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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8,21-28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1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22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23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24 그러나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악인이 저지르는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하면, 살 수 있겠느냐?
그가 실천한 모든 정의는 기억되지 않은 채,
자기가 저지른 배신과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25 그런데 너희는, ‘주님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집안아, 들어 보아라. 내 길이 공평하지 않다는 말이냐?
오히려 너희의 길이 공평하지 않은 것 아니냐?
26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27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28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eaching about anger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서는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바라신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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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제키엘 예언자는,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복음서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주로 예수님과 논쟁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여 율법을 따르고 지키던 이들이었습니다. 율법을 하나라도 어기지 않고 유다교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실천하며 살았던 이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실상 우리는 계명을 지키는 것도 힘겨워하며 살아갑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말 그들을 능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법은 여러 사람이 함께 사는 사회에 필요한 최소한의 규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법대로’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기준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법대로’ 살던 사람들이었고 그것이 그들 삶의 가장 큰 기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넘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법대로’ 사는 것에 만족하고 떳떳해할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생각하고 실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리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해쳐서는 안 될뿐더러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과 입으로 많은 이들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예물로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웃과 화해해야 합니다. 무엇인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용서를 청하고, 손해를 입힌 것이 있다면 갚는 것이 먼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이 지닌 의미를 일깨워 줍니다. 그 의미를 먼저 생각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로움에 이르는 길입니다.(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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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의로움은 하느님께 충실한 것을 말하고, 히브리 말로 ‘충실함’은 ‘믿음’과 같은 말에서 나왔습니다. 결국, 우리의 믿음, 곧 하느님에 대한 충실함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커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의로운 길인지 설명해 주십니다. 참으로 주님께 충실한 이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글자 그대로만 지키는 이들이 아니라, 그 깊은 의미를 생각하며 더욱 온전히 지키는 이들입니다.
사실, 형제들에게 성을 내고 바보라고 욕하는 이들, 형제들에게 원망과 원한을 사는 이들, 그래서 형제들에게 잘못하여 고소를 당하는 이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이들입니다. 형제가 고통을 느끼게 하고, 어려움을 겪게 하는, 형제의 마음을 죽이는 이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런 이들은 형제와 화해하지 않는 한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제물은 하느님께서 기꺼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봉독한 에제키엘 예언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스스로를 의인이라 생각하더라도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지 않는다면, 결국 파멸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가는 길을 되돌려 하느님께 충실히 살아간다면 구원에 이를 것입니다. 오늘 말씀들을 봉독하면서 행여 형제에게 원한을 산 이들, 고소당한 이들이 있다면,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를 청함으로써 구원으로 나아갑시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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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모독하는 일까지 금지하십니다. 분노와 모욕이 모든 분쟁의 발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마음 안에 깃든 모든 악한 요소들을 뿌리 뽑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십니다. 이어 형제와 불화 중인 사람은 그와 먼저 화해한 다음에 하느님 대전에 예물을 드리라고 명하십니다.
문제는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더욱이 용서를 청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계속하여 불의한 행동을 한다면 과연 그를 어떻게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행한 것이 아직도 자신에게 아픔으로 남아 있어 스스로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고는 그 아픔을 느낄수록 용서로부터 멀어진다고 생각하지요. 물론 용서한다고 해서 아픔이 단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아픔 때문에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 아픔은 더욱 깊어질 것이 아닙니까?
내가 상대방을 용서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미움과 같은 가시를 빼내고 진정 내 안에 평화가 넘치도록 하기 위함이지요.
나아가 불의한 자들이 진정으로 회개하도록 오히려 그들을 위해 우리가 선한 일을 해야 하지요. 예수님께서도 죄인을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치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온갖 상처투성이인 인간관계, 병든 사회 구조를 치유해 나갈 수 있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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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인간을 새로운 눈길로 바라보라고 당부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살인 같은 극단적인 범죄만을 중죄로 생각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분노나 모욕까지도 벌을 받는다고 새롭게 가르치십니다. 분노와 모욕이 살인의 발단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훼손하고 인격을 말살하는 것, 사람을 인간 이하로 대하는 것, 심지어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도 일종의 살인이라 하겠습니다. 육신의 생명을 뺏는 것만 살인이 아니지요. 요즘 우려하는 이른바 ‘왕따’ 현상도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얼마나 피해가 극심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살인까지도 가능하게 하는, 인간성의 모든 악한 요소들을 뿌리 뽑는 것이 다른 어느 것보다 중요하다고 보신 것이지요.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형제와 불화 중인 사람은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그 후 하느님 대전에 예물을 드리라고 강조하십니다. 그 형제 역시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이기 때문이지요. 만일 어떤 사람이 이웃과의 불화를 먼저 해소하려는 노력 없이, 단지 미사성제를 통해 하느님하고만 옳은 관계를 맺겠다면, 이는 순서가 바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 대전에 나서도록, 주변의 형제자매들을 늘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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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참 많은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러면서 내심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내 가까이에는 좋은 사람들만 있었으면 좋겠고, 직장이나 본당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착한 사람들만 있었으면 좋겠으며, 다른 사람 때문에 마음 상하고 피해를 입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간단히 말씀드린다면, 내 주변에 나쁜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사람은 나의 직장이나 본당에서 아예 떠났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바라기도 하고, 아니면 그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더라도 부딪히지 않고 그와 함께 지내야 하는 시간을 무사히 넘기려고만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들을 할 때, 우리는 얼마나 진심으로 그가 변화되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그가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과연 우리는 믿고 있는 것일까요?
에제키엘은 멸망을 선포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성전에서까지 우상을 숭배하고 있기에, 하느님께서는 성전을 버리셨고, 그래서 성전은 무너지고 말리라는 하느님의 선고를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꾸짖으시면서도, 그들이 악한 길을 버리고 돌아와 살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멸망이라는 극단적 과정을 통해서마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그들이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인내에 감사드리며, 어느 누구의 죽음도 바라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서 그분의 넓은 마음을 본받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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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좋을 때는 우애롭고 화평하다. 문제는 화가 날 때이다. 분노를 잘 다스리는 것이 조화로운 삶의 비결이다. 누구나 분노할 수는 있지만 지혜로운 이라면 화났을 때 결정하지 않는다. 반드시 후회하게 되어 있는 최악의 결정에 이르기 때문이다. 일본의 ‘야마기시 미요조’(야마기시즘 실현지 창설자)라는 농부는 어린 시절 ‘사람은 왜 화를 낼까?’라는 물음으로 10년을 궁리했다. 그는 마침내 ‘내 생각이 반드시 옳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깨달음에 이르러,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기에 상대방의 마음을 존중하는 데 행복한 삶이 있음을 믿고 그것을 실천했다. 그는 그러한 믿음을 벼농사와 양계에까지 적용했다.
재세례파인 ‘부르더호프 공동체’ 가족은 예배가 시작되면 먼저 감정이 상한 형제를 불러 밖으로 나가서 화해하고 들어온다. 예물을 바치기 전에 그렇게 하라고 복음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대화가 길어져 예배가 거의 끝날 무렵에야 손을 잡고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예배보다 용서와 화해를 더 소중히 여기며 사이좋음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가장 좋은 예물이라는 믿음에 충실하다. 그들은 대화할 때 그 자리에 없는 누군가에 대해 절대로 말하지 않는 규칙을 가지고 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마태 18,15)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인데, 이를 ‘사랑으로 직접 말하기’라 한다.
기질적으로 화를 잘 내는 사람은 공동체 관계가 좋지 못하여 문제의 장본인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 형제가 다른 사람의 잔소리를 듣기 위해서 공동체에 들어온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자기 생각이 반드시 옳다는 믿음을 버리고, 타인의 허물을 들추지 말며, 화났을 때 말하지 않기만 실천해도 놀랍게 변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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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말에 대하여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바보나 멍청이라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니 말을 할 때 좀 더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탈무드』에도 말로 생기는 피해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남을 헐뜯는 말은 살인보다도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살인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으나, 남을 헐뜯는 말은 세 사람의 인간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곧 남을 헐뜯는 말은 그 말을 퍼뜨리는 사람 자신, 그것을 반대하지 않고 듣고 있는 사람, 그 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을 죽입니다.” 한 번 입에서 나간 말은 자기 자신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물론이고 듣는 사람, 그 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모두 악영향을 미칩니다.
어떤 사람이 마귀가 들렸다고 하면 그의 머리에 뿔이 두 개 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라틴 말에서 ‘마귀’라는 말은 ‘디아볼루스’(Diabolus)입니다. 이 말은 ‘중상 모략하는 자’, ‘비방하는 자’, ‘이간질하는 자’, ‘두 마음을 품은 자’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남을 중상하고 비방하며, 두 마음을 품고 사람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것은 마귀나 하는 짓입니다. 마귀라는 말이 이러한 뜻을 지니고 있다면, 나는 과연 평소에 어떤 말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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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가장 어려운 문제는 ‘인간관계’입니다. 가족이든 이웃이든, 서로의 관계에서 늘 우리는 웃고 우는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숱하게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는 것 같지만, 진정으로 가깝게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은 어쩌면 승합차 한 대 인원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내 인생의 승합차에 동승하고 가는 가까운 사람들 안에서 상처를 주고받으며, 미움으로 고통을 겪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몸과 같아서, 누군가에게 말이나 행동으로 상처를 받으면 ‘출혈’을 하게 됩니다. 특별히 가까운 사람에게 받는 상처는 더욱 큰 아픔이 따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출혈을 막는 방법은 ‘미움’이라는 압박 붕대로 눌러서 지혈시키는 것입니다. 곧, 가해자를 미워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미움은 자신의 상처를 보호하려는 일종의 심리적 방어 기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을 치료하는 약은 용서와 화해입니다. 가해자가 진심으로 다가와 용서를 청하면 화해할 수 있습니다. 내적으로 화해가 이루어지면 피해자의 마음의 상처는 비록 흉터는 남지만, 출혈이 멈추고 새살이 돋아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까운 사람에게 얼마나 자주 큰 상처를 주는지요? 지금도 나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며 누군가가 아파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받은 상처의 고통보다 내가 상대방에게 준 상처의 아픔을 더 크게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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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스라엘에는 ‘도피성’이 있었습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이거나 중상을 입힌 이들이 숨어 살던 곳입니다. 반드시 레위 지파 영역 내에 설치했습니다. 유목민에게 보복은 당연했습니다. 그러기에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도피성에 들어가면 안전합니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해칠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도피성은 ‘스켐’으로, 예루살렘 북쪽에 있었습니다.
이렇듯 구약의 ‘도피성’은 살인자를 보호하는 곳입니다. 물론 우발적인 사고를 낸 사람입니다. 그렇더라도 철저한 율법 국가에 이런 제도가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살인은 또 다른 살인으로’ 이어지기에 보복을 막는 차원에서 생겨났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넘어서라고 하십니다. 그들처럼 글자나 따지는 형식주의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아버지였던 모세는 ‘도피성’까지 만드는 유연함을 지녔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길을 그렇게 걸어선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살인이라는 어마어마한 것에 매달리기보다 형제에게 욕하고 성내는 것에 더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씀입니다. 가까운 사람들은 소홀히 하면서 ‘먼 곳의 사람들’에 대해 더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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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바치는 예물보다 형제들과 화해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며 먼저라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불목하여 싸우는 인간들에게서는 그 어떤 예물도 받고 싶지 않다는 뜻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어제 복음 말씀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러한 주님의 마음은 진정 사랑이 넘치는 부모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유산을 더 많이 상속받으려고 서로 헐뜯고 싸우는 형제들이 있다고 합시다. 이들은 서로 반목하여 원수처럼 지내면서도 저마다 부모 앞에 나타날 때에는 온갖 예를 갖추고 선물을 나름대로 정성껏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부모가 그러한 문안 인사와 선물을 반기겠습니까? 진정 부모를 위한다면 서로 화해하고 잃어버린 우애를 되찾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가족이나 친지 또는 이웃과 서로 불목하여 마음이 불편한 상태에 있다면 기도하는 마음으로 먼저 상대편을 찾아가 화해의 마음을 전하려는 용기를 내어 봅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화해하는 바로 그 자리에 분명 함께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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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무시하기에 그를 바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얕보는 마음이 있기에 그를 멍청이라고 합니다. 복음 말씀은 그런 말과 행동을 삼가라는 내용입니다. 형제를 무시하고 얕보면 지옥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합니다. 협박이 아닙니다. 그만큼 가까운 사람을 잘 대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말로써 상처 주지 말라는 것이지요. 허물이 없기에 ‘아무렇게나 말한다’고 하지만, 절대로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본인은 허물없이 말한다지만, 듣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끔은 상대의 마음이 되어 봐야 합니다.
“그것도 못 들어? 한물갔구먼.” 아내는 무심코 한마디 합니다. 남편이 김칫독을 들려는데 꿈쩍을 않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은 뻔한데, 힘을 쓸 수 없었던 것이지요. ‘벌써 늙었나!’ 헛웃음을 참는데, ‘한물갔다’고 한 것입니다. 분위기가 썰렁해집니다. 아내가 멀리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당신은 좀 빠져라.” 시누이 생일 날, 아가씨들과 어울린 아내에게 남편은 무심코 한마디 합니다. 농담인 줄 알지만 얼굴이 굳어집니다. 억지웃음으로 자리를 뜨지만, 가슴에는 구멍이 뻥 뚫립니다. ‘매양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나?’ 남편이 멀리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말을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가족에게는 더 조심해야 합니다. 평생 사랑하며 살아야 할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허물없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나 다른 내용입니다.
종종 고해소에 앉아 있다 보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을 만납니다.
“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가족의 강요로 고해소에 들어왔거나, 의무적으로 봐야 하는 판공성사를 위해 들어온 사람일 것입니다. 고해소 밖에서 ‘내가 어떤 죄를 지었지?’라면서 많은 생각을 하셨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법을 어겨서 수갑을 찰 어떤 죄도 짓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 미사는 한 번도 빠지지 않으셨어요?”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바쁘게 일하다 보면 많이 빠질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주일 미사 빠졌다고 해서 감방에 가는 것은 아니잖아요?”
이분은 사회법의 기준에 맞춰서 자기 죄를 살펴본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아무런 죄가 없는 것이지요.
한 남성이 어느 공공장소에서 소변이 너무 급해서, 오른쪽 손을 자신의 자동차에 올려놓고 자동차 뒷바퀴에 일을 보았습니다. 마침 지나가는 경찰이 이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남성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공공장소에서의 노상 방뇨로 경범죄 처벌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경찰은 흘낏 한 번 보고는 그냥 지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이 남성은 영국에서 이런 행동을 한 것이고, 영국에서는 법으로 괜찮다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역, 나라마다 다른 법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의 법과 이 세상의 법이 같을까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법과 다른 하늘나라의 법을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해 주십니다.
율법의 옛 계명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라고 이르지만,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다른 누군가에게 성을 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하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이보다 더 심한 욕도 퍼붓는 우리는 아닐까요? 분명히 이 세상의 법보다 훨씬 더 엄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법은 마음에서 죄의 뿌리마저 뽑아 버리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죄의 뿌리를 뽑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너무 심한 법 규정이라고 하면서 그 나라에 살지 않겠다고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너무 심하다면서 위헌 신청을 하시겠습니까? 그 나라에 살려면 그 나라의 법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죽음 뒤에 우리 모두 예외 없이 그 하늘나라에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법이 됩니다. 죄의 뿌리를 뽑고 대신 그 자리에 사랑이 가득하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은총을 우편이나 택배로 보내지 않으십니다. 직접 전해주십니다. 그러니 은총을 받으려면, 우리가 하느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연필이 주는 교훈
어느 책에서 연필이 주는 교훈이라는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정리해서 적어봅니다.
첫째, 연필은 뾰족하게 깎아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을 깎아야 합니다. 이렇게 다듬는 것은 고통이 될 수도 있지만, 나의 쓸모를 높이게 됩니다.
둘째, 가장 중요한 것은 밖이 아니라 안에 있습니다. 겉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연필심이 부실하면 좋은 글씨를 쓸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내면의 성장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셋째, 연필로 잘못된 글씨는 지우개로 쉽게 지울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즉시 지워서 바로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 연필로 글을 쓰지만, 훌륭한 글은 연필을 손에 쥔 작가에게 나옵니다. 나를 이끄는 존재인 주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섯째, 연필로 쓴 것을 지워도 자국이 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도 늘 흔적을 남깁니다. 그 자국들이 내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연필이 주는 교훈을 생각하면서 지금의 나를 어떻게 변화시킬지를 묵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행위보다 감정이, 감정보다 자기 정체성이 더 중요하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형과 동생이 싸웠습니다. 그것을 보고 엄마가 말했습니다.
“먼저 용서하는 사람이 형이다.”
역시 한 살이라도 더 먹은 형이 먼저 손을 내밉니다.
“야! 미안하다.”
아마도 동생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면 형의 스타일은 더욱 구겨졌을 것입니다. 동생은 원래 동생이니 동생이라는 말을 들어도 아무 상관이 없겠지만 형은 ‘동생’이라는 말을 들으면 곤란해집니다. 그러므로 “먼저 용서하는 사람이 형이다.”라는 말은 사실은 형이 먼저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이 짧은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내가 누구냐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행위도, 감정도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행동과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내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아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의롭다는 말은 주님 마음에 든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들의 의로움은 ‘행위’의 의로움입니다. 그들은 율법에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라고 나와 있다면 살인하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보다 더 높은 단계의 의로움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행위의 의로움보다 더 높은 단계의 의로움은 ‘감정’의 의로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오신 것은 행위를 넘어서는 감정의 의로움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은 이 감정으로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오늘의 이 말씀이 그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형제에게 화를 내고 욕을 했다고 지옥에 던져진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행위로 살인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정’을 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행위보다는 감정을 의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감정을 항상 기쁨과 평화, 사랑으로 지켜나갈 수 있을까요?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가 사랑과 기쁨과 평화 등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다. 내가 고아인 줄 알았다고 참 부모님을 찾게 되었다면 기분이 어떨까요? 지금까지 아무리 자기를 괴롭혔던 사람이 있더라도 그 부모님을 찾은 기쁨에 그 미운 마음이 싹 사라질 것입니다. 이렇듯 기분은 결국 자기 정체성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기쁨으로 우리 감정을 의롭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정체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면 감정의 흐트러짐을 막을 수 있습니다.
보물섬이라고 하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스코틀랜드의 작가 로버트 스티븐슨이 가족들과 함께 주님의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부인이 놀라 뒤따라 나가서 남편을 붙들고 왜 그러느냐고 물었습니다. 스티븐슨이 말했습니다.
“오늘은 내가 죄를 용서해달라고 주기도문을 주님께 드리기가 괴롭소, 마음이 편치 않소.”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의 자녀로서 유지해야 하는 감정이 있습니다. 감정은 정체성과 직결됩니다. 따라서 하느님 자녀로서의 명확한 자기 정체성은 행위의 의로움을 넘어서 감정까지 의롭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판도라의 상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자 안에는 인간의 삶에 고통을 주는 것들이 들어있었습니다. ‘고통, 절망, 욕망, 근심, 걱정, 시기, 질투, 열등감’과 같은 것입니다. 판도라는 상자를 열어보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지만 상자 안이 너무 궁금해서 기어코 열고 말았습니다. 신화는 이야기합니다. 상자 안에 하나가 더 있었는데 그것은 ‘희망’이었다고 합니다. 험난한 세상에서 사람들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희망’이었다고 합니다. 희망에 대한 이야기 중에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마지막 잎새’입니다. 병들어 죽어가는 소녀는 가을에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나무 잎사귀를 보았습니다.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자신도 죽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잎새는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잎새는 소녀에게 희망이 되었고, 소녀는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물질주의는 모든 것이 쪼개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있는 것들은 그 원인을 알면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영적인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각각의 모든 것들은 사실 전체 안에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법칙과 질서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마음에 따라서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아주 작은 티끌에서도 우주 전체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한 잔의 물에 있는 에너지로도 지구상의 모든 물을 증발 시킬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물질적인 법칙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하느님은 눈에 보일 것 같지 않는 그 뉘우침을 보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을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비록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일지라도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하느님 사랑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햇볕을 주십니다. 그 사랑은 회개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사람이 안고 사는 분노도 나쁘지만, 그것보다 남을 멸시하는 태도가 더 나쁩니다. 모든 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 멸시, 비난 등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말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비난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보다는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고,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하고 친구를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동창신부가 제게 본당 사순특강을 부탁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준비를 했는데 동창신부는 제게 이야기 한 것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동창신부님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을 했고, 저에게도 사과를 하였습니다. 그랬으면 된 것인데 저는 다른 동창들에게 친구의 잘못을 또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친구가 제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친구도 사과를 하였고, 잘못을 인정했으니 더 이상 친구의 허물을 이야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순간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이야기가 옳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잘못된 말은 세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첫째는 잘못된 말을 하는 본인의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 못하는 상대방의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셋째는 험담과 비난을 받는 당사자의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하느님의 의로움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의 말씀은 인간을 위한 생명의 말씀이다. 당신께서 한번 말씀하시면 우리에게 충실하시다. 그 약속은 당신께서 일방적으로 하신 약속이다. 우리가 청해서 하신 약속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완전하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완전한자 되라 하신다.
그런데 인간은 완전하게 되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은 제멋대로여서 자기가 상대에게 약속을 해 놓고도 자기가 불리하면 그 약속마져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상대에게 성을 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비웃으며 자기 유리한 쪽으로 지껄여댄다. 사람이 완전하지 못해 서로에게 의롭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가 의롭게 살기 위하여 하느님의 의로움을 익혀가야 한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그랬다. 그들은 하느님의 의로움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하느님의 의로움을 결코 살지 못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예수님은 제자들만을 따로 불러 가르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
제자들은 공인으로써 하느님의 의로움을 살아야할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의로움의 상태를 항상 살펴야 한다. 양들에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려면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며 살아야 한다. 자칫 한쪽으로 치우치면 평형을 잃어 하느님의 의로움은 말할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약속은 의롭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에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늘 떠올리며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말이 무성하다. 대책이 없다. 그냥 저 좋을대로 쏟아부으며 살고 있다. 하느님의 의로음을 잃어버리고 인간답지않게 서로 상대에게 성을 내고 저잘스런 욕까지 해댄다. 자존심 싸움으로 자기 주장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를 관철시키려다 서로 원수가 되고 고소 고발이 끊이질 않는다. 어수선하고 시끄럽다. 막되 먹었다. 나이만 먹은 늙은이들이 계속 생겨나는 이유이다.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무장해서 우리는 성숙을 살아야 한다.
화
곽승룡 비오 신부님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 22)
분노란 무엇일까?
“사람은 자유롭게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원의가 현실에서 방해받기도 하고 장애를 만나기도 한다. 분노란? 그 장애물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자각해서 발생하는 감정이다.”.
이처럼 분노는 그 장애를 제거하는 원의에서 발생한다.
물론 화, 분노는 무조건 나쁘지만은 않은 듯하다. 옳은 분노가 있을 수 있거나 물론 대부분 옳지 않은 것이다.
올바른 분노를 살펴보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를 하고 환전해 주면서 성전을 더럽혔던 상인들을 몰아내셨는데, 그 때의 주님의 분노가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마르 11, 15이하)
그렇다. 우리는 분노를 해야 한다. 좋은 길을 가고 있는데 그 길을 유일하게 막고 있는 진정한 장애를 극복해야한다. 그 장애가 바로 악의 실체에서 발생한 것이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악에 대항하여 화를 낼 수 있고 분노해야 한다.
코로나19에 대해서, 특히 가짜 뉴스에 대해 분노해야한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놓치지 말 것은 무엇이 가찌인지를 알아차리는 바른 식별이다.
우리가 악에 대해 분노한다면서 사람에 대해 그러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사람을 현혹하는 그런 악이 아니라 진짜 악에 대해 분노해야 한다.
우리는 죄, 나쁜 생각, 악의에 대해서 분노해야 한다. 옳은 분노란 분명히 그 결가 좋을 때만 그러해야 한다. 사람에게 손해를 주어서는 안 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어야 한다.
코로나19의 어려운 상황에서 지혜롭게 최선을 다하는 데 바른 식별로 빠른 소멸이 이뤄지기를 기도한다.
<미워하지 마라. 미움 받을 짓도 하지 마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순 제1주간 금요일>(2020. 3. 6. 금)(마태 5,20ㄴ-26)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1-22).”
이 말씀은, “미워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형제를 증오하고, 그래서 형제를 모욕하고, 형제에게 분노하는 것은 살인죄와 같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증오와 분노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형제가 어떤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를 증오하고, 모욕하고, 그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죄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의 죄’는 ‘그의 죄’이고, 그 일 때문에 짓게 된 ‘나의 죄’는 ‘나의 죄’입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라고 말씀하셨는데, 만일에 그 형제에게 가서 ‘바보’, ‘멍청이’ 라고 욕하면서 그가 죄를 지은 것을 심하게 비난하고 꾸짖었다면?
그런 경우에 그의 죄가 너무 커서 그렇게 크게 혼내야만 했다고 변명하더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면,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 됩니다. (“타일러라.” 라는 말씀은, “사랑으로 회개시켜라.” 라는 뜻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타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정말로 사랑한다면, 상대방을 모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이 말씀은, “미움 받을 짓을 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지금 이 경우에는 아무래도 미움 받을 짓을 한 쪽이 잘못한 경우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라는 말씀은, “그 형제에게 가서 용서를 청하여라.”로 해석됩니다.
‘미움 받는 고통’과 ‘미워하는 고통’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큰 고통일까? 아마도 ‘미워하는 고통’이 ‘미움 받는 고통’보다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형제에게 가서 용서를 빌고, 그 형제와 화해하는 일은,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을 없애 주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나의 고통보다 상대방의 고통을 먼저 생각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은 물론 나의 ‘미움 받는 고통’을 없애는 일이기도 합니다.)
“나는 잘못한 일이 없는데 그 사람이 혼자서 오해하고서 나를 미워하는 것뿐이다.잘못이 없는 내가 왜 그에게 먼저 용서와 화해를 청해야 하는가?” 라고 따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식으로 자꾸만 누구의 잘못이냐를 따지기 시작하면 화해의 길은 점점 더 멀어지게 됩니다. 그런 경우라면 빨리 가서 그 오해를 풀어주는 것이 옳습니다.
실제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상처를 준 사람은 자기가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고, 상처를 받은 사람만 그 일을 잊지 못하고 오랫동안 원망과 원한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현실을 생각하면, 예수님 말씀에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이라는 말씀은,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잘 반성해 보아라.”로 해석됩니다. (“생각나거든”이라는 말씀을 “우연히 생각나거든”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에는 “생각이 안 나면 어쩔 수 없고...” 라는 뜻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사의 시작 예식에 ‘참회 예식’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화해부터 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바치는 ‘고백의 기도’와 ‘자비송’을 형식적으로, 또 습관적으로 바치면 안 됩니다. 예수님 말씀 그대로,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가 있는지, 혹시 내가 미움 받을 짓을 한 적이 있는지” 진심으로 반성하면서, ‘고백의 기도’와 ‘자비송’을 바쳐야 합니다. (그런데 미사 중간에 고해성사를 볼 수는 없으니까, 실제로는 양심 성찰과 고해성사를 보는 일은 ‘미사 전에’ 하는 것이 맞습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5-26).”
여기서 ‘법정’은 하느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고소한 자’는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그 형제”일 수도 있고, 하느님의 법정에서 검사 역할을 하는 천사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분명히 잘못한 사람은 ‘나’이고, ‘그 형제’는 나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피해자입니다.)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라는 말씀은, “살아 있는 동안에 회개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이승에서의 인생은, 사실상 하느님의 법정을 향해서 가는 길입니다.)
‘재판관’은 하느님이고, ‘형리’는 죄인의 처벌을 담당하는 천사입니다. ‘감옥’은 연옥일 수도 있고, 지옥일 수도 있습니다. 연옥이라면 마지막 한 닢까지 다 갚으면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마지막 한 닢까지 다 갚는다는 말은 철저하고 완벽한 보속을 뜻합니다.)
지옥으로 떨어진다면 모든 것이 다 끝난 상황이고, 그곳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승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연옥과 지옥을 겪을 수 있습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후회하고, 자책하면서, 회개하고 보속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연옥의 고통을 겪는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구원받는 것도 포기하고, 자포자기 상태로 살고 있다면, 그 상황은 지옥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살면서도 마음 편하게 사는 것 같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희망도 없이, 영혼과 양심의 평화도 없이 그렇게 사는 것은 결코 마음 편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도 무의식 속에는 심판과 멸망의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시련과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정말 하루 빨리 이 사태가 진정되면서 우리 모두가 행복한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시점에서 생각해 볼 것은 바이러스의 공격은 어쩌면 우리 인간이 이제까지 지구 생태계 안에서 존재하고 살아오면서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오만한 모습으로 자연을 무분별하게 착취해온 것에 대한 자연의 무서운 반격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아온 우리 모두의 지난 삶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회개, 그리고 참된 화해의 시간입니다. 그러한 반성과 회개와 화해의 시간이 없이 단순히 사태의 극복만을 바라며 기도한다면 어쩌면 그것은 또 다시 반복되는 이기적인 예배가 될 것입니다.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욕하거나 막말하지 말라 했습니다.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우리의 의로움은 지도자들 보다 능가해야 된다고 예수님이 그러십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성내지 말고 욕하거나 막말하지 말라 했습니다.
그런데 요새 뭐 그리들 욕하고 막말하고 휴~! 존엄성이탈 자주 하네요.
욕하면 자기가 막말욕지걸 균에 감염, 골방에 격리 외출금지 당해야죠.
그렇다는 사실(Fact)만 알고서 메모지 기록해뒀다가 잘 쓰면 되잖아요.
욕말 막말을 공개로 남기면 우리 국민의 흠집만 남길 뿐 보탬 안됩니다.
예의지국 대한민국은 자유와 민주주의 시민답게 한 가족정신 살립시다.
하늘이 칭찬하고 인간존엄성에 어울리려면 예수님가르침대로 해봅시다.
<징검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과
나 사이에
당신
걸림돌이
아니라
징검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돌아섬"을 제시하십니다. "돌아섬"이 곧 회개의 시작입니다.
"돌아서서"(에제 18,21.23.27.28)
제1독서에서 주님은 여러 차례 "돌아섬"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는 악인이 자기의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주님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는 "돌아섬" 이전의 모든 불의를 용서받게 됩니다. 그의 죄악이 주님께 더 이상 기억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돌아섬"도 있습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의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주님께 그의 정의는 잊혀지고 나중에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으리라는 것이 냉정한 현실입니다. 그러니 돌아서되 올바른 방향쪽으로 돌아서는 것이 관건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마태 5,20).
유다 종교 지도자들의 의로움은 율법에 대한 그들의 열성을 드러내고 증명합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의로움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서 더 요구하십니다. 신분상으로도 그렇거니와 정식 종교 교육도 받지 못한 제자들에게 "그들을 능가하라"고 촉구하십니다.
물리적 살인만이 불의가 아니라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 멍청이라 하는 인격 살인까지 그에 버금가는 불의라고 하십니다. 육적 생명을 앗아가는 죄만 죄가 아니라 영혼의 생기를 빼앗는 위해 역시 엄청난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러므로"(마태 5,23)
예수님께서는 두 개의 권고를 방금 들은 엄격한 말씀의 해법으로 제시하십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화해하라는 것과, 자기를 고소한 이와 얼른 타협하라는 것입니다. 둘 다 "멈춤"과 "돌아섬"이 요구되지요.
사실 관계가 어그러지고 상처까지 입게 되면 화해나 절충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이성과 윤리를 떠나 자존심으로 자기 입장을 밀고 나가는 경우가 다반사지요. 그때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고, 여태까지 치달아온 방향을 돌이켜 서로에게 생명이 되는 방향으로 재조정하라고 권고하시는 겁니다.
이제는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서로 극으로 치닫던 방향을 돌려 일단 서로를 향하고, 그 다음은 대화가 되건 합의가 되건 만나는 겁니다. 중요한 건 그들이 방향을 바꾸어 돌아서고, 승패와 상관없이 그간의 제 길을 돌이켰다는 데 있습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나는 죄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죄인이 돌아서서 살기를 바란다"(영성체송).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는 우리가 돌아서기를 바라십니다. 이 말씀을 생명을 걸고 하시니 어마어마한 무게가 느껴지지요. 실제로 주님은 우리 회개를 위해 당신 생명을 거셨습니다.
