밖으로 푸른 바다가 눈에 안긴다. 여수를 지나 조발도로 연결된 연륙교 위를 지나는 중이다. 청자빛 하늘과 바다, 하얀 뭉게구름 두어 장. 멀리서 노랗게 손 흔드는 유채꽃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짜릿하게 조여온다. 아직은 다리보다 가슴이 떨리기에 덜 낡은 모양이다. 여기서 다시 둔병도를 거쳐 낭도로 길이 이어진다. 멀지는 않지만, 예전에는 배가 없으면 갈 수 없는 섬들이다. 지금은 섬과 섬이 다리로 연결되어 낭도에서 적금도를 지나면 고흥반도로 들어가는 바닷길이다.
낭도 주차장에는 벌써 여행객들이 북적거린다. 섬이 몸살을 앓고 있다. 주말이라 온통 차와 사람의 물결이 넘실거린다. 시골 오일장 같다. 개발의 뒷모습은 씁쓸함이 더 몰려온다. 한가롭고 정겨운 섬이 이젠 얼마나 남았을까? 벽화와 지붕 색깔이 서양화이다. 빨강과 노랑, 파랑이 주를 이룬 요즘 전형적인 벽화마을 풍경이다. 조금 유치하면서도 나름대로 예쁜 분위기다. 낭도 둘레길 1코스를 걷기로 했다. 지도를 보니 출발지점은 이리의 목부분으로 가늠된다. 여기서 입을 거쳐 머리로 올라가면 낭도 방파제가 나온다. 다시 등 뒤를 통해 꼬리 부분에 이르면 ‘남포 등대’로 이어진다. 계속 둘레길을 돌아 삼거리에서 뒷다리 부분 주차장을 지나 ‘낭도 중학교’로 연결되는 길이다.
기념사진 찍느라 바쁜 일행과 떨어져, 평소 친하게 지내던 J 간사님과 잰걸음으로 앞장섰다. ‘낭도갱번미술길’을 지난다. 정자 앞 붉은 연산홍이 화사하다. 낭도 선착장을 지나니 멀리 ‘우주발사전망대’가 있는 나로도가 희미하게 보인다. 방파제 끝 등대까진 제법 먼 거리다. 빨간 정장 차림으로 우뚝 서 있는 등대. 섹시하다. 멀리서 봐도 유혹하듯 눈에 확 들어와 믿음직하다. 둘레길에 접어드니 고요하다. 파도소리도 멀어진다. 노란 유채꽃이 쪽빛 바다와 어울려 하늘이 한층 가깝게 내려앉는다. 해안 길은 동백나무 숲길이다.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동백꽃. 제 목을 댕강 쳐 내고 꼿꼿이 스러지는 그를 보며 절개를 생각한다. 저런 기개를 가진 위정자들이 몇 명이라도 있었으면? 자연은 아름답지만 세상은 오리무중이다.
모퉁이에 노루귀꽃이 무리 지어 쌩긋 웃는다. 이따금 반대편에서 오는 등산객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걸려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둘레길에서 만난 사람은 누구나 오랜 친구 같다. 데크길로 이어지다가 다시 오솔길이 나타나고 바닷가 바윗길로 연결된다. 오른쪽 어깨에 짙푸른 바다를 걸치고 한 걸음씩 힘차게 걸어간다. 갈림길에서 ‘신선대’로 내려갔다. 신선대라! 내가 보기엔 신선이 머물기엔 좀 척박한 바위뿐이지만, 곰곰 생각하니 툭 트인 에메랄드빛 바다, 흰 구름이 둥둥, 서늘한 바람에 그냥 멍하니 앉아만 있어도 신선이 되는 자리다.
‘천선대’가는 길에 캠핑장 카페가 보인다. 노란 유채꽃밭이 푸른 숲과 하늘을 배경으로 그윽한 봄을 펼치고 있다. 갑자기 스프링쿨러가 돌아간다. 물을 피해 유채꽃밭에서 셀카를 찍으려는데 “사장님, 거기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빨리 나오세요.” 카페 주인이 멀리서 소리친다. 머썩해진 마음에 잠시 걸어가니 갈림길에서 천선대가 보인다. 멋지다. 이곳은 경치가 너무 좋아 옛날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아름다움 풍경을 즐겼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켜켜이 쌓인 바위는 악어가 방금 식사를 마치고 물로 뛰어들기 전의 모습이다. 기념사진 최고의 명소이리라. 너럭바위 위의 천선대 안내판은 사라지고 양쪽 기둥만 남아 내력을 읽지 못해 아쉬웠다.
