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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管韻
03.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56년~BC 323년)
4. 사상과 사생활
어릴 적의 스승은 레오니다스. 고대 스파르타의 왕인 레오니다스 1세와는 동명이인이다. 좀 더 컸을 때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로, 서구 철학사에서 플라톤과 더불어 쌍벽으로 예우받는 대철학자이자 자연과학자였다. 그야말로 만능의 천재. 단 왕자 신분이라,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온전히 이어받아 학자로 활동한 것은 당연히 아니고, 그의 정복 전쟁과 정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항적? 단, 그리스식 영웅주의에 아주 빠져 있어서 베개 밑에 일리아스를 넣고 잘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그 일리아스를 추천해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로, 알렉산드로스가 항상 갖고 다닌 일리아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작성해 준 요약 필사본이라고 한다. 이처럼 둘의 사제 관계는 위에서 이야기가 되었듯이 처음에는 매우 좋았던 모양인데, 나중에 가면 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단 동문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인 칼리스테네스를 죽게 만들기도 했고....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에게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죽을 때까지 아리스토텔레스와 계속 교류는 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야심이 매우 커서, 부왕인 필리포스의 승전 소식을 들을 때면 매우 울적해 하며 친구들에게 "부친께서 이렇게 나라들을 계속 정복하신다면 나와 너희들이 자라서 펼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라고 말하기도 했다. 거기에 작은 명예와 이익을 탐하지 않고 큰 영광과 명성만을 탐하는 것은 어릴 적부터 평생을 가서 알렉산드로스가 왕자 시절부터 뛰어난 운동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올림픽 경기에 출전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좋다. 왕들과 겨룰 수 있다면."
부케팔로스의 일화에서 보이듯, 배짱도 강했다. 자신감이 늘 넘쳐났고, 죽음에 두려움을 보이는 일 없이 용감하였다. 모든 전투에서 선두에 선 것은 유명하며, 이로 인해 많은 부상을 입었다. 가장 극적인 전투였던 가우가멜라 전투 때에는 아침까지 늦잠을 자고 있었는데, 기가 찬 파르메니온이 가서 직접 깨우자, 눈을 비비며 일어나 "우리가 이미 이기지 않았소? 도망다니던 다리우스를 쫓아다니느라 우리가 기진맥진하였을 정도니 말이오." 라고 했다. 카파도키아 반도를 넘어가던 중,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얼음장 같은 온도에, 폐렴이 걸려 사경을 헤메기도 하였는데, 어의들은 혹 자기에게 책임이 물어질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한 의사만이 대왕에 대한 애정으로 나서서, 그를 간호하고 약을 지어줬는데 며칠 후, 정신이 좀 든 알렉산드로스에게 파르메니온이 쓴 편지가 왔다. 편지의 내용인즉 "그 의사는 사실 페르시아와 내통하여 전하를 죽이려 하고 있으며, 약을 통해 독살을 하려 한다"인 것. 의사가 약을 들고 천막으로 들어오자, 알렉산드로스는 사발을 받고 쭈욱 들이키며 의사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는데, 편지를 읽은 의사는 바로 사색이 되어 땅에 엎드렸다. 의사는 자신은 절대 이러한 의도가 없다며 살려달라 외쳤고 알렉산드로스는 남은 약을 들이킨 뒤, 미소를 지으며 의사를 일으켜 세웠다. 군의 2인자인 파르메니온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신뢰한 것이고 이는 들어맞았다.
하지만 부하들의 불평을 흘려듣지 않고 간언을 듣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고 하나, 이건 인도 원정을 중간에 그만두고 회군한 것처럼 예외의 경우들이다. 파르메니온과 클레이투스와 칼리스테네스가 괜히 죽은 것이 아니다.
자신감이 높은 만큼, 자존감도 높았는데, 술을 마시면 자기자랑을 거하게 하는 편이기도 했다.
이집트에서 신탁을 받은 뒤로는 자신이 신이라 믿기도 하였다. 인도에서 회군하던 때, 화살을 맞은 그가 피를 흘리며 "이것은 신의 피가 아니라, 인간의 피로구나."라고 슬프게 말하기도 했다.
물욕, 육욕에 대한 자제심이 매우 강했다. 이수스 전투 이후, 아름답기로 소문난 다리우스의 아내에게 융숭한 대접을 하면서도 "그녀의 미모를 나에게 말하지도, 상기시키지도 말 것이다."라고 부하들에게 말하기도 했으며, "페르시아의 여자들은 눈이 아플만큼 아름답다고 하더구나." 라면서도,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다.
