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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그로부터 2년 후
“그럼 이상으로 대원고등학교 68회 졸업식을 마치겠습니다”
-와아아아!!!!
커다란 함성소리가 대강당 안을 흔들었다. 이제 갓 스무살이 되어 성인이라는 세상에 발을 들인 아이들은, 눈앞에 펼쳐진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감에 한없이 들떠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들을 잡고 있던 마지막 족쇄이자 안전장치였던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좌중에는 벌써 대학생 태가 나는 아이들이 있는가하면, 뭐가 그리 급했는지 교복은 벌써 벗어던지고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아이들도 있었다. 검은색 일색이었던 머리칼도 제법 많은 아이들이 염색을 했는지 곳곳에 노란색, 붉은색 뒤통수가 보인다.
식이 완전히 끝나고 친구들과 함께 강당을 빠져나온 아이들은 저마다의 가족들을 찾아 흩어졌고 운동장이며 학교 곳곳에서 기념사진을 찍기 위한 전쟁이 벌어졌다.
그 속에서 마지막 교가를 제창할 때 울컥하는 마음에 잠시 기분이 가라앉았던 재휘는 이내 감정을 수습하고 강당을 빠져나왔다. 평소와 다르게 빽빽이 들어찬 자가용들과, 친구들의 가족친지들. 그리고 환하게 웃고 있는 친구들을 둘러보던 재휘는 한쪽에서 손짓하는 제 형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재호는 전역한지 세 달이 채 안된지라 아직도 완전히 군인티를 벗지는 못했지만 머리카락은 꽤 길어져 있었고, 동생 졸업식이라고 꽤나 신경을 모양새다.
“여기다, 여기!”
이제는 곧 3월인데 따뜻해 질만도 하건만 여전히 살을 에는 추위에 재휘는 목도리를 한 번 더 단단히 감싸며 형을 향해 걸어갔다.
“언제 왔어?”
“방금 도착했다. 식은 잘 봤어?”
“응. 이거”
재휘가 들고 있던 것들을 내밀자 재휘의 엄마가 받아들었다. 그것들은 생각보다 묵직했는데 졸업앨범과 졸업장이었다.
“어머, 재휘 너 우등상 받았니?”
“응. 운이 좋았어”
“식까지 보러갈걸 그랬다 얘. 단상에 서는 것도 찍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하는 엄마를 달랜 재휘가 회사 때문에 오기 힘들 거라던 아버지를 보면서 물었다.
“아빠는 어떻게 오셨어요? 힘드시다더니…”
“막내 졸업하는데 어떻게든 와야지. 이렇게 우등상도 타오는데”
하시며 재휘의 어깨를 잘했다고 두드려 주셨다. 그런 아버지에게 한번 웃어 보인 재휘가 재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형도 바쁘다더니?”
“내가 안 오면 누가 오냐. 와도 불만이냐? 자 사진 찍어요~ 사진! 남는 건 사진뿐이라니까?”
재호의 손길에 어어- 하는 새 부모님과 나란히 선 재휘는 마지막으로 재호가 꽃다발을 안겨주는 바람에 꼼짝없이 렌즈 앞에 서야했다.
“자, 웃어요 웃어~”
하나 둘 셋-을 외치며 한 컷을 찍은 재호가 잠시 찍은 사진을 확인하는 사이 어디선가 재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유재휘!!!”
“어, 성훈아”
언제 둘이 같이 있었는지 은재와 성훈,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이 한쪽에서 재휘가족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얼떨결에 부모님들끼리도 인사를 마치자 재호가 나섰다.
“너네들 셋이 찍어줄게. 서봐”
그러자 두말 않고 성훈과 은재가 재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자세를 잡았다. 그 바람에 재휘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지만 재호는 과감하게 셔터를 눌렀다.
“오~ 작품 작품. 유재휘 표정 봐라”
찍은 사진을 보며 신난 성훈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린 재휘는 형에게 부탁해 제대로 된 사진을 한 번 더 찍었고, 부모님들과 셋이 한번씩, 그리고 셋의 가족전부 한번까지 해서 꽤 많은 사진을 찍었다. 마지막에 모든 사람을 찍을 때는 재호도 찍혀야 했기 때문에 지나가던 같은 반 친구였던 아이의 손을 빌렸다.
