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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져 가신 예수님(6)
행 1:6-14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 설 교 >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행 1장 9~11절 / 김영규목사
주님의 승천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주님의 승천과 재림입니다. 먼저 승천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승천이란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40일간 세상에 계시다가 하늘로 올리우셨습니다. 주님의 승천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히 기록한 사람은 누가입니다. 마태나 요한은 승천 부분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마가는 승천에 대해서 짤막하게 언급을 했습니다.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막16: 19) 누가는 누가복음 끝에서 한 구절로 언급하고, 다시 사도행전에서 다시 기록했는데, 내용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내용이 길든지 짧든지 승천에 관한 내용 자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 중요할까요?
예수님의 승천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성도들의 궁극적 상황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성도들이 부활하면 최종적으로 어디서 어떤 상태로 살 것인가? 압구정동에 살 것인지, 타워 팰리스에 살 것인지? 한국에 살 것인지, 미국에 살 것인지? 지상에 살 것인지, 지구를 떠날 것인지? 아니면 어디로 갈 것인지? 바로 그 점을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의 승천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그냥 사시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다른 처소로의 이동입니다. 현재 사는 곳이 제아무리 좋아도 잠깐 사는 처소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필경 하늘나라로 옮겨가야 합니다. 영혼도 육체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 처소는 지상이 아닙니다. 천국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의 승천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 삶의 나침반입니다. 우리가 어떤 곳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목표로 살아가야 합니다. 재물을 쌓으려면 하늘나라에 쌓아야 합니다. 집을 지으려면 하늘나라에 지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구의 역사는 영원하여 지상에서 천국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을 비롯한 기독교 이단자들이 그런 주장을 합니다. 또한 윤회설을 주장하는 순환적 역사관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합니다. 역사는 돌고 돌아 영원히 계속된다. 달라지는 점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역사는 시작이 있고 마침이 있습니다. 창조가 있고, 종말이 있습니다. 종말이 되면 현세의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지구도, 천체도, 현재의 모든 피조물들도 다 사라집니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세계가 시작됩니다. 이사야는 그런 세계를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합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65:17) 신약의 사도들 역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3)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21:1)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주님은 우리가 거할 처소를 위해 승천하셨습니다. 그 집은 보통 집이 아닙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좋은 집입니다. 사도 바울은 천국 구경을 하고 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12:4) 사도 바울은 천국을 본 그 황홀함 때문에 평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감옥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천국만 생각하면 노래가 나옵니다. 바울은 몸에 지병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육체의 가시”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병들어도 행복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도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습니다. 천국만 생각하면 그냥 이 세상을 떠나고 싶어집니다. 바울은 단지 세상에서 할 일이 있는 것 때문에 더 머무를 뿐이라고 했습입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3-24)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 우리가 사는 집이 좀 허술해도 걱정하지 마세요. 상상도 할 수 없는 좋은 우리 집이 하늘나라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집은 분양가가 너무 비싸서 아무도 그 값을 지불할 능력이 없어요. 이건희 회장이 가진 재산 다 털어 바쳐도 그 집은 못 삽니다. 빌 게이츠가 가진 재산 다 털어 바쳐도 그 집은 못 사요. 누가 돈을 주고 사려고 한다면 창피만 당합니다. 그렇게 비싸고 좋은 집이 내 집입니다! 이미 당첨되어 예약이 끝났습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미리 우리가 차지하도록 선택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집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거저 주셨습니다. 누구에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할렐루야! 그 집은 살림 장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100%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그 집만 생각하면서 즐겁게 사세요. 세상 집이 없어도 좋습니다. 병이 들어도 좋습니다. 조만간 영원한 집으로 올라가면 됩니다. 우리가 애써서 올라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냥 올리워 주십니다. 본문을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ejphvrqh” “he was taken up; He was lifted” 주님께서 올리우신 것은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하늘나라로 올리워 갈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주님을 믿는 것 한 가지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하늘로 올리워 주십니다. 언제나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소망과 기쁨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재림
두 번째로 말씀드릴 주제는 주님의 재림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재림을 약속하셨습니다. 승천이 없다면 재림도 없습니다. 승천이 있기 때문에 재림이 확실한 겁니다.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11)
주님의 승천은 제자들에게는 당황스런 사건입니다. 그때까지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나라를 세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장소는 감람산입니다. 그곳에는 약 500여 명의 사람들이 주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무덤에서 다시 부활하셨으니 주님의 나라가 곧 시작될 것이다. 그러니 열심히 따라가 보자!” 주님의 제자들은 그런 날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3년 반 동안이나 열심히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대와는 상관없이 주님은 마지막 축복을 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 시니”(눅24:50-51) 제자들은 너무나도 허전한 나머지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천사들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11)
재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적어도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역사의 종말, 마감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재림으로 현존하는 모든 역사는 끝이 납니다. 창조에서 시작된 모든 피조물의 역사가 재림으로 마감됩니다. 동물도 식물도, 하늘의 천체들도 주님의 재림으로 마감됩니다. 아담에서 시작된 인류의 역사도 주님의 재림으로 마감됩니다. 주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시작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인류 역사를 시작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피조 세계가 인간의 타락으로 깨졌습니다. 멸망당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 멸망의 시점이 바로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재림은 주님이 시작하신 모든 세계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모든 피조물에 대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아담 때부터 인간 세상을 더럽혔던 모든 죄악은 주님의 재림으로 완전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항상 의문을 품어 왔던 것은 죄악에 대한 보응과 심판입니다. 왜 악한 자들이 버젓이 행세하고, 잘 먹고 잘 사는가? 하나님은 과연 계신가? 권선징악이란 것이 존재하는가?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서 미뤄졌던 숙제가 단번에 해결됩니다. 주님은 전 인류를 둘로 나누실 것입니다. 주 안에서 회개한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 그리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회개를 거부한 자들! 회개하고 주를 믿는 자들은 천국으로, 나머지는 지옥으로 영원한 운명이 확정됩니다. 창세 이후로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주님 앞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25:31-33)
셋째로, 주님의 재림으로 새로운 우주 질서가 시작됩니다. 먼저 자연계의 새로운 질서입니다. 천체들의 질서가 새롭게 재편됩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0-13) 자연 생태계도 새로운 질서로 재편됩니다. 현재의 생태계는 약육강식의 생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본래 창조 때의 모습을 보면 모든 동물은 초식을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타락 이후로 동물을 잡아먹는 살생의 구조로 변했습니다. 강한 동물은 약한 동물을 잡아먹습니다. 사람은 모든 동물을 보양식으로 잡아먹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11:6-9) 상부상조와 조화 공생의 구조입니다.
인간 세계도 마찬가집니다. 미워하고 싸우고 다투는 일은 사라집니다.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만 있습니다. 빈부귀천이 없습니다. 모두가 VIP들입니다. 생계 문제도 없습니다. 모두가 부자들입니다. 병들고 죽는 일도 없습니다. 영생하는 사람들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재림으로 이루어질 세상입니다. 재림은 이전 세상을 끝나게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펼치게 합니다.
재림의 바른 이해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재림에 대한 올바른 이해입니다. 재림이 중요한 만큼 재림에 대한 오해도 많습니다. 역사적으로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엉뚱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어 왔습니다. 대개는 이단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경고를 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살후2:1-3) 그러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바른 교훈은 어떤 것일까요? 주님의 재림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자기 육체를 가지고 재림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교훈을 했습니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요이1:7) 사도 요한 시대에는 영지주의 이단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질은 악하고 영혼만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육체를 가지고 오신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육체가 있어도 가짜 육체다! 혹은 잠깐 빌린 육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남의 몸이 아닙니다. 천사와 같은 임시의 몸도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의 몸이요, 진짜 육체입니다. 우리의 부활도 그렇습니다. 영혼만 살고 육체는 사라지는 부활이 아닙니다. 영혼이 영원히 살듯이 영원히 살 육체로 부활합니다. 영혼의 가치가 있듯이 육체의 가치가 있음을 잊지 마세요.
둘째로, 눈으로 볼 수 있게 재림하십니다. 어떤 이단자들은 예수님이 영으로 오셨기 때문에 아무도 모르게 재림했다고 합니다. 영등포에 오신 재림주, 가평에 오신 재림주, 지리산에 오신 재림주, 말짱 가짜입니다. 이 사람들은 주님이 자신들만 알게 오셨다고 합니다. 주님의 재림은 전 지구적인 역사이며, 전 인류가 볼 수 있습니다. 마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24:27) 그러므로 지금 우리나라에 있는 자칭 재림주들은 말짱 가짜들입니다. 재림은 전 지구적인 역사로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습니다.
셋째로, 예고 없이 돌발적으로 오십니다. 돌발적이란 말은 재림의 시간에 대한 예고가 없다는 뜻입니다. 미리 알려주고 어느 때 어느 장소에 오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5:3) 임산부에게 출산은 정해진 사실입니다. 예정일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출산일과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재림은 정해진 사실이지만 정확한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냥 대기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다미 선교회처럼 1994년 10월에 오신다든지, 예전에 어떤 이단자들처럼 공중에 와 계신 것이 아닙니다. 재림은 언제 어느 때든지 일어날 수 있는 예고 없는 사건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경각심을 가지고 깨어 있는 일입니다.
넷째로, 영광스런 모습으로 재림하십니다. 주님이 처음 오셨을 때에는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베들레헴의 마굿간에,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재림은 다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살전4:16) 전 우주적입니다. 천사장이 함께 임합니다. 나팔과 호령 소리가 납니다. 온 세상의 지배자들이 다 두려워 떠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오십니다.
다섯째로, 종말적 심판적인 재림입니다. 처음 오신 주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시는 주님은 심판주로 오십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25:31-33) 주님의 재림으로 전 인류는 주님 앞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창세 이후로 있었던 전 인류를 둘로 갈라놓을 것입니다. 지금 무덤에 있는 사람이든지, 현재 살아 있는 사람이든지, 결국은 둘로 나뉘어집니다.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심판은 인간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입니다. 천국 백성으로, 혹은 지옥 백성으로! 재림은 교리적 사건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예고된 현실입니다. 주님의 승천은 바로 재림에 대한 증거입니다. 승천이 확실한 만큼 재림도 확실합니다.
내 인생의 종말을 바라봅시다
오늘 우리가 생각할 것은 역사의 종말이 아닙니다. 내 인생의 종말입니다. 내 인생은 어차피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다음 세상입니다.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 우리가 할 준비는 단 한 가지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천국이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어떤 경로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도마가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답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수 없느니라!”(요14:6) 오직 한 가지 주님만 믿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승천하셨습니다. 주님의 승천처럼 우리도 승천합니다. 하늘나라의 가장 좋은 집을 바라보면서 마음 편히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역사는 마감됩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악한 자들이 심판을 받습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우주 질서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땅에 연연하지 맙시다. 세상 종말을 대비하며 삽시다. 천국의 집, 거처를 바라보며 소망을 굳게 합시다. 할렐루야!
초림과 재림
행 1장 9~12절 / 김경년목사
미국에 척 스미스 목사님이 담임하는 <갈보리채플>이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회인데 처음에 이 교회는 서커스 천막 같은 교회였습니다. 사람만 많이 앉게 나무로 대충 지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 갈보리채플이란 교회 이름이 있고 그 밑에 "마라나타 커뮤니티"-`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공동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척 스미스 목사님은 "부흥되는 교회는 2년에 한번씩 예배당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성도수가 늘어나니까 예배당이 작아서 또 늘리고 또 늘리고... 늘려가는 교회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주님의 탄생과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에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까요? 하나님은 약속대로 성취하는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초림(탄생)은 예언대로 성취된 일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예언하기를 456회나 나타납니다.
초림은 창세기에서부터 예언되었습니다.
창세기 3:15에서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여자의 후손이 바로 이 세상에 오실 구원자인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없이 어머니를 통해서만 잉태되었기에 여자의 후손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법적으로는 요셉이 부친이고 그의 후손이지만 처녀의 몸인 마리아의 후손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복제하는 기술을 가진 과학자들도 남자 없이 여자로서만 임신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예언 후에 다시 예수님이 탄생하실 것을 예언하신 이는 이사야입니다.
이사야는 7:14에서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하여 처녀 탄생을 예언합니다.
이어서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 11:1에서 어느 가문에서 탄생할 것인지 예언합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새라는 가문에서 출생합니다.
그리고 미가 선지자는 미가 5:2에서 구체적으로 어느 장소에서 태어날 것인지 예언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바로 그곳은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즉 초림은 분명한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요, 성경은 약속의 책이며,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 지는 줄 믿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재림도 반드시 예언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32,500여가지 하나님의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약속들은 다 이루어졌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것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예언은 구약에 1,200회가 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무려 318회나 걸쳐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보면 1,518회나 예언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재림은 성경에서 제일 많이 예언된 사항입니다. 이제 성경의 예언 중 재림에 대한 예언만 남아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에서도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예언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한 두 사람이 본 것이 아니라 5백여명 이상이 함께 보았습니다. 그 때 천사가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예수님이 오실 것이라고 예언 해 주었습니다.
요한 계시록 22:7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12절에는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20절에는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세 번이나 반복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약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신실하시고 참되십니다. 약속대로 지키십니다.
그러면 왜 아직 재림하지 않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후서 3:9에서 주님이 아직까지 오시지 않는 이유는 오직 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전도해서 회개시켜 함께 구원 받도록 힘서야 할 줄 믿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재림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먼저, 항상 영적으로 긴장해야 합니다.
군인은 항상 긴장해야 합니다. 적군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군인이 정신 상태가 헤이하고 만약 근무 중에 잠이나 자고 하면 큰일납니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주님이 오실지 모르기에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항상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항상 긴장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모든 긴장이 풀어 질 때 주의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영적으로 긴장하도록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을 아무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십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방탕하고 타락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며칠전에 수능이 끝났는데 만약에 학생이 대학 입시에서 합격할 것을 미리 안다면 그 학생이 공부를 하겠습니까? 그것을 알지 못하기에 열심히 공부하게 되듯이 우리도 주님이 언제 어디서 재림을 하실지 안다면 그 때 가서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언제나 충성스럽게 일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2절 말씀을 봅시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여기서 제자들이 감람원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그들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즉 제자들은 더 이상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을 쳐다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만 쳐다보고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올것이기 때문에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서 할 일을 열심히 최선을 다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로 올라가시면서 우리들에게 명령하신 것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우리는 주님이 오시기까지 이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거룩한 삶을 힘써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자는 항상 거룩한 삶을 힘씁니다.
구약에 나오는 노아는 타락한 세상에서 의인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노아는 항상 하나님과 동행 한 사람이었습니다. 즉 노아는 거룩한 삶을 힘쓰며 살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노아의 때와 비슷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들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술 취하고 방탕하여 마음이 둔해져서 종말이 가까워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에 물들지 않도록 거룩한 생활을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맞이할 성도도 의의 옷을 입고 거룩한 삶을 옷 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빠져 산다면 주님은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자” (고후7:1)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재림을 맞을 준비는 거룩한 생활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오신다면 맞을 준비가 되었습니까? 아니면 부끄럽게 생각되십니까?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항상 해야 합니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심판주로 오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날마다 하늘을 향해,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시다. 그러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갑시다. 누구보다도 더욱 굳건하게 삶의 현장을 지킵시다. 그러나 그곳을 땅 끝으로 삼아 다 시 오실 주님의 증인되기 위해 내 삶의 자리를 지키는 자들이 됩시다. 주님께서는 올라가신 그대로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그분에 의해 평가되어질 것입니다. 아멘!
전혀 기도에 힘쓰라
행 1장 9~14절 / 김 조목사
악한 사단과 전쟁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님들 언제나 승리하시고 능력 있는 삶이 되시기 원합니다. 날로 악해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려니 힘들고 지쳐지기 쉬우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하시고 십자가 지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고 무덤에서 부활하사 우리의 산소망을 주신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 바라보고 그 말씀 믿음으로 새 힘 얻고 주님하신 역사 바라보시고 승리하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최후의 명령을 내리신 후 사명 다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재림을 약속하셨고 이를 기다리는 제자들이 예루살렘 떠나지 아니하고 전혀 기도에 힘쓰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전혀 기도에 힘쓰라 제목하고 무엇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사명 다하기 위해 기도합시다. (9-10절)
부활하신 주님이 40일 동안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고 그 사명을 다하시고 승천하시는 모습이 9-10절에 있습니다.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지 못하게 하셨다”고 했는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것으로 구름기둥으로(출13:21) 여호와의 영광이(출16:10,왕상8:10,단7:13) 나타났던 것이니 예수님의 승천이 영광스러웠던 것을 말합니다. 우리 구원하여 이 땅에 오실 때에는 사람의 아들로 멸시와 천대받는 비천한 몸으로 오시었으나 사명을 다 하신 후 승천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이었으니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여 우리도 주님이 내게 맡긴 사명 다 감당하면 영광 중에 하나님 앞에서 큰 위로와 상급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심으로 우리에게 최후의 명령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아는 지식으로 끝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명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고 영광 중에 들림 받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노력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새 힘 얻고 복음 전파의 사명 잘 감당하시고 영광 중 승천하시는 예수님 본 받아 우리도 사명 감당하도록 기도하시어 승리하시기 원합니다.
2. 재림의 때를 생각하고 기도합시다. (11절)
예수님의 승천하시는 모습을 주의 깊게 쳐다보고 있는데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예수는 하늘로 가심은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재림의 약속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언제 오시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오신다는 것입니다. 초림하실 것을 456번 예언하시고 아기 예수님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려 종의 형체를 갖고 오셨습니다. 그 사역 다 하신 후 영광 중에 승천하시면서 구름타시고 영광 중에 많은 사람이 보는 가운데서 오실 것이라 성경에 1,518번이나 약속하셨습니다. 그때는 심판의 주님으로 오시기에 세상이 끝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이때가 주님 맞이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잠시 머물다가 가야할 세상에 것에 끌려서 우왕좌왕 하지 말고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6:20) 하신 말씀 기억하고 이 땅에 쌓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는 지혜로운 성도로 예수님 재림 때를 준비하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서 받을 상급의 결정이 이 땅에서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고 했으니 참으로 오늘이 귀한 날이요, 예수님 재림하실 심판의 날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믿음 준비 면류관 받아 쓸 수 있는 지혜로운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님이 물으신다면 어떤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때 놓치지 말고 준비하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마25:1-13) 준비하기를 날마다 점검하며 기도하는 자가 되시기 원합니다.
3. 합심하여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12-14절)
승천하시는 주님을 바라본 제자들과 모친 마리아와 따르는 여자들과 예수의 아우들이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돌아와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므로 10일 째 오순절에 강력한 성령강림이 임하였고 이것이 초대교회에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에도 합심 기도하여 큰 부흥이 있었던 것입니다.(2:42,4:24,6:4) 제자들이 기도하기 전에는 실패자요, 도망자였으니 합심하여 기도하여 성령 받은 후 큰 능력자요, 승리자요, 복된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의 아우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으로(마15:55,막6:2)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아니했습니다.(요7:2-10)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 보고 믿고 성령 받은 후 제자가 되었고 그 중 야고보는 예루살렘 감옥하며 야고보서의 저자로도 믿어지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예루살렘에 모여 기도하므로 아버지의 약속한 성령 충만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전혀 기도에 힘쓰므로 능력 받고 세상과 사단을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옛날이 아니라 지금 되어야 하고 합심하여 기도합시다.(마18:18) 말세의 징조가 여러 곳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어려울 때일수록 하시고 큰 승리와 복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초대교회의 뜨거운 성령의 역사로 교회가 세워지고 부흥이 일어났듯이 내 심령과 가정, 교회와 나라와 민족 위에 이 역사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비천한 몸으로 오시었으나 사역 마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 중에 승천하셨으니 우리도 영광 얻도록 사명 다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심판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으니 언제 오시더라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성도되시고 말세에 능력 있는 일군 되게 전혀 기도에 힘쓰는 성도되시어 성령의 충만함 입고 귀한 상급 많이 받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당만 밟을 것인가?
행 1장 10~18절 / 홍문수목사
여러분!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혹자는 세상에 대단한 업적을 남기는 것은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예배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인간의 활동 중 가장 위대한 활동(the greatest activity)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배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들은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어디까지나 인간 차원의 일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신적인 차원의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배는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특히 우리 신앙생활에서 예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예배는 신앙생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전도도 중요하고, 봉사, 교제, 그리고 선교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예배의 연장이며, 넓은 의미에서 예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배는 신앙과 삶에서 최우선 순위(the first priority)이다.” 그뿐이 아닙니다. 예배에서 성공하면 인생에서도 성공합니다. 반대로 예배에서 실패하면 인생에서도 실패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을 살펴보면 이런 사실이 분명히 확인됩니다. 그중에 예배에서 성공해서 인생에서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누굴까요?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12장 보면,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곳에 땅 한 평도 자기 이름으로 등기된 게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담합니다. 그는 실망할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가는 곳마다 감사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제단을 쌓는 것은 그 당시 예배 방식입니다. 창12:7~9 보면, 그가 움직일 때마다 제일 먼저 예배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7 ...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이와 같은 아브라함 예배의 하이라이트는 모리아 산에서 제단을 쌓아놓고 이삭을 번제로 드린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결정적인 순간에 중지시켰지만, 아브라함으로서는 이삭을 이미 바친 겁니다. 이것은 최상의 예배였습니다. 가장 소중한 독자 이삭을 바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배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그리고 인류 역사를 보십시오! 아브라함보다 인생에서 성공하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 있는지! 그는 예배에서 성공하고, 인생에서 성공한 대표적인 케이스입니다.