식욕 또한 필요한 만큼만 먹고, 그 이상의 낭비는 하지 않았는데, "저는 레오니다스 선생님으로부터 가장 좋은 식사법을 배웠으니 훌륭한 요리사들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아침을 맛있게 먹으려면 야간 행군을 하고, 저녁을 맛있게 먹으려면 아침을 적게 먹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라고 하기도 했다. 원정 중반을 넘어가며, 재화가 숙영지에 넘쳐흐르던 때부터는 식사가 사치스러워졌으나, 알렉산드로스 본인은 늘 군인다운 검소한 삶을 이야기했다. 이는 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물욕이 없는 만큼, 베푸는 것의 기쁨을 잘 아는 이가 알렉산드로스였는데, 그는 주위의 인물들에게 지나치리만큼 후한 대접을 하여, 친구들이나 동료 장군들의 부는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페르시아의 한 고관은 알렉산드로스에게 "대왕께서 오시기 전에 페르시아에는 다리우스 왕 하나뿐이었지만, 이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여럿입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장군도 아닌 서기관 에우메네스가 자기 막사에 숨겨놓은 돈이 금과 은 1000탈렌트 이상이었을 정도다. 일개 병사들에게도 이러한 태도는 마찬가지여서, 어느날 나귀가 지나치게 무거운 보물로 인해 힘들어하는 것을 본 병사가 보물을 나눠 짊어지자, 대왕이 몸소 그 옆으로 다가가 "힘을 내거라. 캠프까지 너가 그 보물을 들고 간다면 그것은 모두 너의 것이 될 것이다." 라고 하기도 했다.
인정도 깊어, 한 병사가 부상을 입었다 거짓되게 진술하고 전역하려 한 것이 걸렸는데, 그 사유가 고향에 두고 온 연인에 대한 사랑 때문인 것을 알게 되자, 대왕이 이를 용서하며 그를 전역시켜 준 적도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점령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귀족들에게도 융화정책을 펴서 그들의 충성을 얻었다. 사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리스 철학에 감화되어 있었지만 정치적으론 현실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페르시아인도 포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집트에 갔을 때도 굳이 파라오 칭호를 받은 것도 이집트인을 포용하기 위한 것. 사실 페르시아에 쳐들어갔을 때도 페르시아 전쟁에 대해 복수하자고 하면서 그리스인들을 이끌었다. 문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그리스는 페르시아랑 휴전을 했던 것. 그리스인들이 "야만인"의 지배를 받는 걸 못마땅해하자 시선을 밖으로 돌린 것이다. 그런 이후에도 그 "야만인"들을 잘 구슬려서 충성을 받은 걸 보면 정치적인 융화력이 상당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자제력이 매우 강한 편이긴 하였으나, 동시에 충동적 행동도 많이 하였다. 자제력이 강한 모습들도 이러한 충동적 천성 때문에 생겨난 태도가 아닐까 싶다.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우고 후회한 것. 에우메네스의 막사에 불을 지르고 후회한 것, 술에 취해 자신의 은인이자 신뢰받던 장군이던 클레이토스를 죽인 것 등이 그것이다.
수많은 정부 중 하나인 판카스테와의 일화는 그의 자제력을 알아주는 좋은 일화. 판카스테를 모델로 한 여신그림을 그려달라고 화가에게 부탁했는데 판카스테가 그 화가와 사랑에 빠져 연인으로 발전했고 이 소식을 듣자 처음에는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 그들의 사랑을 인정하고 판카스테와 화가의 결혼식을 도와주었다.