돌아섬은 변절이나 줏대 없음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잘못된 방향을 밀어붙이는 것이 죄를 쌓는 무모한 어리석음이고 상대를 죽이는 악이지요. 하물며 하느님도 우리 같은 죄인 때문에 마음을 바꾸시고 징벌을 돌이키십니다. 제단의 예물보다 시급하고 재판장의 판결보다 위엄 있는 것이 생명입니다. 서로의 생명을 북돋우고 살리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하느님께 가기 전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께 예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를 하라고 하십니다. 부모를 찾아뵈러 가기 전에 형제와 먼저 화해를 하라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하느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기도는 충실히 하면서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사랑은 소홀히 하는 것은 안 된다는 뜻입니다.
바벨탑 얘기가 담고 있는 뜻이 여러 가지이지만 이런 면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늘에 닿으려고 탑을 높이 쌓다가 이웃과의 소통이 단절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느님은 저 위에 계시어 거기까지 기어 올라올 수 있는 사람과 만나주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사랑이시기에 사랑의 관계 안에 계시는 것이지요. 그러니 당신을 만나려면 단절된 관계를 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화해하라고 하신다고 화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내가 스스로 화해하려고 해도 화해가 되지 않습니다. 잘 지내자고 찾아가 악수를 했는데도 화해가 되지 않습니다. 화해和解, 이 한자어의 뜻을 잘 보면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和를 하려면 먼저 解를 해야 합니다. 화해란 다 풀어버리고 잘 지내는 것인데 그와 잘 지내기에 앞서 내 안의 풀 것을 다 풀어야 합니다. 무엇을 풀어야 합니까?
미움의 감정.
분노의 감정.
복수의 감정.
질투의 감정.
서운한 감정.
한 마디로 내 안의 모든 惡感情을 풀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악감정을 갖게 한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악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나를 봐야 합니다. 그에게 나의 감정 해소를 책임 지우지 말고 나의 감정은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우리가 분노할 때 나에게 그렇게 한 사람에 대해 분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는 나에 대해 더 분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를 향하는 분노의 화살을 그에게 돌렸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이제 우리는 그런 말에 서운했던 나의 옹졸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 말에 상처받았던 나의 허약함을 진정 강인하게 해야 합니다. 그의 계략에 넘어갔던 나의 허술함을 극복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전에는 그로 인해 내가 악감정을 가졌으나 이제는 그로 인해
넓어지고
강해지고
성숙해져
더이상 그에 의존하지 않고 나를 진정 사랑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 대신 하느님 사랑으로 충분하여 그와 상관없이 진정 행복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나의 삶에서 그를 배제하고 오직 기도만 하며 하느님과만 잘 지내려던 나에서 이제 그와도 잘 지내고 그와 함께 하느님께 기도하고 그와 함께 예물을 봉헌하러 가는 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깨달음의 여정, 정화淨化의 여정 -사랑과 지혜-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어제의 복음 묵상중 빠진 것이 있어 다시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백절불굴의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의 자세를 가리킨다 했습니다. 물론 내 원하는 대로의 내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이겠습니다.
이런 기도의 자세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까? 바로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절대적인 신뢰의 믿음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신뢰하기에 이런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입니다. 이런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없으면 이런 한결같은 기도의 자세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새삼 깨닫는 바 믿음과 기도는 함께 간다는 것이며, 부족한 믿음을 더해 달라 주님의 은총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에 이어 사랑입니다. 경천애인敬天愛人, 참으로 한결같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노력努力이요 실천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했습니다. 사랑은 인생 무지無知와 허무虛無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사랑은 바로 다음 오늘 복음의 서두의 말씀에 대한 답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못하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바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유일한 비결은 ‘사랑’뿐이라라는 것입니다. 내일 복음의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의로움, 완전함에 대한 유일한 답은 사랑뿐이라는 것입니다.
지엽적인 처방이 아니라 근원적인 처방입니다. 무지의 악에 대한 근원적 처방입니다. 무지로 인한 무자비한 언행입니다. 몰라서 판단이요 비방이지 정말 자기를 알면 알수록 판단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자기를 깨달아 아는 것이 사랑이요 지혜요 겸손입니다.
실제적인 살인에 앞서 참으로 거칠고 사나운 혐오와 증오가 가득담긴 생각과 표정과 눈빛과 눈길, 말의 간접적 폭력과 살인을 주목해야 합니다. 비수와 같은 언어 폭력의 말, 섬찍한 표정, 살기 등등한, 미친 듯 광기의 눈빛 역시 그대로 평생 잊지 못할, 상처가 되는 간접적 살인입니다.
참으로 우리 안에 깊이 내재해 뿌리 내리고 있는 폭력성, 잔인성, 배타성, 공격성등 참으로 무지의 악이, 무지의 어둠이 문제인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이런 근원적 무지의 악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무지의 뿌리를, 마음의 정화를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행위, “바보!” 또는 “멍청이!”라고 하는 무시와 멸시의 말, 남의 원망을 받는 행위, 타협하지 못하고 끝까지 파멸의 길을 가는 어리석은 행위들 그대로 무지의 소산이라는 것입니다. 무지의 악에 유혹된 결과라는 것입니다. 즉각적 회개로 원망을 푼다음 제단에 예물을 바치며 법정에 가는 도중 즉각 타협하고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의 어리석음을 범치 말라는 것입니다.
생각도 말도 행위도 마음에서 나옵니다. 자비로운 마음에서 자비로운 생각과 말과 행위입니다. 그러니 마음의 정화와 성화가 우선입니다. 예수님의 참행복 선언중 다음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죄가 없어서가 아닌 사랑할수록 깨끗해지는 마음, 거룩해지는 마음입니다. 사랑의 깨달음, 사랑의 정화입니다. 사랑으로 깨달아 알아갈수록 비로소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깨끗해지고 자유로워지고 지혜로워지는 마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궁극 수행의 목표이자 평생과제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랑이 바로 무지에 대한 답이요, 영적 삶은 깨달음의 여정, 정화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여 무지로부터의 해방이 필생의 영적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결국 회개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 자유의 여정, 정화의 여정 다 무지로부터의 해방에 그 궁극의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가, 빛의 자녀가 되는 평생 여정을 가리키는 말마디입니다.
참으로 이런 깨달음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한 이들은 날로 하느님과 앎의 관계도 깊어져 지혜롭고 겸손합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 오늘 지금 여기에 집중합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낱말이 절망입니다.
바로 오늘 에제키엘서의 말씀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과거에 안주하여 자만하지 않게 합니다. 하느님께는 일체의 기득권도 소용없습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한결같은’ 삶의 모습입니다.
과거 아무리 잘 살았어도 지금 못살면 소용없습니다. 과거 아무리 못살았어도 지금 회개하여 잘 살면 구원입니다. 누가 나 대신 살아 줄 수 없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 깨어 내가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참 엄중합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오늘 지금 여기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절박한 회개의 메시지,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살아 있을 때 회개와 희망이요 찬미와 감사이지, 죽으면 회개도 희망도 찬미도 감사도 없습니다. 일편단심一片丹心, 시종여일始終如一, 변절變節, 변심變心하지 말고 변질變質되지 않고, 지조志操있고 품위品位있게, ‘한결같은’ 삶을 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사순시기 그대로 깨달음의 여정, 정화의 여정의 압축입니다. 전화위복, ‘코로나 19’가 역설적으로 우리의 회개와 정화의 여정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정화의 여정후 마침내 부활 승리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뵈올 것입니다. 세상에 쓸모없다 버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 섭리의 도구가 됩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그러니 삶에서 오는 모든 시련과 장애를 깨달음의 계기로, 정화의 계기로 삼는 것이 지혜입니다.
참으로 깨달음의 여정, 정화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한 깨어 있는 이들은 결코 오늘 지금 여기를 놓치지 않습니다.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깨어 오늘 하루도 깨달음의 여정, 정화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제 좌우명 고백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마지막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그래서 그래도 사랑이다.
최민석 신부님
추운 겨울을 잘 참고 견뎌온 매화나무 한 구루가 서있다. 나 여기 있다. 거리낄 것 없이 여기 있다. 아름다운 생명의 당당한 선언이다. 내 인생의 겨울도 잘 참고 견디며 여기까지 왔다. 저 매화나무처럼 내 어두운 세상에 손톱만큼도 감출 것이 없는, 감출 이유가 없는 떳떳한 인생이고 싶다.
모든 것이 끝났다 싶은 그 자리에서 시작되는 생명의 신비다. 이웃집 담 밑엔 뜻밖에 파릇파릇 미나리 순이 자라나는 걸 보고 방으로 들어오니 창을 가린 커텐 사이로 전기불이 비치듯 햇살이 환히 스며들고 있다. 햇살 속에 이리저리 먼지가 떠돈다.
무심히 먼지를 바라보다가 문득 내가 저 먼지를 드러내는 햇살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오 5,13)하신 성경 말씀이 머리에 스친다. 알고 보니 저 햇살로 피어나는 꽃과 햇살로 드러난 먼지가 다 같은 존재이다. 바로 이것이다. 햇살로 피어나는 꽃처럼 나 지금 하느님의 현존이다.
하늘이 제 품으로 지나가는 구름을 지켜보듯이 주님이 나를 한 순간도 빠뜨리지 않고 지켜보심을 알게 하시니 고맙다. 다만 나의 이 알아차림이 너무 자주 끊어지는 바람에, 주님이 내 곁에서 나를 지켜보시며 내가 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시고 가다가 넘어지면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하신다는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다.
밤이 짧아지는 그만큼 길어지는 낮처럼, 주님의 현존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 느낌에서 오는 생명 에너지로 춤추며 살아가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내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든 원치 아니하든 이제는 그리 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내가 나 혼자 인생의 주인공인 양 처신하며 지낼 수 없다.
그 찬란한 빛이 내안에 항상 가득하였음으로 나는 언제나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감사하다는 생각을 놓지 않는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고 원망하지 않고, 나에게도 당연히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이 주님 안에서 일어나고 주님 안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먼지는 햇살이 되고 햇살이 먼지가 되고 있다. 둘이 하나가 되어갈 춤추는 것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움인가. 때로 움직일 힘이 없어 가만 누워 창밖에 보이는 푸른 하늘만 보아도 아! 그 아름다움.......... 숨 쉬고 눈을 떠 그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의 충만한 행복과 기쁨, 불편한 육체 속에서 빛나는 영혼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인간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은 흠 없는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아름다움이란 그 거룩함이란 본래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매일 매순간 거듭거듭 깨어난다. 그 모든 앎이 다시없는 큰 기쁨이 된다. 참으로 두려움이 없다. 본래의 기쁨, 본래의 거룩함, 그 안에서 만족할 뿐이다.
영혼과 육체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지만 위상이 다르다. 나무가 줄기, 가지, 이파리와 꽃, 열매로 서로 다른 위상을 가지는 것처럼 영혼과 육체는 하나다. 그러나 무엇을 중심 자리에 둘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우주에 중심과 주변이 있듯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중심은 사랑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을 아름답게 한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오 5,23-26)
이는 ‘사랑이 먼저다’는 말이다. 사랑 말고는 아무 다른 할 일이 없고, 마땅히 없어야 한다. 달빛이 횃불로 환해지지 않고 별빛이 태풍으로 흔들리지 않듯이 사랑은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그래서 그래도 사랑이다.
아, 주님이 지으신 세상! 물방울이 모여 내를 이루는 것도, 수증기가 모여 눈송이를 이루는 것도, 인간이 모여 가족 공동체와 국가 공동체를 이루는 것도 다 사랑이다. 옳다. ‘그래서 사랑’이 아니라 ‘그래도 사랑’이다. 아름답지 않는 것이 없는 세상! 이곳을 다녀가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침묵은 금이다.<마태,5/20-2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복음에 언어폭력, 언어 살인, “말로서 말 많으니 말말을 까 하노라” 이런 때 말을 절제하고 침묵이 최선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표현의 자유가 있지만 자유는 언제나 제재와 진실과 사랑으로 다스려질 때 표현과 말의 자유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말 깨끗한 말 순수한 말 사랑을 도구는 말 할 수없으면 입을 막고 침묵으로 욕이나 비꼬는 말이나 경멸하는 말이나 원수의 관계를 가지는 말을 하지 않고 상대의 약점을 떠들며 공동체에 알리지도 않은 것입니다
유티브를 보면서 제가 마음 앞은 것은 말로써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것입니다. 각 사람의 말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부분 자기 이익을 생각해서 말하고 자기 체면에 걸려있습니다.
침묵은 말을 하지 않은 것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넓은 이해심 상대의 의견을 받아 드리고 양보하는 자세입니다.
세상의 모든 상황은 시간과 횐경에 따라 달라집니다. 달라진 환경을 알지 못하면 스스로 이질감을 가지거나 오해의 소지가 많이 일어납니다. 그리하여 기다림 속에 새로운 말 새로운 일들이 생겨납니다. 시대에 적합하고 이치에 맞는 말을 합시다.
모세가 파라오에게 청한 응답은 언제나 아니다 안 된다 하였지만 하느님의 많은 표징을 보고 하느님을 친미하고 예배하도록 자유를 주었습니다. 사람은 한번 경정한 것을 따라야지 변경하면 참패를 당합니다. 내어주고 억울해서 되 찾으려하다가 그 많은 군사를 홍해에 빠져 죽게 하였습니다. 원망의 말 욕하는 말은 마음에 한이 매쳐 있기 때문입니다. 참 화해는 뒤끝이 없이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없었던 일로 합의를 보는 것입니다.
침묵이 금이 되려면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마음 속안에 한이나 원한이 없어야 합니다.
어제 십자가의 길을 하면서 주님은 한 발 한 발 넘어지고 쓰러져도 용기를 내서 일어나 십자가를 산위에 욱둑 세워 온 세상을 등경위에 올려놓은 등불처럼 세상 어둠을 빛을 비추인 것을 느끼면서 기도 하였습니다.
일처 넘어 가면서 “주님에게 끝 까지 가주세요” 십자가위에 깊은 침묵이 우리를 바른길 황금 길로 나가게 해주십니다.
미국의 90세 노인이 젊은이들에게 45가지 말씀을 읽으면 유익한 말씀입니다. 강론 묵상 끝에 올려 들이겠습니다.
복음을 읽고 묵상은 어두운 밥 잠자리에 누어서 내리는 주님의 말씀을 침묵 속에 듣고 형성하어 아침에 글로 표현합니다. 묵상과 참묵을 사랑하기를 기도합니다.
설마가 사람을
최재영 세례자 요한 신부님
가만히 두면 좋아지는 게 있고 나빠지는 게 있습니다. 사람 사이의 갈등과 폭력은 어떻습니까? 5·18민주화운동, 용산 참사, 세월호, 쌍용차 해고자들의 죽음 같은 거대한 아픔들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자칫 제가 함부로 대할까봐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함부로 말합니다. 누군가에겐 사소하게 보이겠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끝없는 막막함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들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납니다. 왜, 언제 이렇게 됐지, 라는 생각이 들곤 하지요. 그래서 갈등은 ‘없었더라면, 앞으로 없다면’이라 생각하며 단순하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입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대해야 하는 문제이지요. 그런데 모든 갈등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언제 어떻게 그것을 풀어가야 할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서로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미움이라는 감정도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우리에겐 이정표가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위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이들에게 화해와 용서를 보여주셨던 예수님입니다. 설마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갈등을 미뤄두는 그 시간에 불신의 골은 점점 더 깊어집니다.
'꼬인 관계'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여라'(마태오 5장 20ㄴ~26)
악인이 죽는것보다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다리 뻗고 편히 잘 수 있는 마음은 누구와도 원수지지 않을 때입니다.
원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얼마나 자주 사소한 것으로 큰 화를 일으키는 약함들ᆢ
유혹이 더 많은 사순시기 주님 선하심으로 초대받은 이때에 서로 꼬인 관계는 따지는것 멈추고 상대의 소리를 들어주는게 필요합니다.
손해보는것이 예수님 닮는 것입니다.
'따지는것 멈추고 부드럽게 대하기'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코로나19 현상 중에 요즘 여러 가지 연유로 장례미사나 적절한 장례예절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떠나시는 분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누가 왜 어떤 경로로 감염되었는가를 두고 감정을 혼란케 하는 경우도 많다고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교황님께서 기자들로부터 성소수자들에 대한 논평을 부탁받았을 때, 내가 한 사람으로서 그 누구를 평가할 수 있겠느냐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주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세상에 이러저러한 환경과 처지 및 여러 피조물과 함께 어울려 살도록 불림을 받았고,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처럼 그렇게 살도록 조건 지어졌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내신 주 하느님께 마련하여주신 여건에 그저 감사드리며 받아드릴 뿐, 가타부타 이것저것 탓하고 불평하며 거절할 권리가 없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22절)
우리가 싫으면 함께 어울리거나 같은 행동을 하지 않으면 될 뿐, 서로 다른 삶의 처지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사는 다른 이들이나 다른 피조물에게 비난이나 원망을 할 수 없습니다. 물론 모든 것을 다 만족할 수 없어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타인에게 폐해를 끼치지 않는 한에서 나에게 필요하고 내가 원하는 환경을 계발하고 처지를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이루어서 살아나갈 뿐입니다. 설사 그 누군가가 같은 취지로 노력했지만 의도치 않게 타인인 제삼자에게 폐해를 끼쳤을 경우에 그에게 수정하도록 요청할 뿐 그를 원망하거나 단죄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같은 경우에 가끔 탐욕에 빠져 실수와 죄악을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23-24절)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고 사람들은 선의보다 고의나 악의로 저지를 때조차 있습니다. 아마도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를 말씀하시는가 봅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25-26절)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고 바보라 하고 멍청이라고 하지 말라고 하신다. 전부 나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하는 행위이다. 내가 보기에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여 직적질을 하는 모습이다. 얼마나 많은 순간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예수님의 초대는 바로 죽음이다. 고스란히 모든 것을 담아 안고 당신의 침묵과 죽음으로 하느님을 드러낸다. 이 초대에 응하기 위해 단련이 필요하다. 오늘도 하루를 시작하며 마음에서 올라오는 이런 충동을 한발짝 물러서서 볼 수 있는 여유 있는 마음을 가지고자 한다.
물러 서서 보면 아름다움을 볼 수 있건만!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제 멋대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을 반성하는
요즈음입니다.
우리 힘이 아닌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일상입니다.
우리들 일상이
하느님 말씀을
듣게됩니다.
하느님 말씀은
우리 내면을
관통합니다.
십자가의 겸손이
화해와 용서의
밑거름이 됩니다.
믿음은 판단을
내려놓는 데서
거기에서
시작됩니다.
지울 수 없는
형제와 형제의
관계입니다.
화해는 가장
가까운 데서
길을 트는
기도입니다.
화해도 용서도
끊임없이 배우고
배우는 생명의
여정입니다.
화해와 용서로
돌아갈 우리의
짧은 시간입니다.
사람의 길이
화해의 길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아름답기를
기도드립니다.
주고받는 것이
화해와 용서이길
기도드립니다.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화해의 물길이
마음과 마음에서
쏟아지길 바라는
십자가에서
화해를 배웁시다.
많은 사람들이 고백을 하느님께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해성사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시는 분들은 하느님께만 하는 고백을 왜 인간인 신부에게 해야 하는 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정답을 말씀드린다면 고백은 하느님께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대리자라는 소리를 듣는 하느님과 사제에게만 하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매 미사의 시작 예식 참회의 시간 때에 바치는 고백 기도를 천천히 외워 보십시오. 이렇게 기도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하느님께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형제들에게도 고백해야 합니다. 즉,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체면 때문에, 얄팍한 자존심 때문에 고백을 뒤로 미루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더군다나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닐 거야. 이 정도는 이해해 주겠지.’등등의 생각을 하면서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는 안일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위선자라고 자주 혼났기 때문에 형편없이 살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열심한 모습이었습니다. 기도도 많이 했고, 많은 봉헌을 했습니다. 또한 참회와 속죄의 표시로 단식도 자주 했습니다. 더군다나 율법의 준수는 이들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반대했을 때, 사람들이 믿고 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라고 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요? 아마 누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싶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께만 기도하는 삶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기도만이 아니라 형제와의 화해 역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자매님께서 어떤 분과의 관계가 심각할 정도로 나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이 관계 회복을 위해서 무엇을 하시냐고 물었더니 “기도만 하고 있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알아서 풀어 달라는 기도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충분히 하실 수 있는 일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활동과 그 노력을 요구하십니다.
다시 한 번 고백 기도를 천천히 바쳐보셨으면 합니다. 특히 그 의미를 하나씩 새기면서 바쳐보십시오. 지금 내가 당장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가 사는데 두 개의 ‘F’가 필요하다. 하나는 Forget(잊어버려라)이고, 다른 하나는 Forgive(용서하라)이다(채규철).
영혼의 햇볕
따뜻한 햇볕이 비추는 곳에서 종종 햇볕을 쬐고 있는 고양이를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추운 겨울에 이 모습을 많이 볼 수가 있는데, 그 이유는 햇볕을 쬐어서 겨울에 부족한 에너지와 영양분을 섭취하고 몸에 곰팡이가 생기지 않도록 소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지요. 사람 역시 햇볕을 쬐어서 비타민 D를 얻게 됩니다. 이 비타민 D를 통해서 뼈를 강화시키고 면역기능을 좋게 만듭니다. 그래서 비타민 D가 부족한 사람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고 활력도 떨어집니다.
우리 영혼도 햇볕을 쬐어야 합니다. 이 햇볕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주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이 세상을 더욱 더 힘차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서는 포장보다는 알맹이, 외형보다는 본질을 중요히 여기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에 입회 후 자주 듣게 된 돈보스코의 말씀, “교육은 마음의 일입니다.”라는 말씀이 처음에는 ‘대체 무슨 의미인가?’ 통~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격적인 청소년 사목 현장에 뛰어든 후, 아이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그 의미를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교사에게 있어 ‘아이들을 향한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기준입니다. 아이들의 영혼을 위한 참 스승이 되는가? 아니면 그저 급여를 받으니 의무감에 교단에 서는 월급쟁이가 되는가는, 바로 이 마음 여부에 달려있습니다.
어떤 교사는 정말이지 아이들을 향한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관심도 사랑도 없었습니다. 별 기쁨도 보람도 없이, 그저 마지못해 교단에 서니 하루하루가 지겹습니다.
어떤 청소년 시설 책임자는 마음은 있는데, 그 마음이 전혀 엉뚱한 마음, 사심(私心)이었습니다. 그에게 아이들은 자기 홍보의 대상이요, 공금 횡령과 착복의 대상이었습니다.
돈보스코께서 강조하신 그 마음은, 다름이 아니라 청소년들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청소년들의 미래를 활짝 열어주고픈 마음입니다. 청소년들이 홀로 설수 있도록 도와 주고픈 마음입니다. 청소년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고픈 마음입니다. 결국 청소년들의 영혼을 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지닌 참 스승은 청소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소년들을 극진히 섬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청소년들이 자식 같고, 친구 같고, 연인 같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산상설교 중에 예수님 역시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에 따라, 외적, 실제적으로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계명을 준수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권위로, 시나이 산에서 주어진 율법 그 위에 새로운 해석을 추가하십니다. 외적, 실제적인 살인을 하지 않았다해도 마음으로, 내적으로 하는 살인 조차 안된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자주 마음으로 이웃을 신랄하게 공격하고, 해치고 죽였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선언에 따르면, 우리는 수십번도 더 재판에 넘겨지고, 지금쯤 전과 십범쯤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계명을 더 적극적이고 폭넓게 해석하고, 이해하고 실행할 것을 촉구하고 계십니다. 이웃을 향한 분노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가득 한채, 제단으로 나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호통을 치십니다. 그런 예배는 마음, 영혼, 진정성이 조금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럴듯한 포장보다는 알맹이, 외형보다는 본질, 외적인 것보다는 마음을 더 중요시 여기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뭘 하든 마음이 담겨있어야겠습니다. 매일의 인간 관계 안에서도, 매일의 전례적 삶 안에서도 마음과 영혼이 담길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겠습니다.
진짜 의로운 사람은 이웃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가만히 보면 화를 내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더 큰 잘못을 한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영화 ‘완벽한 타인’에서 가장 화를 많이 내는 캐릭터가 이서진입니다. 몰래 외도를 한 친구와 동성애자가 된 친구에게 분노를 터뜨립니다. “그렇게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더니 속은 썩은 인간들이구만! 그러면서도 나 맨날 무시하고.”라는 식으로 화를 냅니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에 가면 진짜 못된 사람은 이서진이었습니다. 갓 결혼해서 아내가 임신했는데 또 다른 여인을 임신시키고 심지어는 자신의 친구 아내와도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가 ‘방귀뀐 놈이 성낸다.’는 것일 것입니다. 2005년 실제로 지하철에서 방귀를 크게 낀 사람이 그 냄새가 싫어서 자리를 바꾸려는 사람을 폭행했다는 뉴스가 실린 적도 있었습니다. 방귀를 뀌어서 든 죄책감을 감소시키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 제물로 삼아야했던 것입니다. 화를 많이 내는 사람은 그 만큼 자신 안에 죄가 많다고 보아야합니다.
누군가에게 화를 낸다는 것은 그 화를 내는 것에 대해 자신은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의로운 사람은 화를 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불의를 화를 통해 정당화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의 의로움과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을 비교하십니다. 의로움은 빚이 없다는 뜻입니다. 빚이 없으니 당당하게 누구 앞에나 설 수 있는 마음이 의로움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의롭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윤동주 시인의 말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어야” 의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믿은 이들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자신들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믿는 이들이기에 그들이 바치는 예물도 더 의롭게 되기 위한 것입니다. 즉, 무언가를 희망하며 바치는 예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물은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해서 드리는 것이어야지 그 예물을 통해 무언가 얻어내려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로움은 어떻게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을 넘어서야할까요? 먼저 우리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음을 깨달아야합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고 예수님만 하느님 앞에서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분은 우리의 불의를 입으시고 우리는 그분의 의로움을 입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할 때, 그분은 우리가 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입으신 우리 불의를 당신 자신과 함께 십자가에 달아 죽이셨습니다. 우리가 의로워짐은 이렇듯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 덕분입니다. 그러니 누구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의 의로움과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로 의로워졌다고 믿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그렇지 못하다고 판단하며 화를 냅니다.
그러나 실상 화는 자신의 불의를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하시며,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상태로 예물을 바쳐봐야 소용이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의로워진 사람은 자신의 공로가 하나도 없기에 누구에게든 화가 나지 않습니다.
화는 자신이 의롭다는 착각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다 불의한 사람이고 혹시 의롭게 되었더라도 이는 모두 주님 덕이니 같은 처지끼리 무슨 판단을 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웃에게 화가 나 있는 상태로 예물을 바치는 것은 의롭지 않은 제물이니 바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먼저 이웃과 화해하고 주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의로워진 사람은 남에게 화를 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두 발로 걷고 있다고 해서 네 발로 걷는 아이에게 화가 날 수는 없습니다. 본성이 자기 힘으로 바뀐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나쁜 본성과 마찬가지로 분노는 참아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생기지 말아야합니다. 남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바리사이-율법학자들처럼 그리스도에 의해 의롭게 된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사람임을 명심하고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과 사이좋게 지냅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업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많은 재산을 가진 분들과 친분을 맺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분들이 가진 것을 부러워했고, 그분들의 재산을 부러워했고, 그분들이 사는 모습을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분들과 자신의 삶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많은 것을 소유하였고, 많은 재물을 가졌고, 특별한 대접을 받고, 좋은 것을 누리지만 ‘걱정’이 많았다고 합니다. 많은 재산을 물려주어야 하는데 상속세가 걱정이라고 합니다. 힘들게 얻은 것을 자식들이 고마워하지 않는 것도 걱정이라고 합니다. 많은 것을 가지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잘 자라고,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는 이 자리와 시간을 결코 바꾸고 싶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나의 자리가 사실은 꽃자리입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이지만 내가 얻은 떡이 가치 있고, 보람 있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지난주에는 3박4일 교육을 다녀왔습니다. 안식년을 하는 제게 그런 교육의 기회가 주어진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저를 사랑하셔서 사순시기를 뜻깊게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3사람을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매사에 성실했고, 계명을 충실하게 지켰던 부자청년은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성실하게 지켰던 부자청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십시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부자 청년은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의 것을 위해서는 지금 가진 작은 것을 쉽게 포기하고 더 큰 것을 얻으려 합니다. 작은 차를 큰 차로 바꾸기도 하고, 작은 집에서 큰 집으로 이사를 가기도 합니다. 큰 차를 타는 사람은 전에 타던 작은 차를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큰 집으로 이사 간 사람은 전에 살던 작은 집을 아쉬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것을 위해서는 주저하고, 망설이곤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육체에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라는 허상에 영원한 삶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유다의 이야기입니다. 유다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께서 보는 세상을 보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자신이 보고 싶은 세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려고 하셨던 십자가를 보지 않았습니다. 신앙과 진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결국 유다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있습니다. 지식이 위선과 가식을 포장하는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종교의 거룩함은 사라지고, 종교라는 제도와 틀만 남게 되었습니다. 채우려 했지만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유다는 자기 죄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죄가 크기 때문에 용서 받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유다는 뉘우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의 곁을 떠나 주십시오. 주님 저도 물위를 걷게 해 주십시오. 주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서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하나는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은 주님을 배반할 지라도 저는 주님을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 안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너는 오늘 닭이 2번 울기 전에 나를 3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열정이 있었고, 사랑이 있었지만 베드로 사도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눈이 오는 추운 겨울에는 소나무와 전나무만 푸르다고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함께하는 이가 진정한 친구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고난이 시간이 다가오자 예수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나약한 베드로의 모습을 간직하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와 유다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닭이 울자 눈물을 흘렸고, 회개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용서 받은 것은 죄가 작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가 천국의 열쇠를 받았던 것은 배반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부족한 자신을 인정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해주시고 있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화
곽승룡 비오 신부님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 22)
화란 무엇일까? “자유롭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현실에서 방해받고 있는 것에 대항하여 자각하는 것이다.”라고 영성가 토마스 슈피드릭 추기경은 말한다. 물론 화 또는 분노가 무조건 나쁘지만은 않은 듯싶다. 물론 옳은 분노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옳지 않다.
올바른 분노를 살펴보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를 하고 환전해 주면서 성전을 더럽혔던 상인들을 몰아내셨는데, 그 때의 주님의 분노가 그런 것이 아닐까.(마르 11, 15)
그렇다. 우리는 분노를 해야 한다. 좋은 길을 가고 있는데 그 길을 참으로 막고 있는 진정한 장애를 극복해야한다. 그 장애가 바로 악의 실체에서 발생한 것이면 더 더욱 그렇다.
우리는 악에 대항하여 화를 낼 수 있고 분노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놓치지 말 것은 바른 식별이다. 우리가 악에 대해 분노한다면서 사람에 대해 그러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사람을 현혹하는 그런 악이 아니라 진짜 악에 대해 분노해야 한다.
우리는 죄, 나쁜 생각, 악의에 대해서 분노해야 한다. 옳은 분노란 분명히 그 결가 좋을 때만 그러해야 한다. 사람에게 손해를 주어서는 안 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화가 나거나 분노에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이를 극복할 것인가? 그 답은 바로 사랑이다. 화는 사랑으로 풀어가야 한다. 마음 안에 늘 화를 이기는 진정한 사랑을 담고 있어야 한다. 형제가 화에서 이겨나갈 수 있도록 사랑의 언어로 옳은 말씀 같은 바른 예를 살아야 한다.
종종 우리는 옳지 않은 화나 분노를 일으킨다. 마음 안에 원한, 울분, 화를 담고 있다. 자기감정을 무너트리고, 말로 이웃에게 상처를 주며, 다른 사람을 비난한다.
행동은 감정과 말에서 나온다. 감정이 폭발하는 것은 선하게 살아가는 고운 느낌보다 더 큰 영향을 주는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영성가 성 요한 클리마쿠스는 “화나 분노를 일으키는 사람은 간질환자와 같다.”고 비유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화를 이겨낼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몇 가지 응급처방을 내린다면, 먼저 깊은 숨을 들이키고 내쉬는 심호흡을 권장한다. 그리고 10까지 수를 세며, 음식준비를 위한 장작을 패는 것도 도움이 된다.
가끔 공격적으로 화를 낸 다음, 분노에 대한 반성 때문인지, 용서를 청하곤 한다. 충동과 충돌이 사실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것을 조절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적지 않은 성인들도 충동적 성격인 분들이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도움으로 변화가 되었다. 큰 긴장과 압박에서 생겨난 원의는 온순한 사람을 짐승으로 만들 수 있다.
분노의 폭발은 악한 성품으로 사람을 몰아간다. 그리고 분노의 폭발은 어떤 점에서는 약함의 상징이다. 심리적으로 약하고, 능력부족을 고민하는 사람은 분노를 일으킬 수 있다. 콤플렉스다. 하지만 특히 분노를 안에 품고 있을 때, 매우 위험하다. 더욱이 앙갚음과 냉정함을 품고 있으면 용서와 화해의 모든 가능성은 막혀 버린다.