2백 개가 훨씬 넘는 전 세계 국가들 가운데 가장 잘 사는 나라가 어디입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국이죠. 장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전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역사가 얼마나 짧습니까? 초대 워싱턴 대통령을 기준으로 하면 220여년, 청교도가 메이 플라워 호 타고 신대륙에 상륙한 것을 기준으로 해도 4백 년이 채 안 됩니다. 그런데 미국이 어떻게 그렇게 됐을까요? 그 비결은 예배의 성공에 있습니다. 예수 잘 믿고 예배 잘 드리는 조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청교도가 처음 상륙했을 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습니까? 먹고 사는 문제와 안전 문제가 시급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예배 드리고, 예배 드릴 교회당을 지은 겁니다. 그 다음에 학교 짓고, 나중에 자기들이 살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제일 먼저 예배를 드렸습니다. 지금은 그 전통이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아직 곳곳에 그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그 덕분에 가장 부강한 나라를 이룩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 한국도 이만큼 잘 살 게 된 게 예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짧은 역사 속에서 한국교회 부흥의 기적과 한강의 기적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입니다. 그 배경에는 한국교회의 예배에 대한 열심히 있습니다. 교회 안에 얼마나 예배가 많습니까?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도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예배합니다. 하나님이 이를 기뻐하신 겁니다.
오늘 본문은 이와 정 반대로 구약 이스라엘이 어떻게 멸망했는지를 보여줍니다. 한 마디로 예배의 실패 때문입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아무쪼록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특히 바른 예배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재확인하는 기회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배에서 성공함으로 인생에서 성공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이사야서는 주전 8세기에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한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북 이스라엘 왕국은 이미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남 유다 왕국이 남아 있었지만, 국제 정세가 위협적이었습니다. 앗수르 제국이 버티고 있고, 한편으로는 신흥 강국인 바벨론이 새로운 위협으로 대두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배반한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이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본문 1장을 보면, 그들의 예배 실패를 통렬히 질책하십니다. 예배의 성공은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유다 백성의 예배를 거절하고 계십니다.
[1] 하나님이 받지 않는 예배 : 형식적인 예배
여러분, 하나님이 왜 그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그들의 예배는 형식적인 예배였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꼬박 꼬박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참 예배자가 아니라, 위선이 가득한 자들이요 사악한 자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10절 보면, 그들을 가리켜 심지어 뭐라고 표현하십니까? 소돔과 고모라 사라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소돔과 고모라는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도시들로 심각한 죄악으로 인해 유황불 심판을 받고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의 상징입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이 얼마나 사악한지 소돔과 고모라 백성이 비견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들의 예배가 도대체 어떠했기에 그토록 신랄하게 책망하셨을까요? 형식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도저히 받으실 수 없는 예배였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① 마음이 없는 예배 :
첫째는, 마음이 없는 예배였습니다. 겉모양은 갖추었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사랑의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11절~12절을 보시죠.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그들의 형식적인 예배를 가리켜 뭐라고 표현했나요? ‘마당만 밟는 예배’라고 불렀습니다. 허탕 쳤다는 뜻입니다.
이런 예배의 모습을 사29:13에서는 단적으로 이렇게 지적합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 ”
오늘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이런 겁니다. 성경을 척척 찾고, 기도도 잘 하고, 찬송 시간에 잘 따라 부르고, 설교 시간에 정숙하게 앉아 있고, ... 그러나 몸은 와 있지만, 마음은 전혀 다른 데 가 있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실한 마음이 없이 기계적으로 건성으로 예배에 임하는 모습입니다.
옛날에 극장 구경 간다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오래 전에 시골 영감님 서울에 자식들 보러 올라 오셨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이 모두 바빠서 모시고 다니지 못합니다. 죄송해서 용돈을 드리면서 극장 구경이나 하고 오시라고 햇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보니까 돈이 그대로 있는 겁니다. 이상해서 물었더니 영감님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얘, 서울 사람들 약아빠진 줄 알았더니 참 어리석더구나. 내가 30분이나 여기 저기 둘러보았는데 돈 받을 생각도 안 하더라. 나도 굳이 낼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왔지 뭐.” 극장 구경은 했는데 정작 영화 구경은 못한 겁니다. 마찬가지 예배당 구경은 했는데 얼마든지 예배는 드리지 못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② 삶이 없는 예배 :
두 번째는, 삶이 없는 예배입니다. 신앙은 마음 속에 있지만 행실로 나타납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중요한데, 더 나아가 삶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예배 드릴 때의 진실한 모습이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만일 예배 시간에는 그럴 듯한데, 삶은 엉뚱하게도 악으로 가득하다면 이야말로 큰 모순이라는 겁니다.
15절~16절에 보면 유다 백성의 모순적인 모습을 지적합니다. “ ...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16 ...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그들은 삶 속에서 거짓과 사기, 폭력과 살인, 사악한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그들의 삶을 뻔히 보고 게신 하나님으로서는 그들의 예배가 아무리 겉으로 번듯해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13절~14절 보면, 구체적으로 그들의 예배를 열거하며 책망합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burden)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I am weary of bearing them)” 그런 모순적인 예배는 가증스러워서 바라보기도 지쳤고 아주 지겹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해야 되는 것처럼 예배와 삶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신행일치(信行一致)도 중요하고, 예행일치(禮行一致)도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가증스럽고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예배가 정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 다시 말하면 열납하시는 예배가 되도록 유의해야 됩니다. 열납(悅納)이란 말은 호감을 갖고 좋게 본다(look with favor), 기쁘게 받아들인다(accept)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열납하실 만한 예배가 아니면 거부하십니다. 인간은 예배를 드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말1:10 보면 심지어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 하리라” 아예 성전 문을 닫아걸고 싶으실 정도라는 겁니다.
[2] 형식적인 예배의 폐해 : 축복 대신 저주
이처럼 예배가 형식적인 게 됨으로 예배에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는커녕 거꾸로 진노가 임한다고 경고합니다. 15절 보면,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유대인은 손을 내밀면서 기도하죠. 아무리 예배하고, 간절한 모양으로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인간의죄는 영적인 절연체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단절 시킵니다. 사59:1~2 “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하나님과 통해야 축복을 받든지 은혜를 받든지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아무런 은혜도 경험하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꽉 막혀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심령이 병들고, 더 나아가 생활이 엉켜버리고, 마침내 인생을 망치게 됩니다. 유다 왕국이 이래서 멸망한 겁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엘리 제사장 아닙니까? 그는 제사장이었지만,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귀히 여기지도 않고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그 자식들은 더했습니다. 그들 역시 제사장직을 세습했지만, 제사를 훼방합니다. 제물을 가로채고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을 범하고 ...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짓을 저지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삼상2:30 “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하나님이 경멸하시면 이야기가 끝난 것이죠. 그런 인생이 어떻게 형통할 수 있겠습니까? 엘리는 완전히 패가망신하고 말았습니다. 블레셋과 전쟁에서 패함으로 나라도 망하고, 온 가문이 멸절됩니다.
여러분, 예배에 실패하는 게 이렇게 심각한 겁니다. 우리의 예배 생활은 어떻습니까? 혹시라도 마당만 밟는 예배, 헛된 예배, 그래서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고 축복하시지 않는 죽은 예배는 아닌지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 모습이 있다면 빨리 시정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예배의 회복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축복이 회복됩니다.
[3] 예배의 회복 : 축복의 회복
예배가 회복되면 축복이 회복되는 것, 이건 원리이며 공식입니다. 딱 떨어지는 진리입니다. 우리 삶이 왠지 답답합니까? 뭔가 꽉 막혀 있습니까? 열심히 사는데도 뭐가 잘 안 됩니까? 하는 일마다 자꾸만 꼬입니까? 그러면 우리 예배를 잘 점검해 보십시오! 그리고 예배의 회복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이 흠향하실 만한 예배,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은혜가 넘치는 산 예배로 새롭게 세워지기를 소원합니다. 비유하자면 이런 겁니다. 조화와 생화의 차이입니다. 얼른 보면 조화도 그럴 듯합니다. 어느 때에는 더 화려합니다. 하지만 조화에는 은은한 향기가 없습니다. 생화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풍깁니다. 우리의 예배에서도 향기가 풍겨야 합니다.
① 마음의 향기가 있는 예배 :
먼저 마음의 향기가 있는 예배여야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마음의 향기가 생길까요? 우리 안에 있는 죄를 회개하고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영혼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납니다. 그러므로 예배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마음이 정결해야 된다는 겁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 앞에 에배할 때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해야 됩니다. 회개하는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18절 보십시오! 18절. “ ...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하나님은 유다 백성이 사악하고 예배에 실패하고 있지만 포기하지 않으시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호소합니다. 그들의 깨끗하게 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참 에배자로 변화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이 깨끗한 심령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바라고 기다리시는지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죠. 요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는 깨끗한 심령으로 성령을 의지하며 말씀을 사모하며 드리는 예배자입니다. 이런 참 예배자를 하나님께서 애태워 간절히 찾으십니다. 이런 예배를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집중력과 정성입니다. 마음을 쏟는 겁니다.
어느 목사님의 글을 보니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흔히 성도들이 에배 시간에 범하기 쉬운 실수들을 정래한 겁니다. 설교시간에 강단 멀거니 응시하는 멀대파(눈은 보고 있는데 생각은 딴 데 출장 가 있는 경우), 주보로 밑줄 그으며 교정까지 보는 꼼꼼파, 졸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아멘파, 수시로 시계 보는 안절부절파, 옆 사람과 글로 대화하는 청각장애파, 예배 후 할 일만 생각하는 염려파, 설교 시간이 혼자 성경을 읽는 나홀로파, 찬송 부를 때 입만 벙긋대는 금붕어파, 기도 시간에 살짝 잠을 보충하는 기회주의파, 누가 왔나 안 왔나 두리번 거리는 경비파, 마음을 집중해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순정파, ... 한 가지라도 해당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우리는 순정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담긴 향기로운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② 삶의 향기가 있는 예배 :
또한 우리 예배에 삶의 향기가 있어야 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예배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게 무엇입니까? 16절~17절.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악한 행실은 버리고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에배가 제대로 드려질 수 있다는 겁니다.
마더 테레사가 한번은 거리의 고아를 도와주면서, 목마른 아이 물 한 컵 주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이 그녀를 칭송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주님께 예배하고 있습니다. 칭찬받을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런 예배를 가리켜 생활 예배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롬12:1~2에서 설명합니다. “1 ...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그것 자체가 예배라는 겁니다. 이런 예배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십니다.
이와 같이 마음의 향기, 사람의 향기가 담긴 예배로 회복되면 심령이 회복됩니다. 그리고 생활이 회복되고, 더 나아가 인생이 회복됩니다.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요삼2이 바로 그런 원리를 언급하는 말씀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예배에서 성공하면 영혼이 회복되고 잘 됩니다. 그러면 생활의 범사가 잘 됩니다. 계속 그렇게 살다 보면 인생이 복스러워집니다. 그리고 존귀해집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인생의 성공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이 시간 한번 우리 자신의 예배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성숙해지는 면도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습관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다 보면 성전의 마당만 밟는 안타까운 모습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손해가 큽니다. 인생 전반에서 손해 보게 됩니다. 기왕에 신앙생활 하는 것 그러면 안 되겠죠.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예배에 성공함으로 인생에서도 꼭 성공하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락방
이동원목사 / 행 1:12-14, 2:1-4
신학자들은 성경의 역사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곧 ‘구속사’(Salvation History)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구속사에서 사도행전 2장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강림하고 신약 교회가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세기 11장을 함께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11장에서 인류가 경험하게 된 문제의 해결의 희망이 비로소 사도행전 2장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1장에서 인류는 바벨탑을 쌓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무너져 전 세계로 흩어져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이 되고 민족과 민족 사이에는 벽들이 쌓여지고 언어와 마음이 소통되지 않는 갈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강림하고 성령을 체험하자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그들이 사용하는 다른 언어에도 불구하고 한 마음이 되어 한 메시지를 듣고 민족과 언어의 벽,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초월하여 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 교회의 탄생이었습니다.
이런 성령의 강림 그리고 교회의 탄생이 이루어진 곳이 예루살렘 옛성 시온 문을 나와 100m 지점 시온의 언덕에 자리 잡은 2층 다락방이었습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이제 예수의 제자들은 감람산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13절에 보면 그들은 그들이 유하고 있던 다락방(방 한가운데 3개의 기둥이 주위 벽에 서있는 기둥들과 연결되어 아름다운 아취 형상을 이루며 천정을 받치고 있는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다락방)으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이 다락방은 평소 예수님과 제자들이 자주 모이던 마가 요한의 집(행12:12)에 있던 다락방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함께 했고 여기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바로 그곳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 곳에서 그들은 성령의 강림을 경험했고 성령에 충만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 세계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여기가 바로 신약의 교회가 탄생한 요람이 된 곳입니다. 이 예수의 처음 제자들이 경험한 역사적 성령 충만의 비밀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어떻게 해서 성령의 충만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의 우리도 성령의 충만함으로 이 시대 우리에게 맡겨주신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의 비밀-무엇일까요?
1.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선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 이 다락방에 모인 것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다락방 성령 체험의 시발점이 된 행1:4을 다시 읽겠습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그리고 우리는 이 분부의 말씀이 주님이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눅24:49에서 분부된 말씀이었음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그리므로 이 처음 성령 충만의 자리는 순종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누가 성령 충만을 받습니까? 순종하는 제자들입니다. 주께서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하니까 머물고, 모이라고 하니까 순진하게 모인 것입니다. 순종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순종의 사람들에게 성령이 부어 진 것입니다. 행5:32을 읽겠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저는 지금까지 목회를 하면서 매사에 계산에 빠르고 매사에 비판적이고 매사에 부정적인 성도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사모하신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한 순종을 결단하십시오. 주께서 모이라고 하면 모이십시오. 기도하라고 하면 기도하십시오. 가라고 하면 가십시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순진한 순종을 어리석음으로 매도하고 있습니다만, 성경은 순종이 신앙의 기본임을 구구 절절이 강조하지 않습니까? 성경은 불순종이 초래한 불행을 또한 구구 절절이 보여 주지 않습니까? 그래서 앤드류 머레이는 “우리가 신앙에 입문하는 순간, 순종의 학교에 입학한다”고 말합니다. 지난 해 베이징 올림픽의 국가적 영웅이었던 역도 장미란 선수는 그녀의 역도 선수로서의 성공의 비밀을 아버지에게 순종한 결과라고 말한 바가 있었습니다. 자신은 한때 역도하기가 죽기보다 싫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네가 갈 길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결국은 순종하기로 결심한 것이 그녀의 역도 인생의 성공의 비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미란의 아버지는 그녀의 딸을 강압만 한 것이 아니라, 꿈을 동시에 주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무명의 선수 시절에 미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싸인을 만들어 주고 연습해 보라고 했답니다. “제게 무슨 싸인이 필요해요?”라고 말하면 “그 때가 곧 올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유명한 싸인이 탄생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 전체는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서 명령하시는 말씀으로 가득차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된 우리에게 이 말씀을 따르는 것이 곧 우리의 복이라고, 우리의 성공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성도 여러분, 이제 순종의 자리에 서시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의 첫 스텝입니다.
2. 성령의 능력을 사모해야 합니다.
자, 주께서는 이미 처음 제자들에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그들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성령의 권능을 받기 위해 그들이 얼마간 예루살렘에 머물러 성령의 능력으로 입히도록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을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그들이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기도로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자, 그래서 제자들이 어떻게 했다고 본문은 증언합니까? 1:13-14절입니다.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다 거기 있어 (14)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 그래서 그 다음 절(15절)에 보면 120명이 모여 다락방에서 기도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며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가롯 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선출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12사도와 그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가 주의 부활의 일치된 증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열흘 가까이 집중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교회 공동체가 이만한 집중력을 가지고 전적으로 한 열흘만 온 교회 온 교우가 함께 모여 기도에 몰입하고 기도에 올인하여 성령의 능력을 사모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상상해 봅니다.
기도는 단순히 우리의 욕심을 이루는 통로가 아닙니다. 모든 치열한 기도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가 됩니다. 행2:1은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저는 이 대목이 오순절 성령 강림이 오순절이라는 명절의 타이밍을 맞추어 주께서 이루신 일임을 강조하려는 사도행전의 저자의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의 타이밍이었던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오순절은 이스라엘 3대 명절(유월절, 초막절과 함께)의 하나로 유월절이 지난 50일째 날에 시작되는 추수의 첫 열매를 감사하며 바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이 절기는 처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에게 그 날은 예수님 부활 후 40일을 이 땅에 계시다가 승천하신 후 몇 날이 경과된 날입니다. 오순절(pentecost)이란 말의 뜻이 본래 50일 이라는 뜻입니다. 그 날 성령이 강림하시고 교회가 예수 부활의 새 생명의 열매를 안고 탄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일에 초대 교회 성도들의 기도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은 오시기로 작정된 것이지만, 그냥 오신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기도를 통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로 일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도로 일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사역 이전에 성령의 능력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문제를 만드는 분들을 보면 자신의 고집과 자신의 소견만으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내 모든 고집도 소견도 내려놓고 그냥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이끄심으로 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진정한 사역의 시작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성령 충만의 자리인 것입니다.
3. 성령의 임재를 체험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시작은 역사적 사건을 사실적으로 체험한 데서 비롯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순절 사건입니다. 참된 기독교는 단순한 하나의 사상이 아닙니다. 이론도 아닙니다. 교리도 아닙니다. 물론 교리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은 교리이상의 사건이요 사실이요 체험 곧 ''''''''''''''''reality''''''''''''''''(실제)라는 말입니다. 2절에 보면 급하고 강한 바람이 온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3절에 보면 불이 혀같이 갈라져 임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방언으로 성령의 메시지를 말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방언이 요즈음 말하는 소위 영음 방언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고유 언어들인 여러 외국어를 말하는지는 학자들의 공통된 결론이 없습니다. 대체로는 본문의 문맥상 여기선 외국어를 뜻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2장 6절이하에 보면 오순절 예루살렘에 모여 든 사람들이 제자들의 증거를 각각 자기의 방언(자기 언어)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고 9절 이하에 보면 그 여러 나라와 지역의 이름들이 열거 되어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자기 언어로 주님의 복음을 알아듣고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성령의 놀라운 ‘표적과 기사’(signs and wonders)를 동반한 것입니다. 바람과 불이 동반된 것입니다. 성령이 바람과 불로 임하여 복음의 진정성을 입증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든 표적은 하나님이 거기에 함께 하시고 거기에 임재하시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임재의 체험은 사람마다 다르게 경험되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신앙의 체험을 지나치게 보편화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심지어 그 날 오순절의 다락방에서도 체험은 사람마다 달랐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바람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불을 보고 또 어떤 사람은 혀같이 갈라지는 불을 보았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배우지도 않은 다른 언어를 말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꿈을 꾸고 어떤 사람들은 환상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갑자기 지루한 일상을 깨는 뜨거운 희망이 불덩이처럼 가슴에서 솟아남을 경험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눈으로 나타난 가시적 체험은 없었을지라도 의식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강력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다 성령의 임재 체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소심한 다락방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날개를 펴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 사건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독수리 새끼를 잡아 집안에서 닭장에 넣고 병아리, 닭들과 함께 길렀습니다. 이 독수리 새끼는 자신이 독수리라는 정체성을 상실하고 한 마리의 닭이 되어 얌전하게 닭들의 세계에 적응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다른 닭들과 마당에서 닭 모이를 먹고 한가롭게 걷고 한가롭게 산책하다가 해가 저물면 닭장에서 다른 닭들과 함께 곤히 잠들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가을이 되어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던 날 갑자기 닭장위에 독수리 몇 마리가 나타나 닭장 위를 비상하며 가을바람을 타고 비상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독수리 새끼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합니다. 잠시 후 나래를 편 독수리는 자신들의 동료를 따라 창공으로 높이 치솟아 오르더니 그들과 함께 수평선 저 너머로 여행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닭장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에게 일어났던 사건이라고 믿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믿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지만 그들은 아직도 세상의 자녀들과 다름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여 기도하던 예루살렘 다락방에 한 순간 성령이 바람처럼 임한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능력의 날개를 펴고 비상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불이 임했습니다. 그들의 혀는 불을 토하며 예수의 생명과 소망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이제 성령의 사람, 복음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지금이야 말로 당신의 인생을 하늘로 들어 올릴 이 거룩한 바람에 당신의 현존을 맡길 때가 아닙니까? 지금이야 말로 내 춥고 외로운 인생의 마당에 거룩한 불이 임하여 나의 실존을 능력의 불로 태울 때가 아닙니까? 지금이 바로 성령의 능력을 사모할 시간이요, 지금이 바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할 시간입니다.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쓰라
행 1장 12~14절 / 이성우목사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 중에 하나는 모든 것들이 제 자리에 있으면서, 제 역할을 제대로 잘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제 자리에 있지 않거나, 설령 제 자리에 있다고 해도 제 몫을 온전하게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 그것은 그 자체로도 문제이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 자체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그것은 결국 다른 영역에까지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미치는 영향의 정도는 그 존재의 중요성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물론 이것과는 정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한 존재가 자기 위치에서, 자기의 몫을 잘 감당해 냄으로써 그 결과로 주어지는 긍정적이고 좋은 영향 또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을 우리들은 얼마든지 보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를 말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이 세상의 구세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제물이 되어주심으로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을 마련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꼽아야 할 것입니다.
그 주님은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의 말씀 가운데 13-14절 말씀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며,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살아가고자 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갈 것을 당부하고 계십니다.
