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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벌 받은 KBS
趙甲濟
KBS 수신료를 전기요금에서 분리해 징수하는 내용의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이 5일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에서 통과됐다. 방통위는 오전 전체회의를 열고 방송법 시행령 일부 개정령안에 대한 의결을 실시했다. 표결에 참여한 2인의 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정부·여당 측 위원인 김효재 위원장 직무대행과 이상인 위원이 찬성했고, 야당 측 위원인 김현 위원은 의견을 밝힌 뒤 회의장을 나가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개정안이 방통위에서 통과됨에 따라, 이후 차관회의·국무회의 의결, 대통령 재가를 거쳐 이르면 7월 중순에 개정안이 공포돼 시행될 전망이다. 개정안이 공포되면 유예 기간 없이 즉시 시행된다.
이날 회의에 앞서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 소속 조승래·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방통위를 항의 방문하기도 했다. 이들을 면담한 김효재 위원장 직무대행은 “KBS가 방통위에 낸 의견서를 보면 분리 징수할 경우 기존 6000억원대 수신료가 1000억원대로 줄어들 것이라 지적한다”며 “자발적으로 내는 사람이 없다는 걸 KBS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KBS는 1994년부터 한국전력공사에 수신료 징수 사업을 위탁하고 30년째 TV 수신료를 전기 요금 납부 청구서에 합산해 받아왔다. 앞서 대통령실 국민제안 홈페이지에서 지난 3월 9일부터 4월 9일까지 진행한 국민 참여 토론에서 투표수 5만8251표 중 5만6226표(96.5%)가 통합 징수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KBS 수신료 분리 징수안이 오늘 방송통신위원회를 통과, 곧 시행될 예정이다. 국민세금으로 국가를 해치다가 천벌을 받은 것이다. 최근 KBS 이사 11명 중 ‘소수파(현 여권 추천)’에 속하는 권순범(전 KBS 시사제작국장), 김종민(변호사), 이석래(전 KBS 미디어텍 대표이사), 이은수(전 KBS 심의실장) 이사는 KBS 본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KBS에 대한 극단적 여론의 존재가 너무나 크게 와닿는다”며 “경영진과 이사진 전부가 책임지고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종민 이사는 “현재 성재호 KBS 보도국장을 비롯해 3연속으로 보도국장을 민노총 노조위원장 출신이 맡고 있다”며 “민노총 출신을 앉히라고 국민들이 수신료를 주었나”라고 지적했다. 그는 “KBS는 적자가 나고 있는데 왜 하필 주진우 라이브라는 편파 불공정 보도를 하는 주진우에게 연간 수억 원으로 추정되는 출연료를 주고 있나”라고도 했다.
이은수 이사는 “대통령 방미 기간 KBS1 라디오 출연진을 보면 첫날에는 민주당 및 진보 성향 의원 16명이 대거 출연해 방미를 폄훼하는 방송을 했는데, 보수 색깔 출연자는 단 한 명이 출연해 16:1이었다”며 “월드컵에도 16:1은 없다. 과거 독재 정권과 군사 정권하에서도 6:4, 5:5, 못해도 7:3으로 기계적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고 했다.
최근 KBS는 “검찰이 해외에서 북한 공작원을 접촉한 혐의를 받는 민노총 전·현직 간부를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긴 이른바 ‘민노총 간첩단 사건’이 KBS 9시 뉴스에는 나오지 않고 있다”(KBS방송인연합회)는 내부 비판에 직면했고, 민노총 집회와 관련, KBS 앵커가 9시뉴스에서 집회의 불법성 논란을 다룬 리포트를 소개하면서 사실과 다른 멘트를 했다가 옷을 바꿔 입고 멘트를 일부 수정해 재녹화한 영상으로 앵커 멘트 화면을 바꿔치기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일보는 <지난 정부 시절인 2021년 서울시장 재·보선 당시 서울 내곡동 땅 측량 현장에 오세훈 시장이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던 소위 ‘생태탕 보도’의 진원지도 KBS였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9년엔 철학자 김용옥과 배우 유아인이 진행하는 ‘도올아인 오방간다’(KBS1 TV)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미국의 괴뢰,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는 주장이 전파를 탔다>고 지적했다.
