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챙이를 표절하다
노재순
시골집 처마에 걸려 있는 씨옥수수
그 이력을 따라가다 보면
토방 위에 북적이는 검정고무신과
올챙이국수가 떠오릅니다
맷돌에 간 옥수수를 뭉근하게 끓이다
가마솥에 묵꽃 피면
바가지 구멍으로 쏙쏙 빠져나오던 올챙이들
갓 부화한 간지러운 그 이름 속에는
여름 저녁의 평상이 펼쳐지고
개구리 울음소리와
개똥벌레 불빛들도 떠다닙니다
올챙이는 안 먹는다고 투정도 한 사발
다리가 나오지 않는
올챙이들도 난처한 저녁입니다
개밥바라기 별이 다녀가고
긴 꼬리를 단 별똥별 몇 개도 떨어집니다
내 유년의 점묘로 남은 그 이름은
옥수수가 아닌 강냉이
강냉이 한 줄에는
꼬물꼬물 올챙이 태그가 살아있어요
허기가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
나는 그 꼬불길을 따라 영월로 달려갑니다
시집『꽃으로 묶어둔 시간』 2023년 현대시학
뚜껑을 따다
노재순
매화꽃 소식이 봄의 뚜껑을 따자
마당가에 내걸린 솥뚜껑이 뒤집어졌다
솥뚜껑이 돼지비계 먹고
번철이 되는 날은 동네 잔칫날이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뚜껑들이 있을까
보도블록 틈새에 핀 작은 제비꽃 한 송이가
보랏빛 시의 뚜껑을 따고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의 뚜껑을 딴다
오늘은 부모의 뚜껑을 벗은 한 남자가
베트남 어린 신부를 맞는 날
잘 익은 항아리 뚜껑이 열리고
병뚜껑이 늘어날수록 달빛도 흥청거렸다
아직도 순서를 기다리는 미혼의 뚜껑들
이미 따 버린 뚜껑들
자신을 다 비워내고 쪼그라든 뚜껑들까지
저녁의 뚜껑을 따고 아침이 오고 있다
시집 『꽃으로 묶어둔 시간』 2023년 현대시학
노재순 시인
강원도 영월 출생.
2014년 서울디지털대학교 문창과 졸업.
《문학의오늘》 엔솔로지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시간의 마시멜로』가 있음.
치악산 생명문학상, 김유정 기억하기 공모전,
50+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수상.
카페 게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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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14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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