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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심
행 2:1-13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행 2:1-13 / [성령 강림]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지 일곱 주간이 지난 오순절이었다. 신도들이 한곳에 모여 있는데 2) 갑자기 하늘에서 강한 바람이 휘몰아오는 듯한 소리가 그들이 모여 있는 온 집안으로 울려 퍼졌다. 3) 그리고 불길이 혀처럼 갈라져 나타나서 각 사람 위에 머물렀다. 4) 그러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은 그들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다른 나라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성령께서 이런 능력을 그들에게 주신 것이다. 5) 그때 예루살렘에는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명절을 지키려고 여러 나라에서 건너와 머물고 있었다. 6) 하늘로부터 큰소리가 그 집 위에 들리자 많은 사람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보려고 달려왔다. 그들은 각각 자기네 나라 말이 제자들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것을 듣고 어리둥절하였다. 7)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들이 소리쳤다.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 아닌가? 8) 그런데 지금 이들의 말이 우리가 태어난 곳의 말로 들리다니! 9) 우리 가운데는 바대 사람, 메대 사람, 엘람 사람, 메소보다미아, 유대, 가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10)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 태생의 사람들이 있고,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지방 사람들, 로마에서 찾아온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 11) 거기다가 그레데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들까지 있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가 각기 자기 나라 말로 하나님의 크신 이적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있다니!' 12) 그들은 너무도 놀랍고 신기하여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하고 서로 물었다. 13) 그러나 그중에는 `술에 취해 하는 짓거리야!' 하고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말씀의 성취이며 초대 교회의 성장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목격한 사람들은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이해하지 못하고 그들을 조롱까지 합니다.
그들이 다같이(1) 오순절은 유월절을 지낸 지 7주가 되는 날을 기념하는 절기로 칠칠절로도 알려져 있으며, 장막절, 유월절과 더불어 유대 3대 절기 중 하나입니다. 이 때에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뿐만 아니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과 열방에 흩어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신 16:16). 대략 120명의 무리가(1:15) 다락방에 모여서(1:13)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2-4)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홀연히) 놀라운 현상이 벌어집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각 사람 위에 하나씩..’보입니다. 성령님에 대한 다양한 표현(바람, 소리, 불의 혀)이 있지만, 성령님은 비인격적 에너지가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다락방에 있던 모든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성도의 삶 속에 능동적으로 역사하시어 성도를 새로운 삶으로 이끄시는 성령님의 능력이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우시는 권능입니다(행 1:8).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제자들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인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에 와 있던 각 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방언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5-13) 절기를 지키기 위해 각 나라에서 찾아온 사람들은 제자들이 자기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놀랍니다(6). 제자들이 성령님을 따라 말하는 방언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언급했던 방언과는 다릅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방언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사람들은 제자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각 나라 언어로 선포되는 복음은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하는 복음입니다. 제자들의 출신이 어디인지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방언을 말하고 있는 제자들이 놀라울 뿐입니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이 두 가지 부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이한 현상과 증거하는 내용을 듣고 경솔하게 판단하기 보다는 신중한 입장을 보인 반면 어떤 사람들은 완악한 마음으로 제자들이 방언을 말하는 것을 술에 취해서 떠드는 것으로 조롱합니다.
적용: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이 볼 때 이해할 수 없고, 놀랍게 여겨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쉽게 판단하기 보다는 겸손한 모습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앤드류 매튜스는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가 아니라 일어난 일을 놓고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행복해질 수도 있고 불행해질 수도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날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기쁨으로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입니다.
호크마 주석
=====2:1
오순절 날이 - '오순절'이란 말에는 원래 '제50'의 뜻이 있다. 이 날은 유월절 주간의 안식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 지키는 유대인의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 신 16 : 1, 10, 13)의 하나이다(레 23 : 15, 16). 오순절은 유월절 기간 동안처음 익은 보리 곡식단을 제단에 드린 날로부터 시작하여 밀 추수로 끝나는 49일(7주)간히 추수 기간 다음 날이기 때문에 '칠칠절'이라고도 한다(출 34 : 22 ; 신 16 :10).또한 이 날은 처음 수확한 밀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제사를 드리는 절기이므로 '맥추절'(출23 : 16) 혹은 '초실절'(출 34 : 22)이라고도 향다. 그러나 1세기경부터 오순절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명절로 여겨지게 되었는데(Jubilees 1 : 1 , 6 : 17 ; TB Pesachim 68b ; Midrash Tanchuma 26c) 출 19:1에 암시된 연대를 추론해 볼 때 율법을 받은 날이 오순절날임이 분명하다. 이 절기는 대개유대력 시반(Sivan)월16일에 해당되는데 현재의 태양력으로는 5월말이나 6월 초순이 된다. 이 날에 흩어져 사는 모든 유대인들은 예루살롑에 와서처음 익은 모맥(牟麥)으로 떡을 만들어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다. 유월절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예표하는 것이라면 오순절은 신약 시대에 교회의 시작으로 영적 의미를 지닌다.
이미 이르매(* , 쉼플레루스다이)- 이 말의 원뜻은 '가득 채우다'(눅 8:23) 또는'(시간이) 거의 닥쳤다'라는 뜻으로 본절에서는'오순절 날이거의 가까워'라는 의미이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앞에서 언급뒤 3대절기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 절기들을 지켰다.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미루어보아 많은 사람들이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을 것이며 예수의 제자들은 그혼잡을 피할 뿐만 아니라 예수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한곳에 모였을 것이다. 한 곳에 모인 사람은 열두 사도들과 1:13,15에 언급된 무리들을 포함하여 상당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로 볼 수 있다(Alfor, R. C. H. Lenski).그러나 그들이 모인장소에 대해 본절에서는 확실히 언급하지 않는다. 1:13에서는 '다락'으로만 언급되어 있으나 12:12에서는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 언급되고 있다. 만일 본절과 1:13 및 12:12의 장소가 서로 일치한다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가의 다락방'이란 표현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모인 모든 무리들은 주님의 명령(1 : 4)을 따라열심으로 기도하면서 성령 강림을 기다렸던 것이다.
=====2:2
홀연히 하늘로 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 2-4절에는 성령 강림이 세가지 징표(徵表)로 나타난 것으로 기록한다. 곧'바람'과 '불'(마 3 : 11, 12)과 '방언'인데 이것들은 모두 유대인들이 전통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나타내는 표시로 여겨졌다. 본 구절에는'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로 성령의 임재가 상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바람'이 성령의 임재하심에 대한 징표로서 나타난 것은 어원적으로 볼 때 '영'(* , 프뉴마)이라는 단어가 '바람'(* , 프노에)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서 그 근거를 찾음 수 있다.이러한 연관은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중생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도 발견된다(요 3 : 8). 또한 구약 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바람'으로 표시한 곳이많이 있는 것을 볼 때(왕상 19 : 11 ; 시 104 : 4)이연관이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바람 같은'이라했기 때문에 바람과 성령이 동일하다는 의미는아니다. 다만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소리'는 성령의 능력과 그의 오심의 충만함가리키는 것이다(Stanley D. Toussaint). 뿐만아니라 이 말은 제자들이 지금까지 체험하였던것보다 더 친밀하고 인격적이며 강력한 방법으로성령께서 임재(臨在)하셨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말이다(Richard N. Longenecker).
저희 앉은 온집에 가득하며 - '온 집'은 헬라어 본문상으로 '그온 집'을 말한다. 이것은 이미 한 번 언급된 집을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1 : 13, 15 등에서 말한 집을 지시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집'을 혹자가 주장하듯이 성전의 집(성전 안에는 30개의 홀이 있었음)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Bengel, Bruce)세심한 관찰력과 주의력을 지닌 의사인 누가가 '성전'(* , 히에론)이란말을 왜 언급하지 않았겠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따라서 이 '집'은 앞서 언급한(1 : 13, 15)'그 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Alford , Knowling, Hervey, Toussaint).
=====2: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 '불의 혀'는 성령의 임재를 묘사한다. 이와 괸련하며 구약에서 여러 번 하나님의 임재를 불로 표현한것을 볼 수 있다(출 3 : 2-5; 13 :21 ; 24 : 17 ; 40 : 38). 복음서에서 세례 요한은 성령의 오심을 불과 밀접하게 관련시켜 말하고 있다(마3 : 11 ;눅 3 :16). 여기이서 '불의 혀'란 실제로 불이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불'구약 시대에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상징한다(Blaiklock, Ralph Earle). 그뿐아니라 '불'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기도 한다(창 19 : 24 ; 레 10 : 2 ; 민 16 : 35 ; 왕하 1 : 9-12 ; 사 47 : 14).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임하여 있더니 - 커다란 불덩어리 같은 것이 불의혀같이 나타나서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임했다.이것은 약속된 주의 성령이(1 : 4 ; 요 14 : 16-21,26 ; 15 : 26, 27 ; 16 : 7-15) '각 사람'위에 임했다는 사실로 요엘 선지자의 예언(욜2: 28-32)과 예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성위되었음을 보여 준다. 구약의 옛 언약하에서는 하나님의 임재는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한정(限定)되었으나(민 11 : 26-19 ; 삼상 10 : 6-12) 이제는 예수를 믿는 모든 무리 가운데 성령이 임하셨다. 이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각양 은사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것을 암시한다.
=====2: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 성령의 충만함은 성령 세례와는 다른 것이다. 성령의 충만은 여러 번 되풀이 될 수 있어서 구원의때 뿐 아니라 그 후에도 계속 일어날 수 있다(4 : 8, 31 ; 6 : 3,5 ; 9 : 17 ; 13 : 9,52). 그러나성령의 세례는 구원의 순간에 모든 믿는 자들에게 단회적(one for all)으로 일어난다. 그러면 성령의 충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울의 경우그의 서신에서 성령의 충만에 대해 꼭 한 번만(엡5 : 18) 언급하고 있다. 심지어 그가 성령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다루는, 이른 바 성령장이라고 할 수 있는 롬8장 에서도 성령 충만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특이한 현상이라 할수 있는데 바울은 오히려 성령의 인도나 지배(롬8 : 5, 9, 11, 14 참조)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뿐이다. 따라서 그는 성령의 인도나 지배를 받는상태를 성령의 충만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내주하신 성령(롬 8 : 9 ; 고전12: 3)의 지배와 인도함을 받는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공간적으로 성령이 채워지거나 다시들어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하나님은 바벧탑의 사건을 통해서 사람들의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그들을 흩어버리셨다(창11 : 1-9). 제자들이 성령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말하게 된 이 사건은 혼잡케 되었던 언어가 다시회복된 것으로서 새시대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주님의 부활의 소식이 우주적 로 확산(擴散)될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메이어(Meyer)외에 많은 비평학자들은 오순절 체험이 비역사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본절과 같은 이적을 저자가 미화시킨 것으로 주장한다(Bauer, Schnekenburger. De Wette). 이러한 주장은 근본적으로 본서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누가의 의도적 편집에 의한 것으로 았던 편견에서 비롯되었다. 이 견해를 따르게 되면 결국 본서가 바울이라는 인물을 부각시키고 미화시키기 위한 전기biography)에 불rhk 며 결코 영감받은 책이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비평주의자들의 견해는이런 면에서 배격되어야 한다. 한편 이 구절에서 성령의 세례를 말하지 않고 오히려 성령의 충만을 말하지만 이미 1 : 5에서 성령의 세례를 예언했고 또 11 : 15, 16에서는 성령 세례가 오순절에 일어났다고 회고하고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오순절에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의 사건이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했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이 사건이 교회가 세워지기 위한 처음의 특수한 상황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제자들에게 성령세례의 증거는 방언이었다. 그들은 성령을 받고 자신들이 아직 배운 바가 없는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고, 다른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했다. 이것들은 성령이 그의 경륜에 찬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강림한 증거들일 뿐 일반적이며 영속적인 은사는 아니다.
=====2:5
그 때에 - 이 시점은(1)유대인의 명절인 오순절을 지칭할 수 있고 (2)성령 강림의 때를 의미할 수 있다. 여기서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경건한 유대인이 - 누가가 '경건한'(* , 율라베스)이란 뜻 으로 사용한 이 말은 신약에서 유대인들에게만 사용되고 있다(8 : 2 ; 22 : 12 ;눅 2:25).유대인들은 본래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경건하게 살아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경건한 유대인'이란 표현은 이방인들을 가리켜 경건하다고 할 때(10 : 2) 사용되었던 말과 전혀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이표현은 오순절과 그 규례(민 28 : 26-31)를 지키기 위해 모인 유대인 중에서 율법을 잘 준수(遵守)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 유대인 중 다수가 바벧론에 의해 남쪽 유다가 멸망당한 후(B. C. 586)각국에서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 약 1 : 1 ; 벧전 1: 1)였다.한편 '우거하다'(* , 카토이쿤테스)는 말은 보통 한곳에 머물러 사는것을 뜻한다. 특히 헬라어 본문의 9절에서 각 지역에'거주하는 사람들'을 가리킬 때 이 말이 사용된것을 볼 때. 어떤 사람은 예루살렘에 거주했던것으로 짐작할 수도 있다(De Wette). 그러나 8-11절의 내용이 외국에 거주하던 '디아스포라'암시하므로 오순절의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온 나그네였을 것이다(Meyer, Alfoed, Knowling, H. Marshall).
=====2:6
이 소리가 나매 - 이 소리는 바람 소리(2절)인지, 방언으로 말하는 소리(4절)인지 주석가들 간에 견해가 각기 다르다. 그러나 ' 소리 '를 뜻하는 헬라어 '포네'(* )가 보통 인간의 소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후자가 더 타당하다(Black, Marshall, Lake, Neil, Bruce).
큰 무리가 모여 - 이는 4절의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소리를 듣고 큰 무리가 모여들었던 것을 뜻한다(Robertson).이로 보아 제자들이 머물러 기도헹던 장소가 예루살렘 성 안에서 많은 사람이 붐비는 장소에 위치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 '듣고'(* , 에쿠온)란 미완료시상으로서 무리들이 소리를 들은 시각이 한참 방언하고 있을 때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제자들이 방언이 다락방에서 처음으로 일어났고 주변의 골목과 안뜰에서 계속 일어났으며 마지막에는 예루살렘 성전 경계 지역까지 퍼져 나갔던것을 암시하여 주고 있는 듯하다(Richard N. Longenecker). 따라서 제자들의 방언은 잠시 동안이 아니라 상당히 오랜 시간 지속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방언'(* , 디알려토스)은 '자신들의 언어'(NIV, NASB)로서 고전 14장에 언급된 성령의 은사(恩賜)인 방언은 아니다. 각 사람은 자신들이 거주하던 나라의 언어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던 것이다.
=====2: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 '놀라'(* , 여시스탄토)란 말의 원뜻은 '어떤 장소에서 떠난다'는 뜻인데 입을 다물지 못하는 놀라움을 의미한다. 또 '기이히 여겨'(* , 에다우마존)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그 놀라움이 점점 커져서 어떤 사건이 뜻하는 바를 어떻게 설명할지 몰라서 당황하는 표현이다. 그들은 방언을 말하는 제자들이 갈릴리사람(1 : 11)인데다가 또 배우지 못한 자들이면서도 그와 같이 자신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심히 놀란 것이다.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 이 첫째 질문은 제자들의 출신에 관한 것이다. 갈릴리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뛰어난 언어 구사력(驅使力)이 없는무식한 자들로 여겨졌으므로 나다나엘도 빌립에게 갈릴리에 속한 동네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요1 : 46).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 다른 나라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모여든 사람들은 놀라움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2:8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것 - '각 사람의 난 곳'은 9-11절에 기록되어있는 곳을 가리킨다.
=====2: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 - 이사람들은 유대의 동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그리고 이들 지역은 과거 앗수르인들이 북쪽 이스라엘의 열 지파로부터 포로로 잡혀온자들을 이주시켰던 지역으로(왕하 17 : 6) 가장 먼저 디아스포라(Diaspora) 유대인들이 생겨난 곳이었다. 그 후에도 느부갓네살 시대에 유다의 포로들로 말미암아 그 수는 더욱 증가되었다(단 1 : 1, 2)그들은 나중에 바사 왕국이 쇠퇴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팔레스틴으로 귀환(歸還)하지 않고 살던 곳에 머물렀다. 이 지명에 대해서는 서론지도 '1세기의 근동' 을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우리'는 바대와 메대 그리고 엘람이란 곳에 사는유대인들인지 아니면 그곳에 살면서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인지 분병하지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곳에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추정한다(Bruce, Ralph Earle, Hervey, W. Neil). 그러나 10절 하반절의 진술로 미루어 보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뿐 아니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도 포함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 메소보다미아 - 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 강 사이의지대로 비옥한 초생달 지역(Crescent)으로 잘알려져 있다. 유대인들은 그 지역에 자리잡고있던 바벧론 제국에 의해 B. C. 589년 이후에 포로로 잡혀가서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메소보다미아와 그 인접지역에 정착해 살던 유대인들에 대해 많은 것들을 언급하였다.
=====2: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 아시아와 가바도기아의 중간에 위치한 로마의 행정 구역이었다.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 유대인들은 B. C. 6세기초엽부터 계속 애굽에 거주해 왔다. 예수 당시 애굽에는 유대인이 백만 명 가량 살았는데 알렉산드리아의 다섯 구역 중에 두 구역의 전 주민이 유대인이었다고 한다(Philo, on Flaccus 6, 8).애굽의 톨레미 1세(Ptolemy )는 그의 왕권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하여 많은 유대인들을 구레네에 정착시켰는 그때에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의 여러 지방에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6 : 9 ; 11 : 20 ; 13 : 1).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은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와 동격(同格)으로 봐야 할 것이다(R. C. H. Lenski). B. C.2세기 경에 로마에는 유대인 거주지역이 있을 정도로 많은 유대인이 있었다. 본문의 사람들은 B. C. 62년에 폼페이(Pompeii)에 의해 포로로 잡혀왔다가 후에 자유케 되었던 자들로 볼수 잇다. 본절에서 로마에서 왔던 사람들 중에 나면서 부터 유대인들이었던 사람과 이방인 개종자들이 '둘다'(NVI와 NASB 는 both를 사용함)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로마에서 이방인들을 개종시키는 유대인의 활동이 상당히 봤발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 이란 곧 재종자로 말하는데 유대인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고 그들의 의식을 준수한다는 점에서 유대인들과 교제를 누리도록 허용된 이방인을 가리킨다.
=====2:11
끄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 그레데는 발칸 반도 남방의 섬이고 아라비아는 홍해에서 유브라데에 이르는 지역, 곧 시리아와 팔레스틴 동쪽 지방에 있는 나바티안 왕국(the Nabataean)을 가리킨다. 누가는 지금까지 15개국(또는 지방)에서 살던 유대인 또는 이방인 개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였던 것을 일일이 열거했다. 서론리 지도를 통혀여 보는 바처럼 열거된 그 나라들은 당시 지중해를 중심한 근동과 유럽지역에까지 획장되어 있었다. 이것은 앞으로 복음이 이처럼 세계 각국에 각 나라의 말로 전과될것을 상징하는 것이다(4절 ; 창 11 : 1-9 참조).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 이 말은 8절에서말했던 것을 다시 강조한 말이다. 그 강조점 소유격 '우리의' 란 말에 있다(R.H.Lenski).'우리'가 각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 모두를 지칭하므로, 본절에서는 그들이 속한 지역의 방언을 강조하기 위해'우리의'란 소유격이 첨가되었다.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 여기에서 말한 '하나님의 큰일을'(* , 타 메갈레이아 투데우)이란 그리스도의부활과 같은 특별한 사실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하셨던 구원의 전 사역에 관한 것을 말한다(H.Bavinck).사도들은 성령이 부어지자마자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나님의 큰 일'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성령부어주시사 이 큰 일을 깨닫고 자랑하며 하나님께감사하고 찬양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러한 이적(異蹟)은 이미 예수가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것으로(요 16 : 13. 14) 본절에 특별히 언급되어 약속의 성취를 보여준다.
=====2:12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 '의혹하여'라는 말은 '완전히 당황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디아포레오'(* )의 미완료형으로 신약성경에서 누가만 사용한 독특한 용어다(5 : 24 ; 10 : 17 ; 눅 9 : 7 ).이 동사의 시제가 암시하듯이 그들은 계속해서 놀라고 당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어찐 일이냐 하며 - 모여든 무리들은 사도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의심을 가진사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을 보인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그런데 바로 다음 구절에 조롱하는 어떤 이들이 있었음을 볼 때 부정적인 시각을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13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 '어떤 이들'이 9-11절에 언급된 사람들을 가리키는지 또는 그외 다른사람들을 가리키는지 명확지않다.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팔레스딘 지역에거주하는 유대인들도 그 곳에 많이 왔을 것이다(14절). 따라서 누가는 조롱한 자들이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 방언하는 소리를 들은 불특정인임을 지칭하기 위해 단순히 '어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 바울이 아덴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주제로 전 도하는 것을 듣고 기롱한 사람들이 있었다(17:32).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으로 말하면 '미쳤다'고 생각할 위험이 있다(고건 14 :23). 이처럼 '자연인은 저들의 무지와수치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초자연적인 사실을 자연적인 원인으로 돌리는 법이다'(Bengel). 한편 '새 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글류코스'(* )로 '감미로운'을 뜻하는 '글뤼퀴스'(* )에서 파생된 용어다. 본래 '글류코스'는 발효(醱酵)되지 않은 포도즙을 의미했다. 본절에서는 아마 발효되기 시작한 감미로운 포도즙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 설 교 >
오순절과 성령강림
박영선 목사
사도행전의 기록 내용 중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 뭐냐고 하면 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일 것입니다. 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한 신자의 신앙의 색깔과 모습에 상당한 차이를 가져오게 합니다. 소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갖는 의미를 성경이 요구하고 지시하는 대로 이해하는 것이 사도행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드디어 오순절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시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같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있던 120명의 신도들에게 성령이 내립니다.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며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가직 우리가 살펴봐야 하는 문제는 이것입니다. 성령강림의 모습, 성령충만의 모습이 모든 신앙인이 가지는, 신자가 필수적으로 경험해야 되는 경험이냐 하는 것입니다. 즉 신자라면 누구나 이러한 성령충만의 확인과 분명한 경험, 그리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는 방언과 성령의 어떤 나타남이 그들에게 있어야 되고 인식되어져야 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성경이 그렇다고 얘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한국 교회가 사실 지난 70년 중반부터 80년 초까지 어간에 가장 많은 혼돈을 자아냈던 것이 이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혹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은 얻지만 성령을 받는 것은 조금 더 고급한 신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고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 방언을 하게 된다는 식의 가르침이 한동안 한국교회를 강타했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사 성령의 나타냄과 성령께서 주시는 어떤 초월적인 간섭, 이런 것이 우리에게 감지되는 일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없으면 저급한 신자이고 누구나 꼭 이것을 경험해야 하는 필수적인 것이며 성령의 강림은 꼭 그런 형태로 나타나느냐 하는 데에 대해서는 저는 견해를 달리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이 문제를 취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밖에 나가서 그들이 보고 들은대로, 여태껏 배운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수난과 부활을 선포합니다. 그 일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놀라서 너희들이 왜 그러느냐 하면서 너희들이 다 새 술에 취했다라고 그들을 묘사합니다. “다 놀라며 의혹하며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행 2:12)
이 사람들이 완전히 돌아서 저런다, 말하자면 자기네들이 가진 주장과 견해를 저렇게 미친듯이 주장할 수 있겠느냐 싶어서 새 술에 취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그들에게 설명하는 그 유명한 베드로의 설교가 나옵니다(행 2:14-21).
요엘서에 나오는 예언을 인용해서 그들이 지금 처한 위치와 그들의 경험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인용된 17절 이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지금은 말세입니다. 말세란 시간적으로 끝이기 이전에 순서적으로 끝이라고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가 끝이니까 이 끝의 순서를 마지막으로 남긴 기간은 다 말세라고 했습니다.끝이 되기 위한 전 사건은 무어라고 했습니까? 재림이 끝이니까 초림이 끝이전의 최종적인 사건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초림하셔서 이제 승천하셨으니까 남은 일은 재림하시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초림하셔서부터 말세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17절의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라”는 말씀이 ‘그 때가 되면 누구든지 성령을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겠다’는 얘기냐 하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내 남종과 여종에게 성령이 부어지는 것을 보거든 말세인 줄 알아라’가 되는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지금 우리 한국 교회는 그동안 이 문제가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주께 구하면 성령을 받는다’라고 이 구절이 이해되고 있는데 이 구절은 다른 뜻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거든 이제는 말세인 줄 알아라’ 이런 말도 됩니다. 이것은 오순절 성령 사건이 예수를 믿는 모든 신자가 경험해야 되는 신앙 경험의 전형이 되는냐 아니면 오순절 성령 사건으로 인하여 이제부터는 ‘새 시대’라고 개막을 선언하는 것이냐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다시 보십시다.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든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29-33)
이 대목에 오면 조금 더 확실한 힌트가 나옵니다. 오순절 성령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사역이 완성되었기에 이제 성령이 오실 수 있었다는 쪽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껏 잘못 생각한 식으로 오순절 성령 사건을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성령을 받고 그것도 충만함으로 받을 수 있고 그리고 기도하고 열심히 구하면 방언도 하고 병 고침도 있고 예언하는 은사도 받을 수 있다, 마음의 기쁨이 폭발하는 경험들을 할 수 있다. 이 사건이 이런 것을 위한 기록으로, 그것을 위한 사건으로 의도된 것이 아닌 것 같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 두 가지 사건을 보면 그것이 아니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거든 이제부터는 새 시대가 시작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일의 결과로 이 일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 부분을 조금 더 추적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을 보시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1절). “곧 내가 저희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23-26절)
결국 구원을 얻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설정하고 계신 것은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 안에 계시고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 안에 계신 것같이 우리를 하나로 부르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데 가장 큰 방해가 되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게 하시기 위한 선결 문제는 우리르 죄에서 꺼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동거하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속하러 십자가를 지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승천하셨습니다. 가시면서 요한복음 14장에 있는 바와같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하리라.”(1-3절)
처음 오신 것은 우리와 함께 있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없애려고, 죄에서 구원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오실 때는 같이 살려고 오실 것입니다.
