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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층의 도덕적 해이와 부적절한 사건이 터질때 마다 연상되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란 용어다.
사전적 의미는 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 초기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되었다.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도덕의식은 계층간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으로 여겨져왔다. 특히 전쟁과 같은 총체적 국난을 맞이하여 국민을 통합하고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득권층의 솔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영국의 고위층 자제가 다니던 이튼칼리지 출신 중 2,000여 명이 전사했고, 포클랜드전쟁 때는 영국 여왕의 둘째아들 앤드루가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하였다. 6·25전쟁 때에도 미군 장성의 아들이 142명이나 참전해 35명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그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요세 각광 받고 있는 가문이 한 곳이 있는데 바로 찢어진 워커가 살고 있는 경주 최씨 집안이다. 경주에 드다든지도 거의 11년째이고 경주에 눌러 앉아 산지도 벌써 5년이 넘어가지만 정작 가볼 기회는 2008년초였다. 정계에서 시다바리를 하던 대학 선배가 정권이 바뀌게 되자 마지막으로 지인(후견인)에게 신세를 지기 위해 방문하였을 때 인데 선배 가족 얼굴이나 보러 나갔다가 전직 모 대학 사학과 교수의 가이드를 받으며 함께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까지는 경주최씨란 이야기는 들었어도 실제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별 관심도 없었다.
위치는 경주시 교동 69번지 (중요민속자료 제27호)이며 앞에서 바라보면 좌측에 유명한 경주 교동 법주집이 있고 우측으로는 경주향교와 담을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요석궁이라는 경주 최씨 자손이 경영하는 요리집(??)이 있는데 한때 경주가 관광지로 잘 나갈때는 유명인사들이나 일본 관광객들로 불야성을 이루던 식당이라 한다. 함 들어가 먹어 볼 생각을 해 보았지만 가격이 만만치가 않아서 포기를 했다.1인분에 최소2만원이상으로 3만원, 5만원, 7만원, 10만원 짤기로 구성되는데..혼자가면 손님 받지도 않고 둘이 가면 3만원짜리 즉 6만원 이상을 시켜야 한다고 하니..뭐 3명은 2만원 짜리가 가능하다고 하는데.워커 장인어른의 야그에 따르면 소문난 잔치집에 먹을거 없다고 가면 후회를 한다고 한다. 그리고 요석궁 바로 밑에는 경주 최씨 최준의 둘째 아드님인지 아님 최준의 동생 최윤의 자제분이지 먼지는 하여간 잘은 모르겠는데 그 후손의 집에 최첨단 보안 장치를 장착한 집에서 살고 계시다. 요석궁의 주인이시기도 한데 한때 경주에서 가장 유명한 분이셨다. 최씨 집안의 후손이란 것도 있었지만,,,그 보다는 완펀치 쓰리걍냉이(먼 말이여..ㅋㅋ)의 대빵, 경주 오야붕으로 더 유명했다고 하는데 이젠 연로하셔서 은퇴를 하셨다나 어쨌다나 하여간 옛 경주 시민들 사이엔 유명한 분이셨다. 그 바로 앞엔 경주 박물관을 지나 반월성을 휘감으며 흐르는 작은 개천이 있고 샛길로 빠저 쭉~~ 가면 계림과 그리고 반원성이 나오고 첨성대로 이어진다.
요석궁 안뜰 ... 항상 들리는 가야금 소리가 듣기에 좋다...^&^
이곳은 요석궁 앞 개인주택 현재 최준 선생의 후손이신 유명한 분이 살고 계신니다.. @@
애기가 너무 길어진거 같으니 일단 사진이라도 ...ㅋㅋㅋ 최씨고택을 둘러 볼까요?
가을에 찍은 사진
봄에 찍은 ...
두 일본인 여성관광객에게 친절히 길을 가르쳐 주시는 마실나온 할머니.연세가 꽤 고령이셨는데 한참을 들러 보고 나오니 아직도 일본여성들과 담소를 나누시더군요. 사진 찍다가 맞아 죽을 뻔 했음.. 야이 썩을 넘아 사진 찍지마 .. 나 이쁘고 젊을 떄 찍어야지..쭈글렁 바가지 찍어서 뭐하게 ....
여기가 경주고택 바로 앞. 사진 죄측엔 경주 교동 법주 집이 있고 우측엔 향교 담이.. 이야기가 나온 김에 경주 교동 법주에 들려 전통 경주 법주를 한병 구입하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가격은 한병에 최소 32000원 부터인데 워커는 주로 선물용으로 35000원짜리를 삽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경주법주도 있지만 진짜 오리지날은 경주 교동 법주죠...@@
일단 들어가기 전에 입구에 있는 설명 간판부터 읽어보고...하나는 최씨 고택에 대한 설명이고 하나는 전재산을 기부한 최준 선생의 간단한 양력이다.