갯바위 위에 우뚝 선 ‘남포 등대’를 찾아갔다. 남포 등대는 방금 탱고 한곡 추고 나오는 하얀 정장 차림의 말쑥한 춤꾼같다. 아름답다. 바다에서 입항할 때 ‘왼쪽 물밑에는 암초들이 있으니 오른쪽으로 조심해서 들어오세요’라는 뜻의 흰색 등대이다. 등대 건너편에 보이는 섬이 모래섬, 사도라고 한다. 사도에도 공룡이 살았다는 옛 전설이 깃든 곳이다. 다시 들꽃과 대나무숲 사이로 통한 길을 따라 ‘산타바해변’을 지난다. 멀리 여수의 꽃섬인 하화도가 눈에 안긴다.
오늘 1코스 둘레길의 정점인 주차장 포토존에 앉았다. 낭도를 상징하는 여우 모습의 인형이 푸른 조끼를 입고 손을 들어 여행객을 맞이한다. 멀리 ‘장사금해수욕장’까지 갈까도 생각해 봤으나 약속 시간이 맞지 않았다. 내려오는 길에 처음으로 문우 두 분을 만났다. 차 세 대에서 같이 내려 출발했는데 여기서 겨우 두 분만 만났다니, 뭔가 오늘 좀 이상하다. 다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코스는 같을 텐데 우리만 이렇게 정직하게 길을 돌았는가? ‘산타바오거리’에서 마을을 통해 돌아가기로 했다. 산타바란 ‘산사태가 난 바위’란 뜻이란다. 돌로 쌓은 마을 담장이 여유롭고 아늑하다. 어느 섬이나 바람을 막기 위해 쌓은 돌담이 많다. 10여 년 전 여수 금오도 비렁길을 트레킹한 추억이 떠오른다.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느낌이다. 비렁길을 남성적이라고 하면 낭도 둘레길은 여성적이다. 그만큼 포근하고 아기자기하다.
마을 골목에서 만난 흑염소의 큰 눈망울이 애처롭다. 우리 안 목줄에 묶여 있어서 그런지 울음소리가 더 애잔하다. 주변의 노란 유채꽃만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다정하게 인사하는 J 간사님 위로의 말을 알아들었을까? 작은 울음소리로 응답하는 것 같다. 큰길로 들어서니 승용차가 길을 가득 메우고 있다. 100년 전통 ‘젖샘막걸리집’ 벤치에 앉아 바다를 마주했다. 오랜 시간 지켜온 주막집이다. 예전에는 허름한 초가였으리라. 지그시 눈을 감으니 서편제 한 장면이 겹쳐진다. 칼칼하게 목쉰 주모의 구슬픈 육자배기 한 자락이 귓가에 느릿하게 들리는 듯하다. 건너편 물이 빠진 갯벌에서 조개를 캐는 아낙네의 뒷모습이 짠하다. 허리 한 번 펴기도 힘든 고된 섬 생활이 읽혀 마음이 무겁다. 한 문우가 꺾어 온 찔레순의 달싹한 맛을 음미하면서 뒷 일행을 기다렸다. 벽화는 아름답게 낭도를 홍보하고 있건만 무언가 허전함이 든다. 자연 상태로 오래 보존하는 것도 미덕이거늘 경제 논리를 앞세운 큰 힘에 쓸려가는 섬이 안타깝기만 하다.
묘도를 거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변하는 것은 변해야 된다. 시대와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정체되어 고여 있는 것은 낡아갈 것이다. 내일을 위해 과거는 유연하게 바뀌어야 된다. 마음도 세상도 고집스럽게 머물기만 하면 안 된다. 과거를 지키면서 한편으론 부드럽게 시공간의 아름다운 무늬를 그리는 성숙한 낭도의 봄을 기다린다.
23.4.10.
첫댓글 함께 낭도로 갔는데 누구는 풍광만 즐기는 동안 선생님은 이렇게 멋진 작품으로 남기셨네요.
그날의 감동이 다시금 밀려옵니다.
좋은 분들이 옆에 있어서 더 멋진 여행이 되었습니다.
냥도라는 섬은 처음으로 듣는 이름인데, 여행기를 읽으니, 눈 앞에 그림처럼 떠오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기행문을 작성해보니 그날의 감흥과 풍광이 그림처럼 살아납니다. 그리고 오래 마음속에 갈무리됩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다른 행사와 겹쳐서 불참했던 아쉬움을 만회하는 기분입니다.
명작 기행문에 큰 감사드립니다. 이정경 손모음
조금이나마 낭도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셨다니 고맙습니다. 사진을 함께 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