궁극적인 구원의 목표라는 것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죄를 없이 해야 하며 우리를 죄인의 자리에서 부터 구원해 내야 됩니다.
죄를 씻어낸 것은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드디어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성령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이제 함께 하시기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다 완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것에 궁극적인 목표와 이유를 에베소서 2장에서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20-22절)
하나가 된다는 것이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우리가 지어져 가는데 그 일을 위하여 먼저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지금 예수 안에서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시작하는 첫 번째 개막 테이프를 자르는 것, 공식적인 이 일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인 것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사 드디어 이제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제 우리는 하나가 된다를 공개적으로 역사와 온 우주 앞에 선포한 사건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인 것입니다. 이 사건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제 새 인간이 되었다. 그리고 새 인간으로 완성될 것이다에 첫 테이프를 끊는 것과 같습니다. 즉 이제 신자란 존재론적으로, 운명론적으로 전혀 다른 사람이다 하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 오순절 성령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개인들이 어떤 경험을 했느냐 하는 것은 부수적으로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는 역사적이고 새로운 장을 여는 공식적인 개막을 선언하는 행위였기 때문에 성령이 오신 것이 공개되고 객관화되고 외적인 표현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죠? 결혼식을 숨어서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부부입니다라고 모든 사람에게 공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에는 공개적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성령이 와 계시는 것이 공개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외적인 표현이 있고 어떤 감동이 있고 경험적인 것으로 오신 것을 설명하지 않고 다르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가장 확실한 증거는 우리가 여기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맨 정신으로 누구의 협박에 의해서 앉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가정의 평화를 위해 부인 따라 나오신 분도 있겠습니다만 그것도 하나의 핑계입니다. 어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을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항복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이란 그 만큼 괜찮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세상이 두쪽이 나도 하는 것이 인간의 고집입니다. 그것 빼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에 차를 태워주기 위해서 왔다가 밖에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앉아서 기다릴 겸 들어왔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직 여러분 마음에 만족스러운 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둘러대는 것이지 제가 보면 여러분 마음 속에도 성령이 와 계시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렇지않고 여기에 와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오순절 성령강림 때와 같은 어떤 외적인 표징들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식으로 오도되어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것이 없으면 성령이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이 나를 다른 사람에 비해서 덜 사랑한다, 다른 사람에 비해서 나를 좀 열등하게 취급을 한다고 하는 이상한 생각에 말려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사도행전 2장을 보시면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날 삼천 명이나 구원을 얻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 날에 대한 사도행전의 기록을 다시 봅시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37-42)
분명히 사도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받는다’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구원의 대열에 참여했는데 방언했다든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는 기록은 거기에 없습니다.
이것으로 인한 논쟁거리가 뒤에 나옵니다. 즉 사마리아 전도 사건과 에베소 교회에 있었던 사건을 말하면서 구원을 얻는 것과 성령이 내리시는 일이 구별된 사건으로 등장해서 구원을 얻는 것과 성령이 임하는 것은 다르다는 아주 중요한 논쟁거리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 구언을 얻으면 꼭 성령을 받는 것은 아니다. 성령을 받기 위해서 따로 기도해야 되고 성령을 받는 자는 좀 다른 고급한 신자다라는 식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제대로 믿으면 성령이 임하고 성령이 임하면 꼭 방언을 한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바로 맨 처음 사건, 맨 처음 얻은 신자들, 여기서도 그들이 구원함을 얻었으되 사도 베드로가 약속한 것같이 성령을 선물로 받는 다는 약속까지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원을 얻은데 성령의 임함에 대한 성령받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 사람이 되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의미의 성령을 받는다는 약속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즉 그 신앙 고백을 갖고 있는 자에게는 성령이 와 계십니다. 그는 이제 그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 자신이 자신의 운명을 다 결정하는 자가 아닙니다. 창세기 6장을 봅시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1-3절)
말하자면 성령을 완전히 거두어 가 버리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드디어 살지 않기로 하십니다. 우리가 타락하고 나서 하나님과 분리가 되고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러운 자가 되었고 죄악 속에 묻혀 있는 자가 되었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악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 하나님께서 맨 처음으로 하신 일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 와서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구약식으로 성전에 가서 지성소에 제물을 갖고 들어가야만 하나님을 한 번 만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성령이 와 계시는 신인 합동의 존재론적으로 어디까지가 성령 하나님이고 어디까지가 인간인지를 모르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을 봅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위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9-11절)
이것이 신자의 존재론입니다. 신자의 존재는 이제 인간적인 측면에서만 평가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과 합작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망하면 성령 하나님도 망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나는 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여기 성경에 있는 식으로 하자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인하여 산 것입니다. 나는 못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절망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것으로 우리라는 존재를 평가받지 않고, 같이 계시는 성령 하나님의 의로우시고 거룩하시고 전능하시고 영광스러우시고 온전하신 것도 이제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망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포기할 수 없으며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혼자 결정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성령이 와 계십니다.
그런 존재로의 부름에 대한 첫 선언의 개막 테이프를 끊는 사건이 성령강림이라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갖는 의미는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겪는 것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같은 역사적 사건의 반복은 아닙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인간에게서 더나셨던 하나님이 이제 다시 오사 하나 되는 일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시고 시작하신 사건이고, 그 일은 우리르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완성되는 목표까지 가는 시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로 갈 것입니다. 가느 과정에 여러 단계와 가는 길마다에서 성령이 우리 안에서 함께 하시며 이 길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이 필요하다면 나타날 텐데 그것이 꼭 시작일 필요만은 없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각자에게는 시작의 모습으로서 성령강림이 체험될 수 있고 중간의 여러 과정으로 성령이 와 계시며 간섭하시는 것이 체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꼭 방언일 필요도 없고 그래서 눈물 흘리면서 회개하는 모습일 수 만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이것은 부부가 결혼식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사랑하던 사람이 드디어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식 날이야말로 모든 사람들 앞에 이 사람이 부부가 된 것을 선언하는 날입니다. 공식적으로 모든 것이 허락된 날이므로 그날이 가장 행복한 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보면 어느 때가 가장 부부 관계가 좋습니까. 그것이 만일 연애할 때라면 여러분은 결혼 잘못하신 것입니다. 살면 살수록 행복하고 더 사랑해야지 살아갈수록 재미가 엇다면 그것이 무슨 결혼입니까. 물론 연애할 때보다 결혼해서의 생활이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연애 때는 생활이 없지 않았습니까. 사랑을 주고 받는데 생활이 개입이 안 됩니다. 그때는 연지곤지 바르고 용돈 들고 만나서 놀려고만 하는 계획으로 시간을 잡아놓고 만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밤낮 행복했지요. 만나면 고기만 썰고 택시만 타고 다니고. 그러나 지금은 택시를 타기보다는 전철을 이용합니다. 생활이 개입되었기 때문에 치장하고 노는 것이 많지는 앟지만 살면 살수록 잘했다, 더 사랑한다 하는 것이 부부생활의 의도된 축복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꿈결같이 그때가 늘 좋아요.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언젠가도 예를 든 것처럼 연애할 때가 가장 크게 사랑을 하고 좋은 것 같지만 그때는 사랑이 뭔지 모를 때입니다. 그때는 불길만 요란합니다. 마치 산닭 위에 휘발유 붓고 불질러 놓은 것 같습니다. 불길은 요란하게 치솟았는데 불 꺼진 다음에 먹으려고 하면 털밖에 그을린 것이 없습니다 껍질도 다 안 타고 속은 먹을 수도 없습니다. 결혼을 해서 서로 깊은 사랑의 경지에 가는 것은 마치 삼계탕 할려고 일 주일 정도 삶아 놓은 닭 같지 않습니까. 어디가 뼈고 어디가 살인지 모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작입니다. 결혼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것은 그때의 순수함, 열정, 방향성. 이런 뿌리를 연결하자는 의미에서 돌아가자고 해야 합니다. 그때의 감격으로만 돌아가자는 의미에서 초대교회를 운운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마치 늘 소녀 시절이 좋았어, 연애시절이 좋았어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 인생을 사는 동안에 열매를 맺을 생각은 하지 않고 반짝거리다가 꽃만 피우다 돌아가려는 것과같이 그것은 일종의 허영입니다. 그것은 책임없는 일이고 더 깊은 경지의 기쁨과 영광된 문제들에 대하여 모르는 소치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잘못하면 신자들도 이런 불행이 있습니다. 사람이 언제 제일 감격스러우냐 하면 예수 모르던 사람이 중간에 예수 믿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기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밤낮 그것만 하는 사람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 에수 믿게 하고 그 감격만 연결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사명으로 부름 받은 사람이 한다면, 말하자면 전도자로서 그러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우리 신앙의 체계에 있어서도 그 연애 때의 감정, 결혼식 때의 행복같은 그런 감정의 연장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이제 성령은 우리 안에서 다르게 역사하십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거룩을 사모하게 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더 열심을 갖게 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더 아느 일에 나를 몰아가며 삶의 모든 분야에서, 나의 인격의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으로 몰고 가는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주를 내가 사모하는 것들에서 어떤 식으로 경험이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방언이나 병 고치는 것으로만이 아니고 회개와 눈물로만이 아니고 어떤 산을 옮기는 능력과 기도하는 역사로만이 아니라 나를 아버지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게 하고 거룩한 성전으로 완성되어 가는 일에 조그만 진전과 보충과 나아감으로써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적인 모습으로도 나타날 것이며 필요하다면 기적의 모습으로도 나타날 것입니다. 밤낮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말이 맞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강림의 의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가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여기서부터 더 발전적이고 지속적이고 완성적인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이 감격에만 묻혀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사건이 갖는 목표와 방향성을 향하여 우리의 발걸음을 떼어 놓는 자가 되어야 되고 그런 의미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룰 줄 아는 자로 서야 됩니다. 나의 감격과 행복을 구하지 말고 완성을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할 말이 있고 꺼내 놓을 것이 있는 자가 되지 말고 만들어져 가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사도행전 2:1-4
우리는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서 이제 우리만으로는 우리의 존재를 평가하지 않는, 말하자면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와 계셔 새 사람이 되었다 하는 신자의 존재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있을 때마다 등장하는 싸움거리는 이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면 방언을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추적을 해서 신자가 갖는 바 신자 된 특권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방언을 꼭 한다 하는 문제는 사도행전에서는 중요한 싸움거리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첫 성령강림에 있어서도 강조된 것이 방언이었고, 사도행전 8장에 가면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전도를 해서 그곳 사마리아 사람들을 예수 믿게 했는데 나주에 사도들이 그 얘기를 듣고 그곳을 방문합니다. 그때 사도들에 의해서 그들이 다시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전도받고 구원얻은 일이 있고 그 다음에 다시 나중에 사도들이 권하여 성령을 받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가면 에베소 교회에 이미 그 교인들이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로 말미암아 다시 안수를 받고 성령을 받아 방언을 하는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교파는 아니지만 ‘오순절파’라고 하는 파가 있었습니다. 특별한 교파는 아니고 뜨거움과 열심, 어떤 체험들과 은사들을 강조하는 신앙 노선을 걷는 자들을 오순절파라고 일컬었습니다. 그 오순절파는 장로교 안에도 있고 천주교 안에도 있습니다. 그런 신앙을 견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아주 중요한 근거가 되어서 누구든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것 이상의 것들이 있다, 성령을 받고 성령이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은사들을 받는 것이 있는데 그거을 사마리아 전도 사건과 에베소 교회 사건을 근거로 듭니다.
구원은 얻었지만 성령 받는 일은 다른 문제다, 성령을 받으면 분명히 성경 어디에나 강조되는 것처럼 꼭 방언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 문제가 사실이 그러한가? 오순절 성령강림에서의 방언 사건이, 말하자면 성령이 오시면 꼭 나타나느 필수적인 현상이냐 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2:4을 보시면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사마리아 전도로 말미암아 일어난 방언과 에베소 교회에 있었던 방언은 여기에서 일어난 방언과 달라 보입니다.
지금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며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행 2:5-11)
여기서 말하는 방언은 외국어입니다. 지금 우리 신자들이 알고 있는 방언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쓰는 대화용의 말이 아니고 신령한 언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그런 방언이 아니고 외국어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에서 방언이 두드러졌다고 하는 것은 성령이 오셨다라는 증거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심으로써 이제 우리에게 무엇을 시키시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이 방언이 그런 의미에서 성령이 와 게시다는 표징이 아니고 성령이 오셔서 시키시려고 하는 어떤 일 때문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언을 해야만 성령이 오셨다는 표라는 것은 조금 맞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외국어를 주시느냐 하면 문제는 자명합니다. 사도행전 1:8의 약속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성령은 이런 의미에서 주시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지금 이 방언은 성령이 오신 증거가 아니라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너희가 해야 할 일이 잇다. 그 해야 할 일, 땅 끝까지라는 전도의 책임의 영역을 위해서 주어진 결과인 것입니다. 그렇지요? 성령이 임하신 증거가 아니라 성령이 임하셔서 이제 우리에게 시키시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외국어가 등장하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외국어를 할 능력을 가졌다’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명령하시기를 이제 이 복음은 유대인만의 것이 아니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의 모든 족속에게 허락하신 것이라는 표로서 성령이 임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먼저 받은 신자로서의 표가 아니라 이제 내가 너희들이 그동안 알고 있었던 것과 같이 유대인만의 주가 아니요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요 온 천하 만인의 아버지가 되려 하시며 나도 유대인만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 천하 만인을 구하러 온 메시야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내가 그들을 모두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져 이 일을 해결했으니 이제 너희는 가서 이 복음을 전하라. 유대인만이 아니다 온 천하 만인에게다. 그래서 성령이 오시자 이국어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초점을 어디에 두느냐 하면 외국어를 했다, 기도를 해서 성령을 받아 외국어를 할 것이다라가 아니라, 이제 성령이 임하시고 주께서 구속 사업을 완성하신 그 혜택을 누구에게까지 허락한 것이냐를 강조하려는 것이 오순절 성령강림에서 더 중요한 요점입니다. 내가 성령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방언을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구원을 얻는댜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며 대상은 어디까지냐 하는 문제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은 초대교회 유대인들에게는 사실은 획기적이고 어떤 의미에서 충격적인 하나의 사건인 것입니다.
구원이 유대인만의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만인의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는 것에 대한 사도들이 받은 성령의 감동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갖게 합니다. 지금 사도들이 성령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외국어를 하게 되었다 하는 것은 그들이 성령을 받을 만한 실력이 있었고 그들은 다른 사람과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보너스로 외국어를 할 수 있게 해줬다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 모두는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얻으며 민족적인 구별로써 우열의 개념이나 혹은 더 이익받고 덜 이익받는, 그런 장해도 없는 구원의 대상이 전 민족 땅 끝까지라는 지적을 여기서 받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 성령강림과 방언을 허락하신 데에는 그 대상이 땅끝까지요 각 족속이라는 뜻보다 좀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뜻과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18절). 이 말씀에 응함입니다.
이제 오순절 성령강림을 이런 차원에서 봐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임하심을 체험하고 그 충만하심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외국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언이 일차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쓰이는 언어이지 신령한 언어가 아니라는 것부터 이해를 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방언이라는 것을 만들어낸 것은 그 방언이 성령이 임했다는 증거이기보다 이제 구원의 대상이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인 문턱을 넘어선 뜻이라는 것을 일차로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더 확인해야 하는 것은 이 일은 이미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기로 한 그 약속 속에 더 큰 의도와 목적하는 바가 있어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일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그 약속의 성취입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방언을 주시고 나가서 전도하게 하는 것과 성령이 직접 한 심령을 두드리어 그를 얻는 것과 어느 쪽이 더 완벽하고 쉽겠습니까. 성령이 직접하는 것이 낫습니다. 여러분,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을 공부시켜서 대학 입시를 보게 하는 것과 선생님이 직접 시험 문제를 푸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성적이 좋겠습니까. 물어보나마나 입니다.
그러면 왜 학생들에게 공부를 시켜서 학생들로 하여금 시험을 보게 합니까. 목적이 정답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보내느냐가 아닙니까. 지금 외국어도 그렇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무슨 외국어가 필요합니까. 성령이 꽉 잡으면 그만이지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여기에 있는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그들이 외국어를 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은 외국어를 했다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같이 이제 주님께서 우리를 보내어 그의 일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의 성취입니다. 그 속에는 우리를 어떻게 요구하시느냐가 있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가서 죽어가는 영혼을 붙들어 오는 것만이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같이 시험 문제에 정답을 쓰는 것만이 문제라면 선생님들이 가서 직접 시험보는 것이 제일 빠릅니다. 그럴바에는 성령이 가셔서 일하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예수 믿는 사람 때문에 예수 믿는 데에 도움을 받았습니까. 손해를 봤습니까.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 주변에서 예수를 믿습니까. 혹은 안 믿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 대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꼴보기 싫어서 안 믿는 사람이 그만큼 또 있습니다. 그렇죠? 여러분 남편 중에서 혹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있다면 오늘 집에 가서 조용히 물어보십시오. 왜 안 믿느냐고. 틀림없이 당신 때문이라고 그럴 위험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쓰십니다. 그것은 얼마나 큰 비밀인지 모릅니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 속에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관계와 같은 관계로써 우리를 이제부터 대접하고 초대한다는 놀라운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좀더 확실히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성경이 묘사한 것 중 대표적인 것을 추적해 봅시다.
그 사건이 얼마나 오순절 성령 사건과 흡사한가를 보면 여러분이 참으로 놀라운 기쁨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봅니다. 마태복음 3장을 봅시다.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13-17절)
이것은 아주 재미있는 사건입니다. 주님게서는 성부 하나님과 뜻을 같이 하시고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안타까움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러 오십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곧 성부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성자 예수님의 일에 대하여 성부 하나님은 늘 기뻐하시고, 성부 하나님의 깊으신 뜻에 대하여 성자 하나님은 한 번도 이의 없이 순종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십니다. 그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 다 하나님의 뜻과 합치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이제부터 성자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성부 하나님이 인정 하신다는 공식적인 선언이기도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소리까지 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지금 오순절 성령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그들에게 외국어를 준 것은 결국 이들에게 내가 너희들 모든 민족들에게 말할 수 있게 했다라고 함으로써 이들이 하는 말은 하나님이 전하고자 하는 말이요, 이들이 전하는 내용은 내가 기뻐하는 일이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만일 하나님 앞에 흡족한 자들이 아니라면 그 가는 길을 막아서지 않겠습니까. 마치 발람이 하나님의 뜻을 못 알아 듣자 천사를 내려 당나귀를 막듯이, 만일 하나님이 보실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하나님 편을 들기에 부적합한 자라면 하나님이 우리의 입을 열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외국어를 그들에게 주사 사도행전 2:5 이하에 나오는 것같이 일본에서도 오고 대만, 싱가폴, 필리핀에서도 오고 소련, 몽고에서도 왔는데 우리나라 말로 다 듣는다 하는 그 얘기는 지금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 내려오신 데 대해서 성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이 아들은 내가 기뻐하는 자요 너희들은 이 아들의 말을 들으라’고 히시듯이 지금 이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하는 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이요 우리의 발걸음과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비밀들을 펼치시기로 하며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비밀과 온갖 뜻들을 함께 나누시기로 한 대상이다 하는 뜻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더니 성령이 오시더라, 성령이 오시니까 방언이 나오더라 그것으로 기뻐할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기뻐할 문제지만 그러나 그것 이전에 이쪽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부르셨느냐.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전서 2장으로 가면 우리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9절)
이것을 이렇게 오해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늘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니 너희를 불러내신 자를 선전하며 전도하는 일을 책임맡아야만 된다’라고 이해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전도할 책임이 있고 사명이 있다는 그 차원만이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고, 너희가 어떤 자들이 되었기에 너희의 입술과 너희의 인생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자가 될 수 있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얼마나 높은 존재가 되었기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우리에게 다 맡겨 놓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실수 많고 부족하고 완악한 우리들이 도대체 어떤 부름을 받았기에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과 우리를 고쳐내시는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면서 마음 놓으시고, 기뻐하신 것같이, 우리가 도대체 어떤 존재가 되었기에 하나님이 땅 끝까지 모든 족속을 구언하는 일을 우리에게 맡겨 놓으시고 마음이 놓으시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우리 같은 것들한테 구역장을 맡기시고 어떻게 하나님이 안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대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가가하는 것보다 성경이 얘기하는 대로 하자면 우리가 괜찮은 사람일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보자면 한심하지만 말입니다.
요한복음 8장을 보십시다. 예수님의 사역을 다시 한 번 이런 시각으로 보십시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게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29절)
여기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과 분리된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언제나 지키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또 이렇게도 합니다. 성자 예수님에게 성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이유는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고 기대에 어긋나는 일을 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 쪽에서 성자 하나님을 보면 언제나 흡족하고 만족스럽고 기쁜 것입니다. 예수님 쪽에서 봐도 그렇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에 어긋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게 주님은 아버지의 보냄을 받았고 말하자면 지금 우리도 그렇게 주님이 보냄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존재냐 하면 성자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또 우리는 우리를 보내신 이의 기쁘신 뜻을 늘 기쁨으로 순종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드문데 성경에서는 그렇다고 합니다. 여러분 실제로 그런지를 잘 기억해 보십시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여기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마태복음 28장을 봅시다. 성령이 오셨으니까 성령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방언을 하고 전도를 하게 되었다 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무엇과 대응이 됩니까? 조금 전에 요한복음 8장에서 본 바와같이 아버지께서 항상 나와 함께 계시도다, 항상 나와 함께 계셔서 지키시고 나는 또한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늘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늘 나와 함께 하신다 입니다.
하나님께서 늘 나와 함게 하시기 때문에 내 멋대로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내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 편입니다.
신자는 주님께서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는 자이기 때문에 내 멋대로 할 수 없는 자이며 그래서 성령이 와 계시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주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를 놓아두시지 않는 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지금 성령이 오셨더니 마음의 기쁨이 있고 이런 은사가 나타났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실 수 있도록 우리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음 놓고 땅 끝까지 모든 족속의 영혼을 우리에게 맡기실 수 있어서 우리에게 방언을 허락하시고, 지금 오순절 강림 식으로 얘기하자면, 그래서 신자들은 뛰어나가 기쁨으로 그 일을 시행하는 자 되고 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느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자신의 존재가 자기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실수하고 실패합니다만 이제는 우리가 우리 하나만으로 우리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우리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어긋난 일을 하실 리가 없습니다. 내가 성령을 섭섭하게 하고 안타깝게 하는 일은 있어도 성령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안타깝게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로 지금 부름을 받았고 그래서 모든 것이 허락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가 오순절 성령강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대목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제 어떻게 인정하시느냐 할 때 마태복음 16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게 복이 있도다 이를 내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내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6-19절)
부부같은 존재입니다. 제가 파란색을 좋아하는데 제 아내가 베이지색을 좋아한다면 제가 무슨 색의 옷을 입을 것 같습니까. 우리가 저녁식사를 하러 나갔는데 저는 돈까스를 좋아하고 제 아내는 스파게티를 좋아하면 무엇을 먹게 됩니까. 어느 쪽이 보통 양보를 합니까. 양보한 쪽이 남편이든 아내이든 양보할 때 할 수 없이 양보합니까. 기쁨으로 양보하게 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를 그렇게 부르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내가 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다 안하실 리야 없지만 말하자면 우리를 그렇게 부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내가 싫다고 하면 하나님도 싫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하면 하나님도 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물론 거기에는 하나님이 좋다고 하면 우리도 좋아하는 그런 부분이 생깁니다. 죄의 문제에 관한 한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을 더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여튼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우리의 인생에 우리의 개성들을 쓰시면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히 의미있는 일입니까.