4.2. 사생활
아내를 여럿(아시아 계통) 두었다. 첫번째 왕비는 박트리아 부족장의 딸인 록사나였는데, 록사나와 결혼한 이유는 아마 다리우스 3세의 장녀 스타테이라 2세와 결혼한 것과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록사나와 관계를 맺어 아들인 알렉산드로스 4세를 두었으나 일생 대부분의 시간을 원정에 쏟아부었고, 아들이 아직 태어나기 전에 요절했으니 함께 했던 시간은 극히 짧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알렉산드로스는 적장이었던 로도스의 멤논의 아내였던 바르시네를 후궁으로 삼아 또 다른 아들도 두었는데 이름은 헤라클레스. 하지만 헤라클레스 역시 그가 죽은 뒤 등장한 디아도코이 간의 내전 중에 카산드로스에게 독살당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릴 적부터의 친구이자 최측근이던 헤파이스티온은 흔히 알렉산더의 동성 연인으로 알려져 있다. 기록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당시로선 작은 키에 외모도 평범한 편이었고 오히려 헤파이스티온이 더 키도 키고 잘생겨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가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박살내고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있는 막사에 들어왔을 때 다리우스 3세의 어머니와 그외 일가는 헤파이스티온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인줄 알고 그 앞에 엎드렸다는 얘기가 있다. 헤파이스티온이 정말로 그의 연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알렉산드로스에게는 그 누구보다 절친한 친우이자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가족과 같은 사람이었다는 점은 변치 않는다. 헤파이스티온이 사망할 당시에 알렉산드로스는 엄청난 슬픔과 좌절감에 사로잡혀서 헤파이스티온의 건강을 돌본 의원을 죽이기까지 했으며, 죽은 헤파이스티온을 기리기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거대한 기념물들을 건축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또다른 동성 연인으로 유력한 인물은 페르시아 출신의 미소년 환관이었던 바고아스였다. 그는 외모가 아름답고 가무에 능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총애를 받았다. 플루타크 영웅전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군대를 이끌고 인도를 떠나 게드로시아 사막을 횡단한 후에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무용 경연이 열었는데, 당시에 바고아스가 아름다운 춤을 추어 우승하고 덤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키스를 나누었다고 한다. 바고아스는 관련 기록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알렉드로스가 등장하는 소설이나 영화 등에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심지어 바고아스를 주인공으로 한 <Persian Boy>라는 소설도 있다.
4.3. 외모 문제
고대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알렉산드로스를 꽃미남으로 묘사하고, 남아 있는 조각상에서도 일반적으로는 준수한 미청년의 모습을 일관되게 묘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조각가 리시포스가 남긴 흉상의 레플리카가 가장 신뢰할 만한 알렉산드로스의 모습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실물을 보면 꽃미남이라기보다는 그 아버지 필리포스를 위아래로 잡아 늘린 듯한 닮은 터프한 모습에 가깝다. 어쨌든 추남은 아니라는 데에 유의.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20세기에 들면서부터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남아 있는 전신상들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자세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모습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 이 때문에 알렉산드로스에게 골격상의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른바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 즉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나타났던 어떤 미적인 규칙을 준수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또한 고대 역사가 아리아누스의 기록에 의하면, 알렉산드로스는 한쪽 눈은 검푸르고 다른쪽 눈은 하늘색, 그러니까 오드아이였다고 하는데, 이것도 어떤 유전적인 장애의 징후가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이러한 의견을 종합하다시피 한 사람이 영국의 역사가 피터 그린인데, 그의 말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평균적인 마케도니아 남자의 키에도 못미치고 몸은 뒤틀려있고, 목소리는 쉿쉿거리는데다 수염도 성기게 나기 때문에 뽀대가 안 나서 일부러 면도를 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다만 혹자들이 제기하곤 하는 필리포스 왕이 이러한 알렉산드로스의 외모 때문에 그를 후계자로 택하는 것을 망설였을 수도 있다는 가설은, 일단 알렉산드로스의 외모가 당시 기준으로 어떠했는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는 점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 알렉산드로스 추남설을 지지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알렉산드로스가 지닌 여러 외모상의 문제점, 그러니까 뒤틀어진 골격이나 오드아이, 거친 목소리 등을 부왕 필리포스로부터의 유전, 나아가서는 당시 마케도니아 왕실의 유전적 특성으로 보고 있다. 이는 알렉산드로스의 서출 형제인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의 장애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도 추측되는 부분이 있는 바, 때문에 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외모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고 보는 게 옳을 듯 하다.
게다가 아직도 알렉산드로스의 외모에 대해서는 꽃남설이 다수설이다. 불확실한 점이 많다는 것. 알렉산드로스 추남설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부각되었는데, 그의 외모에 대한 논쟁은 그에 대한 논쟁들 중 메이저는 아닐지라도 2천년은 족히 지속되어온 장기 떡밥이다. 섣불리 결론 내리기는 어렵다.
