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기의 위기시대는 로마에 생존을 위한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결국 로마제국은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로마로의 변신을 준비하는데, 이러한 변화의 주도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콘스탄티누스 대제였습니다. 계속되는 이민족의 국경선 침입과 경제의 쇠퇴 그리고 신흥종교의 발흥으로 로마는 그 뿌리가 흔들릴대로 흔들렸습니다. 따라서 로마제국을 운영하는 황제의 책임은 더욱 무거워졌고, 어떻게 해서든 제국을 다시 부흥시켜야 하는 매우 막중하고도 힘든 책임을 지게 되었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이러한 혼란수습을 위해 과거에 남아있는 공화정의 잔존을 완전히 일소하고 오리엔트의 특징인 절대황권을 도입합니다. 이러한 노력을 위해 과거 원로원의 영향과 과거 로마공화정의 그림자들을 제한하고 개개의 행정부서의 권한을 확정해 더 큰 권력의 집중을 막는 것이어서 민사, 군사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행정이 세심하게 구분되어 황제의 힘에 의해 이러한 부문들이 통합성을 유지하게 했으며, 황제는 이러한 제도의 정점으로 그리고 중앙에서 전체 국가기구를 조종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궁극적인 것은 제국의 효율적 통치를 위해 영토와 통치권의 분할이 시도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제국의 제정초기에 있던 공동통치 제도의 근거해 시도되었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두 명의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와 두 명의 부황제- 카이사르(caesar)로 이루어진 4두지배 체제를 만들었습니다. 두 명의 아우구스투스 중 한 사람은 제국의 동부를, 다른 한 사람은 제국의 서부를 다스렸고, 이들 아우구스투스는 각가 한 명의 카이사르를 두었습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는 혈연관계가 아닌, 양자관계였고, 개인적 능력에 의해 선택되었습니다. 이러한 체계는 극도로 효율적인 경영을 위해 도입되었지만, 결과는 끝없는 내전의 연속이었죠.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의 지방행정제도 개편은 이탈리아의 특별한 위치를 제거하고 황제령속주(provincia)와 원로원령 속주사이의 무의미한 구별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전체 속주는 황제에게만 종속되었고, 본국이탈리아는 다른 속주들과 같은 위치로 격하되어 조세의무를 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속주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게 되는데, 100 개의 속주가 5세기 말에 그 수가 120 개가 넘게 되는데, 영토의 수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 큰 속주들을 쪼개서 생겨난 것이었죠.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의 노력으로 국가제도가 재정비되고 황제권이 강화되는 동안 예나 지금이나 로마의 주민들은 가난했습니다. 이제 대다수 농민들은 소작농(colonus)였고,후기 로마의 생산력의 주력이었지만 점점 세습적인 농노(servus)로 신분이 떨어져갔습니다. 이러한 악화일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조세법으로 더욱 강화되고 그 속도도 빨라졌는데, 제국의 주축이던 화폐납세는 이제 완전히 거덜났고, 긴급조치이던 현물납세가 그 중요성이 점점 높아져갔지만, 이를 아에 제도로 만든 사람이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였죠. 이러한 새로운 납세제도는 로마의 가장 중요한 조세이자 주된 재원이 되었지만, 그러한 부담은 농촌주민들에게만 지워졌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빈궁해진 로마와 농민들은 기근과 불안정한 상황으로 이리저리 떠도는 '논개'가 되어 제국의 관리들은 세금을 걷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고, 제국은 재정을 맞추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야 했죠.
유휴지 부가세- 에피볼레(epibole)체계(아디엑티오 스테릴레움) 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이집트에서 시작된 제도였으니,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때 경작되지 않고 놀고있는 국유지를 사유지 소유자에게 강제로 할당해 소유자는 부가된 토지에 대해 납세의 의무를 부과하는 제도였고, 이 제도는 3세기 말 로마제국 전역에 적용되었고, 향후 국유지뿐만 아니라 황폐해진 사유지에도 해당되었습니다. 이러한 제도가 만들어진 이유가 로마의 황폐제도의 완벽한 붕괴로 급격한 가격상승, 물물교환 및 현물경제로의 광범위한 이행이 영향이었고, 이러한 현물경제는 훗날 새로운 중세국가의 지배적 경제방식이 되었습니다(제국 서부) 하지만 좀 더 부유한 동부지역은 현물경제방식이 지속되기는 했지만 곧 화폐경제가 다시 우월해지게 되었죠.
