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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지도 "주경도" 상 "신라산"
"KBS 최인호 다큐로망 해신 장보고 5부 [역사는 흐른다]" 에서 방영한 내용
신라산 지명에 대한 설명내용
“신라상인이 여기에 죽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정리해서 여기다 묻었다.
그 산은 풍수적으로 보면 위치가 비교적 좋다.
신라인들이 모여 산 곳이 통원방이다.
그래서 신라인이나 디른 기타 상인도 포함해서 모이므로, 이쪽이 통원방이 됐다.“
신라의 대륙존재
- 출처 : 이일봉 저 실증한단고기(정신세계사 간)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 역시 대륙에 존재했었다는 학설은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발표한 바 있으며, 다만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을 뿐이다.
백제와 신라의 대륙존재설은, <삼국사기>는 물론이고 삼국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중국의 여러 문헌에 기록된 내용들 가운데 기상과 기후, 중국과의 거리, 고대의 지명, 특산물, 삼국의 인구, 일식과 월식의 관측지, 지리적 한계 등이 모두 삼국이 대륙에 있어야만 설명이 가능하며, 따라서 백제와 신라 역시 대륙에서 존재했다는 주장이다.
먼저, 25사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신라가 어디에서 처음 건국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당나라의 정사인 <구당서>는 신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라국은 본래 변한의 후예이다.
그 나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있다.
동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에서 끝나고 서로는 백제와 접했으며 북으로는 고구려가 있다.
동서로는 천리이며 남북으로는 2천리이다.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있다고 했는데, 이는 앞서 살펴본 대로 옛 번한에 속한 하북성과 산동성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변한이란 다름아닌 번한(번조선)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역시 25사를 인용하여 동일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신당서>와 <구당서>에 모두 이르기를 “변한의 후예들이 낙랑 땅에 있다.”하였다.
계속해서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양한지(전한서.후한서)를 살펴보건대 낙랑군은 낙양에서 동북으로 5천리에 있으며, 주에 말하기를 유주에 속하며 옛 조선국이라 한다.
낙랑은 하북성 일대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유주에 속하며, 이곳 역시 옛 번조선의 강역이었으니 옛날의 조선국이라 한 것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단군조선의 역사와 정확히 일치하는 내용으로, 이쯤 되면 낙랑과 대방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강단사학자들의 주장은 저절로 빛을 잃는다.
그들의 주장대로 지금의 평양이 옛 낙랑이라면 낙랑의 동쪽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며, 나아가 황해 건너 머나먼 한반도에 있는 평양을 두고 굳이 낙양을 기준으로 설명할 까닭도 없지 않은가.
더구나 낙양에서 동북쪽이라면 실제로도 정확히 하북성의 북경 근방, 즉 옛 유주가 되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다만 이 시기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이므로 신라가 하북성 남단에 있는 고구려와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던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신라가 대륙에서도 남쪽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구당서>에서 동과 남이 바다로 막혔다고 한 것도 대륙 동남부의 지형에 그대로 들어맞는다.
이후 고구려, 백제가 망한 뒤에 대륙의 일부는 물론 한반도에 있던 고구려와 백제의 강역까지 모두 신라의 영토가 되었으며, 그래서 이를 동신라와 서신라로 구분하는 견해도 있다.
한편 <신당서>도 <구당서>의 기록과 똑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
신라는 변한의 후예이며, 한나라의 낙랑 땅에 있다.
<구당서>와 <신당서>의 ‘변한묘예’라는 기록은 ‘변한과 묘족의 후예’로 해석할 수도 있다.
묘족도 고대 동이족의 일파로, 중국의 문헌 중에는 치우 천왕을 묘족의 군주라고 묘사한 책도 있다.
묘족은 일명 삼묘족이라 하여 지금도 양자강 일대의 여러 지역에 소수민족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도 신라가 대륙의 남단에서 존재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남사>에는 백제의 동남 5천여 리에 신라가 있다고 했으며, <수서>에는 백제의 남쪽에 신라가 접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이 모두 거짓이 아니라면 백제와 신라는 모두 대륙에 있어야만 한다.