대문 안쪽에서 바깥 쪽을 찍은 사진 좌측에 있는 쪽문이 바로 행랑채 ...
일단 안에 들어서면 보이는 것이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이다. 1970년 11월 화재로 홀라당 캠프 파이어를 해 묵고 2007년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보시다시피 사랑채는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가 ㄱ 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근데 사랑채가 머하는 곳이여??.
물통처럼 생겼는데...멀까요? 바로 물통입니다. 사람이 먹는 물을 담아 놓은 물통은 아니고 말들에게 먹을 물을 담아 놓았던 ...@@ 생긴게 좀 고풍스럽게 생겼네요... 떠있는 부레옥잠을 보고 꽃병인 줄 알았는데...@@
요건 또 뭐에 쓰는 물건인고??? 정답은 .. 정답은 ... 기억이 안나네...@@ 들었는데...가이드 하신 교수님에게.. 하여간 예전 집안에 큰 잔치나 행사가 있을때 바로 저 위에 큰 불을 피워 집안을 밝히던 용도로 쓰는 것이라 한다. 물론 그 용도로 만들어진건 아니고 아랫부분은 남산에 널린 석물(최소 천년은 넘은 것들...)을 위치이동한 것이고 윗 부분은 요세 따로 만들어 올려 놓은 것이라나...어쩐다나...@@
2009년 4월 2일 가보니 가훈 등을 친절하게 전시해 두었더군요,
사랑채 뒷태의 모습이고 우측에 입구와 행랑채의 모습이 그리고 왠 남자 두 분이...가만히 보니 한 사람이 먼가를 들여다 보는 게 분명 절도범이 분명하고 그 옆엔 망보는 넘이 틀림없는데...
사랑채의 옆 모습 이제부터 슬슬 사랑채를 구경해 볼까요 ^&^ 작은 사랑채 내부는 사람이 있어서 사진은 찍지 못했습니다. @@
한글 밑에 머라고 써있는데 너무 어려워서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영어처럼 보이는데...@@
큰 사랑채에 걸려있는 간판이라고 해야 하나 아님 현판이라고 해야하나...먼 뜻인지는 몰라도... 좋은 뜻인거 같은데.. ㅋㅋㅋ 이럴 줄 알았으면 핵교 당길때 한자 공부 좀 할껄,... @@
작은 사랑채에 걸린 현판.. 여기에도 먼가 외국말로 써 있는데...무슨 뜻인지...ㅎㅎ 저 아찌는 이곳 안채에 사시며 관리를 하시는 분입니다.. 사진 찍는 데 무례하게(???) 겐세이를... ㅡ,.ㅡ ++
그래서 다시 사진 한방 꽝 !! .ㅋㅋㅋ
큰 사랑채는 방이 두 칸 있습니다.. 작은 방과 큰방 그시대에도 부자집이라 그런지 LCD TV가 있었나 봅니다...@@
천장에 먼가 달려 있는데 무었에 쓰는 물건이지...@@
방안에도 먼가 걸려 있는데... 무슨 뜻인지는 알아도 못 가르쳐 줌... 스스로 공부하는 어린이가 돼세요 ^&^.
정답은 여름에 문을 열고 접어서 저곳에 걸어두는 장치입니다. ㅋㅋㅋ 사방 팔방으로 바람이 통하게 @@
사랑채에서 뒤뜰로 나가는 문에서 찍은 사진 조기 보이는 곳이 최씨집안 사당 건물이라 하더군요 ..
사랑채 대들보 모습.
큰 사랑채에서 찍은 대문 모습.
작은 사랑채에서 찍은 사진 .
사랑채 뒤로 가는 길 저기 사당이 보이는 군요
사랑채 뒤로 더 가자 꽤 연세 좀 드신 것처럼 보이는 석등하나가 원래 이곳에 있던 건 아니고 근처 남산에 뒹굴고 있던 신라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예전 양반집에서 가끔 집단장용으로 남산에서 득템한 물건들을 자주 옮겨 왔다고 하는데...최씨네 집도 또한..또 최씨 집에 1700년대 조선 중기이전엔 남산 근처 내남에 살았으니 .. 지금도 내남에 가면 그 옛 본가가 남아있는데 그곳이 사람이 살고 있고 또 개방이 안돼서 들어가보지는 못했다.
좀더 뒤로 가보니 잉????.용도를 알수 없는 작은 쪽문과 난방용 보일러 기름통???.. 아무리 부자집이라 해도 조선시대 뀌뚜라미 보일러가?... 사실 뒤쪽 안채엔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한다. 최씨 집안 사람은 아니고 이곳에 살며 관리도 하는 가족이 살고 있다고 하니...그집 보일러 기름통이...