군사제도도 완전히 변하게 됩니다. 제국의 국경을 지키던 군단들은 사실적으로 국경군대였고, 거의 전 군사력이 제국의 길고도 긴 국경선을 따라 배치되었습니다. 따라서 제국 내부에는 예비군도 없었고, 그런 역할을 맡은 것은 황제의 근위대였죠. 하지만 3세기의 위기로 더 이상 이러한 군사제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못했고, 이미 예전의 군사제도는 위기시대때 완전히 붕괴되어 새로운 제도의 필요가 절실해졌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일단은 국경군을 배로 늘리고 제국내부에서 늘릴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을 창출하는 것이 군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해졌습니다. 또한 외부의 침입뿐만 아니라 제국 내부의 모든 적들에 대항하기 위해 황제의 권력을 뒷받침할 새로운 근위대 - 엑세르키투스 코미타텐시스(exercitus comitatensis)가 이 이중의 과업을 실현하게 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제국의 군대가 점점 야만족화(barboroi)해지는 거였죠. 제국에서 가장 유능한 군대로 평가받은 것은 게르만족과 제국신민들 가운데 일리라아 인들이었고, 4세기 때에는 뛰어난 야만족출신들이 장교단에 진입하는 빈도가 늘어났으며, 또한 기병의 중요성이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제국이 새로운 적-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대응하기 위해선 필연적인 선택이었죠.
제국의 중심축은 이제 동부로 그 축이 기울어졌습니다. 서부보다 좀더 부유하고 문명도 더 뛰어난 점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제국 동부에 새로운 군사적 과제가 증대했기 때문이죠. 도나우 하류에서 밀려오는 야만족들과 서아시아에서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압박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었죠. 사산조 페르시아는 파르티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들어섰지만 그 위험성은 파르티아보다 매우 더 위험했고 사산조 페르시아는 자신을 구 아케메네스 왕조의 상속자로 여기며 구 페르시아의 영토전역이 전부 자기 것이라 주장했으니, 이는 3세기 중반에서 초기 비잔티움 시대 내내 사산조 페르시아의 위험성은 심각했습니다. 이러한 위험한 이웃 때문에 사산조페르시아와의 투쟁은 로마의 군사적, 정치적 과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변혁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토대를 닦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 초석을 놓게 됩니다.
다음에는 콘스탄티누스대제의 업적을 알아보겠습니다.
첫댓글 무플 방지 위원회에서 나왔습니다!!(탕~) 장난이구요.. 로마 후기는 보지 않아서 그렇지만 문제가 심각하군요..
디오황제를 높게 평가하긴 하지만... 개혁의 결과가 않좋았던것이 아쉽고 만년의 생이 나쁘게 끝난것이 너무 불쌍할정도죠... 하나밖에 없는 딸과 아내가 자신의 후계자라고 할수있는 동방정제 갈레리아누스의 친구에게 죽음을 당한후에 어떤 충격을 받았을런지... 위인의 만년도 훌륭한 사람은 정말 찾기힘든듯합니다
디오 황제 노년이 정말 안됐죠..... 에휴....