이제 이와 같은 점을 단편적으로나마 몇 가지 정황을 통해 확인해 보자.
앞에서 고구려의 21대 문자명왕이 백제의 요서군과 백제군을 폐하면서 신라의 백성을 복건성 천주라는 곳으로 옮겼다는 <태백일사>의 기록을 살펴본 바 있다.
신라의 백성들을 대륙의 남단인 복건성 천주까지 이주시켰다는 것은 신라가 대륙에 있지 않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당시 고구려가 복건성 천주 일대로 신라의 백성을 옮긴 사실은 25사를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즉 <진서> 지리지에 의하면 복건성에 있는 천주를 진나라 때에는 진안군이라고 했는데, 그 진안군(천주)에 소속된 8개 현가운데 신라현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진안군에 신라현이 있다는 <진서>의 기록은 고구려의 문자명왕이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겼다고 한 <태백일사>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해 주며, 중국의 역사지도 역시 천주의 서북쪽에 신라현을 표기하고 있다(다음쪽 그림 참조).
그런데 현재 발행되고 있는 중국 지도에는 '신라'라는 명칭을 없애버리고 그 일대에 대신 나방이라는 지명을 두 곳에 표기하고 있다.
이는 곧 신라방이라는 의미로, 신라방이 산동성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륙의 남단에도 존재했었음을 말해준다.
특히 대륙의 남단은 동북쪽과는 달리 옛 지명의 흔적이 대부분 남아 있는 곳이다.
또 신라방이란 뜻의 나방이 있는 곳에는 현재 신교라는 지명도 있는데, 이 역시 '신라의 다리'라는 의미가 아닐까?
또 지도에서 보듯이 현재 복건성에는 나교, 나원은 물론 대전이라는 지명도 있다.
그리고 복건성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광동성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羅陽, 羅浮山, 韓江, 潮州, 潮陽 등과 같은 지명들은 결코 우리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으며, 그 광동성 서쪽에 있는 광서장족 자치구에는 아직도 羅城, 全州, 百濟라는 지명이 남아 있어 백제 및 신라와의 관련성을 말해주는 강력한 증거가 되고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태백일사>에서 고구려가 복건성 천주로 신라의 백성을 옮겼다고 한 기록과 <진서>에서 그곳에 신라현이 있다고 한 기록은 서로 일맥상통하고 있다.
<진서>는 서진(265~316)과 동진(317~420)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로, 당나라 태종때 편찬된 문헌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진덕왕 2년에 김춘추가 당나라에 들어가 태종으로부터 그 당시에 막 편찬된 <진서>를 하사받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는 아직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으로, 이는 당시 고구려와 신라가 중원대륙의 남단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고도 남는다.
즉 <삼국사기>의 이러한 기록에 따르자면 <진서>에 신라현이라는 지명이 기록된 것을 당시 신라의 조정과 당나라에서 모두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되며, 만일 그것이 사실과 달랐다면 바로 수정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기록이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으니 이는 그곳에 고구려와 신라가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이며, <태백일사>의 기록이 모두 사실임을 입증해 준다.
또한 후대에 교간된 <진서>에는 천주에 있는 신라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를 달아놓았다.
-신라성이 정주부의 동남에 있다.-
汀州는 신라현이 표기된 곳 바로 서북에 있는 현 복건성 長汀을 말한다.
그 동남에 신라성이 있었다는 말이며, 실제로 그곳에는 신라현이 있었고 지금도 新橋와 羅坊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원사>지리지에 의하면 이곳에 있는 신라를 당나라가 다스렸다고 하는데, 이 기록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곳에 신라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청나라 때에 편찬된 <대청일통지>에도 정주부에 신라성이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후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자 한반도와 대륙의 삼국 영토는 발해와 말갈, 신라와 당나라가 나누어 차지하게 되었다.
이 중 고구려가 설치했던 신라현은 당연히 신라에 귀속되었기 때문에 훗날 이곳에 신라성이 생겨난 것이며, 혹 보통명사로 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광개토경호태왕의 비문에도 신라성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멸망 이후 이곳이 신라에 귀속되었다면 당연히 신라의 역사도 등장해야 하는데, 과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이와 관련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니 신라 54대 경명왕(제위 917~924) 8년의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봄 정월에 사신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으며, 천주절도사 왕봉규도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서기 907년에 당나라가 멸망한 뒤 혼란기가 계속되던 50여 년 사이에 중원과 변방에 들어섰던 나라들을 5대 10국이라고 하는데, 그 5대 중 하나가 바로 후당(923~936)이다.