또한 그 주님은 공생애를 마치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지상 대 명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기쁨과 영생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의 뒤를 이어서 모든 사람을 제자 삼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이제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이런 저런 많은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가야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주님께서 당부하시고 명령하신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하며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전력 질주해야 함이 마땅한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분부하신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가면서 살아가는 것은 이 세상의 학문이나 경험, 그리고 세상적인 권력이나 지위, 물질의 힘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고 그 분이 공급하시는 은혜 가운데 살아갈 때만 가능해진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면서도 성령의 권능을 힘입지 못하고 살아가게 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제 자리에 있지 못한 어떤 존재와 같이 되어서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되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서 자기 몫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서 다른 존재들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불행한 존재가 되게 됨으로 결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결과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들 가운데 어떤 교회들은 교회다운 교회가 되지 못하고 그저 이름뿐인 교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 땅에 존재하는 많은 성도들 가운데 어떤 성도들은 성도다운 성도가 되지 못하고 역시 그저 이름뿐인 성도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증인이요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으면서도 증인의 자리에서 증인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제자의 위치에서 제자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으며 3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말씀을 배우고 삶을 함께 나눴지만 성령의 권능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지 못했던 제자들은 주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여전히 세상에 속한 사람들로서 세상적인 욕심에 이끌려가는 삶을 살았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세번씩이나 예수님을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으며, 예수님의 구세주로서의 사역의 길을 인간적인 생각을 가지고 가로막고 나섰다가 주님께로부터 책망을 듣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이 체포당하시고 고난을 당하시게 됨으로 자기들의 생각과 뜻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예수님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갔던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제자 훈련은 분명히 실패작으로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제자들을 그렇게 실패한 상태로 방치해두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부활하신 직후에 그들을 찾아가셔서 만나주심으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게 된 것도 놀라운 은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태의 모습만 가지고는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아직은 있지 못했으며, 감당해야 할 역할 또한 제대로 감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셨던 주님은 그래서 그 제자들에게 성령의 보내주심을 약속하시고 그 약속하신 성령을 충만히 받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도할 것을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사도행전 1장 12-14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직후에 제자들과 주님을 따르던 믿음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말씀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고 있는 광경을 증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대목에서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제자들이 왜 한 곳에 모여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하는 일에 힘썼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들이 몇 차례에 걸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써 주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고나서 그들이 갖게 된 생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와 신실성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생각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 하셨던 수난 예고와 부활이 분명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이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의심 없이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도행전 1장 4-5절에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 곧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을 그대로 믿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 오로지 기도에 힘쓰게 된 줄로 믿습니다.
자, 이제 그렇다면 그들이 오로지 기도에 힘쓰게 된 결과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이 여러분들의 중요한 관심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결과를 알게 되면 여러분들도 그들처럼 자연스럽게 오로지 기도에 힘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오로지 기도에 힘쓰게 된 결과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서 오로지 기도에 힘썼던 그들 모두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인해서 이차적인 열매들이 많이 맺히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이제는 더 이상 용기 없는 자가 아니라 담대하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되게 되었다는 사실과 그 증거를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음을 갖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믿는 무리가 생김으로 자연스럽게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신앙 공동체인 교회가 태동하게 되었고, 교회가 교회답게 능력 있는 공동체가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믿는 무리들이 성령 안에서 한 마음이 되어 교제하고 서로를 돌아보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게 됨으로써 외부로부터 다가오는 박해를 이겨내고 용감하게 맞서 싸울 수가 있었으며,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되는 놀라운 기적을 비롯해서 많은 기사와 이적이 나타나게 되고 박해 중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역사가 점점 더 놀라운 속도로 확산되어 나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교회가 교회다워 지고, 성도가 성도다워질 뿐만 아니라 제자가 제자다워지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된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2장 7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에스겔 37장 9-10절 말씀을 보면,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사람이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생기가 없으면 마치 죽은 자와 같이 되듯이, 성도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지 않으면 살았으나 그 존재가 아무런 생기나 능력이 없는 죽은 자와 같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그리스도인의 이름에 합당한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이 있어야 할 정 위치에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역할을 온전하게 감당하며 살아감으로 하나님께 참으로 영광을 돌리시기를 원하신다면 이제부터라도 오로지 기도에 힘써야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와 관련해서 많은 성도들이 잘 못 알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만 기도할 때 응답하시는 분이 결코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은 온통 기도로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누렸던 사람들의 삶을 증거 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성경이 증거 하려고 하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런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방법을 통해서 성도들을 은혜와 사랑으로 돌보시며, 온 세상을 움직여 나가시고 계신 것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응답해 주시는데, 그 응답의 내용 중에는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성경이 아주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함과 같은 영적인 부분도 있지만 나라와 민족을 위기 가운데 구해낸 히스기야 왕과 에스더의 기도 응답도 있으며, 기도함으로 아들을 얻게 된 아브라함과 한나의 기도도 있습니다. 죽을병에 걸렸다가 15년이나 생명을 연장 받게 되었던 히스기야 왕의 기도도 있으며, 죽은 딸이 다시 살게 되었던 회당 장 야이로의 기도도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기도 응답의 경우를 어떻게 말로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사람이 “기독교는 기도 교”라고 말했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성도가 성도다워지며, 주님의 제자가 제자다워지는 길은 오직 기도함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무기요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이 임하는 유일한 통로인 기도는 교회와 성도, 그리고 제자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유일한 방법임을 명심하시고 이제부터 여러분들의 남은 날을 살아가시는 동안에 오로지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쓰심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어서 제자다운 제자가 되며, 기도 응답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늘로 올려 지신 예수
행 1장 9~11절 / 강성찬목사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고 경건한 삶을 살았던 에녹은 야렛의 아들입니다. 야렛은 일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습니다. 야렛과 에녹은 셋의 후예들로서 셋의 신앙과 생활을 본받아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습니다. 무려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했던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하였습니다. 에녹에게는 여러 조상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장수하다 세상을 떠났고 그들의 육체는 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그들과 달리 죽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워 갔습니다.
엘리사와 더불어 요단 강 기슭에 도달한 엘리야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그것을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겉옷으로 요단 강 물을 쳤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요단 강물이 갈라지고 강바닥이 말라서 두 사람은 요단 강을 육지같이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출애굽 당시 홍해가 갈라졌고, 또한 여호수아가 요단 강을 건넜듯이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동일하게 임하심을 보여 준 사건입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무엇이든지 요구하라고 제의하였습니다. 이에 엘리사는 엘리야의 계승자로서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영감을 갑절로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는 엘리야의 능력으로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자신의 승천을 엘리사가 볼 때에 이 요구가 이루어지리라 말하였습니다. 이러던 중 갑자기 하늘로부터 불수레와 불말이 다가와 두 사람을 격리시키더니 회리바람이 엘리야를 태우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리하여 엘리야는 에녹 이후 두번째로 육신의 죽음을 보지 않고 영광스럽게 승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엘리야의 불수레와 불말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신공위성이요 회리바람은 하나님의 로케트 곧 전능이었다 하기도 합니다(석원태 목사 설교).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에 대한 많은 실제적인 증거들을 보이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와 함께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께서 생전에 말씀하신 대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터였으므로 제자들로서는 그 말씀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실 하나님 나라가 출범한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있은 후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세상을 통치하시고 특별히 이스라엘을 통치하신다는 내용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주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 주제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이나 부활하신 후 40일 간의 사역 기간 동안에 주님이 하신 가르침이나 설교의 대부분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증인이라는 새로운 사명을 주기 위해 남은 유일한 일은 성령의 강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것과 성령 세례를 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뒤에 오셔서 성령으로 세례 주실 분이 자기보다 얼마나 능력이 많은 분인가를 말했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위해 성령을 받으신 것처럼 '몇 날이 못 되어' 하나님께서 사역을 앞둔 제자들에게 동일한 영을 부여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그것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정치적 독립을 의미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일은 그들의 알 바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위대한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민족에 국한될 수가 없었고 온 세계를 위한 그 분의 증인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땅 끝까지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의 초 자연적인 능력을 받은 후에 이 일을 해야 했습니다. 8절은 특별히 사도행전의 흐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행1-행7), 유대와 사마리아(행8:1-행11:18), 땅 끝(행11:19-행28:31)을 말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누가는 신약 성경 기자들 중에서 예수님의 승천을 곁에서 목격한 사람의 입장에서 세부 정황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셨습니다.
(행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려져 가시니 합니다. 어디로 올라가셨다는 말씀입니까
(행 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행 1: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늘(tovn oujranovn)’이란 말이 네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올라가시는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행 1:10). 그때 천사들이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행 1:11)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고 합니다.
(막 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눅 24:50-51]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예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한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올라가신 하늘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 곧 바울이 갔다가 온 삼층천의 하늘을 말합니다. 예수는 천체들이 있는 하늘을 지나 하나님 보좌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셨다는 말입니다. 그곳은 곧 예수께서 본래 계시던 장소입니다
(요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예수님의 승천은 다른 어떤 피조세계로 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늘에서 지구로 내려오셨고, 지구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 6:62)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예수님의 승천은 지상에서의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 나라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위함입니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4절에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큰 제사장, 대제사장, 영원하신 제사장, 거룩하신 제사장이 되기 위하여 하늘로 승천해야만 했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구약시대에 사람의 죄 때문에 여러 모양으로 여러 경우에 드리던 여러 가지 제사행위를 성취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흠없는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히 9:12, 14). 그리고 우리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하였습니다(히 10:12). 그래서 그는 영원한 제사장이 되셨습니다(히 7:21).
그가 영원히 보좌 우편에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합니다(히 7:24). 그는 지금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제사장의 간구를 다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롬 8:34). 그러므로 그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마다 능히 구원하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히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예수님의 승천은 영광을 회복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자신의 영광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구속을 완성하신 승리의 영광으로 회복됩니다
[빌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승천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 하시기 전 제자들과의 마지막 작별시에 다는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영(요 15:26), 곧 예수께로부터 오는 보혜사 성령을 보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 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 16:7)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이 일은 그의 약속대로 성취가 되었고, 성령은 마침내 이 세상에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행 1: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2:1-3]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를 위하여 있을 곳을 예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은 우리가 거할 영화로운 맨션아파트를 준비하시기 위하여 승천하였습니다.
예수의 승천은 바로 장차 그를 믿는 신자들의 영화로운 승천을 예고하고 보장하는 소망의 진리입니다.
[엡 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하늘의 시민권이라고 합니다.
(빌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의 낮은 몸도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됩니다
(빌 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예수님은 승천 하시기 전에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 24: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 26: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막 9: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행 1: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세계 선교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땅에서 최고의 복음화 율을 자랑하는 곳이 전라도 신안군 증도라는 곳이라 합니다. 증도는 90%의 복음화 율을 자랑하는 섬입니다. 최근에 이 섬의 스토리를 소개한 ‘천국의 섬’이라는 책이 출간되었다합니다. 이 섬은 섬 특유의 미신도 투전판도 놀음도 없고, 사찰도 굿당도 점집도 하나도 존재하지 않고 주말이면 모든 식당이 문을 닫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섬 인구 2,200명 거의 전부가 주일에 교회갈 준비를 하기 때문입니다. 11개의 교회는 모두 시골 교회이지만 그 중 6개 교회가 자립하고 있고 이 교회들은 서로를 도와가며 살기 좋은 천국의 섬으로 가꾸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섬의 복음화는 목사님도 선교사님도 아닌 한 불행했던 여인의 헌신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천국의 섬의 저자가 섬 할머니를 붙들고 물었습니다. “할머니, 이 작은 섬에 왜 이렇게 교회가 많지요?” 할머니는 주저 없이 대답합니다. “아, 그거야 다 문준경 전도사님 덕분이제” 했답니다.
1891년 신안군 암태도에서 태어난 문준경은 나이 17세에 증도로 시집을 오게 됩니다. 그러나 신랑 얼굴 한번 못보고 혼례를 치른 첫날밤부터 소박을 맞습니다. 이후 20년간 남편에게 버림받은 생과부가 되어 모진 시집살이를 하던 그녀는 우연히 집을 찾아온 전도 부인에게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된 후 유명한 이성봉 목사님 부흥회에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 나라에 헌신합니다. 그녀는 경성 성서학원에 입학하여 전도 부인이 된 후 다시 고향 신안에 내려와 섬들을 나룻배를 타고 다니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주민들의 부탁으로 짐꾼, 우체부, 약사, 의사 노릇을 하며 1년에 아홉켤레나 고무신을 바꾸어 신고 이 섬 저 섬의 돌짝밭 길을 다니며 아이, 병자, 어른을 막론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찬양을 불러주고 기도를 해주며 복음을 전합니다. 섬마다 개척 교회들이 세워지고, 이 분의 영향을 받은 청소년들 가운데 김준곤 목사, 이만신 목사, 정태기 목사, 신복윤 목사, 이봉성 목사등 30여명의 한국 교회 목회자들이 생겨납니다. 그녀의 나이 59세 되던 해 6,25전쟁 중 공산당원이 그녀를 체포하자마자 "새끼를 많이 깐 씨암닭아, 죽어라“고 소리치며 몽둥이를 내리쳤다고 합니다. 문준경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기도하며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원의 증언처럼 그녀는 수많은 영혼의 생명을 낳은 거룩한 씨 암탉으로 주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당시 가장 큰 장례였던 김구 선생의 장례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모였다고 합니다. 그녀에게 전도 받은 사람들, 그녀에게 성경을 배운 사람들, 기도 받은 사람들, 사랑 받은 사람들, 도움 받은 사람들, 그녀의 손으로 눈물을 씻김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 이 섬은 민족의 성지일 만큼 90% 이상이 예수를 믿는 천국의 섬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만일 우리 중에서 문 준경같은 거룩한 전도자들만 일어날 수 있다면, 우리가 이런 전도자들을 키워만 낸다면 사도행전의 부흥은 또 한번 이 땅에서 멀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믿음 좋으신 한 집사님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시골에서 동네 목사님의 신앙훈련을 잘 받았습니다. 주일 낮, 주일 밤, 삼일(수요)기도회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 엄마가 저녁잠을 안 깨워줘서 수요기도회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큰일났다고 대성통곡하였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하늘로 가는 사다리와 같다. 한번 빠지면 사다리 한 칸이 없어지는 것 과 같다’고 말씀하셔서 빠지면 안 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내가 사다리 놓고 한칸씩 올라가는 것은 아니지만 에배에 빠지지않도록 신앙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구름에 사다리 걸쳐놓고 스스로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올려져 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아래서 보니까 어떤 보이지 않는 놀라운 힘이 하늘에서부터 작용해서 올려져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올려져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하시는 모습은 나중에 우리로 그렇게 하늘나라 갈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 힘으로 간다면 사다리 칸 한 칸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관절 아픈 사람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러나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올려져 가는 것입니다. 사다리 놓고 계단으로 걸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엘리베이터에 타기만 하면 올려져 가는 것과 같이 올려져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올리워 가신 것처럼, 우리도 나중에 올리워 갈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올리워주십니다
이것이 현재보다 1,000배나 더한 미래의 축복이 아닌가요! 그래서 예수 승천을 목격한 사람들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했다고 하였습니다
[눅 24:52-53])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바로 예수 승천은 나의 승천의 보장입니다.
예수 죽음 내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 예수 승천 내 승천 예수 천국 내 천국이 되는 줄 믿습니다.
주님 승천하신 사실 믿고 영광 돌리며 사명 감당합시다.
마음을 같이 하여
전종태목사 / 행전 1:12-14절
할렐루야!
서로 인사합시다!
“잘 나오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늘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에는 <마음을 같이 하여>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번 주일은 평신도의 역할을 중요시하여 지키는 평신도 주일입니다.
초대교회 때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서는 평신도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 교회 안에서 평신도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들마다 평신도들을 잘 훈련하여 교회 성장의 주역들로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평신도들은 더이상 교회 성장의 아웃사이드 즉, 구경꾼들이 아니라, 교회 성장의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금암교회 평신도 여러분들도 이런 추세에 발맞추어서 교회 성장의 건강한 주역들로, 적극적 참여자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평신도는 어떤 사람들을 의미합니까?
1. 평신도는 교회를 대표하는 일반신도들을 의미합니다.
예전에는 평신도는 교회 안에서 직분을 갖지 못한 모든 신도를 의미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래는 성직자가 아닌 모든 신도를 평신도라고 합니다.
오늘은 그런 관점에서 평신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데, 이 시간에는 한 개인으로서의 평신도보다는 공동체 안에서의 평신도 전체를 말씀하고자 합니다.
즉 교회 성장의 주역으로서 평신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며 국민 없는 국가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국민의 역량과 책임의 완수 여부에 따라 국가의 흥망 성회가 좌우됩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맡은 바 책임과 의미를 다할 때 국가는 발전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주체는 평신도이며 교역자는 다만 평신도의 지팡이요 돕는 자이며 섬기는 자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교역자 혼자서 교회의 모든 일을 다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교역자는 방향을 제시하고 평신도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평신도는 교회라는 특별한 공동체 안에서 여러 가지 직분을 맡아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흔히 교회의 대표는 목회자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이는 옳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가장 많이 만나고 자주 접촉하는 사람은 목회자가 아니라 평신도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목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평신도를 보고서 교회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를 내립니다.
따라서 평신도가 자기 역할을 잘하면 교회를 보는 그들의 눈이 달라질 것이고, 반대로 평신도가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면 그들은 교회를 다른 종교 집단들과 동일시하거나 오히려 그보다도 낮게 평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평신도들인 성도는 항상 자신이 교회를 대표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모든 일에 임해야 하겠습니다.
교회를 대표하는 평신도들은 신앙생활 뿐만 아니라, 삶의 목적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일차적인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모든 피조물의 기본적인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평신도들은 일상 속에서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신도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 역할이 과소평가되기가 쉽습니다.
한국 교회가 목회자의 위치는 지나치게 중시하는 반면에 평신도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낮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목회자와 평신도가 똑같이 중요합니다.
평신도들은 이러한 사실은 스스로 인식하고 자기 자리를 찾도록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평신도들은 마음을 같이 하여 협력해야 합니다.
사람의 몸은 여러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어느 하나라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각 지체마다 역할이 달라서 한 지체가 기능이 저하된다든지 정지되면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없게 됩니다.
어떤 지체는 언뜻 보기에 있으나 마나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게 사실이나 그 자체가 없으면 몸이 건강하지 못함을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눈에 띄는 지체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중요한 지체들이 우리 몸에 많은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똑같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모든 지체를 귀히 여기고 차별함이 없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습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협력해야 합니다.
서로 상대방의 직분과 지체성을 인정하고 협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한 지체가 한쪽 다리에 병이 나면 온 몸의 무게를 병이 나지 않은 다른 한쪽의 다리가 기꺼이 감당하게 됩니다.
사람의 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쪽 뇌가 망가지면 어떻게든지 다른 쪽의 뇌가 그 기능을 도와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연약한 자의 짐을 사랑으로 대신 져주기도 하며, 직분을 감당하다가 낙심했을 때 용기를 주며 위로하고 일으켜 세워서 공동의 일을 해나가야 합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협력할 때에 선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도 같이 초대교회의 모든 평신도들이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할 때에 성령이 강림하였고,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같이 하였을 때에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정명훈이란 분이 있습니다.
정명훈씨는 피아노로, 여 형제 두분은 첼로와 바이올린으로 세계 정상에 섰으며, 그들의 협연은 듣는 이로 하여금 무한한 감동을 자아내게 합니다.
오늘날 정명훈씨는 피아니스트에서 일약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자리바꿈을 하였습니다.
그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을 보면, 정말 완벽한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케스트라는 다양한 악기가 각각 다른 독특한 음색을 내지만, 지휘자의 지휘봉을 따라서 악보에 맞게 자기 소리를 낼 때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음악을 창출합니다.
바이올린과 첼로는 서로 다르고 클라리넷과 팀파니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다양한 악기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소리의 특징에도 불구하고 멋진 화음과 감격과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도 각 사람을 살펴보면, 신앙의 정도도 각각 다르고, 성격도 개성도, 교육정도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취미도 관심도 얼굴 생김새가 다 다른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보혈의 공로로 한 형제와 자매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라고도 합니다.
비유컨대, 우리들은 하나님을 찬양키 위해서 모여든 오케스트라 멤버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그와 같이 교회 생활은 한 사람의 독창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케스트라 멤버와 같이 각각 자기의 특색을 가지면서도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잘 협력하여 하나님의 뜻인 교회 성장을 이루어 가여 할 것입니다.
끝으로 성경 속에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평신도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살전 1:7절의 말씀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평신도들은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으니”(살전 1:7절)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평신도의 믿음은 큰 자랑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평신도들은 무서운 핍박 중에서도 낙심치 않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평신도들에게서 같은 믿음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평안할 때에도 신앙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더욱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평신도들은 참으로 굳센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운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습니다.(8절)
일찍이 바울 사도께서는 영의 아들 디모데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의 본이 되라”(딤전 4:12절)고 권면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께서도 장로들을 향하여,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5:3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이 열심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남에게 본이 되고자 하는 열심히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같이 하여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다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데살로니가 교회의 평신도들의 신앙을 본받아 믿는 자에게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나 본이 되어 그들이 우리를 보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길로 따라 오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결언>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한분 한분이 교회의 대표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한분 한분이 교회의 얼굴입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협력하여 주의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평신도들처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고자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교회 성장의 가장 중요한 주역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성장을 이루고 그 성장의 축복을 누릴 분들이 바로 여러분들임을 알고 지금까지는 교회성장의 구경꾼처럼 지냈다면 이제부터는 주역으로 행세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
이윤재목사(분당한신교회) / 행 1:12-14
새해가 밝았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많은 비전을 주셨습니다. 비전은 이루고 싶은 꿈입니다. 비전은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미리 보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 한 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얼음이 녹으면 어떻게 되죠?” 많은 어린이가 소리쳤습니다. “물이 돼요”. 한 어린이가 뒤에서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선생님, 얼음이 녹으면 봄이 와요”. 모두가 뒤를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어린이가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고 생각했는 데 그 어린이만 얼음이 녹으면 봄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비전은 추운 겨울에 새 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봄을 봄에 보는 것을 현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봄을 겨울에 보는 것을 “비전”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비전의 책입니다. 특히 사도행전이 그렇습니다. 사도행전은 비전의 책입니다. 행1:8절이 사도행전의 주제입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의 사람들은 지금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그때는 아직 예수믿는 것을 인정받지 못한 때였기 때문에 문을 닫고 쉬쉬하며 모일 때입니다. 그런데 그때 이미 그들은 유다, 사마리아, 땅끝을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데 땅끝까지 보았습니다. 지금 있는 현실을 본 것이 아니라 앞으로 될 미래를 미리 보았습니다. 그리고 1장에서 본 것을 28장에서 실현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은 비전의 책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비전이 있습니까? 지금은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올해가 끝나기 전 나는 반드시 비전을 이루겠다. 그 비전이 있습니까? 연말까지 이루지 못하면 평생에 걸쳐 이룰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도 올해 하나님의 비전을 받았습니다. 함께 모여 행복한 목장교회,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선교하는 교회, 예수님 닮는 제자삼는 교회, 그런데 개인이나 교회나 비전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능력입니다. 다시 1:8절을 보실까요?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비전이 아무리 좋아도 능력이 있어야 이루어집니다. 사도행전의 비전은 땅끝까지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전이 먼저가 아니라 능력이 먼저입니다. 능력이 임하면 스스로 증인이 됩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증인이 되라”가 아니라 “증인이 되리라”입니다. 증인이 되라는 것은 내 의지로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것입니다. “증인이 되리라”는 것은 어떤 조건을 갖추면 나도 모르게 자동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능력입니다. 능력만 임하면 나도 모르게 됩니다. 그것이 비전입니다.