우리에게 방언을 하게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그의 주민등록증과 인감도장 및 저금통장까지 맡기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오순절 성령강림에서 교회에 베푸신 축복입니다. 허락하신 특권입니다. 여러분은 신자가 되었다는 것을 무슨 일을 해야만 된다, 죄를 졌느냐 안 졌느냐 이런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차원에서만 돌아볼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그 부르심을 입은 상급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그 선포에 대하여 여러분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깊은 감사가 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그 영광과 특권을 놓치지 않고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동역하시기를 원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대등한 관계로 여러분의 의견을 들으시며 여러분의 인생을 요구하고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감사와 찬송이 있고 정말 승리와 기대 속에서 여러분의 인생을 거는 것입니다. 남에게 이 특권들을 빼앗기지 마시고, 허락된 것들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시간만 보내는 게으른 신앙생활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순절과 성령강림
겔 37:1-6 행 2:1-4 / 이정익 목사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2천 년 전 오늘 세상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며 두려움의 삶을 살던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기다렸다가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간절히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행 1:4). 그때 10일 만에 강하고 바람 같은 소리가 나더니 성령이 임하셨습니다(행 2:1-4). 그 후 그곳에 있던 제자들에게 변화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성령은 소리는 있고 힘과 능력으로는 나타나는데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성령을 설명할 때 바람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구약성경 요엘서 2장 28절에는 “성령을 부어 주리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요엘 선지자가 기원전 800년경에 예언한 것이 신약시대에 와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세 위를 갖고 계십니다. 이 세 위는 서로 다르지만 본질은 하나입니다. 이 세 위가 서로 일체를 이루는 것을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또한 헬라어로 성령을 프뉴마(pneuma)라고 합니다. 이는 거룩하신 영이라는 뜻입니다. 이 성령이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비둘기 같이 임하셔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광야시험 중에도, 각종 기적을 행하실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예수님의 사후에 이 세상에 오셔서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눈으로 보이게 오셨지만 성령님은 눈에 보이지 않게 오셔서 섭리하시고 역사하시고 운행하시며 활동하셨습니다. 그렇게 2천 년 전 오늘,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셔서 오늘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을 성령강림주일이라고 합니다.
오순절의 의미
오순절은 헬라어로 펜테코스트(Pentecost)라고 합니다. 이는 “50일의 제삿날”이라는 뜻입니다. 이 오순절에는 4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❶ 맥추감사절입니다. 유대인들은 여름 보리를 거둔 후 첫 곡식을 드리며 맥추감사절을 지켰습니다(출 23:16). 새 곡식을 주심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제를 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하루만 드리는 감사절을 맥추절이라고(출 23:16)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유월절이 지난 50일째 날이라 해서 오순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또한 유월절이 지난 7주후 다음날이어서 칠칠절이라고도(레 23:15-16) 했습니다.
❷ 십계명 돌비를 받은 날입니다. 유대인들이 출애굽 해서 시내광야에 도착한 때가 3월(출 19:1)이었는데 그 날이 출애굽한 지 50일째였습니다. 그날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이 적힌 돌비를 받았습니다. 그 계명 속에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맺은 계약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내 백성이다.” 이것이 계약 내용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이날을 감사절로 지켰습니다. 영적 말씀을 받은 날로 지킨 것입니다.
❸ 성령이 강림하신 날입니다. 2천 년 전 오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며 기다렸다가 성령을 받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여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분명 그냥 기도한 것이 아니라 몸부림치며 했을 것입니다. 성령받기 위함뿐만 아니라 자신의 미래가 너무 불투명했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면 이렇게 절박할 때가 오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때 진정으로 기도하며 진정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그때 잊고 있었던 것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세계 2차 대전 때 영국이 프랑스군을 지원하고자 29만 명의 대군을 출격시켰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프랑스군이 독일군에게 완패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영국군도 전멸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며 급하게 도버해협을 건너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독일군은 영국군을 전멸시키기 위해 총력으로 그 뒤를 쫓아왔습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군대에 쫒기는 상황과 같았습니다. 영국에서는 그 소식을 듣고 도울 수 있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전혀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때 영국 국왕 조지 5세가 다음과 같은 방안을 선포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길뿐입니다. 모든 국민은 영국군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영국 국왕이 백성들에게 기도의 날을 선포하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때로 환란이나 절박함은 재앙이 아니고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때 영국 국민이 기도할 때 그냥 형식적으로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몰살당할 위기에 있는 29만 명 속에 내 아들들이 들어 있는데, 내 조카가, 내 동생이, 내 형이, 내 손자가 들어있는데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겠습니까? 그런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위기의 때에 드려지는 기도, 내 이기적인 기도가 아닌 공동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그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그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영국군이 도버해협을 건널 때는 더 없이 좋던 날씨가 독일군이 건널 때 갑자기 돌변했습니다. 그래서 애굽군대가 그랬듯이 갑작스런 폭풍우로 인해 독일군대는 대파를 당했습니다. 그때 그 모습을 본 영국군은 도착 후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날 승리한 이유는 기도의 날을 선포하고 모두가 간절하게 중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얼마나 절박하게 기도했겠습니까? 그 기도는 분명 회개의 기도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절박하면 회개 기도하게 됩니다. 자신들의 무능과 교만됨과 원수맺음과 죄지은 것에 대해 회개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회개를 좋아하십니다. 회개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 받는 조건이 바로 먼저 회개하는 일입니다. 제자들은 그날 자신들의 무능함과 추함과, 교만, 몰이해와 불신을 철저하게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오순절 날에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❹ 교회 탄생일입니다. 성령강림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고백하며 모여서 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임 공동체를 교회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신앙인들이 모인 공동체로서 그 모임을 의미합니다. 오늘 교회가 공식적으로 탄생하게 된 날이 바로 오순절 날입니다. 구약시대의 언약 공동체라는 것도 바로 교회 개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 교회개념을 총회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총회를 히브리어로 카할(신 9:10, 10:4, 18:16)이라고 하는데 그 때에는 백성들이 다 모였습니다(출 19:5-6). 그들은 정기적으로 년 3차례 유월절 때, 맥추절 때, 수장절 때(출 23:14-17) 모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구약시대에는 카할, 즉 언약 공동체라고 불렀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성령강림 하신 후 그를 주로 고백하고 믿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 공동체를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이 공동체는 혈육공동체도 민족공동체도 아닌 예수와 연합된 성령이 내주하시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신약공동체 일원은 모두 형제이고 자매였습니다. 이 공동체는 혈육공동체나 민족공동체 차원을 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도행전 2장처럼 네 것 내 것이 없이 서로 나누고 함께 하며 섬기며 하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성령강림 후에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후대에 이 날을 “메시야가 완성된 날”이라 해서 “화이트 선데이(White Sunday)”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날에 하얀 드레스를 입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날이 교회가 탄생한 날이고, 그리스도인이 세례 받음으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부활절과 오순절에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성령을 보내심
성령을 보내심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❶ 선교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제일의 목표와 관심은 세상구원입니다.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제일 먼저 한 일은 복음을 전하고 증거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목적과 할 일을 발견하여 내 양을 먹이라는 뜻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고 다녔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베드로가 성령을 받은 후 설교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날 베드로는 유대교의 역사와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일목요연하게 설교했습니다. 그랬더니 3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회심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때부터 오순절은 기독교의 절기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시대마다 준비된 사람들을 선교하게 만듭니다. 성령이 입을 열게 하시고 전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는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복음을 받은 선교사들로 인해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의 보내심은 선교가 제일목적입니다.
❷ 희망입니다. 당시는 절망의 시대였습니다. 그렇기에 성령의 오심은 희망이었습니다. 에스겔서를 보면 그 당시는 민족의 압제 생활로 미래가 막막하고 암담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조차 없었고 현실은 너무 비참했습니다. 그때 성령은 그를 이끌고 골짜기로 가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거기에는 버려진 해골들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은 이스라엘의 현재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자 마른 뼈들이 움직이더니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환상을 본 에스겔은 백성들을 향해 외쳤습니다. “이제 회개하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실 것이다.” 요엘서에서 요엘도 외쳤습니다.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고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라.” 이사야도 외쳤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피곤치 아니하며 걸어가도 곤비치 아니하리라.” 성령은 능력의 영이고 소망의 영이며 새 힘과 새 길을 여시는 희망의 영이십니다.
❸ 연합입니다. 성령은 일치와 연합을 이루시는 영이십니다. 성령이 강림하실 때 가장 먼저 나타난 변화는 하나를 이룬 일이었습니다. 먼저 언어의 통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12개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다락방에서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언어가 달랐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자 그들이 통일된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 이는 바벨탑 사건 이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언어의 통일이었습니다. 또한 뜻의 일치도 이루어졌습니다. 그곳에 12개국에서 온 사람들이 모였으나 모두 한뜻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도에 매진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강림하는 곳에는 언제나 하나 됨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교회 공동체가 가져야 할 사명은 바로 하나를 이루는 일입니다. 성경도 하나 됨의 아름다움을 강조합니다. 시편 133편을 보면 형제의 연합을 말씀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이는 오늘 교회가 지향하여야 할 목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편 133편은 성전에 올라가며 불렀던 노래의 가사입니다. 12지파로 흩어졌던 형제들이 한곳으로 모여듭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러 줄지어 올라갑니다. 그때 이 시로 하나 됨을 꿈꾸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형제가 연합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마치 보배로운 기름이 아론의 수염타고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1-3).” 이는 임직식 장면을 연상한 표현입니다. 기름은 제사장이 임직식 때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헐몬산의 이슬은 모든 식물이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수를 말합니다. 이는 땅을 비옥하게 해 주는 생명수입니다. 즉 형제가 함께 한마음으로 연합하여 살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공동체는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 서로 노력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고 뜻입니다. 그렇기에 분열과 갈등을 서로 막아야 합니다. 그래야 개인도 살고 가정도 살고 사회도 살고 나라도 살고 교회도 살고 기업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사시대에는 백성들이 타락하였고 하나님을 떠나 서로 분열하였습니다. 그 결과 나라가 망했습니다. 솔로몬의 타락으로 이방신을 수입하였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나라가 남북으로 둘로 분열되어 망하게 되었습니다. 분열은 망하게 되는 길입니다. 그렇기에 교회공동체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서 가운데 하나 되라는 메시지를 여러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잃은 양 비유(눅 15:3-7)는 이탈한 양 한 마리 때문에 99마리 양들이 고난 받는 모습을 역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마리 양 때문에 나머지 99마리가 불편합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가 나머지 전체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잃은 동전 비유도(눅 15:8-10) 그렇습니다. 잃어버린 동전 하나 때문에 나머지 9개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탕자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이탈하거나 낙오하거나 병들면 모든 가족에게 아픔을 주게 됩니다. 이는 모두 공동체 정신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공동체를 세우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오늘 개신교회는 분열이 심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성찬에 두는 신학자도 있습니다. 대부분 교회는 일 년에 두세 번 성찬식을 합니다. 그것도 떡은 잘게 썰고 포도주는 작은 잔에 각각 나누어 줍니다. 성찬식은 원래 주님과 연합됨을 확인하고 지체됨을 확인하는 예식입니다. 그래서 이전 성만찬은 큰 떡에서 떼어먹고 큰 잔에서 나누어 마셨습니다. 그래야 주님 몸에서 우리 모두가 지체됨을 확인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학자 본회퍼는 “성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책에서 “영적 공동체 안에서는 인간과 인간의 직접적인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그 말은 교회 공동체에서 예수가 없이 인간만 있는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공동체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중재됩니다. 누군가를 도울 때도 내가 가진 것이 많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형제의 약점을 고치고 치료하는 것도 오직 주님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내가 형제의 약점을 고치겠다고 비판하고 지적하는 것은 형제의 상처만 크게 할 뿐입니다. 그냥 우리는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내 아픔을 치료하고 고쳐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만약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다 해도 내가 고치려고 하기보다 주님이 고쳐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라도 그를 고쳐주십니다. 그것이 공동체의 유지법입니다.
나의 이야기
성령이 내 인생에 임재하시는 것은 가장 큰 복입니다. 그렇기에 성령의 임하심은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입에서 고백하고 증거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내가 변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삶에 변화가 생깁니다. 내 의지가 아닌 성령의 힘으로 사역하고 살고 일하게 됩니다. 그때 나를 초월하고 가족을 초월하고, 내 것을 초월하게 됩니다. 또한 때로 나를 포기하고 희생도 하게 됩니다. 이는 성령의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또 내가 성령의 사람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조화의 주인공, 일치의 주인공, 화해의 주인공, 행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불화의 요인의 근성과 뿌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또한 욕망과 투기, 탐욕과 음란함의 뿌리도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만이 다스릴 수 있습니다. 성령만이 그 뿌리를 뽑을 수 있습니다. 그때 내가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에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 성령을 힘입으십시오. 이 성령에 흠뻑 취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은혜로 살아가십시오. 그때 우리 모두 주님의 충실한 제자들이 될 것입니다.
불같은 성령 바람같은 성령
이필재 목사
지금 아이티에는 갈보리교회 선교사 11명이 계약을 하고 열심히 사역하고 있습니다. 금년 10월에 제가 아이티에 가기로 약속해 놓고 있는 중에 이런 지진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저는 지진 지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진도 7.0의 지진이면 이 갈보리교회 같은 건물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집니다. 이번 아이티 지진에 대통령궁도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견고하지 못하게 건축된 빈민국의 건물들이라 여지없이 그 주변이 다 무너진 것입니다. 우리 선교사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계속 연락을 시도한 결과 오늘 아침 한통의 이메일이 저한테 왔는데 도미니카 최광규 선교사님을 거처 저한테 다시 온 것입니다. 깔리테풀리오리도 목사님이 보내신 스페인어로 되어있는 이메일 밑에 최광규 선교사님께서 한국말로 다시 번역해서 보내주셨습니다.
『 존경하는 이필재 목사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와 저의 가족은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은 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일원 중 목사님 한분이 사망했고 많은 목회자의 자녀들이 죽었습니다. 많은 신실한 성도들이 죽었으며 모든 선교사들은 지금 집과 가산을 잃어버린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이티는 이번 지진으로 피로 얼룩진 폐허가 되었습니다.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형제 된 깔리테풀리오리도 목사 』
이런 내용의 이메일이 왔습니다. 아마 미국이 재건 약속을 철저히 하고 있으니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지만, 갈보리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회의해서 소식이 오는 대로 다른 곳을 거치지 않고 우리 갈보리교회 선교사들을 돕는 일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도미니카 최광규 선교사님과 통화를 했는데, 어느 정도 수습이 되면 자신이 들어가셔서 갈보리교회 선교사 11명 중 지금 한분이 돌아가시고 남은 선교사 10명의 형편을 다 알아본 후 보고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또 이번에 제 개인적으로 간증거리 하나가 생겼습니다. 카리브호텔에 투숙한 한국인 3명이 연락 두절이라고 하는 방송이 계속했고 한국 신문과 미국 신문에 모두 나왔고, TV에서도 계속 방송했었습니다. 미국 신문에는 이름까지 나왔는데 한국 신문에는 이름은 나지 않고 성과 나이와 신분이 세 사람이 났습니다. 결국 카리브호텔도 무너졌는데 분명히 한국사람 세 사람이 그곳에 투숙했는데 호텔은 무너지고 연락 두절이 되면서 ‘이것은 틀림없이 사고가 생긴 것이다.’ 모두 이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사업을 늘 같이 하는 쟁쟁한 사업가들이고, 몇 천 명씩 종업원을 둔 사업가들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제 사위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죽었는지 살았는지 연락이 안 되니까 정말 답답하고 마음이 많이 쓰였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안에 있을 때 지진이 나서 호텔이 무너졌지만 이 세 사람은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잘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젯밤에 미국에 잘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으며 여기서 정말 걱정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했는데 괜찮으냐고, 마음의 충격이 심하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사위는 저보다 믿음이 좋습니다. 저더러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아버님이 늘 설교하셨으면서 왜 걱정하셨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아이티에 계속 사업을 할 것이냐?” 질문하니 “그럼요. 계속 사업할 겁니다.” 사실 미국이 관세를 삭감해주는 나라가 세계에서 몇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업가들은 더 끌리는 겁니다. 제품을 미국으로 만들어 들어가면 관세를 거의 삭감해 주니까 사업가들은 그게 매력이 있어서 거기를 찾아가서 그것을 하려는 것입니다. 사위가 하는 말이 “사업을 계속 할 것입니다. 아주 좋습니다. 더군다나 오바마가 이번에 약속을 했기 때문에 더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거기 가서 보니 그곳 아이들이 얼마나 불쌍하게 자라는지 우리 아이들과 그곳 아이들을 비교하니 천국과 지옥 같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생기는 수입으로 그 어린이들을 도와주는 프로그램을 이미 월드비젼과 하루 만에 예약하고 왔습니다.” 지난주에 그런 일이 저한테 있었습니다. 제가 늘 광고하는 게 있습니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은 새벽 기도회 나가라는 겁니다. 저는 경험한 것이 하도 많아서 늘 자신감 있게 말합니다. 한번 새벽기도 나가 보십시오. 교인들 가정에 얼마나 간증 거리가 많은지 목사가 시키는 것은 절대 해롭지 않습니다.
지난 주일은 성령님의 성격을 물로 표현했습니다. 오늘은 성경말씀에 성령은 불과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주일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배경은 장막절인데 오늘은 오순절입니다. 오순절은 유대인의 추수감사절입니다. 쌀농사는 없고 보리농사이기 때문에 맥추감사절로 지킵니다. 유월절이 지난 후 50일째 되는 날이기 때문에 오순절이라고 부르는데 성경에 여러 가지 이름이 나옵니다. 오순절, 맥추절, 수장절, 칠칠절은 모두 다 똑같은 날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첫 열매는 하나님의 것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첫 수확 곡식은 가지고 와야 합니다. 일주일을 그렇게 지켰습니다. 민수기 28장 26절에 있습니다.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라. 수송아지 두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한 마리와 일 년 된 숫양 일곱 마리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또 출애굽기 23장 16절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그리고 말씀이 계속됩니다.
17절에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유월절, 장막절, 오순절에는 예루살렘으로 다 모이라고 했습니다.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 동안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만 정성껏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일 년에 세 번씩은 다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데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바로 사람이 많이 모인 그 때를 맞추어서 구원 역사로 비추어지게 된 것을 성령이 지금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성령님의 역사가 그렇게 특별 사건에 일어나게 되었는가?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가장 사람이 많이 모였을 때 가장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전달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에는 사람들이 지금 이곳에 어떻게 많이 모여 있는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5절에 보면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고 했습니다. 외국에 있는 사람도 믿음이 좋은 사람은 장막절이 되면 유대 나라로 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다 모이는데 이것은 아마 이슬람이 더 잘 압니다. 이슬람의 특별절기에는 외국에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짓밟혀서 죽는 사람도 생길 정도입니다. 이처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데 해마다 그럽니다. 유대 나라에 세 절기도 그런 모습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온 세계로 퍼져나가게 된 하나님의 계획이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있는데 오늘은 어떤 일들이 벌어졌느냐 하면 이 사람들은 갈릴리 지방 사람으로 막 방언으로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이 “아니, 갈릴리 사람들이 어떻게 세계 각국에서 온 우리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가?” 바대인, 메대인, 애굽인, 구레네, 리비야, 로마, 아라비아인들인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그래서 성령의 역사는 온 세계를 대상으로 지금 사역하고 있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이 “네가 성령을 받게 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네 증인이 되라”고 하신 말씀이 2장에 와서 구체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성령 역사가 일어났다고 오순절 교회가 생긴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난 성령 사역의 특징은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불이다. 불 같은 성령이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에게 임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출현이 불로 나타난 것은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세요.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는데 어디서 만났습니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계신 하나님과 이야기했습니다.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침략했을 때 군사들이 엘리사 숙소를 다 에워싸고 이제 엘리사는 잡혀 죽게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화 되었는데 다 물리쳤잖아요? 그 물리쳐준 하나님의 군대를 성경이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불말과 불병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불로 나타났습니다. 우리 인류 역사 가운데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사람은 엘리야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승천할 때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이 성경에 불말과 불수레라고 했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대결했던 엘리야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불로 내려서 소멸해 버렸습니다. 레위기 성경에 보면 “성전 안에 항상 불을 피워 꺼지지 않게 하라.” 그래서 항상 불을 피웠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불같은 하나님의 성령 임재가 항상 교회 안에 이렇게 타고 있어야”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성입니다.