“고마워. 축하 한다”
“재휘 너도 축하해. 우리 무사히 끝났네”
“응. 대학 붙었다고 했지? 그것도 축하해”
“너한테 축하한다는 얘기 들으니까 민망한데? 너야말로 S대 갔으면서”
“소문났냐?”
“진작에”
이후로도 몇 마디 나눈 뒤 정말로 이별의 인사를 한 재휘는 다시 가족들에게 뛰어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한 뒤 자신도 가족들에게 돌아왔다.
“그럼 우리 먼저 간다. 연락해. 입학 전에 한번 보자”
“응. 알았어”
“저희 먼저 가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 가세요”
“그래. 졸업 축하 한다 얘들아”
“감사합니다”
성훈과 은재가 재휘의 부모님에게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고, 찍은 사진들을 돌려보던 재호가 입을 열었다.
“우리도 점심 먹으러 가요. 뭐 먹고 싶냐 유재휘”
“글세…”
재호의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하던 재휘는 슬쩍 학교건물을 돌아보았다. 옆에서는 재호가 자기는 뭐가 먹고 싶니, 어디가 새로 생겼다더라 하는 얘기를 했지만 재휘는 그저 지난 3년간의 일들을 돌아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오늘은…”
“저기, 엄마아빠.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학교 좀 둘러보다 갈게요”
“뭐?”
“그냥 가기 좀 아쉬워서. 금방 따라갈 테니까, 아직 점심시간까지 시간 좀 있잖아”
“그러렴 그럼. 재휘가 학교 떠나는 게 많이 아쉬운가보네”
재휘의 엄마가 허락의 뜻을 비치고 재휘를 한번 안아준 뒤 투덜거리는 재호를 끌었다.
“천천히 둘러보고 와라. 좀 늦어도 상관없으니까. 알겠지?”
자상하게 말씀하는 아버지의 말에 재휘는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아버지도 앞서가는 재호와 아내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이 차에 올라타는 것까지 확인한 재휘는 몸을 돌려 운동장을 걸었다.
운동장에는 아직도 사진을 찍거나 친구들과 이야기중인 아이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지나쳐 재휘는 3학년 교사인 별관에 들어섰다. 자신의 반은 가장 꼭대기인 3층이었기 때문에 천천히 1층부터 한 바퀴 돌며 올라갔다. 3학년교무실과 앞 반들을 지나쳐 자신의 반에 도착한 재휘는 칠판에 정신없이 쓰여진 글귀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축! 졸업!] [드디어 해방] [축하한다] [지긋지긋한 학교] [대학 예비 붙게 해주세요!]
손끝에 하얗게 분필이 묻어났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재휘는 뒤돌아 천천히 교실을 둘러봤다.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텅 빈 교실은 마치 ‘더 이상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듯 했다. 재휘는 들어 올 때와 달리 미련 없이 교실을 나섰다.
교실을 나온 재휘는 바로 연결된 구름다리를 통해 도서관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졸업식이고 한창 겨울방학중이라서인지 굳게 자물쇠가 걸려있어서 아쉽지만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3학년건물을 나서 건물 뒤를 돌아가니 이제는 완전한 앙상한 가지만 남은 커다란 나무와, 벤치하나가 재휘를 반겼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마음이 복잡하거나 잘 풀리지 않은 일이 있을 때면 휴식처가 되어 주었던 공간. 싸늘하게 식어있는 벤치에 잠시 엉덩이를 걸친 재휘는 목도리 속으로 얼굴을 폭 묻으며 몸을 웅크렸다.
공부가 잘 안 되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찾아왔지만 이곳은, 한편으로는 아프기도 하지만 행복했던 추억을 기억하게 하는 곳이었다.
