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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6장 24~33절/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존귀한 자입니다.
현대인의 결정적인 약점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으면서 잘 안다고 생각하고 배우려 하거나 바꾸려 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지식을 많이 소유하기를 원하고.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지식을 소유하는 동안, 자기 자신을 아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우리는 자연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얻음으로 인하여 삶이 풍성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연은 변화무쌍하고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일들이 벌어지는 경우에 힘없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자동차는 우리들에게 대단한 편리성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먼 거리를 왕래할 때도 편리하게 가족과 함께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운전을 배우고 여러 가지로 유익한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사고를 당하면 자신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무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좋은 점만을 생각하고 살기를 원하지 자신의 삶에 위험을 초래하는 일들이 일어날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 마지막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만 특별한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의미는 거룩한 속성을 가졌다는 뜻이요, 지혜와 능력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요. 사랑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은 다스림의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에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모든 생명은 본능을 지녔고 그 본능에 따라서 살아가며, 본능에 의해서 질서를 유지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먹고 싶은 본능이 있기에 굶어 죽지 않습니다. 서식 본능이 있고, 귀소 본능이 있어서 나름대로 자기들 생활을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고 보면, 모든 행복은 본능과 관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능 자체를 속된 것으로 여기는 것은 헬라 철학 사상의 영향이며 이원론적인 사고로 이방 사상입니다. 기독교는 본능을 소중히 여깁니다. 어떤 본능이든 근본은 하나님께로 온 것이며 본능을 통해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능은 아름다운 것이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문제는 본능을 인간 스스로 다스리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본능은 주시고 우리가 선택하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내 본능을 다스려 나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본능을 다스리지 못하면 큰 환난을 댱하게 되고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가질 수 있는 마음을 주셨지만 무엇이든 다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능한 것을 가질 수 있지만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동물들은 욕심을 부리지 않지만 사람은 욕심을 부려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지만 그러나 먹을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은 구분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일입니다. 이성으로 본능을 다스려야 하고 양심에 의해서 다스려야 합니다. 좀 더 나아가면 믿음으로, 성령의 감화로 우리의 본능을 다스려야 합니다. 본능을 잘 다스리면 그 다스리는 것만큼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존 본능이든 생식 본능이든 본능은 원래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중에서 다스린다는 본능을 심리학자들은 정치적 본능이라고 합니다. 가정도 다스리고, 직장도 다스리고, 무엇인가를 지배하면서 느끼는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은 특별히 남성에게서 더 많이 발견되어 집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아름다운 선물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신 권한을 잘 간수하고, 잘 보존하고, 잘 주관하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주관대로 파괴하고 마음대로 잡아먹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신 축복에 대해서 잘못 깨달고 다스리면 곧 사람에게 다가오는 재앙이 되는 것입니다.
다스리라는 말씀 속에는 자유와 자율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유는 사람에게 주어진 큰 특권이며, 자유가 있는 만큼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네가 자유한 만큼 네가 책임을 져라." 이 만큼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한계입니다. 책임을 질 줄 모르면 허세이고, 폭력입니다. 권리만 행사하고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은 권리를 가질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책임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책임지는 것만큼 자유의 영역도 넓어지는 것입니다. 윗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그만큼 책임을 크게 많이 져야 합니다. 자기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사람은 항상 남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책임지는 만큼 자유의 영역은 넓어지며 그만큼 큰 정치적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가장 어려운 문제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문제입니다. 내 뜻으로 내가 다스렸다면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것이 다스림의 뜻입니다. 다스린다고 하는 말은 바로 자유 한다는 뜻입니다. 아무에게도 어떤 일에도 매이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다스리는 자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증오의 노예가 된 사람은 아주 불행한 사람입니다. 미워하는 감정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고생하고 있습니다. 증오의 노예가 되었기에 자기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나친 욕심에, 지나친 명예욕에, 지나친 질투심에 노예가 된 사람은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빼앗긴 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욕망과 희망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욕정도 다릅니다. 사랑은 무한히 자유롭습니다만 욕정은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계속 그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당한다면 그는 사랑을 모르는 자입니다. 사랑은 자유롭고 욕정은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내 마음이 얼마나 자유로우냐 하는 만큼 인간은 자기 특권을 향유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에 억지로 끌려가는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저는 술을 마시고 술 기운데 의존하여 사람들에게 말하는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마음을, 자기감정을 마음대로 다스리지 못해서 술의 힘을 빌려 무엇을 해 보겠다고 하는데 정말 한심한 것입니다. 술이 깨어날 때 더 처참해지는 자기 모습 즉, 자기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한 자책이 더 비참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로마서 7장 24절에서 바울의 고백이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원하는 선은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는 자기 모습, 즉 무엇인가에 끌려가는 처참한 자기모습을 객관화 시켜 슬퍼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어떤 상황 아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다스림이란 또한 굴복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나를 쳐서 복종케 하라." 즉 나 자신을 때려서 굴복시킨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길들인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놓치게 되면 실패합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막8;36. 눅9;25)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라고 묻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아는 자는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자입니다. 스스로를 아는 자는 자기를 믿지 않습니다. 내가 나됨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자기의 본능은 죄인의 괴수로서 방종하고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자기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굴레로 씌웠습니다. 우리들의 결심은 조석으로 변합니다. 과연 나 스스로가 믿을 만한 존재입니까? 공부하는 아이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위해 알람을 맞춰 놓고, 또 어머니께 깨워달라고 부탁합니다. 자기 스스로를 믿는다는 것을 일단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못 믿으니 이제는 어머니를 의지하려고 합니다. 나는 믿을 것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육신이 하자는 대로 다 하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자고 싶은 대로 자면 24시간을 자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나는 형편없고 구제 불능함을 두 손 들고 선언해야 합니다.