니사의 그레고리오 성인은 분노할 때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척을 당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의 도움 없이 혼자 앙갚음할 것을 숙고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였다.
사도 성 바오로는 화나 분노로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화가 나더라도 죄는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에페 4, 26)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상대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 멍청이라고 했다. 내가 피해자라 여기면 누구나 어디 그런가?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반작용이 가해진다. 이때 피해자는 가해자로 변신한다. 결국 팽팽히 맞서고 힘대 힘의 대결이 시작되고 밀릴 수 없는 한판승부가 벌어진다.
이는 평소에 가진 잠재적 알력때문이다. 서로가 도토리 키재기를 하며 자기 안에 부정의 너를 품고 살기 시작한다. 그 때부터 상대를 보면 심기가 불편해 별것도 아닌데 피하게 만든다. 그것은 상대가 나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상대를 미움으로 만들어 피하는 것이다. 미움의 알력은 때가 되면 성내고 바보 멍청이로 감정을 싣고 크게 붙는다. 그 일로 서로가 상처투성이 만신창이가 된다. 고소가 따르고 법정에 서게되고 감옥에 갖힌다. 때로는 파멸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되기 전에 화해가 있어야 한다.
화해는 서로의 공감이며, 공감은 용서가 된다. 용서가 될 때, 복구가 시작되고 서로의 관계는 새롭게 성장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제대로 하게되면 둘 사이는 급속도로로 성숙하게 된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객관적으로 그 구분이 애매하다. 누구를 두둔하고 편들면 안 된다. 둘만을 놓고 서로가 마음의 불편함을 내려놓도록 지혜롭게 도와 주어야 한다. 둘만의 일이 사람들에게 확대되지 않도록 둘이 머리를 맞대고 화해해야 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아, 이렇게 하기까지 얼마나 어렵던가?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먼저 그 형제와 타협하여라”(마태5,24-25 참조).
‘영원한 사제로’
신학대학 4년을 졸업하고 신학교를 떠나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행복을 살며 60을 훌쩍 넘은 이순용 마르코 지인이 있다. ‘한국천주교 약사’, ‘라틴어 사전, ‘사제 오르도(ordo)’, 그리고 최근에 ‘영원한 사제로’ 라는 책을 집필, 세상에 내 놓았다. 그분에게 감사를 드린다.
이 책에서 첫 방인 사제, 탁덕 성 김대건 안드레아로 시작해 현재까지(2019,2.1) 6570명의 사제를 배출, 사제로 수품된 날을 기록 한으로 책으로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저자는 권고하고 있다. 이 책에는 환속한 사제의 이름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담고있다.
나는 어제 환속사제 선배의 초대로 함께 식사를 했다. 그는 환속한 후에도 지금껏 하느님 보시기에 잘 살려고 노력하는 신앙인의 삶을 살며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며 또한 사회인으로 당당히 살아가는 분이다. 그가 우리 사제들에게 식사 중에 들려준 말이 있어 여기에 담아본다.
교구장 주교님이 사제들에게 “사제직은 고귀하고 특별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잘 간직하고 사시길 바랍니다.” 저는 젊은 사제 시절 주교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권고 말씀이 환속을 한 저에게 1년이면 10번정도 뒷통수를 맞은듯 쟁쟁하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제직의 고귀함을 다시금 깨닫게 해 줍니다. 선배 환속사제는 식사 자리에서 신부님들 사제로 잘 살기 바랍니다.”라고 말해준다.
우리 자신은 너무 소중한 존재이다. 세상에 태어나서 단 한번 살고 가는 우리네 인생, 아름답고 귀하게 여기며 서로 사랑하며 마음을 나누며 살아가도록 불림을 받고 있다.
함께 사제로 몸담고 살았던 환속사제들이 ‘영원한 사제로...’책 속에 우리와 똑 같이 명단에 올라있다. 오늘 미사에서 그분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한다. 그리고 다시한번 이 책을 만들어준 이순용 마르코 저자에게 감사를 드린다.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우리가 이 사순시기를 보내면서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의 주님께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던 우리 인간의 회복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쳐 화해의 재물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순시기는 ‘회복의 시기’이자 ‘화해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의 삶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하느님의 품으로부터 멀어진 모습을 살아가기도 했었고, 때로는 이웃들과도 멀어진 모습으로 살아가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은총의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 구원의 중재자로서 우리를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조금이나마 닮아 하느님 안의 참된 회개의 삶과 더불어 이웃들과도 진정한 화해의 삶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독서 에제키엘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 형제적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복자 앨레두스 아빠스의 ‘사랑의 거울’에서(Lib. 3,5: PL 195,582)
원수들을 사랑하는 것 -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완성입니다. 이 사랑을 고무시키려면, “사람들 가운데 제일 아름다운 사람”이면서 당신의 아름다움 얼굴을 포악한 자들이 침 뱉도록 내맡기시고 눈을 멀게 하도록 내맡기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의 그 놀라운 인내심을 묵상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분은 당신 어깨를 채찍질에 내맡기시고 군주들과 세력가들에게는 공포가 되었던 그 머리는 가시관의 고통으로 숙여졌습니다. 그분은 모욕과 모독을 참으시고 온유와 인내와 양순함을 간직하시면서, 십자가와 쇠못과 창과 쓸개와 신 포도주를 평온히 견디심으로 인내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한마디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온유와 사랑으로 충만되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말씀하시는 그 놀라운 음성을 들을 때, 누가 즉시 사랑에 넘쳐 자기 원수들을 포옹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이 말씀보다 더 온유하고 더 사랑에 넘친 말이 또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분은 무언가 덧붙이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위해 간구만 하시지 않고 그들을 위해 변호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이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나를 십자가에 못박지만 자신들이 못박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나를 율법을 거스르는 자로, 거짓으로 자기 자신을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는 자로, 그리고 백성들을 선동하는 자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는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감추었고 그들은 내 위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올바로 사랑하려면 육신의 정욕으로 부패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하여 그는 자신의 모든 사랑을 우리 주님의 거룩한 인간성으로 향해야 합니다. 자기 형제들에 대한 사랑의 기쁨을 더 완전히 누리기 위하여 그는 팔을 펼쳐 원수들마저 참된 사랑으로 포옹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가해지는 모욕으로 인해 이러한 사랑의 불이 식지 않도록 그는 마음속에서 사랑하는 주님과 구세주의 그 온유한 인내심을 끊임없이 바라보아야 합니다.
<화해하여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창세기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물을 받아주시지 않은 일이 살인 사건의 원인이 된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하느님께서 아무 이유 없이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 카인은 아벨을 몹시 미워했고, 아벨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고, 아벨을 박해하고 있었다. 그는 아벨에 대한 증오심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어서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도 희미해져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하느님께 제물을 바쳤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의 제물을 받아주시지 않았고, ‘제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너의 죄악을 잘 다스려라.’ 라고 타이르셨다(창세 4,7). 그러나 카인은 ‘나는 잘못한 일이 없는데, 하느님께서는 나만 나무라신다.’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아벨 탓이라고만 생각했고, 결국 아벨을 죽였다.”
잠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악인들의 제물은 주님께서 역겨워하시고, 올곧은 이들의 기도는 주님께서 기꺼워하신다(잠언 15,8).”
아마도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기 전부터 카인은 ‘악인’이었을 것이고, 아벨은 ‘올곧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물을 받아주시지 않아서 그가 살인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 이미 살인죄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의 제물을 받아주시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3).”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카인처럼 마음속에 미움과 분노가 가득한 채로 ‘사랑 없이’ 바치는 제물은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이 될 수 없고, 또 ‘사랑 없이’ 겉으로만 계명을 지키고,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위선죄’와 ‘신성모독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0ㄴ-22).”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마음속에 무엇을 품고 있든지 간에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면 “살인하지 마라.” 라는 계명을 지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바로 그런 사고방식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사람을 죽인 일만 살인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것도,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주는 분노와 모욕도 ‘살인하지 마라.’ 라는 계명을 어긴 죄가 된다.” 라고 가르치십니다.(정신적인 살인도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29-32).”
여기서 ‘좋은 말’만 하라는 권고는, 속마음과 상관없이 입술로만 ‘좋은 말’을 하라는 권고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온, 즉 진심으로 ‘좋은 말’을 하라는 권고입니다.
좋은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서로 용서하라는 권고를 덧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3-26).”
이 말씀에서 ‘생각나거든’이라는 말은, “잊어버리고 있다가 갑자가 생각난다면”도 아니고, “모르고 있었는데 우연히 알게 되었다면”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형제에게 상처를 준 일이 있는지 잘 성찰해 보고, 그런 일이 있다면 제물을 바치는 일보다 그 형제에게 가서 용서를 청하는 일을 먼저 하여라.” 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이 말씀은, 내가 형제에게 잘못한 경우입니다. 즉 형제를 용서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형제에게 용서를 청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앞에서 말한 카인의 경우, 아벨을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고 있었다면,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아벨에게 용서를 청하는 일을 했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제물을 받아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남에게 상처를 준 일은 잘 잊어버리고, 자기가 상처를 받은 일은 잘 기억합니다.
그래서 형제를 용서해야 할 일은 잘 생각하면서도, 형제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 일은 생각을 못할 때가 많습니다.
카인의 이야기를 보면, 하느님께서 아벨을 죽인 일 때문에 그를 꾸짖으시는데도, 그는 잘못했다고 빌지도 않았고, 아벨에게 미안해하지도 않았고, 형벌이 너무나 무겁다는 하소연만 하고 있습니다(창세 4,13-14).
동생을 죽였으면서도 회개하기는커녕 억울해하는 모습입니다.(혹시 지금 내 안에 카인과 같은 모습은 없는가?)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 5, 20)
김웅태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십시오.
오늘 복음(마태 5, 20~26)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 5, 2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얼마나 법을 철저히 지키고 법을 존중하며 그래서 심지어는 율법주의자라고 말할 정도로 철저히 지켰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너무나 율법을 철저히 신봉하고 하였기 때문에 융통성이 없을 정도로 그만큼 하느님 말씀을 존중하며 또 그런 법을 잘 지킴으로써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찬들이 그러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의로움보다 능가해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더 노력하고 더욱 더 진실한 사람이 되도록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이 보다 더 완전한 사람이 되고 또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 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말씀이지요. 단순히 계명을 지키고 죄를 짓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태도를 넘어서 적극적으로 법의 정신을 따라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살인해서는 안된다, 사랑하면 재판에 넘겨진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살인하지 않는 그 자체로만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살인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형제에게 성을내는 자, 자기 형제를 바보라고 하는 자,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 5, 21~22)
또,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는데 형제가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난다면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고 그 다음에 예물을 바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상대방 형제는 원망을 품고 있는 데, 그 사람과는 아무런 화해도 하지 않고, 하느님께만 잘 보이려고 하는 그 모습, 그것이 과연 좋은 모습으로 보일까요? 예수님은 먼저 화해하고 제단에 예물을 바쳐야 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예는 자신을 고소한 자가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화해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자신을 재판관에 넘기고, 재판관은 형리에게 넘기기 때문에 그러기 전에 화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마태 5, 25) 그 사람의 의견이 무엇인지를 존중하고 서로 타협하고 화해해야 한다는 것, 누군가 자신을 어떤 이유로해서 고소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무엇인가 그 사람에게 불편을 끼쳤거나 그 사람에게 잘못했다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곰곰히 생각해야 되고, 조그만 것이라도 얼른 그 사람과 화해를 할 때, 좋은 관계 형성의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진실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하느님께 기도하거나 미사를 드릴 때, 나의 모습이 다른 형제에게 좋아 보이는지요? 혹시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끝없는 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끝없는 길을
걷습니다
이쯤이면 되겠지
라고 할 수 없는
여기까지도 대단해
라며 자족할 수 없는 길
그저 계속 걸어야 할
끝이라 싶으면
이내 새 길이 열리는
주님이 몸소
딱 한 걸음 먼저
내딛으시기에
주님 곁에 서려
한 걸음 내딛으면
이내 주님은
나보다 한발 앞서
나가시는 길
끝없는 길
끝을 물을 수 없는 길
끝을 물으면 안 되는 길
그저
한걸음 또 한걸음
걷고 또 걷고
길이신 주님을
따라 걸으며
나도 또한
길이 되어야 할
사랑의 길
의로움의 길
화해의 길
살림의 길
한걸음 또 한걸음 새롭게
한걸음 또 한걸음 힘차게
한걸음 또 한걸음 벅차게
끝없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언젠가 아주 열심한 신자분이 신부님께 선물을 하나 주고 가셨습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 신부님에게 선물을 주고 가신 분이 직장에서는 부하 직원들 월급 지급도 몇 달씩이나 밀리고 일만 많이 시킨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신부님은 ‘나에게 선물 마련해주실 돈으로 부하 직원들 월급이나 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그 말씀에 덧붙여 우리의 의로움을 자세히 설명이라도 하시듯이,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23-24절)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오늘 독서의 말씀이 우리의 양심을 때립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26-28) 어제 했던 우리의 의와 오늘 내가 주님께 바치는 기도 그리고 내일 내가 하기로 했던 좋은 이상만큼이나, 오늘 여기서 우리의 삶이 자비로운 주님 사랑의 모습을 닮을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어제와 내일을 사는 오늘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님
제일 무서운 사람이 ‘오늘만 사는’ 사람입니다. 그 만큼 ‘오늘’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안에 우리의 과거와 미래가 들어 있습니다. 오늘을 잘 살려면 지나간 것들과 화해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미래를 앞당겨 오늘 잘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화해를 하라고 권유하십니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마태 5,23-24).
이것은 진정한 마음으로 다가가는 용기와 결단입니다. 그것도 하느님 사랑 안에서 그 사람에게 찾아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화해하고자 하는 마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께 신뢰하면서 화해하고자 찾아가는 사람은 화해의 손을 상대가 거부해도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그 형제 안에 살아 계신 주님께 화해의 마음을 베푸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신뢰하기에 진정한 마음으로 화해의 손을 내미는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때 이미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오늘’ 깊이 살게 됩니다.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구원의 삶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어제 못 살았다면 오늘 다시 잘 살아 보라 선사되는 하루입니다. 어제의 과거는 지나갔고 내일의 미래는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오늘이 좋은 날이요 구원의 날입니다.
어제의 과거는 오늘이 되고 오늘의 현재는 내일의 미래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을 잘 살아야 합니다. 어제의 내가 아니라 매일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하고만 비교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회개의 삶입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어제 아침식사후 집무실 창밖 동편에서 떠오르는 찬란한 일출이 흡사 주님의 방문처럼 반가워 즉시 써놓은 글이 있어 나눕니다.
-“결코 절망하지 말라고/살만한 세상이라고
오늘 하루만 살라고
아침마다/찬란히/희망으로/사랑으로 떠오르는 태양
찾아오시는 주님
반갑다/고맙다/기쁘다
감사와 찬미/감동으로/시작되는 하루다.”-
아침마다 희망과 사랑으로 떠오르는 태양처럼, 아침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희망의 태양, 사랑의 태양으로 우리 마음 속 어둠을 환히 비추시며 찾아 오시는 주님이시며 이런 주님을 마음 활짝 열어 환대하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이사야서 말씀도 생각납니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 두지 마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과거 악인이라도 오늘부터 의인으로 살면 구원이지만 과거 의인으로 살았어도 오늘 악인으로 살면 구원이 없습니다. 주님은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당신 생각을 정확히 밝히십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구원의 기회이자 구원의 날입니다.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얼마나 희망적이고 자유롭게 하는 말씀인지요. 회개하여 시작하면 언제든 늦지 않습니다. 회개하여 늘 새롭게 시작하라 선사되는 새하늘과 새땅의 오늘 하루 새날입니다.
바로 이런 삶을 사는 이들이 바로 오늘 복음의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요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로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사는 이들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여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의 순수가 우선입니다. 살인도 마음의 분노와 증오에서 시작됩니다.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언어 폭력도 일종의 살인입니다.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지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실제적 살인뿐 아니라 이런 성냄이나 언어 폭력 역시 일종의 살인입니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화내지 말아야 하고 언어 폭력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니 죄의 뿌리인 마음의 정화가, 순수가 우선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구별되나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 할 때 전제되는 바 형제와의 화해입니다. 형제를 용서해야 하느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화해한 깨끗한 마음으로 이 거룩한 미사중 모시는 주님의 성체입니다.
수도생활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의 궁극 목표는 마음의 순수입니다. 죄가 아예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마음의 순수입니다. 참으로 마음 깨끗한 이들이 지혜롭고 자비로우며 온유하고 겸손한 이들이요 내적으로 자유롭고 평화로운 행복한 이들입니다. 오늘 하루만 사는 단순하고 착한 이들입니다.
하여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미사와 시편 공동 전례기도입니다. 나쁜 기억과 상처를 치유하고, 잠재의식과 무의식을 정화하며, 죄의 뿌리를 뽑아 버림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 마음의 순수를 살게 하는 데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의 수행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찬미와 감사가 바로 마음의 순수에 대한 답입니다. 다음 행복기도 내용 그대로입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중에/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사는 마음 깨끗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 위로와 치유,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순수해진 우리 영혼에 온갖 필요한 좋은 것들을 선물하십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마지막 연이 오늘 강론 주제와 직결되어 다시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한 발 불러서면 보인다.
최민석 신부님
나는 길을 걷다가 아름다운 꽃을 보면 걸음을 멈춘다. 꽃은 존재 자체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지금 여기 있는 그곳에서 비로소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되살려 준다. 모두 다 내 기억 속에 가장 오래 각인되어 있는 나의 본향 하느님 나라를 기억나게 하는 꽃들이다. 그 꽃들을 보면 걸음을 멈추곤 한다.
밝고 환한 미소로 가던 길을 멈추도록 나를 부른 것은 내 마음의 꽃과 마주쳤기 때문이다. 어제와 오늘 미세먼지 사라지고 티 없이 푸른 하늘이다. 내가 기분 좋을 때는 내 입에서 저절로 부르게 되는 동요가 있다. <파란 마음, 하얀 마음>이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여요. 산도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임 속에서 파란 하늘 보고 자라니까요.”
나는 들풀과 꽃 그리고 나무를 보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현상, 사람, 감동적인 장면을 만나면 그 속으로 빠져든다. 숲속 길을 끝없이 시간 가는 줄 모르며 걷다가 배고프면 돌아오곤 한다. 들풀과 꽃 그리고 나무 등은 나를 끄는 그 무엇이 있다. 흔들리며 서있는 생명들, 그 존재들이 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내 의식이 알아차린 것이다.
지금 있는 이대로 희망이게 하는 것들 천지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여요. 파랗게, 파랗게 파란 하늘 보고 자라니까요.’ 그렇다. 늘 어린아이처럼 푸른 하늘을 보고 푸른 꿈을 노래하는 나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내 안에 푸르른 사랑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만약에 들풀과 꽃과 나무며 숲속을 노니는 온갖 새와 이름 모를 생명들과 서로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는 것은 아직도 내가 푸른 하늘을 노래하는 푸른 마음 때문인가. 나는 지금도 너에게서 나를 보고 나에게서 너를 보는 푸른 꿈을 살고 있다. 한 생명은 어디에도 있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있게 하는 생명이다. ‘없음’으로서 존재하는 텅 빈 알아차림이 내게 있다.
지금 내가 여기 살아 숨 쉬고 있다. 내가 가고 오고 앉고 눕는다고 말하는 것은 내 안에 계시면서 나를 한 순간도 떠난 적이 없는 그분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아래 들어오신 지금 여기 현존하신 분이 여기와 저기에 아울러 있는 계신다. 시작 없는 과거와 마침 없는 미래를 아울러 품고 있는 하느님이 ‘지금’이 내가 있는 곳에 함께 계신다.
예수님이, 내가 너 있는 곳에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 계신 곳이 없는 존재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분이 ‘하느님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은 그가 모든 곳에 아울러 존재한다는 사실을 신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인생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고요함에서 왔다가 고요함으로 돌아간다. 왔다 간다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실제는 온 곳도 없고 갈 곳도 없다. 다만 거죽의 모습이 바뀌고 또 바뀔 따름이다. 사실은 오면서 오지 않고 가면서 가지 않고 머물면서 머물지 않고 움직임도 아니요 고요함도 아니면서 아니 계시 곳이 없는 분이 나를 떠나지 않고 나와 함께 계신다.
내가 사는 인생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인연 따라 쉼 없이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부분인 나 개인은 움직이고 전체인 하느님은 가만히 계신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움직이면서 가만히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이 부분이면서 전체이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없다. 움직이는 가운데 움직이지 않는 중심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내가 보는 꽃들이 땅에 뿌리를 박고 있다. 실은 모든 꽃은 뿌리다. 뿌리가 꽃을 피운 것이다. 꽃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뿌리도 아름다운 것이다. 꽃과 뿌리를 구분함으로써 꽃만 보는 것이 한계다.
세상의 모든 보이는 들풀과 꽃과 나무에는 뿌리가 있다. 뿌리의 사랑 없는 생명은 없다. 모든 생명은 사랑을 먹고 자란다. 사랑을 받은 생명이라야 사랑의 꽃을 피워낸다. 어떠한 예술이든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 먼저 이뤄져야 창작의 아름다움이 형성될 수 있다. 근원이신 하느님 사랑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무궁무진 생동감 넘치는 세상으로 나를 인도한다. 내 본질을 숨기고 있던 가식과 허상의 껍질을 벗는다. 지금 이대로가 나다. 나와 또 다른 생명들이 어우러져 사랑을 나누고 있다. 나눔과 섬김과 사귐의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다. 하늘을 나는 새들과 들에 핀 들꽃과 나무 그리고 온갖 생명들이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다.
말의 품격 <마태오 5, 20ㄴ-2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인간관계에서 말의 사용에 따라 좋은 관계인지 나쁜 관계인지 판가름할 수 있습니다. 말이 품격이 있거나 진실과 사랑이 있으면 진실, 사랑, 자비, 온유, 겸손, 친교가 아름답게 이루어지지만 성질나는 말, 성격이 나오는 말에는 저주, 강압, 시기, 질투가 섞인 말이 되어 미움과 원수의 관계로 판결 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성내는 말, 원수 맺는 말, 고소 고발하는 말은 살인적 언어가 되어 인간관계가 올바로 이루어지지 않아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말은 품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부드러운 말씨, 작은 음성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꼭 할 말도 해야 합니다‘말의 완전함은 인품이 있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거칠거나 막말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자비 가득한 말씨, 부정적 의미가 있어도 부드럽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온유한 말로 “아담아 너 어디에 있느냐?” 하셨지 “이놈아 너 어디에 있느냐?” 하시지 않고 “바보야 죽으려고 그런 짓을 하였냐?”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표면상 벌을 주신 것같이 느껴지지만 “내가 장차 사람이 되어 너희를 구하겠다.” 하셨습니다.
본질에 따라 말하지 못하여 사람의 고귀한 인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말하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생각 없이 늘어놓아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이 되어 부메랑이 되어 자기에게 화가 돌아옵니다.
말 한마디 때문에 폭망하고 악의 무리가 뒤를 따라 원수의 관계 아니면 귀한 사람을 잃어버리는 불행한 일을 당합니다.
말은 제대로, 말은 바르게, 말을 성실하게, 서로 진실과 사랑을 가지고 말을 나누면 불붙는 지옥에 빠지지 않고, 서로 원수의 관계도 맺지 않고, 새로운 친구를 얻으며, 감옥에 갇힐 일도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사순절에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게 준비하여 기쁨이 넘치는 부활절을 맞이하기를 기도합니다.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가
맺는 관계들이
실은 하느님께
올려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화해의 기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라는
예수님 앞에서
화해를 배우게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모두는
형제들입니다.
형제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의
관계입니다.
화해로 새롭게
맺어져야 할
우리의 관계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형제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화해야말로
하느님과 우리사이의
선물이며 예물입니다.
화해의 연결점이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찾습니다.
서로의 상처를
겸손하게 인정하는
화해로 다시 맺어지는
사순의 오늘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상처에 필요한 약은
화해라는 뜨거운
눈물같은 예물임을
믿습니다.
보상심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결핍이나 고통을 겪고 나면 반드시 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는 것이지요. 단적인 예로 군대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군대에서 후임병 때 겪은 어려움들을 기억하고는, 자신이 선임병이 되었을 때 후임병들에게 잘 해주는 것이 아니라 더 괴롭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늘 “내가 쫄병 때는 말야~~”라고 말합니다. 후임병 때의 어려움을 선임병이 되고 나서 어떤 보상으로 얻고자 하는 마음에서 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보상심리를 공격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바로 나폴레옹이라고 합니다. 그는 작은 신장에 대한 열등감을 보상받기 위해 수없이 전쟁을 치르고 결국 황제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이렇게 보상심리는 역사를 움직이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됩니다. 그런데 이 보상심리의 결과는 늘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폴레옹도 말년에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되지요. 그리고 이러한 나쁜 보상심리로 인해 상처받는 누군가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보상심리의 한계는 자기 내부의 치유 능력을 상실하고, 상처의 진통제를 자기 바깥에서만 찾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허약한 모래성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상을 받으려는 마음이 우리의 삶 안에서 너무나 자주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주 성을 내거나 모독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내부를 바라보지 않고 외부를 통해서 해결하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이들의 잘잘못이 너무나 많이 보입니다. 자신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고 불의한 것이기에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는 착각 속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내 이웃에게 아픔과 상처를 남기는 것뿐이 아니라, 자기 자신 역시 기쁨과 평화 속에서 살지 못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게 넘겨지고,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조금 너무한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성 내지 않고, 바보나 멍청이라고 말만 하지 않으면 될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마음 안에 깃들고 있는 모든 악한 요소들을 없애라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원인은 내 마음 속에 있는 좋은 가치들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 믿음, 희망, 기쁨, 평화 등의 좋은 가치들을 내 마음 밖으로 내어 놓지 못하고, 부정적인 가치만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을 통해서 보상을 받으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내 자신 안에 있는 가치들을 통해서 스스로에게 보상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주님께서 말씀 하신 하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한 방향으로 깊이 사랑하면 다른 모든 방향의 사랑도 깊어진다(안네 소피 스웨친).
미루지 말아야 할 세 가지
사업에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번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돈은 많이 벌었지만,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주위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어느 날 그는 고민 끝에 지인을 찾아가 도움을 구했습니다. 지인은 그의 고백을 듣고 진심 어린 충고를 해주었습니다.
“자네는 삶에서 미루지 말아야 할 일이 있는데 그 세 가지를 계속해서 미루는 것 같네.”
그는 궁금해서 지인에게 물었습니다.
“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지인은 세 가지 미루지 말아야 할 것을 그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첫째는 빚을 갚는 일이네. 누군가로부터 받은 미소,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도움을 갚는 일 같은 것 말이야. 그런 빚은 갚는 것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네.”
“둘째는 용서를 구하는 것이네. 자신의 잘못으로 어떤 사람과 관계가 소원해졌다면 상대방이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기를 바라지만 말고 내가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하네. 생각해 보게나, 그러지 않음으로써 지금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 있는지를...”
“마지막으로 바로 사랑을 고백하는 일이지. 잘 표현한 음악은 청중에게 진한 감동을 주지만 표현하지 않고 담아두기만 하는 마음은 안타까움만 줄 뿐이지.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의 사랑은 상대방의 심장에 북소리 같은 강한 울림을 남긴다네.”
미루지 말아야 할 것들을 계속해서 미루고 있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지금 당장 미루지 말아야 할 것들을 실천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구도자가 위대한 스승의 집을 찾는 것을 본 사탄은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데서 돌아서도록 힘껏 온갖 수단을 다 쓰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그 가엾은 구도자에게 재산, 욕정, 명성, 권력, 위신 등 있을 수 있는 온갖 유혹을 다 겪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도자는 영적인 일에 제법 경험이 있었기에 그 유혹들을 쉽게 싸워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이 간절했던 것입니다.
그가 위대한 스승의 집을 발견하고 들어가 스승 앞에 갔을 때, 그는 스승이 융단 의자에 앉아있고 제자들은 그의 발치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는 좀 놀라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성인들의 으뜸가는 덕인 겸손이 모자라는군.’
그러고는 그 스승에 대하여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다른 점들도 살폈습니다. 그리고 발견했습니다.
‘세상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찾아온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의 눈길도 주지 않는군.’ 그리고는 혼잣말로,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아첨을 안 하니까 그럴 테지”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리고 입고 있는 옷도, 뭔가 잘난 척하는 말투도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이 모든 점들로 미루어보아 그는 자기가 잘못 찾아왔으며 어디 다른 데를 계속 찾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구도자가 방을 나서자, 방 한구석에 앉아있던 사탄을 본 스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사탄아. 그는 애초부터 네 차지였다.”
[개구리의 기도 1, 6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이 ‘의로움’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인데, 사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의로움’의 의미를 명확히 새기고 살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의로운 사람일까요?
루카복음 18장 9절에서 14절에는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 하느님께로부터 의로운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기도합니다. 먼저 바리사이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우선 바리사이는 불의나 죄를 짓지도 않고 감사의 기도를 드릴 줄 아는 신실한 신앙인입니다. 그리고 단식을 통한 절제생활과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십일조도 철저히 내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는 행동으로는 이 세상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신실한 신앙인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의롭게 되었다.’라는 말은 오늘 복음처럼 ‘하느님에게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완전한 삶을 산 바리사이가 아니라, 온갖 죄를 저지르는 세리만이 하느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았을까요? 그는 뒤에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은 ‘의로움’이란 결코 ‘행위’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리는 자신을 낮추어 누구도 평가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만을 간청하지만,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고 여겨 세리를 판단했습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의로움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나의 자리가 심판자가 아니라 용서를 구해야 하는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느끼면서 어떻게 동시에 심판자처럼 남을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자리를 아는 것이 의로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라고 기도합니다. 즉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하지 못하고 심판한다면 하느님도 우리 죄를 용서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로움이고 정의입니다.
따라서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이 ‘의로움’이지, 사람들이 보기에 의로운 행동을 한다고 해서 의로운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결코 형제를 심판하여, ‘바보!’라고 하거나, ‘멍청이!’라고 하거나, ‘성’을 내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가르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살인자가 어떻게 의로운 사람으로 심판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남을 심판하는 사람을 살인자와 같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가끔은 ‘내가 이렇게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를 하고 있는데, 저 사람들은 왜 아무 것도 안 하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내가 봉사하면서 남을 판단하게 된다면, 내 구원을 위해서라도 봉사를 잠시 접는 것이 낫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도 위대한 교회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어찌 될지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일이고 나의 의로움도 하느님께서 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하고 그분의 자비만을 바랐던 세리의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지닐 때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때입니다. -과거를 묻지 않는 하느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와 복음의 예수님이 참 담대합니다. 두분 다 본질을 직시합니다. 율법을 유린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율법의 핵심, 바로 하느님 마음에 깊이 접근합니다. 참으로 하느님 마음을 아는 분들입니다. 차이는 에제키엘이 하느님의 ‘대변자agent’ 역할이라면 복음의 예수님은 하느님 율법의 ‘결정자arbiter’로서 관여하신다는 것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이 크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절망에서 벗어나 희망과 용기를 갖고 지금 여기에 투신하게 합니다. 한마디로 지금이 구원의 때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과거를 불문不問에 부치시는 아주 현실적인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잘 살았든 못살았든 중요하지 않고 지금 여기 현재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 여기 현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에서 벗어나 늘 초심자의 자세로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독서 후반부 말씀이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는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리는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하느님 눈엔 고정불변의 의인도 악인도 없다는 것입니다. 악에서 돌아서는 회개의 선택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이런 결정적인 좋은 예가 배반자 가롯 유다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시 옆에 있던 구원받는 강도의 경우입니다. 선택받은 유다는 불의를 행함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불의하게 살았던 강도는 막판에 회개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지금이 바로 구원의 때입니다. 구원 역시 은총이자 우리의 결정적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새롭게 시작하는 회개의 모습을 보십니다. 하느님께는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이라는 것이 전혀 없는 분이십니다. 이런면에서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 죄’라는 말을 실감합니다. 이사야도 이런 하느님에 관해 비슷한 관점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 두지 마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이미 싹이 돋았는데 그것이 보이지 않느냐? 내가 사막에 큰 길을 내리라. 광야에 한길들을 트리라.”(이사43,18-19).
가끔 고백성사 때 보속으로 써드리는 말씀 처방전이기도 합니다. 참 어리석은 사람들이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상처의 악순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과거는 지났고 사는 것은 지금 여기 현재인데 과거의 상처의 아픔을 반복하며 사는 것입니다.