‘성우현…’
2년 전, 편지만을 남겨두고 사라져버린 우현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 지내는지, 유학간 곳에서는 별 탈 없이 잘 있는지, 그리고… 이제 완전히 나았는지.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상실감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막 새 학기가 시작했고, 2학년이 되었었지만 재휘는 가슴한가운데가 뻥 뚫려버린 것 같은 느낌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보냈다. 하지만 동아리부장이라는 직함과, 이제는 선배라는 것이 재휘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사정을 대강이나마 알고 있던 은재와 성훈의 도움으로 조금씩 이전처럼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 아닌데다가, 곳곳에 널려있는 우현과의 기억 때문에 그 생각 속에 파묻혀 한동안 멍청히 서있기 일쑤였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은…
재휘는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벤치를 조심스럽게 한번 쓸어본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본관 후동으로 향한 재휘는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단숨에 4층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복도 맨 끝에 위치한 동아리방문을 열었다.
재휘들의 졸업공연이 있은 지 보름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동방은 아직 치우지 못한 온갖 것들로 정신이 없었다. 그 모습에 한번 피식 웃은 재휘가 청소를 시작했다. 널려진 악보들을 차곡차곡 모으고 먹다버린 음료수 캔이나 과자봉지들을 쓰레기통에 한데 모아버린 재휘는 한결 깨끗해진 동아리방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가운데에 서있는 스탠딩마이크를 향해 걸어갔다. 조심스럽게 한번 마이크를 쥔 재휘는 한참을 서 있다가 이내 손을 떼었다. 그리고 창가에 다가섰다.
본관 후동에서는 본관 앞 동에 가려 운동장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불 꺼진 교실들과 아무도 없는 복도만이 눈에 띄었을 뿐이었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새파란 하늘을 한번 올려다본 재휘는 창문을 꼼꼼하게 다시 단속한 뒤 커튼을 닫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본관1층을 지나는 누군가가 재휘의 눈에 들어왔다. 졸업생인가- 생각하며 다시 커튼을 치기위해 손을 든 재휘가 멈칫했다. 1층 복도를 가로지르던 이가 어디론가 들어가 자취를 감췄다. 방향과 위치상 저곳은… 음악실이었다.
고개를 한번 갸웃하며 다시금 꼼꼼하게 커튼을 친 재휘는 졸업식 날 음악실을 찾다니, 피아노 전공자인가- 생각했다. 그리고는 내딛으려던 걸음을 멈췄다.
피아노…?
단하나의 단어에 세차게 뛰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들으면서 재휘는 자조했다. 피아노만 봐도 떠오르는 한사람 때문에 자신은 그날이후로 언제나 이 모양이었다. 과거에도 수십 번, 부질없는 기대감에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현실을 확인했을 때- 언제나 자신은 더 깊은 실망감에 빠져 허우적대야 했다.
고개를 한번 저은 재휘는 동아리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곤 본관 후동을 나와 본관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집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본관복도를 가로지르는데 어디선가 희미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잘못 들었나, 했지만 작지만 분명하게 들리는 소리에 재휘가 음악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다른 곳은 아까 보았던 음악실이었다. 살짝 열려있는 문틈사이로 들려오는 피아노소리를 잠시 멍하니 듣고 있던 재휘는 핫- 하는 웃음을 뱉었다. 그리고는 아까 들어간 사람이 마지막으로 피아노라도 치는가보다 생각하고 다시 돌아서려했다. 그때-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들어오죠
첫눈에 난 내 사랑인 걸 알았죠
내 앞에 다가와 고개 숙이며 비친 얼굴
정말 눈이 부시게 아름답죠
노래가 들려왔다. 그 기묘한 이끌림에 재휘는 자신도 모르는 새 음악실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웬일인지 낯설지가 않아요 설레이고 있죠
내 맘을 모두 가져간 그대
조심스럽게 얘기 할래요 용기 내 볼래요
나 오늘부터 그대를 사랑해도 될까요
처음인걸요 분명한 느낌 놓치고 싶지 않죠
사랑이 오려나 봐요 그대에겐 늘 좋은 것만 줄게요
들리는 노래 소리는 감미로웠다. 미성의 목소리라기보다는 조금 낮은 톤이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노래를 더 분위기 있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피아노반주에 감기듯이 조용히 울리는 목소리는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로 멋졌다.