빨리 자신의 악함을 선언하고 이제 예수님의 의지를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 의지를 부정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뜻합니다. 이제 내가 나를 다스리지 못하므로 그리스도가 나를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으로 나를 다스리게 하여 그저 묵묵히 순종할 뿐입니다.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기 마음을 믿지 않고, 자기를 다스립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순종하고 나의 모든 것, 즉 나의 판단, 감정까지도 그 분께 위탁하는 사람입니다.
첫째, 사람은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잠언 16장 32절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사람은 순간적인 분노와 순간적인 감정의 노예가 되어 일생동안 후회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바로 다스린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 중요한 일입니다. 이번 명절을 보내면서 가정에서 이런, 저런 일들로 다툼이 생겨나고 이러한 다툼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들이 일어난 사건을 보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는 일들이 일어하는 경우를 보면서 이것이 우리의 본 모습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모세를 보십시다. 그는 시내 산에서 40일 동안 주야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에 광채가 빛나 백성들이 쳐다볼 수가 없어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 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며 내려온 모세지만 우상을 숭배하는 백성들을 볼 때 격렬한 분노가 터져 나옵니다. 자제할 틈도 없이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돌 비석을 그대로 내던집니다. 저 같으면 십계명을 내려놓고 다른 돌을 던질 것입니다. 어쩌자고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의 돌비석을 그대로 던집니까? 이 모습이 모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옛날에 애굽 사람을 때려죽인 성깔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할 때 가데스에서 반석을 두 번씩 내리칩니다. 혈기를 그대로 뱉었습니다. 패역한 놈들이라고 욕설을 하며 불 신앙적 발언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바로 되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마술적이나 기계론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진실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된 사람을 비방하다가 내가 더 거짓말쟁이가 되는 경우가 많고 사실에서 떠나버리고 과장과 궤변으로 치우칠 때가 있습니다. 끝까지 웃음과 친절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집에서 키우는 개를 쓰다듬으면서 내가 너를 미워한다하면 개는 좋다고 꼬리를 칩니다. 그러나 개를 향하여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소리를 지르면 꽉 물어 버립니다. 사랑한다고 했느냐, 미워한다고 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동한 모습이 어떠하냐에 따라 개는 반응한 것입니다.
잠언16장 27~30절에서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나니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같은 것이 있느니라 패역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강포한 사람은 그 이웃을 꾀어 좋지 아니한 길로 인도하느니라 눈짓을 하는 자는 패역한 일을 도모하며 입술을 닫는 자는 악한 일을 이루느니라”
1)불량한 사람은 악을 만들어 내고 그의 언행이 불같다고 말합니다.(27) 사람은 말을 듣는 경우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경우에는 말을 잘 들으려고 합니다, 반면에 자신에게 전혀 유익이 없거나 무가치한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불량한 사람은 말에 가치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그 말하는 것이 전혀 유용하지 못해서 사람들에게 들려지지만 오히려 불같은 것이 되어 태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진실하지 않은 사람은 그가 하는 말을 통해서도 악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합니다.
2)패역한 사람은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질 시키는 자입니다.(28) 패역하다는 것은 고집이 세고 괴팍하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햐는 말은 저 고집을 누가 꺾느냐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고집이 세다는 것은 패역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자신의 고집대로 하고, 자기주장대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하신 뜻을 거역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갖고 말을 많이 하는 것을 오히려 관계를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말을 적게 하고 바른 말을 하려고 노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강포한 사람은 이웃을 꾀어 좋지 않은 길로 인도합니다.(30) 강포한 사람은 폭력을 행하거나 부당하게 악행을 저지르는 경우를 말합니다. 자신이 가진 힘을 통해 강압적으로 잘못된 길로 행하도록 하는 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까지 고통에 빠뜨리는 경우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은 혈기를 통해 무엇을 하려고 하는 자체가 무익함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참된 진리를 말해도 소용없고, 아무리 귀한 말을 해도 혈기가 있으면 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끝까지 사랑과 친절을 잃지 말아야겠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있고 하나님이 들으시고 하나님이 보십니다. 바로 이러한 신앙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모습을 바로 보십시다. 하나님 앞에 서있는 내 모습을 보십시다. 그리고 이야기합시다. 사도행전 4장 19절에 베드로와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너희가 판단하라" 이렇게 하나님 앞에 서있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창세기 4장 7절에 보면 분노한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어느 한 순간에야 죄스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다스리라는 것이 우리가 할일입니다. "머리 위로 지나가는 새는 막을 수가 없으되 내 머리 위에 둥지를 트는 새는 막아야 한다."는 마틴 루터의 말이 있습니다. 슬쩍 지나가는 죄의 생각이야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음에 쌓이면 안 됩니다.
잠언16장 31절에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백발은 머리가 희어 졌다는 말입니다, 이는 오랜 세월을 살았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단지 나이가 많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인생의 여정 속에서 깨달은 진리를 증거 함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으로 남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점점 노령인구가 많아지고 존경받는 노인이 아니라 구박받는 노인으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른들을 공경하는 것은 그분들의 삶을 통해서 비춰지는 공의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오히려 유익하게 하시려는 마음을 보게 됩니다.
후회라고 하는 것은 전부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한 것의 고통입니다. 자기 상실에서 오는 것입니다. 돈을 벌지 못해서 후회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나를 바로 다스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입니다. 믿음과 겸손과 사랑으로 다스립시다. 잘 안 된다고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값을 치렀습니다. 이제 우리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에게 맡기면 그가 나를 다스릴 것입니다. 그가 내 마음을 지배하고 그가 내 뜻을 주관하실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이 내 인격과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실 것입니다. 잠언16장 32절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