일단 정설로 취급받는 학설은 "역사에 획을 그을 정도의 추남은 아니라는 것." 즉 미남이 아닐 수는 있어도 보자마자 혐오감을 느낄 정도의 외모는 아니었을 거란 것이다. 만약 역사에 회자될 정도의 추남이었다면 그에 관련된 루머나 역사책이 상당 수 남아 있어야 정상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당시 세계의 절반을 흽쓴 양반이 보자마자 토할 정도의 얼굴인데 아무런 기록이 없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신체적 결함에 대해서도 소소한 장애는 보유하고 있을 수 있어도 행동에 지장을 줄 정도의 장애는 보유하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일화 중에 날뛰는 난폭한 말에 올라탔다는 일화, 무용담, 또 왕에게 심각한 신체적 결함이 있을 경우 왕이 되기 힘든 그 당시 사회상, 언제나 전쟁터에 군대와 함께 섰었다는 걸 생각했을 때 장애설은 신빙성이 낮다. 발을 절뚝거리며 몸이 뒤틀린 사람이 전쟁터에서 선봉에 서고도 살아 돌아오는 걸 반복할 가능성은 낮다. 물론 신체 장애가 있음에도 전쟁터에서 용맹을 떨친 사례도 상당히 있는 편이며, 한 예로 영국의 리처드 3세는 심한 척추측만증으로 별명이 곱추왕이었지만 전쟁터에서 뛰어난 기사로 이름을 남겼다. 절름발이였던 스파르타의 아게실라오스 2세는 왕이 되려 하자 불구인 왕이 나라를 몰락시킨다는 신탁이 나왔다. 그러나 리산드로스가 신탁에 대해 부정한 태생의 사람이 왕이 되면 왕국이 절름발이가 된다는 의미로 주장하여 사생아로 의심을 받던 조카를 제치고 왕이 될 수 있었다.
애시당초 위에 나온 추남설은 대다수가 근대에 와서 제시되기 시작한 의견으로 '클레오파트라'는 미녀가 아니었다 등과 비슷한 맥락으로, 그 당시의 일종의 유행 같은 것이었다. 확실하게 미남인지, 평범한지, 추남인지는 유해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유해가 있을 곳으로 보이는 지역이 알렉산드리아이고 유력한 곳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궁전 단지인데, 바닷 속인데다가 추정만 할 뿐,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5. 후대의 평가
알렉산드로스의 행보는 사실 냉철한 현실주의에 기반한 합리적 행적들이라기보다는, 야망에 불타오르는 청년의 겁없는 모험담에 가까운 면모가 많다. 이를테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기록된 그의 왕자 시절 모습과, 군주 시절의 원정 준비 작업을 살짝 들여다보자.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가 어느 중요한 도시를 함락했다거나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조금도 기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투덜거렸다. "이러다가는 아버지한테 일을 다 뺏겨서, 우리는 크고 빛나는 사업도 못하고 말겠어."
쾌락과 돈보다는 영광과 명성을 더욱 갈망했던 그는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을 영토가 넓어질수록 자기가 정복할 땅이 적어진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결코 안일한 생활과 호사스러움이 보장되는 평화롭고 번영된 나라를 물려받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외적을 가진 나라의 왕위를 계승 받아 용기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의 군대는 보병 3만 명과 기병 4천 명이었다는 설도 있고, 보병 4만 3천 명 그리고 기병 3천 명이었다는 설도 있다. 아리스토불로스의 설에 의하면 그는 70탈렌트 정도의 군자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며, 두리스의 설로는 군량미 30일 분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 오네시크리토스는 당시 알렉산드로스에게 2백 탈렌트의 빚이 있었다는 얘기도 전한다. 어쨌든 대규모적인 계획의 준비로서는 변변치 못한 준비였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부하들의 일이 염려되어 모든 사람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 어떤 자에게는 많은 토지를 주고, 어떤 자에게는 한 마을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항구를 주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신분에 맞도록 각각 재산을 나누어 준 다음에야 군비를 수송시켰다. 그러나 이렇게 하느라고 그는 대부분의 왕실 재산을 다 써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페르디카스가 그에게 물었다.
"대왕께서는 자신을 위해 무엇을 남겨 놓으셨습니까?"
알렉산드로스가 대답했다. "희망".
그러자 페르디카스가 말했다.