우리 개신교에는 그런 것이 없지만 가톨릭에 들어가 보십시오. 들어가자마자 왼쪽이나 오른쪽에 촛불이 수백 개입니다. 그래서 헌금 좀 하고 촛불 하나 켜고 기도하고 나옵니다. 그 불을 왜 켜놓은 겁니까? 그곳이 어두워서 켜 놓은 것이 아닙니다. 구약대로 하나님의 임재성을 나타낸 것입니다. 출애굽기 24장 17절에 산 위에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다고 했습니다. 제일 큰 불의 역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밤에 불기둥으로 나타나셨을 때입니다. 그러면 왜 불로 나타나셨는가? 불의 성격이 있습니다. 불은 소멸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불이라면 모든 물체가 없어져버립니다. 잿더미가 되고 재가 날아가면 아무 것도 안보입니다. 간혹 우리 집안에 지저분한 쓰레기를 소각해 버릴 때가 있습니다. 태워서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농촌에는 불태워버려야 되는 것들이 많이 있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 성격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죄에 대한 소멸의 능력이 불 같은 성령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령은 불과 같아서 지저분한 인간의 모든 죄를 흔적도 없이 보이지 않도록 다 사라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은 죄가 다 없어지는 겁니다. 정결의 성격입니다. 구약 시대 제사 지낼 때 성경에 보면 고기는 먹고 내장, 이런 것은 다 불태워서 하나도 보이지 않게 했습니다. 그 뜻은 지저분한 짐승의 똥이나 내장 같은 죄를 모두 다 소멸해서 보이지 않게 하는 불 권능의 사역을 말합니다. ‘성령은 불 같은 것이다.’ 불은 심판의 상징입니다.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 성을 심판하실 때 불로 심판하셨다고 말씀하셨고 예레미야 23장 29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이 아니하냐?” 세상의 모든 마귀의 세력은 불 같은 성령의 역사로 소멸되어짐을 성령의 성격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무엇보다 뚜렷한 불의 성격은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해지면 열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에게 주어진 성령의 사역은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부인이 아무리 말려도 안 됩니다. 남편이 아무리 말려도 안 됩니다. 또, 자식이 말려도 안 되고 부모가 말려도 안 됩니다. 불같이 되어버린 걸 어떡합니까? 또, 누구든지 당하지 못합니다. 죽음도 안 되기 때문에 순교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상 역사에 기독교를 가장 잔인하게 핍박한 국가는 로마입니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잔인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는데 그 중에서 우리가 다 기억하는 것은 원형극장 사건입니다. 공고합니다. “몇 월 며칟날 원형극장에서 기독교인들 사잣밥 되게 하니까 구경 오라.” 다 써 붙입니다. 그러면 잠실야구장 같은 곳으로 사람들이 가득하게 모입니다. 이때 붙잡아 온 기독교인들을 벌거벗겨서 운동장 가운데로 몰아놓고 며칠씩이나 굶주린 사자들을 풀어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동물의 왕국이라는 TV 프로그램을 잘 보는데 사자들이 다른 동물을 순식간에 잡아먹어서 뼈다귀만 남습니다. 원형극장에서는 사람도 그렇게 했단 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들이 그 사실을 구경하고 있으니 인간으로서 이게 할 일입니까? 거기 끌려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죽을 것을 알고 끌려가지 모르고 끌려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지금 생각해 보세요. 오늘 잠실 운동장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 내가 장본인으로 끌려가서 사잣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가시겠습니까? 어떻게 갈 수 있는가? 불 같은 성령이 그때 주어졌으므로 누구도 말릴 수 없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큰 축복이야. 아무나 순교하나? 하나님이 순교자로 정해준 사람만 순교하는 건데. 할렐루야!’ 그래서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들어가기 직전까지 나는 이제부터 예수 안 믿겠다고 말하면 그 시간으로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 하고 풀려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충만의 문제를 어떻게 표현했는가? “나는 날마다 죽노라.” 365일 죽을 각오로 사역을 한다고 그 뜨거운 열정, 불 같은 용기가 결국 어떻게 했습니까? 로마를 뒤집어엎어 버렸습니다. 지금 세계 교회 중심은 로마가 되었잖아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옛날 부흥회는 실감이 나는데 요즘 제가 부흥회를 다녀보면 그렇게는 안하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 제가 청년 시절에는 교회 부흥사가 오면 통성기도를 하게하고 항상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불 받아라!”라는 말이었습니다. 성령 받으라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 충만, 불 같은 성령! 어떤 경우에 주어지는가? 잘못 생각하면 ‘제자들은 이때 비로소 성령을 받은 것인가?’ 아닙니다. 12사도, 120사도 이 과정을 한번 정리해 보면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통해서 주님의 제자 관계성이 이루어졌는데 주님과 함께 사역하는 동안에 성령 체험을 하고 메시아성에 대한 확실한 고백을 했고 사도가 된 것에 대한 기쁨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정말 사도가 필요한 주님의 십자가 사건 때는 다 도망을 갔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흩어진 제자들을 일일이 찾아 다시 모아놓고 이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성령 받은 사람들이 다 도망가고 말았으니 이제는 제2의 성령의 역사를 기다려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아버지의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을 받게 될 것이다.” 만약 그때 제자들이 또다시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면 십자가 사건도, 부활 사건도 주님의 놀라우신 기적 모든 사역도 전설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 이 성령 강림 사건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새로운 역사 출발이 되었는데 여기서 우리가 정리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객관적 지식이 주관적 체험으로 승화되어 하나님의 역사에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성에 대해서도 절대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신앙생활은 안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이시다.” 하지만 안 믿습니다. 알고 있는데 안 믿습니다. 객관성 있는 진리이지만 나의 주관적 체험으로 연결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헤롯이 서기관들을 불렀잖아요?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베들레헴입니다.” 정확하잖아요? 너무 잘 알잖아요?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이 한 사람도 메시야에게 와서 경배를 안 합니까? 보십시오. 예수님의 기적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그토록 놀라고 신기하면서도 예수님은 안 믿습니다. 배고팠을 때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가지고 기적을 일으켜 다 같이 먹었잖아요? 먹은 사람들은 죽도록 예수 믿어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기적으로 먹었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주관적 체험으로는 연결이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성령님의 인도로 예수를 믿고 구원 받는 자리에 왔을 때 그 사람은 틀림없이 성령 받은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 사도들에게 주어진 성령 충만의 사건은 어떤 성격인가? 1단계가 은혜적 역사라고 말합니다. 내가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 생활을 하는데 2단계는 은사적 역사입니다. 성령을 받고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에게 은사적 충만의 역사가 내림으로 하나님이 목적하는 어떤 사역에 몸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힘입니다. 제가 제 자신을 들어 쉽게 말씀을 드리면 저는 어려서 성령 체험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성에 대해서 확실한 고백을 하고 주님을 영접하고 아주 기뻐서 신앙생활 잘하고 교회에서 날마다 살다시피 하는데 그토록 평생가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10대 후반, 20대 초반 시절에 나에게 또 다른 성령의 뜨거운 체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이건 뭐야?’ 바로 은사적으로 나로 하여금 목사가 되게 하는 은사적 성령의 역사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이것을 받은 겁니다. 지금 사도들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되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그냥 두면 또 흩어지고 말아.” 불 같은 은사적 성령 체험을 줄 때 비로소 그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은사적 성령 충만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습니다. 똑같지 않고 똑같은 목적이 아니라 각자 다른 목적의 충만 역사로 “이때는 네가 이것을 해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충만 역사를 주시기 때문에 그것을 실행하는 단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의 충만 역사가 급하고 강한 바람 같다고 했습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성령은 불 같은 것이고 바람 같은 것이지 불이나 바람 자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설교하실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하시면서 성령은 바람 같은 것이라고 어디서 오면 어디로 가는 것인지 모르지만 분명히 있는 것과 같이 성령이 너희에게도 임하는 것이라고 설교를 해주셨잖아요? 여러분! 바람을 보십시오. 태풍이 불어도 우리 눈에는 안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있잖아요? 성령의 역사는 자유함이 있어서 우리 영 가운데 언제 들어왔는지 알 수도 없게 예수님의 설교대로 분명히 내게 주어졌는데 자율성이 있어서 그 대기권 안에 어떤 곳이라도 가득 차 있는 것이 바람이잖아요? 성령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문을 잠그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열어드린 적이 없는데 예수님이 바람과 같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말해줍니까? 기독교 복음을 들어오지 못하게 아무리 문을 잠가 놓아도 바람은 들어갑니다. 성령은 들어갑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얼마나 굳게 문을 잠갔습니까? 그런데 성령님이 들어오셔서 대한민국이 지금 세계에서 제일가는 교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은사적 성령 충만의 사건은 어느 때 주어졌는가? 여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다가 이런 사건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때 이들의 마음을 기록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예수 믿는 형제들이 마음을 같이 해서 한 곳에 모여 합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영적 힘이 나타나는지 우리가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공동 기도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혼자서 기도하는 것과 함께 기도하는 것은 은사적 면에서 차이가 큽니다. 저는 어쩌다가 강남금식기도원의 전속 강사가 되었습니다. 제가 7년이나 했으면 그만 두겠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계속 하라고 해서 매달 한 번씩 갑니다. 거기 가보면 사람들이 어떤 때는 수천 명씩 와서 기도합니다. 그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들이 할 일이 없나? 뭐하려고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기도할까? 집에서 기도하던가 자기 교회에서 기도하던가 할 것이지….’ 이 사람들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막 합심하여 기도할 때 영적인 역사가 크게 역사한다는 체험이 있는 사람들이 거기 그렇게 모이는 겁니다. 가보면 혼란스러울 만큼 기도를 합니다. 강대상에서 내려다보면 어떤 사람은 땅을 치면서 기도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몸부림을 치면서 기도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요상한 율동기도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은 바람이라고 바람 소리를 냅니다. “쉭! 쉭!” 우리 한국 사람들은 극히 감정적이라 신앙생활도 천지개벽적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이 “저 사람 술 취했다.” 성령 충만한 사람과 술 취한 사람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담력이 생깁니다. 무서운 사람이 없게 됩니다. 술 취해 보셨습니까? 길거리 지나가는데 술 취한 사람들 보세요. 아무나 보고 덤벼듭니다. “야! 뭐야? 이 사람이! 왜 쳐다봐?” 그런데 다른 사람과 시비가 안 붙습니다. “저 사람 술 취했어.”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파출소에 잡아다 놓아도 경찰들을 막 때립니다. 성령 충만하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담력이 생깁니다. “너 사잣밥 되게 할 거야!” “그래?” 성령 충만한 사람 못 당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 진행의 장애자가 되지 말라는 말은 성령 충만의 역사가 가는 것을 방해하면 화가 내게 오게 되어 있습니다. 외부의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구약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기도를 드릴 때 밤새도록 바람이 불었다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할 때 회오리바람이 불었다고 했습니다. 성령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프뉴마’(pneuma)라고 하는데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물의 성격, 불의 성격, 바람의 성격 그 특징이 뭡니까? 바로 자유함입니다. 어떤 것에서도 장애를 받지 않고 우주 공간을 왕래하는 힘이 있습니다. 물은 땅 속에도 스며들잖아요? 성령은 심령 속에도 파고 들어갑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그래서 누구도 막지 못합니다. 이제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저는 북한 땅에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불같이 뜨겁게 번질 것이며 바람같이 통과해서 삼팔선을 넘어 신의주까지, 주문진까지 왕래할 것을 믿기 때문에 갈보리교회 마지막 선교지는 북한이라고 기도하고 이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2010년 사도행전 29장 역사가 여러분을 통해서 물같이, 불같이, 바람같이 온 세상에 이루어지고 이런 일에 쓰임을 받는 여러분의 가정에도 하나님의 축복역사가 나타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성령께서 오시다
이정선 목사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제자들이 모였을 때 성령께서 임하셨던 바로 그날에 해당하는 날입니다. 1절에 보면 오순절 날이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오순절이라는 단어는 50일째 날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에서 순(旬)은 열흘입니다. 한 달이 30일이니까 셋으로 나누어서 초순, 중순, 하순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오순이면 50일이 됩니다. 영어로는 pentecost라고 하는데, 이 말은 헬라어에서 온 것입니다. 헬라어에서 펜타는 5입니다. 그래서 미 국방부를 펜타곤이라고 합니다. 펜타곤은 오각형이라는 뜻이지요.
50일째 되는 날이라면 어디에서 시작해서 50일이 되는지 기준이 있어야겠지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연중 세 개의 큰 명절이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설, 추석, 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맨 처음에 오는 명절이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하면서 생겨난 명절입니다(신 16:1). 두 번째 명절이 오순절인데, 구약에서는 칠칠절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레 23:15-16). 칠칠절이라는 말은 칠일이 일곱 번, 즉 7주가 지난 날을 의미합니다. 7X7은 49니까, 그 다음 날 50일 되는 날이 명절이 됩니다. 유월절에 처음으로 곡식을 베는데, 그 때로부터 50일 동안이 수확의 계절입니다. 그렇게 수확이 끝나는 날이 칠칠절, 즉 일종의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명절은 유대력으로 7월 1일입니다(레 23:24). 이것이 초막절인데, 명절 가운데서 가장 큰 명절입니다. 초막절은 두 번째 추수가 끝난 다음에 모든 백성이 들에 텐트를 치고 생활합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천막을 치고 살았던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막절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오순절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는데, 유월절 후 첫 번째 안식일에서부터 50일 후가 오순절 날이 됩니다. 그런데 유월절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때 유월절이 목요일이었고, 금요일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 다음 토요일이 안식일이었고, 안식 후 첫날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후 딱 7주 만에 오순절이 되었는데, 바로 그날에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계시다가 승천하셨으니까(행 1:3), 이날 오순절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지 10일이 되는 날이군요. 그날 제자들이 함께 모였습니다. 오순절이라고 해서 특별히 모인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늘 그렇게 모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특별한 날이니까 특별히 모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특별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안을 가득 채웠습니다(2절). 그리고 불꽃이 내려와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는 각 사람 위에 머물렀습니다(3절).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오신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성자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던 것처럼, 성령께서 공식적으로 오신 유일한 단 한 번의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성령께서는 그 이전에도 오셔서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을 이루시는 사역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먼저 성자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으로 인간의 구원을 이루셨고, 그 구원이 각 사람에게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을 위하여 성령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 사역을 시작하기 위하여 공식적으로 오신 사건이기 때문에 일회적인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왕이 왕위에 오른 후에 대관식을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대관식은 왕위에 오른다는 공식적인 의식입니다. 대관식 이전에도 왕이었지만 대관식을 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관식은 다시 반복해서 하지 않습니다. 한 번 대관식을 한 후에는 그냥 왕으로서 통치하는 일을 계속하면 됩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공식적으로 오신 것은 예수님의 약속에 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가 떠난 다음에 성령을 보내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하셨습니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예수님은 성령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십니다. 영어성경에는 another Counselor, 또는 another Helper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또 다른 보혜사라면 보혜사가 한 분 더 있다는 말인데, 누가 보혜사입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이 떠나시고 예수님처럼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하실 다른 분이 오신다는 것인데, 그분이 바로 성령이시라는 말입니다.
성자께서는 인간이 되셔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그렇게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게 성자께서 하실 일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니 성자께서는 하늘로 돌아가시는데, 문제는 그렇게 만들어놓은 구원을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일이 남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위해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 그리고 그렇게 떠나신 후 열흘이 지나서 마침내 성령이 오셨습니다. 마치 임무교대를 하는 것처럼, 성자께서 떠나시고 성령께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에 대해서 오해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성자는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사람들 가운데 함께 사셨기 때문에 그분이 인격체이신 것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그렇게 인격체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 본문에서도 바람소리처럼, 또 불꽃 모양으로 오셨단 말이에요. 그래서 성령을 마치 하나님의 기운이나 능력 정도로, 즉 비인격체로 오해하는 분들이 종종 있더군요.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성령께서도 성자와 같이 인격체이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보혜사이시고 또 성령도 똑같이 보혜사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성령이 오시면 어떻게 되는지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성령이 오시면 제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행 1:5). 이것을 성령 세례라고 말합니다. 성령 세례는 성령의 오신 목적을 이루시는 그분의 활동입니다. 성령이 오신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이루신 구원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는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세례도 받았지만 예수가 믿어지지 않는다면 성령 세례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성령 세례를 받을 때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고 했습니다. 물로 주는 세례는 성령 세례 받았음을 확인하고 선언하는 외적인 절차일 뿐입니다.
4절에 보면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셨을 때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성령 충만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성령이 한 사람에게 임하셔서 그 안에서 온전하게 역사하시는 상태입니다. 내 인격 속에서 거짓과 불의와 욕망에 이끌려 살던 것이 과거의 내 모습이었는데, 성령께서 오셔서 내 인격을 가득 채우시니 내 속에 있던 거짓과 욕망이 모두 쫓겨나가고 성령께서 하시려는 대로 내가 순종하며 살아가는 상태, 이것이 성령 충만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이해가 되시지요? 성령 세례는 처음 예수를 믿게 된 순간이고, 성령 충만은 점점 믿음이 깊어지면서 나중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이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매우 특별하고 예외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주라고 고백한 것은 훨씬 이전이었지만, 아직 성령 세례를 받지 못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성령께서 오시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날 성령이 오셨을 때 제자들에게는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이 동시에 일어난 것입니다.
제자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으니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다 알아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맨 처음 하신 일이 제자들의 입에서 다른 언어가 나오게 하셨다는 사실은 의미하는 것이 많습니다. 인간의 언어가 다양해진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도전한 것에 대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흩으셨습니다(창 11:7-8). 오늘도 우리가 언어가 달라서 겪는 고생과 불이익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파도 병원에 가는 것이 꺼려지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저 당할 수밖에 없는 설움이 이 언어 때문입니다.
바벨탑 사건에서 그렇게 나뉘고 흩어졌던 언어의 장벽이 사도행전에 와서 극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흩으셨던 언어를 하나님이 다시 통일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저주를 거두시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막혔던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다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깨져버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시겠다는 상징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성자께서 이루신 구원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고 믿도록 하시는 일을 위해서 오셨는데, 제자들을 사용하여 그 일을 이루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제자들은 예수님께 훈련을 받고 배운 사람들입니다. 이제 이들에게 능력을 주셔서 예수님께 배운 것을 전하게 하는 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성령 충만을 받고 큰 능력을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게 하겠다고 하셨는데(요 14:16), 그 약속에 근거해서 우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성령께서 함께 계심을 알고 믿습니다. 그 오순절 날 공식적으로 오신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이 다 구원을 얻을 때까지 쉬지 않고 역사하십니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고, 또 할 수만 있으면 성령으로 충만케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아름답게 살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와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우리가 어떻게 알고 느낄 수 있습니까?
먼저 여러분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나의 죄를 위한 것이고, 그분을 믿음으로 내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이 믿어지면, 여러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성령께서 각 신자의 몸을 성전 삼아 계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고전 3:16)?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우리의 죄악된 성품의 지배를 받으며 삽니다. 그래서 거짓말도 하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기도 하고, 나쁜 짓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겠지요? 사도 바울은 이것을 술 취하는 것에 비유해서 말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사람이 술에 취하면 제 정신으로 말이나 행동을 하지 못하고 술기운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술이 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셔서 성령의 뜻대로 우리가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데, 우리가 성령의 뜻대로 살지 않고 자꾸만 악한 성품을 따라 살면 어떻게 될까요? 성령께서 우리를 떠나실까요? 분명한 사실은 성령께서 절대로 떠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인격체시기 때문에 감정을 가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순종하며 살면 성령께서 기뻐하시지만, 그렇지 못하면 슬퍼하셔요.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엡 4:30).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데서 더 나아가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 됩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살전 5:19). 성령을 소멸한다는 표현이 좀 지나친 것 같네요. 우리가 어떻게 성령을 없애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영어 성경에서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고 번역했군요.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충만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신실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는데, 우리가 자꾸만 반역하고 불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게 나가면,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없게 됩니다.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려는 성령의 사역이 소멸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근심케 하고 성령의 사역을 소멸하는 행태가 계속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우리가 자녀를 키우면서 계속해서 말 안 듣고 나쁜 짓을 하면 언제까지 놔둘 수 있습니까? 매를 들어야지요. 성령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우리도 말 안 들으면 매를 맞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 저 한쪽 구석에 계십니까? 아니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 전체를 충만하게 채우고 계십니까? 여러분 마음 속의 성령께서는 늘 기뻐하십니까? 아니면 자주 근심하십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변화되지 못하고 옛 습관의 지배를 받고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령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몸을 성전 삼아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따라 살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이 사람 저 사람 돌보시느라 너무 바빠서 나한테까지는 못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성령 하나님께서는 매 순간 모든 신자들과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범죄하는 현장에서 성령께서는 근심하시며 슬퍼하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고집을 부릴 때, 성령께서는 탄식하십니다.
조금만 더 성령님께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 드리십시오. 조금만 더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는 공간을 드리십시오.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성령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인도하심대로 사는 것이 귀찮고 괴로운 것이 아니라 가장 즐겁고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순절 사건
김상복 목사 / 행 2:1-13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사람은 이 땅에서만 살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다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이후로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요, 이제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소문을 듣지 못하는 것은 더 억울한 일이요, 듣고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더 억울한 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반드시 성령을 체험하고 신앙의 확신 속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 사건이 약 2천년 전 오순절에 일어났습니다. 약 500명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다가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4-5)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중 380명은 그냥 집으로 돌아갔어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셨는데 그냥 가버린 것입니다. 120명만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하면서 성령강림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할 일들은 해가면서 성령의 체험을 기다렸습니다. 가룟유다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맛디아를 선출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에도 성령의 역사는 할 일을 해가면서 기대하고 기다릴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밥 할 때는 밥 하고, 아이들 돌볼 때는 돌보고, 직장에 가면 열심히 일하고, 사업도 열심히 하는 가운데, 주님의 전에 와서 모여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찬양을 할 때 성령께서 우리 각자에게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입니다. 500명 중에 380명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명령에 순종하지 않아서 성령강림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언제나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또 함께 모여 기도한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모여 기도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령이 임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주일에 교회에 오실 때 영적 기대감을 갖고 오십시오. 한 주간동안 주일을 생각하면서, ‘이번 주일에 하나님께 나아가 찬양과 기도를 올리고 말씀을 듣고 헌신할 때 성령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 내게 역사하실 것이다’ 하고 기대하십시오.
성경을 펼 때마다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십시오. 저도 가끔 그런 경험을 합니다. 수십 번 읽었던 성경구절인데, 어느 날 기도하면서 다시 읽을 때 그 속의 한 마디가 튀어나와서 내게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때는 그 자리에 고꾸라집니다. 어떤 때는 바로 무릎을 꿇습니다. 깨달음이 옵니다. 눈이 뜨입니다. ‘아! 그렇구나. 이건 참 내가 잘못했었구나.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아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구나!’ 합니다. 여러분도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말씀을 공부할 때마다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십시오. 기다리십시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것이 확실하지 않습니까?
한국교회의 단점 한 가지는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하고 싶은 말만 빨리 하고 ‘아멘!’ 그러고 일어나서 집에 가버립니다. 하나님도 말씀을 하시고 싶은데 자기 할 얘기만 20분, 30분, 1시간 하고는 금방 나가버리니까 하나님이 “좀 기다려라. 나도 할 얘기가 있는데...” 하십니다. 여러분, 앞으로 기도하실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실 말씀을 꼭 기대하십시오. 많은 말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 듣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 말씀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순종하며 기도하며 성령의 역사를 기다는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나타나십니다.
오순절에 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한지라”(행2:2). 성령께서는 갑자기 나타나셨어요. 언제 성령께서 나타나실지 몰라요. 성령강림은 사람이 조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어느 순간 성령께서 직접 여러분에게 말씀하시고 나타나십니다. 어느 때는 꿈으로, 어느 때는 환상으로, 어느 때는 음성으로, 어느 때는 가슴이 찔림으로, 어느 때는 평화와 기쁨으로, 어느 때는 용서의 선언으로, 성령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분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 무릎 꿇을 때마다, 찬양할 때마다, 예배할 때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갑자기 나타나실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 같은 것이 휙 하더니 120명이 있던 방에 가득 찼어요. 그리고 갑자기 각 사람의 머리 위에 혀같이 갈라진 불이 임하였습니다. 타원형의 혀를 절반을 갈라놓은 모양의 불길이 사람들의 머리위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 순간 모두가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충만’이란 성령을 많이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은 많이 받고 조금 받고가 없어요. 성령은 인격적인 존재입니다. 우리가 서로 인사할 때 서로의 인격에게 하지, 손이나 발에 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몸소 찾아오십니다. 성령을 1/4만 갖고 있다가 기도하면 성령이 1/2 오시고, 더 기도하면 4/3 오시고, 바짝 기도하면 충만하게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한 분이므로 더 오실 수가 없어요. 여러분에게는 성령이 계시든가 안계시든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가슴속에는 이미 성령께서 오셨습니다.
성령충만이란 성령님이 나를 더 많이 가지시는 것입니다. 전에는 예배시간에만 성령을 의식했는데, 이제는 차를 타고 갈 때, 생각할 때, 느낄 때, 말할 때, 행동할 때, 사람들과 만날 때, 사업할 때, 공부할 때, 늘 성령을 의식하여, 성령께서 내 인생 전체를 주관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이란 컵에 절반밖에 없던 성령이 어느 날 가득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여러분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지배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생각하게 하시고, 그분이 말하게 하시고, 그분이 행동하게 하시고, 그분이 느끼게 하시고, 여러분을 전적으로 성령님께 의지하는 것이 성령의 충만입니다. 마치 분노에 충만한 사람이 분노에 사로잡혀 얼굴색깔, 눈빛, 몸짓, 목소리까지 변하는 것처럼, 성령충만은 성령께서 완전한 통제권을 갖는 것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술에 끌려 다니는 것처럼,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이끄심을 받습니다.
성령충만의 결과가 초대교회에는 방언이라는 이상한 현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행2:4). 방언은 사람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른 방언”(other tongues)이란 다른 나라 말을 의미합니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무려 16개 나라 사람들이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가만히 들어보니까 제자들이 자기 나라 말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놀라 “도대체 이게 뭐냐?” 한 것입니다.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7절). 여기에서 ‘갈릴리 사람(Galilean)이란’ 예루살렘 사람들에 비하여 교육받지 못하고 무식한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입니다. 우리도 전에 시골사람을 비하하는 말을 했었지요. 갈릴리 사람들이 어떻게 남의 나라말을 거침없이 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방언은 성령께서 초자연적 역사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11절에 보니 “...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재미난 것이 두 가지 있어요. 그 외국인들이 언어를 알아들었고 내용을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 방언의 내용은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배우지도 않은 외국어로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어성경은 이 말을 “The wonderful works of God”이라고 했어요. 즉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보통 “하나님의 역사”(The works of God)란 표현은 성경에서 네 경우에 쓰입니다.
❶ 하나님의 창조(creation)입니다. 창세기 2장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다 끝내신 다음에 "하나님의 일을 마치셨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무엇을 하게 됩니까? 성삼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말하게 됩니다. 욥기 10장 3절에도 “당신의 손의 작품을 멸시하십니까?”(spurn the work of your hands) 라고 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에게 자기를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뇌성과 번개와 비, 눈과 들, 짐승 폭풍, 추위, 자연, 어두움, 구름 등 모든 자연현상을 하나님의 큰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욥37:4). 또한 죽었던 사람이 부활하는 것도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였습니다(욥33:29).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이 크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이 보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보입니다. 붉게 물든 저녁노을을 보아도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찬송이 나옵니다. 성령을 통하여 영적인 눈을 떴고 영적인 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어린 아기를 보면서도 감동을 받습니다. 가슴이 찡하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아기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작품을 보는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만 보면 그런 증세가 자꾸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세계를 보고 느끼고 다른 이들에게 말해줄 수 있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으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❷ 하나님의 보전의 사역입니다. “The work of preservation,” 즉 보호하시고 유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내팽개쳐 놓는 것이 아니라 보전하여 지속적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하늘에 해와 달과 별이 순서대로 뜨고, 바다에서 수증기가 올라가 구름이 되어 돌아다니다 필요한 곳에 내려줍니다. 그러면 그것이 샘물이 되고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어 그 속에서 많은 생명들이 움틉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어 볼 때” 찬양을 합니다.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자연의 세계를 보면서 하나님의 지혜와 위대하심과 존귀하심을 이야기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삶입니다. 여러분도 성령에 충만하여 자연의 세계를 보면서 감동과 감화와 충만한 기쁨을 맛보며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❸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역사와 인류를 주관하시며, 우리의 가정과 자녀와 가문과 직장과 사업체를 움직이고 계십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큰 손이 그의 삶 속에서 역사하는 것을 보고 경험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하며 삽니다. 여러분의 삶에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분명히 보이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❹ 기적들이 있습니다. 기적이 무엇입니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만이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우리의 능력을 초월하는 역사들을 이루시는 것이 기적입니다. 우리는 제한이 있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건강에 제한이 있고, 생각에 제한이 있고, 능력에 제한이 있고, 사랑에 제한이 있고, 인내에 제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통해 나의 한계를 초월하는 일들이 삶에서 일어나는 것이 기적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설교를 듣는 도중에 질병이 사라집니다. 기도와 찬양과 말씀 속에서 가슴에 맺혔던 한이 풀어집니다. 무엇입니까?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the wonderful works of God)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종종 제게 와서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교회에 올 때는 제 어깨가 너무 아팠었는데 예배 도중에 시원해지더니 통증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수십 년 동안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 나를 배신하여 내게 고통을 주었던 그 사람이 나이가 많아서 이제 집으로 돌아오겠답니다. 내 일생을 망쳐놓고 이제 늙어서 돌아오겠다는데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배 중에 성령께서 용서해주고 받아들이라고 하셔서 용기가 생겼습니다. 용서해 주었습니다. 받아들였습니다.” 보통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예요.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어린이가 몇 년 동안 모은 돼지저금통을 들고 와서 건축헌금으로 드렸습니다. 어린 아이가 그것으로 뭘 하고 싶지, 어떻게 하나님께 드릴 마음이 났겠습니까?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감동입니다. 회계부의 많은 어른들이 감동을 받고 “아! 이 교회가 이렇게 되는구나!” 했습니다. 우리가 한동안 재정부족으로 저 기도탑을 짓지 못하고 있었는데 두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목사님! 저 기도탑을 저희가 하겠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헌신의 열망이 생긴 것입니다. 내 시간과 물질과 사랑과 건강과 재능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바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 속에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세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순종하며 기도하는 자들의 삶속에 오늘도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이번에 잠깐 하와이에 강의하러 갔다가 판사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성령의 역사로 예수를 믿게 되었고, 성경공부 중에 성령의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매주 성경공부를 하며 몰래 화장실 청소를 하다가 그만 교회에 들켰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대법원 판사 자리를 사임하시고 목사가 되셨습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충만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생각지도 못할 놀라운 일들을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성령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성령의 역사는 베드로와 바울의 감옥 문을 여는 사건으로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는 갇혀있는 것 같아도, 아무 힘이 없는 것 같아도,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우리의 인생의 막힌 것들을 활짝 열어주실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서 우리 속에 거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성령에 의지하여, 그 능력과 은혜의 역사를 체험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역사는 체험한 사람들이 압니다. 2천년 전 오순절에는 방언으로 나타났지만, 그것은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와 똑같은 환경과 똑같은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역사는 역사예요. 그러나 오늘 21세기의 환경과 여건에서도 동일한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저 사람들 술에 취했는가? 참 이상하네” 하며 사람들이 놀랍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방법으로 우리의 삶에 역사하십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예수를 안 것입니다. 이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하나님을 드높이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이렇게 역사하셨다는 이야기를 여러분의 언어를 통해서 간증하는 입술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부흥의 원동력
김경년 목사 / 행 2:1-13
어떤 호기심 많은 과학자가 벼룩을 가지고 특이한 실험을 했답니다.