능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오랫동안 능력을 위해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기도에는 보통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먼저 필요를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의 의식주, 생계를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을 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하나님께 많은 것을 구하면 안된다. 그것은 기복적인 기도다“.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한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처럼 교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게는 아무 것도 모자라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내가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큰 교만입니까? 우리는 필요한 것을 구해야 합니다.
또 하나의 기도는 예수님 닮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의 필요를 구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필요를 구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도가 수단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뭔가를 얻어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가는 수단입니다. 필요한 것을 구해도 우리가 더 사랑할 것은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입니다. 기도에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입니다. 그래서 묵상기도가 필요합니다. 묵상기도를 통해 우리가 받는 은혜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은혜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기도를 사모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또 한 가지 기도가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능력을 위한 기도”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힘이 없으면 못합니다. 바람은 밖에서 불지만 힘은 안에서 나옵니다. 바람이 불면 비행기가 뜨지만 안에서 힘이 공급되지 않으면 곧 주저앉고 맙니다. 사도행전은 성도의 삶에 얼마나 많은 능력이 필요한가를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설교한 것은 능력이 없으면 못합니다. 그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회개했습니다. 회개도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할 마음과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입니다. 회개한 사람들이 모며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안에서 자기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구제, 긍휼, 사랑도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것을 버리는 능력, 욕심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3장부터 전도가 시작됩니다. 행3: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베드로와 요한은 “내게 있는 것으로”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능력이 있어야 전도합니다.
4장부터 핍박이 시작됩니다. 이로 인해 사도들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행5:41절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를 떠나니라”. 어떻게 감옥에서 매맞고 고통받는 데 기뻐할 수 있습니까?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행7장에서 스테반이 순교하고 11장에서 안디옥 교회가 세워지고 13장에서 바나바와 바울이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28장에서 드디어 로마에서 바울이 도착하여 복음을 증거합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힘이 있었습니다. 능력입니다.
저는 그동안 예수님 닮는 것이 신앙생활의 최종목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안에 있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힘없는 분, 나약한 분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을 다 그 앞에 무릎꿇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분이고 죽음에서 능력으로 부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자입니다. 그래서 어느날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 예수님처럼 일하기 위해 능력을 구하리라”. 다같이 “능력을 주옵소서.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 예수님처럼 일하기 위해 능력을 주옵소서”. 그러면 그 능력은 어떻게 옵니까? 오늘 말씀이 그 비밀을 밝혀 줍니다.
함께 모였습니다
오늘 말씀으로 오십시오 .능력을 위해 사도행전 교회가 첫 번째로 한 것은 함께 모이는 것이었습니다. 행1:1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감람원은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감람산입니다. 왜 제자들은 이 산으로부터 왔을까요? 예수님이 이 산에서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눅24:50-51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배다니앞에 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누가복음의 저자와 사도행전의 저자는 같은 누가입니다. 누가복음 마지막 장에서 예수님은 베다니 근처 감람산에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남기고 승천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작별한 후 예루살렘으로 온 것입니다.
자, 어떤 사람들이 모였습니까? 13절 중간입니다. 행1:13,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가롯 유다를 뺀 12제자가 다 모였습니다. 다만 순서만 다릅니다. 4복음서에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로 형제는 형제끼리 묶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순서입니다. 아마 리더쉽의 순서로 기록한 것 같습니다. 사도외에 여자들이 모였습니다. 14절,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여인들의 명단은 눅24:10절에 나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다른 여자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아우들도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아우들은 마13:55절에 보면 넷입니다.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이들은 본래 예수님을 잘알지 못했던 믿음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자 같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모인 사람이 모두 120명가량 되었습니다.
수가 120명인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120명은 12x10입니다. 이스라엘의 기본 수는 12입니다. 12지파, 12제자, 그래서 120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기본수입니다. 유대인의 구전에 따르면 예수님 시대 자체 공회를 가진 도시가 설립되기 위해서는 120명의 남자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 120명이 얼마나 다양합니까? 제자들, 여인들, 형제들, 남자, 여자, 노인, 젊은이, 사회적 신분도 각각 달랐습니다. 여자와 남자가 함께 모였습니다. 나이 차이도 많았습니다. 출신지역도 달랐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예루살렘, 갈릴리뿐 아니라 바대, 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 갑바도기야, 본도, 아시아, 구레네, 그레데, 너무 너무 먼데서 왔습니다. 사회적 신분도 달랐습니다. 요안나같은 여자는 남편이 헤롯왕실의 관리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자중 하나인 셀롯인 시몬은 열심당이었습니다. 열심당은 극우파 테러리스트, 반 헤롯당입니다. 정치적으로 적끼리 모였습니다. 그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행1: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 다양할 뿐 아니라 마음도 같이 했습니다. “마음을 같이 했다”는 말은 “호모뒤마돈”, 호모=같은, 뒤마돈=마음입니다. 같이만 모인 것이 아니라 마음도 하나였습니다. 저마다 선 자리는 달랐지만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집중한 것입니다. 판교개발이 되면서 우리 교회가 아주 다양해졌습니다. 옛날에는 호남, 서울출신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모든 지역이 거의 비슷합니다. 서울, 호남, 영남, 충청도, 경기도, 심방해 보면 말씨가 각각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만 바라보면 하나됩니다.
여러분,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능력이 필요합니까? 예수님을 닮기 위하여,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능력이 필요합니까? 우선 모여야 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히10:24-25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언제나 부흥하는 공동체는 모이기를 힘씁니다. 사무엘 시대, 모든 백성이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느헤미아 시대 모든 백성이 수문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느8:2-3,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 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수문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남자, 여자, 알아들을 만한 모든 자는 모든 백성이 모였습니다.
1907년 한국교회 대부흥 운동도 모여서 일어났습니다. 1907년 1월, 영하 20도의 흑한속에 사람들이 각자 먹을 것을 가지고 100리, 300리에서부터 걸어서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1970년대 빌리 그래함 대회도 모였습니다. 여의도에 100만이 모였습니다. 모일 때 교회성장, 선교의 부흥이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교회는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행5: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성전에 모여 예배하고 목장에 모여 사랑을 나눴습니다. 모여야 힘이 납니다. 모여야 능력이 임합니다.
여러분은 한 해동안 잘 모이겠습니까? 사모하는 마음으로 잘 모이겠습니까? 어느 수도원에서 수도자들이 생각했습니다. “왜 우리 수도원은 영적으로 충만하지 못할까?” 젊은 수도사들이 원장에게 찾아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수도원이 부흥할 수 있습니까?” 했습니다. 원장은 말없이 나무 하나를 가져오더니 불을 붙였습니다. 나무는 한참 타다가 꺼졌습니다. 이번에는 나뭇가지를 한 단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불을 지폈습니다. 나무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리고 불이 꺼질만 하면 또 나무를 넣고 꺼질만 하면 또 나무를 넣고, 그러는 사이에 불이 크게 타 올랐습니다. 하늘 높이 타오르는 불빛을 보다가 원장은 말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젊은 수도자들은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그러다 누군가 깨달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가 열심히 모이지 않아 불이 타지 않았구나”. 그때부터 수도자들이 모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모이자 부흥의 불이 타올랐습니다. 한 해동안 놀라운 부흥을 꿈꿉니까? 모여야 합니다. 예배로 모이고 목장으로 모여야 합니다. 장작더미가 쌓여 큰 불이 나는 것처럼 모여야 큰 불이 납니다. 불이 붙으면 능력이 임하고 능력이 임하면 비전이 이루어집니다.
약속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능력을 위해 사도행전 교회가 한 두 번째 일이 있었습니다. 약속을 믿고 기도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사람들은 모였습니다. 120명이 모였습니다. 그들이 모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약속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이렇게 약속했습니다. 눅24:49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저는 은행에 갈 일이 별로 없습니다만, 가끔 은행에 가면 “아, 기도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은행에 돈을 예금합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 찾습니다. 어떤 분이 은행에 5천만원을 예금했습니다. 새 학기가 되어 아들 등록금 때문에 은행에 갔습니다. 은행 창구로 가서 청구서를 씁니다. 직원이 이름을 묻습니다. 그리고 “얼마요?”하고 묻습니다. 그때 쭈삣 쭈빗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은행이 어렵겠지만 돈좀 주시겠습니까?” 이렇게 모기만한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500만원이요” 당당하게 말합니다. 맡겨놓은 돈이 있기 때문입니다. 은행직원 입장에서는 이 사람이 목소리가 작거나 인상이 안 좋다고 돈을 안줘서는 안됩니다. 그가 할 일은 이 사람의 돈이 은행에 있는가와 그 사람이 본인인가만 확인하면 됩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당당합니까? 성경은 이것을 “담대함”이라고 표현합니다. 엡3:12절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앞에 담대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안에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실 은혜가 약속되었기 때문입니다. 히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로 인해 이미 우리에게 줄 은혜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6:7절이 중요합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이 말씀은 가끔 오해가 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 많은 말을 하지 말라는 오해입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 어떻게 말을 안할 수 있습니까? 기도를 잘해 보려고 하면 말이 좀 길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중언부언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중언부언”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중언부언하지 말라“라는 말은 길게 기도하지 말라거나 같은 말을 반복하지 말라거나 소리내서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말이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말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말이 필요하지만 말을 많이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 중요합니다.
이번 주에 제가 서점에 가서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작은 책을 보았습니다. 제목이 “하나님의 약속 900”입니다. 이 책은 하나님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약속한 약속 900가지를 주제별로 정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믿음 생활에 대해 약속하셨습니다. 승리생활에 대해서도 약속했습니다. 구원과 천국과 영생과 상급에 대해서도 약속했습니다. 개인적 생활의 필요에 대해서도 약속했습니다. 가정생활, 물질생활, 자녀교육에 대해서도 약속했습니다. 영혼구원, 교회, 전도에 대해서도 약속했습니다. 무엇보다 기도응답에 대해서 약속했습니다. 그것이 이 책에서만 900가지입니다. 저는 정말 우리 교인 모두가 이 책을 가슴에 품고 다녔으면 좋겠습니다. 이 작고 예쁜 책에 하나님의 주옥같은 약속이 900가지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사도행전 교회는 자신의 의를 믿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까? 여러분의 몸이 아플 때 출15:26절, “나는 너희를 지료하는 여호와임이라”라는 약속을 믿습니까? 그래도 아파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시103:3절,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이 약속을 믿습니까? 인생의 어려운 시기를 맞아 힘들고 지쳤을 때 연약한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약속을 믿습니까?
인생의 두려움이 엄습할 때 사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약속을 믿습니까? 물질과 재정으로 어려울 때 시34:9-10,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약속을 믿습니까? 자녀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사54:13,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에게는 큰 평안이 있을 것이며”. 약속의 말씀을 믿습니까? 간절한 기도로 하나의 응답을 기다릴 때 시6:9,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약속을 믿습니까? 기도는 내 언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약속을 믿는 것이 내 유창한 기도보다 낫습니다. 어떤 기도도 믿고 기도하면 응답됩니다. 시편 21:2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아멘. 마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아멘. 요일5: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약속을 믿고 기도합시다. 그것이 능력의 비결입니다.
성령안에 모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여기 있습니다. 능력의 원천이 성령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함께 모이고 약속을 믿고 기도하는 것은 능력을 받는 방법이고 능력의 원천이 따로 있습니다. 모든 능력의 원천은 성령님입니다. 눅24:49을 보겠습니까? “볼지어다. 내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나님 아버지가 능력을 약속했습니다. 예수님이 또 다시 능력을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오신 분이 누구입니까?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약속의 실체요 능력의 원천입니다. 사도행전 사람들은 성령을 받기 위해 기대하고 기다리고 기도했습니다. 49절 다시 볼까요? 성령님이 누구입니까?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입니다. 능력은 능력인 데 아래서 생기는 능력이 아니라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입니다. 세상의 모든 능력은 아래에서 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성령님만 위에서 임합니다. 그 능력이 사람에게 입혀집니다. 옷의 비유입니다. 옷처럼 위에서 덮어 씌워집니다.
이를 위해 사도행전 교회는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행2:14절 뒷 부분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 여기서 “힘쓴다”는 말은 체육선수가 운동장에서 골인 지점을 향해 사력을 다해 달리는 것입니다. 우리 말로 “끈질기게” “악착같이” 달려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님이 모든 능력의 원천이라고 믿습니까? 사도행전의 기적은 성령의 능력이 임하자 일어난 것을 믿습니까? 말 못하던 베드로가 한번 설교하자 3천명이 회개했습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사람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앉은뱅이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한 마디에 벌떡 일어났습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사람을 고치시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자기를 이기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마술사 시몬이 사도들의 발앞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마귀를 이기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바울이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 소아시아, 그리스, 로마, 간데 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위대한 명령, 선교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 능력이 필요할까요? 개인적 비전, 가정의 꿈, 사업의 성공, 영육간의 건강을 위해서도 그 능력이 필요할까요? 제2기 목회, 한신교회 부흥과 도약을 위해서 그 능력이 필요할까요? 총선, 대선을 앞둔 이 나라, 남북화해가 필요한 이 시점에서 민족을 위해서라도 그 능력이 필요할까요? 필요합니다. 우리가 올해 마음을 다해 모이고 약속을 붙들고 오로지 기도에 힘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누가 이 기도의 용사가 되겠습니까? 누가 교회와 영혼과 나라를 위해 중보기도하겠습니까?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 해동안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사도행전의 용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전혀 기도에 힘 쓰니라
행 1장 12~14절 / 권영국목사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급자족의 능력을 갖추기 위해 애를 쓰며 살기 때문에, 기도라는 것은 참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자급자족에 목숨을 걸고 살다가 빠지기 쉬운 것이 교만입니다. 내가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계획하고 내 나름대로의 길을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기도에 시간을 드려야 한다는 것이 황당한 방해일 뿐입니다. 기도는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기도는 털썩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나는 자급자족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와 인도하심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요한일서5장에 보면, 우리 믿는 자의 믿음의 증거가 3개인데, 물과 피와 성령이라고 말씀합니다.
(1)물은 씻음을 상징합니다. 늘 우리의 더러워진 부분들을 씻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나처럼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이런 사람은 믿음의 삶과는 무관한 사람입니다. 늘 더러워진 발들을 부끄럽게 예수님 앞에 내어놓는 것이 믿음입니다.
(2) 또한 피가 믿음의 증거라는 말은 희생과 헌신을 말합니다. 믿음의 삶은 희생과 헌신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쉽게 예수도 믿고 세상도 즐기다가, 턱걸이라도 천국에만 들어가면 된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희생하기를 꺼리고, 헌신하기를 싫어합니다. “묻지마 교회, 묻지마 성도”가 요즘은 숫자적으로 성장합니다. 누가 와도 안 묻습니다. 왜, 어떻게, 신앙생활은? 가정생활은? 숫자적 성장이 좋은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믿음의 삶은 다른 말로 희생이고 헌신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기독교 신앙의 길입니다.
(3) 또 믿음의 중요한 증거가 성령님이십니다. 내 모든 삶이 믿음의 삶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대로 사는가? 아니면 내 마음과 내 생각과 뜻대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에 보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충만한 역사가 일어나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전혀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사도행전2:에 보면, 성령 충만한 역사가 일어나고 이것이 초대교회의 태동의 역사입니다. 믿음의 삶은 기도로 주님께 내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의 뜻대로 내 삶을 이루어 주십시오... 이것이 새벽의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하루가 잘 굴러가고, 기도하지 않아도 저녁에 부끄럼 없는 인생은 내가 삶의 주인인 사람입니다.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무릎을 꿇지 않으면 안될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중에 신음하며 하나님을 안 찾을 수 없게 하셨고, 그들의 부르짖음으로부터,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시고, 광야의 40년 동안 고통과 위험과 장애물과 어려움들을 겪게 하시면서 역사하시는 도구는 기도였습니다. “부르짖으매...” 모든 백성들은 원망하고 불평과 불만이 가득할지라도,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특별히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출애굽기 17:8-13에서 잘 말씀해 줍니다. 아말렉 사람들이 르비딤에 있는 이스라엘을 공격해왔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장정을 뽑아서 전쟁은 네가 하고, 나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산꼭대기에 서 있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이상한 현상이 벌어진 것은 여호수아의 전쟁 지략이나 용감함 때문에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두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우세하고, 피곤해서 두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우세했습니다. 저녁이 되도록 손을 들 수가 없어서, 아론과 훌이 모세의 한 손씩을 붙잡아 들어 올려줌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힘이 어쩌면 전부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이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고, 성령 충만한 역사가 이루어지고, 풍성한 승리를 이루어 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무릎으로 자녀를 양육하면 실패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마가의 다락방에 제자들이 모였습니다. 12절에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고 말씀합니다. 감람원이라는 산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곳입니다.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거리라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지켜야 할 규례가 39개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안식일에 여행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행이라는 정의를 2000규빗( 약 914미터) 1km이상을 걸어 다니면 여행으로 간주했는데, 감람원이라는 산이 예루살렘으로부터 1 km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유대인의 회당을 보면 모두가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주거지 근처에 있는 것이 특징이고, 파킹랏이 별로 없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왜냐하면, 1 km 이상 먼 회당에는 갈 수가 없고, 운전은 더더욱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과 120성도들이 예루살렘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였는데, 물론, 그들도 약속대로 성령충만한 역사를 체험하게 되지만, 마가의 집안도 큰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마가는 어려서부터 집에서부터 본 것이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첫 선교사로 파송 받을 때에 마가 요한을 데리고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구브로에서 선교 여행하는 일이 너무도 힘들고 고달퍼서 마가 요한이 슬며시 도망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사건으로 바나바와 바울이 서로 크게 다투기도 하였지만, 마가 요한은 다시 바나바와 더불어 성경에는 그의 사역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만, 평생 복음의 일군으로 쓰임 받게 되는 것을 봅니다. 기도하는 집, 기도하는 자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며, 넘어져도 결코 아주 쓰러지지 아니하고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결코 실패하는 일이 없습니다.
야베스의 기도의 저자 Bruce Willkinson은 현대 부모들의 자녀 교육에 대한 위험한 유형들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1) 알아서 크겠지... - 난 밥만 먹여주면, 의식주만 해결해주면 알아서 자기가 크기를 기다리는 유형은 아주 위험합니다. 동물적 유형입니다.
2) 잘 부탁 드립니다 - 관리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자녀를 몽땅 다른 사람에게 맡깁니다. (어린이집, 학원, 학교, 과외 선생님, 상담 선생님등... 엊그저께 신문을 보니까, 중요 타이틀이 방학은 쩐의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방학 때가 되면, 과외, 특별 학원, 어린이학교 몽땅 돈 들어가는 일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3) 뭐든지 최고로 해줘야지... - 오로지 돈으로 키우는 양육하는 부모입니다. 최고 수준의 학교, 유치원, 최고급 장난감, 옷 이것이 최고의 부모인 것 처럼 착각합니다. 세상에 그렇다면 돈 많은 사람이 제일 좋은 부모겠지요?
4) 미안하구나 너무 바빠서... - 직무와 사업 지향적인 부모들일수록 자녀 양육은 스케줄에 없습니다. 그냥, 미안하지만, 나는 나, 너는 너! 의 유형입니다. 이민 가정의 자녀들이 가장 실족하는 유형이 바로 이 유형입니다.
5) 자식은 부모가 하라는 대로 해야 돼 - 군대식. 선임하사와 같은 단속 지향적 교육방침의 유형입니다. 특징은 “안돼”가 많습니다. 다. No! 자식은 무조건 부모가 하라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놈은 의사가 되고, 둘째 놈은 변호사가 되고, 셋째 놈은 사업가가 되고... 망치는 위험한 부모의 유형입니다.
6) 내 자식 수송은 내가 책임진다 - 택시 기사 역할만을 열심히 해주는 부모. 학원, 음악, 연기, 발레, 과외, 도서실등... 하루 종일 태워다 주고 부모 다했다고 생각하는 유형입니다. 남의 새끼들은 다 걸어 다니는데, 나는 이렇게 널 운전해서 태워주는 좋은 부모란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7) 교회에서 살아라 - 교회에다가 자녀들을 묶어놓으려고 합니다. 무조건 교회 활동만 잘 하면 다 해결될 것 같은 착각의 유형입니다. 도대체 자녀의 신앙과 교육 상태가 어떤지 상관없이 교회에만 놓으면 잘 크겠지... 유형입니다. 아닙니다.