어느새 음악실에 완전히 들어온 재휘가 그런 자신의 행동에 놀라 멈칫했지만 이내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아름다운 피아노소리에 맞춰 들려오는 노래를 경청했다.
재휘의 자리에서는 피아노에 앉은 상대가 보이지 않았다. 노래는 아직 초반이었지만 노래가 끝나면 이순간이, 상대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알 수 없는 초조함에 재휘는 입술을 깨물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 심장소리 때문에 재휘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대체 이게 무슨 기대감일까. 몇 번이나 실망을 해놓고. 몇 번이나 자기스스로 멍청함을 화를 냈으면서도.
당장에 달려가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으면서도 확인하고 싶지 않다는 이율배반적인 심정으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새에 1절이 끝나고 간주가 시작했다.
매끄럽게 들리는 피아노의 선율이 익숙하다고 느끼는 것은, 과연 자신의 착각일까.
웬일인지 낯설지가 않아요 설레이고 있죠
내 맘을 모두 가져간 그대
참 많은 이별 참 많은 눈물
잘 견뎌 냈기에 좀 늦었지만 그대를 만나게 됐나봐요
지금 내 앞에 앉은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대에게 고백할께요
조심스럽게 얘기할래요 용기 내 볼래요
나 오늘부터 그대를 사랑해도 될까요
처음인걸요 이 느낌 놓치고 싶지 않죠
사랑이 오려나 봐요 그대에겐 늘 좋은 것만 줄게요
재휘가 들어온 것을 모르는 듯 상대는 피아노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이미 클라이맥스를 지나 끝을 향해 가고 있었고,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던 재휘는 더욱더 격하게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는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끝인데…
사라져버릴 것 같은 불안감에 재휘는 잡고 있던 옷자락을 더욱 세게 쥐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피아노소리가 멎었다. 자신의 존재를 들킨 줄 알고 놀란 재휘가 무심코 한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바로 벽이 등에 닿아왔다. 나가야 하는지, 아니면 가만히 있어야하는지를 고민하는 재휘의 시야에 상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들어왔다.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인지 일어나며 고개를 뒤로 돌린 상대방은 제법 큰 키에 말끔한 수트를 입고 있었고, 바로 등을 돌려버리는 바람에 얼굴은 보지 못했다. 상대는 일어나 무언가를 한참 부스럭거리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친 재휘는 숨을 멈췄고, 힘이 들어간 손은 하얗게 뼈가보일 정도로 쥐어진 채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 바람에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었지만 재휘는 알아채지 못하고 간신히 벽에 몸을 지탱하며, 천천히 다가오는 상대방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살짝 감청색이 도는 말끔한 수트에 단정하게 넥타이까지 매고서 보라색포장지에 싸인 꽃다발을 든 상대방이 천천히 재휘에게 걸어왔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으로, 하지만 단 한순간도 재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피아노를 돌아 나온 상대는 재휘의 바로 한걸음 앞에 멈춰 섰다.
상대는 천천히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더니, 들고 있던 꽃다발을 재휘에게로 내밀었다. 그리고 눈은 여전히 재휘에게 고정시킨 채 상대의 입에서 마지막 노랫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그대를 사랑해도 될까요
놀라 크게 떠진 재휘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믿어지지 않는 현실에 재휘는 차마 손을 내밀지 못했다. 그저 무릎 꿇고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을 계속해서 살펴볼 뿐, 미동도 할 수 없었다. 혹시나 사라질까 깜빡이지도 못하는 눈에서만 끊임없이 눈물만 흘러내렸다.
상대는 그런 재휘를 재촉하지도, 말을 걸지도, 다가가지도 않았다. 그저 꽃다발을 내민 그 자세그대로 재휘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재휘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성… 우현…”
상대, 우현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러자 우현이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응. 재휘야”
“…!”
아아, 네게서 나의 이름이 불러지기를, 얼마나 기대했었는지.
“성우현…”
“그래. 재휘야”
나의 부름에 네가 대답해주는 날이 오기를 얼마나 꿈꿨는지.
“흑… 성우현…”
“응. 나야. 나 돌아왔어. 재휘야”
네가 돌아와 우리 서로 마주보는 날이 있기를 얼마나 바랬는지.