벼룩은 원래 자기 몸체에 비해 엄청나게 높이 뛸 수 있습니다.
그 벼룩 한 마리를 잡아 유리 병 속에 넣습니다. 그리고 유리 병 중간 부분을 투명한 유리로 가로막아 버립니다. 그 결과 벼룩은 뛰어오를 때마다 등이 부딪치게 됩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분명히 무언가가 가로막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러기를 수도 없이 계속하던 벼룩은 마침내 유리 높이 직전에서 뛰기를 멈추어 버립니다. 조금만 더 뛰면 등이 부딪치 게 됨을 안 벼룩이 아예 더 이상 뛰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주어진 환경에 순응한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 일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유리 병 중간부분의 유리를 치워버립니다. 벼룩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껏 자기 세계를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이 제거된 셈입니다. 그렇다면 그때부터 벼룩은 마음 놓고 있는 실력껏 높이 뛰어야만 합니다. 그런데도 벼룩은 예전 유리 가 막혀 있던 위치 직전에서 여전히 멈추고 맙니다. 벼룩은 투명한 유리가 변함없이 그곳을 가로막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까닭입니다.
이것은 벼룩이 자신의 세계를 유리 칸막이 이하로 스스로 국한시켜버린 결과이기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 어떤 호기심 많은 과학자가 이번에는 물고기를 실험했답니다. 큰 수족관에 물을 채웁니다. 그리고 그 수조의 한 가운데를 유리로, 이번에는 세로로 막은 뒤 한 쪽 편에 물고기들을 넣습니다. 물고기들은 번번이 중간에 막힌 유리에 머리가 부딪칩니다. 분명히 그 너머 에도 물이 있는 것이 보이고, 중간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계속 부딪치기만 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물고기 역시 중간 너머 가기를 포기해버립니다. 유리 칸막이가 있는 직전에서 방향을 바꾸어버리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가면 또 다시 머리가 어스러질 듯이 부딪칠 것을 잘 아는 까닭입니다. 그때 그 세로 칸막이 유리를 치워버립니다. 그래도 물고기들은 수족관 반 너머를 가려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막대기로 몰아도 예전 칸막이가 있던 곳 직전에서 돌아서 버리고 맙니다.
물고기들 역시 보이지 않는 장애물이 거기에 여전히 그리고 반드시 있을 것이라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 또한 물고기들이 자기 세계를 스스로 수족관 반 이 내로 제한해버린 부정적 결과입니다.
우리는 위의 실험을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바깥 세계를 잘 수용하지 않으려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평생 자기라는 우물 속에 갇혀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면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2-13절 /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리고 의심했습니다. 심지어 손가락질 하며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미쳤다고 말하고 술취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가 경험해 보지 않았다고 해서 부인하거나 비판하면 안 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수많은 일들이 이 세상에는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강림 사건을 봅시다.
한자로 오순(五旬)은 50을 말합니다.
오순절을 희랍어에서 “펜테코스테(pentekoste)”라고 하는데 “50번 째”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주님이 승천하신 후 10일 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본문 2-4절 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기서 일어난 특별한 일은 성령께서 임하시매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다른 방언'이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언어와 다른 언어를 의미합니다.
본문 5절-7절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의 방언을 듣는 순간 놀라면서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하고 말한 것은, 배운 것이 없는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냐...이런 말입니다.
그런데 본문 8절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방언을 하는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제자들이 하는 말을 한결같이 자신들의 모국어로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갈릴리 사람'에 지나지 않는 무식한 어부들이 다른 나라 말을 따로 배울리가 없었습니다 .
그런데 그들이 모두 갑자기 유창하게 자신들의 모국어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 사이에 소동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찜이뇨'라고 서로 반문했습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는 뜻이었습니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본문 9절-12절이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리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 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 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그들은 당시 유럽과 중동 및 아프리카의 여러 곳에서 모인 사람들로 그들은 각기 다른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같이 제자들이 하는 말을, 각각 그들의 모국어로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이 어찐 일이냐?'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 아무리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많은 외국어를 다 섭렵하기란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정규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갈릴리의 어부들이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본질적으로 깨달아야 하는 성령이 임한 까닭은 무엇이었습니까?
중요한 사실은 성령님께서 임하시므로 제자들은 비로소 자기라는 좁디좁은 우물, 갈릴리라는 편협한 자기 틀을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제자들 속에 내주 하시므로, 그들은 그제야 그들 바깥에 있는 더 큰 세계를 만나고 그 세계를 향하여 열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므로, 그들은 유다 사람과도 사마리아 사람과도 땅 끝의 사람과도 온전히 말이 통하는 바른 그릇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비로소 더 넓은 세계로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그들은 자기 우물에 틀에 갇혀있었지만 성령 강림 이후에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자기 우물을 벗어난 사람들을 통해 역사 하십니다. 자기 지식, 경험, 한계를 넘어선 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사도행전 1: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할 때,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사마리아에서, 땅끝으로, 점점 더 넓은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또한 실제로 성령 강림 이후 세계 선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주 목요일은 개인적으로 감회가 새로운 날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던 영주에 가서 그 지역에 중직자요, 지도자들인 남선교회 회원들 300여명 앞에서 오전 오후 두 시간 강의를 하고 왔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영주시 영풍군 문수면 월호2리 298번지입니다. 정말 시골 작은 동네입니다. 그런데 제가 목사가 되고, 서울에서 목회를 하고,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이렇게 점점 세계로 성장하게 된 것은 내가 잘났기 때문이 아니라, 중학교 3학년 때 성령을 받고,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제가 이렇게 큰 세상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번에 강의를 하면서 많은 분들이 저를 격려하시고, 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인하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지만, 또한 우리는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것과 성령의 충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고, 에베소서5장 18절에서는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곧 성령인데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에게 다시금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가 얼마만큼 성령의 인도대로 살아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성령은 물질이 아니므로 ‘충만’이란 더 많이 채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분의 인격을 따라 그 분의 생각대로 생각하고 그 분의 의도대로 말하고 그 분의 가르침대로 생활하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결 론
우찌무라간조라는 유명한 일본의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기독교인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의 것을 가지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것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를 업신여겨도 그는 세상을 이길 힘이 없으며, 깨끗하게 되기를 힘써도 그는 결코 깨끗해질 수 없다. 그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불신자보다도 못한 사람이 될 것이다.”
초대교회의 부흥의 원동력은 성령강림이었습니다.
우리도 성령 충만을 통해 나의 틀을 극복하고 더 넓은 세계로 더 귀하게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아멘
나는 성령을 믿으며
행 2장 1절 / 임영수목사
오늘 사도신경의 세 번째 명제인 "성령"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에게 성령과 관련해서 회상되는 몇 가지 인상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부흥사, 열광하는 신도들, 방언이나 예언기도, 간증등입니다.
저는 저의 성장과정에서 어느 한 때 성령을 부흥사들의 전유물로 생각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것과 연계해서 성령은 인간을 흥분시키는 어떤 신비스러운 물질로 오해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성령 체험을 몹시 열망했습니다. 제가 성령체험을 갈망한 것은 성령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 내에서 특별한 사람들처럼 대우받고 선망의 대상이 되곤 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난 날 한때 이해한 성령에 대해서 한편의 글을 쓴다면 상당한 분량이 될 것 같습니다. 성령은 부흥사들의 전유물도 아니며, 인간을 흥분시키거나 자극시키는 신비스러운 물질도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신앙을 갖지 아니한 만 못할 정도로 혼미한 상태에 빠지게 되고, 정신적으로 병들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성령은 '창조의 영', '생명의 영', '하나님의 영"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인간의 종교적 체험의 대상이 아닙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서 임마누엘 하시는 힘이요, 그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로 고백하게 하고 받아드리며, 그에게 복종해가게 하는 능력이십니다.
우리가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고 할 때 성령은 창조의 영, 생명의 영, 하나님, 그리스도 영으로서, 그 분이 하시는 새 창조의 사역을 믿습니다. 라는 뜻이 됩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에는 성령이 지향해 가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성령이 지향해 가는 목표는 하나님의 새 창조입니다. 저는 이 시간 사도신경에서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고 할 때 그것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성령은 지금까지 우리가 듣고 이해한 사도신경의 첫 번째 명제 하나님, 그리고 두 번째 명제 예수 그리스도를 현재적 사건이 되게합니다.
사도신경 첫 번째 명제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이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고 인간 세계로 들어오셔서 "임마누엘"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일찍이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7:14)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도록 하는 힘이 성령입니다.
로흐만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은 친밀하게 가깝게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미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은 놀라움을 일으키고, 기뻐하게 하는 하나님의 현존으로 나타낸다.
하나님은 시작과 마지막의 주이실 뿐 아니라 현재의 주이시며, 하나님은 높이와 깊이의 주이실 뿐 아니라, 나의 영혼의 주이시며, 피조물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내가 내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것보다 더 가까이 계신다. 그는 바꿀 수 없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고 했습니다.
한편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과 교제를 원하시고, 우리 인간을 그의 교제의 상대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그의 창조의 동역자로 부르고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를 갖게하고, 그의 창조의 사역에 참여하게 하고, 그의 뜻에 복종해가게 하십니다.
그 다음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현재적 사건이 되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분명히 지난 역사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지 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에는 여전히 죽음, 질병, 전쟁과 같은 온갖 어두운 일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은 예수께서 하늘로 올리워 가신 것으로 끝났는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의 사역이 이 역사의 현장에서 계승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사도신경에서는 세 번째 명제인 성령으로 답변해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시공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새 창조의 사역을 계속해 가십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가 하늘로 올라가신 후 단절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일에는 공백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라 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므로, 그리스도의 사역은 전 인류로, 전 피조물로 확대되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별을 하시고 이 세상을 떠나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세계 속으로 새롭게 진군해서 들어오시는 시작이었습니다. 그 일이 주님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계승되어지고 있습니다.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새로운 창조의 일은 인간의 깊은 내적인 세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성령은 정처 없이 허공에 떠다니는 영이 아닙니다. 성령은 먼저 인간의 내적 세계에 깊이 관여하는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이러한 특성과 관련해서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고전3:16) 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진리 영", "사랑의 띠", "자유의 영"이기 때문에 강요가 아닌 자유하는 가운데서 인간을 새로운 가치, 목적,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는 부활의 희망의 지평 위에 올라서게 합니다.
"예수의 영이신 성령의 분명한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생명을 잃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얻게 하는데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비유에서 표현되어 있는 것과 같이 인간이 제 정신이 들고, 진정 인간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인간의 진정한 자기 실현은 성령의 내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성령의 내재 가운데서 자신의 비참함을 보고, 좌절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계시는 새로운 삶의 지평으로 올라서게 되는데서부터 인간의 진정한 자기실현이 이루어집니다.
성령의 새 창조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피조물인 인간에게서 제일 먼저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자신과 무관하지 않은 사건이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시는 분, 우리를 찾고, 기다리시는 분, 우리를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단순히 그렇게 말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하나님을 그러한 분으로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일학교 학생시절에 전도사님으로부터 들은 감동적인 실화가 있습니다. 어떤 곳에 남편을 일찍이 여의고, 유복자로 키운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와는 달리 얼굴 형체가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아들이 어린 유아시절이었을 때에는 어머니의 얼굴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자라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면서부터, 아들에게는 그러한 얼굴을 가진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겨졌습니다.
아들이 학교에 가면 아들의 어머니를 본 친구들이 일그러진 어머니의 아들이라고 놀려댔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울면서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가방을 내동댕이치면서 내일부터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그 사연을 물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얼굴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된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다른 친구의 어머니들은 다 예쁜데 어머니는 왜 그렇게 생겼어?"하고 아들은 더욱 슬프게 웁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듣고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장롱 서랍에서 앨범을 꺼내 첫장에 있는 젊은 부부의 사진을 아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얘야, 이 사진을 좀 보렴. 이 사진에 있는 여자가 이쁘냐, 미우냐."고 물었습니다.
"엄마, 이 여자 너무 예뻐." 아들은 대답했습니다.
"얘야, 이 여자가 바로 나란다." 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아들이, "엄마 그런데 지금은 왜 그렇게 미워."
어머니는 아들의 눈에 눈물을 닦아주면서 지금까지 숨겨왔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너의 아버지는 내가 너를 뱃속에 배었을 때 그 해에 사고로 세상을 떠나시고, 나는 너를 아버지 없는 아이로 세상에 낳았다."
"어느 날 너를 안방에 재워놓고 집 앞에 있는 빨래터에 나가 빨래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불이야 하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니 바로 네가 누워 있는 우리 집에 불길이 휩싸여 있지 않겠니. 달려와 보니 동네 사람들이 와서 불을 끄고 있었고, 너는 그대로 방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불길을 헤치고 방으로 뛰어 들어가 너를 이불에 싸서 밖으로 뛰어 나오다, 그만 불길에 이렇게 화상을 입게 되었단다."
어머니의 말을 다 듣고 난 아들은 그 다음부터 그의 어머니의 얼굴이 하나도 부끄럽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부터 친구들에게 용감하게 훌륭한 어머니를 자랑했습니다. 아들은 일그러진 어머니의 얼굴 모습에서 자기를 극진히 사랑하는 어머니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신 우리의 구세주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고백하게 할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새 창조의 일은 인간의 내면 세계에서부터 시작되지만, 거기에만 국한되거나, 머무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운동은 인간 밖으로, 전 세계 안으로 들어가도록 자극하고 이것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은 새로운 마음만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영의 지평을 의미합니다.
성령은 형체가 없는 무 형체의 환영이 아니고, 성육신을 목표로 하는 그의 몸을 창조하는 창조의 영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성령이 창조하는 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갈5:19∼21)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 절제" (22∼23)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 대조적인 몸이 있습니다. 육적인 몸과 영적인 몸입니다. 육적인 몸은 음행, 호색, 우상숭배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음행, 호색과 같은 것은 관념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몸의 행위입니다.
그것과 대조되는 영의 몸은 사랑, 희락, 화평의 열매입니다. 열매는 씨앗이 죽어 싹이 나고 그 싹이 줄기가 되고 그 줄기에서 잎이 생겨 꽃이 피고, 그 다음 열매가 됩니다. 열매는 씨앗의 구체적인 형체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은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몸입니다.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의미합니다. 개개인이 지체라고 하면 그 지체가 모인 공동체가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성령이 계시는 장소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 성령 강림으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몸의 탄생을 보게 됩니다. 그 몸은 이 세상의 몸과는 달리 사랑, 희락, 화평의 몸입니다. 성령 강림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이 세상으로 다시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주님의 몸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나타나지 않는데서 오는 좌절과 실망, 갈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은 교회의 포로가 아닙니다. 성령은 교회의 부정적인 면과 함께 소멸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그가 지향하는 목표를 향해 나아갑니다.
성령을 바람으로 비유하면 성령은 인간의 이기심, 종족주이, 지역적 편파성에 따라 불어가지 않고 그러한 장벽들을 허물고 새로운 관계로 이루어지는 새 백성, 새 사회를 이루어가는 방향으로 불어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편파성과 이기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교회의 모습에 묶여있지 말고, 성령의 바람이 불어가는 그 방향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그 방항을 따라 가야합니다. 거기에 생명이 있고, 희망이 있고,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선교입니다.
한편 성령은 이 세상에서 마땅히 구할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우리의 희망과 기쁨은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몸인 교회 가운데 계시는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 있는 주님의 몸으로서 하나님과 살아 있는 교제 가운데 있으면서 동시에 주님의 몸으로서 이 세상에서 선교적 사명을 수행해 가게 됩니다. 그것은 성령의 본질적인 특성 때문입니다. 성령은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를 맺어가면서 이 세상의 피조물과 수평적 관계를 이루어 가는 본질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성령은 기독교인의 전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선물을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바르게 사용하도록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창조적 사역은 교회안에 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사역은 언제나 피조물이 압박 받고, 고통당하고 있는 그 삶의 현장, 역사의 현장에서 시작된군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 한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령이 계시는 곳에는 기쁨, 평화,희망이 있는 반면, 탄식과 고통, 세상을 위한 눈물의 중보의 기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개인화, 교리화, 제도화는 지양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목표로 하는 것은 개인, 교리, 제도화에 있지 않습니다. 성령이 지항하는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세계사의 목적 자체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로흐만 교수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서의 비밀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의 상태를 지시한다. 첫째는 율법 아래있는 상태이고, 둘째는 은혜 안에 있는 상태이며, 셋째는 곧 다가오는 더 풍성한 은혜의 상태이다. 첫째는 노예적인 상태이고, 둘째는 봉사하는 삶이고, 셋째는 자유 안에 있는 상태이다. 첫째는 두려워하는 노예의 상태이고, 둘째는 신앙안에 있고, 셋째는 사랑 안에 있는 상태이다. 첫째는 종들의 상태를, 둘째는 자유의 상태를, 셋째는 친구의 상태를 뜻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새 창조의 사역을 이루어가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 새 창조로 나타난 것이 거룩한 공교회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그 새 창조 가운데서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성령의 힘으로 살자
행 2장 1~4절 / 최성규목사
요사이 만나는 사람들마다 “아! 힘들다”, “아! 짜증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날씨도 짜증날만큼 덥습니다. 비로 인해서 습기까지 찼습니다. 열대야로 인해 잠도 잘 못 잡니다. 날씨만 짜증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가는 오르고, 가계부는 적자가 납니다. 이 와중에 북한과 일본까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역사를 왜곡하고, 주권을 침해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런 어려운 현실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까?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의 힘으로 됩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모든 것이 상쾌해집니다. 『이는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만족케 하며 무릇 슬픈 심령을 상쾌케 하였음이니라 하시기로 내가 깨어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렘 31:25,26).
지금은 성령시대입니다. 성령세례 받아야 하고, 성령충만 해야 합니다. 성령의 힘으로 살면 우리는 어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성령충만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요 20:22). 주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도 성령충만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엡 5:18). 성령충만은 성도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십니다(요 16:7; 고전 12:7). 성령세례 받고 충만함으로, 성령의 바람이 불어 모든 것이 상쾌해지는 성령의 사람이 됩시다. 성령의 힘으로 대한민국을 시원케 합시다
첫째, 성령충만 하면
성령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바꿉니다. 사람이 바뀌면 세상은 저절로 바뀝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충만함으로 바뀔 때,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첫째, 성령충만 하면, 능력을 받습니다. 권능을 받습니다(행 1:8). 병을 다스리는 능력, 병을 치료하는 능력, 사단을 쫓아내는 능력을 받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 고난 속에서도 슬퍼하지 않고 기뻐할 수 있는 능력을 받습니다. 능력 중의 능력인 예수 증인되는 능력을 받습니다(행 1:8). 12제자들은 돈도, 정치적 영향력도, 조직도 없었고, 배움도 짧았습니다. 그럼에도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행 2:43). 우리도 성령충만 하면 능력충만 합니다.
둘째, 성령충만 함으로 능력을 받으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현대인은 사명을 모르고 삽니다. 세상 흘러가는 대로 좇아다니기 급급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사명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성령은 바울을 선교사로 부르셨습니다(행 13:2,3). 이때 성령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케 하십니다. 바울은 소아시아로 가려고 했으나 성령은 바울을 유럽으로 인도하십니다. 바울은 이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우리 역시 성령의 인도하심에 민감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영혼구원의 사명, 성전건축의 사명, 성경적 효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나아갑시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구삼아 역사를 이루십니다.
셋째, 성령충만 하면, 말씀대로 삽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까맣게 잊었기 때문입니다(눅 22:61). 우리도 이처럼 말씀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성령충만 하면, 말씀실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은 말씀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우리 모두 성령의 힘으로 말씀을 실천하여 복에 복을 누립시다.
넷째, 성령충만 하면 통합하고 화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은 끊임없이 다투면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했습니다(눅 22:24). 서로 다투던 제자들이 성령충만 하자, 변화되었습니다. 서로 통합하고, 화합합니다. 한 마음이 되어 사명을 감당합니다(행 2:14). 성령의 통합과 화합의 역사는 계층과 지역과 인종을 넘어섭니다(고전 12:13; 엡 4:3,4). 성령충만 하면, 용서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양보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충만 하여 한국 교회와 대한민국을 화합케 합시다. 나라와 민족을 넘어 온 세계를 화평케 합시다. 성령의 사람들이 헌신하면 성령의 하나 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둘째, 성령을 받으려면
성령세례 받고, 성령충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주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교회를 다녀도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부어주십니다(행 2:33).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가 성령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7:38,39). 예수님은 나이, 학력, 외모와 같은 조건이 아니라, 믿음을 보십니다. 믿음 없이 성령만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마술사 시몬처럼 잘못된 동기로 구하면, 받을 수 없습니다(행 8:18,19). 120문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성령이 임했습니다. 우리 모두 믿음 안에 서서 성령을 받읍시다.
둘째, 성령을 받으려면,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행 2:38).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혹시 “나 같은 죄인에게도 성령이 오실까”라고 염려하십니까?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도, 교회를 핍박한 바울도, 이방인인 고넬료도 성령을 받았습니다. 누구나 회개하면 성령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행 2:39).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은 후에는 더욱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우리 모두 깨끗한 그릇이 됩시다. 죄를 멀리하고 성령이 좋아하시는 것을 행합시다.
셋째, 성령을 받으려면, 성령 받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어야 합니다. 성령세례 받고 싶어서 병 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성령의 능력만 구하려고 합니다. 성령님은 능력이 아니라, 인격이심을 기억합시다. 성령님은 기사와 이적이 아니라, 기사와 이적의 주인이심을 기억합시다. 성령님은 은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기억합시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립시다. 성령님을 사모하는 자는, 몇 번 기도하다가 응답이 없다는 이유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120문도는 다락방에서 무려 열흘을 기다렸습니다. 간절히 사모하는 자에게 성령님이 임하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넷째, 성령을 받으려면,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인격자이시기에 우리가 초대해야 오십니다. 간절한 기도는 성령님께 보내는 초대장입니다. 하나님은 약속과 동시에 기도할 것을 명령하셨고(겔 36:37), 예수님도 “강청”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눅 11:8). 120문도도 간절히 기도함으로 성령을 받았고(행 1:14), 예수님도 우리가 성령받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요 14:16). 기도하면, 성령의 불이 떨어집니다(행 2:3).
다섯째, 성령을 받으려면 합심해야 합니다. 오순절 날, 제자들이 합심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던 아우들이 제자들과 합심했습니다. 남성과 여성이 합심했습니다. 각기 다른 계층과 이념의 사람들이 합심했습니다(행 2:1). 120명이 오직 성령세례 받기 위해 합심했습니다(행 1:15). 그 결과, 120명 모두 성령강림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4). 우리도 새벽기도로, 구역예배로, 성령을 사모함으로 합심합시다. ‘한 마음’과 ‘한 목적’으로 ‘한 곳’에 모일 때, 불같은 성령이 임합니다.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함으로 말미암아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시다. 그리하면 이 땅은 행복한 사회가 되고, 서로 칭찬하는 사회가 되고, 서로 격려하는 사회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야! 살맛난다. 참 살맛 난다” 하는 희망의 사회가 됩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자
피종진목사 / 행 2:1~4
사람은 무언가에 사로잡혀서 살아갑니다. 육신에 사로잡혀서 사는 사람이 있고, 마귀에 사로잡혀서 사는 사람이 있으며, 성령에 사로잡혀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육신에 사로잡혀 사는 자들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갈 5:19~21).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3) 육신에 속한 삶이란 영에 속하여 구원은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숙한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아직 세속적인 데 집착하여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마귀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더러운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보면 얼굴도 멀쩡하고 젊고 지식도 있고 경험도 많이 쌓았지만 악령에 사로잡혀서 자아를 상실하고 부모 형제 자식, 친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얼마나 불쌍한지 모릅니다. 누가복음 8장 26~29절을 보면 귀신들린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고침 받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도시 사람이었지만 오랫동안 옷을 입지 아니하고, 집에 거하지도 않고, 무덤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자는 수치를 모릅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눅 8:28)라고. 이는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게 그 사람에게서 떠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을 여러 번 사로잡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쇠사슬과 쇠고랑으로 그를 묶어 감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쇠사슬을 끊고 귀신이 이끄는 대로 광야로 뛰쳐나가곤 하였습니다.