"그럼 대왕을 모시고 떠나는 저희들도 그 희망을 나누어 갖겠습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알렉산드로스 열전』 中
또한 그는 전장에서도 자신의 안전을 내팽개치고는, 전투 대형의 맨 앞에서 보통 병사들과 함께 싸웠고, 위험을 무릅썼다. 물론 적들은 복장을 통해 알렉산드로스를 알아볼 수 있었음에도 말이다. 또한 유사시 그가 사망하여 발생할 정국의 불안정을 막기 위해 혼인해서 자식을 낳을 때까지 정복을 멈춰달라는 조언들마저도 무시했을 정도다. 마지막으로,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일화이기는 하지만 그는 후계자에 대해서 "가장 강한 자(kratistos)!"라는 말만 남기고는 역사에서 퇴장했다. 당연히 이러한 행동들은 후대의 군주들이 절대로 따라해서는 안 될 무모함으로 가득차 있다. 하지만 사나이의 피가 끓지 않는가? 바로 이 때문에, 따라해서는 안 되는데 뭔가 멋있는 사람으로 후대인들에게 길이길이 회자되고 있다. 그리하여 많은 군주들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따라 대왕병을 앓게 된다. 대표적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들 수 있는데, 카이사르가 33살의 나이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내 나이에 세계를 정복하고 죽었지만, 나는 이 나이에 이를 때까지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구나"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석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개탄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리스와 오리엔트 문화가 결합된 헬레니즘 문화를 만들어낸 사람으로 유명하다. 물론 헬레니즘 제국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에다가 그리스, 마케도니아를 합쳐놓은 정도의 판도이기에, 넓기는 하지만 몽골 제국이나 대영제국, 러시아 제국 같은 후대의 거대 제국들에 비하면 "의외로 작네?"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대 그리스인들이 인식하고 있던 세계의 유서깊은 문명 지역이란, 그리스, 이집트, 레반트,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이란 고원, 인도였으며, 이러한 꿀땅들 중 인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알렉산드로스는 정복했다. 게다가 대영제국이나 러시아 제국은 세대와 세대를 거쳐서 형성된 거대 제국이기에, 개인으로서 알렉산드로스와 비견될 만큼 땅을 팍팍 정복한 군주는 칭기즈 칸 등 정말 몇 안된다.
친구 헤파이스티온과의 뜨거운 관계로 다른 방면에서도 상당히 유명하다. 또한 부하 장병들에게 현지 여성과의 결혼을 장려하였는데, 이 역시 그리스와 동양을 혈통적으로 결합하여 이상적인 세계시민을 양성하려는 의도였다고 추정된다. 이런 동서 문화 융합 정책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측근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해서 반역 음모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이런 융합 정책 때문인지 로마 때는 폭군으로 기록되는 일이 많았지만 소아시아의 왕들 중에는 자신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예로 부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 또한 영웅시되는 일이 더 많았다. 일례로 티무르의 생애를 다룬 열전에서 그 지역의 위대한 왕들의 이름을 얘기할때 알렉산드로스도 언급된다.
알렉산드로스는 동쪽으로 행군하면서 수많은 신도시를 건설하였고 이들을 모두 알렉산드리아라고 명명한다. 이 알렉산드리아들은 알렉산드로스가 꿈꾼 완벽하게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시험작들이라고 추측된다. 실제로 이 도시들은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문화가 어울리도록 조치하였고 그에 따라 당시 서방에서 모을 수 있었던 거의 모든 문헌을 수집 배분하여 도서관을 설치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는데 당시에 있어서 책의 가치를 생각해본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것인지 알 수 있다. 헬레니즘 문화의 발흥도 바로 이러한 배경에 의한 것이다.
세계 방방곡곡에 건설되었던 알렉산드리아는 모두 폐허가 되어 위치조차 알 수 없고, 현재까지 유일하게 살아남은 곳이 바로 이집트 제2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다. 터키의 항구도시인 이스칸데룬(Iskenderoun 또는 Iskenderun) 역시 그리스어로는 알렉산드렛타라고 불리며, 스스로는 알렉산드리아의 후신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멸망한 뒤 같은 위치, 혹은 인근에 세워진 새로운 도시라는 설이 유력하다.
서양에서는 동양에 대한 우월감을 상징하는 인물로 쓰이기도 하며 이 인물 때문에 과거의 마케도니아와 관련없는 현재의 마케도니아도 그리스와 관계가 복잡해진다. 아이러니한 건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지방을 어르느라 동방 문화를 받아들여서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욕을 단단히 먹었었다. 역시 죽고 나면 정치적인 도구가 될 뿐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그리는 역사서들은 옹호와 비판의 두 갈래로 나뉘는데, 옹호 쪽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예찬하는 경향이 지나쳐서 《창천항로》의 조조급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비판 쪽은 군사적인 면보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잔인함과 술주정에 주로 집중하는 편이다.
그 인기 때문인지 이슬람권에서는 침략자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한편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거쳐 서아시아 세계에 전파되어 그의 정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이슬람 신학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기 때문. 참고로 그리스도교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스콜라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경우는 플라톤의 비중도 굉장히 큰 편이다. 한편 무슬림이나 크리스천이 알렉산드로스의 전쟁을 성전이라 믿는다는 카더라가 있는데 근거는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선 정도는 있지만.