<2015년 6월, KBS 도쿄 특파원은 바로 이날(6월27일) 이승만 정부가 일본에 망명 요청을 하였다는 보도를 하였는데, 일본의 한 지방 자료를 인용하면서 날짜를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6월27일 이승만 대통령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는데 일본으로 도망치려 하였다니! 그래서 KBS 이사회는 '이승만 일본 망명 조작 보도 사건'에 대하여 논의를 하려고 하였더니 야당 추천 이사들이 방해하여 제대로 된 토의가 이뤄지지 않았었다. 국영방송이 역사를 조작해놓고 그것을 시정하려는 노력을 방해한다면 이런 언론기관은 '펜을 든 조폭'보다도 못하다.>(조갑제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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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대통령의 회고록 2권 '시련과 희망'(1946~1952)은 1950년 6월26일(한국 시간 6월27일)에 있었던 일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월요일이 되자 한국으로부터 들어오는 보고들은 어둡고 실망스러웠다. 이승만은 美 국무부의 電文 보고 형식으로 쓴 편지를 통하여 지원을 요청하였다. '6월25일 이른 아침부터 북한공산군은 남한에 대한 무장 침공을 개시하였습니다. 각하와 미국 의회도 잘 알다시피 우리 국민들은 이런 사태를 예상, 동양에서 민주주의의 보루를 구축, 세계 평화에 기여하기 위하여 강력한 국군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귀하께서 우리를 해방하고 공화국을 건설하는 데 필수적인 도움을 주신 데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였지만 용감하게 저항하고 있으니 세계 평화를 파괴하려는 책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더 강력한 지지와 효율적이고 시의적절한 지원을 호소합니다.' 李 대통령의 호소문을 가져온 한국 대사는 낙담하여 울먹였다. 나는 전투가 겨우 48시간 지났을 뿐이고, 다른 나라들은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싸워서 종국적 승리를 거두어 자유를 지켜냈다고 말하여 그를 격려하였다. 나는 그에게 버티어내라면서 지원이 진행중이라고 했다.>
2015년 6월, KBS 도쿄 특파원은 바로 이날(6월27일) 이승만 정부가 일본에 망명 요청을 하였다는 보도를 하였는데, 일본의 한 지방 자료를 인용하면서 날짜를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6월27일 이승만 대통령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는데 일본으로 도망치려 하였다니! 그래서 KBS 이사회는 '이승만 일본 망명 조작 보도 사건'에 대하여 논의를 하려고 하였더니 야당 추천 이사들이 방해하여 제대로 된 토의가 이뤄지지 않았었다. 국영방송이 역사를 조작해놓고 그것을 시정하려는 노력을 방해한다면 이런 언론기관은 '펜을 든 조폭'보다도 못하다.
트루먼 대통령의 회고록 2권 '시련과 희망(Trial and Hope)'(1946~1952) 中
*남정옥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 책임 연구원의 논문 발췌
<이승만은 6월 27일 01:00시경에 주미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이때는 경무대에서 국무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한표욱 참사관이 전화를 받았다. 한표욱 참사관은 “이때 대통령의 목소리는 지난번과는 달리 확연히 떨리는 기색이었고, 흥분을 감추려고 노력하는 듯 했다.”고 회고했다.
이 대통령은 한 참사관에게, “필립, 일이 맹랑하게 되어가고 있다. 우리 국군이 용감하게 싸우긴 하나 모자라는 게 너무 많다. 즉각 장(張) 대사를 모시고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군사원조의 시급함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대통령은 장 대사와 통화를 했다. 장 대사에게도, “우리 국민들은 잘 싸우고 있지만 무기가 없어서 큰 걱정이다. 제일 필요한 것이 탱크다. 그러니 빨리 탱크를 보내도록 주선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표욱 참사관은 국무부의 한국담당 나일스 본드(Niles Bond)에게 전화를 걸어 트루먼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그날 27일 04:00시(워싱턴 시각 26일 15:00시)에 백악관에서 장면 대사는 트루먼과 회동했다.
장 대사는 먼저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내용을 전달했다. 이때 트루먼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한국정부, 국민, 국군이 용감하게 싸우고 있으며, 국민들이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미국 독립전쟁 때 독립군이 무기, 식량난에 어려움이 겪고 낙담하고 있을 때, 프랑스의 라파예트 장군이 우리를 도와준 적이 있다. 또 1917년 유럽 제국이 독일의 침공을 받아 존망의 어려움을 겪었을 때, 미국은 그 지원에 나선 적이 있다.”고 했다.
이어 트루먼은 장 대사에게, “대한민국에 상당한 무기와 탄약을 수송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이 장비는 곧 [한국의] 군사상황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알려줬다. 이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지원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을 의미했다.
주미대사관을 전화를 걸고 난 후 이승만은 다시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민복기 비서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전화를 받은 맥아더 보좌관이 원수는 지금 자고 있다고 대답하자, “우리는 지금 잘 싸우고 있으나 무기가 없다. 그러니 탱크를 빨리 보내라. 만일에 당신들이 아니 도와줄 것 같으면 여기 미국사람들도 온전치 못할 것이라고 흥분된 어조로 말씀하시자, 프란체스카 여사가 대통령의 입을 막으시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그런 후 이승만 대통령은 03:00시에 경무대를 떠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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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6월25일 오전 10시, 남침상황을 보고 받은 직후, 곧바로 하와이에 머물던 구축함 3척에 대한 신속한 귀국지시(11:00경)를 시작으로 무초 대사와 회동(11:35), 주미대사관에 전화(미국지원 요청, 13:00), 긴급국무회의(14:00), 미국에 무기와 탄약지원 요청(오후), 미 극동군 사령부에 전투기 지원 요청(오후), 무초 대사와 회동(22:00이후),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군사경력자회의 지시(22:00이후) 등의 조치를 취했다. 다음 날에는 새벽부터 맥아더 장군실에 전화(03:00), 무초대사에게 전화(04:30), 내무부 치안국 방문(아침), 대통령 지시로 군사경력자회의 개최(10:00), 국회 본회의 참석(11:00~13:00),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 방문(14:00), 서울 시경국장 피란 건의 접수(21:00), 27일엔 주미대사관에 전화(01:00이후), 맥아더에게 전화(주미대사관 전화 이후), 신성모와 조병옥 등으로부터 피란 건의 접수(02:00), 경찰의 청량리 적(敵) 전차 진입 보고에 따라 경무대 출발(03:00), 서울역 출발(04:00) 등의 행적을 보였다.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고 총력전 태세를 갖추는 등 전쟁 지도의 방향을 정확하게 잡았다.