바로 제대로 회개가 이뤄지지 않은 ‘약한 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과거의 강력한 유혹에서, 관성慣性에서, 타성惰性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마음’의 영웅적 회개의 노력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런 노력과 함께 가는 하느님의 은총이 과거의 상처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할뿐 아니라 그 어둠의 상처를 치유합니다. 이미 회개로 정리된 형제들의 어뒀던 지난 과거를 들춰내 상처를 덧나지 않게 하는 것이 예의이며 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이 의도하는 바도 지금 여기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지체없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섯 개 대당 명제중 첫 번째에 해당되는 ‘성내지 마라’는 오늘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기존의 율사들과는 달리 권위를 지닌 분으로서 율법의 참뜻을 밝히십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잡아내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역시 답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도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마음 속의 악의 뿌리부터 근절하라는 것입니다. 악의 발본색원拔本塞源에는 사랑뿐이 없습니다. 살인의 시작은 말로부터, 아니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살인에 버금가는 언어폭력도 많습니다. 바로 생각과 말과 행위의 진원지인 마음의 정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사랑할 때 마음의 순수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을 하느님을 볼 것이다.”, 죄가 없어서 마음의 순수가 아니라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입니다. 이런 마음의 뿌리부터 사랑으로 정화되어 마음이 좋아야 생각도 말도 글도 행위도 좋습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회개, 지금 여기서의 지체없는 회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형제들과 화해하고 예물을 바쳐야 할 때도 지금 여기요, 불편한 적수와 얼른 타협하여 더 악화되지 않게 해야 할 때도 지금 여기입니다. 이 또한 사랑이 주는 분별의 지혜입니다. 회개의 사랑과 함께 가는 마음의 순수와 지혜,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마음 속 악의 뿌리의 근절에 미사은총은 얼마나 절대적이고 감사한지요. 참회와 자비송으로 시작되어 말씀전례, 성찬전례에 이은 주님의 기도, 평화의 인사후 사랑의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 마음의 정화淨化, 성화聖化와 더불어 내외적 일치一致로 영육靈肉의 건강을 회복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악순환惡循環의 사슬에서 벗어나 주님과 함께 늘 새롭게 지금 여기를 살게 하십니다.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네.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시편130,5). 아멘.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태 5,20-26(사순 1 금)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큰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회개와 화해를 요구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의로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그런데, 대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은 무엇일까?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여섯 가지의 대당명제로 제시하십니다. ‘대당명제’란 한 명제를 먼저 내세우고, 그 다음에 그에 대한 반명제를 내세우는 것을 말합니다. 곧 이는 “~라고 이르는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여섯 가지 의로움 중에서, 첫 번째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형제를 ‘바보’ 혹은 ‘멍청이’라고 모욕하고 멸시하는 것까지도 ‘살인’에 포함시키십니다. 곧 형제에게 ‘성’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언어폭력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참으로 혀를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집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스러진 이들보다는 적다”(집회 28,18)
또한 이는 “혀”의 살인뿐만 아니라, 죄의 뿌리인 내면적인 면도 살인에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이다”(1요한 3,1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곧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화해”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살인하지 않는 것이 본질인 것이 아니라, 화해하는 것이 본질이라는 말씀입니다. 화해하면 살인하지 않게 되지만, 살인하지 않는다고 화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화해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우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우선하는 일이 화해하는 일입니다. 곧 먼저 화해하는 일입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형제들 사이의 사랑과 화해를 중요하게 여기시는지를 말해줍니다. 형제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지를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바칠 때, ‘먼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23-24)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곧 제단의 예물을 바치는 ‘우리 자신’이 예물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야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시고”(창세 4,4) 예물과 예물을 바치는 이를 하나로 간주하셨듯이, 예물을 바치는 이를 바로 ‘예물’로 삼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제단의 예물보다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예물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사람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늦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지체치 말고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비를 가리고 따지기 전에, ‘먼저’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고 것이 의로움인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루는 것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 예수님께서는 형제와 맺는 관계가 곧 하느님과 맺는 관계요, 형제와의 의로움의 관계가 곧 하느님과의 의로움의 관계임을 깨우쳐주십니다. 그러므로 형제와 ‘먼저’ 화해하고, 무엇이 우선이고 먼저 해야 할 일인지를 헤아려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마태 6,24)
그리고 “먼저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마태 5,24)
주님!
얼른 화해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기회가 있을 때,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화해한 제 자신이 당신께 드리는 참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시비를 따짐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인생유전(人生流轉)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인생유전人生流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생이 한결 같지 않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돌고 도는 인생이라고도 하고 그래서 어떤 유행가에서는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이라고 노래하기도 합니다.
인생유전에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뜻도 있습니다. 인생이 돌고 돌아 처지가 바뀐 것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주인댁 도련님은 고생 모르고 살다가 삶의 거센 풍파에 떠내려가기도 하고 뒤집히기도 하여 비참해진 반면 주인댁 머슴의 아들은 어릴 적 고생이 오히려 그를 단단하게 만들어 성공을 하였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이렇게 인생의 전과 후가 뒤바뀌는 것을 성공과 실패의 관점에서 볼 수도 있지만 노숙과 노추의 관점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나이 먹을수록 노숙老熟하고 원숙圓熟해집니다. 젊어서는 욕망이 들끓고 인생의 갈 길을 찾지 못해 방황을 하다가 나이 먹어 정신을 차리고 소박하지만 자기 삶을 충실히 살고 작은 사랑을 실천하며 이웃과도 원만하게 지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요즘 볼 수 있듯이 정말 안타깝게도 노추老醜의 경우도 많습니다. 젊었을 때는 꿈과 이상이 있었고 그래서 그것을 향해 매진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유명해졌으며 위치를 갖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나이 먹으면서 이상은 사라지고 욕망만 남아 욕망이 노망이 되고 명예가 권력이 되면서 추해지는 것입니다.
또 다른 관점도 있습니다. 선행과 악행의 관점입니다.
젊었을 때는 한 성깔이 있어 악행을 저질렀지만 여자를 잘 만났거나 스승을 잘 만나 망나니 같은 사람이 정말 착실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반대로 중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정말 착하고 모범생이었는데 사실은 줏대가 없어서 착한 것이었기에 살벌한 현실을 만나면서 살아남기 위해 정말 악랄한 사람으로 바뀐 인생도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의 인생은 끝이 중요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남는 것은 마지막이 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망했다 하는 것은 젊었을 때 잘못 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젊었을 때 잘 살다가 늙어 또는 마지막에 잘못되었을 때 하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더 중요한 관점이 있습니다. 회개와 타락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회개라는 것이 못된 성격 또는 습관을 바꾸고, 늘 남에게 못되게 굴던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는, 다시 말해서 개과천선改過遷善의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회개란 하느님께로 돌아섬입니다. 하느님 모르고 그래서 하느님 없이 살다가 하느님을 만나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악행이 하느님을 모를 때의 악행이었기에 선행도 하느님을 알고 난 뒤의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성실의 선행입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하느님을 더 사랑합니까, 세상을 더 사랑합니까?
내 인생의 마지막에 무엇이 남을 것 같습니까?
선행이 남겠습니까, 악행이 남겠습니까?
하느님이 남겠습니까, 형해形骸만 남겠습니까?
이것을 묵상케 하는 오늘 독서입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랑하라! 선을 행하라!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마태오5,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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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矛盾).
결코 좋은 의미로 사용될 수 없는 단어임을 우리는 압니다....
하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모순이라는 단어와 거리를 두고 살아가기는 쉽지 않은 듯 합니다.
주위를 둘러볼 필요조차 없습니다.
조금만 차분히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면 어쩌지도 못하는 그런 모순들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늘 무엇인가를 청하는 우리의 삶이지만, 타인의 청에는 소극적이고, 때로는 모른 척 하기까지 합니다.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며 살아야 하는 처지이면서도, 타인의 작은 잘못에도 관대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사랑을 원하면서도 사랑하는데 인색하고 서툽니다.
정의로운 세상을 원하지만, 우리 모두는 각자의 어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누군가의 희생적인 아름다운 모습에 감동의 눈물을 흘릴 줄 알면서도, 내 몫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분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아니 그분께서 그토록 싫어하시는 삶을 보여드리기도 합니다.
그 내용을 일일이 열거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어쩌면 세상도, 그 세상 안에 있는 교회도,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도 평생 자기모순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여,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싸워야 합니다.
내 안에는 선과 악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질 수 있는 본성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선을 선택하고자 싸워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적 삶입니다.
하느님의 논리는 늘 간단하고 분명했습니다.
“사랑하라!”
“선을 행하라!”
구원의 의미는 그분께서 일러주신 길로 걸어갈 때 존재합니다.
비록 우리가 스스로의 모순 때문에 수없이 걸려 넘어진다 하더라도, 그분께서는 우리가 다시 일어서기를 변함없이 기다리신다는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당당하고 영예롭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폴리카르포 주교 순교자는 오늘 날로 치면 터키 지역인 스미르나의 지역의 목자로 사도직을 수행하셨습니다. 요한 사도의 직제자였던 그는 스승을 따라 가톨릭 정통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습니다. 동시에 당시 초세기 교회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흔들어놓던 이단 척결을 위해 앞장섰습니다. 깊은 신앙과 탁월한 인품의 소유자였던 그는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들로부터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당시 그리스도교 교회는 혹독한 박해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폴리카르포 주교님께서는 비록 주교직을 수행하고 계셨지만, 하루 하루의 삶이 마치 살얼음 판 위를 걷는 듯 위태위태했습니다. 번듯한 교구청도 없었습니다. 탄탄한 교구 조직도 없었습니다. 언제 불어닥칠지 모를 박해의 칼날과 순교의 때를 기다리며 살아가고 계셨습니다.
마침내 올 것이 왔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주도한 대대적인 그리스도교 박해로 인해 폴리카르포 주교님은 체포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적대자들로부터 갖은 수모와 치욕을 당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교 신 앞에 제사바칠 것을 강요당했습니다. 적대자들의 협박을 의연히 뿌리친 폴리카르포 주교님께서는 기원 후 156년, 당시로서는 무척 장수(長壽)한 나이인 86세 때, 스미르나 시내의 경기장에서 화형으로 순교하셨습니다.
폴리카르포 주교님의 순교 장면이 얼마나 영웅적이었으면, 당시 목격자가 상황을 세밀히 기록했고, 그 순교록이 아직도 우리 손에 남아있습니다. 그가 지상을 떠나가는 마지막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끔찍한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라면, 아무리 강심장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부들부들 떨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깊은 신앙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얼굴이 사색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순교 현장에 등장한 폴리카르포 주교님의 모습은 너무나 당당했습니다. 화형의 도구인 높게 쌓아올린 장작더미를 마주했지만, 마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개선장군의 모습처럼 늘름했습니다. 머지 않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하리라는 기대감에 그분의 얼굴은 광채로 빛났습니다.
폴리카르포 주교님의 화형은 당시 경기장 내에서 치러진 ‘순교 이벤트’의 파이널 경기이자 메인 이벤트였습니다. 몇몇 순교자들에 대한 처형이 모두 끝난 다음, 마지막으로 폴리카르포 주교님의 순서가 잡혀 있었습니다. 화형이 시작되기 전 총독이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죄인 폴리카로포! 만일 그대가 지금 이 자리에서, 그대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한다면, 즉시 그대의 목숨을 살려줄 것이다.”
그러자 폴리카르포 주교님께서는 큰 목소리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내가 86세가 되도록 섬겨온 그분은 나의 왕이며 구세주이시고, 또 나를 조금도 해치지 않으신 그분이신데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는가?”
화형이 시작되고 나면 너무 뜨거운 나머지 어떤 죄수들은 장작더미 위에서 뛰어내려 형집행이 지연되곤 했기에, 사형집행인들은 폴리카르포 주교님을 장작더미 위에 올린 다음 끈으로 묶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대못을 몸에 박아 단단히 고정시키려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주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힘드신데 괜히 고생들 하지 마시고 그대로 두십시오, 저에게 불을 견딜 힘을 주시는 주님께서는 그대들이 굳이 못을 박지 않더라도, 제가 장작더미 위에서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서 있는 것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장작더미 위에 올라가신 폴리카르포 주교님께서는 두 팔을 하늘을 향해 활짝 벌리고 장엄하게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사랑하고 찬미하올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계시(啓示)하신 성부여, 저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에 들게 하시고 성자의 수난의 잔을 같이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이날 이때를 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진심으로 당신을 찬미합니다.”
폴리카르포 주교님께서 마지막으로 “아멘!”하며 기도를 마치셨을 때, 사형 집행인들은 장작더미에 불을 붙였습니다.
피를 흘리는 박해시대는 지나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시대 또 다른 순교자들의 탄생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로 사랑의 순교자, 땀의 순교자, 인내의 순교자, 용서의 순교자들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매일 우리와 한 지붕 아래 몸붙여 살아가는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서, ‘나와 다름’으로 인해 파생되는 갖은 상처나 고통들을 너그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기꺼이 견뎌내는 사랑의 순교자들이 더 많이 필요로 하십니다.
거룩한 치열함으로 살아내는 사랑실천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제 1차 바빌론 유배 전후로 유다는 혼란과 위기를 맞습니다. 그럼에도 유다는 이집트와 바빌론 양대 세력이 서로 견제하고 있기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믿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런 방심과 무사 안일함 속에 있는 백성들을 향하여 하느님과 집단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하지만 말고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에제키엘은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21) 생명을 얻으려면 자비로우신 주님께 돌아가야 함을 간곡히 권고한 것이지요. 그러나 백성들은 예언자의 소리에 귀를 닫아버립니다. 그 결과 587년에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맙니다.
회개하지 않고 죄와 어둠에 머물려는 사람은 건널 수 없는 죽음의 계곡과 패망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 자신의 삶과 사랑에 책임을 짓지 않고 회피하거나 남의 탓만 하는 사람은 영이 헷갈려 주님을 만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나를 부르는 사랑 찾아 참 회개의 여정을 떠날 때임을 알아차려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5,20) 곧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삶을 살라는 것이지요. 안일함의 잠을 깨워 간절함과 열정과 헌신의 자세로 주님의 뜻을 실행해야겠습니다.
남에게 해코지를 않고 남보기에 착하게 사는 것만으로 결코 좋은 제자라 할 수 없겠지요. 십계명과 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신앙인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참 신앙인은 소극적으로 피해 안 주고, 하라는 것만 하는 유아적 자세에서 벗어버려야 합니다. 더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일치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약자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함께하며, 서로를 더 깊이 사랑해야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 성내거나 ‘바보’, ‘멍청이’라고 말함으로써 평화를 깨뜨리며 마음에 상처를 주지 말라 하십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관계 안에서 바라보시고, 사람 안에 있는 작은 생명의 단초까지도 존중하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늘 '한 걸음 더' 그리고 ‘보다 더’의 자세로 살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요구에 성실히 응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잠든 영적 감수성을 일으켜세워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늘 하느님 앞에 자신을 둠으로써 주님의 영을 호흡해야겠지요. 그란 끊임없는 수련이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을 더 갈망하는 가난한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마음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내 안에 타오르게 되는 사랑과 선과 의로움의 불꽃은 결국 거룩한 치열함을 낳습니다. 이 거룩한 치열함 안은 무관심과 무감각의 잠을 깨울 것입니다. 그렇게 깨어 있는 사람은 분노, 폭언, 멸시와 증오, 관계 단절과 같은 평온과 일치를 깨뜨리는 행동을 그만 두고, 능동적으로 이웃에게 달려갑니다.
오늘도 무딘 영적 감각을 깨워, '한 걸음 더', '보다 더', ‘아직도 더’의 자세로 주님과 이웃에게 다가가 사랑을 실천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원망조차 할 수 없는 이와 함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빼앗는 이들을 향한
원망의 눈빛마저 빼앗긴
빼앗기는 이들이 있답니다
빼앗는 이들과
빼앗기는 이들 사이에서
누구와 함께 하고 있나요
짓밟는 이들을 향한
원망의 울부짖음마저 짓밟힌
짓밟히는 이들이 있답니다
짓밟는 이들과
짓밟히는 이들 사이에서
누구와 함께 하고 있나요
죽이는 이들을 향한
원망의 몸부림마저 죽임당한
죽임당하는 이들이 있답니다
죽이는 이들과
죽임당하는 이들 사이에서
누구와 함께 하고 있나요
말투를 바르게 하자 <마태 5, 20ㄴ-2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의로운 행동의 시작은 말부터 바르게 하고 고운 말, 깨끗한 말, 사랑이 넘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내서 말하고, 형제를 무시하는 말로 “바보 멍청이”라는 존경심 없는 말로 어떤 일을 서로 반대하거나 의견이 상치되어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의 자리가 올바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마음, 긍정적 마음, 양심의 지시를 받아 선을 향해 있는 마음,
자비와 일치와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권력이나 재력이나 명예에 의하지 않고 자기 욕망에서 자유스러운 사람입니다. 긍정적 마음은 매사를 감사와 찬미로 사는, 부정을 모르고 사는 마음입니다. 양심에 따라 사는 사람은 악의나 시기심이나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고 선을 행하는데 전념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에는 신앙 문제가 따릅니다. 주님이 사람과 화해하여 살려고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것같이 말로써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그 당사자 앞에 자비와 일치의 정신으로 겸손하고 온유하게 “제가 잘못했으니 용서 바랍니다.” 청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말투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상대를 존중하는 말, 신뢰하는 말, 우리는 함께 사는 사람임을 강조하는 말, 우리는 한 형제입니다.
세상은 끼리끼리 모이게 마련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은 형제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 밑에 모두가 한 형제입니다.
원망과 상처를 기억하며 살지 말고, 상처는 치유하고 깨끗하게 살아 주님을 더욱 찬양합시다.
사랑의 감옥
인영균 끌레멘스 수사신부님
의로움 안에서 화해를 강조하시며 주님은 이 비유로 화해를 하지 못한 이의 비참한 종말을 보여주십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마태 5,25).
만일 누군가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앙심을 품고 있다면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그래야 합당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나로 인해 상처 받은 사람에게 가야 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용서해 줄 것을 청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지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30의 부르짖음처럼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사람의 용서를 통해 용서해주십니다.
겸손되이 용서를 청하는 사람이야 말로, 증오와 앙심의 감옥이 아니라 사랑의 감옥 갇힌 사람입니다. 증오와 앙심의 감옥에서는 용서를 통해서 나올 수 있지만, 사랑의 감옥에서는 나올 수 없습니다. 주님 사랑의 감옥에 우리가 매일 더욱 깊이 사랑의 사슬에 묶여 더욱 단단히 갇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사랑에 묶여 있는 사람만이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베풀 수 있습니다.
스페인 성 베네딕도회 라바날 델 까미노 수도원에서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고 얼른 타협하여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에제키엘은 악인과 의인을 나누어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악인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에제 18,21-22)
그러고 하느님께서는 악인에 대한 진심을 전하고 계십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23절)
이번에는 하느님께서 의인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악인이 저지르는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하면, 살 수 있겠느냐? 그가 실천한 모든 정의는 기억되지 않은 채, 자기가 저지른 배신과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24절)
이번에 다시 의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26절)
그리고 결론으로 다시 악인을 위한 말씀을 하느님께서 하십니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28절)
그래서 예언자의 초점은 하느님께서 아무리 악인이라 하더라도 ‘악에서 돌아서면’라는 점에 두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악인의 회개가 하느님의 자비를 바탕으로 구원으로 이를 수 있다는 희망을 펴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멸망을 원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다리시는 사랑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구약의 배경을 바탕으로 율법의 정신을 일깨우고 계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율법에 매여 사람들을 판단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율법의 틀을 벗어나야 하는 사실을 또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율법학자들이 삶의 기조로 삼고 있는 십계명에서 ‘살인’은 법조항이 아니라 그것이 이루지는 가능성까지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주님께서 또한 가르치는 것입니다.
율법은 그 결과를 갖고 죄인으로 몰고 가지만 그 전에 이미 악의 결과로 나갈 것을 미연에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의 대수롭지 않은 작은 것이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 순간들을 성실한 자세로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일들, 특히 ‘바보’, ‘멍청이’라는 욕은 대수롭지 않은 것 같지만 그것이 바로 살인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최고의 경신행위로 여기는 제단에 예물을 바치는 경우에도 먼저 이웃과 용서하고 용서받은 화해의 일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지요.
어떠한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께 ‘무마의 의미로 제물을 바치면 그것으로 끝난다.’라는 관행에 주님께서 좀 더 귀를 기우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느님께서 사람의 잘못을 기다려 주시듯이 고소한 사람과 법정으로 가기 전에 먼저 감정을 접고 타협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법정까지 가는 것은 사실 서로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야.’라는 우리의 속담도 사실 복음의 정신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끝까지 자신을 양보하고 겸손한 자세가 얼마나 우리의 삶을 지혜롭게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시는 말씀이십니다.
화해한다는 것은 서로의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 질 수 있지요. 그리고 인내와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전제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이웃과 하해할 수 있고 평화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내놓고 보면 진실도 진리도 옳음도 없는데 때로는 고집하고 내 중심으로 몰고 나갔던 지난 날의 어리석음과 쓸 데 없는 옹고집을 반성하게 됩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옹졸함은 결국 ‘좁다란 자기’라는 감옥에 갇혀서 자유를 잃고 너그러움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기다릴 줄 알고, 무례함이나 경솔함까지도 인내할 수 있는 겸손의 그릇에서 더 빛을 내는 것이지요.
사순절을 보내며 부족한 우리는 늘 기도하며 나 자신을 반성하고 회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날의 나의 과오나 죄를 고칠 수는 없어도 인자하신 하느님께서는 회개를 통하여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고 의인으로 나가며 구원의 길에서 구원되기를 늘 기다리십니다.
”물러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참된 봉헌은
형제와의 진정한
화해입니다.
화해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가야할
진정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화해하지 않는
우리의 모순을
다시 일깨워주십니다.
형제와의 화해가
참된 회개이며
우리의 봉헌입니다.
화해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삶의
반복인 미움을
걷어내는 것은
화해입니다.
화해는 형식적인
겉치레의 말이 아닌
진정성있는
나눔입니다.
진정성어린 나눔만이
서로를 결박에서
풀어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을 때
화해의 문도 쉽게
열릴 수 있습니다.
이 사순시기가
화해의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봉헌의 시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다시 화해라는
예물을 바칠
시간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화해가 하느님을
향하는 참된 길임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십니다.
화해가 없으면
평화도 없습니다.
우리나라 고소고발 건수는 엄청나다고 합니다. 보통 한해 평균 50만 건을 돌파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큰 문제는 무고한 명예훼손, 모욕 사건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혐의가 입증되어서 기소로 이어지는 비율은 전체의 30% 수준에 불과하다고 하네요. 이는 곧 수사기관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고소고발의 남용이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고소고발 자가 많은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나는 잘못한 것이 없고, 네가 잘못한 것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고, 상대방만 잘못한 것일까요?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화해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내가 먼저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마치 자기 체면이 크게 훼손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길에서 서로 부딪쳤을 때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기 보다는 ‘뭐야?’라는 표정으로 째려볼 때가 많다고 하지요. 이렇게 째려보았을 때의 결과는 어떨까요? 싸움이 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하지만 얼른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를 하면, 상대방 역시 “아닙니다. 제가 죄송합니다.” 식으로 사과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째려보는 것이 이득일까요? 아니면 무조건적으로 화해를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이 이득일까요?
저 역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커다란 후회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한 친구를 향해서 “용서할 수 없어.”라는 말을 함부로 내뱉은 것이었습니다. 왜 이 말이 큰 후회가 될 수밖에 없냐면, 이 말을 내뱉고서 얼마 뒤에 이 친구가 사고로 주님 곁으로 떠났기 때문입니다.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서 싸웠고, 또 함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는 상처까지 주었다는 생각에 얼마나 많은 후회를 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다짐하게 되었지요.
‘무조건 화해하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의로움에 능가하는 의로움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용서에 있습니다. 그것도 상대방이 용서를 청해야 하는 용서가 아니라, 내가 먼저 화해를 청하는 진정한 용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발적인 용서의 마음이 바로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의 마음이고, 이 사랑의 마음이야 말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에도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되어 있지요. 주님께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가 먼저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방이 먼저 화해를 청했을 때에 마지못해 용서하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를 청할 수 있는 능동적인 자세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해서 함께한 게 아니야. 더 사랑하려고 함께하는 거야(영화 ‘업’중에서)..
소중하지 않은 건 하나도 없다(‘따뜻한 하루’ 중에서)
어떤 동산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있었습니다. 한 그루는 키도 크고 나뭇잎도 무성했지만 그 옆에 있는 나무는 키도 작고 가지도 나약해서 불평이 많았습니다.
“저 키가 큰 나무 때문에 햇빛을 못 받아서 나는 자라지 않는 거야.”
“저 나무가 없었다면 훌륭히 자랄 수 있을 텐데.”
“저 나무는 키만 크지 쓸모도 없고 나에게 피해만 주는군!”
그러던 어느 날, 나무꾼이 그곳을 지나갔습니다. 작은 나무는 나무꾼에게 큰 나무를 도끼로 찍어 가져가 달라고 했습니다. 큰 나무가 나무꾼의 도끼에 찍혀 넘어지자, 작은 나무는 매우 기뻐했습니다.이제 멋지게 자랄 수 있겠다고 환호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작은 나무가 쓰러져버렸습니다. 그늘이 되어 주고 바람막이가 되어 주던 큰 나무가 없어지자 뜨거운 햇볕과 세찬 바람을 견디지 못한 작은 나무는 그만 힘없이 쓰러져버린 것입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에 대한 소중함을 잘 모르는 우리가 아닐까요? 그래서 소중함보다는 내게 해를 주고 있다면서 부정적인 판단을 가지고 대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러나 그러한 잘못된 판단들이 결국 내 자신을 더욱 더 힘들게 만들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 달 전입니다. 국회는 ‘국정농단’의 책임을 물어서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가결시켰습니다. 헌법재판소는 국회의 탄핵에 대한 심리를 하였습니다. 법적인 절차에 따르면 헌법재판소는 ‘탄핵’을 인용할 수 있고, ‘탄핵’을 기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사회는 13년 전에 같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하였고, 헌법재판소는 탄핵을 기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하였습니다. 이번에도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했으면 좋겠습니다.
군에 있을 때의 기억입니다. 신학생이었던 저는 성당의 군종병으로 근무하였습니다. 성당은 부대 밖에 있었기 때문에 매일 영외에서 근무했습니다. 군 생활을 하신 분들은 영외에서 근무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아실 것입니다. 성당에서 근무하니, 시간이 나면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좋은 군종병을 3개월만 하고 부대로 복귀하였습니다. 군종 신부님께서 보시기에 저는 군종병으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니 군종신부님께서 저를 ‘탄핵’하셨고, 저는 그 결과를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31년 전의 일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신부님께 무척 고맙습니다. 저는 정신을 차렸고, 무사히 군 생활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물질주의는 모든 것이 쪼개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있는 것들은 그 원인을 알면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영적인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각각의 모든 것들은 사실 전체 안에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법칙과 질서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마음에 따라서 사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아주 작은 티끌에서도 우주 전체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물 한 컵에 있는 에너지로도 지구상의 모든 물을 증발 시킬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물질적인 법칙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진심으로 뉘우친다면 하느님은 눈에 보일 것 같지 않는 그 뉘우침을 보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비록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일지라도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하느님 사랑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햇볕을 주십니다. 그 사랑은 회개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사람이 안고 사는 분노도 나쁘지만, 그것보다 남을 멸시하는 태도가 더 나쁩니다. 모든 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 멸시, 비난 등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말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비난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보다는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고,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하고 친구를 비난한 적이 있습니다. 동창신부님께서 동창모임에서 제게 본당 사순특강을 부탁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준비를 했는데 동창신부는 제게 이야기 한 것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동창신부님은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을 했고, 저에게도 사과를 하였습니다. 그랬으면 된 것인데 저는 다른 동창들에게 친구의 잘못을 또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친구가 제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친구도 사과를 하였고, 잘못을 인정했으니 더 이상 친구의 허물을 이야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순간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이야기가 옳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잘못된 말은 세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첫째는 잘못된 말을 하는 본인의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 못하는 상대방의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셋째는 험담과 비난을 받는 당사자의 인격을 죽이는 것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행복은 선택이다. -오늘 지금 여기 깨어 사십시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은 선택입니다. 책임은 개인에게 있습니다. 깨어 오늘 지금 여기를 살 때 행복입니다. 바로 여기 답이 있습니다. 깨어 오늘 지금 여기를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영성훈련도 없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의 궁극 목표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습니다. 과거에 아파하지 마시고 미래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영역이 아닌 하느님의 영역이니 하느님께 맡기세요.
우리가 확실히 살 수 있는 행복의 구원의 자리도, 하느님을 만나야 할 하늘 나라도 바로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의 묵상 결과 도달한 결론입니다. 이미 타계한 가톨릭의 대표적 시인인 구상선생님의 ‘오늘’이란 시가 깊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과거와 미래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이 영원입니다. 하느님께서 선사하신 참 좋은 오늘의 신비, 오늘의 행복, 오늘의 선물입니다. 저는 요즘 28년전 사제서품식날(1989.7.11) 가족사진을 보며 주님 안에서 큰 위로와 행복을 체험합니다. 사진 안에 환한 모습의 이미 타계하신, 그러나 언제나 하느님의 영원한 오늘 안에 살아 계신 사랑하는 어머니 마리아, 큰 형님 요셉, 둘째 형님 베네딕도, 셋째 형님 세례자 요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 깨어 사는 것입니다. 깨어 있음은 영원입니다. 깨어있음은 사랑입니다. 깨어있음은 빛입니다. 깨어있음은 마음의 순수입니다. 깨어있음은 마음의 가난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깨어있음이 축복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 깨어있는 깨끗한 영혼들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사랑의 빛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 깨어 있는 영혼들은 사랑의 빛 속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어둠의 유혹이 침투할 수 없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ㄴ).
오늘 지금 여기 사랑의 빛 속에 깨어 살 때, 비로소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할 수 있고 간접적 살인의 뿌리를 뽑아낼 수 있습니다. 지엽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마음의 순수를 통한 근본적 해결입니다.
살인은 물론이요 살인의 씨앗인 성을 내는 일, 형제에게 ‘바보’라 하거나 ‘멍청이’라 하는 멸시 가득 담긴 말도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깨어 오늘 지금 여기를 사는 마음 순수한 이들 안에는 이런 부정적 감정의 자리가 없습니다. 이런 이가 바로 지혜로운 현자입니다.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들입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다가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면 즉시 결행하여 형제와 화해하고 난 후 돌아와서 예물을 바칩니다.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이라면 지체없이 타협할 것입니다. 회개의 실천에 능한 ‘회개의 달인들’입니다.
하느님은 회개한 영혼들에게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과거는 불문에 붙입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사는 모습입니다. 책임은 개인에게 있습니다. 행복도 구원도 은총임과 동시에 개인의 선택입니다.
과거에 아무리 잘 살았어도 오늘 지금 여기 못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과거에 못살았어도 지금 여기 깨어 잘 살면 구원입니다. 이사야서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역시 제가 고백성사시 보속의 처방전 말씀으로 자주 드리는 구절입니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 두지 마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이사43,18-19ㄱ).
과거는 오늘이고 오늘은 미래입니다. 오늘에 구원이 달렸습니다. 과거를 치유하고 미래의 불안을 없애는 오늘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이 설파하는 진리입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18,26-28)
회개가 답입니다. 지체없는 회개가 구원의 지름길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가 회개의 자리입니다. 오늘이 영원입니다. 오늘이 구원입니다. 생명을 주는, 자유롭게 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죄책감에 아파하거나 시달릴 필요 없습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회개로 말끔히 죄책감을 씻어내고 주님 사랑의 빛 속에 깨어 오늘 지금 여기를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그 인생 변질로 부패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깨어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바로 그분이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시네.”(시편130,7ㄴㄷ-8). 아멘.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율법의 형식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지키는 이들, 율법을 아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능가하는 의로움, 곧 형식적인 율법의 의로움이 아니라 율법정신에 해당하는 사랑의 의로움을 실천하도록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여섯 가지 중에서, 첫 번째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살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체적 행동의 결과로서의 살인에 대한 단순한 문자적, 형식적 차원에서의 율법을 넘어서, 율법의 참 정신인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차원을 설명하십니다.
원리상 살인으로 적용할 수 있는 내면적 동기를 말씀하시면서, 구체적으로 세 단계로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 곧 단순한 내적인 분노요, <둘째>는 형제를 ‘바보’라고 말하는 것, 곧 천박하다고 멸시하는 것이요, <셋째>는 형제를 ‘멍청이’라 말하는 것, 곧 불경하다고 매도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능가한 의로움을 제시하십니다. 곧 살인의 내면적 혹은 근본적인 동기까지 금지하심으로써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을 완성하십니다.