인도 쪽에서는 역사적으론 침략자인 만큼 별로 취급이 좋지 않다. 전 인도 수상 네루는 딸에게 대놓고 야만족의 우두머리라고 가르쳤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가 오래 살았다면 세계 제국과 과학의 발전이 일찌감치 성공했으리라고 예상했지만, 거꾸로 그가 단명하지 않았으면 그나마 남아 있던 헬레니즘 문화의 바탕인 오리엔트 문명이 그리스인들의 무지에 더욱 파괴되었을 것이란 반론도 있다. 사실상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제국을 그대로 계승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현실을 볼 때 설득력 없는 의견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알렉산드로스 개인의 성격이 어쨌든 상관없이 말이다. 앞에서 말한 계획대로 로마로 진공했다고 해도 한니발이나 피로스의 신세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해석도 있다. 원본은 로마 장군이 연설하면서 '천하의 알렉산드로스도 우리 로마에 쳐들어왔으면 깨졌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 주장은 당대에서부터 제기되었는데,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로마로 왔다고 해도, 최종적으로는 로마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물론 당시 로마와 마케도니아의 국력 차이와 인재풀을 생각하면 설사 원정을 실패해도 한니발과 피로스의 신세가 될 확률은 낮다.
기독교 성경에서는 저자였던 유대인들의 땅을 침략한 인물이다 보니 다소 부정적인 시선으로 평가하고 있다.
키팀 땅 출신의 마케도니아 사람으로, 필리포스의 아들인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인들과 메디아인들의 임금 다리우스를 쳐부순 다음, 그 대신 왕위에 올랐다. 그 이전에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많은 전쟁을 치르고 요새들을 점령하고 세상의 임금들을 죽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땅끝까지 진격하여 많은 민족에게서 전리품을 차지하였다. 세상이 그 앞에서 평온해지니 그는 마음이 우쭐하고 오만해졌다. 그가 막강한 군대를 모아 여러 지방과 민족과 통치자를 굴복시키자, 그들은 그에게 조공을 바쳤다. 그 뒤에 알렉산드로스는 앓아 눕게 되자 죽음이 닥친 것을 알고는, 젊은 시절부터 함께 자란 대장군들을 불러, 죽기 전에 자기 나라를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열두 해를 다스리고 죽었다. 그의 장군들은 저마다 자기 영토를 다스렸다. 그들은 그가 죽은 뒤에 모두 왕관을 쓰고, 그들의 자손들도 그 뒤를 이어 오랫동안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세상을 악으로 가득 채웠다.
성경 마카베오기 상권 1장 1~9절
5.1. 이란의 평가
한편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전근대 이란인들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사산 왕조 시대 유행하던 것으로 알렉산드로스를 악의 화신으로 보는 관점이며, 둘째는 사산 왕조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정복 이후 등장한 것으로 알렉산드로스를 역사에 존재한 그냥 유명한 영웅 중 하나로 보는 관점이다.
전자의 견해는 주로 조로아스터교 경전이나 사산 왕조 당대의 기록에 의거한다. 이에 따르면 '로마인' 알레크산다르는 성스러운 경전들을 없애고, 성스러운 불꽃들을 꺼뜨렸으며, 이란을 쑥대밭으로 만든 악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이 악의 화신이란 말이 단순한 비유법이 아니라 악신인 아흐리만, 악룡 아지다하카, 투란의 왕 아프라시압 등과 함께 당당히 실제(?) 악의 화신으로 쓰여져 있다. 이렇게 사악한 알렉산드로스의 공격으로 이란에 혼란과 분열의 시대가 찾아왔으나, 이를 수습하여 이란에 질서와 정의, 종교와 신앙을 되돌려 놓은 것이 바로 아르다시르 1세라는 것이 사산 왕조의 공식 입장이었다.
반면 이슬람 세력의 정복 이후, 구체적으로는 10세기 이후 페르도우시의 샤나메나 여러 작가들에 의해 저술된 에스칸다르나메 등에 등장하는 에스칸다르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다르다. 에스칸다르가 사실 이란 혈통이라는 주장도 있고, 이란을 정복한 후에도 특별히 뭘 파괴하거나 사악한 짓을 저질렀다는 말이 없다. 오히려 패배자인 다라 왕이 부하들에게 암살당하면서 자기 딸을 에스칸다르에게 결혼시켜 왕위를 이으라는 유언을 남기고, 이란의 왕이 된 에스칸다르는 세계 각지를 정복하며 위대하고 현명한 왕이 된다. 나중 가서는 정복왕이 아니라 현자, 예언자라고 쓸 지경이다.