결코 실패가 없는 자녀가 되시기를 원하면 기도하는 부모가 되십시오. 어거스틴의 스승인 암부로스는 그 어머니에게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 기도하는 자식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농구 경기에서 승패는 정확한 슛 확률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리바운드의 숫자가 승패를 좌우합니다. 슛을 실패했을 때에 누가 열심히 리바운드를 잡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얼마든지 잘못된 길로 나갈 수 있어요. 그러나, 기도는 리바운드의 힘을 줍니다. 자녀교육은 무릎으로 감당하는 것이다.
Lincoln을 키운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소리는 오막살이 통나무집 구석구석에 깔려있는 것 같았다. 집안뿐 아니다. 들에서 일할 때나 내가 성장하여 가게에 나가 일할 때에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언제나 어머니의 기도소리는 내 주변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행동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응하게 하시려고...)
결코 실패가 없는 자녀로 양육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16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베드로가 일어나서 첫 설교를 하게 되는데, 그 끝부분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 유다에 관하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가룟유다의 죽음에 대해서, 사건이 아니라, 말씀의 성취로 말합니다. 그리고 20절에 보면, “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 직분을 타인에게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가룟 유다 대신에 제자를 뽑고자 하는 것이 내 생각과 우리의 결정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맛디아를 선출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의 표현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응답과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은 말씀에 항상 귀 기울입니다. 기도했으니까, 이제 내 마음대로 한다...라는 것은 기도를 헛되게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많이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길은 “성경 말씀”입니다.
신명기 6장에 보면, 자녀 손 대대로 축복받는 삶을 누리는 비결을 말씀해 줍니다. 신6:2-6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3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
그리고 신명기 11장에서 다시 한번 쉐마 “들으라 이스라엘아...!” 이 말씀을 거듭 강조해서 말씀합니다. 자녀가 복되고 형통하기를 원하시면 말씀을 가르치십시오. 그런데, 그 말씀에 대해서는 입술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기독교의 힘은 말씀에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말씀으로 창조하셨고,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에 말씀으로 기적을 이루셨습니다.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가 반역죄로 붙들려 시베리아 감옥으로 갈 때에 한 작은 역에서 장교부인들이 작은 성경책을 그 죄수들에게 전해 주었는데, 그 때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손에 작은 성경이 하나 들려졌습니다. 감옥 안에서 그의 삶이 완전히 변화된 것이 그 말씀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처형당하는 것을 보고 너무도 충격을 받아서 간질병까지 있었는데 , 말씀의 힘은 그의 병까지 고쳤고, 그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충격적인 능력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중심에 가득했던 증오와 원망, 불평과 미움이 다 사라지는 기적적인 치유를 받게 되었으며, 그 후 그는 죄와 벌, 죽음의 집 등 세계적인 작품을 쓰게 됩니다.
시편1편에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 결론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그리고 그 삶의 축복이 무엇 인가하면 4절에 ”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말씀만큼 우리의 삶의 변화와 능력과 축복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영어책, 수학책, 역사책도 중요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성경을 부모님들이 먼저 읽으십시오. 그리고,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경험을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자녀들에게 말씀을 주십시오 말씀 위에 세워진 집은 반석 위에 세워진 집과 같은 신앙입니다. 부모님이 목사와 장로요, 집사요 권사요, 구역 장이고 회장이고... 다 직분은 화려한데, 성경을 보지 않으면 누릴 축복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세계적인 석학으로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두각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오직 구약 성경만으로도 세상의 그 어떤 것이 추종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납니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을 가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충만한 역사 속에 살아갑니다. 말씀은 결코 우리 자녀를 실패자로 남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먼저 말씀을 손에 들고, 성경의 기쁨과 감격을 나눌 수 있기를 원합니다.
3. 기도로 사람을 세우는 일을 감당하십시오
기도하는 사람의 특징이 있다면 첫째는 결코 사람을 헐뜯거나 염려하거나 험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승천 하신 후에 제자들이 가장 먼저 다룬 문제가 가룟유다였던 것을 보면, 그들의 마음속에는 가룟 유다에 대한 배신감으로 가득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베드로가 일어나서 가룟 유다의 모든 배신행위에 대해서 꾸짖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뜻과 섭리대로 “제 곳으로 갔나이다”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결코 사람을 험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향하여 가장 많이 실수하는 것이 험담입니다. 자녀를 험담하는 것도, 또한 다른 사람을 식탁에서 험담하는 것도 자녀들에게는 일생을 불행하게 살게 하는 부정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결코 사람을 비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6장에서 “기도는 이렇게 하라”라고 말씀하신 후에, 마태복음7장에서 이어서 말씀하시는 것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 열심히 하고,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둘째로 기도하는 사람은 사람을 세워준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말씀 이하 21절을 보면, 마가의 다락방에서 전혀 기도에 힘쓴 후에 제일먼저 행한 일은 사람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전심으로 기도하였다는 것과 가룟 유다 대신에 사람을 세운다는 것이 별개의 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중에 제일먼저 한 일이 사람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기도로 서로 세워주는 마음이 됩시다.
셋째로 기도하는 사람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똑같이 어려운 일을 닥쳐도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걱정과 염려할 일이라고 말하지만, 믿음의 성도들은 “기도해야 할 제목들”이라고 말합니다. 염려와 기도는 둘 중의 하나만 해야 합니다.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생각과 마음을 지키시리라 ”(빌4:6-7) 자녀를 위해서 기도했으면 염려하지 마십시오. 많은 부모들이 신문에 아이들이 가출하고 사고치고, 자살하고 , 마약과 10대 임신 모들이 나오고... 이런 뉴스를 대할 때마다 자식에 대한 염려로 가득합니다. 이것은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갖는 마음이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기도의 제목들이 가득해 집니다. 우리 아이들, 교회의 아이들, 지켜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해주실 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모든 것이 기도의 제목들입니다.
그리고 기도하였으면 , 자녀들을 세워주십시오. 모든 일에 “너는 나보다 훨씬 낫구나...” 이렇게 세워주세요.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왕년에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땡전 한푼 안주고, 학비도 안 줘서 아버지가 스스로 벌어서 학교를 다녔고, 매일 굶고... 아이들의 인식 속에 할아버지는 무책임하고 자식만 낳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못한 무능한 할아버지로 만들지 마십시오. 언젠가 신문에 4자녀를 모두 서울대학교를 마치게 하고, 의사, 법관으로 키운 한 농부가 어떻게 그렇게 잘 키웠느냐?고 묻자, 자기야 말로 정말 자녀를 위해서 아무것도 안 했는데, 단 한가지, 학교를 마치고 아이를 데려오면서, 오늘 학교에서 배운 것이 뭐니? 아버지는 무식해서 잘 모르니까, 좀 가르쳐줄래?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아이가 학교에서 들은 수업을 아버지에게 그대로 가르치는 겁니다. 그러면, “넌 아버지보다 훨씬 낫구나...” 매일 이 말이 듣고 싶어서, 학교 수업을 잘 배워서 아버지에게 가르치려고...
한국 부산에서 제일 큰 교회를 목회하시는 정필도 목사님이라는 분이 쓴 “교회는 무릎으로 세워진다”라는 책에 보니까, 이런 말씀을 합니다. “ 교회는 성도들의 기도의 눈물이 차야 성장하고, 교회의 부흥은 성도들이 무릎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사람들만 많이오면 진정한 부흥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겸손할 수 있고, 기도할 때에 사람을 온전히 세울 수 있고, 기도할 때에 교회에 불평이 없어집니다.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이것이 우리 가정과 자녀, 교회가 풍성하게 복 받는 비결입니다. 다른 것은 바빠서 잘 감당하지 못하셔도 “기도하는 일”에 힘쓰며, 자녀들에게 기도의 후원자가 될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시 일어서는 교회
이수영목사 / 행 1:12~14
오늘 본문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십일 동안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살아계심을 보이시고(행1:3) 하늘로 올라가신 후(행1:9-11) 남겨진 이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13절에서는 예수님을 은 삽십에 팔아 넘겼다가 스스로 목매어 죽은 배신자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명의 제자들이 거명되고 있습니다. 그 다음 14절에서는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자들”이라 불린 이들은 분명 예수님을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지켜보았던(마27:55) 여인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과 더불어 다락방에 모여 함께 기도하던 약 백이십 명의 무리가 있었다고 오늘 본문을 바로 뒤따르는 1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 백이십 명의 무리, 이들이 다였습니다.
한때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곳이면 온 마을, 온 도성이 떠들썩할 만큼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보고 그의 말씀을 들으러 모이곤 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까지 따라다녔습니다. 해지는 줄도 모르고 따라다니며 며칠씩 집에도 돌아가지 않고 따라다니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인 남자들만 오천 명 이상을 한꺼번에 먹이신 일을 생각하면 그를 따라다니던 사람들의 수가 실제로는 수만 명이었을 수 있습니다. 남자들은 일하느라고 따라다니기 힘들었을 것이라 보면 여성들이 더 많이 따라다녔을 것이고 아이들까지 데리고 다녔다면 그 전체 수가 수 만 명이 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을 것입니다. 수 만 명의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 이동하는 장면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장관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무리는 다 어디 가고 백이십 명 정도만 남았다는 말입니까? 그 백이십 명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사십 일 간 제자들을 찾아다니시면서 당신이 다시 살아나셨음을 친히 보이시고 증명하시며 설득하셔서 그나마 다시 모여진 숫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그의 가까이에 남은 이들이란 제자 요한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한 몇 명의 여인들뿐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며칠 전만 해도 소리 높여 뜨겁게 예수님을 환영하던 예루살렘 군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다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찾던 정치적인 메시야로서의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군중 사이에 예수님에 대한 거짓 소문을 내며 군중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게 하라는 지시와 돈을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받은 자들의 공작에 쉽게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최측근 열두 제자 가운데서도 오로지 예수님을 통해 돈을 버는 데만 관심이 있었던 가룟인 유다가 먼저 주님을 배신하고 떠났습니다. 절대충성을 호언장담하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도 사실 예수님 덕에 높은 자리에 오르고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기를 꿈꾸다가 여의치 않자 다 주님을 부인하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돌보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요한과 순수하게 주님을 사랑했던 몇 몇 여인들만 끝까지 남았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이해관계에 어긋나면 언제든지 무섭게 돌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흩어진 당신의 백성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시자마자 그들을 다시 불러 모으기 시작하셨습니다. 사십 일 만에 백이십여명이 모이게 된 것입니다. 비록 미미한 숫자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백이십여 명은 머지않아 일어날 성령의 역사와 함께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될 예루살렘 교회의 씨앗들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다시 모이기 시작한 사람들의 수가 백이십여 명이 된 데도 이미 성령의 역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는 그를 믿지 않았던(요7:5)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 백이십여 명의 무리 속에 들어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모이던 사람들은 본문 14절에 따르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훗날의 폭발적인 교회성장의 비결이 오직 기도에 있다고 쉽게 결론을 내리는 일입니다. 물론 기도 없이 교회 성장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곧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교회성장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고 성령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을 비롯한 백이십여 명의 무리의 기도는 주님의 분부를 따른 일입니다. 그 주님의 분부가 무엇이었습니까? 행1:4-5에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입니다. 또 행1:8에서 보듯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들을 비롯한 백이십여 신도가 한 일은 그 주님의 그 말씀을 기억하며 그의 분부에 순종한 것입니다. 이에 당신의 약속대로 성령께서 오셔서 행하신 일이 복음전도의 능력 주심과 교회의 성장이었던 것입니다. 기도는 언제나 중요하지만 우리의 기도는 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함께하는 기도이어야 함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저 기도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불순종에 대해 면제부가 주어질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충만함이 임하자 사도들은 다 능력과 용기와 열심을 얻어 복음 전도에 나섰습니다. 그 결과 하루에도 수천 명의 새 신자들이 생기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교회가 주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파되며 주의 제자들과 증인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교회가 온 세상에 세워지는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이 잘못해서 교회를 약하게 만들고 교인들을 흩어지게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른 한편으로 주의 몸 된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며 주의 백성을 다시 불러 모으십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지구촌 사방에서 도전과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오랜 기독교 국가의 많은 교회들이 쇠약해져서 문을 닫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나라, 다른 대륙에서 새 교회들이 계속해서 세워집니다. 예상치 못한 데서 하나님의 백성이 왕성하게 일어납니다. 서구 교회가 침체하고 있을 때 한국에서 눈부신 교회성장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를 통해 전 세계에 많은 복음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한국교회가 침체기에 들어섰다지만 그 선교의 열매로 중국과 아프리카와 남미 등에서 놀라운 교회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이슬람이 기독교를 밀어내고 있을 때 내부에서는 오히려 복음의 확산이 은밀히 진행되고 있는 이슬람 국가들이 있습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한국의 개신교도 한때는 기독교의 이천년 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물질욕, 권력욕, 명예욕에 빠지고 싸우며 나뉘다가 세상으로부터 등 돌림을 당하는 가운데 한때 천이백만 명이라 호언하던 교세가 지금은 팔백만 명대라고 말하는 정도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수가 줄었다고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일으켜 세우시려면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수 만 명에서 백이십 명으로 줄었다가 다시 하루에도 신자가 수천 명씩 늘어나는 교회가 되었던 예루살렘 교회처럼 한국교회도 반드시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수만 명이라는 거품이 한 번 빠지는 것이 필요할 지도 모릅니다. 단지 병 고치기 위해서, 귀신 쫓아내기 위해서, 배고픔 해결하기 위해서, 출세하기 위해서, 돈 벌기 위해서 등의 이유로 교회에 드나들던 사람들은 떠나가도 상관없습니다.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깨닫고 진실하며 충성되게 변화된 제자 열한 명과 백여 명의 신자들만 있어도 참된 교회로 튼튼히 설 수 있습니다. 비대해서 누워있는 교회는 필요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일어나야 합니다. 작아졌어도 일어선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일어설 수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잘 받들면서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힘쓰면 하나님께서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한국교회 부흥의 희망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문안교회가 창립된 지 125주년을 맞았습니다. 125년 동안 이 교회와 함께하시며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신교의 교세가 전체적으로 사분의 일 정도 줄어드는 동안 완만하지만 지속적인 성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고 전도하기를 힘쓴 데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교세가 줄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자화자찬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계속해서 달라지고 앞으로 더욱 나아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더 힘쓸 일이 무엇인지를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본 교회 전도부 기획팀이 지난 9월 15일에 있었던 2012년도 상반기 정책당회에 우리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분석한 보고자료를 제출했습니다. 교회창립 제125주년을 맞아 앞으로의 교회의 발전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기초자료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설문 중에 첫 번째가 새문안교회의 장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모든 연령대에서 단연 첫 손 꼽히는 것이 “대한민국의 어머니 교회로서의 오래된 역사와 전통”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새문안교회의 약점으로 지적된 것은 41.6%가 “교인들의 배타성”, 31.3%가 “오래된 교회로서의 경직성”을 지적했습니다. 그 두 가지 점만 합하여 거의 73%에 달하는 것입니다. 이와 무관할 수 없는 설문의 하나는 새 교우들이 정착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대답으로서 모든 연령대에 걸쳐서 단연 가장 많이 지적된 것이 “신도들의 적극적 포용력 부족”(40.2%)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 교회의 새 성전 설계안은 그 외관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여러분의 눈에 이미 익숙해진 그 외형은 다른 어는 교회 성전건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곡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곡선이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두 팔을 벌리시고 모든 사람을 맞으시기 위하여 벌리신 두 팔의 옷자락의 곡선을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어머니 교회>로서의 부드러움과 푸근함을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미래의 새문안교회의 자화상입니다. 그런 교회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설문조사 결과 현재 우리 자신의 가장 잘못된 모습으로 지적된 “배타성”과 “경직성”과 “포용력 부족”의 대척점에 서있는 것들입니다. 즉 우리가 변해야 할 점이 무엇이며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새 성전 건물은 부드럽고 포용성이 풍부한데 그 안의 교인들은 그 반대라는 말이 들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최대의 장점인 “오래된 역사와 전통”이 부드러움과 포용력을 함께 갖추도록 우리 모두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설계안에서 새 성전을 정면에서 보면 왼쪽에는 일자로 곧게 높이 종탑이 서있습니다. 거기에 이어서 부드러운 곡선면을 지닌 건물 본체가 서게 됩니다. 곧고 높은 종탑은 일자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 땅의 첫 번째 교회라는 뜻입니다. 가장 오래된 역사와 전통의 교회이지만 경직되지 않고 배타적이지 않으며 포용력 있는 교회가 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포용력 부족”은 달리 말하면 교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래 된 교회들이 빠지기 쉬운 공통된 함정의 하나가 교만입니다. 우리는 가장 오래되었으면서도 결코 교만하지 않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온유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누구든지 찾아와 편하게 머물며 쉼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온유하고 겸손한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당의 층을 3층 이상으로 높이면서까지 지상층을 높고 열린 광장으로 조성하여 교인이든 아니든 누구든지 자유롭게 지나다닐 수 있고 편히 쉴 수 있는 주님의 품,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공간으로 제공하고자 한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고 섬기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드러내는 성전건물이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설계가 더 까다로워지고 공사비가 더 들며 우리 교인들은 조금 더 불편해질 수 있음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런 설계를 고집한 것은 바로 미래를 향한 우리 교회의 지향성을 선언한 것입니다. 성전 건물 자체가 우리의 신앙고백을 표현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새 성전 설계에 임하는 우리의 기본지침의 한 면을 실현한 것입니다.
새문안교회는 그저 하나의 개교회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늘 이 땅의 “어머니교회”라는 의식이 잠재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는 자랑거리가 아니라 우리를 보다 진지하고 겸허하게 만드는 책임감인 것입니다. 이 땅의 “어머니교회”로서의 새문안교회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너그러움과 푸근함이 있어야 합니다. 섬김과 헌신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이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다시 일어서며 바로 서서 이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 잃어버린 신뢰와 사랑과 존경을 이 사회로부터 되찾는 일에 새문안교회는 앞장설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선한 꿈을 꾸며 원대한 비전을 품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실 것이며, 능력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개인의 꿈이 아니고 교회가 갖는 꿈과 비전을 하나님께서 외면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한국교회를 다시 일어서게 하는 데 쓰임 받는 교회, 이것이 교회창립 125주년을 맞는 새문안교회의 모든 교우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강림을 기다림
박향근목사 / 행 1:12-16
요사이 관심사는 북한의 핵실험이지요. 지금 개발된 것이라도, 남한에 한 발 날아오면 수십 만 명이 죽는다니까, 핵의 먹구름이 우리 위를 덮고 있습니다. 북한은, 김정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 몰아붙이며, 신문에 보니, 곧 미국과 남한이 조공을 바칠 날이 온다고 선전한다는군요. 핵무기가 무서워 돈을 싸들고 온다는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시작하면서부터 큰 어려움에 봉착한 것 같습니다. 이 땅의 성도 된 우리는, 한반도에 전쟁이 없는 평화를 달라고, 더 간절히 기도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예수님말씀에 따라 제자들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13절에 보니, 예수를 판 가룟 유다 외에 11명의 제자가 나오고,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와 아우들이 나옵니다. 특이한 것은, 예수님의 아우들이 함께 한 것이지요. 예수님이 사역하는 동안, 형이 메시야인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같이 자란 형이 어느 날 갑자기 메시야, 믿기 힘들겠지요. 이적을 베푼다는 소문을 듣고, 형 예수가 귀신 들렸나봐, 더 심해지기 전에 집에 데려와야지, 찾으러 다니던 동생들이었으나, 제자들이 모인 곳에 함께 합니다. 무엇을 말하나요?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임을 확실히 알려주지요. 부활하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올 동생들이 아닙니다. 후일, 동생 중에 야고보는 야고보서를, 유다는 유다서를 남겼고요, 야고보는 행 15장에, 예루살렘에 종교회의가 열렸을 때, 의장의 역할을 합니다. 수제자 베드로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분부에 모이긴 했으나, 그들 사이가 그리 화목치는 못했을 것입니다. 제자들 간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 서로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경쟁하고, 시기했지요.
막상, 예수님이 잡혀가자 도망치기에 바빴던 제자들입니다. 바로 며칠 전 일이니, 서로 얼굴보기가 민망했을 것이고, 무슨 말부터 하나 주저했을 겁니다. 또, 도망친 제자들로서, 부활하신 새벽에 무덤을 찾아간 여자들을 보기가 쑥스럽지요.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치 않고 냉대하던 동생들은, 이 자리에 함께 하니 머쓱했을 것입니다. 그런 어정쩡한 상태에 모여 함께 했습니다. 무엇이 그런 그들을 한데 모았나요? 예수님의 분부입니다.
4절을 읽습니다.‘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어떨까요? 남녀노소, 여러 형편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믿음이 오랜 이, 얼마 안 된 이, 편안한 이, 어렵거나 아픈 이, 함께 자리했습니다. 서로 간에 서먹서먹하기도 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여기에 모이게 했습니까?
말씀의 제자들과 여자들과 동생들처럼, 성도들도 예수님말씀에 순종해 모입니다. 이 모임의 중심은 예수님과 말씀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순종입니다. 성경은 신구약을 통틀어 순종의 책입니다. 구약에는, 하나님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신약에는 믿으면 영생이요, 안 믿으면 영벌입니다. 예수님분부에 순종해서 기다린 제자들에게, 말씀대로 성령이 임했습니다.
예전 영국에, 건망증이 심한 재상이 있었습니다. 재상은 어느 날, 볼 일이 있어 먼 지방에 가게 되었는데, 열 살 난 아들이 마차 타는 재미에, 저도 가겠다며 따라나섭니다. 아들과 함께 한 나절을 가서, 볼 일을 마친 후에, 돌아오는 길에 들릴 곳이 있어‘아들아, 여기서 좀 기다려라. 금방 돌아올 테니, 어디 가면 안 된다.’그런데, 볼 일을 마친 재상은. 그만 아들과 함께 왔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혼자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집에 들어서며 아들을 찾습니다.