이어서, 살인과 분노와 모욕과 매도를 “화해하라”는 사랑으로 대치시키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곧 제단의 예물만이 아니라, 예물을 바치는 우리 자신이 예물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야훼께서는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셨다.”(창세 4,4)고 하시며 예물과 예물을 바치는 이를 하나로 간주하셨듯이, 예물을 바치는 이를 예물로 삼으십니다.
결국, 형제와 맺는 관계가 곧 하느님과 맺는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오늘도 예수께서는 우리가 바치는 예물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예물을 들고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사람이기를 바라십니다.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은 형제를 사랑하고 화해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형제 상호간의 화해를 거듭 강조하여 촉구하십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마태 5,25)
늦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지체치 말고 화해하라는 촉구입니다. 시비를 가리고, 따지기 전에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한편, 이 말씀은 인간관계는 애시 당초 인격적인 관계임을 깨우쳐줍니다. 곧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시비를 따지기보다, 먼저 용서하고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애시 당초 인간관계의 문제는 화해해야 할 문제인 것이지 따져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인관관계는 인격적인 관계이기에 사랑을 매개로 맺어지는 관계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용서받아야 할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용서받고 구원받아야 할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사랑받아야만 하는 존재요, 받은 그 사랑을 하염없이 내 주는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회개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신앙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을 믿고 예수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있을지 생각합니다. 살아가며 영성생활에 진보보다는 보이지 않게 쌓여가는 먼지처럼, 죄와 허물만 늘어 감을 보기도 합니다. 삶도 죽음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신앙의 문제는 더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의 말씀들에서 길을 찾아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에제 18,21-23)
하느님과 집단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지 말고 각자 자기 죄를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제 1차 바빌론 유배를 전후한 당시, 유다는 이집트와 바빌론 양대 세력이 서로 견제하고 있으므로, 전쟁의 위협은 적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방심과 예루살렘은 안전하리라는 무사 안일함 때문에, 회개를 외치는 예언자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587년에 멸망하게 되지요.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요? 세상살이에서도 이 정도면 괜찮아, 별 문제 없겠지 하는 안일함 때문에 더 큰 곤경을 겪기도 합니다. 또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도, 되도록 남의 탓을 하려는 무의식의 조정에 자신을 쉽사리 내맡겨버릴 때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더 무디어지기 쉽지요. 그러다보니 회개하라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반대로 자신이 세워둔 기준에 따라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없는 우리에게 완벽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뉘우치고 돌아서라 하십니다. 돌아서서 말씀을 따르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기만 하면, 구원의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죄임을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자로서의 최소한의 의무만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하십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의 삶보다 ‘더’ 의로운 삶을 살라고 요청하십니다(마태 5,20). 그렇습니다. 믿음의 실천은 언제나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무감각의 잠에서 깨어나 안일함을 버리고, ‘지금보다 더’ 사랑하고, ‘남보다 먼저’ 찾아가 화해하며, ‘지체 없이’ 정의를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멈춤의 시간을 가지며, 무디고 완고한 부분은 없는지 살펴보고, 회개를 서둘렀으면 합니다.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부패와 불의를 보며, 남을 손가락질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부터 회개하는 정직함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요? 또 한걸음 더 나아가지 못한 채, 남과 비교하고, 자신의 기준에 비추어 자만자족하며 안일함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도 살폈으면 합니다.
정의는 반드시 바로 세워져야겠지만, 하느님의 자비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먼저 나 자신부터 남의 탓을 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을 그만 두고, 한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께 얼굴을 돌려 사랑과 정의를 실천해야겠습니다. 자신의 회개를 서두르며, 국가적 차원에서의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서도 기도하는 오늘입니다.
가련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회의 차 머나먼 타국에 와서 조마조마·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조국의 운명을 바라봅니다. 대한민국의 현실은 지금 수많은 외국인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입니다. 한국에서 왔다니 틈만 나면 묻습니다. 헌재의 최종 결정 여부, 사드 배치 문제, 북한의 동태에 대해...
어떡하다 우리나라가 이렇게까지 백척간두에 내몰렸는지 참으로 안타깝고 부끄럽기만 합니다. 특히 나라가 이 지경이 되기까지 아무 것도 한 일 없는 제가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는 크게 가슴을 치고 있습니다.
지금 저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조국 대한민국과 사랑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더 이상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더 이상 우리가 비참해지지 않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합니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우리의 지난 역사를 돌아보니 참으로 슬프고 가련한 우리 민족입니다. 틈만 나면 이리 내몰리고 저리 내몰렸습니다. 슬프게도 이리 찢겨지고 저리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사실 우리 동포들이 많은 것을 바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가족들과 둘러앉아 평화롭게 삼시새끼 거르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랜 세월 동안 우리 민족에게는 그 최소한의 권리마저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머나먼 남국(南國)에서 그 옛날 에제키엘 예언자의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를 올립니다.
“가련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 벼랑 끝에서 바치는 저희 동포들의 간절한 기도를 굽어 들어주십시오. 그 옛날 이스라엘 못지않게 참으로 슬프고 혹독한 우리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백성들의 인도자라는 이들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가 있습니까? 착한 목자라는 자들이 어떻게 이다지도 양떼들을 끝도 없는 곤경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 대한민국의 현실은 그 옛날 이스라엘의 현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지도자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가난한 백성들의 재산을 마음껏 갈취했습니다. 사제들은 율법을 짓밟고 성전에 바쳐진 예물을 더럽혔습니다. 예언자들은 점쟁이나 마술쟁이로 타락했습니다. 백성들은 부모를 홀대했으며 이방인들, 과부와 고아들의 고통을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굳게 믿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이 비참한 유배생활이 종지부를 찍을 것이며, 산산이 파괴된 대한민국이 화려하게 재건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 모든 백성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할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다시 한 번 우리 백성들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실 것입니다.”
존경하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이신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님께서 시의 적절하게 대국민호소문을 발표하셨습니다. 한국 천주교 안에도 엄연히 다양한 의견과 노선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호소문을 발표하신 대주교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큰 박수를 보냅니다.
한 말씀 한 말씀이 가슴에 와 닿는 동시에 큰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우리 국민은 헌정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로 탄핵을 둘러싼 첨예한 대립과 갈등에 직면하였으며, 민심으로 위장하여 사법 근간을 흔드는 부끄러운 폭력의 민낯도 목격했습니다. 숱한 희생을 치르며 쌓아온 민주주의의 가치를 농락하는 악의 기운에 맞서 꿋꿋이 법 정의를 실현하려는 헌법재판소의 노고와 용기에 지지를 표명합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헌법재판소가 법치주의의 건재를 입증하는 공정한 판결로 법치주의 실현과 민주주의의 도약을 보여주기를 기대합니다.”
저도 국정농단 청문회와 헌법재판소의 재판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느낀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이번 사태가 꼭 우리 대한민국을 위해 나쁜 일만은 아니구나 하는 체험입니다. 치졸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압박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오로지 국가와 국민의 안위와 미래만을 생각하며 목숨 바쳐 진리를 증언하신 분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유치하기가 하늘을 찌르고 안하무인도 그런 안하무인이 없는 뻔뻔스런 사람들의 폭언 앞에서도 조금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차분히 대응하신 판관님들의 의연한 모습에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그때 저는 확신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대한민국을 완전히 저버리지는 않으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김희중 대주교님 말씀대로 “거짓 평화와 화해의 음모가 명명백백 밝히 드러내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진정한 평화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합니다. 더 이상의 갈등과 대립을 지양하고 정의와 평화를 건설하려는 식탁에 함께 앉아 진정한 일치와 화해를 위해 노력하기를 촉구합니다.”
오늘 밤 주님께서 우리 민족들에게 주실 메시지는 다른 것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당신의 본심, 당신의 간절한 마음을 우리 백성들에게 건네실 것입니다.
“내가 너의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올리겠다.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의 안에 내 영을 넣어주어 너희를 살릴 것이다. 내가 너희를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에제키엘 예언서 37장 13~14절)
예제키엘 예언자는 주님의 현존이 거룩하고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에만 국한되지 않고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한 유배지 바빌로니아에도 지속된다는 것을 반복해서 선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고통스럽고 불만족스러운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분명히 주님께서는 현존하고 계실 것입니다. 죄와 불행과 절망 속에서도 부단히 희망하고 인내하며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바일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굽어보소서. 벼랑 끝에서 바치는 우리 민족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저희 백성을 저 사악한 악의 무리로부터 구해주십시오.”
하느님과 이웃과의 화해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20-26: 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해하라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을 가지라고 하신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보다도 인간적 영광이라는 명예를 추구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의롭게 보이는 것을 중요시 하였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의 찬사라는 역겨운 의로움보다 거룩한 의로움의 행실과 믿음의 공덕을 더 귀중히 여기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살인에 대해 말씀하시며,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 3,15)라고 하시고,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22절) 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행실에서 율법이 단죄하지 않는 것도 징계하신다. 업신여기는 말을 하려고 마음먹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23절). 이 말씀은 ‘예물을 바치고 나서’나 ‘예물을 바치기 전에’가 아니다. 그것은 예물이 제단에 놓인 순간에, 제사가 시작된 바로 그때,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23-24절) 라고 하신다. 예물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동안 우리는 형제에게로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은 우선, 주님께서는 사랑을 가장 훌륭한 예물로 여기신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고, 사랑이라는 예물이 없으면 제물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둘째로는 주님께서는 화해를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만드시어 어떤 핑계도 댈 수 없게 하신다. 화해하기 전에는 그의 제물은 봉헌되지 못한 채 제단에 그대로 놓여있을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화해하여야 한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25절) 우리를 고소하는 자는 우리의 양심이기도 하며 육체의 욕망과 악덕에 맞서시는 성령이시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갈라 5,17)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이미 죽음에로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느님과 영원한 친교와 평화를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령께서 우리의 고발자가 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제단에 나올 때에도, 우리가 이웃과 가지는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올바를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웃과의 관계는 바로 하느님과의 관계라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하느님과 화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죗값을 모두 치루기까지 풀려나지 못한다고 하신다. 우리 이웃과의 진정한 화해를 통하여 주님과 화해하고 주님 앞에 참된 예물을 드릴 수 있도록 하자.
자기 잘못에 ‘물 타기’ 행동
윤경재 요셉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5,22~26)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쉽게 뉘우치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하거나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변명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런 심리를 범죄심리학에서는 ‘중화 이론’이라고 부릅니다. 자기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기보다 부정하거나 희석시켜 범죄의 강도를 줄이거나 자기 죄의식을 경감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왔습니다. 일종의 ‘물 타기 전법’이라고 하겠습니다.
중화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보통 5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자기의 범죄 사실을 희석시키려고 합니다.
1.‘자기 책임의 부정’은 자신의 행동은 고의성이 없었고, 어쩌다 주변 환경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책임도 없다고 주장하는 심리입니다.
2.‘가해의 부정’은 자신의 행동으로 누구도 피해를 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심리입니다. 상대방이 자발적으로 동조했으니 피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또는 보험에서 다 보상해 주었으니 막상 피해본 것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정도 피해쯤이야 다른 일로도 생길 수 있다는 심리입니다.
3.‘피해자 부정’은 나쁜 쪽은 오히려 피해자 측이며 응당 받아야 할 손해를 받은 셈이다. 그가 유혹해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또 폭력을 행사하고는 상대방이 맞을 짓을 해서 맞았다고 주장합니다.
4.‘비난 자를 비난함’은 나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이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느냐는 비난입니다. 법집행기관이나 공권력을 비난하는 심리입니다. 누구도 이 정도 죄쯤은 짓고 사는 게 아니냐고 항변합니다.
5.‘더 높은 충성심에 호소하기’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했다거나 사회 정의를 위해서 약간의 무리수를 두었다고 생각하기입니다.윗사람이 명령해서 어쩔 수 없이 따랐다는 나치의 핑계도 여기에 속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중화이론’이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일상생활 가운데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실수나 잘못에서도 흔히 이런 ‘물 타기 전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죄의식을 무마하려 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간해서는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흔히 입에 발린 말처럼 내뱉는 잘못을 저지르는데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그럴 맘은 없었는데 상황이 그렇다보니 그랬을 뿐인 걸 뭘 그래. 이해해줘”
“하지만 뭔가 크게 잘못되어버린 것도 아니잖아. 그냥 넘어가자.”
“내가 좀 심했긴 했지 그렇지만 그놈은 그래도 싸. 자업자득이야.”
“넌 뭘 잘했다고 나더러 사과하라고 그러냐?”
“본래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지만, 친구들이 그러기로 해서 나도 별 수 없었어.”
하나하나 읽어보면 늘 우리가 쓰던 말투입니다. 죄의식은커녕 스스로 쿨? 하다고 여기면서 사용한 적도 있습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는 속담이 있듯이 우리가 아무런 의식도 하지 않고 내뱉는 이런 말들이 사실은 범죄심리학에서 나오는 이론에 꼭 부합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가볍게 농담처럼 주고받았던 말들이 얼마나 우리의 죄의식을 희석시켰고 그로 말미암아 저지른 잘못 탓에 얼마나 피해자에게 상처가 되었을까 반성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그 피해 당사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별다른 반감 없이 넘어갔었지요. 나도 그런 짓을 했기에 그런 대접을 받는 게 당연하다는 식이었습니다. 이른바 스톡홀름 증후군에 걸린 것입니다. 스톡홀름 증후군에서 얼른 벗어나야 정의가 실현되고 가해자가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하셨을 때 지나치다는 마음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이 말씀에는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게 아무 잘못이 없다면 정당하게 밝힐 건 밝혀야 하는 게 아닌가? 피해망상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범죄심리학에서 말하는 ‘중화이론’을 배우며 제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완벽한 인성을 지키셨기에 우리의 어떤 점이 잘못되었는지 어디가 부족한지 잘 아셨습니다. 우리가 더 큰 잘못과 죄를 짓지 말기를 바라셨기에 그 근원적 대책을 가르쳐주신 것이었습니다.
형제와 이웃에게 화해하려는 마음이 생긴다면 진정으로 사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진정 의미 있는 사과를 하고 싶다면 적어도 세 가지 요소를 갖추어 말해야 한다고 합니다. 유감 표현, 책임 표현, 재발 방지 및 대책 마련에 대한 약속입니다. 또 사과할 때는 진심으로 후회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 다시는 자신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뉘우침, 상대의 비난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는 태도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원망조차 할 수 없는 이와 함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빼앗는 이들을 향한
원망의 눈빛마저 빼앗긴
빼앗기는 이들이 있답니다
빼앗는 이들과
빼앗기는 이들 사이에서
누구와 함께 하고 있나요
짓밟는 이들을 향한
원망의 울부짖음마저 짓밟힌
짓밟히는 이들이 있답니다
짓밟는 이들과
짓밟히는 이들 사이에서
누구와 함께 하고 있나요
죽이는 이들을 향한
원망의 몸부림마저 죽임당한
죽임당하는 이들이 있답니다
죽이는 이들과
죽임당하는 이들 사이에서
누구와 함께 하고 있나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사람은 혼자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웃과 서로의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것이지요.
그 관계가 좋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긴장과 반대의 위치에서 갈등을 갖기도 합니다.
에제키엘은 사람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선인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좋겠지만 악인은 그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언자는 악인에게도 희망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에제 18,21-22)
그러나 예언자는 의인에게도 경고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26절)
마태오는 의로움이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보다 능가하지 못하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의 주제가 되는 토라의 계명 중에 살인은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작은 단계가 있는데, 그것은 감정표현, 성을 내거나 상대방을 자극하는 욕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지요.
또한 의도적인 살인은 인간의 욕심과 두려움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을 내는 것조차 다스려야 한다고 가르치시지요. 더 나아가 ‘바보’ 또는 ‘멍청이’라는 욕은 상대방을 비하시키는 것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것인데, 이것도 주님께서는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형제에게 원망을 품고 있거나 서로의 감정이 좋지 않을 때에 풀거나 화해하는 것이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과제라고 말씀하시지요.
주님께서는 사람이 서로 어떤 감정이 대립되거나 상할 때에는 다투거나 상대방을 누르려고 하는 것 보다 양보하고 부드럽게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도 하시지요.
재판으로 가는 극한 방법을 피하고 도중이라도 상대방을 인정해 주고 화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작은 것이 큰 화를 불러 온다고 상대방에 대한 모욕이나 비하시키는 것은 결국 살인까지 저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작은 것과 미묘한 감정이라도 잘 다스리고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진정한
화해에 관하여
생각하게됩니다.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는
이 팽팽한 싸움을
멈추는 길은
우리의 마음이 먼저
하느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예수님께서 먼저
화해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매순간이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약하고 부족한
우리 존재들입니다.
하느님 자녀답게
산다는 것은
형제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이 사순시기가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성찰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치유해주는
따뜻한 화해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이론이 아닌
마지막 한 닢까지
갚아야 할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원망과 원한
증오가 아닌
형제간의
따뜻한 화해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화해없이
올바로 나갈 수
없습니다.
제가 일어나는 시간은 보통 새벽 3~4시입니다. 이때 일어나서 우선은 성당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성당에 가려면 우선 사제관 밖으로 나가 성당이 있는 건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거리가 그리 멀지는 않지만 빨리 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단 하나의 등도 켜져 있지 않아 너무 어둡기 때문입니다.
너무 어두워서 계단에서 헛디딜 수도 있고 눈비가 오면 미끄러워서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걷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렇게 불편한 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좋은 점도 꽤 많습니다. 우선 아직 잠이 덜 깬 상태로 사제관을 나서지만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 발걸음을 하나씩 힘들게 내딛다보면 어느 순간에 잠은 모두 달아나서 기도와 묵상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완전한 어둠에 둘러싸여 있어서인지 도시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환한 별들을 많이 볼 수도 있습니다.
어두움이라는 불편함, 그러나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들 삶 안에서 어두움이라고 생각되는 부분 역시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게 불편하고 나쁜 것을 준다고 해서 없애려고 하지만, 이를 통해서 더 많은 것들을 얻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거절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 담겨 있는 또 다른 깊은 메시지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의 만남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만남 자체를 거부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과의 만남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또한 부정적인 생각들을 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 만남이 의미 없는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어떤 만남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평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더 많이 가졌으며, 당신을 반대하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만남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신 만남은 그 자체로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할 때 먼저 형제와 화해라고 하시지요.
누군가와 어두움과 같은 불편한 만남 속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나쁘다고 거부하고 피해서도 안 됩니다. 그 안에 있는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혜안을 갖도록 노력하면서 얼른 화해하고 타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오늘 갖게 되는 만남을 불편한 만남이 아니라 소중한 만남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어두움 같지만 그 안에서 빛나는 밝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는 것보다 더 먼저가 되어야 하는 것은 화해를 통한 소중한 만남을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은 무한한 용서의 행위이며 습관이 되는 따스한 눈길이다(피터 유스티노프).
장준(필립보) 신부님 선종.
어제 오후. 제 동창신부가 전화를 걸었습니다.
“장준 신부님께서 돌아가셨데. 들었어?”
“아니 무슨 소리야. 왜 돌아가셔?”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는데?”
거짓말처럼 들렸습니다. 얼마 전에도 신부님을 뵙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신자들을 사랑하던 신부님이셨지요.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런 부고 소리를 들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12년 전에 제가 갑곶순교성지의 초대신부로 발령받아서 성지 개발을 하고 있을 때, 신부님께서는 전 신자를 모두 이끌고 성지에 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신자들이 많이 와야 교구 성지의 소중함도 알고 또 성지 개발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라고 말씀하시면서, 미사헌금도 또 미사예물까지 모두 성지에 두고 가셔서 큰 도움을 주셨지요. 솔직히 그 당시에는 성지를 찾는 신자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아직 꾸며지기 전이라 많은 사람들을 맞이할 수 있는 여건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본당 신부님들께서도 “갑곶성지는 가봐야 고생만 해.”라면서 만류했던 시기였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든 신자들을 이끌고 오셨습니다.
그만큼 교회를 사랑하시던 신부님께서 어제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주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신부님께서 주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으시도록 여러분들의 많은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사진설명: 장준 필립보 신부님을 위한 기도 부탁합니다.
하느님 앞에 합당한 예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경을 통해 낱낱이 드러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얼굴을 묵상할 때 마다 가슴이 순식간에 따뜻해져옵니다. 언제나 그러하셨듯이 하느님 아버지는 한 번 더 우리를 인내하십니다. 또 다시 우리를 용서하시며 당신께서 먼저 화해의 신호를 보내십니다. 지난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또 한 번의 기회를 제공하십니다. 어쩔 수 없이 하느님 앞에 선 한 인간의 궁극적인 태도는 겸손이요, 우리 인생의 결론은 감사여야 합니다.
이토록 크신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매 순간 선물로 받고 있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매일의 과제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조건 없이 용서하고 화해하셨듯이 우리 역시 동료 인간을 조건 없이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전제된 제사야말로 하느님께서 가장 기쁘게 받으실 제사입니다. 화해가 먼저 이루어진 후 드리는 예물이야말로 하느님 앞에 합당한 예물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오 복음 5장 23~24절)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요즘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극단적 대립과 물리적인 충돌은 막아야겠습니다. 우리 민족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면서 평화의 소중함을 온 몸으로 깨달았는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가장 바라시는 바 역시 첨예한 대립과 끔찍한 충돌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 대화와 타협이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유다인들은 다윗가문에서 출생한 메시아, 힘과 능력을 갖춘 정치인으로서의 메시아, 결국 로마의 압제로부터 민족들을 해방시켜줄 해결사로서의 메시아, 그래서 이스라엘을 온 세상의 중심이 되게 하는 정복자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허무맹랑한 기대를 무너트리십니다. 그들의 그릇된 메시아관에 반박하십니다. 당신은 철저하게도 비폭력주의자로 처신하십니다. 언제나 용서하시고 먼저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시는 완벽한 평화주의자로 살아가십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잠시 지나갈 이 현세에 기반을 둔 왕이 아니라 영원한 도성,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아버지께 기반을 둔 왕이십니다. 만왕의 왕은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왕, 힘의 논리에 의존하는 그런 왕이 절대 아니셨습니다. 거듭되는 폭력과 압제, 비인간화 앞에서도 끝까지 견뎌내며, 끝까지 용서하며, 박해자마저 사랑으로 감싸 안은 사랑의 왕이셨습니다.
이제 권력이나 물리적인 힘으로 인간이나 세상을 지배되는 시기는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 늘 대화하면서 화해와 타협을 끌어내려는 노력의 소중함이 더 강조되어야 합니다. 비록 시간이 좀 걸린다 할지라도 앞뒤 정황을 잘 따져본 다음, 물러설 것은 물러서고 양보하면서 대화로 일을 풀어나가려는 노력이야말로 복음적 노선이며 비폭력 노선의 바탕입니다.
평생 웬수 앞에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원수(怨讐)란 말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요즘은 ‘웬수’, ‘평생 웬수’란 말을 더 자주 사용합니다. 원수란 한 마디로 적(敵)을 의미합니다. 내게 치명적인 손해를 끼쳐 사무치는 원한을 맺히게 한 사람입니다.
조금 더 범위를 넓혀 생각해보니 이런 사람들도 원수에 포함시킬 수 있겠습니다. 내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 견딜 수 없는 수모를 준 사람, 그래서 대면하기 껄끄러운 사람, 같은 식탁에 앉아 밥 먹기 싫은 사람, 자다가도 얼굴을 떠올리면 심장이 벌렁벌렁 뛰게 만드는 그 사람, 내 인생에 매운 고춧가루를 뿌린 사람, 틈만 나면 내 인생길을 가로 막는 사람...
결국 원수는 멀리 있지 않고 아주 가까이 살아가는 존재들이군요. 원수는 어느 다른 하늘 아래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내 가정 안에, 내 직장 안에, 내 공동체 안에,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버젓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비하신 주님께서 바로 그 ‘원수’를 사랑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상종하기 싫은 사람이라고 안면몰수하지 말고 먼저 다가가서 인사하라고 권고하십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고 꼴 보기 싫은 그 인간도 사랑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예수님의 당부말씀을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해도 해도 너무한 요구를 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건 뭐 속도 밸도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말씀 아닌가요? 그저 바보 멍청이처럼 살아가라는 말씀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정말이지 인간의 힘,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주님께서 요구하고 계십니다.
인간의 한계, 인간의 무력함, 인간의 부족함에 도달해보니 조금 길이 열리는군요. 결국 인간의 끝에서 주님께서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이러한 기도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주님,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도저히 더 이상은 안 되겠습니다. 제 힘으로는 안 되겠습니다.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제 힘으로는 저 웬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저 인간을 위해 기도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당신께서 활동하실 순간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저 웬수를 사랑합니다. 주님 때문에 저 웬수를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저 웬수에게 먼저 다가가서 인사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한없이 부족한 우리를 당신의 완전성에로 초대하십니다. 더 큰 너그러움과 더 큰 관대함, 더 큰 사랑으로 무장해 유한한 인성을 넘어 무한한 신성으로 건너오라고 초대합니다. 나 홀로는 너무나 나약하고 부족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라면,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다면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주님 앞에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마음의 순수純粹 -사랑, 기도, 회개, 깨어있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말씀 묵상 중 떠오른 강론 주제는 마음의 순수입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회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바로 마음의 순수는 수도생활의 궁극목표입니다. 하여 모든 수행도 마음의 순수를 목표로 합니다. 같은 ‘깨’자 돌림이라며 ‘깨어있음, 깨끗함, 깨달음’이란 예로 강론했던 적도 생각이 납니다. 사실 깨어있을 때 깨끗한 마음이요, 깨끗한 마음에 뒤따르는 깨달음의 열매들입니다. 누구나 원하는바 깨끗한 마음, 마음의 순수일 것입니다.
얼마 전 중동에 진출한 중국의 지도자 시진핑이 아랍지도자들에게 연설 중 인용했다는 맹자의 천하대장부라는 글에 공감했습니다. 사실 유럽과 미국의 기독교 세계와 아랍의 이슬람 세계는 여전히 견원지간, 천년의 앙숙입니다. 바로 이 천년의 앙숙 사이에 진출한 야망의 중국이요, 여전히 중국을 반신반의하는 아랍지도자들에 행한 시진핑의 연설중 맹자를 인용한 대목입니다.
"천하의 넓은 집에 거처하고,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도를 행하여,
뜻을 얻으면 백성과 도를 행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한다.
부귀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고,
빈천이 절개를 변하게 하지 못하며,
위무가 지조를 굽게 하지 못하는 것,
이를 대장부라 이르는 것이다
(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 得道與民由之,
不得誌行其道, 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
얼마나 호쾌하고 자유로운 기상인지요. 천하대장부는 우리 식으로 말해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대자유인을 뜻합니다. 마음의 순수는 타고난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수행의 열매입니다. 마음의 순수는 고정적 실재가 아니라 끊임없는 수행과 함께가는 유동적 실재입니다. 사랑할 때 저절로 기도하게 되고, 기도할 때 회개하게 되고, 회개할 때 치유되고 정화되어 마음의 순수요, 마음이 순수할 때 깨어있게 됩니다.
‘사랑-기도-회개-치유와 정화-순수-깨어있음’이 하나로 연결됨을 봅니다. 회개의 열매가 바로 마음의 순수입니다. 회개를 통해 마음이 순수할 때 주님을 만납니다.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마음의 순수뿐입니다. 언행言行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마음이 순수해야 언행 또한 순수합니다. 자기 형제에게 간접적 살인과도 같은 성을 내지도 않을 것이며, ‘바보!’라 하지도 않을 것이며, ‘멍청이!’라고 하며 무시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정말 큰 죄는 타인에 대한 차별과 무시, 경멸입니다. 또 회개로 마음이 깨끗해진 이들은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면 즉시 예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그 형제와 화해한 다음 예물을 바칠 것입니다. 마음의 순수에서 샘솟는 용기요, 하여 형제들과의 화해의 소통에 지체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순수한 깨어있는 사람들은 ‘오늘 지금 여기’를 사는 단순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도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바로 오늘 1독서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계시되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하느님은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오직 오늘의 지금 여기의 마음 상태를 보십니다. 과거에 의인으로 아무리 잘 살았어도 지금 못 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반면 과거에 악인으로 살았어도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목숨을 살릴 것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들 통한 다음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그대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끊임없는 회개의 삶이 오늘 지금 여기서 순수한 마음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합니다.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며 살게 합니다. 그러니 과거에 아파할 것도, 미래에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보지 않고 오늘 지금 여기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제가 고백성사 보속 처방전으로 자주 써드리는 이사야서 말씀도 생각납니다.
“지나간 일을 생각하지 마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두지 마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이사43,18-19?/span>).
지나간 일들의 아픈 추억들의 유혹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지금 여기를 살아야 과거의 아픔도 치유되며 미래의 두려움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를 치유해 주시고 깨끗한 마음을 선물하시어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며 살게 하십니다.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바로 그분이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시리라.”(시편130,7끼-8참조). 아멘.
화해의 효험
류지인 신부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든 신앙 규정을 철저히 따져가면서 지키는 데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율법의 금지규정은 365가지고, 긍정 명령은 248가지에 이른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들의 의로움을 뛰어넘는 구체적인방법을 다음과 같이 알려 주십니다.
‘성을 내지 말며 형제를 비난하지 않고, 잘못한 일에는 하느님을 찾기 전에화해부터 하라.’(마태 5,22-24 참조) 법적인 내용을 기계적으로 지키는 것보다 이면의 정신들을 자발적으로 수용하고 실천하는 것이 의로움을 달성하는 길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실천 문제는 가히 도전적입니다. 잘못을 인정하려 할 때 온몸이 뒤틀리는가 하면, 먼저 화해를 청하려들면 이상한 패배감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모호한 화해를 시도하곤 합니다. ‘그래, 내가 잘못했지만 너도 잘한 건 없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화해의 정신은 ‘미안하다’ 한 가지만 생각해야 합니다. 거기에 ‘그런데 말이야’ 하고 사족을 붙이기 시작하면그 결과는 아예 시도하지 않은 편보다 못하게 됩니다. ‘미안未安’하다는 뜻은 편안하지가 않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입 밖으로 내기까지는 상당히 거북스럽지만, 상대에게 전하는 즉시 편안함을 회복하게 하는 특별한 효능이 숨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효험의 혜택을 당신 자녀들이 제일 먼저 누리기를 원하며 기다리십니다.
쟤 탓이오, 쟤 탓이오? 제 탓이오! 미안합니다.
생명을 키우고 넓혀가는 길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에제키엘 예언자는 제1차 바빌론 유배를 전후하여 어려움 중에 있는 유다 백성을 향하여 스스로는 회개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과 집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잘못을 경고합니다. 다른 한편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21)라는 하느님의 자비를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5,20)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율법의 세목을 지키고 정해진 교리를 꼬박꼬박 지키는 것만으로는 신앙인의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살인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생명 존중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육신을 죽이지 않는 외적 행위 뿐 아니라, 성내거나 ‘바보’, ‘멍청이’라고 말함으로써 평화를 깨뜨리며 마음에 상처를 주는 내적 살인도 해서도 안 된다 하십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개별 목숨에 국한시키지 않으시고 관계 안에서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최대한을 요구하시고, ‘보다 더’를 요청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런 요구에 충분히 응답하며 산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더 잘 응답하려면 무엇보다도 잠에서 깨어나 영적 감각을 되살려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늘 하느님 앞에 자신을 두고 온갖 피조물을 지극한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보살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지니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민감한 영적 감각을 지닐 때 형제 자매들과의 관계에서도 분노, 폭언, 멸시, 관계 단절과 같은 평온과 일치를 깨뜨리는 행동을 그만 둘 것입니다. 아울러 형제와 ‘먼저’ 화해하지 않고는 참지 못할 것입니다. 영적 감각이 무디어지면 분노, 증오, 악의, 험담과 같은 반생명적인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립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음으로 몰 수도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고”(5,23-24), "고소를 당하면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마지막 한 닢까지 갚고 얼른 타협하라."
우리 사회는 거짓과 무책임, 당리당략의 추구, 공정한 기회의 박탈, 금수저와 흙수저로 표현되는 신분 차별, 돈과 경쟁으로 숨쉬기 힘든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인들부터 대충주의와 안일함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예수님 께서는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감옥에서 나오지 못할 것"(5,26)이라 하십니다.
