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읍 교회의 이원영 목사는 제정시 일본 관헌들이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거절하여 투옥되었다가 8.15 해방으로 출옥된 목사이다. 그는 1952년 제37회 장로회 총회 때 부회장이 되었고 1954년 남북한의 노회가 전부 합석한 제39회 안동 총회시에는 총회장이 되었다.
그때 남북한의 노회가 전부 합석한 총회였으므로 신사참배를 통회하는 시간을 가진 바 있었는데 제5일째 되는 새벽시간에 김윤찬 목사는 설교를 끝마친 후 이 목사를 향하여 수고의 뜻을 표하며, 무엇이든 말씀하기를 권했다. 그때 이 목사는 "나는 그때 나의 잘한 것도 자랑할 것이 없고 다만 마땅히 해야 될 주의 종으로 의무를 다한 것 뿐입니다."라는 말만 하였을 뿐 더 말하지 않았다.
옥중 수난을 자랑하며 지나간 참배에 대하여 맹책하는 출옥성도들이 많을 때 오직 의무를 다했을 뿐 자랑할 것이 없노라는 겸손의 담화는 참으로 청중으로 하여금 통회케 하는 동시 이 목사님을 더욱 존경하게 하였다. 겸손은 존경을 받게 한다.
당신의 마음에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마음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자신의 자랑만을 늘어 놓곤 합니까?
[빌 2:3-4] 3 :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1. 이제 3월에 들어섰습니다. 움추렸던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문턱에 들어섰습니다. 코로나로 부터 벗어나 맞이하게 되는 봄입니다. 새로운 비젼속에 새 봄을 맞을 준비가 필요합니다.
2. 카페지기의 거리에서 찬양하며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이 하나님의 은혜속에 잘 이루어지고 지경을 넓혀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목 : 사랑과 겸손 본문 : 빌 2:8
겸손을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겸손이 현대 사회에서는 자신이 높아지려는 생각을 밑바탕에 두고 치밀하게 가식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겸손의 진정한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겸손을 예의상 한번 양보하거나 자신이 높아지려는 수단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겸손이 사랑의 본질로서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엄격하고 주의깊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과 함께 성도들은 왜 겸손해야만 하며 어떤 겸손을 추구해야 하는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딤전1:15)
1) 자신의 죄인 됨을 알아야 함 우리는 죄인들입니다. 아니 우리가 죄인이라고 시인하기에 앞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3:10)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자기들이 죄인이라고 인식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음에도 지극히 당연시하고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임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근신하고 겸손하게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베드로는 주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라고 했으며, 세라는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도 "조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고 하면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2) 자기를 내세우지 않음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미치는 영향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자신의 일생을 한눈에 볼 수 있다면 행동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를 자기 P.R 시대라고 해서 흔히 좋은 것은 과대 포장하고 나쁜 점은 축소해서 말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하게 자기 자신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을뿐더러 자기에게 맡겨진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죄인 됨과 부족함을 알기에 가식적인 겸손을 추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섬기는 자의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눅22:27)
1) 주님께서 섬김의 모습을 보이심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남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남을 섬기는 자세의 어려움이 있으며 그러기에 섬김은 누구나 할 수 있는것이지만 누구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혹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섬김의 모습을 취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유익을 통한 섬김이 진정한 섬김의 모습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섬김은 누구나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섬김은 자신을 온전하게 낮추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섬김을 통하여 유익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섬김이며 참된 겸손의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섬김은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온전하게 낮추셔서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으며(참조,마20-28)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어 줌으로써 우리에게 섬김의 도리를 보여 주셨습니다.(참조,요14:113)
2)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심 세상의 집권자 중에는 자신의 임의대로 권력을 남용하여 빈축을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17)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으뜸이 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남의 종이 되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하지만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 결심을 굳게 하고서 노력하면 가능할 것입니다. 문제는 진정한 섬김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생각하는 대로 죽음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참조,빌2:8) 죽음까지도 감수하면서 우리를 사랑한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겸손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3. 사랑의 수고를 감당하는 것입니다(고전13:4,5)
1) 남의 유익을 구함 자신의 유익을 의식하지 않고서 겸손한 모습으로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남을 위하여 자신의 권리를 자진해서 포기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날과 같이 이기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남의 유익을 구하는 모습은 우둔한 행위로 비웃음을 사거나 의혹의 눈길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웃음, 질시, 의혹의 눈길도 진정한 겸손 안에서 남의 유익을 구한다면 그러한 것은 잠시뿐일 것입니다. 수치와 고난은 그 사람의 겸손이 진정한가 아닌가를 판가름하는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겸손은 그러한 수치나 수욕을 극복해 나갑니다.
2) 수고하는 사랑을 행함 바울은 사랑의 본질에 관하여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7)고 했습니다. 친구든 적이든 믿음을 가졌든 안 가졌든 간에 주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수고하는 사랑을 하여야 합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수고하는 사랑을 행할 때 진정한 겸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한 겸손을 가지고 있습니까? 남을 위하여 수고하는 사랑을 행하십시오. 주님은 이처럼 실천하는 겸손을 기쁘게 여기십니다.
결론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18:12)고 했습니다. 사랑의 본질로서 진정한 겸손은 그 자체만으로 끝나고 유익이 없다고 할지라도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어여삐 보시는 겸손의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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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도 주안에서 주님의 영광과 복음의 도구로 겸손하게 살게 하소서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