‘이 녀석이 어딜 갔어, 아버지 왔는데 나와 인사도 안 하고..’부인이 깜짝 놀라며‘아니, 아이는 어쩌고 혼자 와서는 아이를 집에서 찾아요?’그제야 아들을 길에 세워둔 것이 기억납니다. 밤새 마차를 몰며,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면 어쩌지, 내내 걱정했는데, 다음날 새벽에야 헤어진 곳에 도착하니, 아들은 헤어진 곳에 밤새 그대로 서 있습니다.
길을 지나던 이들이‘얘야, 우리 집에 가자, 아버지 오실 때까지 우리 집에서 쉬어.’그럼에도, 아들은‘아니에요. 아버지가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셨어요.’순종입니다.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기다리라 하시며, 언제까지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남녀 120명이 함께 하기에는 매우 불편한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열흘이나 기다렸습니다.
함께 모인 이들이 무엇을 했나요? 14절에‘더불어’라 하는데, 사도행전을 쓴 누가가 즐겨 쓴 단어로, 다른 곳을 보면 일치 된 기도, 일치 된 결정과 같이 일치의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그저 모인 것이 아니라, 뜻을 같이 하여 모였습니다. 예수님이 분부하신 성령의 강림을 한 마음으로 기다린 것입니다.‘마음을 같이 하여 힘쓰니라.’의‘힘쓰니라’도‘부지런하다, 끈질기다’의 뜻입니다. 모여 기도를 한 마음으로, 끈기 있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분명히 약속하셨으니, 성령은 때가 되면 오겠지, 아니고요, 오실 때까지 끈기 있게 기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이 오신 후 세대를 삽니다. 예수 믿은 내게, 성령이 오셔서 함께 하시겠지, 아니면 말고, 아니고요, 성령님, 저를 주장하고 인도해주세요. 육의 사람을 벗고, 영의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세요.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됩니다.
모인 이들의 수가 일백이십 명이라고 말합니다. 열두 지파의 대표 열 명씩이면 120명인데, 예수님에 의해 시작하는 새 이스라엘의 완전한 출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있고,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며 따랐던 여인들이 있고, 동생들이 있고, 그 외에 예수님을 가까이 따랐던 이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승천 뒤에 남은 알짜배기라 할 수 있지요. 모두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는 이들로, 초대교회를 시작하여, 오늘의 교회가 있게 한 분들입니다.
초대교회가 자주 부딪친 어려운 질문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란 예수가 어떻게 그 흉측한 십자가에 달려죽을 수 있어? 메시야가 죽는 것도 그런데, 더구나 십자가에 죽어, 말도 안 돼, 이 때문에 전도하기 무척 어려웠습니다. 바울이 롬 1:16에‘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말한 것은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함께, 고전 1:18을 읽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메시야가 어떻게 십자가에 죽을 수 있어?’에 대한 답입니다.‘그래, 안 믿고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여겨질 거야, 그러나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야.’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도, 사랑하는 우리를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어서 최후로 택하신 것이, 그 아들을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게 한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알고 믿을 때, 우리는 주님은혜에 감사하며, 나는 무엇으로 갚을꼬? 이어집니다. 구원받은 것만으로도, 항상 기뻐하며 주님을 찬양합니다.
복음송 8장을 부르고, 말씀을 잇습니다.
두 번 째 부딪치는 문제가, 예수님을 3년 간 따라 다니며 보고 배운 가룟 유다가 어찌 메시야 예수를 배반할 수 있느냐? 그것은 제자들에게도 의문이요, 걸림돌이지요. 열 두 제자 가운데서 배신자가 나오다니 말이 안 됩니다. 서둘러 가롯 유다가 죽음으로 빠진 사도를 보충하면서, 베드로는, 16절 끝부분에‘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우연한 일이나, 가롯 유다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성경말씀대로 이뤄졌다며, 20절에 베드로는 시편의 두 곳을 인용합니다.
예수님은 성경말씀대로 십자가에 죽으셨고, 가롯 유다도 그리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성경을 읽고 배우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일이 이뤄져감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은 크게 유익합니다. 요사이 새벽기도회에서 창세기 요셉의 이야기를 나누며 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요셉은 좋은 꿈을 꾸고, 꿈 해석을 잘 해, 애굽 총리가 되었다는 정도는, 틀린 것은 아니나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요셉의 순종을 잘 봐야합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크게 될 사람임을 꿈으로 보여주셨고, 요셉은 그 꿈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이 종으로 팔아, 먼 애굽에 가서 종살이를 하면서도 최선을 다 했고, 주인집 아내가 요셉을 유혹할 때 하나님의 사람이 실수할 수 없다며 뿌리치다가, 오히려 모함으로 옥에 갇혔는데도, 요셉은 꿈을 믿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 요셉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옥중에서 바로왕 신하의 꿈을 해석해준 것으로, 바로왕의 꿈을 풀고 총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요셉의 잘 순종한 결과입니다. 꿈을 꿨어도, 종살이, 옥살이에 낙심하고, 포기했으면 그것으로 끝이지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읽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읽고 배워 요셉처럼 살아야합니다. 하나 더 꼭 배울 것은, 요셉의 형들은 곡식을 사러왔다가 요셉이 총리임을 알고, 예전에 요셉을 팔았기에 두려워 떱니다. 요셉은‘형님들, 두려워 마세요. 형들은 날 팔았으나,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을 기근에서 구하려고 날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때로, 내게 해를 끼치는 이가 있을 때, 맞싸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통해 내가 하나님께 더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는구나.
요셉에게 바로 배운 성도입니다. 깨닫고, 해를 끼친 이에게 당신덕분에 내가 더 신실한 교인이 되어서 고맙소, 말한다면 너무 지나치나요? 그러나, 성경을 읽는 성도는 그리 되도록 힘써야합니다. 예배드리고, 성경 읽고, 기도하며 점점 성도로 성숙해져 가야지요? 10, 20년 믿어도 원 성품에는 거의 변화가 없다, 난 원래 그런 사람이야. 아닙니다. 내 힘으로 바뀌기는 힘듭니다. 성경을 읽으며 나도 요셉처럼 살아야지, 깨닫는다면 성령님의 도움을 청하세요. 성령의 권능이 여러분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말씀을 보면, 사도는 보통사람이지만, 주님께 특별한 은혜를 받아 선택을 받아,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입니다. 21절에 보니, 사도가 되기에 합당한 조건이 나오는데, 첫째 조건은,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서 세례 받으실 때부터 3년 간 함께 다니며 말씀 듣고 온갖 이적을 보았으며, 승천하실 때까지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며칠 함께 지낸 정도가 아니라, 계속 함께 한 사람입니다.
요일 1:1에‘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는 말씀대로, 예수님 공생애 삼 년을 함께 한 사람만이 사도의 자격이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친히 지명해서 세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다니시며 제자들을 친히 부르셨지요. 아무리 오래 함께 다녀도 예수님이 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제 한 명을 보충하려는데, 택하실 예수님이 안 계시니, 제자들은 기도한 후에 제비를 뽑아 정했습니다. 예수님이 택해주세요, 한 것입니다.
셋째로는,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뵌 사람이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고, 말씀을 듣고, 부활을 직접 체험한 사람만이 부활을 증거할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은 보았지만, 공생애에 함께 하지 못해 사도로서 미흡합니다. 실제로, 곳곳에서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했기에,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택해서 사도 된 나 바울은, 이라고 자신이 사도임을 적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도의 조건은, 오늘 우리성도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사도는 초대교회 당시로 끝났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일은, 오늘날 모든 성도들의 몫이지요.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보았던 사람이 사도가 되는 것과 같이, 성도는 예수 믿으며 삶에 신앙체험이 있어야합니다. 19세기 미국에 유명한 신학자 포리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있었는데, 병을 앓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앞이 캄캄하고, 말할 수 없이 슬펐지요.
그러나 얼마 후‘나는 딸의 죽음을 통해서, 이전에 머리로 알던 신학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죽음과 부활을 직접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아하, 그렇구나’의 연속이라 합니다. 생활하면서, 아하, 성경말씀이 이렇게 이뤄지는구나, 하나님은 진정 살아계시며, 날 사랑하시는구나. 기도하니 응답해주시는구나, 누가 그럴 수 있을까요?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 성경읽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작은 것을 체험한 사람은, 점차 아하, 예수 믿으니 이렇게 좋구나, 점점 더 큰 체험하게 됩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택한 사람이 사도인데, 우리는 모두 택함을 받아 성도가 되었습니다. 내가 택해서 예수 믿고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택하셔서 믿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내가 택함 받았음을 확신하면, 이어지는 것이 주님은혜 참 감사하다, 나 같이 부족한 것을 어찌 택해 하나님자녀 삼으셨나,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에 보답해야지. 생활이 달라집니다.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가장 귀한 일이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분부하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가 성령을 받아서 할 일은, 행 1:8에 있는 대로,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지요. 120명의 제자들은 예수님말씀에 순종해서 기다리다가, 성령을 받고, 나가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지요. 우리도 순종하면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됩니다. 삶으로 예수님의 부활과 구주이심을 증거할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역도선수 장 미란을 아시지요. 세계기록을 세우며 올림픽 금메달을 딴 그녀지만, 훈련이 너무 힘들어 역도는 죽기보다 싫다, 여러 번 그만두려고 했답니다. 그때마다 아버지가‘이 길이 네가 갈 길이라’며 붙들어주었습니다. 아버지가, 안 하면 혼내, 아니라, 격려하며 꿈을 심어 주었습니다. 장미란 선수가 아직 무명인 때, 딸에게 사인을 만들어주며 연습하라 했습니다. 장 선수가‘제게 무슨 사인이 필요해요’아버지는‘그때가 곧 올 거야.’얼마 후 이름을 날리자, 그 사인이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아버지의 지혜로운 인도에, 장 미란 선수가 순종하며 포기치 않음으로 세계역도에 큰 탑을 이루었듯이, 요셉이 하나님아버지가 함께 하심을 알고 순종함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어 많은 이를 기근에서 구했듯이, 우리성도들이 주님께 순종하면 누릴 것이 엄청 많습니다. 순종은 어렵습니다. 어렵기에 성령님은 함께 하시며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도와달라면 기쁘게 도와주십니다. 나는 연약하지만, 성령님이 함께 하심으로, 무엇이든 순종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 구하며 성령 충만하게 살면서, 예비된 복을 충만히 누리길 축원합니다.
성령 충만한 인생
조학환목사 / 행 1:12~14
1.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인데요, 성령강림절은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예수님의 분부를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오로지 기도에 힘쓸 때에 오순절 날 성령께서 강력하게 임하셔서 신약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의 역사가 힘있게 이루어지게 된 놀랍고 위대한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런 성령강림절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게 됩니까? 물론 자명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한다, 받되 충만하게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래야 완전히 거듭나 새사람이 되고 나아가 생명의 능력과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복음의 역사를 힘있게 이루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당연한 일입니다. 제 아무리 똑똑하고 지혜롭고 심지어 천사 같은 사람이라도 인간은 누구나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어서 절대로 완전한 능력과 지혜와 선과 의를 가질 수 없고, 완전한 능력과 지혜와 선과 의를 가질 수 없으므로 당연히 스스로의 능력과 지혜와 선과 의로는 하나님과 천국은 물론 완전하고 참된 진리와 선과 의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완전한 진리와 선과 의를 모르면 어떻게 됩니까? 말할 것도 없이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인간의 생각에 갇혀 영적인 일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설령 영적인 것을 좀 생각하며 뭔가 영적인 것을 추구하며 제법 고상한 종교생활을 한다해도 완전하고 영원한 참 생명과 능력과 지혜와 선과 의이신 하나님을 알 수가 없고, 알 수 없으니 만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죄와 무지 속에서 죽으나 사나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인 것만을 생각하며 거기에 인생의 정열을 바치게 되고, 그런 육체적 물질적 정신적 생각조차도 사랑과 선과 진리와 의가운데 하지 못하고 심령 속에 있는 죄와 무지와 욕심을 따라 악하고 추한 방법으로 할 때가 많고, 설령 선하고 의로운 방법으로 한다해도 그 선과 의를 온전히 이룰 수도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나님과 온전한 선과 진리와 의를 알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섬기며 세상의 왜곡된 것만을 향하여 달려가면 당연히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뭐냐는 것입니다. 물론 그게 바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하나님과 천국과 진리와 선과 인생을 알고 그래서 회개함으로 천국백성이 되고 나아가 하나님을 따라 선과 진리와 의를 따라 살아감으로서 주님 안에 있는 그 놀라운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복되고 존귀한 인생이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당연하잖아요.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하나님과 천국과 인생과 선과 진리와 의에 대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아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당연히 하나님과 천국과 인생과 선과 진리와 의를 알게 되고, 나아가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능력과 사랑과 지혜와 선과 의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으로 채워주심으로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치는 가운데 살다가 영광의 나라를 누리게 되는 것이 너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엡5:17, 18절에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말씀그대로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가는 것은 어리석고 방탕한 일이므로 오로지 주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러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길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오늘 성령강림 주일을 맞이하여 인간이 제아무리 똑똑하고 지혜롭고 선하고 의롭고 고상하고 지식과 문명과 과학과 경제가 발달해도 오직 성령을 받아야만 하나님과 인생과 천국과 참 진리와 선과 의를 알고 그것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생명의 은총을 온전하게 누리며 살다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세상의 것을 충만하게 받아 누리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먼저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하여 더 많이 애쓰고 힘씀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진정 여러분의 삶속에 더욱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위로가 넘치는 존귀하고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성령 충만함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 부요하고 충만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성령으로 부요하고 충만해야 하는데 그러면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이것도 말할나위도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과 기도와 찬양입니다. 당연하잖아요.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혔던 담이 허물어져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온전한 교제가 이루어지 않고 꽉 막혀 있으면 도대체 어떻게 성령을 받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온전한 교통이 이루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가장 기본중의 기본, 핵심 중의 핵심은 말씀과 기도와 찬양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겸손히 엎드려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과 가장 직접적으로 교제하는 시간이 아닙니까? 기도도 마찬가집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오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나는 무지하오니 주님의 뜻을 알려 주옵소서. 나는 죄와 무지 속에 있사오니 주여 도와주소서하면서 자신의 무능과 연약함과 허물을 아뢰며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하나님과의 교제의 시간입니까?
찬송도 마찬가지지요. 나는 죄인이요 무지한 자요 어리석은 자인데 나같은 죄인을 이렇게 사랑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오니 그저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라는 고백가운데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 바로 찬송이 아닙니까? 그러니 이 또한 얼마나 귀하고 복되고 아름다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제냔 말씀입니다.
그리고 물론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신령한 교제가 이루어지면 성령께서 얼마나 기쁘시게 우리 심령에 임재하시겠으며, 그러면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온갖 아름답고 귀하고 복되고 영광스러운 것들이 얼마나 우리 안에 충만하게 임하겠으며, 그러면 얼마나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며 주님과 동행하겠으며, 그러면 얼마나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치는 삶이되겠으며, 그러면 또 하나님의 나라를 얼마나 아름답고 힘있게 이루어져 가겠습니까?
초대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가 아니었습니까? 오늘 14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120여명의 문도들이 주님의 분부를 따라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 들어가 간절한 마음으로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론 우리가 잘 아는대로 오순절에 그들이 모여 있는 다락방에 성령께서 강력하게 임하심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치는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참 제자가 되었고, 그렇게 성령이 충만했던 초대교회는 진정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기쁨이 넘치는 가운데 힘있게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운데 사는 비결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 생활에 힘써 우리 심령이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우리는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이 넘치는 삶이 되고 그러면 주님의 교회는 누가 뭐라 하고 세월이 어떻게 변해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아름답게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물론 세상의 일에도 열심을 내고 좋은 것을 많이 누려야 하겠지만 그보다 앞서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주님과 만나고 교제하는 일에 더욱 힘씀으로서 성령께서 여러분의 영혼에 충만하게 임하여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기쁨이 넘치는 가운데 주님의 역사도 힘있게 이루어가는 복되고 존귀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려면 말씀과 기도와 찬송생활에 힘써야 하는데 그러면 말씀과 기도에 힘씀으로 성령 충만함을 받았으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론 이것도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으면 당연히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우리가 가운데 주님이 계시고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면 당연히 성령의 인도하심과 다스리심과 역사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성령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정말 안 그렇습니까? 우리가 세상의 돈과 명예와 영광과 즐거움을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훈련하고 능력을 계발하면 우리 머리 속에 돈과 명예와 영광을 위한 것들로 채워지고 그러면 당연히 세상의 돈과 명예와 영광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또 그러면 당연히 우리의 시간과 물질과 정열을 그런 것들에게 바치게 되고 그러면 당연히 세상의 돈과 명예와 영광과 즐거움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다른 것보다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기도하며 경건 훈련을 하면 우리 영혼이 성령과 지혜와 사랑과 선과 의와 같은 것들로 채워지고, 그렇게 성령과 지혜와 사랑과 선과 의와 같은 것들로 우리 심령이 채워지면 당연히 우리 물질과 시간과 정열을 세상의 것을 위하여 바치는 것보다 하나님의 나라와 사랑과 은혜와 진리와 사랑과 선과 의를 위하여 사용하게 되고, 그러면 당연히 생명과 사랑과 은혜와 진리와 선과 의의 열매가 맺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7:16~18절에서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포도나무는 포도 열매를 맺고, 무화과나무는 무화과를 맺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고, 마귀의 사람은 마귀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면 우리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이 계시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니까 그에 걸맞는 열매가 맺히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의 열매, 성령의 열매는 뭡니까? 물론 수많은 것이 있지만 갈5:22,2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말씀그대로 성령은 생명과 진리와 사랑과 은혜와 선과 의와 거룩과 진실의 영이시니까 그 성령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생명과 진리와 선과 의에 속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는 진정 다른 어떤 것보다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으면 우리는 예수님께 속하고 성령에 속한 좋은 나무임을 기억하며 예수님께 속하고 성령에 속한 생명과 사랑과 진리와 은혜와 기쁨과 평강과 위로와 소망과 선과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진정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요,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표징이며, 또 그래야 우리가 진정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사랑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가운데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며 주님의 역사도 힘 있게 이루어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은 더욱 말씀과 기도와 찬양생활에 힘씀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음으로 말미암아 진정 생명의 능력과 은혜와 기쁨과 평안과 소망과 존귀함이 넘치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에게도 생명의 기쁨과 은혜를 가져다주며 주님의 교회도 아름답게 세워가는 복되고 존귀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행 1장 12~14절 / 정관호목사(뉴욕만나교회)
감람산과 다락방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하늘에 오르시기 전 40일 동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일을 그의 11사도들에게 말씀하시고, 예루살렘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세례를 기다리라고 하시며, 또한 복음전도에 관한 지상대명령을 분부하셨습니다. 이에 11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감람산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락방에서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을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감람원이라 하는 산 곧 감람산은 예루살렘에서 동편으로 약 1.2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도보로 약 15분 정도이면 갈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놓여 있는 곳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후에 승천하셨으므로 승천하신 날은 목요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사건 후에 있었던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유월절 후 안식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므로 주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과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둘 다 똑같이 주일에 발생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사도들이 체류하는 방은 다락방이었는데 그 다락방은 사도행전 12:12에 나와 있는, 베드로가 옥에서 천사들에 의해 풀려나와 찾아간 마가다락방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물론 이 다락방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나눈 최후의 만찬 장소이자 제자들에게 최초의 성찬식을 베푼 장소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습니다만.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행12:12)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
그런데 그 다락방 안에는 가룟유다를 제외한 11사도들과 여인들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도 거기에 함께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약 120명 정도 되었습니다.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 명이나 되더라”(행1:15)
오늘 본문에는 11사도들의 명단이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 도마 마태 야고보 다대오 시몬 (가룟유다) 순서로 되어 있지만,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 그리고 도마 바돌로매 마태 등의 순서로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목록에 있는 바돌로매는 나다나엘, 야고보의 아들 유다는 다대오와 동일인물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다. 또한 셀롯인 시몬은 열심당원들로 구성된 셀롯당(열심당)에 몸담았던 자로 보면 되겠습니다.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추종하던 갈릴리 여인들로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였거나,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거나, 그리스도의 빈 무덤을 발견한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 가운데는 막달라 마리아, 살로메, 요안나, 수산나,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등이 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다락방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아우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아우들은 마가복음 6:3에 나타나 있는 야고보, 요셉(요세), 유다, 시몬이라 불리는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이 아우들 가운데 야고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후 변화되어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기둥과 같은 인물이 된 자로 신약성경에 나오는 야고보서를 쓴 저자이며, 유다도 유다서를 기록한 성경저자입니다.
더불어, 함께 기도에 힘쓴 사람들
이들 약 120명의 사람들은 예루살렘교회의 아주 중요한 핵심적인 인물들로, 신약교회가 태동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에 함께 참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로 이 다락방에서 오순절이 이르기 전에 약 10일간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쓴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13절과 14절을 보십시오.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1:13-14)
그렇다면 그들의 기도는 어떠했습니까? 그들의 기도는 더불어, 함께 마음을 같이한 기도였으며, 오로지 힘써 행한 기도였습니다.
첫째, 그들 120명의 기도는 더불어, 마음을 같이한 기도였습니다.
120명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다락방이라는 한 장소에 함께 모여 기도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일 수 있으나 진정 더불어, 함께 마음을 같이하기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인간적이며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면서 하나된 것을 이루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한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 가운데서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생각이나 의견이 달라지면 곧 감정싸움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일이 종종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노회나 총회에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락방에 모였던 그들은 이미 그러한 분열과 갈등을 다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있었던 자리다툼도 사라졌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놓아두고 도망쳤던 일에 대해 서로 책임을 추궁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는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나 동생들도 그들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어떤 특권이나 지분을 요구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다락방에 모여 함께 마음을 다하여 힘써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한 이후 그를 따르던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늘 찬송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누가복음24:52-53)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이 우리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는 늘 지속적으로 찬송을 하였고, 다락방에서는 기도에 늘 힘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후 10일 동안에 있었던 일입니다. 함께 찬송하고, 함께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또한 함께 기도하되 한 마음이 되어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함께 모여 함께 찬송하고, 함께 기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까? 또 그와 같은 일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주일예배시간에 우리는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수요예배시간에 우리는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새벽기도회시간에도 우리는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도라면, 한 교회의 교인이라면 마땅히 함께 모여 함께 찬송하고 함께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교회의 지체로서 이런 예배시간과 기도시간에 무관심하다면 어찌 바른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주일에 예배하는 일은 물론 수요예배와 새벽기도회에도 동참해서 예배와 기도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둘째, 그들 120명의 기도는 오로지 힘쓰는 기도였습니다.