“성우현!!!!!!”
재휘가 우현을 덮치듯 끌어안았다. 덕분에 한쪽무릎만 꿇은 채로 앉아있던 우현의 몸이 넘어가 음악실 바닥에 눕혀졌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엉엉 울면서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재휘를 우현은 조심스럽게 마주 안았다. 그리고 조용히 한 번 더 속삭였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이제야… 돌아왔어”
돌아오지 않는 너를 원망하면서도, 널 잊지 못하는 나를 포기하지 못했던 나는.
지금 이 순간 네가 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꿈만 같아. 그래서 금방이라도 네가 다시 사라져버릴 것 같아.
하지만…
이제 떠나지 않을 거지? 이젠 나와 함께 있을 거지?
그렇지? 우현아…?
“피아노…?”
“응. 피아노”
“갑자기…”
“실은… 그때 거의 말은 할 수 있었거든. 처음엔 어색했는데 한번 터지기 시작하니까, 선천적으로 말을 하지 못했던 게 아니라서 속도가 빨랐었어. 조금 어눌하기도 하고 호흡은 힘들었지만…”
“……”
희미하게 웃은 우현이 조심스럽게 재휘의 젖은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손등으로 아직도 조금씩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다 설에 집에 올라갔었잖아. 그때 부모님이 그러시더라고. 이제 말하는 문제도 거의 해결이 되어 가는데 유학을 가는 게 어떻겠냐고. 사실… 나 어릴 땐 피아노 전공이었거든. 근데 말을 잃으면서 여러 가지로 자신감도 잃고… 그래서 포기했었어. 근데 부모님은 그게 안타까우셨나봐”
“……”
“내 상태는 이미 주치의선생님한테 들었다고, 원한다면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어. 그래서… 다녀온 뒤에 너한테 그랬던 거야”
“……. 친구로 지내자고? 헤어질… 생각으로? 유학…”
“으응. 그전에 너랑 문과, 이과 때문에 얘기 나눴었잖아. 사실 그때 네가 정말 부러웠어… 너 따라서 이과 간다고 했던 것도 조금 심술이었지. 난… 피아노를 포기했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마음한구석에서는 포기할 수가 없었나봐”
“…피아노를”
“응. 그래서… 이제는, 드디어 제대로 가기 시작한 내 인생을 그저 보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던 거야. 미안해… 하지만 그렇게 정을 떼놓지 않으면 널 더 힘들게 할 것 같았어”
“그건 내가 결정하는 거잖아!! 얘기해주면 됐잖아. 말해주면… 말해줬으면…!”
우는 바람에 잠겨서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 지르는 재휘를 마주보던 우현이 손을 들어 재휘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부드러운 감촉에 슬쩍 미소 지은 우현이 대답했다.
“널 보면 떠날 자신이 없었어”
“……! 그래도… 말이라도, 간다고 얘기라도…”
“너한테 연락을 하는 순간 포기할 것 같았어… 네 목소리만 들어도. 하다못해 너한테 문자한통만 받아도 그대로 너한테 달려갈 것 같아서…”
“……. 그래도… 그래도…”
“미안해…”
“그럼… 나가서는 연락할 수 있었잖아. 한번쯤은… 메일한번이라도… 아니, 편지라도”
우현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감정이 정리되지 않는 듯 정신없이 내뱉는 재휘를 우현이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분명히 보고 싶어질 텐데, 분명히 이렇게 끌어안고 싶어질 테고 네 목소리를 듣고 싶을 테니까. 사실… 지난 2년 동안 몇 번이나 핸드폰을 들었다 놓았다 했는지 몰라. 목소리만 듣고 끊을까. 그러면 되지 않을까. 모르는 번호로 하면 너도 모를 텐데. 하면서, 하루에도 수십 번 씩 고민했어. 근데… 역시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너와의 연결고리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분명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있을 것 같았어”
“…우현아”
“미안해. 정말 미안해. 지금 말하는 모든 것들이 다 이기적인 내 마음에서 나온 변명인거 알아. 결국엔 다 나를 위해서였으니까. 너를 배려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단 하나만 알아줬으면 좋겠어”
“……”
“한순간도 널 잊어본 적이 없어. 널 내 마음속에서 지워본 적이 없어"
“…우현아”
“비록 떨어져있었지만 내게 지난 2년동안 널 사랑하지 않은 시간은 내게 없었어
”“……!”
