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 독서삼매
엊그제 남녘에 제법 많은 강수를 기록한 장맛비가 중부권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남하한 유월 마지막 날이다. 인터넷 기상 정보에 낮에는 비가 온다는 우산이 그려져 있어 야외 활동은 무리가 있을 듯해 다른 행선지를 물색해 두지 않았다. 아침 식후 집 근처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집으로 빌려와 읽은 책을 세 권 안고 현관을 나섰다. 바깥으로 나간 차림은 반바지를 입은 채였다.
퇴직하고 나니 의관에 대해 아무런 걸림이 없어 좋다. 그래도 바깥으로 나갈 때면 면도는 하고 나섰다. 머리숱이 적은지라 겨울에는 이마가 시려 모직으로 된 헌팅캡을 쓰고 여름은 햇볕이 따가워 차양이 되는 모자를 쓰고 다닌다.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이라 모자는 쓰지 않아도 되었다. 퇴직한 전임 대통령은 구레나룻 수염을 덥수룩하게 하였지만 나는 면도는 정갈히 해 나선다.
전임 대통령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일 거리가 하나 있다. 양산 사저로 데려가 키우던 북한산 풍산개 사료값이 부담되어 파양시켜 대학 동물원으로 보냈다가 어느 지방자치단체로 넘겨졌다는 기사를 봤다. 사저 근처로 몰려간 시위꾼이 잠잠해졌는지 뉴스거리가 되지 않자 책방을 열어 주인이 되었단다. 연금 소득도 상당할 텐데 서점까지 열어 형편이 나아져 떠나보낸 개는 찾아오려나.
나는 퇴직 후 북카페를 열 여건은 되지 못해도 집 근처 공공도서관이 있어 무료함을 잊고 지내 좋다. 시청 산하 규모가 상당한 도서관이 있고 그에 딸린 작은 어울림도서관이 있는데 나는 후자를 가끔 이용한다. 용지호수 잔디밭 구석에 자리한 작은 어울림도서관이 다니기 좋아 쉽게 드나든다. 도서관 업무 개관 시간에 맞추어 우산을 받쳐 쓰고 아파트단지를 벗어 용지호수로 갔다.
1인이 운영하는 도서관이라 사서는 문을 열면서 실내 청소로 하루를 시작했다. 바깥의 우산꽂이에 우산을 두고 실내화로 갈아 신고 대출 도서를 반납했다. 기존 서가와 별도로 비치된 신착 도서 코너에서 읽을 만한 책을 예닐곱 권 가려내 남쪽 창가에 앉았다. 쌓아둔 책을 펴기 전 아침에 도착 된 지방지 신문을 펼쳐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살피고 고정 필진 기고와 칼럼을 읽었다.
사서는 업무를 시작하면서 틈을 내 나에게 커피를 타 주어 고맙게 받아 마셨다. 비가 오는 날이라 도서관을 찾은 이는 아무도 없어 개인 서재 같았다. 내가 언제 커피믹스나 사탕 봉지라도 구해 비치되도록 하고 싶으나 아직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언제 기회를 엿봐 마련해 전하고 싶다. 창은 통유리라 비가 내려 물방울이 맺혔고 용지호수와 파릇한 잔디가 드러난 바깥 풍경이었다.
아침나절에 읽은 책은 퇴직 군인이 쓴 ‘일생에 단 한 번 독기를 품어라’와 정신과 의사가 쓴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이다. 전자는 항공계 고등학교를 졸업해 직업 군인의 길을 가다가 10년 만에 전역하고 새로운 인생길로 접어든 젊은이였다. 후자는 내 또래 여의사가 중년에 파킨슨병을 판정받고도 꿋꿋하게 병마와 싸워 이겨가는 인간 승리를 보여주어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점심때가 되어 잠시 도서관을 나서 나는 나대로 일을 한 가지 봤다. 아침에 내리던 비가 그쳐 우산은 펼쳐 쓰지 않아도 되었다. 용지호수 산책로를 따라 한 바퀴 걸으니 수면에는 잎을 펼쳐 자라는 수련이 연꽃을 펼쳤다. 시야에 드는 먼발치 대암산과 불모산은 안개가 가려 운치를 더했다. 용지호수에서 멀지 않은 대형 할인 매장에서 들러 등산복 바지와 생필품을 몇 가지 사 놓았다.
할인 매장 구내에서 간편하게 점심까지 때우고 바깥으로 나와 다시 용지호수를 한 바퀴 둘러 도서관으로 들었다. 아침나절 읽다가 접어둔 책장을 넘기며 시간이 제법 자났다. 오후 시간이 느긋하게 흐를 즈음 도서관을 찾아온 부녀들이 서넛 되었다. 나는 그들과 임무 교대라도 하듯 열람석 자리를 비켜주었다. 집으로 가려고 바깥으로 나오니 웃비는 그쳐 우산은 펼치지 않아도 되었다. 23.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