그들은 힘써서, 끈기 있게, 지속적으로 기도하였습니다. 14절 하반절이 이를 보여줍니다.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우리 모두에게 기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또한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덧붙여 기도에 힘쓰는 일이 필요합니다.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제가 언제인가 한국을 방문하고 뉴욕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 기내에서 한 기독신문의 어느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6:1-4을 인용하면서 글을 전개한 기사였습니다. 저는 그 인용된 성경구절을 아주 충격적으로 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사도들은 구제하는 일을 일곱 집사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자신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사역에 힘쓰기로 하였습니다. 제가 충격을 받았다고 한 것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사도들이 힘쓴 것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사역이었는데 그 순서가 기도하는 일이 말씀사역보다 앞서 나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기도의 중요성,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일의 중요성, 끈기 있는 기도의 중요성을 저와 여러분 모두가 알아가고, 배워가고, 실천에 옮겨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12:1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4:2)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 우리 영혼을 쏟아 부어넣는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그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과연 기도하고 있습니까? 또한 기도에 힘쓰고 있습니까? 기도를 한다고 해도 우리의 기도는 너무 단조롭고, 밋밋하고, 대충 시간만 때우고 마는 그런 기도는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기도해야
예수님을 따르는 사도들을 비롯한 120명의 제자들은 약속의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그 악속성취를 통해서 성령의 세례를 받고 복음의 증인들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함께 한 마음으로 오로지 기도에 힘을 쏟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도 한 목적, 한 목표, 한 마음이 있지 않습니까? 또한 우리들은 기도해야 할 기도의 제목들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왜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까? 기도를 해도 전심전력을 다해 기도에 힘쓰지 못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야 하는 삶,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해야 하는 삶,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나가야 하는 삶, 거룩하고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하는 존재들이 아닙니까? 우리 교회표어처럼 삶을 함께 나누며,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진리의 공동체와 사랑의 공동체와 선교의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가정은 성경적인 가정, 복되고 아름다운 가정, 피차 복종하는 가정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써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뉴욕만나교회의 신앙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하나님 말씀을 중심으로 더불어, 함께 모이기를 힘쓰며 아울러 더욱 기도에 힘쓰는 자들이 되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성령 충만을 받는 비결
행 1장 12~14절 / 박찬길목사
카메론 페리 박사라는 분이 30세에 목사가 되어 60세까지 30년간 목회를 하면서도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병이 들었습니다. 그는 아내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 성경을 연구하다가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기도하면 고쳐주신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남들이 잠든 시간에 한 시간씩 하나님과 고요한 시간을 갖는 겁니다. 어디를 가든지 그 시간만큼은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렇게 4년을 지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고 신유의 은사를 받게 되었다. 그가 기쁨이 충만해서 이런 간증을 합니다. "성령 충만의 능력을 받고 두 달 동안 전도한 것이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전도한 30년 보다 더 많은 성과를 올렸습니다."
성도가 성령 충만하면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삶에서 여러 가지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고, 기쁨이 없는 사람은 기쁨이 넘치는 사람이 되고, 불화한 사람은 화목한 사람이 되고, 조급한 사람은 오래 참는 사람이 되고, 냉정하고 정이 안 가는 사람은 따뜻한 사람이 되고, 믿을 수 없는 사람은 충성스런 사람이 되고, 오만불손한 사람은 온유한 사람이 됩니다. 성령 충만하면 내 삶이 변하고 내 인격이 변하는 거예요.
사도행전에 보니까 성령 충만하면 굉장한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은 대단합니다. 말씀을 전파하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도하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도 일으키고 병자를 낫게 합니다. 감옥에 가서도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재판정에 섰어도 두려워 떨지 않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니까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담대한지 모릅니다. 이 모습을 사람들이 보고는 놀라지요. 사도행전 4장 13절에 보니까 베드로가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는 원래 배운 것이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인 줄로 알았다가 놀랐다고 했습니다.
사실 성령 충만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이 말씀은 일종의 암시나 호소가 아니지요. '성령 충만을 받을래?' 의문형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명령형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성령 충만은 선택의 의지가 없다는 겁니다. 누구나 반드시 성령 충만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을까요?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은 많이 있지만 이 시간에는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는 것을 통해서 성령 충만을 받는 비결을 배우려고 합니다.
첫째로 (성령 충만을 받으려면) 성령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으시고 중요한 말씀을 하시지요.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성령의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계셨지요. 창세기 1장 26절에서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여기에서 '우리'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을 말하는 겁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에도 늘 함께 계셨습니다. 귀신을 내어쫓으셨고 각종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성령은 창조 때에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예수님과 함께 계시면서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령께서 이 땅에 정식으로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시대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시대가 되면 사람들이 능력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능력은 세상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인간이 노력하고 훈련해서 얻는 능력이 아닙니다. 물리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영적인 능력입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경험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이 성령의 능력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능력을 주고, 정신 활동에도 능력을 주고, 도덕성에도 능력을 주고, 더 나아가 육체에도 능력을 부어줍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전도하는 능력도 주셨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고, 용서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고, 병 고치는 능력,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도 주셨습니다. 성령의 이러한 놀라운 능력이 오늘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반도체 계통에 일하는 사람들이 지금이 아날로그 시대인지 디지털 시대인지를 알아야 하잖아요. 셀폰을 만드는 사람들이 푸쉬시대인지 터치시대인지 알아야 제품을 만들어서 사업을 할 것이 아니겠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주님의 사역을 온전히 감당할 수가 있는 겁니다. 지금은 어느 시대인가요? 성부 하나님의 시대인가요. 성자 예수님의 시대인가요? 성령 하나님의 시대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성령을 받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시대입니다. 더군다나 교회의 최대 사명은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인데, 증인은 성령을 받지 않고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증인이 말로 되는 겁니까?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로 나가고 전도지를 들고 거리에 나가는데, 말 잘한다고 할 수가 있어요? 누가 시킨다고 할 수가 있어요? 못합니다. 선교나 전도가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선교사로 나가는 것이고, 마켓에 전도하러 나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사역도 그렇습니다. 교회의 사역은 하나의 일이 아니잖아요. 자기의 재능을 발휘하면서 폼잡는 곳이 아니잖아요. 교회의 사역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입니다. 주의 사역을 감당하려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고는 선교 교육 봉사 새가족 홈페이지 영상 미디어 미술...,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사역은 성령을 받아야만 가능한 줄로 믿습니다.
사실 교인들 중에서 성령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제껏 신앙 생활하시면서 성령에 대해서 많이 들으셨고 성령이 중요하다는 것은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않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성령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마음에 깨달음이 없어요. 성령을 받지 못하면 신앙생활이 어려운 거다. 힘들은 거다. 성령을 받지 못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살기가 힘들은 거다. 알기는 아는데 깨닫는 마음이 없어요. 그러니까 성령을 받지 않아도 신앙생활에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위험한 거지요.
여러분 중에 혹 이런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다면 고치시기 바랍니다. 성령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을 깨닫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아무리 교회 사역을 열심히 하고, 많은 일을 한다고 해도 성령을 받지 못하면 문제가 될 뿐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열심히 하는 사람일수록 걸림돌이 되는 거예요.
오늘 이 시간에 성령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성령 충만을 받아야 살 수가 있는 거예요. 성령 충만을 받아야 신앙생활도 잘하는 것이고, 성령 충만을 받아야 비즈니스도 잘하는 것이고, 성령 충만을 받아야 공부도 잘하는 것이고, 성령 충만을 받아야 만사 형통하는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성령 충만을 받으려면) 성령의 자리에 참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어떻게 보면 제자들이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허탈해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니까 낙심해서 고향으로 돌아갔잖아요.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신 거잖아요. 제자들이 얼마나 허전하겠어요.
더군다나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이야기를 듣잖아요. 성령이 임하시면..., 증인이 되라...,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 제자들이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이런 말은 들어보지를 못했는데,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처음으로 이런 말을 들으니 얼마나 충격적이었겠어요.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는 겁니다.
제자들은 평소에 즐겨 모이던 다락방으로 모였습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명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사랑해서 무덤까지 좇아갔던 여인들과 부활의 현장을 목격했던 여인들과 예수님의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도 모였습니다. 15절에 보니까 120명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령을 주신다는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한 자리에 모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기 위하여 부르시는 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 곳에서나 성령을 받게 하시지 않습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는 자리를 만들어 놓으시고 성도들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순종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령을 받을 수가 있는 겁니다.
이용규 선교사가 지은 '내려놓음'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벌러르'라는 자매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서 교회로 들어오더랍니다. 이 자매는 예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려 가지고 찾으러 뛰어나갔다가 예배 시간이 임박하니까 소를 버려 두고 말씀을 들으려고 들판을 가로질러 왔다는 겁니다. 몽골에서의 소는 삶의 기반이요 재산목록입니다. 소 한 마리가 보통 사람의 1년치 월급과도 같습니다. 이 자매는 예수 믿은 지 몇 달 밖에 되지 않았는데 예배의 중요성을 깨닫고는 소를 포기하고 교회로 달려온 겁니다.
놀라운 사실은 예배를 마치자마자 예배당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겁니다. 잃었던 소가 예배당으로 찾아온 겁니다. 소를 잃어버렸을 때에 소를 찾는 기쁨을 포기하고 예배의 기쁨을 선택했는데, 하나님은 예배의 기쁨과 소를 찾는 기쁨을 모두 얻게 하셨습니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깨달은 자매이지요.
여러분, 성령 충만히 받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어요. 성령 받는 자리에 빠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은혜 받는 자라다 싶은 곳에는 빠지는 법이 없어요. 우리 교회는 부별로 영성 훈련하러 기도원에 가잖아요. 대개는 제 시간에 오는데, 가끔 보면 직장이나 학교 끝나고 오는 분들이 있어요. 9시, 10시에 끝나고 그 늦은 11시에 도착하는 거예요.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늦게 끝나서 못 간다고 말하지요. 얼마나 핑계가 좋아요. 기도원 알러지 있는 분들은 기도원 이야기만 나오면 경기하거든요.
그런데 성령 받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빠짐없이 참석합니다. 그 늦은 시간에 와서 두 세시간 참석하고 잠깐 눈 붙이고 토요일 이른 아침에 다시 직장에 가요. 이런 교인들은 기도원에서 지내는 시간이 별로 없지만 오는 발걸음에서부터 은혜를 받는 겁니다. 준비된 분들입니다. 그래서 한 시간만 참석해도 성령을 받는 겁니다.
지난 금요일날 상항중앙장로교회에서 청년집회가 열렸어요. 김춘근 장로님을 모시고 연합 집회를 했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참석하신 분들은 느끼셨을 겁니다. 얼마나 뜨거웠어요. 얼마나 뛰는지..., 중앙교회가 튼튼하게 지었으니 망정이지 웬만한 건물 같으면 일났을 거예요. 참석한 교인들 대답해 보세요. 성령 받았지요? 그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뛰는 자리인가요? 노래하고 연주하는 자리인가요? 촬영 실습하는 자리인가요? 아니지요. 성령을 받는 자리였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기 위하여 만들어 놓으신 자리였어요. 그래서 누구든지 순종해서 참석한 사람들은 성령을 충만히 받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을 받는 자리는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데 왜 놓칩니까? 놓치니까 은혜도 받지 못하고 성령도 받지 못하는 거예요. 성령을 받는 자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놓치면 안 되는 거예요. 다른 것은 놓칠 수도 있고 다른 것은 좀 손해가 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성령 받는 일에는 놓치지도 말아야 하고 빠지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 성령을 받아야 우리가 사는 것이거든요.
우리 주위에 성령을 받는 자리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오늘 이 자리가 성령을 받는 자리가 아닌가요? 주일예배, 목요찬양기도회, 소그룹 속회, 수련회, 기도원..., 이 모두는 성령을 받기 위한 자리입니다. 좋은교회 모든 교인들은 하나님이 성령을 주시기 위하여 부르시는 자리는 빠짐없이 참석하여 성령의 충만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성령 충만을 받으려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120명이 다락방에 모여서 무엇을 했을까요?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문제가 생겼을 때에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토론을 하거나 논쟁을 벌입니다. 자기 주장이 옳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자기 방법대로 해야 해결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회의나 토론을 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했습니다. 14절에 보니까 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제자들이 기도할 때에 성령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성령은 기도할 때에 받는 것입니다. 성령은 때가 되면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생활을 오래하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을 가졌다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모태신앙이라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7장 13절에 보면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구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기도를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 누가 기도를 안 합니까? 모두들 기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기도하면서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진실로 기도하지 않고 시간 채우기만 한다는 겁니다. 속으로만 묵상하면서 기도한다는 겁니다. 이성적으로 상식적으로 점잖게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말로만 입으로만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묵상기도도 해야 하고 입으로도 해야지요.
120명은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집중해서 기도했습니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성경에 이런 표현은 없지만 다락방의 상황을 보세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하루 기도했는데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틀을 기도해도 아무 일이 없어요. 삼일이 되어도 아무 일이 없어요. 어지간한 사람은 포기하고 일어났을 겁니다. 그러나 120명은 끝까지 기도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한 마음으로 기도했다고 했잖아요. 120명은 간절히 기도했던 겁니다. 드디어 열흘 째 되던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불같은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기 시작하더니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방언이 터졌습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이 내려서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을 받는 비결은 간절히 기도하는 겁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말 그래도 간이 저리게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돈이 떨어지면 어떻게 기도합니까? 돈이 다급하게 필요하면 어떻게 기도합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병이 들면 어떻게 기도합니까? 주시려면 주시고..., 이번에 안 해 주시면 다음에 해 주셔도 좋고...,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합니까? 돈이 필요한데, 돈이 떨어져 가는데, 명상기도가 나오고 묵상기도가 나옵니까?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이성적으로 지성적으로 기도가 나옵니까? 용트림의 기도가 나오지 않겠어요. 몸부림치는 기도가 나오지 않겠어요. 생명을 거는 간절한 기도가 저절로 나오지 않겠어요. 제자들이 이런 기도를 한 겁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미국에 와서 목회를 하면서 먹고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교회가 도울 수 있는 형편도 아니고... 결국 내 코로 숨쉬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내의 전공을 살려서 라이센스를 취득해야만 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학원을 다니지 못했습니다. 책을 사다가 독학을 하면서 시험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그 때는 차도 하나 밖에 없어서 시험장에 아내를 데려다 주고 저는 교회에 가서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셀폰도 없고 시험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해서 12시에 다시 오기로 하고 교회로 달려간 겁니다. 교회 가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시험에 붙게 해 주세요. 시험에 떨어지면 우리는 먹고 살 길이 없어요. 단번에 붙여주세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애간장이 끓도록 기도했습니다. 소리 높여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세 시간을 기도하고 아내를 데리러 갔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단번에 붙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RN 시험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책을 사다가 놓고 또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시험 날자가 되어서 예전처럼 아내를 시험 장소에 데려다 주고 교회로 차를 몰았습니다. 기도 제목이 이전과 동일했습니다. '하나님, 시험에 붙게 해 주세요. 시험에 떨어지면 우리는 먹고 살 길이 없어요. 단번에 붙여주세요.' 애끓는 기도, 간장이 끓도록 기도했습니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소리 높여 기도를 했습니다. 나중에는 하도 소리를 지르니까 미국교회 목사님이 나와서 보시더라구요.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역시 단번에 붙었습니다.
오늘날 교인들의 문제가 무엇인가요? 내 심령이 영적으로 메말라 가는데 순수한 기도, 간절한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교회가 마귀에게 속아서 영적으로 게으르고 나태해져 가는데 눈물 흘려 기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교인들이 성령 충만을 받아야만 신앙생활을 잘할 수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성령 충만을 사모해서 땀 흘리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비극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성령 충만을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전도할 수가 있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죄를 이길 수가 있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비니지스를 할 수가 있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설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착각하지 마세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지 않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지 않고 잘되는 것은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이 여러분에게 임하게 되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고는 안 된다는 중요성을 깨닫고 성령의 자리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생애에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물이 스며들 듯이, 바람이 불 듯이, 불이 내리듯이 여러분 각 사람에게 다른 모양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성령 충만으로 황홀하고 능력있는 오순절의 역사를 이루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성령을 충만히 받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시대에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부어 주시옵소서. 오순절에 사도들이 경험했던 그 성령을 오늘 이 시간에 내려주셔서 내 생애에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전에 성령을 받았던 사람에게는 더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셔서 능력있게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마가 다락방의 무리들
행 1장 12~14절 / 피종진목사
100년 전 평양 장대현교회에 임한 성령 강림의 역사가 이 땅에 재현되기를 위해서 지금처럼 5만 교회, 7만 교역자, 1천2백만 성도가 합심으로 기도하였던 때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2007년도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땅에 한국 교회를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게 하시고, 세계 교회에 다시금 성령의 불을 지펴 마가 다락방의 역사를 일으키게 될 줄 믿습니다. 이러한 기도의 대열에 우리도 함께 참여하여 마가 다락방의 무리들처럼 오순절 성령 강림의 주역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성령 강림 약속과 선교 명령을 받은 마가 다락방의 무리들은
첫째,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마가 다락방의 무리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는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행 1:12). 여기에서 ‘예루살렘’은 성전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한 이유는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으로 예배가 있기 때문이고, 사명이 부여된 곳이며, 주님의 약속이 부여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122:6에 보면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항상 교회를 위하여 평안을 구하고, 교회를 사랑할 때에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가 다락방의 무리들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사랑하고 떠나지 아니했을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성전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항상 마음이 성전에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합니다.
둘째,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마가 다락방에 모인 무리들은 이름, 출생지, 신분, 직업이 다른데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어 기도하였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직업의 귀천이나 남녀노소, 빈부, 지역, 인종 차별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는 다 하나입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지위와 부와 권력을 가진 분이라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는 교만하지 말고 한 마음이 되어 서로 섬기고 봉사해야 합니다.
마가 다락방의 무리들은 사도행전 2:46에 보면 하루만 마음을 같이 한 것이 아니라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하였습니다. 마가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은 주를 위한 일에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사실 초대 교회의 역사는 한마음이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도간의 하나 됨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교회들에게 편지하면서 항상 하나 될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1~3)
악한 자들은 악한 마음으로 같이 하고, 예수 믿는 자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같이 합니다. ‘셀리’라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의학자는 “피 묻은 손보다 더 나쁜 것은 비정한 마음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을 때려 상처를 줄 때 손에 피가 묻습니다. 그런데 그 피 묻은 손보다 더 나쁜 것은 비정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항상 마음을 착하게 가져야 합니다.
영국의 소설가 ‘벌로 이튼’이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의 착한 마음은 이 세상의 모든 머리보다 더 귀하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착한 마음, 온유한 마음, 정직한 마음, 넓은 마음, 사랑의 마음, 믿음의 마음으로 하나 되어 주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행 1:14) 마가 다락방에 모인 무리들의 가장 귀한 것은 전혀 기도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힘써 기도한 이유는
①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행 1:4). 성령이 충만한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기도하는 교회가 부흥합니다.
② 직분자 선택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행 1:14). 가룟 유다를 대신하는 사도를 선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③ 훌륭한 일꾼이 교회에서 많이 일어나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④ 죄 사유함을 받기 위해 기도했습니다(행 2:38).
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행 4:28).
⑥ 핍박을 이기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⑦ 담대히 말씀을 전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⑧ 예수의 이름으로 신유의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마가 다락방의 무리들은 예수님의 분부와 약속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성령이 임하시기까지 힘써 기도한 결과 성령을 충만히 받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락방의 무리들처럼 예루살렘, 즉 교회를 사랑하여 모든 예배에 모이기를 힘쓰고, 한마음으로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 기도하기를 힘써 100년 전 평양 장대현교회에 임한 성령 강림의 역사를 이 땅에 재현시키는 주역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의 중요성
행 1장 12~14절 / 임덕순목사
본문에는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체험한 사도들과 성도들 100여명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전혀 기도하기에 힘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기도하라는 명령을 자주 자주 하셨고,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겠다는 약속을 분명히 하셨으며, 응답받는 비결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마7:7에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신 것은 기도하라는 명령이요, 주실 것이요, 찾을 것이요, 열릴 것이라는 말씀은 응답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끈질김과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신말씀은, 응답을 받는 비결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기도란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리는 것이며, 이 기도는 인간과 하나님사이의 가장 오래되고 영원히 불변하는 통화수단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며, 성도의 특권이고 의무입니다. 우리나라의 전화시설은 세계최고입니다. 우리나라의 전화는 자석식 시대, 다이얼시대, 전자식 시대로 발전하였고, 지금은 이동통신의 편리함을 누리는 세계최첨단의 통신시설을 갖춘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자석식 전화를 사용하기 전 봉화시대부터 최신예 방식의 무선전화를 사용토록 우리에게 주셨는데, 기도라는 이름의 하나님께 하는 직통전화입니다.