갚는다는 것은 생명을 거스르는 온갖 부조화와 불일치, 부정적인 언어와 움직임을 극복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이제 서로 존중하면서 애정어린 대화, 따뜻한 배려와 관대한 이해, 차별과 불화의 극복을 통해 자유롭게 생명의 관계를 넓혀가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나 영성생활은 늘 '보다 더', ‘아직도 더’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도 잠든 의식을 일깨워 어떤 상황이나 관계에서도 주님의 영을 품고 ‘더’, ‘먼저’, ‘서둘러’ 사랑하고 작은 것 하나도 소중히 여김으로써 생명을 키워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마태 5,24)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여러분은 자주 미사를 봉헌하십니까?
그런데도 감동도 없고 하느님을 만난 것 같지도 않나요?
왜 일까요?
아무리 미사를 열심히 드리고 예배와 찬송을 하고 불공을 드려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미워하거나
원수처럼 여기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먼저 그와 화해하지 않는 이상 하느님께서도 해결해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하느님께서 하실 일을 혼동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할 일을 다 해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마마보이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힘들지만 직접하기를 바라십니다.
그게 우리를 잘 되게 하는 길이니까요.
어릴 때 부모는 자녀를 위해 대신 많은 것을 해 주지만 커 갈수록 혼자 해결해 나가는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서라도 때로는 냉정해져야 합니다.
미사나 예배, 불공을 드리러 가기 전에 내가 미워하거나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는지 미리 살펴보고 기꺼이 용서한 후에 예물을 바칩시다.
가장 열심하다는 신앙인들이 가장 유아틱할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아니겠지요.
<하느님께 봉헌할 예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새로운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하셨습니까? 거룩한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는 그리스도인답게 예수님을 본받아 나눔과 섬김으로 오늘 하루를 아름답게 가꾸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벗님들의 신앙생활에서 중심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 모두가 중요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것은 성찬례, 곧 미사입니다. 미사, 특히 주일미사는 우리 삶의 중심이요, 우리가 살아가는 힘의 원천입니다. 미사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흥겨운 잔치입니다.
그렇다면 벗님들께서는 과연 어떠한 몸과 마음의 자세로 미사에 참례하십니까? 진정 하느님과 하나 되는 기쁨에 넘쳐 미사를 드리십니까? 아니면 단지 의무감에서 미사에 참석하십니까? 벗님들께 미사는 말씀과 성체를 받아먹음으로써 충만한 생명으로 거듭 나는 잔치의 자리입니까? 아니면 벗님들을 한 사람의 관객으로 만드는 그저 거룩한 연극 같은 것입니까?
주일미사를 한 시간 남짓 진행되는 형식적인 종교 행사쯤으로 여긴다면, 미사가 삶의 중심도, 살아가는 힘의 원천도 될 수 없습니다. 미사가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하고 화해하는 자리요, 우리 삶의 힘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미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한 시간의 주일미사를 봉헌하기 위해서, 일주일이라는 삶의 소중한 시간을 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사회생활과 신앙생활을 분리하려는 유혹에 빠져듭니다. 교회와 세상을 분리하고, 지친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교회 안에서 봉헌되는 미사나 신심행위로 해소하려는 유혹도 만만치 않습니다. 구체적인 이웃 사랑은 외면한 채 하느님 사랑을 공허하게 외치는 어리석음도 우리를 괴롭힙니다. 이웃과의 일치와 화해를 도모하지 않으면서, 그저 애타게 하느님만을 목 놓아 부를 때도 있습니다.
화해 권고< 마태,5/20-26.>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법정 투쟁에 화해권고란 법이 있어 정식 재판을 받기 전에 당사자 끼리 화해하여 재판의 결과를 기다리지 않고 서로의 충돌을 피하는 것으로 결과는 서로 인간적 해결을 보라는 법입니다.
우리는 약자나 강자나 문제가 일어나면 “법대로 하자.” “법으로 해결하지 ” 하지만 잘못하면 더 힘든 일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은 네가 제물을 바치려 할 때 형제가 자기를 원망하는 것을 형제와 화해하고 제물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어떤 본당의 사제와 신자 사이에 충돌이 있어 신자가 사제에게 빰을 한 대 맞고 그래도 성당에 나오니 당신은 “성질도 없나 성당에 나오게” 그러니 그 신자 '내가 신부를 보고 성당에 나오나 하느님 보고 나오지.' 하였다고 하여 신앙이 깊은 사람이라고 하였지만, 오늘 복음에 따라보면 먼저 사제와 화해하고 미사에 참례 하는 것이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날 다양한 인간적 요구가 있고 경쟁사회에는 가장 가까운 사람과도 함께 못하고 분열의 기회가 빈번한데 서로가 가장 가까운 것 같아도 속마음은 갈등과 상처를 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을 지혜롭고 믿음 깊은 삶을 살려면 서로의 상처를 씻고 화해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요사이 sns을 보면 말이 말을 만들어 상대를 격양된 모습으로 비난하고 원수같은 상태로 만들고 나가는 것을 보면서 남과 북이 화해를 못하고 동과 서가 화해를 못히고 빈부사이에 화해를 못하고 살아가니 성장과 결실을 맺지 못하고 살게 됩니다.
화해의 시작은 서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감사의 기회를 이용하여 화해하고, 서로 긍정적 사고로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자비의 희년을 지내는 우리는 더욱 자비로운 마음으로 서로 화해 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많은 운동 경기 중 싫어하는 경기는 권투입니다. 남을 때리는 것을 보고 통괘하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주먹이 나가면서 너 죽어봐라 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의 모습이 우리 안에 없는지 반성 합시다.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수녀님
‘너그럽다’는 말은 한편에서 보면 마음이 넓고 선한 뜻이지요. 그러나 또 한편에서 보면 줏대도 없고 자기 소신도 없어 보입니다. 이 너그럽다는 뜻을 좀더 살펴본다면 '마음이 넓고 아량이 있다.'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이 그 뜻을 살피려면 꼭 집어서 설명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아량雅量'이라는 말이 한자에서 온 것인데 '너그럽고 속이 깊다.'라고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문을 살펴보면 '아雅'는 '맑다', '바르다'. '아름답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요 '량量'은 '헤아리다', '추측하다,'라는 뜻으로 풀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글자대로 한다면 '마음이 맑고, 바르거나, 아름다운 것으로 헤아릴 수 있다.'라고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너그러운 마음이라는 것은 어디에 오염되지 않는 순수하고 맑은 마음, 바르고 선하고 아름답다 넓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너그러운 마음'이야 말이야말로 인간의 본래의 심성이겠지요?
사람이 본래 착하고 선한데, 살다보면 떼가 끼고 욕심이 들어가고 그리고 '자기'라는 주장이 강하다보니 본래의 아름다운 마음이 손상 입거나 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너그럽고 인자한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고 그 마음을 우리가 나누어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그러하듯, 살아가려고 하다보니까 우리가 갖고 있던 본래의 선하고 좋은 마음들이 주위의 환경으로 좁고 이상하게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하느님으로 받은 ‘하느님의 모상’은 기도와 그분을 닮으려는 노력으로 그 모습그대로를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 에제키엘은 너그러우신 하느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27-28).
좁아터진 세상 사람들은 이웃의 지난 잘못들을 기억하며 용서하지 못하고 처벌을 바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신 마음으로 기다리시며 악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오늘 전례에서 화답송으로 바치는 시편저자의 청원을 한 없이 부족한 우리도 전심으로 바치게 됩니다.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시편 130,3)
하느님께서는 인자하시고 너그러우신데 우리 인간은 그렇지 못합니다. 남에게 법의 멍에를 씌우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허세를 비판하시며 사람은 작은 잘못이라도 다스려야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웃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 ‘멍청이’이라는 말도 다스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옭고 그른 것을 따지고 견주기 좋아하는 그들보다 먼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나를 거슬러 고소하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화해를 요청하라고 하십니다.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이나 일을 하고도 우리는 때로 무심코 지나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일도 하지 말고 나의 작은 과오라도 인정하고 회개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주님께서는 남에게 작은 과오를 따지지 말고 먼저 나의 티 같은 잘못도 살피고 악의 시작부터 다스리라고 가르치십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어른들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내것을 양보하고 낯추며 상대를 존중해 줄 때,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넉넉함과 너그러움이 자라나고 성숙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화해하여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이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하나의 기준점으로 삼아서 그들보다 더 의로워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위선자가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했던 위선자들이었습니다(마태 6,1).
그런 '거짓 의로움'은 하느님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위선을 버리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1-22)."
"사람을 죽이지 마라."는 십계명 제5계명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십계명을 지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것'도 살인죄라고 가르치십니다.
증오심, 복수심, 그리고 큰 상처를 주는 모욕과 분노 등도 모두 십계명 제5계명을 어기는 죄라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에 대해서만 재판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속마음까지 심판하십니다(마태 6,4).
요한 1서 저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 3,15)." (여기서 '형제' 라는 말은 '모든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지만, 그것을 꾹 참고(감추고) 평온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위선인가? 아닌가?
마음속에는 큰 미움이 생겼지만, 그것을 참고(감추고), 미운 짓을 한 그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한다면, 그것은 위선인가? 아닌가?
화가 나는 것을 참으면서 그 화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은 '선'입니다.
또 마음속에 큰 미움이 생겼지만 그것을 누르고 안 미워하려고 애를 쓰는 것도 '선'입니다.
그러나 화가 나지 않은 척 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또 미워하지 않는 척 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위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게 실제로는 구분하기가 어렵고, 자기 자신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결국 자기 양심의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이 말씀은, '이웃 사랑'을 먼저 실천한 다음에 '하느님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순서'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신앙인의 '본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웃 사랑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여기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라는 말은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말입니다.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형제입니다.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뭔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형제가 그럴 수도 있고, 그 형제가 뭔가를 오해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에 지금 내 마음은 편안하더라도 형제는 괴로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럴 때에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형제에게 가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 형제를 괴로움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 그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만일에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 형제가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다면, 형제와 화해하는 일과 하느님 앞에서 회개하는 일을 모두 실천해야 합니다.
그 경우에는 형제와 화해하는 일은 내 쪽에서 그에게 '용서를 청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용서할 일'은 잘 기억하면서도 '내가 용서를 청해야 할 일'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신앙인으로서 형제를 '용서하는 일'은 중요한 일인데, 더 중요한 일은 형제에게 '용서를 청하는 일'입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마태 5,25)."
이 말씀은 "심판을 받기 전에 빨리 회개하여라." 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심판이 시작되면 회개할 기회가 없습니다.
그런데 심판을 언제 받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6)."
이 말씀은, 대충 적당히 회개해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감옥'이 연옥일 수도 있고, 지옥일 수도 있는데, 연옥이라면 아주 작은 죄 하나까지 모두 보속해야만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이라면, 그곳에서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습니다.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마태 5,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형제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는
우리의 관계맺음을
반성하는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참된 예물봉헌은
올바른 관계맺음이기
때문입니다.
불안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올바른 관계맺음인
화해로 초대하십니다.
화해는 불편한 여정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화해는 이 여정을
단숨에 뛰어넘지 않습니다.
화해는 화해의
여정을 통해 나자신과
형제를 보는 시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화해와 존중은
관계맺음의
앞면과 뒷면입니다.
화해는 자잘못을
잊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입니다.
화해의 초점은
상처를 주고 받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관계맺음에서 오는
우리의 아픔을 주님께
먼저 봉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를
어루만져주시는
주님을 통해 우리는
화해를 위한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안에서 본격적인
화해가 시작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힘으로
형제들과 화해하십시오.
화해의 체험은
사랑이신 주님을
맞아들이는 참기쁨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먼저 묶여있는 관계를
풀게 될 것입니다.
1984년 미국, 주민 대부분이 백인이었던 아이오와 작은 마을의 한 초등학교에서 “흑인은 더럽고 나쁜 사람들이에요.”라는 아이들의 말에 교사, 제인 엘리엇은 아이들에게 재밌는 실험을 했습니다.
우선 갈색 눈과 파란 색의 두 집단으로 나눈 뒤, “파란 눈이 갈색 눈보다 더 똑똑하고, 더 잘생긴 아이들이다.”라고 말해주고 파란 눈 아이들에게 수업시간 무한 칭찬, 급식시간 먼저 식사, 쉬는 시간 먼저 놀이기구 사용, 더 오래 쉬기 등의 특권을 준 것입니다. 그리고 갈색 눈 아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교사의 차가운 태도였지요. 그 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갈색 눈이 열등하다는 편견이 빠르게 전염되었습니다. 파란 눈 아이들은 갈색 눈 아이들을 무시하고 괴롭혔지요. 결국 하루 만에 친구가 원수가 되었고 학급은 분열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교사는 “사실은 파란 눈보다 갈색 눈이 더 우월하단다.”라고 말을 바꿉니다.
그리고 하루 만에 이제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아이들 모두 번갈아 편견을 경험한 뒤 실험 종료하면서 아이들에게 말했습니다.
“내 말 한마디로 너희들이 서로 괴롭힌 것을 봐라.”
교사인 제인 엘리엇은 아이들에게 파란 눈과 갈색 눈의 차별에는 근거가 없었음을 고백하고 “눈의 색깔로 사람을 평가하고 나눌 수 없듯, 피부 색깔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며 인종차별이 얼마나 근거 없는 행동인지를 설명해주었습니다.
14년 후, 성인이 된 아이들이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때 그토록 짧은 시간에 나에게 악마 같은 마음이 생기는 것에 놀랐어요.”
편견은 이렇게 내 안에 악마 같은 마음을 생기게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얼마나 이 편견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될 이들이 옛 계약의 교사들보다 훌륭한 사람이길 바라십니다. 사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당시에 못된 사람으로 평을 받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율법에 대한 철저한 준수로 인해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사람들이었지요. 얼마나 철저히 율법을 지키는지 보통 사람들은 따라할 수도 없고 그래서 감히 그들의 행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보다도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니 얼마나 엄청난 말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신 이유는 율법만으로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의 준수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들을 해야만 한 것입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그렇게 예수님께 비난을 받았던 것은 율법의 준수 때문이 아닙니다. 철저히 율법을 지키기는 했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보다 인간의 칭찬과 세상의 영광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편견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모습이 아닌 하느님께서 인정하는 모습으로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정하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편견 없이 모든 이들을 받아들이는 사랑의 모습, 한 없이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모습, 약하고 소외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모습이 바로 하느님께서 인정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스스로 가지고 있는 편견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될 때 하늘 나라는 활짝 열릴 것입니다.
제나라 재상 관중은 전쟁 통에 길을 잃었을 때 늙은 말을 풀어 길을 찾았습니다. 젊은 말은 빠르지만 늙은 말은 지름길을 압니다. 세월은 지혜입니다. 머물지 않는 세월, 나이 듦은 복입니다(이영만).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요즘 사람들의 강아지에 대한 사랑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강아지를 키우는 이유는 외로움을 덜고 위안을 얻으려하기 때문이라고 많이 말씀하시는데요. 문제는 사람에 대한 사랑은 줄어들고, 대신 강아지에 대한 사랑만 커진다는 것이지요.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집에 가면 아무도 반겨주지 않지만, 우리 집 강아지는 나를 정말로 기쁘게 반겨준다.”
“사람은 배신하지만, 개는 배신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요? 요즘에는 애를 낳는 집은 줄지만, 강아지 기르는 집은 늘어난다고 하더군요. 조만간 15세 이하의 아이보다 강아지가 더 많은 시대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해외토픽의 기사처럼 애완견이 유산을 받는 시대가 올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에 대한 불신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고 있을까요? 똑같이 불신을 받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역시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불신이 가득합니까? 먼저 믿으십시오. 미움이 가득합니까? 먼저 사랑하십시오.
내가 먼저 바뀌어야 주변도 바뀝니다.
하느님이 무지 싫어하시는 것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사람이 부르는 아름다운 많은 노래에서 대표적 단어는 사랑일 겁니다. 그리고 사랑의 대상은 사람일 겁니다. 사랑에 죽고 사는 인생 맞지요? 그런데 점점 대상이 달라지는 세상입니다. 자신, 재물, 권력, 등으로요.
우리를 닮은 인간을 만들자며 창조된 인간은 외모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닮았으니 우리도 사랑밖엔 할 줄 몰라야 맞아요. 사랑의 반대인 욕, 흉 같은 걸 하느님은 무지 싫어하시는 것도 맞지요.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오 5,22)”
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떤 분이 자신 안에 안 좋은 성향이 있어 벗어나려 해도 계속 같은 죄를 반복한다며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죄를 지을 운명으로 태어난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니 지옥에 갈 것이라고 느낀다고 합니다.
이렇게 가끔은 우리 삶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을 때 자신을 지배하는 어둠의 세력이 자신 안에 있다고 느끼고, 자신은 그렇게 가리옷 유다처럼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단정 지어 버리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 안에 뱀이 한 마리씩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 뱀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뱀이 있어야 자유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뱀을 자신과 동일시해버리는 것이 결국 영원한 죽음을 가져온다는 것은 알아야합니다. 뱀은 나를 유혹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 나 자신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유혹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나는 뱀과 하느님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존재입니다. 자신이 뱀과 하나라고 느끼며 선택권을 포기한다면 그것 자체가 죽음인 것입니다.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박진식씨가 쓴 책입니다. 그분은 2남 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 다들 우량아라고 부러워할 만큼 건강한 유년 시절을 보내었답니다. 그런데 일곱 살 무렵부터 몸에 이상이 생겼답니다. 아홉 살이 되자 주변의 사물을 붙잡지 않으면 일어나거나 앉거나 눕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답니다. 우리는 잠시 그 책의 서문만이라도 읽어보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가져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꿈꿀 수만 있어도 행복한 인생입니다.
멀쩡하던 사람의 몸이 점점 돌로 변하면서 죽어가고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요?
믿기 어렵겠지만 제게 바로 그런 기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불가사의한 질병의 열쇠는 인체에 꼭 필요한 칼슘의 쓰임새에 있습니다. 칼슘은 뼈를 만드는 석회(石灰)물질이라서 인체가 필요로 하는 양보다 부족할 경우 골격 형성이 지체되거나 뼈에 공간이 생기는 골다공증이 발생합니다. 반면에 필요한 양보다 지나치게 많이 생성될 경우에는 남아서 필요 없게 된 칼슘이 서로 뭉쳐져서 석회석이 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몸을 돌로 만들어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칼슘의 저주’가 제 몸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의학 용어로 ‘부갑상선 기능 항진증에 의한 각피 석회화증’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앞의 문장을 과거형으로 말했습니다. 아미 25년 전에 시작된 증상인데, 지금 이 순간까지도 현재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대의학은 20년 전에 저의 증상을 한마디로 ‘불치병’이라고 진단하면서 스무 살을 넘기기 힘들 것이라는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서른둘입니다.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 세월보다 두 해를 더 살았으니 기적이다 싶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남아도는 칼슘이 온몸에 가득 쌓여 결국 신체의 마지막 보루인 심장까지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증상이란 심장을 손아귀에 쥐고서 서서히 조여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칼슘에 포위당한 온몸의 고통으로 인해 혼수상태가 수없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명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십 년이 넘도록 죽음을 유보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생사를 주관하는 절대자의 가호도 있었겠지만 운명의 장난에 굴하지 않으려는 저의 의지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가 없었다면 저는 병원에서 말한 대로 오래 전에 생명의 끈을 놓고 말았을 것입니다.
제 병은 이미 병원의 손길을 떠난 지 오래입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그 흔한 진통 주사 한 대 제대로 맞지 못하고 원시인처럼 견뎌냈습니다. 그렇다고 제 병이 더 나아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점점 악화되고 있지만 그 육신의 절망을 견뎌냈을 뿐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폐마저 30% 정도 석회화가 끝난 제 몸은 이제 한계에 다다라 내일을 장담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포장한다 해도 제게는 ‘산다는 것’ 자체가 잔혹한 생매장의 연속일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상상할 수조차 없는 절망과 굳세게 싸웠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부족하나마 제 삶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 자체가 저로서는 일생일대의 역사(役事)였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과의 눈물겨운 투쟁이었습니다. 남들은 기적이라고들 합니다. 제가 떠나기 전에 남긴 저의 인생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도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비록 내일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없지만 예정된 운명보다 십수 년을 다 버텨오고 있습니다. 적으나마 제 삶의 의미를 참고 싶어서입니다. 이제 제게 죽고 사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일이 될지 모레가 될지 모레가 될지 모르겠지만 사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리고 저만의 꿈을 꾸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세상 살아가기가 힘들다고 하여 절망하신 분이 있다면 제 이야기를 읽고 부디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저는 “꿈꿀 수만 있어도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참담한 현실에 처해 있을지라도 살아 있는 한 꿈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
겨울 햇살이 졸고 있는 마루에 엎드려
박진식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1813-1855)는 그의 저서를 통해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절망이 얼마나 유해한지를 지적하며 제2편에서는 ‘절망은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절망하는 자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단테는 그의 책 「신곡」에서 지옥 입구에“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자들은 소망을 포기하라!”라는 글귀가 붙어있다고 합니다. 절망 자체가 지옥입니다. 왜냐하면 지옥에서만 희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절망한다면 이미 지옥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우리가 지금까지 같은 죄를 지었더라도 또 앞으로도 그럴 수 있어도 절대 싸움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이길 수 있으니 주님께서 싸우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죽음을 원하시지 않고 구원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분이 기대하시니 우리도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에제키엘18,21-23)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에제키엘 예언자는 정말로 우리가 반드시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희망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 얼마나 큰지를 알려주는 명확한 말씀입니다.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혹시 이 말씀을 나와는 상관없는 악행을 일삼는 이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예외 없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틀 전 묵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저 악한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소극적인 생각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되겠다는 적극적인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무슨 의미로 이런 말을 하였을까요?
단지 신앙이란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태도를 요구한다는 의미였을까요?
아닙니다.
물론 죄를 짓지 않겠다는 마음이 분명 죄를 피하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삶이라는 것을 우리는 체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우리는 죄인의 모습으로 살다가 삶을 마무리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우리의 삶을 깨끗하게 인정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은 죄를 상쇄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를 가톨릭적 용어로 보속(補贖)의 삶이라고 합니다.
보속은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며 다시 잘 살아보겠다는 결단을 전제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단이 만들어내는 적극적인 선의 실천이 보속의 행위인 것입니다.
예 언자 에제키엘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악인의 죽음이 아니라, 악인이 선한 길로 돌아서는 것이라 말합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뉘우침과 보속의 삶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에제키엘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 의 깊이나 횟수가 아니라, 뉘우침의 진정성과 용서를 구하는 마음을 보시고 평가하시는 하느님이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이해가 가능할 때,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복음이 말하는 사랑의 하느님을 비로소 만나게 될 것임을 믿습니다.
용서를 청하는 것을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의 순결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마음의 순결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모든 수행의 궁극목표도 마음의 순결입니다. 순결한 마음은 자비이자 지혜입니다. 마음이 깨끗할 때 하느님을 봅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생각도 말도 행위도 깨끗합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과거나 미래에 살지 않고 '지금 여기에' 삽니다. 하느님 역시 과거를 보시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를 보십니다. 판단 기준도 과거의 삶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삶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의 삶이 깨끗한 마음으로 만듭니다. 지금 여기를 살게 합니다. 새삼 깨끗한 마음은 고정적 실재가 아닌 유동적 실재입니다.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살 것이다."(에제18,26-28).
의인과 악인은 고정적이 아님을 봅니다. 회개할 때 의인이요 의인으로 살았어도 악을 저지르면 악인입니다. 과거에 아무리 의인으로 잘 살았어도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살면 다 소용없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정의를 실천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역시 초점은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지금 여기서 공정과 실천을 살 때 깨끗한 마음의 의인이요 그는 죽지 않고 삽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도 근본적인 회개를, 마음의 순결을 요구합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일은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마음의 순결뿐입니다.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는 마음의 뿌리에서 나옵니다. 살인 이전에 마음의 살인부터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 형제를 '바보!'라고, 또 '멍청이!'라고 하는 자체가 이미 마음으로, 말로의 살인입니다. 마음이 순수는 사랑입니다. 겸손이자 지혜입니다. 결코 이런 순수한 사랑의 마음에서는 이런 살인과 같은 언행은 나올 수 없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마음을 정화하여 깨끗하게 하십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인간과 동물은 유전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다만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습니다. 동물에게는 없는 이 마음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세상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라고 말을 합니다. 죽고 싶은 것도 ‘마음’ 때문입니다. 원망과 분노도 ‘마음’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도 ‘마음’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 마음은 나도 몰라!’라고 말을 합니다. 이 마음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인간답게 살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인간 이하의 삶을 살게 됩니다.
Enneagram(애니어그램)은 사람의 마음을 9가지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MBTI(엠비티아이)는 사람의 마음을 16가지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저는 생각이 깊은 유형이 아닙니다. 직관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유형도 아닙니다. 내면의 깊이를 파고드는 성격도 아닙디다. 남들 앞에서 일을 주도하는 성격도 아닙니다. 저는 감성적이며, 협조자형입니다. 논리와 판단을 앞세우는 사람들을 만나면 답답합니다. 일을 추진하기 보다는 인간의 관계를 먼저 생각하는 편입니다.
맹자는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4가지의 마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겸손한 마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입니다. 모든 교육은 이 마음을 잘 다스리기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닮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자비심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마음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가끔씩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에 대해서 묵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나를 배반할 사람이 있습니다.’
유다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는 아니겠지요?” 많은 경우에 배반은 절친했던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들 봅니다. 많은 것을 나누었던 사람들에게 당하는 것들을 봅니다. 본당에서도 보면 그렇습니다. 단체의 간부들끼리도 없는 자리에서는 상대방의 흉을 보기도 합니다. 이런 배반은 사제/ 수녀/ 평신도 모두에게서 나타나곤 합니다. 저는 교구에 있을 때 본당에서 ‘투서’를 보내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본당 신부님의 잘못을 지적하고, 본당 신부님을 비난하는 그 사람은 사실 본당 신부님과 늘 가까운 자리에 함께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저 역시도 예수님을 팔아 넘겼던 그 유다와 비교해서 “나는 아니죠!”라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생각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늘 모범생이었고, 예수님께 칭찬도 많이 받았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유다와 베드로는 똑같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와 베드로의 삶은 그 끝이 달랐습니다. 유다는 절망하였고, 희망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돌아오려는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베드로는 절망을 버렸고, 희망을 가졌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잘못을 용서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배반을 묻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을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비록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인일지라도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햇볕을 주십니다. 그 사랑은 회개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사람이 안고 사는 분노도 나쁘지만, 그것보다 남을 멸시하는 태도가 더 나쁩니다. 모든 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미움과 분노, 멸시, 비난 등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주님께서는 늘 나와 함께 계셨는데, 나는 주님이 힘들어하실 때, 주님께서 함께 기도하자고 하실 때, 어쩌면 늘 주님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봅니다.
바보, 멍청이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5,22). 하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저는 지옥을 갔어도 벌써 몇 번은 갔어야 할 사람입니다. 짧은 생을 살아 오면서 차마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나 행위를 듣거나 보고 접하면서 ‘바보, 멍청이 같은 이라고!’ 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이렇게 무서운 말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살아있는 것은 분명 주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주님의 사랑, 자비와 용서가 없었다면 오늘이 없을 것입니다. 은덕을 입었으니 이제 정신을 바짝 차려 깨어있어야 하겠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도 갚는다.’고 하였지만 오히려 말로 상처를 주고 일을 어렵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별 뜻 없이 던진 말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평생 잊지 못할 상처로 남을지도 모릅니다. “다재다능하지만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혀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복됩니다. 말이 많으면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지기 쉽습니다”(알베리오네).
성녀 데레사도 “여럿이 있는 가운데 말을 적게 하십시오! 말 많은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의 감정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을 골라서 하고 모든 이에게 후회되지 않을 말을 찾으십시오”(십자가의 성 요한).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4,29) 다른 사람을 욕하고 미워하면 욕과 미움은 독이 묻은 화살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혹시라도 뜻하지 않은 말로 상처를 주고 서먹해진 관계가 있다면 상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서둘러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을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마음에 담긴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선하고 거룩한 마음을 지녔으면 선한 것이 나오고, 그렇지 못한 미움과 분노를 담고 있으면 화가 나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호감을 사지만 어리석은 자의 입술은 자신을 삼켜 버립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시작은 어리석음이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끝은 불행을 초래하는 우둔함입니다”(코헬10,13). 아무리 조심을 해도 마음한번 흔들리면 안에 있는 것이 쏟아져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초점을 두지 않고 ‘성 내지 말고’, ‘바보’, ‘멍청이’ 라고 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을 치료하기보다 뿌리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상기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제 입이 맺는 열매로 배를 채우고 제 입술이 내는 소출로 배부르게 된다.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잠언18,20-21).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좋은 글이 있어 함께 나눕니다
침묵의 소중함
-토마스 머튼-
침묵은 양선함 입니다.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을 때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않을 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온전히 하느님께
내맡길 때 바로 침묵은 양선함 입니다.
침묵은 자비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 할 때
판단하지 않고 마음 속 깊이 변호해 줄 때
바로 침묵은 자비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불평 없이 고통을 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바로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겸손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 때
하느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추어졌을 때도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든 어떻든
내버려둘 때 바로 침묵을 겸손입니다.
침묵은 신앙(믿음)입니다.
그분이 행하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에 있기 위해 세상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분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바로 침묵은 신앙입니다.
침묵은 흠숭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옹할 때
바로 침묵은 흠숭입니다.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마태 5,23-24)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 사랑하려 노력해도 나 때문에 알게 모르게 상처를 받는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게 마련입니다.
나의 고의가 아니라도 나 때문에 힘들어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 때문에 분노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어쨌거나 나 때문에 그런 것이라면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용서를 청하며 그를 위해 보속의 기도를 바쳐주는 일밖에 없습니다.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구요?
하느님이 나에게 그렇게 해주시니까요.
오늘 행여라도 나에게 원망이나 미움을 가진 형제가 없는지 한번 떠올려봅시다.
그리고 맘으로라도 그에게 용서를 청하고 그를 위해 작은 기도와 희생을 바쳐보면 어떨까요?
인생 역전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독서를 보면 <그러나>가 두 번 나옵니다.
“그러나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의인이 계속 의인이었다면 <그러나>란 말은 없었을 것이고 악인이 계속 악인이었어도 <그러나>란 말은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의인은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고 악인은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기에 <그러나>란 말이 있는 것이며 회개와 훼절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놓고 우리 인생을 돌아볼 때 초지일관하거나 처음서부터 끝까지 똑같은 사람은 참으로 드물고 대부분의 사람은 전의 것을 버리고 돌아섭니다.
그런데 전의 것을 버리고 돌아서는 것이 어차피 우리 인생이라면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는 회개를 해야지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는 훼절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오늘 가르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들을 보면 인생역전이 실제로 있습니다. 참으로 공부도 잘하고 모범생이었는데 망나니가 되기도 하고 그야말로 개망나니였는데 의젓한 모범생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역전逆轉이 있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데 지고 있다가 마지막에 이기면 그 기쁨이 무척 크지만 이기고 있다가, 그것도 크게 이기고 있다가 마지막에 지면 그 슬픔과 허탈함이 클 뿐 아니라 비참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지금에 대해 안심하고 안주하면 실패로 마감을 하고, 계속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심기일전하면 성공을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실패한 인생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과거지향적이거나 과거를 지향하기까지는 않지만 나아가지 않고 머뭅니다.
과거지향적인 사람은 옛날이 좋았다거나 옛날에 잘했다는 식으로 옛날에 머물거나 옛날이 현재와 미래의 발목을 잡아서 실패하는데 과거에 머물거나 과거의 발목이 잡히지는 않지만 현재에 머물러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기에 실패합니다.
이는 굴렁쇠나 자전거와 비슷합니다. 조금이라도 계속 굴러가야지, 다시 말해서 나아가야지 멈추면 쓰러집니다. 이것이 굴러가는 것의 이치이고, 인생의 이치입니다.
인생은 굴러간다고 표현하고 굴러가는 인생이라고도 하는데 나아가지 않고 나아지지 않으면 그 상태의 유지가 아니라 실패를 합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나아가지 않으면 퇴보한다고까지 하였고, 생의 말년에 이르러서도 지금까지 아무 것도 한 것 없으니 다시 시작하자고 형제들을 독촉하고 격려하였습니다.
반대로 심기일전心機一轉을 하면 성공을 합니다. 현재에 안심安心하거나 방심放心하면 안주安住하게 되어 실패하지만 지금까지 많은 것을 이뤘어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마음을 고쳐먹으면 아니,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심기일전하면 성공합니다. 옛날이 좋았지! 하며 살면 천국을 과거에 가두고 현재는 지옥이 될 것이고, 지금도 괜찮아! 하며 살면 거짓 천국에 안주하여 진짜 천국을 잃게 됩니다. 옛날이 좋으면 어찌 버리겠습니까? 지금이 괜찮으면 왜 버리겠습니까? 그런데 지금부터 영원히 좋기 위하여 지금까지 좋은 것은 잊어야 합니다. 아니, 잊어야 하고 버려야 합니다.