“그리고 정말 오래전부터 내 목소리로, 이 말을 하고 싶었어…”
재휘를 안은 팔에 더욱 힘을준 우현이 고개를 숙여 재휘의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 사랑해 재휘야”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우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재휘는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렸다.
나는 부끄러워 차마 하지 못했던 그 말.
너는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그 말.
오래전부터 서로 심장 속에 묶어만 둔 채로 꺼내 보이지 못했던 그 말.
“나도… 나도 사랑해 우현아”
재휘의 대답에 행복하게 미소 지은 우현이 조심스럽게 재휘의 얼굴로 다가갔다. 재휘가 천천히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서로의 입술이 맞닿는다.
이제는 모두가 빠져나간 학교는 적막감이 흘렀다. 흔들리는 커튼사이로 정오의 겨울햇살이 빼꼼히 들어오고 하늘은 여전히 구름하나 없이 새파랗다. 고요한 겨울풍경 속에서 두 소년들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만이 공간을 메워갔다.
떨리는 입술너머로 느껴지는 너의 온기가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나와 너의 손이 맞잡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웃음이 나온다.
이제는 예쁜 색을 입은 너의 목소리가 나의 세계를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이고,
그리고 이제는…
분명한 울림을 가진 너의 목소리만이 내 심장을 울리게 할 것이다.
-Fin
*끝났습니다..............
*후기
1. '너의 목소리'는 처음 시작부터가 '어린 10대소년들의 풋풋한 사랑이야기'를 쓰고싶다!!! 해서 시작한 작품이었습니다.
근래들어서 이런저런 소설들을 읽으면서(물론 장르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져있었다고 할까요.
물론 재미는 있었지만! 소재가 자극적인것들이 많아서... (예를 들면 강제로...라던가, 폭력, 살인 등)
가끔 대책없는 집착공들이 나오면 정말 공중에 하이킥을 할정도로 짜증이 났었답니다.
'이자식 내가 한대 치고싶어!'라는 심정이었죠.
그래서 시작한게 '너의 목소리'였습니다. 나 스스로 마음을 정화할수있는 소설을 쓰자! 한거죠.
연재의 계획은 없었던 작품입니다. 사실 연재는 'LST'로 끝내려고 했었거든요.
하지만 LST를 읽어주시던분들이 제 차기작을 기다리겠다고 해주시는걸 보면서, 한번 해보자 싶었습니다.
결국엔 완결까지 끌어올수 있었네요. 다행입니다.
2. 앞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본래 쓰려고 했던 목표가 새콤달콤한 이야기였기때문에,
농도짙은 어른들의 이야기가 가미되지 않은게 사실입니다. 그것에 실망하신분들도...... 많죠?
기어가는 우현과재휘의 진도에 가슴을 치셨다는것 저도 알고있습니다. 아하핳
하지만 개인적으로 미성년자인 둘을 제 상상속에서라도 벗겨놓고 이러쿵저러쿵 할수가 없어서........
어디까지나 소설자체에서 풋내가 나고싶었으니까요.
3. 집필 뒷이야기를 조금 해보자면,
사실 2학년인 강하늘군은 서브공이었습니다. 초반 플롯에서는.
재휘를 좋아하는 역할을 해줄 놈이었죠. 캐릭터도 맘에들었고. 그런 자유분방한놈도 좋아하거든요.
하지만, 중도진행중 빼버렸습니다.
또하나는, 성훈이와 은재는 서브커플이 될수도 있었다. 일까요?
아무래도 은재가 성훈이를 잘 키워줄것 같았습니다만....
이 두가지를 뺀 이유중 가장 큰것이....
제가 소설쓰면서 가장 배제하고싶어 하는게 하나있거든요.
바로 '호모월드'죠.
말하자면 에블바리게이! ....................................................................