이 전화기의 특징은 즉시통화, 무료통화, 진실통화 입니다. 하나님께 거는 전화는 언제라도 통화중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즉시통화요, 아무리 오래해도 요금은커녕 유익한 응답만 돌아오니 무료통화이며, 이 전화는 스토커나 도청이나 다른 부정적인 수단으로 쓰일 수가 없고 오직 예수님 이름으로 진실한 말만 해야 통화가 되므로 진실통화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데 우리 개인은 한없이 나약합니다. 힘이 없는 우리에게는 지금도 많은 문제들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악한 사단은 우리들이 조용히 신앙생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라고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시험하고 까부르고 밀고 당기고 유혹하고 위협도 하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우리는 주님의 뜻을 이루며 의롭게 살아야 하는데, 시험에 들지 않고 바르게 신앙을 지키고 주님의 뜻을 이루며 승리하려면 기도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인생에게 있어서 기도는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합니다.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한번 살펴봅시다.
1. 기도는 어떤 대화보다 중요합니다.
우리나라는 6공화국시절부터 북방외교를 힘써왔습니다. 소련과 수교를 하였고 중공이라고 부르던 중국과도 수교하였고, 북한과의 대화도 꾸준히 추진하지만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한국, 북한 이렇게 여섯 나라가 함께 대화로 문제를 풀어보자고 6자회담이라는 것을 열어놨는데, 북한이 우리는 핵무기를 만들었으니 6자회담에 갈 이유가 없다고 정신없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우리나라까지 지금 위기에 싸여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끝내 대화로 안 된다면 전쟁을 수단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고 나오는데, 그러면 우리에게 큰 불똥이 튈 것입니다.
현대국가들은 외국과의 대화를 위해 외교관을 양성하고 파견하며, 대화를 통하여 분쟁과 불신을 해소하고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대화가 그 어떤 방법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적이고 중요한 대화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남북간의 대화, 국가간의 대화, 개인간의 대화나 그 어떤 대화보다도 하나님과의 대화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가 없이 시도하는 모든 인간끼리의 대화는, 서로가 자기의 유익만을 추구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국가간의 대화이건 개인간의 대화이건 마음을 다 털어놓지 못하고 하는 진실이 없는 대화가 되기 쉽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상대를 의심하는 이기적인 대화가 되기 때문에, 대화를 아무리 계속하여도 진전이 없고 분쟁과 불신을 해소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역사상의 모든 대화와 회담들의 당사자들이 먼저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를 하지 않고 나왔기 때문에, 회담들이 결렬되었거나 조약을 맺었다 하여도 그것이 기대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며, 지속적인 평화와 안정을 주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판문점 회담이 얼마나 상호 불신적이고 기만적인 대화인가를 잘 알고 있으며, 세계 국가들의 대화창구인 유엔이 아무런 효용가치 없는 기구가 되어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화의 주체들이 먼저 하나님과의 대화를 하지 않기 때문이며, 따라서 하나님과의 기도는 인간끼리의 그 어떤 대화보다도 중요하고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과 문제가 있습니까? 누군가와 만나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가로놓여 있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람과의 대화가 바로 풀리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두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반성을 하게 되기 때문이고, 하나는 하나님이 도우심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있는 자신을 봅니다. 하나님앞에서 기도하면서 자신을 보면 자신의 속셈과 위선까지 다 보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바로세웁니다. 그는 사람과 대화를 시작할 때 진실을 말하게 되며, 그러기에 비록 더딜지라도 선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도한 사람의 문제를 위해서 배후에서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외교활동이나 그 어떤 대화보다 중요하고 효과적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기도를 해야 합니다.
국가간에만 아니라 어떤 모임이든지 문제가 생겨납니다. 그리고 문제해결을 위한 모임들이 가집니다. 몇 명이 모여 숙덕공론을 하기도 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무슨 위원회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임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기도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문제의 매듭을 갖고 있는 사람이 남이 아닌 자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문제의 본질을 바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대화를 하면 문제가 부작용 없이 풀려나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외교관이 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대화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 기도모임은 유엔보다 중합니다.
2. 기도는 어떤 물리학적 발명보다도 중요합니다.
인간의 발명품은 발명 당시에는 인간에게 편리와 행복을 주는 듯 합니다. 전기, 전화, 레이저, 다이너마이트, 자동차, 원자력 등입니다. 이런 것들을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과학자들이 수없는 밤들을 꼬박 새우면서 연구를 했습니다.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는 작은 물건들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수고와 연구와 노력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세계가 부러워하는 발명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삼성과 LG가 만드는 대형 텔레비전이나 반도체나 휴대전화나, 거대한 배들은 세계에 1등 제품들이랍니다. 그러나 인간의 발명품은 얼마 가지 못해서 인간을 불안케 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안전사고와 공해를 유발시키고, 새로운 질병의 원인이 되었으며, 전쟁의 구실이 되어갔습니다. 지금 세계는 석유 때문에 전쟁을 하고 있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황 우석 박사가 연구하는 인간배아복제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인간의 발명품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못됩니다.
세상의 과학은 말할 수 없이 발전하여, 안방에 앉아서 세계를 다 돌아보며 세계 어느 곳이나 즉석에서 대화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만큼 사람들이 행복 해졌고 평화스럽고 올바르게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부패해졌고 더 불안하고 더 고통스러운 일이 많아졌습니다. 발명가들이 그토록 수고했지만 세상을 조금 편리하게 했을 뿐이지 평안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발명가들만큼 기도하는 사람이 많았다면 어땠을까요? 만약 과학적 도구를 만들기 위해서 밤샘을 하며 심혈을 기울이는 것만큼,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고자 하여 기도했더라면, 자기의 죄를 회개하기 위해서 기도했더라면,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기도했더라면, 하나님의 뜻을 알기위해서 기도했더라면, 이 세상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요? 남보다 한 푼을 더 벌기위해서 남보다 더 먼저 일어나듯이, 일찍이 일어나서 오늘도 어떻게 하여야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며 진실하게 살수 있느냐고 간구했더라면, 이렇게 아귀다툼을 하며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 세계가 되었을까요?
지나가는 사람끼리도 서로 얼굴 붉히며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기까지 마음을 놓지 못하는 나라는 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의 질이 덜 좋아서 우리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과 대화를 하지 않음으로서, 하나님앞에서 살아갈 진실함이 없어서, 하나님 등 뒤로 피하기만 하기 때문에 이렇게 살벌하고 각박한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명가는 못되어도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우리모임은 어떤 연구소보다 진지합니다.
3. 기도는 어떠한 법 제정보다도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행동이 빗나간 사람을 제재하기 위하여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하지 말라는 짓을 하고 죄를 짓고 남과 자신에게 피해를 낳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더 엄격한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법을 만드는 전문기관을 두었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법을 지키지 아니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신종범죄가 제정한 법보다 훨씬 앞서가므로, 법을 만드는 사람들을 당황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법을 지키지 아니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죄악의 본성 때문에, 법을 지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우리들은 본래 죄인이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입만 열면 죄가 나오고, 손만 뻗으면 죄를 행하고, 걸어가는 방향이 죄를 향하고 있는 존재가 타락한 인간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법을 지키고 살만한 의인은 단 한명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란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사람의 마음이 부패되었기에 아무리 법을 엄하게 만들고 엄하게 집행하여도 사람이 죄를 안 지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법과 제도를 개선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즈음에는 학교 안에 일진회라는 폭력 써클이 큰 문제랍니다. 중학교 1학년부터 일진회가 있는데, 그들의 비행과 죄 된 행실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찰이 나서서 학교의 폭력서클을 없애겠다고 나섰답니다. 그러나 그게 될까요? 경찰이 있다고 해서 깡패집단이 없어졌나요?
법과 제도를 잘 만들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조금 나은 사람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바꿔보면 어떨까 하고 새마음운동, 삼청교육대, 정신순화운동을 일으켜 보았지만, 그것을 시행해야 할 사람들이 더 큰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는,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만물보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든 법이나 제도나 운동으로는 결코 사람을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법을 만들기보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만드신 분이고, 죄짓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하시기 때문에, 너와 나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 서서 기도하며 자신을 돌아보아야만 사람이 변할 수 있습니다. 어떤 윤리교육이나 철학으로도 변화시키지 못하였던 탕자 어거스틴을 그의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의 힘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문제 앞에 고민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은 문제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내 자신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활짝 열고 기도하며 매달릴 때, 자신 안에 있는 문제와 자신 밖에 있는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기도는 어떤 법률제정이나 어떤 정신교육보다도 위대합니다. 그러므로 법률가 되기보다, 기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4. 기도는 문화보다 중요하고 어떤 예술보다 아름답습니다.
할아버지 한분이 낡아빠진 나무판자 책상에 앉아서 돋보기를 쓰고 성경을 읽다가 식사 때가 되어서 빵 한 조각에 스프 한 그릇을 놓고 두 손 모아 기도를 드리는 그림을 보셨습니까? 참 경건하고 진실한 인격자의 모습이 아니었습니까? 그 그림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풍요하고 행복하고 인격적인 줄 알았던 것을 부끄러워하게 만드는 그림입입니다.
기도하는 모습은 그림만 보아도 사람을 숙연하게 하고 경건하게 만듭니다. 기도하는 그림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기도 자체가 사람을 아름답게 변화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문화나 예술보다 귀중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지 아니한 문화는 주술적이요, 퇴폐문화요, 선동하는 문화입니다. 오천년의 한국의 문화는 샤머니즘 주술문화에 불과했습니다. 서구에서 분별없이 받아들인 오늘의 문화는 너무나 퇴폐적입니다. 한국에서 민중문화라고 일컫는 것은 선동적인 혁명도구일 뿐입니다. 예술은 인격순화의 기능이 있는 것인데 거기에는 인격순화의 기능이나, 참된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그것을 아셔야 합니다. 성경을 믿는 사람은 세상문화의 허구를 봐야 합니다.
진정한 문화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서 생기는 문화입니다. 종교개혁시대의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생긴 문화는 세계를 각성시켰고, 영국의 청교도 문화는 애국 애인 애신의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예술가로 키우실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법부터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자신과 인간, 그리고 하나님을 바로보지 못하고는, 문학도 음악도 그 어떤 예술도 주소가 분명치 않습니다. 목적이 잘못되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편견과 퇴폐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그런 문화나 예술은 사람을 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왜곡시켜 사회를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미술가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 자녀로 기도하게 하고 자녀와 함께 기도하시면 재능을 얻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오묘한 아름다움을 그려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음악가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기도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아름다운 소리를 재현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의 귀를 열어주는 불후의 음악가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어떤 예술행위보다 우선이고 중요하며 아름답습니다.
예술가가 되지 아니했을지라도 기도하는 사람은 세상을 참으로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여서 자신이 아름다워지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의 기도는 어떤 작품 활동보다 백 배나 아름답고, 천배나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5. 기도는 어떤 웅변이나 설교보다 중요하고 훌륭합니다.
웅변은 사람들에게 사람들의 일에 대하여 말하는 것임에 비하여, 설교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말씀전하는 것이며, 기도는 하나님께 사람들의 일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사람들의 일을 말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일을 전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지만, 하나님께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아뢰어 올리는 것은 더 더욱 귀한 일입니다.
웅변은 사람들의 마음을 잠시 흥분 시킬 수 있으나, 설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굴복 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우리를 도우시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지속적인 새 힘을 불어넣어 줍니다.
그런데, 웅변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흥분시키는 웅변은 많이 배워야만 할 수 있고, 사람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설교는 설교자의 지위를 얻은 사람 중에도 하기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 응답을 내고, 사람들에게 새 힘을 주는 기도는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산을 옮기는 힘이며,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는 파이프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끌어 갈때 때때로 쇠약해졌으나 그때마다 하나님께 꿇어 기도함으로 새 힘을 얻었습니다. 저도 요즘 한가람교회를 이끌어가기가 힘듭니다. 저도 이번에 기도하면서 힘을 얻으려합니다. 기도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웅변가나 설교자가 되지 아니했어도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특별히 한 영혼을 구원하고 그의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하여 하는 기도는 참 숭고합니다. 그런 기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녀와 우리 이웃들이 살고 있는 우리나라를 위해서 남들이 자는 시간에 기도하는 일은 얼마나 숭고한지 모릅니다. 그런 기도를 저와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대신에 남의 나라에가서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잠을 보류하고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고 그들에게는 천군만마보다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함께 해 주십시오.
6. 기도는 10개의 전투사단보다 힘이 있습니다.
히스기야왕은 고약한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기도하여 나았을 뿐 아니라, 15년을 더 살았으며, 침략한 적군을 물리쳤고, 여호사밧은 암몬, 모압 연합군이 쳐들어와 나라가 망하게 되었을 때에 백성들과 함께 금식하며 성전에 모여 기도함으로, 화살하나도 날리지 않고 그 많은 연합군을 물리쳤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전쟁할 때 산위에 올라가 손을 들고 기도하였더니 아말렉을 해가지기 전에 물리쳐 이겼습니다. 그때 아론과 훌은 그 기도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에워싼 모든 적들을 물리치는 힘이 있습니다. 기도는 10개의 전투사단보다 더 강력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무엇에게 둘러싸여 있습니까? 질병입니까? 외로움이나 절망이나 실패나 사망에게 둘러싸여 있습니까? 무엇에게 둘러싸여 고민하고 절망 하십니까? 전도할 대상자를 이끌어낼 능력이 없어 고민하십니까? 선한 일을 하고 싶은데 힘이 없어 고민을 하십니까? 그런 고민을 하는 성도들이 많아지기를 정말로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10개의 전투사단보다 힘이 있는 기도라는 무기가 있습니다. 기도는 포위도 뚫고, 하나님을 향한 길을 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승리하게 합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저 높은 곳에 계신 것 같던 하나님은 기도 하노라면 내 곁에 계신 것이 깨달아지고, 가슴과 두 손에 힘이 쥐어지며,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일들이 깨달아지고, 기도하고 나면 나도 모르게 문제가 해결되어 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게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것을 네게 보이리라.” (렘33:2-3)
기도로 모든 난관을 이기고 승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에 힘쓴 사람들
행 1장 12~14절 /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이 말은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말입니다. 현대는 ‘신용 사회’입니다. IMF 체제에서 ‘나라와 기업의 신용도가 얼마나 중요한가?’하는 것을 온 국민이 절감하지 않았습니까? ‘무디스’같은 세계적인 신용평가 회사들의 평가에 따라 한 국가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공신력을 잃어버리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음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한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용불량자가 되면 받는 제약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떤 이유로 신용 불량자가 되었던지 간에 그 사람은 자신의 이름으로 은행 거래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계 13:17에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
2000년전 기록된 계시록에서 마지막 때에 가장 큰 어려움이 매매를 못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장 힘든 고통이 될 것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많은 이들이 매매하는 일이 금지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가지 약속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당장 차를 몰고 나가면 안전벨트를 메야 하고, 사거리에서 빨간 불이 켜지면 서야 합니다. 인터넷에서 어떤 사이트에 회원으로 가입을 하려면 복잡한 약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읽어야 하고, ‘이 약관에 동의합니까?’하는 란에 반드시 클릭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약속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언약이라고 하는데 구약은 오래된 약속, 신약은 새로운 약속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들이 가득합니다.
성경의 약속 중에 대표적인 것이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입니다. 창 12:1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 세였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땅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복과 영통에 대한 복, 그리고 세번째는 아예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분명히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 구약에서 가장 큰 약속은 메시야에 대한 약속입니다.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올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미 5:2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슥 9:9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약속대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강림의 사건도 구약에 이미 예언되어 있었던 사건입니다.
욜 2:28에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고 성령 강림에 대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우리에게 약속하신대로 이루어 주실 것을 믿으십니까?
초대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방은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던 장소였고 또 오순절 강림의 역사가 일어난 장소입니다. 지금도 성지 순례를 가면 예수님 당시의 건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까지 40일을 머무셨고, 눅 24:49에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약속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약속하신 것은 성령입니다.
행 1:4에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다시 한번 당부하셨고 또 5절에는 더 구체적으로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받을 자들이 지켜야 할 사항이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2. 기도에 힘쓴 사람들
12절 이하에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남아있는 자들이 한 행동들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그때 모인 무리의 수가 15절에 120명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돌아왔고 마가의 다락방에 유했으며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들이 기도에 힘썼기 때문에 성령이 오신 것이 아니라 성령은 이미 오시기로 약속되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해야 할 것으로 기도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본문은 “약속의 성취 과정에서 제자들이 어떤 행동을 하였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기다리라고 했을 때 제자들이 모여서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도에 힘썼던 것입니다.
이 원리는 오늘날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모든 교회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에 대해 약속해 주셨습니다. 어느 교회는 기도를 열심히 했는 데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고, 어떤 교회는 조금만 기도했는 데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교회마다 동일하게 약속되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는 자들이 해야 할 일이 기도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혼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저희 교회에 대해 낙관적인 말을 하시는 분들과 또 조금은 비관적인 말을 하는 분들도 다 만나보았습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했다고 하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교회 개척에 대한 말만 합니다. 그러면 저는 저희 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저는 낙관적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 교회가 주님이 세우신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이 교회가 주님이 세우신 교회라고 하는 말에 무슨 다른 교회는 주님이 세우신 교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갖겠지만 저는 이 교회가 세워지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다 갖고 있는 장본인이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부정적인 부분입니다. 이 교회가 아무리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좋은 요소들을 골고루 갖추었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이 교회는 비관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실 때 나는 언제나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하신다 하더라도 그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을 통해 이 교회를 섬기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힘쓰는’ 그런 기도가 이 교회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도에 힘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명의 사도들, 여자들 - 여기서 여자들이란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갔던 여인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족들, 그 외에 전도대로 파송되었던 70인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초대교회 개척 멤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열흘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지만 자기의 생업을 모두 제쳐두고 예수님의 약속만 믿고 기도하면서 기다렸다는 것은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저는 1년의 처음 시작을 최소한 3일은 기도원에서 기도하면서 지냅니다. 농촌 목회를 할 때는 4년 정도 지난 다음에는 성도들도 같이 기도원엘 갔습니다. 1년을 시작하면서 3일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복을 바라는 것이 도둑놈 심보기 때문입니다. 미안해서라도 축복해 달라는 말을 못할 것 아닙니까?
본문에 나오는 이들은 10일만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믿고 기도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성도들이 ‘기도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3. 기도의 결과
기도의 결과 -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의 성취는 행 2: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2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엄청난 역사입니다. 오늘날에도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지지만 대개가 개인적인 역사입니다.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를 할 때에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능력받고 새사람이 되는 경우가 있지만 모두가 뜨거워지는 역사는 기독교 역사상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안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어느 누구도 제외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기도에 힘쓴’ 결과입니다.
행 2:28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을 때 사람들의 마음이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라는 말을 합니다.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날 예수의 제자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의 수가 3천이 더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를 보면 초대교회의 성령 강림의 역사와 같은 일들이 많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700년대 영국에서 있었던 존 웨슬리에 의해 영국 전체가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옥스퍼드 대학의 ‘신성클럽’이라는 작은 소모임이 있었는데 그들은 매일같이 때를 정하여 기도하고, 성경을 연구하고, 사회봉사를 하였습니다. 이들이 후에 성령 체험을 하고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감리교의 시초입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미국에서는 장로교 목사였던 조나단 에드워드에 의해 제1차 영적 대각성운동이 일어나 미국의 13개 주가 성령의 역사에 휩싸였습니다. 흔히 에드워드 목사를 ‘지옥불 설교자’라고 부릅니다.
제2차 대각성운동은 찰스 피니 목사에 의해 이뤄졌습니다. 흔히 제 2차 대각성운동을 미국에 쏟아진 축복이라고 부릅니다. 제2차 대각성 운동을 통해 선교사를 외국에 파송하고, 학교와 대학을 세우고, 수만 명이 회심하게 되고, 반 노예운동, 여권신장, 형무소 개선, 금주운동 등 많은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젊은 변호사였던 찰스 피니의 회심은 1821년 10월 10일 자신이 근무하는 법률사무소에서 환상 가운데 빛으로 임재하신 예수님을 만났는데 그때 “나는 주님의 발 앞에 쓰러져서 나의 영혼을 주님에게 쏟아 놓았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면서 목메인 소리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회개를 다하였다. 나는 주님의 두 발을 나의 눈물로 온통 다 적시어 놓았다”고 고백합니다.
“성령이 나에게 임하셔서, 마치 전류의 파장이 내 온 몸을 꿰뚫고 흐르고 또 흐르는 듯 하는 느낌을 느꼈다. 정말 성령은 사랑의 물결이 엄습해 오듯 내게 밀려왔다. 성령의 파도가 계속 밀어닥칠 때 나는 감당할 수 없어 죽을 것만 같았다.”
찰스 피니의 집회에서는 기적을 동반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고 미국 뉴잉글랜드 전역에 부흥이 일어났으며,부흥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일년에 십만 명의 개종자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미국의 플로리다 주의 펜사 콜라 지역은 꺼지지 않는 성령의 불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펜사콜라 브라운스 빌 교회를 시작으로 일어난 부흥의 불길이 온 도시를 뜨겁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가운데 기도만큼 능력있는 것이 있습니까?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지혜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들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사실 기도 밖에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먼저, 가장 우선 순위로, 기도해야 합니다.
역전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귀하게 쓰임받기를 원치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마가의 다락방처럼 뜨겁게 기도했던 은혜의 자리가 있습니까?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기도의 불이 꺼지지 않아야 합니다. 능력 있는 교회가 되려면 기도에 힘쓰는 자들이 있어야합니다. 초대교회는 기도에 힘쓰는 자들을 통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기도에 대해서 계속 강조하셨습니다.
요 14:13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 15:7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16에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요 16:23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요 16:24에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 14:-16:은 예수님의 고별설교입니다. 고별설교라는 것이 사실은 유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고별설교를 보면 온통 기도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그만큼 기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막 9:에 귀신들린 아이의 병을 제자들은 고치지 못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묻자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아무리 점쟎게 보이고, 지혜롭게 보이고, 착하게 보이고, 깨끗하게 보여도 영적인 면에서는 아무런 능력도 나타낼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동차가 아무리 좋아도 기름이 떨어지면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수많은 약속을 이미 주셨습니다. 이제 약속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도입니다. 기도가 열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