지금, 여기가 천국이고, 천국은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지만 지금, 여기를 버리고 떠나야만 천국은 영원히 계속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깨어나 더, 먼저, 서둘러 사랑하자!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는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웬만한 것은 다 갖추어져 있고, 필요한 것들도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현세생활 뿐 아니라 영성생활도 유행처럼 새로운 것이 떴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영성생활의 항구함과 열정, 치열한 도전이 사라진 채 안일하게 살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은 듯하다. 오늘의 말씀들은 이런 우리에게 강렬한 도전을 던진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비극적인 제1차 바빌론 유배를 전후하여 어려움 중에 있는 유다 백성을 향하여 경고한다. 예언자는 그들에게 개인적으로는 회개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과 집단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위험, 선과 악 사이의 치열한 투쟁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위험에 대해 경고한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에제 18,21) 당시 유다는 이집트와 바빌론 양대 세력이 서로 견제하고 있으므로 전쟁의 위협은 적다고 믿었고, 한편이 침략해 오면 반대편 세력이 구출해주리라 믿었다. 이런 방심과 예루살렘은 안전하리라는 무사 안일함 때문에 회개를 외치는 예언자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결국 예루살렘은 587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한 편 오늘 복음말씀도 영성생활의 안일함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한다. 예수님께서는 계명과 신자로서의 최소한의 의무만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는 ‘안일함’을 버리고 ‘더’ 사랑하고, ‘먼저’ 찾아가 화해하며, ‘서둘러’ 타협하라’는 좀 더 근본적이고 폭넓은 삶을 요구하신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의 삶보다 ‘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마태 5,20). 옛 정의는 살인을 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했으나, 새로운 정의는 형제에게 ‘바보’, ‘멍청이’라고 하는 것조차 금한다(5,22).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다 살인자이다.”(1요한 3,15). 화해를 촉진시키는 형제적 사랑은 하느님께 바친 희생제물을 보다 풍성하고 가치 있게 해준다.
나의 삶을 돌아보자! 나는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지금까지 신자로서, 수도자로서,가족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국가와 지역사회의 시민으로서 할 만큼은 하고 살아왔다. 나 정도만 살아도 잘 사는 것 아닌가’ 하고 만족스럽게 여기지는 않는가? “지금 나는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으니 오늘만 같아라!” 생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틈날 때 하는 기도나 영적독서, 물질적인 약간의 희사나 시간 날 때 하는 봉사로 신앙인으로서의 도리는 다하고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가? 그러나 하느님과의 관계나 영성생활은 늘 ‘아직도 더’만 있을 뿐이다.
이제부터라도 ‘더’, ‘먼저’, ‘서둘러’를 내 마음과 몸과 영혼의 지렛대로 삼고 사랑의 춤을 추어보면 어떨지. 지금까지 해오던 것보다 ‘더’ 열정을 불태우고, ‘더’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을 경청하며,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자! 그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갈망하고, 누구보다 ‘먼저’ 자신을 내놓고, 기도나 성경공부나 봉사에 앞서 ‘먼저’ 찾아가 화해하며, ‘먼저’ 받아들이도록 하자! 하느님과의 관계, 형제자매들과의 관계,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꼬이고 맺힌 매듭을 미루지 말고 ‘서둘러’ 풀도록 하자! 우리 모두 눈을 뜨고 있으나 잠자고 있는 영혼과 의식을 일깨워 어떤 상황이나 어떤 관계에서도 주님의 영을 품고 ‘더’, ‘먼저’, ‘서둘러’ 사랑하는 우리가 되도록 하자!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신 사람답게 어정쩡한 태도를 버리고 철저하고 치열하게 살아봤으면 한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김기현 신부님
”지난 5일 동안 재속 사제회 양성 피정이 있었습니다. 열 명의 양성자와 동반하는 신부님 세분이 함께 피정을 하였는데, 주로 그 내용이 각자의 삶의 이야기를 얘기하고 듣는 것이었습니다. 서로를 알고 이해하는 것이 아마도 공동체를 만드는 기본이어서 그런 작업을 길게 하는 거 같습니다.
그것이 다 끝나고는 사도적 성찰에 대한 이론 설명과 실습이 있었는데요. 그 안에서 조금 느낀 것이 있습니다. 보통 그 과정이 관찰 - 판단 - 실천으로 이루어지는데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관찰입니다. 어떤 신부님의 사건이 선택이 되고 나면, 그 사건 안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시는지를 주의 깊게 들여다봅니다.
먼저 신부님이 그 사건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해 주시고, 다른 신부님들은 사건 안에 드러나시는 하느님의 손길이 조금 더 명확히 드러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질문들을 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사건에 대한 이해가 있게 되면 판단을 하게 되는데, 그 형태가 충고나 지시의 형태가 아니라 하느님 말씀 안에서 복음의 빛을 비추어 주는 모습입니다.
각자가 그 사건을 바라보면서 떠오른 구절이나 그 이유에 대해서 들려주는 겁니다. 그 작업을 준비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데요. 준비하면서 마음속으로 ‘이 짧은 시간에 찾은 말씀 가운데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열 분의 신부님들이 찾은 성경 말씀과 그 이유에 대해서 들으면서 놀랍고 신선한 느낌이 있었습니다.
제가 느끼기로는 말씀들이 그 사건들의 다양한 차원을 비추어 주고 있었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새삼 발견하게 하여 주는 느낌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 ‘그래서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있어야 하는 거구나.. 여럿이 함께 바라보고 식별하여야 더 풍요로울 수 있겠구나..’ 하는 거였습니다. 그 과정 안에서 ‘공동 식별이 이런 것이겠구나..’ 하는 느낌이 조금 있었고, ‘함께 하면 풍요로울 수 있다.’ 는 깨달음이 제가 피정 중에 받은 작은 은총이라면 은총입니다.
그 동안 해 온 것은 개인적인 기도 안에서 식별하고 숙고하는 것이었는데요.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할 수 있겠다.. 는 생각이 듭니다. 공동체 안에서 함께 나누고 고민하고 식별하는 가운데 살아계신 하느님을 조금 더 잘 바라볼 수 있고,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혼자 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작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하는 신앙이 될 수 있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소공동체든, 레지오든, 다른 단체 활동이든.. 무엇이든 간에 작은 소그룹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해야, 주님의 자비와 풍요를 더 깊이 알고 체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작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가운데 시편 저자와 같은 신앙을 고백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선배 신부님이 외국에서 양성을 받으실 때 여덟 명 중에 한 분은 암으로 돌아가시고, 한 분은 마다가스카의 주교가 되셨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원로 신부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고...
“하나는 천국에 가고, 하나는 지옥(?)에 가네~”
“먼저 화해하여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사랑하는 사람 관계는 상대가 잘 될 때 기쁘고 안 되면 함께 고통스러움을 느끼지요. 그런데 사랑하지 않고 만일 상대가 경재의 대상이라면 그 반대가 되는 것은 십상이지요. 예언자는 하느님 사랑의 마음을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 18,23)
하느님께서는 표현은 무섭게 하시지만 사실은 사랑 많고 물러터진 부모의 마음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신학교 시절에 무섭기로 소문난 라틴어 교수 신부님은 그야말로 모든 신학생들에게 유명(?)인사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신부님은 사랑을 야단으로 표시했습니다. 전 날에 했던 숙제노트를 수업하기 내 주시면서 아끼는 학생은 야단과 함께 틀린 것에 대해서 지적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학생에게는 노트를 내 줄 때에도 그리고 수업시간에 틀려도 그대로 넘어 갑니다. 그러면 선배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그 학생은 그 교수 신부님이 생각하실 때 야단 칠 자격도 없다고 여기시는 것으로 학생들은 알아듣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다음 학기에 그 학생은 학교로 오지 않습니다. 학생들은 확실한 것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학교에서 그 학생의 짐을 부치고 학교로 올라오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한 번도 화를 내지 않고 산다면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요 그게 가능하기나 한가요? 그게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일까요? 목석 아니면 바보의 경지이겠지요? 세상에서 보통 사람이 화를 내면 사람이 허(虛)한 기분에 휩싸일 것이고 분위기 망친 장본인이라는 감정에서 자유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지지고 볶으면서 점자 슬기로운 삶을 배우는 것이지요. 화를 내면 사실 나만 손해이고 나만 성질 나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점점 너그럽고 내 입장에서 슬쩍 물러나는 삶의 여유를 배우고 또 그렇게 해서 참다운 기쁨과 평화가 무엇인지를 깨우치게 되지요.
‘너그러움’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철저한 ‘회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결실인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내 이웃을 존경과 사랑으로 대하게 되는 것 아니겠어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어른들의 가르침은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라는 주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알아듣게 되지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2)라는 주님의 이 말씀은 사실 우리에게 큰 부담인 것은 사실입니다.
꼭 같은 표현은 아니더라도 살면서 이런 내용의 말을 했거든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십계명의 한 말씀만을 따지지 말고 사람이 악으로 기울어 지는 가능성부터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어겨서 후회하지 말고 아예 그 뿌리부터 다스려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사람관계도 또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23-24절)
그리고 자기가 양보하며 살라는 말씀도 해주시지요.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25절)
자기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법대로’ 또는 ‘갈 데까지’라며 우기고 자기주장에 머물지 말고 ‘양보하고 화해하라.’는 말씀이십니다. 사람이 감정이 치받혀 있을 때 결정하거나 행동을 하면 후에 주님께서는 감옥이라고 표현하셨지만 ‘뼈저린 후회’를 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미움의 위기를 잘 참고 넘겼다가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결정해도 늦지는 않는 것 입니다. 감정 상할 때에 결정하면 꼭 후회가 따르는 법이지요.
서로 싸울 때 보면 사람들은 다 옳은 말만 합니다. 그들이 틀려서가 아니라 그들 마음에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말을 잊어버리는가봅니다.
서로 갈라서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것은 무엇인지 아세요? 서로 옳은 말만하고 상대가 틀렸다고 우기기만 합니다. 화를 내지 않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화를 어떻게 다스리고, 또 화를 냈다하더라도 어떻게 후속조치를 하느냐가 관건인 것입니다.
‘양보하는 것’, ‘지는 것’이 너그러움으로 나가는 다리라는 사실을 왜 이렇게 늦게 깨닫게 되는 것인지요. 그런데 그때가 바로 은총의 때인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사순절 금요일인 오늘이 바로 그날이면 좋겠습니다.
‘회개’와 함께 이웃에게 친절하고 너그럽고 사랑의 말을 하는 그래서 넉넉한 하루가 됩시다.
<화해하여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이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신앙생활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서 '그들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들처럼 하지 마라."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의 의로움은 의로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위선이었기 때문입니다(마태 6,5).
가장 큰 문제는 그들에게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느 안식일에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는 것을 보고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다고 시비를 건 일이 좋은 예입니다(마태 12,1-2).
그들은 사람들의 사정은 보지 않았고, 안식일 규정을 외적으로 지키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정말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자비를 베풀어 주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이 말씀을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제단에 예물을 바치는 일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가리키고, 형제와 화해하는 일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여기서 '먼저' 라는 말은 '하느님은 나중에'가 아니고, 하느님께 예배를 드릴 때의 마음가짐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형제가 무엇 때문에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못한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형제가'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고, 둘 다 잘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지금 중요한 것은 형제의 마음속에 나에 대한 원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제와 내가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더 잘못했는가, 원인과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를 따지지 말고 화해부터 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먼저' 라는 말은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이기도 하고, '형제보다 먼저'이기도 합니다. 그 형제가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형제에게 가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실현되고 완성됩니다. 이웃 사랑 없는 하느님 사랑은 '위선'입니다(1요한 4,20)
("그러면 하느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은?" 하느님을 안 믿는 무신론자들도 이웃 사랑 실천을 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의 가르침은 신앙인들에게 주시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무신론자들의 경우는 따로 생각할 일이고, 우리는 신앙인들의 경우에 대해서 집중해야 합니다. 만일에 신앙인들이 이웃 사랑 실천은 잘하면서도 하느님 사랑 실천은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형제와 화목하게 지내면서도 부모에게는 불효하는 것과 같습니다.)
"화해하려고 형제를 찾아갔는데 그가 화해하기를 거절한다면?"
1) 잘못이 '내 쪽에' 있어서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려고 찾아간 경우. 형제가 나를 용서하기를 거절한다면, 그것은 용서하려고 하지 않는 그의 잘못이고, 그가 마음을 풀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면서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2) 잘못이 '그쪽에' 있지만, 그래도 내가 먼저 그를 찾아가서 그와 화해하려고 했는데 그가 화해하기를 거절하는 경우. 화해하기를 거절하는 것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면 화해하겠다고 찾아간 나의 태도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용서를 청할 때 필요한 자세가 '겸손'인 것처럼 화해할 때에도 '겸손'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고, 잘못은 너에게 있다."는 오만함을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똑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따라서 형제를 용서하는 일은 '죄 없는' 내가 '죄인인' 그를 용서하는 일이 아닙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사랑을 나누는 일입니다. 그것을 잊으면, 형제와 화해하려고 찾아간 일이 '교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화해를 원한다면, 자신을 낮추어서 형제의 위치로 내려가야 합니다.
실제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 그래도 신앙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본받아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필리 2,5-8ㄱ)."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화해를 모르고 사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먼저 참된 화해의 의미를
미사 전례안에서
강하게 일깨워주십니다.
화해는 미움과 원망을
주님 앞에
먼저 내려놓는 것입니다.
화해를 통해 우리는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자녀들이 됩니다.
주님의 길을
따른다는 것은
화해의 길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해야할 것은
무엇보다 화해입니다.
화해는 주님의 사람들을
우리가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화해는 가장 아름다운
마음의 예물인
관계의 선물을
서로 주고받는 것입니다.
화해는 자신만의
상처와 아픔을
과장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진심을
나누는 것입니다.
진심은 서로를
아프게 했던
과거의 방식을 버리고
먼저 내려놓는 것입니다.
화해의 기쁨은
진심어린
생명의 기쁨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화해의 예물을 봉헌하는
은총의 사순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의 절정은
서로 화해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2009 년 2월. 저는 혼자서 개인 피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피정 중에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선종 소식을 듣게 되었지요. 제 마음속에 큰 어른으로써 영원히 그 자리를 지켜 주실 것이라 생각했는데, 갑자기 주님 곁으로 떠나셨다고 하니까 참 먹먹한 느낌이었습니다. 아마 저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그래서 조문객 줄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섰었지요.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명동성당을 찾아가 조문을 했던 것이지요.
역사 안에서 큰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분들을 접하게 됩니다. 큰 어른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분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다 가지십시오.”라는 남과 다른 생각을 갖고서 철저하게 실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을 본 받아 실천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이 사회는 용서와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세상의 기준에 맞춰서 생활하고 있으며, 남보다 내가 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요즘에는 이러한 큰 어른이 없다고들 말하네요. 그런데 왜 특별한 사람만이 큰 어른이 되어 자기희생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어야 할까요? 바로 내 자신이 “다 가지십시오.”라는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좋은 모범과 사랑을 전달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을까요?
의자에 앉아서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많은 것들을 바라봅니다. 그중에서도 연필꽂이에 가득 꽂혀 있는 필기구가 눈에 띕니다. 볼펜 한 자루면 몇 달을 쓰고도 남을 텐데 왜 이 많은 필기구를 소유하고 있었을까 싶습니다. 책장을 바라봅니다. 책이 많아서 겹겹이 쌓아두었습니다. 또 책이 너무 무거워서 책장의 가운데가 크게 휘어졌습니다. 다 읽은 책을 또 다시 볼 일이 그렇게 많지 않을 텐도 쓸데없이 책장만 채우고 있구나 싶습니다. 옷장을 열어봅니다. 빼곡하게 걸려 있는 옷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옷 몇 벌이면 충분한데도 버리고 나누지 못해서 옷장을 가득 매우고 있었습니다.
“다 가지십시오.”라는 마음가짐. 남이 표현하면 좋고, 나는 절대로 안 된다는 마음가짐은 아니었을까요?
늘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말씀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사랑을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는 율법조항만 지키면 그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 이상의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 역시 똑같이 재판에 넘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에게 성을 내면 재판에 넘겨지고,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면 최고 의회에 넘겨지며, ‘멍청이’라고 하면 불붙는 지옥에 넘겨진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다 가지십시오.”라는 마음가짐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율법 조문의 실천도 중요하지만 여기에서 더 나아가 사랑의 실천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서의 기쁨이 원망보다 더 강하고 더 클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
주님의 나라에서 대박 납시다.
지금 현재 미국 메이저리그의 추신수 선수는 작년 FA 계약을 통해 텍사스와 7년간 1억 3000만 달러(약 1394억 원)를 받게 되었습니다. 연평균 1857만 달러(약 199억 원)를 수령하게 되었지요. 매년 199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통장에 들어오는 것이지요. 이제까지 열심히 살았던 그의 땀과 노력이 이러한 결과를 만든 것입니다.
문득 로또 복권을 떠올려집니다. 우리나라에서 매주 약 천만 명이 대박을 노리면서 복권을 구입한다고 합니다. 1등에 당첨된다고 해도 199억 정도가 아닌, 약 10억 원 정도 받는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렇게 복권에 당첨된 사람은 행복한 마무리를 못한다고 하지요. 흥청망청 쓰다가 결국은 알거지가 되는 경우가 복권에 당첨된 사람의 80% 이상이랍니다.
거액 연봉을 받는 사람들이 알거지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를 위해 흘린 땀과 정성이 대단했기 때문에 쓸데없는 곳에 낭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운에 의해 복권에 당첨된 사람은 그렇지 않지요.
주님을 향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들의 목표는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위해 얼마나 노력하며 살고 있을까요? 그냥 ‘어떻게 되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만을 가지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허황된 욕심을 버리고 대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데 최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 언젠가 떠날 이 세상 안에서의 대박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주님의 나라에서 대박 날 수 있습니다.
모순(矛盾).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마태오5,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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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矛盾).
결코 좋은 의미로 사용될 수 없는 단어임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모순이라는 단어와 거리를 두고 살아가기는 쉽지 않은 듯 하다.
주위를 둘러볼 필요조차 없다.
조금만 차분히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면 어쩌지도 못하는 그런 모순들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늘 무엇인가를 청하는 우리의 삶이지만, 타인의 청에는 소극적이고, 때로는 모른 척 하기까지 한다.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며 살아야 하는 처지이면서도, 타인의 작은 잘못에도 관대하지 못하다.
언제나 사랑을 원하면서도 사랑하는데 인색하고 서툴다.
정의로운 세상을 원하지만, 우리 모두는 각자의 어둠을 가지고 살아간다.
누군가의 희생적인 아름다운 모습에 감동의 눈물을 흘릴 줄 알면서도, 내 몫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분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아니 그분께서 그토록 싫어하시는 삶을 보여드리기도 한다.
그 내용을 일일이 열거해서 무엇 하겠는가?
어쩌면 세상도, 그 세상 안에 있는 교회도,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도 평생 자기모순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고 계신지도 모른다.
싸워야 한다.
내 안에는 선과 악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질 수 있는 본성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선을 선택하고자 싸워야 한다.
이것이 복음적 삶이다.
하느님의 논리는 늘 간단하고 분명했다.
“사랑하라!”
“선을 행하라!”
구원의 의미는 그분께서 일러주신 길로 걸어갈 때 존재한다.
비록 우리가 스스로의 모순 때문에 수없이 걸려 넘어진다 하더라도,
그분께서는 우리가 다시 일어서기를 변함없이 기다리신다는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의로운 사람이란?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한 구도자가 위대한 스승의 집을 찾는 것을 본 사탄은 그가 진리를 추구하는 데서 돌아서도록 힘껏 온갖 수단을 다 쓰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그 가엾은 구도자에게 재산, 욕정, 명성, 권력, 위신 등 있을 수 있는 온갖 유혹을 다 겪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도자는 영적인 일에 제법 경험이 있었기에 그 유혹들을 쉽게 싸워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영적인 것에 대한 열망이 간절했던 것입니다.
그가 위대한 스승의 집을 발견하고 들어가 스승 앞에 갔을 때, 그는 스승이 융단 의자에 앉아있고 제자들은 그의 발치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는 좀 놀라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성인들의 으뜸가는 덕인 겸손이 모자라는군.’
그러고는 그 스승에 대하여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다른 점들도 살폈습니다. 그리고 발견했습니다.
‘세상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찾아온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의 눈길도 주지 않는군.’
그리고는 혼잣말로,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아첨을 안 하니까 그럴 테지”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리고 입고 있는 옷도, 뭔가 잘난 척하는 말투도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이 모든 점들로 미루어보아 그는 자기가 잘못 찾아왔으며 어디 다른 데를 계속 찾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구도자가 방을 나서자, 방 한구석에 앉아있던 사탄을 본 스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사탄아. 그는 애초부터 네 차지였다.”
[개구리의 기도 1, 6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이 ‘의로움’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씀인데, 사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의로움’의 의미를 명확히 새기고 살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의로운 사람일까요?
루카복음 18장 9절에서 14절에는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 올라가 하느님께로부터 의로운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기도합니다. 먼저 바리사이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우선 바리사이는 불의나 죄를 짓지도 않고 감사의 기도를 드릴 줄 아는 신실한 신앙인입니다. 그리고 단식을 통한 절제생활과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십일조도 철저히 내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는 행동으로는 이 세상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신실한 신앙인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의롭게 되었다.’라는 말은 오늘 복음처럼 ‘하느님에게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완전한 삶을 산 바리사이가 아니라, 온갖 죄를 저지르는 세리만이 하느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았을까요? 그는 뒤에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싶은 ‘의로움’이란 결코 ‘행위’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리는 자신을 낮추어 누구도 평가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만을 간청하지만, 바리사이는 스스로 의롭다고 여겨 세리를 판단했습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의로움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나의 자리가 심판자가 아니라 용서를 구해야 하는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느끼면서 어떻게 동시에 심판자처럼 남을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자리를 아는 것이 의로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에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기도합니다. 즉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하지 못하고 심판한다면 하느님도 우리 죄를 용서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로움이고 정의입니다. 따라서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이 ‘의로움’이지, 사람들이 보기에 의로운 행동을 한다고 해서 의로운 사람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결코 형제를 심판하여, ‘바보!’라고 하거나, ‘멍청이!’라고 하거나, ‘성’을 내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가르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살인자가 어떻게 의로운 사람으로 심판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남을 심판하는 사람을 살인자와 같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가끔은 ‘내가 이렇게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를 하고 있는데, 저 사람들은 왜 아무 것도 안 하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내가 봉사하면서 남을 판단하게 된다면, 내 구원을 위해서라도 봉사를 잠시 접는 것이 낫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도 위대한 교회의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어찌 될지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일이고 나의 의로움도 하느님께서 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하고 그분의 자비만을 바랐던 세리의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지닐 때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어린 시절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에에 어른들은 그런 나쁜 말을 하지말라고 하며 ‘말이 씨가 된다’는 사실을 회상시킵니다. 주님께서 ‘살인하지 말라’는 토라의 법을 말씀하시며 그 출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살인의 끔찍한 결과도 사실은 작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것도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는 자기 주장을 접고 상대방과 화해하라고 당부까지 하십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할 때 자기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이 생각 나거든 그 예물을 두고 화해하고 와서 바치라는 말씀가지 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재판에 넘기고 결국 감옥에 넘길 것이라고 했고 그곳에서 한 닢까지 다 갚아야 나올 수 있다고 말씀 하십니다.
존 다이아몬드는 한 마디의 말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오랜 실험을 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사람이 물질적 자극 뿐 아니라 감정적이고 지적인 자극에도 근육이 민감한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부정적인 자극은 신체에 나쁜 신호를 영향을 미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경우 아이들은 학습능력이 떨어지고 차분하지 않으며 들뜨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여서 작업능률이 떨어지고 실수도 잦아지고 무기력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긍정적인 말은 반대로 사람에게 좋은 반응을 주고 결과에도 몇 배의 좋은 것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좋아’ ‘사랑해’ ‘잘 할 수 있어’라는 한 마디 말에도 사람의 근육은 강화되는 것입니다.
그는 부정적으로 표현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갉아먹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실패하는 경우가 많고 초조하거나 불안한 반응을 흔히 보인다는 것입니다.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이 있듯 좋은 한마디의 말이라도 그것이 모이면 좋은 결실을 이루지만 반대로 나쁜 말 한디가 모이면 엄청난 결과를 부정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상대에게 나쁜 표현 한 마디가 결국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에제 18,21)
우리가 무심코 긍정적인 말 보다는 부정적인 표현이 있다면 예언자의 가르침대로 회개하고 이제부터라도 긍정적 표현, 긍정적 사고로 돌아서면 되지요.
이제까지 잘못 살았다고 해서 그 대로 살라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사순절을 시작하며 우리의 결심이 더욱 확고하게 나를 변화시키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한 마디 말이라도 기쁨과 희망을 담아내는 내 자신이 된다면 얼마나 큰 변화일까요?
거기다가 늘 감사하며 생활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곳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고 있는 것이지요. 멋진 하루 되세요!
모두 영적 혈연이라는 거지요.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며 바치는 주의 기도가 언제나 새롭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 가족이라는 것은, 영적 혈연이라는 거지요.
영적 혈연은 영혼들이 한 근원 이라는 뜻, 정신 멍한 경지를 느낍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라는 말씀에서 마음의 눈빛도 신비해 집니다.
나의 존재, 나의 주소가 지상에서 영의 세계로 여행하는 기분이 느껴집니다.
마치 사이버 세상에서 놀 듯, 영적세계의 엄청난 공간이 약간 감잡히네요.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마태오 5,23~24)”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이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신앙생활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아서 그들보다 신앙생활을 더 잘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들처럼 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이었고(마태 6,2),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기도를 하고 단식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마태 6,5.16).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의로움'은 의로움이 아니라 사람들을 속이는 짓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숨은 일도 보시는'(속마음을 보시는) 분입니다(마태 6,4.6.18). 사람들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겉모습만 잘해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속마음이 진실해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1-22)."
이 말씀은 십계명 제5계명, '사람을 죽이지 마라.'의 참뜻을 설명해 주신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 분노, 모욕, 폭력 등도 모두 제5계명을 위반하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속의 법정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범죄 행위만 처벌할 뿐이고, 속마음을 재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법정에서는 속마음부터 재판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죽이지 않았더라도 죽이고 싶어 했다면, 하느님의 법정에서는 그것도 살인죄가 됩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사기꾼'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마태 27,63), 그 말도 죄가 되지만, 그 전에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증오심이 더 큰 죄입니다. 또 바리사이들이 성전 경비병들을 가리켜서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요한 7,49), 그 말도 죄가 되지만, 다른 사람들을 천대하고 모욕하고 멸시하는 그들의 교만이 더 큰 죄입니다.
어떤 사람은 상대방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에이, 농담으로 한 말인데, 뭘 그걸 가지고 상처를 받냐?" 라고 하면서 오히려 상대방을 나무라기도 하는데, 그 말이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이쪽에서는 악의 없이 가볍게 농담으로 한 말이라고 주장해도 상대방이 그 말 한마디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았다면 죄는 이쪽에 있습니다. 기준은 나에게 있지 않고 상대방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이 말씀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고, 똑같이 중요하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뭔가 잘못한 쪽은 '형제'가 아니라 '너'입니다. 따라서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라는 말씀은 "그 형제에게 용서를 청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자기에게 잘못한 형제를 용서하는 일보다 형제에게 자기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그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자기가 형제에게 상처를 준 일은 잊어버리고 형제가 자기에게 상처를 준 일만 기억하고 있다면 하느님께 용서를 청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기도'에 있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라는 구절은 "저희가 서로의 잘못을 서로 용서하오니"로 생각해야 합니다.)
받은 상처가 너무 크고 많아서 용서가 안 된다고, 용서하는 일이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상황을 거꾸로 생각하면(입장을 바꿔서 생각하면) 용서하는 일만큼이나 용서받는 일도 어렵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더 어렵게 되기 전에 서둘러야 합니다. (상대방이 이미 세상을 떠나버렸다면 용서를 청하고 싶어도 청할 수 없게 되고, 그래서 형제의 용서를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말고, 너무 늦기 전에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일이 없고, 그 사람이 왜 나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상대방이 뭔가 오해를 했거나 착각을 해서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누군가가 중간에서 이간질을 했을 수도 있고, 서로 안 맞아서 그냥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나에게 잘못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원망을 풀어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래서 화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바로 하느님께 첫 번째로 바쳐야 할 예물입니다.
<먼저 해야 할 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예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형제와 화해하여라.”
이것이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탁 떠오른 것입니다. 하느님께 예물을 봉헌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니 순서적으로 먼저일 뿐 아니라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먼저 해야 할 일이 바로 형제와의 화해입니다. 형제와의 화해가 하느님께 예물 봉헌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고, 하느님께 예물 봉헌을 하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마치 형제들과는 원수처럼 지내면서 부모에게는 때가 될 때마다 선물을 사가지고 오는 자식에게 부모가 나에게는 오지 않아도 좋고 선물하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너희 형제들과 화해하고, 화목하게 잘 지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가 바라는 것은 자식들이 같이 오는 것입니다. 자식이 오는 것을 바라지만 따로 오는 것은 부모의 슬픔입니다.
요즘 모 재벌 형제들 간의 법정 싸움이 간간이 얘깃거리이지요. 부모가 자식에게 각기 많은 재산을 물려줬는데 그 재산을 가지고 볼썽사납게 싸우는 것입니다.
그 부모가 살아있다면 이것을 보고 통탄하겠지요. 내가 잘못 살았고, 내가 잘못 가르쳤다고 통탄할 것이고, 재산은 물려주고 사랑은 물려주지 못했다고 통탄할 것입니다.
사랑을 물려주지 않고 재산을 물려준 부모는 실패한 인생입니다. 사랑할 줄 모르는 불구자로 키워놨으니 얼마나 잘못한 것입니까?
마찬가지로 사랑할 줄 모르는 자식도 실패한 인생입니다. 부모가 사랑하기에 준 재물이 사랑이 아니고 재물일 뿐이고 사랑을 받고도 받기만 할뿐 할 줄 모르면 얼마나 잘못 된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재물은 주고 사랑은 안 준 부모로 만드는 불효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을 주셨습니다. 부모형제를 주셨고, 재물을 주셨으며, 재능도 주셨습니다. 이런 은총을 받았는데, 은총이 사랑이 아니라면 되겠습니까?
사랑으로 주시고, 사랑하라고 주신 은총을 가지고 우리가 싸운다면 되겠습니까? 이러면 하느님께서 얼마나 후회하시고, 얼마나 슬퍼하실까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제대로 안다면 사랑이 아니라 다른 것을 예물로 가지고 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래서 하느님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화해를 원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화해하지 않고 대신 다른 것을 예물로 가져가지 않을 겁니다.
오늘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먼저 화해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도 생각해봐야겠지요.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두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소중한 형제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끊고 자를 수 없는
생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화해를 통해
평화로움을 체험합니다.
화해는 하느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아픈 상처까지도
봉헌하는 것입니다.
상처는 우리 형제들을
과거에 갇힌 아픈 영혼이
되게합니다.
서로에게 준 상처에는
서로의 욕심이
있었습니다.
욕심을 정화하는 화해는
분노와 복수로 향하지 않습니다.
화해는 미약한
우리의 사랑까지
하느님 사랑에
보태는 일입니다.
품어주는 사랑없이는
우리의 결핍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형제와
서로 주고받는 사랑이
이제는 화해이길 기도합니다.
서로를 향하는 마음이
이제는 사랑과
믿음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하늘나라는
품어주는 사랑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진정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순시기는
하느님과의 화해
부모님과의 화해
형제와 이웃과의
화해가 이루어지기 위해
뜨겁게 우리의 십자가에
못박히는 시간입니다.
진정한 화해는
십자가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까 삼일절을 맞이해서 심야 폭주족들이 난리를 쳤다고 하더군요. 시끄러운 굉음을 내면서 곡예를 하듯 달리는 폭주족들의 모습이 뉴스에 담겨 있었습니다. 물론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왜 저럴까?’ 싶더군요. 오토바이를 타면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신의 욕구를 푼다는 사실이 얼마나 이기적인 모습일까요?