그런데 신라에서 이 후당에 조공할 때 천주절도사 왕봉규도 조공했다는 사실이 왜 신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인가?
이는 그가 대륙신라의 천주절도사였기 때문임이 분명할진대, 삼국의 대륙역사를 알지 못했거나 아니면 고의로 부정한 김부식이 모호하게 기록해 놓은 것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지리지에서 그 소재를 알 수 없다 하여 팽개쳐 놓은 360여 개의 지명 가운데 泉州도 들어 있었음을 상기하라.)
이 무렵 어느덧 신라도 기울어 경명왕 이후 경애왕과 경순왕을 거쳐 고려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바로 그 직전 경애왕 때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당(후당)의 명종이 권지강주사 왕봉규를 회화대장군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지강주사 왕봉규가 임언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니 명종은 중흥전으로 불러 물품을 하사하였다-
신라의 천주절도사로 있던 왕봉규가 신라의 강주를 관할하는 권지강주사가 되어 있었는데 후당의 명종이 다시 회화대장군으로 임명했다는 내용이다.
천주가 속한 복건성의 서쪽에 광동성이 있는데 강주는 바로 이곳에 속해 있던 지명이며, 현재의 지도에는 광녕이라 표기되어 있다.
또한 회화는 호북성에 있었던 지명으로, 지금도 회화시로 남아 있다.
생각해 보면 당시 중국에서 인사발령을 냈던 사안까지 <삼국사기>에 기록될 이유가 없고, 실제로 그러한 기록의 예도 없다.
그런데도 천주절도사 강봉규가 후당에 입조한 사실과 후에 강주와 회화로 이어지는 인사이동의 내용까지 모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된 것은 결국 그곳에 신라의 영토가 있었음을 말해주며, 김부식을 비롯한 당시의 학자들이 신라를 비롯한 삼국의 대륙역사를 간과 혹은 무시하고 모호하게 기록했을 뿐이다.
한편 방향을 돌려 복건성 북쪽으로 올라가면 양자강 하류의 남쪽에 해당하는 절강성에 닿는데, 이 일대도 신라의 강역이었음이 역사상 존재했거나 현존하는 여러 지명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우선 중국의 고지도에는 절강성 임해현 북쪽에 신라산이라고 뚜렷하게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대륙의 남단인 이곳 절강성 일대가 신라의 영토였음을 말해주는 물증이며, 청나라 때 편찬된 <대청일통지>에도 "임해현 서쪽 30리에 신라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산이 있는 절강성의 임해는 신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신라 21대 소지마립간 때의 기사이다.
-15년 가을 7월에 임해와 장령 두 곳에 진영을 설치하고 왜적을 방비하게 하였다.-
그리고 신라 30대 문무왕 15년에 당나라로부터 임해군공이라는 봉작을 받았다는 기사도 있다.
식민사학자들은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임해가 경주 월성군 동쪽이라며 반도사관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경주 월성군 동쪽 어디에 임해라는 지명이 있었으며,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작은 고을의 지명을 따서 신라왕에게 임해군공이라는 작위를 내린다는 것인가?
당시 중국에서 고구려, 신라, 백제의 왕들에게 내린 봉작은 대부분 그 나라를 대표하는 지명들로 되어 있다는 상식도 모른단 말인가?
다시 30대 소성왕 2년의 기사를 보자.
-여름 4월에 폭풍으로 나무가 꺾이고 기와가 날아갔으며...임해와 인화의 두 문이 무너졌다.
(인화-현재 광동성 북쪽에 인화라는 곳이 있다.)
또 46대 문성왕 때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9년 봄 2월, 평의와 임해의 두 전을 중수하였다.
또 47대 헌안왕 때의 기사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4년 가을 9월, 왕이 임해전에서 신하들과 회동했다.