조금더 들어가자. 바로 최씨집안 사당이 있는 곳입니다. 사랑채 왼쪽으로 들어가면 되죠.
구멍이 숭숭 ... 좀 으시시해서 걍 나왔죠.
사당 입구에서 찍은 사랑채 뒷태 .. 그 뒤에 대문이 까꿍하고...
옆 집엔 뭐가 있나 하고 호기심에 찰칵. 바로 옆 집인 경주 교동법주집입니다. 최씨 집안이랑은 같은 친척이죠. ^&^
마당으로 나와보니 아니 왠 수상하신 분이 한 분,....
관광객은 아닌거 같지만 왠지 학자풍의 할배가 한분 계셔서 슬쩍 말을 건네니 이곳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무료 문화재 설명을 해주시는 지금은 은퇴하신 崔 勇 夫 영남대학교 교수님이셨다. 물론 이분은 꽁짜로 해주는 건 아니고 일정 교육을 수료하고 일주일에 몇일 나오셔서 가이드를 하신면 지자체에서 용돈을 20 여만원 정도 드린다고 한다. 경주 곳 곳을 가다보면 자주 문화재 해설사 분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땐 과감하게 말을 걸어보라. 단순히 돌덩이, 흙무덤, 풀포기로 보였던 보잘것없던 것들이 모두 하나 하나 역사의 숨결을 내뿜고 있는 걸 느끼게 될것입니다.
이분에게 이것 저것 경주최씨 집안에 대해 들을 기회가 있었다. 알고보니 그 유명한 동립운동가셨던 박상진 열사께서 최준선생의 자형이셨더군요. 다 아는 이야기였지만 노구에 열변을 토하시는 교수님에게 실례가 될까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들었다. @@ 그런데 2008년 초에 선배 가족과 워커를 가이드 하셨던 분의 야그와는 좀 다른 부분이 있었는데. 그분도 예전 영남대학교 사학과에서 강의를 하셨던 분이다.
그분 말씀을 요약해 보면
가훈에 위에 6가지 내용이 있는 건 사실이나 어느 고문서에도 경주 최씨 집안이 행한 선행이 실린 경우는 없고 또 후대에 이르러서는 집안이 그리 흥하지 않았다고 하더라. 그 아우 최윤은 일제시대 말기 중추원 참의(머 하는 자리인지...)로 대표적인 친일파 였고 또 그리고 전 재산의 국가 헌납 문제는 다른 이야기가 있는데 고 최 준선생이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있어서 독립군 군자금을 맏아 보관해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 자형인 박상진 열사는 일본경찰에 걸려 결국 옥사를 하시고.. 하여간 최준씨가 그 돈을 계속 보관하였는지 아님 꿀꺽 할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잘 보관하고 있었는데..나중에 문제가 돼서.. 하여간 최준 선생이 전 재산을 영남대에 다시 기부를 하였다나 어쨌다나 인데... 상해임시정부에 가장 많은 독립자금은 제공했었다는 이야기는 문서가 6.25 때 불타 알수가 없고. 또 대구대 설립 당시 최준 선생이 거금 40 만원과 고서화 서적 등 5000 여권을 기부부한 건 사실이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대구대를 최준선생이 설립한건 아니다. 그때 최고의 기부자는 정해봉 선생으로 860 만원을 내신 분이고 그 외에도 많은 분들이 기부를 해서 대구대를 발전시키는데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경주 토박이들은 걍 부자집이었고 그보다는 그 후손인 그 요석궁 주인을 더 잘 알고 있었다. 경주 복싱계의 대부, 그러던 중 몇 년전 모 중앙지에 경주 최씨 집안 이야기가 실렸고 그 후 경주 사람들의 인식도 바뀌게 되었던 건 사실이다. 워낙 또한 궁금한 점이 많아 뒤져보았는데 과거 최부자집 선행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였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1967년 집안의 토지를 대구대에 기부를 한것을 보면 역시...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란 말이 틀린건 아니라 본다. 도대체가 누구의 말이 정답인지... 같은 학교 같은 과 교수분들도 의견이 재 각각인지...원..하여간 판단은 제 각각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호기심에 최 용부 교수님께 좀 곤란한 문제들... 박근혜 씨와 영남대학과의 관계 등을 물어 보았는데.. 역시나 민감한 부분에는 말씀을 피하시는 모습이..