우리는 육신에 사로잡히거나 마귀에 사로잡혀서 살지 말고, 성령에 사로잡혀서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마가 다락방에 모인 사람들은 먼저 혀가 성령에 사로잡힘을 받았습니다. 혀가 성령에 사로잡히게 되면
첫째, 권세 있는 혀가 됩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 2:3) 혀는 언어와 복음 전파를 상징합니다. 잠언 18장 21절을 보면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혀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선한 말, 아름다운 말, 축복의 말’을 하게 되면 생명과 축복의 열매를 맺게 되고, ‘악한 말, 저주의 말’을 하게 되면 죽음과 저주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자는 선하고 축복된 말을 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둘째, 말씀이 있는 혀가 됩니다.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 23:2) 다윗은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말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신, 곧 성령께서 자신의 혀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령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의 혀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해주십니다. 초대교회시대에 성령에 사로잡힌 사도들은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행 4:33).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일으키신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행 2:22). 예수님은 3년 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이 보낸 메시야임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셋째, 축복된 혀가 됩니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7) 우리가 축복된 말을 하게 되면 하나님이 역사해주십니다. 그러나 저주하는 말을 하게 되면 마귀가 그 속에 역사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혀는 축복된 말을 하는 혀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속상하다고 가족들에게 함부로 저주하는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싸우더라도 축복된 말을 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4절을 보면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저주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한 초대교회 스데반 집사는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향하여 저주하지 않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에 사로잡힌 자가 되어 권세 있는 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혀, 축복된 혀로 하나님 앞에 더욱 크게 쓰임 받고 복음의 열매를 많이 맺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불같은 성령 바람같은 성령
행 2장 1절 / 이필재목사
지금 아이티에는 갈보리교회 선교사 11명이 계약을 하고 열심히 사역하고 있습니다. 금년 10월에 제가 아이티에 가기로 약속해 놓고 있는 중에 이런 지진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저는 지진 지역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진도 7.0의 지진이면 이 갈보리교회 같은 건물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집니다. 이번 아이티 지진에 대통령궁도 무너지지 않았습니까? 견고하지 못하게 건축된 빈민국의 건물들이라 여지없이 그 주변이 다 무너진 것입니다. 우리 선교사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계속 연락을 시도한 결과 오늘 아침 한통의 이메일이 저한테 왔는데 도미니카 최광규 선교사님을 거처 저한테 다시 온 것입니다. 깔리테풀리오리도 목사님이 보내신 스페인어로 되어있는 이메일 밑에 최광규 선교사님께서 한국말로 다시 번역해서 보내주셨습니다.
『 존경하는 이필재 목사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와 저의 가족은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은 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일원 중 목사님 한 분이 사망했고 많은 목회자의 자녀들이 죽었습니다. 많은 신실한 성도들이 죽었으며 모든 선교사들은 지금 집과 가산을 잃어버린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이티는 이번 지진으로 피로 얼룩진 폐허가 되었습니다.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형제 된 깔리테풀리오리도 목사 』
이런 내용의 이메일이 왔습니다. 아마 미국이 재건 약속을 철저히 하고 있으니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지만, 갈보리교회가 무엇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회의해서 소식이 오는 대로 다른 곳을 거치지 않고 우리 갈보리교회 선교사들을 돕는 일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도미니카 최광규 선교사님과 통화를 했는데, 어느 정도 수습이 되면 자신이 들어가셔서 갈보리교회 선교사 11명 중 지금 한 분이 돌아가시고 남은 선교사 10명의 형편을 다 알아본 후 보고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또 이번에 제 개인적으로 간증거리 하나가 생겼습니다. 카리브호텔에 투숙한 한국인 3명이 연락 두절이라고 하는 방송이 계속했고 한국 신문과 미국 신문에 모두 나왔고, TV에서도 계속 방송했었습니다. 미국 신문에는 이름까지 나왔는데 한국 신문에는 이름은 나지 않고 성과 나이와 신분이 세 사람이 났습니다. 결국 카리브호텔도 무너졌는데 분명히 한국사람 세 사람이 그곳에 투숙했는데 호텔은 무너지고 연락 두절이 되면서 ‘이것은 틀림없이 사고가 생긴 것이다.’ 모두 이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사업을 늘 같이 하는 쟁쟁한 사업가들이고, 몇 천 명씩 종업원을 둔 사업가들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제 사위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죽었는지 살았는지 연락이 안 되니까 정말 답답하고 마음이 많이 쓰였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안에 있을 때 지진이 나서 호텔이 무너졌지만 이 세 사람은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잘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젯밤에 미국에 잘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으며 여기서 정말 걱정 많이 하고 기도를 많이 했는데 괜찮으냐고, 마음의 충격이 심하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사위는 저보다 믿음이 좋습니다. 저더러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아버님이 늘 설교하셨으면서 왜 걱정하셨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아이티에 계속 사업을 할 것이냐?” 질문하니 “그럼요. 계속 사업할 겁니다.” 사실 미국이 관세를 삭감해주는 나라가 세계에서 몇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업가들은 더 끌리는 겁니다. 제품을 미국으로 만들어 들어가면 관세를 거의 삭감해 주니까 사업가들은 그게 매력이 있어서 거기를 찾아가서 그것을 하려는 것입니다. 사위가 하는 말이 “사업을 계속 할 것입니다. 아주 좋습니다. 더군다나 오바마가 이번에 약속을 했기 때문에 더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거기 가서 보니 그곳 아이들이 얼마나 불쌍하게 자라는지 우리 아이들과 그곳 아이들을 비교하니 천국과 지옥 같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생기는 수입으로 그 어린이들을 도와주는 프로그램을 이미 월드비젼과 하루 만에 예약하고 왔습니다.” 지난주에 그런 일이 저한테 있었습니다. 제가 늘 광고하는 게 있습니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은 새벽 기도회 나가라는 겁니다. 저는 경험한 것이 하도 많아서 늘 자신감 있게 말합니다. 한번 새벽기도 나가 보십시오. 교인들 가정에 얼마나 간증 거리가 많은지 목사가 시키는 것은 절대 해롭지 않습니다.
지난 주일은 성령님의 성격을 물로 표현했습니다. 오늘은 성경말씀에 성령은 불과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지난 주일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배경은 장막절인데 오늘은 오순절입니다. 오순절은 유대인의 추수감사절입니다. 쌀농사는 없고 보리농사이기 때문에 맥추감사절로 지킵니다. 유월절이 지난 후 50일째 되는 날이기 때문에 오순절이라고 부르는데 성경에 여러 가지 이름이 나옵니다. 오순절, 맥추절, 수장절, 칠칠절은 모두 다 똑같은 날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첫 열매는 하나님의 것으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첫 수확 곡식은 가지고 와야 합니다. 일주일을 그렇게 지켰습니다. 민수기 28장 26절에 있습니다.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라. 수송아지 두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한 마리와 일 년 된 숫양 일곱 마리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또 출애굽기 23장 16절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그리고 말씀이 계속됩니다.
17절에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유월절, 장막절, 오순절에는 예루살렘으로 다 모이라고 했습니다.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 동안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만 정성껏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일 년에 세 번씩은 다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데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바로 사람이 많이 모인 그 때를 맞추어서 구원 역사로 비추어지게 된 것을 성령이 지금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성령님의 역사가 그렇게 특별 사건에 일어나게 되었는가?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가장 사람이 많이 모였을 때 가장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빛이 전달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에는 사람들이 지금 이곳에 어떻게 많이 모여 있는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5절에 보면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고 했습니다. 외국에 있는 사람도 믿음이 좋은 사람은 장막절이 되면 유대 나라로 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다 모이는데 이것은 아마 이슬람이 더 잘 압니다. 이슬람의 특별절기에는 외국에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짓밟혀서 죽는 사람도 생길 정도입니다. 이처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데 해마다 그럽니다. 유대 나라에 세 절기도 그런 모습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온 세계로 퍼져나가게 된 하나님의 계획이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있는데 오늘은 어떤 일들이 벌어졌느냐 하면 이 사람들은 갈릴리 지방 사람으로 막 방언으로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이 “아니, 갈릴리 사람들이 어떻게 세계 각국에서 온 우리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가?” 바대인, 메대인, 애굽인, 구레네, 리비야, 로마, 아라비아인들인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그래서 성령의 역사는 온 세계를 대상으로 지금 사역하고 있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이 “네가 성령을 받게 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네 증인이 되라”고 하신 말씀이 2장에 와서 구체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에 성령 역사가 일어났다고 오순절 교회가 생긴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난 성령 사역의 특징은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불이다. 불 같은 성령이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에게 임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출현이 불로 나타난 것은 성경에 아주 많이 나옵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세요.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는데 어디서 만났습니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계신 하나님과 이야기했습니다.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침략했을 때 군사들이 엘리사 숙소를 다 에워싸고 이제 엘리사는 잡혀 죽게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화 되었는데 다 물리쳤잖아요? 그 물리쳐준 하나님의 군대를 성경이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불말과 불병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불로 나타났습니다. 우리 인류 역사 가운데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늘로 승천한 사람은 엘리야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승천할 때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이 성경에 불말과 불수레라고 했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대결했던 엘리야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불로 내려서 소멸해 버렸습니다. 레위기 성경에 보면 “성전 안에 항상 불을 피워 꺼지지 않게 하라.” 그래서 항상 불을 피웠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불 같은 하나님의 성령 임재가 항상 교회 안에 이렇게 타고 있어야”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성입니다.
우리 개신교에는 그런 것이 없지만 가톨릭에 들어가 보십시오. 들어가자마자 왼쪽이나 오른쪽에 촛불이 수백 개입니다. 그래서 헌금 좀 하고 촛불 하나 켜고 기도하고 나옵니다. 그 불을 왜 켜놓은 겁니까? 그곳이 어두워서 켜 놓은 것이 아닙니다. 구약대로 하나님의 임재성을 나타낸 것입니다. 출애굽기 24장 17절에 산 위에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다고 했습니다. 제일 큰 불의 역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밤에 불기둥으로 나타나셨을 때입니다. 그러면 왜 불로 나타나셨는가? 불의 성격이 있습니다. 불은 소멸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불이라면 모든 물체가 없어져버립니다. 잿더미가 되고 재가 날아가면 아무 것도 안보입니다. 간혹 우리 집안에 지저분한 쓰레기를 소각해 버릴 때가 있습니다. 태워서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농촌에는 불태워버려야 되는 것들이 많이 있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 성격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죄에 대한 소멸의 능력이 불 같은 성령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령은 불과 같아서 지저분한 인간의 모든 죄를 흔적도 없이 보이지 않도록 다 사라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은 죄가 다 없어지는 겁니다. 정결의 성격입니다. 구약 시대 제사 지낼 때 성경에 보면 고기는 먹고 내장, 이런 것은 다 불태워서 하나도 보이지 않게 했습니다. 그 뜻은 지저분한 짐승의 똥이나 내장 같은 죄를 모두 다 소멸해서 보이지 않게 하는 불 권능의 사역을 말합니다. ‘성령은 불 같은 것이다.’ 불은 심판의 상징입니다.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 성을 심판하실 때 불로 심판하셨다고 말씀하셨고 예레미야 23장 29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이 아니하냐?” 세상의 모든 마귀의 세력은 불 같은 성령의 역사로 소멸되어짐을 성령의 성격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무엇보다 뚜렷한 불의 성격은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충만해지면 열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에게 주어진 성령의 사역은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부인이 아무리 말려도 안 됩니다. 남편이 아무리 말려도 안 됩니다. 또, 자식이 말려도 안 되고 부모가 말려도 안 됩니다. 불같이 되어버린 걸 어떡합니까? 또, 누구든지 당하지 못합니다. 죽음도 안 되기 때문에 순교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상 역사에 기독교를 가장 잔인하게 핍박한 국가는 로마입니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잔인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는데 그 중에서 우리가 다 기억하는 것은 원형극장 사건입니다. 공고합니다. “몇 월 며칟날 원형극장에서 기독교인들 사잣밥 되게 하니까 구경 오라.” 다 써 붙입니다. 그러면 잠실야구장 같은 곳으로 사람들이 가득하게 모입니다. 이때 붙잡아 온 기독교인들을 벌거벗겨서 운동장 가운데로 몰아놓고 며칠씩이나 굶주린 사자들을 풀어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동물의 왕국이라는 TV 프로그램을 잘 보는데 사자들이 다른 동물을 순식간에 잡아먹어서 뼈다귀만 남습니다. 원형극장에서는 사람도 그렇게 했단 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들이 그 사실을 구경하고 있으니 인간으로서 이게 할 일입니까? 거기 끌려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죽을 것을 알고 끌려가지 모르고 끌려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지금 생각해 보세요. 오늘 잠실 운동장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 내가 장본인으로 끌려가서 사잣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가시겠습니까? 어떻게 갈 수 있는가? 불 같은 성령이 그때 주어졌으므로 누구도 말릴 수 없습니다. ‘이건 하나님의 큰 축복이야. 아무나 순교하나? 하나님이 순교자로 정해준 사람만 순교하는 건데. 할렐루야!’ 그래서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들어가기 직전까지 나는 이제부터 예수 안 믿겠다고 말하면 그 시간으로 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 하고 풀려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충만의 문제를 어떻게 표현했는가? “나는 날마다 죽노라.” 365일 죽을 각오로 사역을 한다고 그 뜨거운 열정, 불 같은 용기가 결국 어떻게 했습니까? 로마를 뒤집어엎어 버렸습니다. 지금 세계 교회 중심은 로마가 되었잖아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옛날 부흥회는 실감이 나는데 요즘 제가 부흥회를 다녀보면 그렇게는 안하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 제가 청년 시절에는 교회 부흥사가 오면 통성기도를 하게하고 항상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불 받아라!”라는 말이었습니다. 성령 받으라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 충만, 불 같은 성령! 어떤 경우에 주어지는가? 잘못 생각하면 ‘제자들은 이때 비로소 성령을 받은 것인가?’ 아닙니다. 12사도, 120사도 이 과정을 한번 정리해 보면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통해서 주님의 제자 관계성이 이루어졌는데 주님과 함께 사역하는 동안에 성령 체험을 하고 메시아성에 대한 확실한 고백을 했고 사도가 된 것에 대한 기쁨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정말 사도가 필요한 주님의 십자가 사건 때는 다 도망을 갔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흩어진 제자들을 일일이 찾아 다시 모아놓고 이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성령 받은 사람들이 다 도망가고 말았으니 이제는 제2의 성령의 역사를 기다려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아버지의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을 받게 될 것이다.” 만약 그때 제자들이 또다시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면 십자가 사건도, 부활 사건도 주님의 놀라우신 기적 모든 사역도 전설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 이 성령 강림 사건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새로운 역사 출발이 되었는데 여기서 우리가 정리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객관적 지식이 주관적 체험으로 승화되어 하나님의 역사에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성에 대해서도 절대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신앙생활은 안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이시다.” 하지만 안 믿습니다. 알고 있는데 안 믿습니다. 객관성 있는 진리이지만 나의 주관적 체험으로 연결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헤롯이 서기관들을 불렀잖아요?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베들레헴입니다.” 정확하잖아요? 너무 잘 알잖아요?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이 한 사람도 메시야에게 와서 경배를 안 합니까? 보십시오. 예수님의 기적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그토록 놀라고 신기하면서도 예수님은 안 믿습니다. 배고팠을 때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가지고 기적을 일으켜 다 같이 먹었잖아요? 먹은 사람들은 죽도록 예수 믿어야 할 것 아닙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기적으로 먹었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주관적 체험으로는 연결이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성령님의 인도로 예수를 믿고 구원 받는 자리에 왔을 때 그 사람은 틀림없이 성령 받은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 사도들에게 주어진 성령 충만의 사건은 어떤 성격인가? 1단계가 은혜적 역사라고 말합니다. 내가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믿음 생활을 하는데 2단계는 은사적 역사입니다. 성령을 받고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에게 은사적 충만의 역사가 내림으로 하나님이 목적하는 어떤 사역에 몸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는 힘입니다. 제가 제 자신을 들어 쉽게 말씀을 드리면 저는 어려서 성령 체험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 성에 대해서 확실한 고백을 하고 주님을 영접하고 아주 기뻐서 신앙생활 잘하고 교회에서 날마다 살다시피 하는데 그토록 평생가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10대 후반, 20대 초반 시절에 나에게 또 다른 성령의 뜨거운 체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이건 뭐야?’ 바로 은사적으로 나로 하여금 목사가 되게 하는 은사적 성령의 역사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이것을 받은 겁니다. 지금 사도들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되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그냥 두면 또 흩어지고 말아.” 불 같은 은사적 성령 체험을 줄 때 비로소 그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은사적 성령 충만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습니다. 똑같지 않고 똑같은 목적이 아니라 각자 다른 목적의 충만 역사로 “이때는 네가 이것을 해야 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충만 역사를 주시기 때문에 그것을 실행하는 단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의 충만 역사가 급하고 강한 바람 같다고 했습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성령은 불 같은 것이고 바람 같은 것이지 불이나 바람 자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설교하실 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하시면서 성령은 바람 같은 것이라고 어디서 오면 어디로 가는 것인지 모르지만 분명히 있는 것과 같이 성령이 너희에게도 임하는 것이라고 설교를 해주셨잖아요? 여러분! 바람을 보십시오. 태풍이 불어도 우리 눈에는 안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있잖아요? 성령의 역사는 자유함이 있어서 우리 영 가운데 언제 들어왔는지 알 수도 없게 예수님의 설교대로 분명히 내게 주어졌는데 자율성이 있어서 그 대기권 안에 어떤 곳이라도 가득 차 있는 것이 바람이잖아요? 성령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문을 잠그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열어드린 적이 없는데 예수님이 바람과 같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말해줍니까? 기독교 복음을 들어오지 못하게 아무리 문을 잠가 놓아도 바람은 들어갑니다. 성령은 들어갑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얼마나 굳게 문을 잠갔습니까? 그런데 성령님이 들어오셔서 대한민국이 지금 세계에서 제일가는 교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은사적 성령 충만의 사건은 어느 때 주어졌는가? 여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함께 모여 기도하다가 이런 사건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때 이들의 마음을 기록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예수 믿는 형제들이 마음을 같이 해서 한 곳에 모여 합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영적 힘이 나타나는지 우리가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공동 기도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혼자서 기도하는 것과 함께 기도하는 것은 은사적 면에서 차이가 큽니다. 저는 어쩌다가 강남금식기도원의 전속 강사가 되었습니다. 제가 7년이나 했으면 그만 두겠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계속 하라고 해서 매달 한 번씩 갑니다. 거기 가보면 사람들이 어떤 때는 수천 명씩 와서 기도합니다. 그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들이 할 일이 없나? 뭐하려고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기도할까? 집에서 기도하던가 자기 교회에서 기도하던가 할 것이지….’ 이 사람들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막 합심하여 기도할 때 영적인 역사가 크게 역사한다는 체험이 있는 사람들이 거기 그렇게 모이는 겁니다. 가보면 혼란스러울 만큼 기도를 합니다. 강대상에서 내려다보면 어떤 사람은 땅을 치면서 기도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몸부림을 치면서 기도하는 사람, 어떤 사람은 요상한 율동기도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은 바람이라고 바람 소리를 냅니다. “쉭! 쉭!” 우리 한국 사람들은 극히 감정적이라 신앙생활도 천지개벽적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성령 충만한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이 “저 사람 술 취했다.” 성령 충만한 사람과 술 취한 사람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담력이 생깁니다. 무서운 사람이 없게 됩니다. 술 취해 보셨습니까? 길거리 지나가는데 술 취한 사람들 보세요. 아무나 보고 덤벼듭니다. “야! 뭐야? 이 사람이! 왜 쳐다봐?” 그런데 다른 사람과 시비가 안 붙습니다. “저 사람 술 취했어.”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파출소에 잡아다 놓아도 경찰들을 막 때립니다. 성령 충만하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담력이 생깁니다. “너 사잣밥 되게 할 거야!” “그래?” 성령 충만한 사람 못 당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 진행의 장애자가 되지 말라는 말은 성령 충만의 역사가 가는 것을 방해하면 화가 내게 오게 되어 있습니다. 외부의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온 집에 가득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구약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기도를 드릴 때 밤새도록 바람이 불었다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할 때 회오리바람이 불었다고 했습니다. 성령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프뉴마’(pneuma)라고 하는데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물의 성격, 불의 성격, 바람의 성격 그 특징이 뭡니까? 바로 자유함입니다. 어떤 것에서도 장애를 받지 않고 우주 공간을 왕래하는 힘이 있습니다. 물은 땅 속에도 스며들잖아요? 성령은 심령 속에도 파고 들어갑니다. 성령님의 역사는 그래서 누구도 막지 못합니다. 이제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저는 북한 땅에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불같이 뜨겁게 번질 것이며 바람같이 통과해서 삼팔선을 넘어 신의주까지, 주문진까지 왕래할 것을 믿기 때문에 갈보리교회 마지막 선교지는 북한이라고 기도하고 이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2010년 사도행전 29장 역사가 여러분을 통해서 물같이, 불같이, 바람같이 온 세상에 이루어지고 이런 일에 쓰임을 받는 여러분의 가정에도 하나님의 축복역사가 나타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이윤재목사 / 행 2:1-13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능력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소원입니다. 지난 2주동안 이것을 절감하며 살았습니다. 어떻게 지치지 않는 능력으로 활기찬 삶을 살 수 있을까? 한번 시작한 일을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이루는 힘은 없을까? 뛰고 달려도 피곤치 않는 삶은 무엇일까? 이것이 새해 우리가 바라는 소원입니다.
그래서 한 소녀가 어느 공장에 취직했답니다. 실만드는 방직 공장인데 수습기간을 거쳐 드디어 일을 시작했습니다. 반장이 와서 기계 작동법을 가르쳐 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일을 배웠지만 그래도 일하다 보면 고장이 날 때가 있을 거야. 그 때마다 일을 멈추고 즉시 나에게로 달려와. 내가 도와줄께”.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녀가 일하다가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올이 풀리고 실이 얽혀 기계가 엉망이 되었습니다. 몇 시간을 낑낑 거렸지만 고칠 수 없어 반장을 찾아갔습니다. 반장이 물었습니다. ”언제부터 고장났지?“ 소녀가 말했습니다. “몇 시간전에요”. “그런데 왜 이제 왔지?” 소녀가 말했습니다. “제가 고쳐 보려고요. 그런데 잘 안되었어요”. 반장이 말했습니다. “너의 할 일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즉시 내게로 달려 오는 거야”.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어려움이 생겼다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도 안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즉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최선은 우리에게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가는 것입니다.
중세시대의 성녀 아빌라의 테레사가 있었습니다. 그가 신앙생활의 네 단계를 말했습니다. 첫째 단계는 물동이로 물을 긷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힘든 단계입니다. 모든 것을 내가 해야 합니다.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기껏해야 물동이에 물을 채우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펌프로 물을 품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도 힘듭니다. 그러나 물은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내가 활동을 멈추면 아무 것도 안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수로에서 물이 흘러오는 단계입니다. 이것은 내가 하지 않습니다. 저수지에서 물이 스스로 흐릅니다. 쉽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소낙비가 쏟아지는 단계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비가 쏟아집니다. 그것도 소나기가 쏟아집니다. 내가 할 일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위에서부터오는 은혜의 폭포수로 나를 적십니다. 이것이 신앙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되고 싶지 않습니까? 하루 하루 물동이 이고 힘들게 펌프질하는 신앙으로는 힘들지 않습니까? 뭔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은혜를 받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흠뻑 옷이 젖는 은혜를 받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능력을 구하는 일입니다. 능력을 사모하는 일입니다.