48대 경문왕 때에도 임해전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49대 헌강왕 때의 기사에는 임해전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상 임해와 관련된 <삼국사기>의 기록들을 보더라도 신라가 한반도뿐만 아니라 대륙에서도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특히 중국의 고지도에서 임해현에 신라산을 표기하고 있는 것은 대륙신라설을 확증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이렇게 보면 앞서 고구려가 신라의 백성을 천주로 옮겼다고 하는 내용도 당시 대륙의 절강성 일대에 있던 신라의 백성을 그 남쪽인 복건성 천주로 옮겼다고 설명하면 극히 자연스럽다.
한편 신라산이 표기된 임해는 절강성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곳이 신라의 강역이었다는 사실 역시 <삼국사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신라 41대 헌덕왕 8년 때의 기록이다.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려 절강 동쪽으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자가 170명이나 되었다.
신라에 흉년이 들자 절강성 서쪽에 있는 복건성과 강서성 일대의 주민 170여 명이 동쪽에 있는 절강성으로 먹을 것을 구하러 갔다는 정확한 기록이다.
혹 한반도에 있는 신라 백성이 뱃길을 이용해 수백리 이상 떨어진 절강성까지 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소설 같은 얘기로, 굳이 대륙으로 간다면 가까운 요녕성. 하북성.산동성.강소성 등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멀리 양자강 이남의 절강성까지 간단 말인가.
앞서 절강성 서남에 있는 복건성의 천주에 대해 설명했는데, 대륙에 신라가 있었다면 천주에만 있었겠는가.
한편 <명사> 지리지에는 절강성 임해 앞바다에 高麗頭山이라는 섬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과 동시대인 청나라 때 편찬된 사서에 고구려 혹은 고려와 관련된 지명이 임해 앞바다에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는 것은 이곳이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현재의 중국 지도에는 임해 앞바다에 高島와 頭門山이라는 두 섬이 나란히 표기되어 있는데, 모두 <명사>에서 말한 고려두산에서 비롯된 지명들이다.
현재 그 북쪽에는 牛頭山과 檀頭山이라는 지명도 절강성 내에 표기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절강성 남쪽에는 평양이라는 지명도 있는데, 이는 대륙신라의 평양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는 신라 18대 실성이사금 12년 8월의 기록에서 "평양주에 큰 다리를 새로 놓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대륙에 있던 신라의 평양에 다리를 새로 놓았다는 말이며, 만일 이를 한반도에 있는 평양에 다리를 놓는 것으로 해석하는 학자가 있다면 만인의 웃음을 살 일이다.
이 무렵은 고구려가 건재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한편 고구려가 절강성 서남쪽의 복건성 천주로 신라의 백성을 옮겼다면 당시 신라와 백제의 남쪽까지도 진출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양서>와 <남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나라(신라)는 백제의 동남쪽 5천여리에 있다. 그 땅은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았고 남과 북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에 접해있다.
백제의 동남쪽 5천여리에 신라가 있다는 기록이 한반도의 지리의 조건으로는 결코 성립될 수 없음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실제로 절강성 동쪽에는 동지나해라는 큰 바다가 있으며, <양서> 제이전도 "바다 남쪽에 동이가 있다."고 기록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위의 기록에서는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의 북쪽과 남쪽에 도 있다고 했는데, 이는 당시 절강성 서남쪽의 복건성 천주를 고구려가 차지한 뒤 신라의 백성을 옮겼다는 기록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삼국의 영토가 '개의 이빨(犬牙)'처럼 얽혀 있다고 한 <삼국사기>의 기록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그 때문인지 복건성 서쪽 광동성에는 조양과 한강이라는 지명이 있다.
한편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는 부여(북부여) 제실 출신의 파소라는 여인인데, 이 파소는 훗날 선도산의 신선이 되었다는 것이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록이다. <삼국유사>는 "선도산의 신모"라 하였고, <태백일사>는 "선도산의 성모'라 하였으며, <삼국사기>는 "선도산의 지선"이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선도산이라는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선도는 대륙의 여러 곳에서 사용된 지명으로, 현재에는 양자강 북쪽의 호북성에 선도시라는 지명으로도 쓰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름이 바뀌었지만 중국의 고대 지도에는 선도산과 음이 같은 선도산이라는 산이 양자강 남쪽에 표기되어 있다.