이 같은 변화의 원인은 에스칸다르 전설 자체가 유럽의 알렉산드로스 전설들이 수입/번안된 것이며, 그 과정에서 상당히 이슬람적/이란적 색채로 변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란이 타국 세력에 정복된 이후이고, 이란의 지배 세력이자 독자 정체성의 근간이던 조로아스터교 세력이 해체되었기 때문에 외국 침략자에 대한 혐오가 상대적으로 약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사산 왕조 시대에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증오가 상당히 종교적인 형태로 나타났음은 전술한 대로다.
현대 이란의 일반적인 평가는 "비록 적이었지만 솔직히 대단했다는 건 인정함" 정도이다. 워낙 오래된 일인 데다가,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의 공주인 록산나와 결혼하는 등 동서 화합을 모색했고, 키루스 2세의 무덤에 경의를 표하는 등 정복한 이후 페르시아 인들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정책을 폈기 때문에 현대 이란의 평가는 꽤 좋은 편이다. 때로는 그냥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인정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중세 이후에는 신화적인 존재나 위대한 왕으로 묘사한 경우가 굉장히 많으며 대표적으로 페르시아의 시인 니자미가 지은 '이스칸다르의 서'에서는 알렉산드로스가 매우 긍정적이고 영웅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다만, 이 동네도 모든 사람의 생각이 똑같을 수는 없으니 (칭기즈 칸과 함께) 페르세폴리스를 파괴한 '악마'적인 이미지도 물론 있으며 '영웅'적인 이미지와 양립하는 중이다.
6. 대중문화에서
일본 SF 소설 은하영웅전설의 주인공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의 주요 모델로 꼽힌다. 과감한 원정을 통한 정복 군주, 아름다운 외모, 동성애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친했던 지크프리트 키르히아이스 등. 무엇보다 최후도 대원정을 거의 마친 뒤 고열을 동반한 병으로 급속도로 체력이 떨어지며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점까지 충실히 반영되었다.
범용 TRPG 시스템인 겁스에 샘플로 등장하는 대체역사 평행세계중 하나인 '이스칸다르-2'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운 헬레니즘 제국이 12세기까지 건재한 세계라는 설정으로, 현실세계에서는 근미래 수준의 과학수준을 자랑한다. 이 세계의 전쟁은 완전한 기계화가 이루어져서 대부분 로봇들이 싸워준다. 다만 알렉산드로스제국 1극체제는 아니고, 아시아를 거의 다먹은 중국기반의 아시아 제국과의 양극체제 세계.
2004년에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알렉산더》로 재조명되었다. 콜린 파렐, 안젤리나 졸리, 안소니 홉킨스가 주연한 이 영화에서는 필리포스 2세의 암살을 올림피아스가 사주한 것으로 그리고 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헤파이스티온의 뜨거운 관계도 그려내서 영화 개봉 당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근데 이 영화는 학자들에게도 지뢰급의 취급을 받고 있다. 안습. 그러나 전투 고증 면에 있어서 영화는 모든 역사/군사학자들의 환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역사상 이렇게 '아름다운' 전투 고증은 흔하지 않다. 한 장면은 위의 벽화의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이 부분은 칭찬은 받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전형적인 헐리우드의 방황하는 10대마냥 그려진 것이 학자들의 불만을 샀다.
십자군 이야기로 유명한 김태권에 의하면 이란에서 구전되어 세계적으로 널리 퍼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의 모델이 된 왕이 바로 그라고 전해진다. 그리스 신화 쪽에서는 그 이야기의 모델을 미다스 왕이라고 서술해 놓았지만.
아이언 메이든의 Alexander The Great는 곡 제목 그대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그리고 있는데 8분 30초라는 긴 러닝타임에 서사적인 곡 전개가 일품이다.
히스토리에에서는 헤파이스티온이 동성연애의 대상이 아닌 알렉산드로스의 제2의 인격이란 설정으로 나온다. 거기에 페이지 맨위의 벽화의 모습과 닮은 사람이 올림피아스의 정부이자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친부로 의심되는 상황으로 나온다. 실제 역사에 기록된 알렉산드로스의 성격처럼 격의 없고 털털한 면이 있지만 실제 역사에 비해 유약하고 자신감없어하는 면이 보인다. 그의 유약한 성격이 공포에 몰릴때 무감정하고 짗궂은 헤파이스티온의 인격으로 교체되어 실제 역사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가끔 충동적이거나 폭력적인 경향을 보였던 성격을 보여줬던 면을 묘사하는 전개로 나아갈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그의 유약한 성격과는 별개로 전장에서의 전투력은 엄청나다.