오늘 말씀 1절을 보실까요? 행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그래서 사도행전 교인들이 모였습니다.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믿는 것을 인정받지 못한 상황에서 그들은 너무 힘들게 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나사렛 이단 예수를 믿는 이단들”이라고 핍박했습니다. 가정에서 예수믿는다고 미움받고 직장에서는 예수믿는다고 쫓겨났습니다. 영적으로 물질적으로 너무 힘든 상황에서 사도행전 교인들은 힘이 필요했습니다. 핍박과 박해속에서도 넉넉히 살아갈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들이 믿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약속은 하늘로부터 능력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하늘로 오는 능력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능력이 없어서 힘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받지 못해서 힘없이 삽니다. 우리는 저마다 이 힘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사실은 힘을 갖기 위함입니다. 공부를 잘해야 더 좋은 위치에 올라가지 않습니까? 우리가 돈을 버는 것도 사실은 이 힘때문입니다. 물질의 힘입니다. 권력도 힘이요 명예도 힘이요 지식도 힘이요 과학도 힘이요 오락도 힘입니다. 그러나 모든 힘이 다 좋은 힘은 아닙니다. 좋은 힘은 나를 살리고 남도 살리는 힘입니다. 그 힘은 위에서 내려옵니다. 나쁜 힘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따먹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입니다. 나쁜 힘입니다. 결국 그 힘 때문에 그들은 망했습니다. 이스라엘 왕 사울도 힘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힘으로 평생 다윗을 쫓아다녔습니다. 나쁜 힘입니다. 결국 그 힘 때문에 그가 망했습니다. 좋은 힘이 필요합니다. 좋은 힘은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하늘의 힘은 약속으로 주어지고 기도로 받습니다. 약속과 기도가 함께 갑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약속이고 우리 입장에서는 기도입니다. 약속+기도입니다. 약속을 믿고 기도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힘을 받습니다. 한 믿음좋은 기업의 총수가 어느날 시간을 내서 교회에 갔습니다. 자신이 시작한 사업이 꼭 성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한참 기도하고 있는 데 거지 하나가 들어오더니 큰 소리로 소리칩니다. “하나님, 오늘 저에게 10만원을 주옵소서. 오늘 꼭 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굶어 죽습니다”. 하도 큰 소리로 기도하는 바람에 총수의 기도가 방해를 받았습니다. 총수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습니다. “이봐요. 내가 10만원 줄테니 어서 나가세요”. 거지의 기도는 즉각 응답되었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도 응답합니다. 거지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우리 기도도 들으십니다. 눅11:13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말씀을 믿습니까? 기도하면 약속대로 응답받고 기도하면 능력받습니다.
제가 작년 이태리 피렌체에 갔습니다. 거기에 한 위인 한 사람이 살았는 데 사보나롤라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루터 이전의 종교개혁자라고 부를만큼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설교했다는 성 마가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가 기도하고 설교할 때 수많은 군중들이 몰렸습니다. 하루는 강단에 올라가 설교하는 데 갑자기 자신에게 능력이 없슴을 깨달았습니다. 즉각 설교를 중단하고 골방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때까지 5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놀랍게도 예배 참석한 사람중 한 사람도 자리를 뜨지 않고 같이 기도했답니다. 5시간 후에 능력이 임했습니다. 그가 다시 일어나 설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습니다. 위대한 시대, 위대한 교회는 언제나 위대한 능력이 필요합니다. 목회자나 평신도나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으면 설교하지 않으리라”. 평신도는 “나는 하나님의 능력과 함께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의 능력과 함께 세상에서 살아가리라” 다짐해야 합니다. 능력이 먼저입니다.
오순절 날에
그러면 그 능력이 언제 임했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사도행전 사람들은 오순절에 모였습니다. 왜 하필 오순절입니까? 오순절에 모였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매년 세 번의 절기가 있습니다. 4월에 있는 유월절, 5-6월에 있는 오순절, 11월에 있는 장막절입니다. 이 세 절기는 모두 역사와 관련되고 농사와도 관련됩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절기입니다. 그리고 곡식이 막 자랄 때입니다. 오순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지 50일만에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절기입니다. 그리고 농사로 말하면 밀, 보리등 첫 곡식을 수확할 때입니다. 장막절은 가을에 익은 모든 곡식을 수확하여 창고에 저장하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이라고도 하고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그 중에서도 사도행전의 역사가 오순절에 일어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순절은 50일이라는 뜻입니다. 언제로부터 50일?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 유월절로부터 50입니다. 그 50일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 가지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는 시내산에 올라갔고 또 하나는 첫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이것은 신약의 오순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에서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베드로가 처음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설교는 곧 처음 전도였습니다. 처음 설교, 처음 전도가 이루어지자 처음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처음 신자 3천명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이 처음 곡식입니다. 그런데 곡식은 어떻게 익었습니까? 때가 되어 익었고 햇빛이 비춰 익었습니다. 이스라엘은 3월부터 더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5월, 6월 되면 섭씨 40도를 오르내립니다. 그 뜨거운 햇빛아래 보리와 밀이 익습니다. 그래서 보리를 먼저 수확하고 다음 밀을 수확합니다. 그 절기가 오순절입니다.
구약시대 오순절은 백성들이 시내산에 올랐습니다. 시내산에 오를 때 두 가지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하늘의 불이 임했고 다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출19:18절입니다. “시내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아께서 불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시내산에 오를 때 하늘의 불이 먼저 임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할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불입니다. 불은 하나님 자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불이 임하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출20:1입니다. 출20: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되”. 순서가 있습니다. 백성이 시내산에 오르자 하나님의 불이 임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오순절입니다. 신약의 오순절은 어떻습니까? 백성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다락방은 신약의 시내산이었습니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때가 되자 약속하신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초대교회였습니다. 초대교회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첫 곡식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열매임을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첫 열매로 부르기 위해 먼저 성령을 주시고 다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을 믿습니까? 열매는 아무 때나 수확하지 않습니다. 때가 있고 준비가 필요합니다. 1절에서 “오순절이 이르렀다”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이르렀다”는 말은 헬라어로 “쉼플레로오”입니다. 이 말은 “가득 채워졌다”는 뜻입니다. 가령 큰 물통에 물을 한 바가지씩 퍼담다가 어느 순간 가득 차서 물이 밖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이르렀다”, “쉼플레로오”라는 말입니다. 언제 곡식이 익습니까? 물통에 물이 가득차야 합니다. 때가 되어야 합니다. 언제 성령받고 하나님의 좋은 열매가 됩니까?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양이 차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차야 합니다. 그 때까지 세 가지 준비가 필요합니다. 첫째 영적 시내산에 올라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불인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야 합니다. 그러면 물통에 물이 차면서 밖으로 흘러 넘칩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열매입니다. 2-3절을 좀 더 자세히 봅시다.
하늘로부터
행2:2-3,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성령이 초자연적으로 임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자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먼저 소리가 나타났습니다. “하늘로부터 급하고 바람같은 소리”였습니다. 다음 눈에 무엇인가 보였습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모습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상한 말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4절,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 이상한 모습이 보이고, 이상한 말이 들렸습니다. 세상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한 것이었습니다. 소리가 났는 데 분명 바람은 아닌 데 바람소리 같았습니다. 무엇인가 보였는 데 분명 불은 아닌 데 불의 혀같은 것이었습니다. 말이 들렸는 데 분명 우리 말은 아닌데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확실히 초자연적인 것인데 우리의 감각기관에 체험되었습니다. 분명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데 그렇다고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현상, 성령의 나타남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부터 나왔습니다. 2절, “하늘로부터”. 다같이 “하늘로부터”.
여러분은 모든 좋은 것이 하늘로부터 나온다고 믿습니까? 여러분은 약1:17을 믿습니까? “모든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모든 좋은 것은 위로부터 나옵니다. 구원도 능력도 거룩도 권세도 다 위로부터 나옵니다. “내 주여 내 발붙드사 그곳에 서게 하소서.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옵니다”. “위”는 공공간적 “위”만이 아니라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영이신 하나님, 곧 성령이 계신 곳이 “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거듭납니까? 위에 계신 성령님이 임할 때 우리가 거듭납니다. 요3:5절에서 예수님이 “거듭나라” 말씀합니다. “거듭나다”는 말은 헬라어로 “겐네테 아노텐”라고 합니다. 이 말은 “위로부터 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위에 계신 성령님의 은혜때문입니다. 구원을 어떻게 받습니까? 딛3:5절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구원도 위에 계신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은혜로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거룩해집니까? 거룩에 대하여 2천년 교회사에서 끊임없이 논의된 두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모방설이고 또 하나는 이식설입니다. 모방설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끊임없이 예수님을 닮아갈 때 온다는 것입니다. 거룩에 대한 우리의 인간적 노력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모방해야 합니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가 대표적인 책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식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 거룩의 능력이신 성령님이 들어와 그 분의 다스림을 받을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분들은 “죄인인 우리가 예수님을 닮으면 얼마나 닮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전인자속에 죄의 유전인자가 있는 데 우리가 노력한다고 얼마나 거룩해지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속에 implant, 될 때 나도 모르게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식설”이라고 합니다. 이식이냐 모방이냐? 어느 것이 맞는가 할 때 제가 내린 결론은 둘이 같이 간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이식되고 다음은 모방됩니다. 자, 먼저 하나님의 성령님이 우리 속에 임합니다. 그것은 초자연적인 역사입니다. 초자연적인 소리와 모양과 언어로 우리에게 임합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하나님의 강권하는 역사로 우리 안에 성령님이 임합니다. 그러면 그 분의 통치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내가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 순종하고 그를 닮아갑니다. 먼저 임하고 다음 닮습니다. 이것이 거룩의 순서입니다.
이것을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과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말은 비슷하지만 내용은 다릅니다. 세례는 일생 한 번 받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세 번 받았다고 자랑하는 데 그 사람은 어디 가서 한신교인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안에 임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더 의지하고 사랑합니다. 그 분을 닮아가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날마다 기도하고 사모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능력을 부어 주십니다. 그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세례가 관계를 위해 주어진다면 성령충만은 능력을 위해 주어집니다.
이것을 결혼의 비유로 말하면 성령세례는 결혼과 같고 성령충만은 사랑과 같습니다. 결혼은 일생 한번 합니다. 여러번 결혼하는 것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결혼은 사랑하는 님과 딱 한 번 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한번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결혼은 사랑의 시작이지 끝이 아닙니다. 결혼했다고 자동적으로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결혼하는 순간부터 부부는 매일 사랑의 연습을 해야 합니다.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도 이와 같습니다. 성령세례는 단 한 번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받은 후 우리는 더 성령님을 사모합니다. 지속적인 사랑이 부부를 행복하게 하듯 지속적인 성령 충만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십니다. 4절을 보십시오 행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사도행전 사람들은 오순절날 처음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받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순절날 간절히 기도함으로 성령충만을 받은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계속 받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세 번이나 성령충만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가 행2:4입니다.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속에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가 행4:8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베드로가 잡혀가기 전입니다. 마지막이 행4:31입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더 성령으로 충만하여” 베드로는 성령충만을 계속 받습니다. 성령세례는 한번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계속해서 받고 하나님 자녀의 능력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성령으로 세례받았습니까?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받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이제 할 일은 성령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과연 어떤 상태입니까? 성령충만하면 어떻게 됩니까? 엡5:18은 성령충만을 술취한 것과 비교합니다.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여러분중에 술마신 분 있습니까? 취할 때까지 마셔 본 분 있습니까? 어떤 분이 술취한 것과 성령충만을 몇 가지로 비교했습니다. 첫째 술취하면 말수가 는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해도 말수가 늡니다. 입을 열면 쉴새없이 하나님 이야기, 성경이야기, 은혜받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둘째 술취하면 노래한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하면 노래합니다. 심방을 했더니 하루 종일 찬송을 부른다는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성령충만의 한 모습입니다.
셋째 술취하면 운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해도 웁니다. 자기 죄 때문에 울고 은혜에 감격해서 울고 예배드리다가 울고 찬양하다가 울고. 바보처럼웁니다. 넷째 술취하면 용감해 진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용감해집니다. 평소에 전도 “전”자도 모르던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전도하고 핍박도 받고 심지어 순교도 합니다. 다섯째 술취하면 남에게 권한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하면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군에게 말을 걸고 싶고 누구에게 주고 싶습니다. 여섯째 술취하면 정신이 몽롱해진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하면 정신이 몽롱해집니다. 세상과 나는 간데없고 구속한 주만 보입니다. 일곱째 술취하면 냄새를 풍긴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해도 냄새를 풍깁니다. 냄새를 풍기되 예수님 냄새를 풍깁니다. 마지막 술취하면 중독된다. 그렇습니다. 최고의 중독은 하나님 중독입니다. 성령충만하면 하나님 없이는 못살게 됩니다. 성령충만, 우리 신앙생활의 능력이요 행복입니다. 구하면 주십니다. 그것이 능력입니다. 아멘.
새로운 언어
그 중에서 성령이 임할 때 나타난 중요한 현상이 있었습니다. 4절입니다. 행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다른 방언”이란 평소 쓰는 말과는 다른 말입니다. “방언”이란 헬라어로 “글롯사”입니다. 이 말은 “혀”란 뜻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혀를 통해 말합니다. 성령이 임하자 사람들은 혀를 통해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거기 모인 사람들에 같은 말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9절부터 11절데 보면 적어도 16개 나라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행2:9-11을 보십시오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포타미아, 유다와 갑바도기야, 본도와 아시아,브르기야와 밤빌리야, 애굽과 및 구레네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이들은 모두 주전 6세기, 바벨론 포로때 전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입니다. 이들이 사는 곳이 달랐다면 언어도 각각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이 제자들의 방언을 각각 자기의 언어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11절 뒷부분을 보세요.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분명 자기 나라 말은 아닌데 자기 나라 말로 알아듣는 사람들, 제자들은 대부분 무식한 갈릴리 사람들로 외국어를 공부한 적이 없는 데 어떻게 16개 나라 사람들이 그 말을 알아 들었을까? 신비합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체험했습니까? 방언도 하십니까? 저는 중학교 1학년 부흥회때 방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방언을 하냐 못하냐가 아닙니다. 진짜 방언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성령의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언어입니다. 지금까지는 나만을 위해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전혀 다른 말이 시작됩니다. 남을 위해 말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말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 말을 통해서 11절, “하나님의 큰 일을 나타내기 위해” 말합니다. 성령이 임해서 달라지는 첫 번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깨끗하고 좋은 말, 덕스럽고 아름다운 말, 무엇보다 사람을 살리는 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곧 전도의 말입니다. 전도는 내 입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을 합니다. 사도행전에 열아홉 번의 설교가 나온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 중 8개는 베드로가 한 것이고, 9개는 바울이 했고 스테반과 야고보가 각각 1번씩 했습니다. 설교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전도입니다. 전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입에 넣어주신 새 방언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전도 안하기 쉽지 않습니다. 대신 전도가 어렵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 입에 말을 넣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능력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모든 능력의 원천입니다. 평생 예수믿는 데 평생 물동이 이고 힘들게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힘들게 펌프질하며 감질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소낙비가 쏟아져야 합니다. 쏟아지는 소낙비아래 서면 온 몸이 적셔지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은혜입니다. 강물같이 흐르는 성령의 은혜, 하늘에서 내리는 단비같은 은혜, 생명 시내 흘러 마른 땅을 적시는 은혜, 그 은혜가 넘치게 하소서. 일생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이 오셨네!
이종철목사(빛과생명의교회) / 행 2:1-13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오순절은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오순절이 바로 교회의 창립일이기 때문입니다. 오순절로부터 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교회의 기원을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함께 했던 제자들의 공동체로부터 잡을 수도 있습니다. 최대한 늦게 부활절 사건 직후로 들 수도 있습니다. 부활절을 계기로 흩어졌던 제자들이 모였고,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오순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교회가 교회다운 사역을 시작한 시점이 언제냐에 주목하기 때문입니다. 본격적인 선교와 예배와 능력과 기적은 오순절 이후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오순절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사도행전 말씀 바로 앞에 요한복음이 있는데 그 마지막 21장에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20장에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도마는 그 손의 못자국과 허리의 창자국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1장으로 넘어가면 부활을 경험한 공동체라고 믿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앞장서서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요21:2)고 하며 갈릴리 바닷가로 나갑니다. 다른 제자들도 따라나섰고 그들이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묻습니다. 그때까지 빈 손이었던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합니다. 이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지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고기가 잡혔습니다. 나중에 세어보니 153마리나 되었습니다. 이때서야 제자들이 예수님임을 알아보았지만 그 앞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은 “당신이 누구냐고 감히 묻는 자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건이 만약 부활절 이전에 발생했다면 우리는 충분히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건이 부활절 이후에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절을 경험했던 제자들이 왜 이렇게 무기력하고 목표도 없이 헤매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이것이 제가 오순절이 교회 탄생일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입니다. 부활절이 예수님의 부활을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날이었다면, 오순절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안으로 들어온 날입니다. 즉 주체적으로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날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실을 머리로 아는 것과 자기 것으로 느끼는 것은 다릅니다. 아는 것과 확신을 갖는 것은 다른 차원입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수많은 지식들과 당위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하나가 뼈저린 깨달음의 과정을 통하여 자기 것이 되었을 때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주님이 자신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과 어느 날 갑자기 정말 주님의 그 사랑이 절절하게 느껴져 하염없는 눈물을 흘릴 때가 다르지 않습니까? 성령이 바로 그런 일을 우리 안에서 일으킵니다. 오순절 이후가 되어서야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더 이상 어리석을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는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9절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사도행전 1장 4절입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떠나지 말라. 기다려라. 주님은 제자들이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성령을 받을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단 기다릴 것을 명령하십니다.
오순절은 유월절 이후로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그 10일 후인 오순절에 120명의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던 다락방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을 받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부활을 목격하고도 목적의식도 없이 헤매던 베드로가 담대히 그리고 유창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하루에 3천 명, 5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일들보다 더 큰 능력들을 제자들이 행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도, 우리 교회에도 이런 오순절 사건이 필요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 그러나 능력 있는 자녀가 되고, 능력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은 또다른 차원입니다. 사람 중에도 그냥 사는 사람이 있고,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능력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성령을 받은 교회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다루고 있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은 어떤 분이고 성령이 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바람 같은 성령
성령은 바람 같습니다. 2절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급하고 강한 바람입니다. 구약에서는 성령을 하나님의 영이라 하였습니다. 그 ‘영’을 헬라어로 ‘프뉴마’라 하고 히브리어로는 ‘루아흐’라 합니다. ‘루아흐’는 숨결 혹은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영’이란 말은 우리가 흔히 말하듯 영혼처럼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호흡이며 태풍입니다. 느낄 수 있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말씀하는데 이 하나님의 영이 바로 루아흐입니다. 루아흐는 그냥 살랑거리거나 선선한 바람이 아닙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의 거친 바람입니다. 마치 토네이도와 같고 태풍과도 같은 바람입니다. 이번에 미국에 거대한 토네이도, 즉 회오리바람이 불어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영상을 보니 집을 순식간에 삼켜버릴 정도의 강력한 바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바람이 불면 없던 것이 생기고, 있던 것도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영은 역사에 변화를 일으키는 바람입니다. 정치인들이 역사를 주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인들은 단지 풍향계일 뿐입니다. 그들은 바람이 부는 방향을 향하여 몰려들고 손가락을 들고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불고 있나 살피고 있는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바람을 일으키고 바람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날 사람들 위에 하나님의 바람이 불면 사람들의 관심이 급격히 그 곳으로 쏠리기 시작합니다. 중동 땅에 일고 있는 민주화의 바람이 그것입니다. 촛불 시위나 월드컵 때 수백만을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하던 그 바람입니다. 베를린 장벽과 사회주의권을 일거에 무너뜨린 바람이었습니다. 도무지 예측할 수 없고 그 위력을 가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의 바람을 일으키시는지 긴장하며 지켜봅니다.
우리는 흔히 ‘바람났다’란 말을 씁니다. 한 번 바람나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것이 사랑이든 도박이든 바람나면 막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모두 하나님이 일으키신 바람에 바람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바람이 부니 본토 친척 아비 집보다 먼 미래의 약속의 땅만 눈에 아른 합니다. 애굽의 영화보다 저 광야와 시내산과 가나안 땅만 보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물도 집도 가정도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버리고 땅 끝을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현대 무용의 창시자로 마사 그레이엄을 들 수 있습니다. 이 그레이엄을 무용의 세계로 뛰어들게 만들었던 결정적 사건이 있습니다. 1911년 4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마사 그레이엄은 공연 포스터 한 장에 시선이 끌렸습니다. 당시 무용가 로스 세인트 데니스가 힌두교의 주신인 크리슈나의 연인 라다로 분장한 포스터였습니다. 금빛으로 번쩍이는 팔찌와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옥좌 모양의 단상에 책상다리로 앉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모습에 반한 17세의 마사 그레이엄은 아버지를 졸라 공연을 보러 갔습니다. 그레이엄은 로스가 여신의 모습으로 분장하여 보여주는 다양한 춤사위과 무대를 휘어잡는 그 매혹적인 마력에 그만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을 그레이엄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내 운명은 결정되었다. 나는 여신처럼 춤추는 것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미루다가 결국 스물두 살이라는, 무용가로서는 너무 늦은 나이였지만 그레이엄은 춤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춤바람이 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마음에 바람을 일으킵니다. 무언가 하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일으킵니다. 우리 안에도 이 바람이 불고 있습니까?
불 같은 성령
성령은 또한 불과 같습니다. 3절입니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불꽃은 마치 머리카락처럼 갈라지며 피어오릅니다. 이런 불꽃이 한 사람 한 사람 머리 위에 임했습니다. 구약에서 묘사된 하나님의 모습은 불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9장 18절에서는 시내 산에서 강림하시던 하나님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하나님의 불이 임한 곳에서는 견딜 수 없는 열정이 일어나고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불이 임했던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 말씀의 불이 임하면 잠잠하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제자들에게 필요했던 것이 바로 이 불입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으로부터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비유하고 싶습니다. 훈련과 공부는 마치 장작을 쌓아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불이 붙어야 활활 타오릅니다. 그런 점에서 훈련이나 공부는 하지 않고 성령만 받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면 불이 붙더라도 곧 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지식만 쌓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면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요한 웨슬리라고 생각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성령의 불을 받기 이전까지 매우 경건한 생활을 했으며 미국에 선교사로도 갔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열매는 없었습니다. 능력도 없고 바다의 폭풍에도 두려워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올더스게이트란 곳에서 모라비안 교도들과 함께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다가 성령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는 그 때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738년 5월 24일자 웨슬리의 일기입니다.
“그날 저녁에 나는 올더스게이트 가에 있는 기도모임에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참석했다. 거기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밤 9시 15분 쯤, 그 낭독자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변화를 가져 오시는 일을 묘사하는 말을 듣는 중에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음을 느꼈고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주께서 내 모든 죄를 없이 하였다는 확신이 생겼고 나 같은 자의 죄를 다 사하시고 죄와 죽음의 법에서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올더스게이트의 회심’이라 하며 감리교에서 기념주일로 지키는 유명한 웨슬리의 중생 체험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그로부터 6개월 후에 페터레인이란 곳에서 철야기도를 하다가 다시 한번 성령체험을 합니다. 1739년 1월 1일자 웨슬리의 일기입니다.
“미스터 홀, 킨친, 잉함, 휫필드, 허친스, 그리고 나의 동생 찰스가 우리의 형제(모라비안) 60여 명과 함께 페터레인 애찬회에 참석하였다. 끊임없이 기도하기를 새벽 3시까지 계속하였다.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강하게 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기쁨으로 소리쳤다. 많은 사람들이 땅에 엎드러졌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현존에 경외와 놀라움으로 사로잡힌 우리는 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 하나님, 우리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오 당신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 이후 요한 웨슬리의 설교에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웨슬리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몰려들었고 그 자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을 했습니다. 요한 웨슬리가 복음을 전했던 곳에는 술집과 극장이 문을 닫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세계는 내 교구다” 하며 그의 생애 동안 말을 타고 25만 마일을 다녔으며, 하루 평균 4, 5회 꼴로 총 42,000회의 설교를 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가 이처럼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웨슬리가 성령을 받기 전에도 그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했을 때서야 비로소 그는 능력 있는 전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경건훈련과 성경의 지식을 쌓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불이 붙지 않은 마른 장작은 아무 쓸데없습니다. 성령은 불입니다. 베드로가 지식이 부족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석제자로서 예수님 곁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훈련받았습니다.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불이었습니다. 불이 붙자 그는 달변가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3절에서 제사장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배우지 못한 범인으로 알았는데 기탄없이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성령의 불이 그 얼었던 입술을 녹이고, 흩어졌던 지식들을 하나로 엮었던 것입니다. 몰라서나 배움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같은 말을 해도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는 듣는 사람에게 망치와 같은 충격으로 떨어집니다.
성령의 방언
120명의 제자들이 성령 충만하여 방언으로 말을 합니다. 4절입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기 말하는 방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서술하고 있는 영의 언어라는 그 신비적 방언이 아닙니다. 4절부터 12절까지 내용을 읽어보면 그것이 각 민족 언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라 하여 전세계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러다 유대의 명절이 되거나, 노년이 되면 예루살렘에 거하기 위해 그곳으로 올라갑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기가 살았던 각 나라의 언어로 갈릴리에서 올라온 촌뜨기들이 유창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외국에는 한 번도 나가지 않았던 자들의 입에서 외국어가 술술 나왔던 것입니다. 참 부럽습니다. 우리나라 사교육 시장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영어 사교육입니다. 영어 하나 배우고자 그 많은 돈을 들여 해외 연수니 조기유학이니 보내는 것 아닙니까? 거침없이 영어 방언을 하고 있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니 차라리 우리 자녀들을 성경 읽고 기도에만 전념하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 받아 영어 방언을 받는 것이 경제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방언이 터진 것은 하나의 특수한 사건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순절을 성령강림절로 지키지만 유대인들은 이 날을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날로 기념합니다. 오순절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날이며 이 때가 유대력으로 정월 14일입니다. 이들이 애굽을 나와서 시내 산에 이른 것이 삼월이었습니다(출19:1). 그러니 대충 따지면 오순절 무렵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십계명 율법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 미드라쉬의 해석에 의하면 시내 산에서 율법이 주어질 때 당시 세계의 모든 언어라고 생각했던 70개국의 언어로 선포되었다고 합니다. 율법은 모든 백성들이 들어야 될 생명의 말씀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오순절의 방언은 복음 선포의 의미가 있습니다. 전 세계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부활과 주되심을 각국 언어로 선포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복음이 필요합니다. 호흡이 있는 모든 인생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각 나라 언어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방언의 역사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우리 입술을 녹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는 또한 민족이나 언어의 경계가 풀렸다는 것입니다. 바벨탑 사건 이후 인간의 언어는 혼잡케 되었습니다. 서로 소통이 되지 않고 민족의 특권을 주장하며 서로 고립되어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은 선민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복음 안에서는 어떤 특권이나 차별이나 경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모든 경계나 특권이 사라집니다. 성령은 담을 허뭅니다. 민족의 담과 피부색의 담과 계층의 담과 이념의 담을 허뭅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고집쟁이가 되고 더 편협해진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성령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새 술에 취한 사람들
성령을 받은 사람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 13절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술 취한 사람은 담대합니다. 제정신이 아닙니다. 즐겁습니다. 모두가 친구가 됩니다. 성령이 취한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과 그의 사명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늘 감사하고 기쁨으로 생활합니다. 경계가 사라지고 모든 사람을 친구로 사귑니다. 인색하지도 않습니다. 술 취한 사람처럼 한 말 또 하고 반복하는데 그것은 곧 ‘예수 믿으라’는 이 한 마디입니다.