“종말에선 선이 악을 이긴다”
이승만은 6월25일 오전 경무대를 방문한 무초 대사에게 “즉 필요하다면 모든 남녀와 어린이까지 막대기와 돌을 가지고라도 나와서 싸우라고 호소하겠다”고 했다. 〈전쟁기간 한국은 군과 경찰뿐만 아니라 여군, 학도의용군,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소년병, 유격대, 노무자 등 全 국민이 북한 공산주의와 맞서 싸웠다. 특히 대한민국이 가장 위기를 맞았던 낙동강 전선에서 더욱 그랬다.〉(남정옥 박사)
기습을 받은 한국군과 이승만 대통령이 1940년의 프랑스군처럼 抗戰(항전) 의지를 포기하고 무너졌더라면 미군이 한국에 오기 전에 전쟁은 끝났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은 트루먼과 함께 세계사를 좋은 방향으로 바꾼 한국전의 두 영웅이다.
이승만이 서둘러 서울을 떠난 점은 그가 포로가 되면 한국군의 저항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을 고려하였을 때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후퇴하는 군과 민간인들이 渡江(도강)하기 전에 한강 다리를 폭파한 것은 군의 실책이었지 대통령이 책임질 수 없는, 전쟁에선 흔히 있는 실수일 뿐이다.
트루먼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클라크 클리포드 전 국방장관은 미군 파병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나는 제국을 보존한다는 목표가 아니라 理想(이상)을 지키기 위해 지구의 반 바퀴나 떨어진 곳의 전쟁에 참여할 나라가 (미국 말고는) 지구상에 달리 없다고 생각한다.〉
트루먼은 한국전 참전 결단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결정보다 더 어려웠다고 고백했다. 트루먼의 파병 결정에 대해 여러 가지 학문적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근본에 깔려 있었던 것은 그의 선한 마음일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8월15일 건국 선포일 연설의 첫마디로, “우리는 민주주의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민주주의가 더디지만 종말에 가서는 선이 악을 이긴다는 이치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비열한 기습 남침에 민주주의적으로 싸워서 이긴 것이다.
국가이익을 넘어선 세계적 보편 가치 구현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7월19일 트루먼에게 보낸 편지에서 〈위대한 貴國(귀국)의 병사들은 미국인으로서 살다가 죽었습니다만, 세계 시민으로서 그들의 생명을 바쳤습니다〉고 했다. 그는 이어서 〈공산파쇼 집단(Comminazis)에 의해 자유 국가의 독립이 유린되는 것을 방치한다는 것은 모든 나라들, 심지어는 미국 자신까지도 공격받는 길을 터주는 길이 됨을 알고 나라 사랑의 한계를 초월하면서까지 목숨을 바쳤던 것입니다〉면서 〈본인은 우리의 大義(대의)가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리라는 데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습니다. 본인은 정당성(right)과 강력함(might)이 우리 편이란 사실을 잘 압니다〉라고 예언했다. 이 대통령은 한국전을 선과 악의 대결로 보고, 〈이 전쟁은 남북한 대결이 아니라 소수의 공산주의자와 절대다수 韓民族(한민족)의 대결이다〉고 정의했다.
한국전 관련 외교 문서를 읽다가 보면 공산진영 지도자들은 술수만 논하는데 자유진영 지도자들은 大義를 항상 따지는 것이 대조적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겨울 맥아더의 오판으로 중공군의 개입이 이뤄지고 그들의 대공세로 유엔군이 총퇴각하면서 이산가족의 비극, 흥남철수, 그리고 서울이 다시 함락되는 위기를 만났을 때 다시 한 번 한국을 구한 사람이다. 맥아더와 영국이 한국 포기론을 꺼냈을 때 '미국은 친구가 어려울 때 버리는 나라가 아니다'면서 이를 거부, 리지웨이의 반격을 뒷받침하였던 것이다. 휴전 회담 때 반공포로 처리 문제가 쟁점이 되자 자유의사를 무시한 무조건 송환을 거부한 이도 트루먼이다. 이로써 휴전 회담이 2년을 끌었고 이 기간 미군 戰死者는 2만을 넘었다. 트루먼은 한국인 반공포로를 위하여 自國의 젊은이를 희생시킨 것이다. 국가이익보다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와 안권을 더 소중하게 여긴 사람이다. 이승만이 이런 미군 전사자에 대하여 '그들은 미국인으로 죽었지만 동시에 세계시민으로서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바쳤다'는 표현을 쓴 것은 한국전이 구현한 고귀한 정신을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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