Fate/Zero에서 '이스칸달'이라는 이름으로 서번트 라이더로 출전.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고. 여기서는 위에서 대립하는 꽃미남설과 추남 루저설 토대로 하면서 결국 무지막지한 떡대의 거구 중년남으로 그려놔 화제가 되었다. 다만 미소년과의 커플링 관련으론 나름 고전적인 고증을 따랐다 F/GO에서는 어린 시절의 면모를 간직한 채 라이더로 등장했다. 설정에 따르면, 어렸을 때는 미소년이었지만 제우스의 축복을 받으며 점점 떡대가 된 거라고... 여담이지만 알렉산드로스보다 상대적으로 거구였던 것으로 알려진 다리우스 3세는 이스칸달의 벌크가 강화된 덕분에 이 세계관에서는 신장 3미터짜리 광전사가 되었다.
영웅전희에서도 정복왕으로 나오긴 하는데, 이상하게도 성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동정녀로 나온다.
디오게네스와의 만남이 꽤 유명하다. 해당 문서 참조.
탈무드에서도 등장하는데, 유대인들이 믿는 정의에 대해 알고자 하는 그에게 쓰레기 속에 있던 금덩이의 일화를 듣고는 "나라면 그 둘을 모두 죽이고 내가 그 금덩이를 차지하겠다. 그게 나의 정의다"라 말했다고 한다.
어느 일화에 따르면 소규모의 병사로 협상을 할 때 본인의 군대들에게 낭떠러지로 행진하라고 하자 군사들이 그 명령에 따랐고 그 걸 보고 적장이 두려워해서 항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만화 하이큐의 오이카와 토오루와 이와이즈미 하지메의 생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생일/사망일은 같다. 별거 아니게 넘길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두 캐릭터 사이의 신뢰 관계 등을 보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설정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 아동 교육 소설 오딧셈의 수학 대모험에서 신의 아이 중 한 명 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의 전대 신의 아이로, 주인공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다.
고박봉성 화백의 만화 알렉산더1~3권에서는 붉은 머리카락의 미아동 미소년 미청년으로 나오고 전체관람가 만화라 동성애관련 술주정 등은 나오지않는다
샨샤의 알렉산더의 연인에서는 록산느와 만나기전 헤파에스티온과 관계를 맺고 아버지와도 관계를 가지는등 사랑과 상처를 받는역할로 나온다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에서는 여러 차례 그리스 문명의 지도자로 등장하였다. 문명 5에 등장했을 때는 위 벽화의 복장과 애마를 그대로 재현.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군주상을 반영해서 엄청나게 호전적이면서도 다른 정복 문명들과는 달리 종특때문인지 도시국가에게 공물요구나 정복을 좀처럼 하지 않으며 게임 중반만 지나도 세계 도국의 절반정도가 알렉산더의 동맹이 되어갈 정도로 골치아픈 문명. 문명 6에서는 그리스의 지도자가 페리클레스와 고르고로 변경되어서 안 나올거 같았지만, 마케도니아 문명에서 따로 등장하였다.6탄 특유의 그림체 때문에 그냥 시골청년 처럼 보인다.
모바일게임 크루세이더 퀘스트에서도 팔라딘 용사로 등장한다. 전형적인 탱커로서 탱킹만은 손에 꼽을 수준.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 템플러의 일원으로 등장하며 일타니라는 암살자에게 독으로 사망한다. 그리고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에서 그의 무덤이 알렉산드리아에 등장한다. 그리고 그가 생전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신비한 지팡이가 등장한다.
갓 오브 하이스쿨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차력으로 나오며 사용자인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아들 호세 나타샤 비욜레타 알렉산더로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직계후손이다. 참고로 호세의 차력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다.
스타크래프트 유즈맵 올랜덤 인물전에서 SS급 영웅으로 등장한다. 가장 유명한 정복 군주 답게 정복에 매우 특화되어있는 능력치를 지녔다. 유닛은 저글링이다.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 싱글 캠페인에서 알렉산더의 정복 루트와 전투들이 디테일하게 그려져있다.
7. 어록
가장 강한 자!
두려움을 정복하는 자가 세계를 정복한다!
내가 죽거든 손을 밖에 내놓아 남들이 볼 수 있게 하라. 천하를 쥐었던 알렉산드로스도 떠날 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할 뿐.
내가 파르메니온이었다면 받아들였을 것이오.
좋다. 왕들과 겨룰 수 있다면.
희망.
내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으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승리를 훔치지 않겠다.
우리의 가장 큰 승리는 패자들과 다르게 처신하는 것임을 그대들은 모르는가!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할 수 있는 한, 연기를 계속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