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석유
나희덕
석유를 악마의 배설물이라고 후안 파블로 페레즈 알폰소는 말했다*
베네수엘라의 광업개발부 장관이었던 그는 OPEC의 설립을 주도했지만 석유가 부정부패와 갈등의 강력한 매개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록펠러는 자신의 석유를 더 많이 팔기 위해 램프와 난로를 아주 싸게 팔았다
그들에게 가장 큰 위험은 석유 소비가 줄어드는 것, 매일 일억 배럴의 석유가 세계로 팔려나간다
뚫고 또 뚫어라!
기후 위기 따위는 문제가 아니라는 듯 점토와 암반에 파이프라인을 박아대는 시추탑과 데이터센터로 전송되는 데이터들, 지구는 구멍이 숭승 뚫린 채 갈기갈기 찢기고 있다
땅속에서 쉬지 않고 뽑아 올리는 이 죽음의 주스를 한 번도 마시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죽은 유기체들로부터 나온 이 화석연료는 굴뚝과 배기구를 통해 승천하며 지구를 가장 빠르게 죽게 할 것이다
석유와 가스는 전쟁과 함께 수출되기도 하고 전쟁으로 공급이 장기간 중단되기도 한다
원유값도 가스값도 치솟는 겨울, 발트해를 지나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떠올린다
그들은 말한다 석유나 가스에도 정신이 있다고, 고갈과 종말에 대한 공포를 가르치는 대신 새로운 신을 섬기게 하고 타오르는 불꽃의 아름다움을 알게 해야 한다고
피처럼 붉게 피보다 붉게 마침내 피로 붉게
세상을 물들이는 자들이여, 더 이상 석유를 위해 피를 흘리지 말라
피는 붉고 석유는 검지만 피와 석유는 포르피린**이라는 같은 혈통을 지녔다
러시아산 석유와 우크라이나인들의 피가 때로는 동의어가 될 수 있는 것처럼
*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 윤원화 옮김, 미디어버스, 2021, 62쪽. ** 같은 책, 60쪽.
—계간 《창작과비평》 2023년 봄호 ----------------------- 나희덕 /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파일명 서정시』 『가능주의자』 등.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