가끔 '아니 무슨 호모가 이렇게 많아! 주인공은 물론이고 주인공친구 형제할것없이 죄다 호모잖아!'라고
할정도로 굉장한 소설들이 많아서 조금이라도 현실감을 주기 위해서는 주인공 두명의 이야기에 집중을 하는것이
가장 좋을거라고 판단했기때문이죠.
기본적으로 BL이란 장르가 판타지소설이긴 하지만(어떤한면에서는) 그래도 전 현실감 있는게 좋습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어딘가에 이런 커플이 있을거 같은게 더 재밌지 않나요?
4. 결말을 쓰면서 고민을 했던것이, 과연 이놈들을 이렇게 쉽게 만나게 해줘도 되는건가! 였습니다.
하지만 구구절절이 또 적자니 분량이 만만찮아질것같고, 그래서 그냥 깔끔하게-
멋지게 돌아와 세레나데를 불러주는 우현이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삽입곡은 파리의연인에서 박신양이 부른 노래로도 유명한 유리상자의 '사랑해도 될까요'입니다.
5. 본래 외전은 계획에 없었습니다. 본편만 몇일동안 퇴고를 했는데, 한가지 아쉬운점이 있어서 외전을 쓰기로 했습니다.
외전은 에피소드로 두개, 편수로는 3~4편정도 될것같네요. 생각보다 두번째 에피소드가 길어지는바람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외전이 남았으므로 완전한 마지막 인사는 미뤄두도록 할게요.
댓글달아주시고, 추천해주시고, 읽어주신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
첫댓글 어허헝 돌아왔어ㅜㅜ 우현아 나도 니목소리 듣고싶은데...외전은 재호님의 사랑이야기도 괜찮을듯ㅎ 아님 군대이야기?ㅎ
우현이가돌아왔어요^^잘됐어요 우현이랑재휘달달한사랑이야기듣고싶어요~^^
와..이번글은 정말 풋풋해서 좋았어요..작가님 생각으로 잘 지어진 이야기였습니다..외전도 기다리고 있을께요~
고생하셨어요~~ㅎ
고생하셨어요 재밌게잘읽었어여 해피엔딩이라기분아조아여
아~~~우현이 목소리 가지고 돌아왔군요...그렇군요...마음을 다잡고 공부하려고 그렇게 모질게 떠났던 거군요...
너의 목소리 처음부터 끝까지 잔잔하니 너무 좋았어요. 얼레리 꼴레리보다 이런 잔잔함이 좋네요.
외전이 있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여기서 율님글 그만 읽자니 너무 아쉽거든요.
잘 봤습니다.
처음으로이렇게소설을 읽으면서댓글을해보네요ㅡ나이거때문에ㅡ중요한시험도망치고ㅜ 하지만그만큼아깝지않은글이였습니다ㅡ 작가님감사^^*
작가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저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우현이랑 재휘 만나서 너무 기쁨!!
외전 외전 가대 기대 ㅋㅋ 잘봤어요^^둘이 만나서 너무좋고 노래랑 상황이
너무 잘 맞는 것 같아요*^^*
넘넘 젬있게 보고가네요 외전도 기대할께요~
아 시험기간이라 어젠못보고 오늘에서야 보네요 ㅋㅋㅋ 아 재밌다 ㅋ 농도 짙은게 없지만 반대로 없어서 둘이 가지는 느낌을 제대로 느낄수 잇엇던거 같기도 하네요 ㅋㅋ 잘보고 가요~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ㅋㅋㅋ 드뎌 둘이 만났네요...ㅋㅋ 다음 외전도 기대하고 있을게요..
우현이가 일방적으로 이별을 고해서 징짜 미웠지만 !! 이렇게 다시 돌아와서 너무 기뻐요 ~ ㅋㅋㅋ 이자식!! 재휘를 애간장태우다니~ 외전도 기대할께요~ ^^수고하셨습니다~
아아...정말 수고 하셨습니다...ㅋㅋ
흠..외전은 둘의 대학생활을 쫌 엿보고 싶은데요...ㅋㅋㅋ...
너무 욕심이 많은가요?
어쨌든 완결까지 고생하셨습니다..
벌써부터 외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