인자하신 교수님과 해어져 할어버지 건강하세요 ^&^
이곳이 그 옛날 경주 최부자집의 상징 인 곳간 곳간 하나 약 천석이 들어간다고 하니 예전엔 이런 곳간이 8채가 있었다는 야그인데..지금은 이곳 관리인의 창고로 쓰인다나....@@
곳간의 정면 모습...워커집보다 클거같은 느낌이...아흑...ㅠ.ㅠ
예전엔 꼭꼭 곳간 문이 잠겨있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열려져 있더군요. 가난뱅이 워커가 올걸 알고 곳간문을 열어 놓았나 봅니다. 쌀이라도 퍼가라고..용기를 내서 열고 들어가 보았습니다. 쌀 한섬 슬쩍 하려고.
들어가보니 쌀은 없고... 건물이 수령이 다 되었나 봅니다...보강 공사를 한거 보니..임시로... 무너지기전에 쨉싸게 빠져 나와서...^^
곳간 앞에서 찍은 안채 사진.. 최씨 고택 대문을 들어서서 약간 오른 쪽으로 몇 걸음 움직여 정면을 바라보면 집구조가 두 군데로 나누어 지는데 중앙에 작은 사랑채 그리고 좌측에 큰 사랑채 우측은 안채로 바깥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깥에서 보면 작은 사랑채와 큰 사랑태가 합쳐저 ㄱ 자 형태의 모습을 하고 있고 전반적으로 보면 고택 전채 모습은 ㅁ 자 모습을 하고 있다.
사진 좌측에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보이는데 들어가보니 관리인 부부가 살고 있었다. 사람이 살고 있어서 관리인 남자가 " 너 누구야?? 하며 도리께를 들고 나올거 같기도 하고 사진이고 뭐건 다 집어 치우고 다시 마당으로 작전상 후퇴..... =3=3=3 @@ 그러나 이번엔 갔을떈 용기를 내어 안채로 처들어 갔는데.. ㅋㅋ
중문을 들어서자 먼저 맞이한건 장독대.
안채에서 찍은 마당과 사랑채로 통하는 중문
오른쪽에 할머니들 소리가 들려서 귀을 기울여 보니.. 할메 : 똥있다 아니가? 함멈 : 똥 웁다. 할머니 : 아니 .. 고사지내나? 빨리 치소..없으면 암꺼나 내고...ㅋㅋㅋ 알고보니 소일거리로 동네 할머니들이 화투를...@@
안쪽에 사도세자(정현세자)가 떠오르게 하는 물건 하나가...@@
이제 다시 대문 쪽으로 .. 잉...이곳이 행랑채라고 하는 곳인데 즉 행랑아범네 가족이 사는 곳이다. 행랑아범은 먼가하믄...긍께 좋은 야그로 하면 집사이고 대충 말하믄 하인들 가족이 사는 곳,...@@ 보통 대문 옆에 있는데 구조상 대문 담벼락과 집안 벽을 일부 공유를 ....@@ 사진 상으로는 안보이지만 죄측으로 좀 가면 곳간이 있다.
행랑채 옆 모습...처마 밑에 달인 옥수수가..하나 슬쩍 할라고 했는데..쏘샤루 뽀지숀이 있어서...단념을..@@
이번에 가니 저번에 없던 새식구가....바로 떙칠이... 사진 한장 찍자는데 바로 외면을.... ㅠ.ㅠ
그래서 한마디했죠. 야 된장 바르기 전에 똑바로 처다봐.!!! 효과가 바로 오더군요... ^&^
마지막으로 나오기전에 ...이곳이 바로 ㅋㅋㅋㅋ 칙간. 냄새.. 예전 어릴때 생각이 나는군요...밤에 재래식 화장실 갈때 그 공포... 빨간 전구가 달린 ... 일을 보다가 행여 밑에서 빨간 손이 올라와서 꼬추나 부랄을 따 갈까 벌벌 떨던 기억이...
경주 최씨 고택을 떠나기 아쉬워...워커가 온 흔적을 화장실에 남기고 나이가 중년에 들어서니 오줌빨에 힘이 없어서 ... 지송.... 이상으로 재미없는 신발장 (찢어진 워커가 사는 곳.. 경주) 구경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진은 두 번에 걸쳐 업그래이드를 했습니다. 초 가을과 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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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경주 내남면 이조리에 있는 경주 최씨 본가 입니다. 원래 이곳에 모여 살다 1700년대 경 교동으로 옮겨왔죠. 경주 교동이나 이곳이나 경주 최씨 분들이 많이 모여 삽니다.
이곳엔 경주 최씨가문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무공을 세운 최진립 장군의 위폐를 모신 충의당이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경주최씨하면 가장 유명한 분은 바로 최 치원 선생이시겠지요.
저곳은 아마 예전에 행랑채였던거 같던데...
충의당의 모습입니다.
경주 최씨고택 밖에 있는 보호수인데...수령이 꽤 오래된 것 같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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