디오의 업적과 평가에 대한 것은 좀더 신중해야 겠지요. 저는 일단은 로마제국의 복원이란 점에선 디오의 개혁은 깊은 통찰력이 약간 결여되 보이는 단기적이거나 의도한 바와는 다른 결과를 낳아버린 개혁이라 봅니다. 그가 시도한 것중 비잔티움으로 이어지고 오래 살아남는 것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어서라기 보다는 그것을 이어받은 권력자들의 이해와 생각을 크게 반영한 결과라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디오를 비판하기만 할 수 없는 것이 당시 제국의 상황이 AD2세기로 돌려 놓기에는 안팍의 상황이 너무나 달라졌다는 점 입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해볼때 디오에 대한 평가는 콘스나 유스보다는 좀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은 고대 로마제국을 "보편제국"으로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실현하고 단일 법, 단일 명령, 단일 조세가 제국 전역에 시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통합을 위한 노력을 한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도 "보편제국"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시작은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였다는 점은 정말 중요한 점일 것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고대 로마를 복원하려는 것보다 시대의 흐름을 알고 그에 따라 "보편제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보편국가라 말씀하셨지만 그 이전 로마제국은 보편국가가 아니란 말씀이신지? 단일한 법, 단일명령을 드셨는데 이것이 진정 이전의 로마제국과 그리도 달랐는지 설명좀 해주십시오. 조세제도의 경우 비잔티움의 조세의 특징은 너무나 복잡했다는 것으로 압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존의 로마 제국의 속주Provincia를 개혁했습니다. 과거 로마 제국의 속주는 그 크기가 넓고 많은 자치를 허용받았습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원로원 속주를 폐지시키고 속주에 편입되지 않았던 이탈리아를 8개의 속주로 바꾸어 다른 속주처럼 편성시킵니다. 즉, 이전에 있던 황제 속주, 원로원 속주, 본국 이탈리아 등 여러 지방 통치 단위를 일원화 시켜 단일 명령권 안에 들게 했다는 것이죠. 또한 이전의 로마 제국은 속주를 총독Proconsul이 민정과 군정을 같이 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를 개혁하여 군이 주둔하는 속주에 장군Dux이라는 직책을 만듭니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민정과 군정이 분리되었으며, 이렇게 통치조직을 세분화 시킨 덕분에 가장 말단의 행정단위인 마을까지도 황제의 단일 명령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미 로마제국은 212년에 제국내 모든 자유인에게까지 시민권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이전에 속주민이었던 시민들은 본국의 시민과는 많은 차별을 받고 있었습니다.(우리나라가 근대화되면서 법적으로는 신분제도를 철폐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남아있던 것과 비슷하죠.) 이러한 차별을 없애는 측면에서도 앞서 말했던 통치 체제 일원화가 큰 기여를 합니다. 또한 이는 단일 법이 모든 행정단위에 동등하게 적용되게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세 제도는 이전의 로마 제국은 속주정부의 자율권을 중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3세기의 인플레이션으로 이전의 화폐제도가 붕괴됩니다. 이때는 각 속주별로 납부 액수를 정하는 것은 각 속주 정부의 관할이어서 자의적인 해석에 따라 그 액수가 천차만별이 되었습니다. 또한 이전의 로마 제국은 인플레이션에 적응하기 위해 세금의 액수가 증가 되어야 했고, 이에 정규적인 세금은 그대로 둔채 비정규적인 세금들을 증설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정규 세금은 침공 위협이 큰 속주일수록 더 커지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즉, 조세제도가 형평성에 어긋나는 현상이 발생한 것입니다.
속주별로 조세제도의 차이가 심해지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과세의 기준을 새로이 정해 전 제국에 걸쳐 시행합니다. 토지나 재산은 유굼Iugum이 기준이었고 생물일 경우에는 카푸트Caput가 기준이 되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미리 제국 전체의 1년 예산을 산출하여 1명의 시민이 부담할 세금액수를 유굼과 카푸트를 기준으로 결정했죠. 그리고 앞서 말했던 통치 체제 일원화는 이탈리아의 시민들만 직접세를 면제 받던 권리를 없애고, 모든 속주에 동등한 조세제도를 시행시키게 함으로써 전 제국에서 단일한 조세제도가 시행되도록 했던 것입니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고대 로마의 혼을 없애버렸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중세 국가가 가장 중요시했던 "보편주의"를 가장 먼저 실시한 사람이었고, 그것을 이용해 로마 제국의 위대함을 다시한번 보여주었습니다. (중세에는 이러한 보편제국-혹은 보편국가-를 추구했던 3가지 세력이 있는데 바로 중세 로마제국과 신성로마제국, 교황청이 그것입니다.) 고대 로마의 면을 완전히 사라지게 했다고 해서 과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를 비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과연 잘못된 일일까요? 추억에 빠져 시대에 역행하는 행동이 과연 옳은 걸까요? 과거로의 회귀도 중요하지만 새시대를 여는 것은 더욱 어렵고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