그 위치는 신라의 임해전과 신라산이 있는 절강성 남쪽과 복건성, 강서성의 경계 지점이다. 이곳에 표기된 고대의 선도산을 현재의 중국 지도는 무이산맥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무이산이란 곧 동이의 산이라는 뜻으로, 이 역시 우리 역사의 잔영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의 대륙 지명들
주지하다시피 현재의 한국 사학자들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오는 삼국의 지명들을 거의 모두 좁은 한반도 땅에 끼워맞추면서 이것이 삼국의 전부인 양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는 삼국의 일부였을 뿐, 결코 전부가 될 수 없다.
<삼국사기>지리 편에서 대륙과 관련된 지명들 중 대표적인 몇 곳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등주.우이현.임치현.동래군-이들은 모두 산동성에 있었던 지명임은 상식에 속한다.
특히 등주와 동래를 일명 등래라고 했다.
고대 산동성 일대에 있는 동이족을 우이 혹은 래이라고 했는데 우이현과 동래현은 이에서 비롯된 지명이며, 또 임치현은 춘추전국시대에 제나라의 도읍지였다는 것 역시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지명들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고구려와 백제가 제.노.오.월 등지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2. 한양군.장사현-한양은 현재까지도 호북성에서 사용되고 있는 지명이며, 고대에도 호북성에 한양이 있었다.
장사현 역시 호남성에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지명이다. 지금은 모두가 시가 되었다.
3. 봉화현-한반도에도 봉화라는 지명이 있으나, 옛부터 현재까지 절강성 임해현의 동북쪽에 있는 지명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삼국사기>에서 "이름만 있고 자세히 알 수 없는 삼국의 땅"이라 하여 소재를 밝히지 않고 지명만 기록해 놓은 것이 무려 360여 개에 이르는데, 이들 역시 대부분 대륙에서 사용하던 지명들이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몇 곳만을 골라 그 소재를 밝혀보기로 한다.
1. 역산-현재 하북성 남쪽에 역현이 있고 이곳에 역수도 있으므로 역산 역시 이곳에 있었다. 옛 연나라가 있던 곳이다.
2. 래산.대산군-옛 제나라 땅인 산동성 일대에 있던 지명들이다.
래산은 동래군과 마찬가지로 래이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보이며, 대산이 산동성에 있는 태산을 말하는 것임은 상식이다.
현재의 지명으로는 안휘성에 대산이라는 곳이 있으며, 절강성 동쪽바다에 떠 있는 섬에도 똑같은 지명이 있다.
3. 임해진-임해 역시 신라와 관계가 깊은 절강성에 있는 옛 임해현을 말하며, 그 임해현 동쪽바다에 설치한 진영을 말하는 것이다.
4. 천주-앞서 살펴본 대로 현재 복건성에 있는 지명으로, 고대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지명 가운데 하나이다.
5. 악양성-호남성에 있는 유명한 동정호의 동쪽에 악양시라는 지명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으며, 산서성에도 똑같은 지명이 있었다.
6. 강릉향-이것이 한반도에 있는 강릉을 말하는 것이라면 김부식이 어찌 모를 수 있었겠는가?
강릉은 지금도 호북성에 남아 있는 지명이다.
그래서 김부식도 그 소재를 차마 밝히지 못했던 것이며, 앞서 고구려 편에서 설명한 사비성과 백암성의 위치도 밝혀놓지 않았다.
한편 현재 절강성에서는 임해시라는 지명뿐만 아니라 동양이란 지명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데,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 소지마립간 10년의 기사에 "동양에서 눈이 여섯 개 달린 거북을 진상했다."는 것은 바로 이를 말하는 것이다.
또 절강성과 경계하고 있는 안휘성에는 황산이라는 지명도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진성왕을 황산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모든 증거와 정황들로 보아 고구려는 물론 백제와 신라 역시 한반도뿐만 아니라 대륙에서도 활동했었다는 사실에는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세 나라 모두 그 무게중심은 대륙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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