우리 고전 논어에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에 미치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알아 가는 단계입니까? 좋아하는 단계입니까? 아니면 즐기고 있는 단계입니까? 하나님 말씀 따라 사는 것을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즐거워서 하고 있습니까? 참고 인내하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다만 내일의 행복을 꿈꾸며 괴롭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일 그 자체가 즐거워 기쁨과 감사로 하고 있습니까?
술 취한 사람들은 즐겁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취하게 만듭니다. 이유 없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굴러가는 휴지 하나를 보아도 새롭습니다. 즐거움은 우리 의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가득 부어질 때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의지로 기뻐하라면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부은바 된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즐거움을 불러일으킵니다. 술꾼이 술기운으로 살아가듯 우리는 성령 기운으로 살아갑니다. 알코올 중독자가 술 없이는 살 수 없듯이 우리는 성령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 중독자들입니다. 이 시간 이 말씀을 듣는 우리 위에 성령님이 충만하게 부어지길 기도합니다.
성령이 이끌어가는 공동체
이규현목사(수영로교회) / 행 2장 1~4절
사도행전을 가리켜 성령행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지만 사실은 성령행전이 더 맞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을 움직이는 힘이 성령이셨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주체는 성령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여 성령으로 끝납니다. 성령은 창세기의 창조 사역부터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성령으로 잉태되신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도 성령이 임하셨으며,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 일이 있었고,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성령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주님은 이미 공생애 마무리 단계에서 성령에 대해 예고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주님은 또 다른 보혜사가 오실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떠나는 것이 유익이라고 하셨습니다. 보혜사는 위로자, 상담자, 곁에서 도움을 주는 자, 진리로 인도하는 교사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첫 번째 보혜사이시고, 성령은 두 번째 보혜사가 되십니다.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인도해주셨는데 부활승천하시면서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또 다른 보혜사는 예수님과 같은 분을 보내주신다는 말인데 그분은 영으로 오셔서 우리를 진리와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실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을 깨닫지 못하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명령에 순종했을 때 마침내 강력한 하늘의 영이 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행 2:2~3)」 신약교회가 출발하는 순간입니다. 제도적인 유대 종교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공동체가 역사 속에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낡고 무기력한 유대 종교에 등을 돌리시고 새로운 공동체를 출발시키셨습니다. 기존의 제도적인 틀이나 조직, 성전과 같은 외형을 갖추지 않았고, 유대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형태의 기독교가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날 신약의 교회들은 사도행전의 교회의 원형을 바라보고, 그런 모습이 우리 가운데 계속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력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사도행전의 성령이 이끄시는 교회의 특징을 몇 가지만 알아보고자 합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공동체의 특징은 첫째, 역동적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역동적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이란 행동을 강조한 것입니다. 움츠리고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바람과 불의 이미지로 나타나셨는데 바람이나 불은 역동적이고, 강력한 자연현상으로 일어나듯이 영적세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구도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는 강력한 역동성이 제자들 안에 일어났습니다. 대표적으로 베드로의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그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거침없이 나왔습니다.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말하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강력하게 일어나니까 종교지도자들이 복음 전하는 것을 금지하며 위협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이 반응합니다.
「19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 4:19~20)」
증인으로서 확신에 찬 모습으로,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모습입니다. 이처럼 사도행전의 분위기는 정적이기보다는 동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잔잔한 강이 아니라 파도치는 바다의 이미지입니다. 저녁의 노을보다 아침에 솟아오르는 태양을 더 닮았습니다.
성령이 역사 하는 교회는 역동적입니다. 의식화되어 있고 형식화된 유대 종교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억지와 강요로 나오는 순종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교회에는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한번에 3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왔고, 그다음은 5천 명, 나중에는 수를 셀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통제가 불가능한 역사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약속하셨던 성령이 임하시고 위로부터 능력이 임할 때, 성령공동체는 구원의 역사가 파도쳤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팔레스타인에서 어떤 부족의 종교 하나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구원의 복음이 마치 폭발하듯이 번져나갔습니다. 성령이 역사 하시는 공동체는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잠잠하지 않습니다. 봇물이 터지듯 흘러넘치는 역동성이 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조용하다면 그냥 사람만 모였다 흩어지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사건도 마치 핵폭탄이 터진 것과 같습니다. 복음이 강력한 전염성을 가지고 번져 나갔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과 성령이 하시는 일은 확연하게 구분이 됩니다. 내가 열심히 기도하는 것과 성령께서 기도하게 하실 때 일어나는 현상은 다릅니다. 성령께서 기도의 불을 붙이시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성령께서 전도하게 하시면 그 사람에게 필요한 말을 주셔서 상대가 뒤집어집니다. 성령께서 준비된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정확한 공식이 하나 있는데,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하는 곳은 뻔합니다. 조직하고, 직책을 주고, 예산을 세우고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고, 그러다가 싸우고 시험 들고, 누가 회장을 하느냐고 선거합니다. 인간이 하는 일은 거기서 거기입니다. 힘은 들고 갈수록 지쳐서 시들시들해집니다. 내가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어도 성령을 경험하기 바랍니다. 성령의 체험 없이 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성령을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령을 경험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영의 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스스로 압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삶이 달라집니다. 성령이 없으면 신자가 아닙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성령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고, 너무 서두르거나 내가 하려고 하지 말고 성령이 일하시도록 기다리십시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성령이 없으면 신자도 아닙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신앙생활이 불가능합니다. 마른행주를 쥐어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 하시면 폭포가 쏟아지듯, 분수가 치솟아 오르듯이 강력한 공동체가 됩니다. 교회는 골수분자들이 자아도취에 빠져 자신의 구원을 노래하는 이상한 집단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예수 믿는 것을 압니다. 그곳에 교회가 있었는지, 주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인지 몰랐다면 죽은 교회이고, 예수 안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직장에 파장이 일어나야 합니다. 내 안에 계신 영이 분출되고 홀씨처럼 바람을 타고 끝없이 전염시키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것은 신적 에너지가 넘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한계를 뛰어넘고 땅 끝까지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동성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맡기면 강력한 일들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둘째, 성령이 이끄시는 공동체는 자유롭습니다. 사람이 움직이려고 하는 곳은 인간의 힘으로 제도화 조직화 되어 있습니다. 종교란 인간이 만든 것이고 다분히 인위적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교회는 제도화된 유대교와 엄격히 차별됩니다. 유대 종교는 제도적인 틀이 너무도 확고하게 잡혀있었고, 그 틀들이 낡고 생명이 없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종교가 아니라 강압적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런 종교는 두려움을 주는데 우리는 두려움의 영이 아니라 아들의 영, 자유의 영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그런 낡은 틀들을 거부했습니다. 초대교회는 직분이나 조직 중심으로 움직인 교회가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를 움직이는 힘은 오직 성령이었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졌습니다. 사도행전 교회의 초점은 단 하나, 성령을 받았는가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하면 항상 조직을 해서 회장, 부회장을 뽑고, 사업계획서를 작성해서 사람을 얽어매고 부담을 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수만 명의 초대형교회였지만, 조직이라고 할 것이 없었습니다. 고작 일곱 집사를 세운 것이 전부였습니다. 무슨 힘으로 돌아간 것일까요? 순전히 성령의 힘입니다. 성령이 사람들을 움직이셨습니다. 그 안에 주의 영이 임하신 것입니다.
반대로 현대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없어도 돌아갑니다. 조직의 힘입니다. 그런 교회는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역사 하시지 않으면 중단되는 교회가 진짜 좋은 교회입니다. 성령께서 역사 하시지 않으면 교회가 돌아가지 않아야 정상입니다. 우리는 가능한 인위적인 요소를 배제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성령이 역사 하시지 않으면 꼼짝도 하지 않으려고 할 때 성령이 주도하시는 교회가 되고 그 교회는 성령이 책임지십니다. 직분이나 제도가 없어도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성령을 받았느냐입니다.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해서 베드로가 설교합니다.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행 2:18)」 여기에 남종과 여종이라는 표현에서 남자와 여자면 되고, 중요한 것은 그 위에 성령이 임하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직분과 나이가 어떻든지 하나님의 관심은 주의 영이 그 사람에게 임했는가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직분이나 믿음의 관록이 아니고 성령이 임하시면 초신자라도 강력하게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이 신약의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은 세월이 짧고 성경지식이 얕다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성령을 구하고 성령을 받으면 여러분의 삶은 달라질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내 안에 깊은 확신으로 다가오고 이 세상이 흔들 수 없는 진리에 대한 견고함이 성령으로 인해 서게 되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안에는 오직 성령이 각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스스로 자원함으로 주의 교회를 섬기게 했습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을 위해 조직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캠페인을 벌였습니까? 구제하자고 누가 선동을 했습니까? 전적으로 자발적이었습니다. 사람들 안에 자원하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강요에 의해 집을 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성령이 역사 하실 때 그들은 기쁨으로 자신의 소유를 내어 놓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역사 하실 때 뚜렷한 특징은 자유함입니다. 성령의 공동체는 사람들을 조정하여 움직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형화될수록 조직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조직이 없을 수는 없고, 전략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령의 역사를 갈망해야 합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공동체는 가능한 인간적 요소나 힘을 빼고 성령께 맡기는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즐겁고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배나 사역에서도 성령께서 역사 하시도록 공간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예배의 순서를 짜고 계획을 하지만 성령께서 예배 가운데 어떻게 역사 하시는지 민감성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곳에는 유연하고 자유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 순서란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꼭 정해진 틀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역을 할 때도 계획은 우리가 하되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태도를 가지고 인도받고자 해야 합니다. 우리가 계획은 하되 성령께서 역사 하실 여유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성령 안에 인도를 받을 때 성령은 반드시 자유함 가운데에서도 어떤 질서를 가지게 하십니다. 성령이 역사 하시는 공동체는 자유하고 딱딱하지 않습니다. 부드러움과 우연성이 필요합니다. 제도와 관습, 문화와 전통 안에서 억압되고 묶여있는 것들로부터 풀려나야 합니다. 영의 자유를 가지고 주를 섬기고 신앙생활을 해야 파워가 생깁니다. 누군가 우리 교회에 와서 처음 느끼는 분위기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아니면 강력한 조직이, 아니면 무슨 프로그램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표현할 수 있는 힘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면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 힘이 바로 성령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모인 공동체를 누가 이끌 수 있겠습니까?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인도를 받고 움직이고자 한다면 성령은 완벽하게 우리 공동체를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하심 가운데 인도받을 때 공동체는 자유의 영으로 모두가 춤을 추듯이 주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셋째, 성령이 이끄시는 공동체는 매우 밝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그들은 날마다 모였습니다. 그냥 모인 것이 아니라 떡을 떼고 음식을 나누고 기쁨이 넘쳐흘렀습니다. 모일 때마다 같이 먹는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잔칫집과 같은 분위기입니다. 마음을 같이 했다는 말은 하나 됨과 화평함이 넘쳐났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으로 가면 물건을 통용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완전한 가족 공동체였습니다. 성도들의 관계 안에서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거의 완벽한 공동체였습니다. 이전에 유대 종교에서는 율법 아래에서 서로를 정죄하고 판단하고 따지고 경직되어 있었지만, 사도행전의 교회는 축제의 장이었습니다. 기쁨이 넘쳤습니다. 대개 잘 되는 교회는 너무 행복하고 좋으니까 자연스럽게 전도를 합니다. 우리 교회에 와 보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안 되는 교회는 “우리 교회 절대로 오지 마라. 나도 힘들다”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불만이 많고 행복하지 않습니다. 모이면 서로 판단하고 비난합니다. 무엇인가 경직되어 있고 하려고 하는 분위기보다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행 2:46)」 모이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모이면 좋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역사 하시는 특징은 잘 모이는 것입니다. 모이는 것이 좋아야 합니다. 어디에 사람들이 보입니까? 밝고 행복한 곳입니다. 사랑방 식구들이 잘 모이려고 한다면 그곳에는 모든 것이 잘될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 하시는 곳은 어둡지 않습니다. 활기차고 즐거움이 넘쳐납니다. 성령의 열매는 희락이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성령의 충만이란 기쁨 충만입니다. 마귀가 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웃는 것입니다. 마귀는 즐거움을 모릅니다. 늘 얼굴이 굳어있고 인상을 쓰는 분이 있습니까? 성령이 임하시기 바랍니다. 신약의 교회는 성도들의 얼굴이 밝습니다. 세상의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성령의 공동체가 되기 바랍니다. 축제가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잔칫집이 되기 바랍니다. 성령으로 춤추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이 이끄시는 공동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우리 모두 성령의 인도 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성령은 영이십니다. 우리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놓칠 수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누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성령의 인도 하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가장 먼저 성령의 인도 하심을 기다리십시오. 작년에 했어도 성령께 묻고, 성령께서 감동을 주시고 인도 하시는 것을 따라 움직이십시오. 기도생활을 하다 보면 성령께서 내 안에 주시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마음에 순종해 보십시오. 가장 좋은 곳으로 나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영적 민감성이 살아나기 바랍니다. 육으로 사는 자가 아니고 영으로 사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성령과 내 영이 날마다 접촉할 때 내 삶의 지평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둘째, 성령이 이끄시는 공동체가 되려면 성령께서 역사 하실 공간을 내어드리십시오. 우리는 내가 무엇인가를 잘 하려고 노력하고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내가 열심히 하는 것보다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열심이 성령의 역사를 제한할 때가 많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고 자기 수준에서 끝날 때가 많습니다. 나의 생각을 내려놓고 성령이 하시는 일에 민감하고, 내 삶의 주도권을 내어 드리기 바랍니다. 언제든지 나의 계획을 포기하고 그 뜻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을 주님이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경직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면 언제든지 그분께 내 고난과 모든 주도권을 내어드릴 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고 상상할 수 없었던 길을 걸어가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우리 공동체를 누가 이끌어 가셔야 강력한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성령님이십니다. 사람이 움직이는 교회가 아니라 성령이 직접 움직이고 이끌어가는 교회가 될 때, 우리 교회가 이 도시와 민족과 열방 가운데에서 빛을 발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그 감격으로 춤추며 인생의 전성기를 맞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성령님의 오심
노경모목사(초대교회) / 행 2:1-4
성탄절, 크리스마스는 기독교인들에게 아니 전 인류에게 있어서 축복의 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죄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날이니 이 날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값으로 인해서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져야 합니다. 여기 게시는 우리 모두는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탄절 못지 않은 중요한 날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탄절 못지않은 중요한 날이 바로 ‘성령강림절’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드디어 성령이 강림합니다. 물론 구약시대에도 성령님은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역사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이제 드디어 성령님이 본격적으로 이 세상 인류에게 역사하기 위해서, 특히 하나님의 자녀에게 역사하시기 위해 임하셨습니다. 성령님은 누구십니까? 바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을 성령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예수님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성자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는데 성령님은 왜 이 땅에 오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보다도 내가 가고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오는 것이 너희에세 더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정도로 성령님의 오심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해고 절대적으로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을 읽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 성령님이 드디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구약에서 예언하셨듯이 성령님의 오심도 구약에 예언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오심은 예언 성취였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성령님의 오심이 반드시 필요했기에 예수님은 하나님께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시도록 요청하실 생각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약속하신데로 승천하셔서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이렇게 성령님을 보내시기를 원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말할 정도로 성령님의 오심이 그렇게도 중요하셨을까요? 답은 말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생각이 아니라 성경의 답이고 에수님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런 문제를 내신다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답변하실까요? 예수님이 생각하시기에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절기는 어떤 절기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답변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을 것입니다. 성탄절과 성령강림절.
그렇다면 성령님의 오심이 왜 그렇게도 중요하다는 말씀입니까? 우리 성도들의 삶에는 항상 두 가지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한 가지는 구원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삶에서는 가장 큰 이슈요 가장 큰 축복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에게 성도라는 말이 존재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영생과 구원이라는 말이 존재하겠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이 존재하겠습니까?
또 한 가지의 영역이 있습니다. 바로 구원 그 이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구원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구원받은 그 이후입니다. 구원받고 난 뒤의 삶입니다.
구원받고 난 뒤의 삶을 정말로 잘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단순히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창조하셨고 구원하셨기 때문에 정말로 우리는 이 목적에 맞게 잘 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목적에 맞게 우리가 살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보셨나요? 생각하는 것은 끔찍해요. 그냥 생각 안하고 올바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해요.
외국에 비싼 돈을 주고 사온 명견이 있었습니다. 주인이 많은 돈을 투자해서 이 개를 잘 키웁니다. 친 자식 처럼 보살피고 잘 키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명견이 이상 한 짓을 합니다. 주인의 말을 안 듣기 시작합니다. 도리어 주인을 물려고 합니다. 주인의 가족을 뭅니다. 주인에게 대항합니다. 어느 날 주인을 덮쳐서 주인에게 큰 상처를 입힙니다. 이 명견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구원받고 난 뒤에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목적에 맞게 살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다면 팬티만 입고 불 속에 구원받은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겨우 구원만 받은 턱걸이 구원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도 3장 13-15절을 읽습니다.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불 가운데서 구원받으면 실은 팬티도 다 탑니다. 부끄러운 구원이지요. 그러나 구원받은 것만이라도 천만다행지이요
그러나 더 큰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목적대로 살지 못할 때 버림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원받은 끝이지 뭐 하나님이 중간에서 구원을 취소하시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믿으면 구원받고 한 번 받은 구원은 절대적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심각해야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가짜냐 진실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이라면 반드시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의 삶의 열매가 나타난다는 것이 성경의 원리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믿음과 삶의 행함은 분리할 수가 없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야고보서 2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기를 구원할 수 없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믿음은 가짜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구원이 따라오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예수님이 더 섬세하게 더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20절에서 23절까지 말씀입니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즉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 하나님을 말씀을 잘 귀담아 듣고 그대로 사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바울도 아니고 베드로 아닌 구원주가 되시는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제 나는 예수 믿으니 천국 가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야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강 대강 신앙생활합니다. 생활을 어떻게 하든지 간에 천국은 가는 것인데.. 어떻게 사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하겠다는 의지와 노력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뉴스를 보면 교회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 심지어 교회에서 높은 직분을 받은 자들이 불법을 행해서 그 이름이 뉴스에 오르내리고 불신자들이 욕하고 손가락질하고..
예수님이 이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구원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구원받은 후의 삶이 더 중요한 데 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하면 이 유혹많고 어려운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잘 살 수 있을까 예수님이 고민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바로 성령님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보내기로.. 이렇게 성령님이 오신 날이 바로 성령강림절 오늘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을 읽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여기서 성령님을 ‘보혜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우리 곁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요청하셔서 성령님이 우리 곁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잘 살도록 돕기 위해서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셔야 구원받은 우리로서 삶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뜻대로 잘 살 수 있게 됩니다.
자 이제 오신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하시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우리를 위해서 해 주십니다.
첫째, 성령님은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을 봅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가르치시되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사람들은 어떤 영적인 심오한 진리만을 가르치시는 줄 아는데,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가르치십니다. 말씀 그대로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읽고 듣는 성경말씀의 의미를 가르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십니다. 어려움을 피할 수 있도록 미리 가르쳐 주십니다. 영적싸움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의 생업에서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승리하고 성공하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성령님의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성령님의 가르치심은 실수가 없습니다. 온전합니다 완전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 27절에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성령님이 내 곁에 오신 목적이 나를 가르치심임을 알고 성령님을 인정하고 성령님께 가르쳐 달라고 하세요. 목사님도 목회하는데 성령님께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고 성도들도 가정 생활에 있어서 성령님께 가르쳐달라고 요청하고 생업에 종사하시는 분은 생업에 있어서 성령님께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십시오.
성령님이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우리 곁에 오셨는데, 성령님이 옆에 계신 것도 모른다면 안되지요. 가르쳐달라고 요청하지 않으면 손해를 누가 보게되지요?
둘째,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나게 하십니다.
다시 한 번요한복음 14장 26절을 일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읽은 성경말씀이 생각납니다.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제자훈련을 받은 집사님이 러시아에 사업차로 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러시아가 당당히 위험한 시기였습니다. 강도의 위협도 있고 사기맞을 위협고 있고, 미혹과 유혹의 덫도 참 많았습니다. 자기를 미혹하고 유혹하려는 위기 때에 재자훈련하면서 암송한 성경구절이 확 떠오더랍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외치고 선포했답니다. 그는 미혹과 유혹의 덫을 멋지게 피할 수 있었다고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말씀을 수없이 들었지요.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으로 들은 말씀이 그 머리 속과 가슴 속에 죽어있는 말씀으로 버려진 것 같았지만 오순절 성령님이 베드로에게 임하시고 난 뒤에는 베드로가 달려졌습니다. 그가 3년 예수님께 배우고 들은 말씀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그 말씀이 살아움직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의 베도로의 설교를 보십시오. 놀라운 설교입니다. 성령님이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은 새로운 발상을 주신다는 말씀이요,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로운 지혜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반드시 영적인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발상과 새로운 아이디어와 새로운 지혜를 주십니다.
저는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셔서 놀라운 일들을 했다는 분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여기서 그 놀라운 간증들을 제가 대신하진 않습니다. 정말로 놀랍습니다. 성령님께서 자기를 의지하는 자에게 세세하게 세심하게 자상하게 알려주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성령이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것은 놀랍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시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인정하고 계속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하면 그 사람의 삶은 모든 영역에서 점점 풍성해집니다. 반대로 성령님을 인정하지 않고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삶은 모든 영역에서 힘들어집니다. 비꺽거립니다. 소리가 납니다. 악화는 악화를 낳고 양화는 양화를 낳는다는 말과 같이 됩니다.
셋째, 성령님은 우리를 회개하게 하십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울고 불고 하면서 회개한 적이 있는 분들도 여기 있을 것입니다. 보통 성령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성령 충만 설교를 듣고 듣는 자의 마음 속에 성령님이 감동을 주실 때 그들에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7-38절의 말씀을 읽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요한복음 16장 8절에, ‘그가 와서 즉 성령님이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를 회개시킵니다. 정결하게 하십니다.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게 하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게 못하게 만들고 우리에게 열매가 없도록 만드는 우리 속에 있는 죄와 어두움의 세력을 내어 쫓으시고 청소하십니다. 너무나 고마우신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면 성령님을 우리를 항상 씻겨주십니다. 어떤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두려움과 염려와 음란과 분노를 깨끗하게 씻기십니다. 더러운 것들을 보는 우리는 눈을 맑히 씻으시고 밝혀 주십니다. 더러운 말과 분노의 말과 비판의 정죄의 말 불평과 원망을 말을 하는 우리의 혀와 입을 깨끗하게 씻겨 주십니다. 우리의 귀를 씻겨 주십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씻기시면 우리를 회개시키시면 우리의 마음 속에 기쁨이 넘칩니다. 평강이 넘치게 됩니다. 우리가 또다시 새로워집니다. 디도서 3장 5절을 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자 여러분, 예수님에 계신 것보다 성령님이 오시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고 하신 그 성령님이 지금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오늘이 바로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돕도록 보내심을 받으신 성령님이 지금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양인 우리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우리들의 그 풍성한 삶을 위해서 지금 성령 하나님이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우리 하여금 승리하고 성공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곁에 성령님이 와 계십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씻기시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우리도 하여금 생각나게 하시기 위해서 성령님이 지금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이제 어떻게 하십니까? 그 분께 감사하면서 성령님을 모셔 들여야 하지 않겠습니다. 이 시간 이렇게 기도하십시다. 나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신 하나님, 예수님 감사합니다. 나를 위해서 오신 성령님 감사합니다.
이 시간 성령님을 환영합니다. 성령님을 초청합니다. 내 속에 들어오십시오. 나의 삶과 나의 모든 것을 성령님께 맡깁니다. 성령님을 의지합니다. 성령님 나의 삶을 멋지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이제 성령님을 항상 기억하고 항상 성령님을 의지하고 항상 성령님께 묻고 항상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겠습니다. 성령님 사랑합니다. 다같이 이렇게 고백합시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