그런데 이것 아십니까? 아주 시끄럽게 오토바이를 타는 폭주족들에 대한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폭주족 자신이라는 것을요. 실제로 자신이 내고 있는 소음 공해의 가장 큰 피해를 당하고 있으며, 위험으로부터 노출되어 안전에 있어서도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신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더 큰 손해를 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들이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 자기만의 잇속을 채우려고 하지만, 그렇게 키운 욕심과 이기심이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욱 더 힘든 자리에 서게 할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의 감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가 너무나 미워서 그 사람을 향한 심한 욕을 했습니다. 그 순간에 마음이 편하던가요? 아닙니다. 내가 베푼 욕으로 인해 내 마음이 가장 먼저 더럽혀지고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결국 부정적인 감정, 나쁜 감정들은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되돌아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이 부정적이고 나쁜 감정들에서 자유롭게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가장 큰 손해를 보면서 살고 있는 우리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오늘 복음의 말씀을 이해해 봅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리고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하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내 이웃에 대한 아주 작은 말 역시도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별 것 아닌 말 역시 부정적이고 나쁜 감정이 실려 있을 때, 이 감정이 고스란히 내게 치명적인 손해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마음부터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을 긍정적이고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바꾸지 못한다면, 지혜로운 사람이 아닌 가장 어리석은 자의 모습으로 살면서 손해 보는 행동만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랑의 삶. 이 삶만이 손해가 아닌 큰 이득을 볼 수 있는 삶입니다.
즐겁게 살려거든 주기 위한 주머니와 받기 위한 주머니를 함께 가지고 다녀라.(괴테)
무릎 꿇은 석공
무릎을 꿇고 비석을 다듬는 석공이 있었습니다. 이 석공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땀을 흘리며 비석을 깎고 다듬었지요. 바닥에는 돌가루 먼지가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석공은 몇 시간동안 무릎을 꿇은 채 일어날 줄 모르고 일에 열중 했습니다. 차츰 비석은 아름다운 문양을 드러내며 모양을 갖추었습니다.
며칠 뒤 석공은 다듬기가 끝난 비석에 명문을 새겨 넣었습니다. 그때 석공의 집 앞을 지나던 높은 관리 한사람이 석공의 재빠르고 정교한 솜씨에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나도 돌같이 단단한 사람들의 마음을 당신처럼 유연하게 다듬는 기술이 있었으면 좋겠소. 그리고 돌에 명문을 새기듯 사람들의 마음에 내 이름을 새길 수 있었으면 좋겠소.”
그러자 석공이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 저처럼 무릎을 꿇는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겸손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글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무릎을 꿇는 겸손. 고개를 숙이는 겸손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그런데 무릎을 꿇기 보다는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 남들보다 위에 서려는 교만으로 겸손의 길과 정반대의 길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길은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겸손의 길밖에 없습니다.
화해하여라
신헌문 신부님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를 짓지 않는 일’과 ‘용서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반성과 통회를 하고 고해성사를 통해 결심을 해도 연약한 인간이기에 죄는 계속 반복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자신은 물론 타인을 용서하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용서한 듯하지만 사실은 불편한 감정을 잠시 저 밑에 숨겨 두었을 뿐 깊은 용서가 되지 않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면 감정이 ‘전이’되거나 ‘투사’되어 오히려 배가된 감정 폭발이 일어나곤 합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재단에 예물을 드리기 전에 화해하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내적 순수함과 평온함 그리고 이웃을 향한 성숙한 인간관계가 우선이라는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재단에 예물을 드릴 때 우리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꾸며지고 연습된 미소로 겉치장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앉으나 서나 우리를 다 아시는 하느님’(시편 139)께서는 손에든 예물보다 ‘잘 준비된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참 좋다고 하시지 않을까요?
마음으로 용서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복수와 화해
김태완 신부님
고대 근동 지방에는 동태 복수법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한 방 맞았으면, 남을 한 방 때릴 수 있습니다. 내가 다쳐 다리가 부러졌으면, 상대방의 다리를 부러뜨릴 수 있습니다. 내가 목숨을 잃으면, 내 형제가 복수할 수 있습니다.
이 법의 내용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두 가지 해석을 합니다. 하나는 형벌을 규정하여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해 주기 위함이라는 해석입니다. ‘피해자가 이런 피해를 입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 복수를 해야 한다. 그러니 적어도 내가 당한 만큼은 복수를 해야 한다. 그것이 하느님의 정의다.’라고 해석합니다.
다른 하나의 해석은 형벌을 규정하여 가해자의 권리를 보장해 주기 위함이라는 해석입니다. ‘피해자가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피해자가 복수를 하려고 할 텐데, 자칫하면 가해자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피해자가 화난 마음에 과하게 복수할 수 있다. 그러니 복수를 하더라도 피해를 입은 그 이상의 복수를 할 수 없다. 이것이 하느님의 정의다.’라고 해석합니다.
실제로 어느 것이 하느님의 정의일까요? 복수는 복수를 낳습니다. 그리고 복수의 정도는 점점 더 강해집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이 커지지 않았을 때 화해하여라. 태평하게 예물을 바치고 하느님을 찾을 것이 아니라 서둘러서 이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미움과 분열의 싹을 자르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의로움을 능가하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희의 의로움이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너희의 의로움, 곧 우리의 의로움과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
우리의 의로움과 바리사이의 의로움은 달라야 한다는 말씀인데, 무엇이 바리사이의 의로움이고, 무엇이 우리의 의로움이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뒤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니까 바리사이는 옛사람의 말을 듣는 사람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옛사람의 말은 무엇이고 주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옛사람의 말은 죄지으면 재판에서 단죄를 받아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이웃을 판단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웃을 내 기준에 따라 바보, 멍청이라고 판단하지 말 것이며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성내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남을 판단하는 의로움과 판단치 않는 의로움의 차이이며, 의로움밖에 없는 의로움과 사랑하는 의로움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의로움밖에 없는 의로움은 남을 단죄하는 것으로 그치지만 사랑의 의로움은 남과 화해하는 것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사랑이 법을 능가함입니다.
법에 그래도 사랑이 있다면 남을 죽이지 않는 정도의 사랑이라면 사랑은 남을 죽이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고, 바보, 멍청이라는 인격적 무시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법이 남을 단죄하는 것이라면 사랑은 자신과 똑같이 소중한 이웃을 바보, 멍청이라고 인격적 살인을 한 것에 대해 자신을 단죄하고 뉘우칩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의 죄를 보지 않고 자신의 죄를 보고 뉘우치기에 하느님께 예물을 바치러 가기 전에 먼저 그 이웃에게 갑니다.
인격적 살인을 한 것에 대해 용서를 청하고 화해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저 위 하늘에 홀로 계시지 않고 우리 가운데 사랑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화해 없이 혼자 하느님께 가지 않고, 화해한 뒤 같이 하느님께 예물을 드립니다.
그때 진정한 예물은 용서와 사랑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의롭다는 것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랜 세월 동안 주변 열강들의 외세에 시달려왔던 우리 민족이기에, 숱한 나날 동안 식민 통치에 이력이 난 우리들이기에, 긴 세월 동안 군부 통치에 시달림을 받아온 우리들이기에 '의로움'이란 단어만 보면 즉시 뇌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 '강함' '결사항전' '혈서' 같은 말들입니다.
의로운 사람 하면 즉시 떠오르는 대상은 불의를 보면 절대 못 참는 사람, 삭발하고 머리띠 두른 사람, 길거리 투쟁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한자 의(義)자 분석해보면 재미있습니다. 의(義)자는 양(羊)과 나(我)의 합성어입니다. 결국 의로운 사람은 자신 안에 한 마리 양이 들어있는 사람입니다.
양은 어떤 동물입니까? 순한 채식동물, 염소와는 달리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동물, 흠없고 순결한 동물, 겸손하고 순응적인 동물의 대명사입니다.
성경 안에서도 양은 염소와 대비되어 천국의 동물, 하느님의 동물로 묘사됩니다. 이는 우리가 장례미사 때 마다 읽게 되는 마태오 복음 25장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날이 오면 양은 오른 쪽에 염소는 왼쪽에 갈라놓듯이 의인은 오른쪽에 악인은 왼쪽에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의롭다는 것은 강경일변도, 투쟁일변도의 자세를 취하는 것이기보다 겸손하다는 것, 순수하다는 것, 순응적이라는 것, 부드럽다는 것, 하느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학자들의 표방했던 의로움은 거짓 의로움이었습니다. 그들의 목은 한없이 뻣뻣했습니다. 그들의 콧대는 하늘 높은지 몰랐습니다. 그들의 뒤는 구리고 또 구렸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은 철저하게도 이중적이었고 위선적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실상을 정확하게 꿰뚫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강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때로 이 한세상 살아가다보면 불의 앞에 날 선 대립과 섬뜩한 비판, 강한 투쟁과 강직함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부드러움과 온유함도 필요합니다. 따뜻한 배려와 측은지심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행적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얼마나 자상하고 부드러우셨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섬세하고 다정다감했는지 모릅니다. 결국 예수님의 한없는 부드러움이 우리 인류를 구원한 것입니다. 그분의 한없는 측은지심과 연민의 마음이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끊임없는 용서와 화해
권태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언급하시면서, 그들보다 더욱 올바르게 살아가야 할 것을 권고하십니다. 이후 살인에 대한 말씀으로 그 결과에 집중하시기보단 그런 극단적인 죄의 행위에 앞서 신앙인으로서 보여 줘야 할 자세에 대해 더 상세히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이는 죄악의 싹을 초기부터 잘라 버리시려는 그분의 의지가 담겨 있으며, 죄의 시작이 될 수 있는 미움과 분노의 감정들을 어떻게 조절하고 다스려야 하는지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즉, ‘살인해서는 안 된다.’의 율법 규정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이해해야 하는지 재조명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심판은 죄행위의 유무有無만을 따져 단죄와 판단으로 공동체를 갈라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용서와 화해로 내 이웃 모두를 사랑의 공동체로 초대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는 현실의 삶에서 우리 행동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 정화되리라는 기쁨과 희망을 갖게 해 줍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그분의 자녀로서 얼마만큼 사명을 성실히 수행하고자 노력했는지, 특히 그분이 보여 주신 용서와 화해의 삶을 얼마나 실천하고 살았는지 성찰해 보는 그런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욕이 무슨 접속사나 조사라도 됩니까 ?
노성호 신부님
네 살 때쯤인가, 놀다가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심하게 맞은 적이 있었다. 밖에서 듣고 온 말 한 마디를 어머니 앞에서 했기 때문인데,그 말은 욕이었다. 어떤 욕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호되게 매를 맞고 정신을 차렸던 것 같다. 나는 그때부터 욕을 하지 않을 뿐더러 이 세상에서 욕하는 사람이 제일 싫다.
한번은 신학생 때 동기들과 택시를 탔다. 그런데 우리가 올라타기 무섭게 출발하던 기사님은 갑자기 험한 욕설을 늘어놓는 것이었다.물론 그분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손님을 뒤에 두고 어쩜 그리 욕을 잘 할 수 있는지. 그래서 바로 문을 열고 내렸다.
현재 나는 학교에서 사목을 하고 있는데, 학생들과 지내다 보면 자기들끼리 욕하고 떠드는 소리를 많이 듣게 된다. 멀리서도 욕이 섞인 된소리를 들을 때면 순간 기분이 상한다. 얼마 전에는 어느 초등학생이 친구들과 놀다가 심하게 다투었는지 친구들한테 딱 세 마디 욕을 하면서 집까지 걸어 들어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정말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요즘에는 욕이 접속사나 조사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화나는 일이 있으면 욕하면서 풀기도 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욕은 다시 자신한테 돌아와 자신을 최고 의회와 불붙는 지옥에 넘기고 만다. 욕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그 욕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실을 고치고 바른 언행에 힘쓰면서 긍정적으로 화를 풀고 주변의 모든 것과 화해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겠다.
<너희의 의로움이>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이란 겉모습만의 의로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열성적으로 하고, 율법 잘 지키고, 자선도 잘 베풀고, 기도도 많이 하지만, 그 마음에 사랑이 없어서 겉으로 보이는 그런 것들이 모두 위선일 수밖에 없는 거짓 의로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의로움과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진심으로, 믿음과 사랑으로 가득 찬 신앙생활을 하라고 타이르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십니다.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자만심에 빠지지 말고, 마음으로부터 화해하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생활만’ 잘하는 사람은 칭찬받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여기서 ‘화해’라는 말은, 단순히 싸우고 나서 화해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을 모두 뜻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신심 행위를 하지 말고, 사랑을 먼저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하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사랑만이 가득한 곳이 하늘나라입니다.
아무리 큰 재난을 당하더라도 사랑만 있다면 하늘나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남의 불행을 보고 고소해하거나 천벌을 받았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은 그 마음에 지옥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것보다 지옥을 품고 사는 것이 더 불행할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삶이 곧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더욱 끔찍하고 딱하고 불쌍한 일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는 하늘나라로 갈 것이라고 믿고 있다면 도대체 그 하늘나라는 어떻게 생겨먹은 나라일까?
나이 듦
양미강 목사
나이 듦, 이 말은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30대를 눈앞에 둔 20년 전 일이다. 남들은 20대를 넘기기가 죽도록 힘들다고 하던데 나는 너무나 행복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방황하던 20대를 끝내고 무엇인가를 독립적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행복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내 몸 안에 있던 돌덩이를 내려놓은 듯한 후련함과 홀가분함이 있었다. 20대에 나를 억눌렀던 것은 바로 결혼에 대한 고정관념이었다.내 생각에서 자유로움을 얻었을 때 나는 또 다른 나를 향해 도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꺾어진 나이 50대에 진입하면서 다시 나를 바라보게 된다. 나이 든다는 것이 누구라도 품을 수 있는 넉넉함과 관용이기보다 편협함과 나만 옳다는 고집불통의 완고함이라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 나이가 들수록 지갑을 열고 말을 닫으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맞는 말이다. 나이 들수록 지갑을 열어야 한다. 후배도 먹이고 친구도 먹여야 한다. 훈훈함은 지갑에서 나온다. 비록 그 지갑이 두툼하지 않더라도 마음의 지갑도 있으니 말이다.
나이 들수록 말을 닫아야 한다. 말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말을 아끼라는 말이다. 제단에 제물을 바치기 전에 형제와 화해를 하기 위해서는 말과 행동이 따를 때 가능하다.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은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진정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게 될 것이다. 말을 적게 하더라도 그 속에서 풍기는 나이 듦의 권위를 품어내야 한다. 이래저래 50이 되면서 나는 인생을 배우고 있다.
두 형제가 성장해 형은 알코올중독자가 되었고, 동생은 유명한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어떤 기자가 이 부분을 취재하게 되었지요. 왜냐하면 같은 부모의 한 자식으로써 이렇게 다른 삶을 살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형에게 가서 어떻게 하다 알코올중독자가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알코올중독자였던 아버지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알코올중독자니 자식도 그렇게 되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는 동생을 찾아가서 어떻게 변호사가 되었는지 물었지요.
“알코올중독자였던 아버지 덕분입니다. 아버지처럼 되고 싶지 않아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때문에’ 할 수 없다는 말, ‘덕분에’ 할 수 있었다는 말. 똑같은 상황에서도 어떤 마음가짐을 갖느냐에 따라 어떤 결과가 나올 수 있는 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평소에 쓰고 있는 말은 과연 어떤 말이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때문에’라는 원망과 불평의 말을 쓰고 있었는지, 아니면 ‘덕분에’라는 기쁨과 희망의 말을 쓰고 있는지 말입니다. 원망과 불평의 말을 쓰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잘못된 판단으로 일관할 뿐입니다. 그러나 기쁨과 희망의 말을 쓰는 사람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음말씀을 통해서 좀 심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들 만한 이야기를 하시지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솔직히 다른 사람에게 단 한 번도 성을 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또한 ‘바보, 멍청이!’라는 말을 마음속으로도 품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에 우리 모두는 죄책감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를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아닙니다. 원망과 불평이 가득한 남에 대한 판단 자체가 얼마나 나쁜 것인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얼른 뉘우치고 화해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길로 들어서게 하기 위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는 원망과 불평의 말은 내게서 없애야겠습니다. 대신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기쁨의 희망의 말을 나의 말로 만들어야겠습니다. 그래야 하늘나라에 떳떳하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프랑스격언)
그것은 사실이 아니야(밥 보딘, 'WHO' 중에서)
나는 아버지에게 사업이 잘되지 않아서 전망이 어둡다는 불평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의 바보 같은 불평을 끝까지 조용히 듣고는 이렇게 물으셨다.
“너를 괴롭히고 있는 게 그게 다니? 흠, 정말 엄청난 문제들이구나.”
아버지는 책상 서랍 오른쪽 끝에 있는 조그만 카드 위에 내 고민에 대한 답변이 적혀 있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카드를 꺼내 뒤집어보았다. 그 위에는 딱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뭐가 사실이 아니라는 거죠?” 내 물음에 아버지는 천천히 답했다. “나 역시 여러 복잡한 상황과 환경 때문에 골치 아픈 걱정들과 싸워야 할 때가 있었단다. 그럴 때면 이 카드를 꺼내 보곤 했지. 우리 마음속에 있는 걱정과, 우리를 괴롭히는 어리석고 부정적인 생각들 대부분은 현실로 나타나지 않는단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사실이 아니야. 그런 생각들이 너를 괴롭히게 그냥 내버려 둔다면, 네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크게 자라게 될 거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거니?”
나는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거나 과거의 일들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나쁜 생활 습관을 키워오고 있었다. 부정적인 생각은 마음속에 몰래 들어와서 우리의 꿈과 목표를 포기하게 만든다. 성공의 기회는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을 제거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다음에 또 부정적인 생각에 휩싸이게 된다면, 잠시 멈추어 서서 자문해 보라.
“누가 그런 말을 했니?” 그리고 이렇게 답하라. “그것은 사실이 아니야.”
소리와의 화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이곳에서도 비가 왔겠지만 어제 광주는 비가 왔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잠을 자다 비 오는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비가 눈보다 좋은 것이 있다면 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나뭇잎이면 나뭇잎, 시멘트 바닥이면 시멘트 바닥, 그 어디에 닿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는다면 그 소리는 즉시 내 마음을 두드리는 소리가 됩니다.
내 듣지 않는다면 땅을 적시든 흘러가 버리든 하고 말았을 것이 잠에서 깨우듯 내 마음을 두들겨 깨우고 창밖으로 불러내듯 나를 나에게서 불러내어 널려진 존재에게로 인도하고 그리고 널려진 존재로 계신 하느님께로 인도합니다.
그 빗소리 하나 때문에 하느님과 만나고 이웃을 만납니다.
내 잠에 묻혀버린 하느님의 부르시는 소리.
내 생각에 묻혀버린 이웃들의 외치는 소리.
오늘의 화해는 이 소리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나의 마음 무디게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올림픽이 한창인데 어찌 보면 우리도 그들처럼 결승선만을 보며 무한질주 했습니다.
어떤 소리도 듣지 않고 그저 나의 길을 달렸습니다.
누가 뭐래도 나는 내 길을 간다고 하며 갔습니다.
오늘 에제키엘서에서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오늘 복음에서는 이웃과 화해하라고 하지만 오늘 우리의 화해는 이 소리와 화해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불러도 듣지 않고 나의 길, 죽음의 길을 갔는데 가던 길 멈추고 돌아서서 주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서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진심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악인의 죽음이 아니라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살인을 하지 않음은 물론 누구보고 바보 멍청이라고도 하지 말라 하시고, 누구에게 원한 산 일이 있었다면 제단의 예물을 바치지 전에 먼저 화해하라고 하시지만 오늘 우리의 화해는 화해할 일조차 없을 정도로 이웃과 무관하게 살아온 삶을 돌이켜 이웃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보, 멍청이라고도 해보고 바보, 멍청이라는 나의 소리가 이제는 메아리 되어 나에게 되돌아오는 소리도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바보, 멍청이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정겹습니다.
그래서 바보, 멍청이라고 한 것이 바보, 멍청이인 나임을 서로 일깨우는 것이어서 고맙습니다.
미사의 준비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이번에 다시 사형제가 합헌 판결을 받았습니다. 13년 전의 찬성-반대, 7-5에 비해 이번엔 5-4로 근소하게 찬성이 선택되었습니다.
인터넷 서울 연합뉴스엔 “사형제 합헌에 탄식한 ‘사형수 대모’”라는 제목으로 글이 실렸습니다. 바로 20년이 넘도록 사형수들을 찾으며 뉘우침을 도왔던 올해 79세의 조 모니카 수녀님입니다.
수녀님은 처음부터 재판을 지켜보았고 합헌 결정이 나자 헌재 주차장 한편에 다른 이의 시선을 피한 채 우울해 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수녀님들과 신자 분들의 위로에 “애들 어떻게 하느냐”며 마음아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재판관들이 결정을 내렸어도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라며 ‘인간 생명은 존중받아야 하고 지구보다 더 무거운 게 사람 생명인데… 회개가 되어가고 잘 살아가려는 그때 죽을 날도 알리지 않고 집행하는 것은 참 잔인하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제가 놀란 것은 그 밑에 달린 의견들이었습니다. 이 기사를 읽고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리플을 달았습니다.
대부분의 의견은 사형은 꼭 사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는 종교인들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대부분이었고 수녀님에 대해서도 ‘사람을 죽인 사람이 사람인가? 혹은 너도 한 번 피해자들처럼 당해 봐라.’라는 식의 심한 욕설을 써놓은 것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래도 ‘사형제 폐지를 찬성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겠지.’하며 밑으로 계속 읽어 내려갔습니다. 읽어내려 갈수록 더욱 마음만 무거워졌고 결국 30-40개의 악플을 읽고서야 찬성의 글을 한, 두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들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렇게 당한다면 그 땐 어떻게 변할지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을 죽인 사람이 사람인가?’ 하면서 사형제를 옹호하면서 비록 우리 손으로 죽이지만 않을 뿐이지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살인을 저지르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많은 아픈 사연 중에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듣는 것만큼 마음 아픈 사연도 없는 것 같습니다. 본당에 있다 보면 이런 사연을 가끔 접하게 됩니다.
특별히 부부간의 신의를 지키지 않아서 가정이 파괴가 되는 경우는 더 가슴 아픕니다. 더욱 가슴이 아픈 것은 신의를 저버린 사람은 새로 만난 사람과 잘 살아가는데 버림을 받은 사람은 병에 걸려 일찍 죽는다든지 자녀를 키우기 위해 혼자 궂은 일을 하며 힘든 삶을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신의를 저버리는 것도 일종의 살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바람피우는 사람을 다 죽여야겠습니까? 나는 과연 어떤 누구에게도 잘못하는 것이 없어서 그렇게 무서운 심판을 내리는 것입니까? 죽을 죄를 지어서 죽어야한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면 고해성사 때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다가 뉘우치며 앞으로는 가정에 충실하겠다고 하는 사람을 사람 취급도 안 하고 또 세상에 알리고 신고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크건 작건 하느님 앞에 다 죄인입니다.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려 나오는 이유도 우리 죄를 용서받고 또 용서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다른 이들의 잘못에 대해 미운 감정만 가지고 있다면 하느님은 우리 죄를 어떻게 용서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성전에서 기도는 하지만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일러주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부부가 온전한 가정생활을 위해서는 서로 보이지 않는 밖에서도 신의를 지켜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부들인 우리들도 미사를 드리러 오기 이전에 해야 할 의무를 충실히 하였는지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죄를 짓는 것이 우리의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대해 신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이웃사랑의 유일한 계명을 주신 그리스도께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신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합니다. 그들은“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믿고 지키지만 그것과 관련된 것들은 지키지 않습니다. 형제들에게 화를 내고 미워합니다. 큰 죄는 사실 다 작은 것에서 비롯됩니다.
“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지금은 교만하여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겠지만, 사실 ‘상황’이 그리되면 우리도 사형자들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과 사람을 죽이는 것을 같은 죄로 취급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은 절대 용서 못한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은 정의 자체이시기에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미사를 하고 많은 예물을 바쳐도 용서하실 수가 없으십니다. 그래서 먼저 예물을 바치기 전에 화해하고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배의 준비는 봉헌금을 준비하고 몸만 성당으로 와서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구원받아야 하는 온전한 영혼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꼽냐?>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소년분류심사원에서 데려나왔던 한 아이가 기억납니다. 나이에 비해 체격이 땅땅한 것이 아주 야무졌습니다. 마음이 여리고 착했지만 첫인상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척 보면 "깍두기" 계보라는 인상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거기다 눈빛이 사납다보니 본의 아니게 친구들과 자주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별 생각 없이 쳐다보는데도 상대방에서는 "저것이 내게 감정이 있나?"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눈빛이 날카로웠지요.
소년원이나 심사원, 또는 구치소나 교도소에서 자주 체험하는 일입니다. 우리 가정이나 공동체 안에서도 자주 발생하는 일이기도 하지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여러 사람들이 밀집되어 생활하다보니 사소한 일로 마음 상하고 또 심하게 다투기도 하고 급기야 큰 싸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대형사건의 첫 시발점은 너무도 사소한 것이어서 웃음이 다 나올 지경입니다.
머리가 터지고 갈빗대가 나가는 전치 5주쯤 되는 싸움의 원인을 추적해 가다보니 "왜 째려봐?"였습니다. 상대방이 "내가 언제 째려봤다고 그래?" "그래서 꼽냐?" "그래 꼽다." "아니,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하면서 주먹을 한 대 날립니다. 무방비 상태에서 갑자기 날아든 주먹에 코피가 터진 상대방은 격분한 나머지 있는 힘을 다해 상대방의 턱에 시속 100Km짜리 헤딩으로 응수합니다. 턱이 얼얼해진 상대방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게 되어 흉기가 될만한 것을 집어듭니다. 이런 식으로 상황이 점점 악화되면서 전치 10주의 부상, 결국 살인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심한 다툼의 원인을 보니 라면이 좀 더 맛있으려면 "라면 스프를 먼저 넣느냐? 면을 먼저 넣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우리 인간들의 "욱하는 마음", "부족한 인내심"을 적나라하게 지적하면서 싸움이 나중에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까지 가지 않도록 아예 불화나 다툼의 원인을 원천봉쇄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손상시키는 말은 아예 애초부터 하지도 말라는 말입니다.
상대방에게 "바보"라는 말을 던지면 저쪽에서는 더 심하게 "바보 병신"으로 응수합니다. 이쪽에서 "미친놈" 하고 화살을 날리면 저쪽에서는 "죽일 놈"으로 응수합니다. 순식간에 증오와 반감이 쌓이고, 순식간에 둘은 원수지간이 됩니다.
회개의 첫걸음은 다른 무엇에 앞서 그릇된 우리의 언어습관을 고치는 일입니다. 왜곡된 언어구조, 비꼬는 습관, 공격적인 대화, 헐뜯는 식의 말들을 고치는데서 회개는 시작됩니다.
격려와 위로가 되는 말, 삶의 의미와 희망을 주는 고운 언어습관을 통해서 우리와 동행하는 이웃들에게 작은 기쁨을 선사하는 우리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어제부터 제가 있는 간석4동 성당에서는 성서40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성서40주간 하는 것에 대해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성서40주간 강의를 제가 혼자서 맡아 해야만 하거든요. 한 주에 2시간씩 그렇게 40주를 강의해야 한다는 것, 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제가 작년 한 해 동안 강의를 40번 정도 나갔습니다. 이것도 힘들었는데, 성서40주간의 강의만 40번, 그리고 다른 곳에서의 강의 청탁도 작년과 동일하게 들어오고 있는데, 이 모든 강의를 제가 혼자서 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사라지지 않더군요.
‘성서40주간 꼭 해야 할까? 괜히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시간도 없는데…….’
이런 생각만 계속해서 제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신자들이 성경 공부를 원했고 저 역시도 그 필요성을 깊이 느꼈기에 대책 없이 어제 첫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 날인데 어제는 비까지 주룩주룩 내리더군요. 하지만 뜻밖에 많은 분들이 오셔서 성당을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우리 본당 교우 뿐 아니라 다른 본당 교우들도 부족한 저의 성서40주간 강의를 듣기 위해서 오신 것이지요.
사람들이 많다보니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2시간의 강의를 모두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사로 마무리……. 미사 후에 많은 교우들이 제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해주시더군요. 그러한 인사를 받으면서 들은 생각…….
‘하길 잘했다…….’
생각해보니 남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했을 때는 그 과정 안에서 종종 후회하기도 했지만, 결과는 항상 기뻤던 것 같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바쁜데 괜한 것을 하는 것은 아닐까? 남들도 하지 않는데 내가 뭘 잘 났다고 이런 것을 하는가?’ 라는 생각들을 갖지요. 그러나 나를 위해서 한 일과 다른 이를 위해서 한 일의 결과는 큰 차이를 보입니다. 즉, 내가 아닌 다른 이를 무엇인가를 했을 때 더 큰 행복을 얻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보면 우리들이 생각하는 사랑을 확장해서 더 큰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할 것을 명하십니다. 즉, 자기 형제에게 ‘바보, 멍청이’라고도 말해서는 안 되고, 형제와는 무조건 화해할 것을 명하십니다. 또한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라도 얼른 타협하라고 하십니다.
어제 성서40주간을 시작하는 날이고 해서, 제대 벽면에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창세기 말씀을 붙여 놓았습니다. 그런데 미사 하는 도중에 그 글씨 중에서 ‘좋’이라는 글자가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글씨는 ‘보시니 참았다.’가 되더군요.
처음에는 웃었지만, 생각해보니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못된 모습을 보시고 계속해서 참고 계시지 않을까 싶더군요. 그렇게 사랑 좀 하라고 했는데, 끊임없이 미움과 다툼으로 일관하고 있는 우리들을 보시고 얼마나 답답하실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하지 않고 끝까지 참아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는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도 내가 간직하고 있는 사랑을 확장해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진정한 노고는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노고이다. 사람의 눈에 띄는 노고는 허영심만 있으면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라 로슈푸코)
생각을 현실로 옮기는 용기(‘행복한 동행’ 중에서)
프랑스의 시골 마을에 슈에 발레리라는 우편배달부가 있었다. 하루는 마을 사이를 걸어 다니다 산길에서 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는 일어나서 흙을 털어 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을 넘어뜨린 돌이 특이하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돌을 가방에 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가방에 큰 돌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생각하면서도 어서 버리라고 했다. 매일 걷는데 돌을 가지고 다니면 무겁다면서, 하지만 그는 돌을 꺼내 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돌을 본 적이 없다고 자랑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피곤해서 잠이 들었는데 문득 이 아름다운 돌로 성전을 지으면 얼마나 휘황찬란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잠에서 깼다. 그래서 그는 매일 우편배달을 하고 돌아올 때마다 길에서 돌을 하나씩 주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밀차를 밀면서 우편배달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돌을 싣고 왔다. 그는 날마다 돌을 가져오느라 하루도 편하게 지낸 날이 없었다. 낮에는 우편배달과 돌을 운반했고 밤에는 건축가가 되어 자신의 상상력을 총동원해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20여 년 동안 끊임없이 돌을 운반해 도처에 많은 성전을 지었다. 사람들은 고집스런 우편배달부가 어린아이와 같은 장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1905년 프랑스의 한 신문기자가 우연히 슈에 발레리의 성전과 건축 구조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고 그를 소개하는 글을 실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건축물을 보려고 찾아왔다. 그중에는 당시의 유명한 화가 피카소도 있었다. 현제 프랑스의 유명한 관광지가 된 이 성의 이름은 ‘우편배달부 슈에 발레리의 이상 궁전’이다. 궁전의 한 돌에는 ‘나는 희망을 담은 돌이 얼마만큼 빛을 낼 수 있을지 궁금했다.’라고 적혀 있다. 이 돌이 바로 처음 슈에 발레리를 넘어뜨린 그 돌이다.
미사의 준비
전삼용 요셉 신부님
많은 아픈 사연 중에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듣는 것만큼 마음 아픈 사연도 없는 것 같습니다. 본당에 있다가보면 이런 사연을 적지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부부간의 신의를 지키지 않아서 가정이 파괴가 되는 경우는 더 가슴 아픕니다. 더욱 가슴이 아픈 것은 신의를 저버린 사람은 새로 만난 사람과 잘 살아가는데 버림을 받은 사람은 병이 걸려 일찍 죽는다든지 자녀를 키우기 위해 혼자 힘든 일을 하며 살아야 한다든지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도 가정이 소중한지 두 집 살림을 하면서도 상대를 속이고 몇 년을 살기도 합니다. 이것을 나중에야 알게 된 사람의 마음은 그 배신감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도 신앙의 힘으로 참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의를 저버리고 다른 사람과 관계하면서 몸만 집에 들어와 산다고 하여 그것이 상대나 자녀를 위하는 일이 아닙니다. 혼인을 하였다면 지켜야 할 것이 있는 것이고 그것을 지켜갈 때야만 상대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지 않으며 살 수 있습니다.
이는 아주 단순한 진리이지만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라는 핑계로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상처를 주며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육체를 이기지 못하면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도 아픔을 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 진리는 우리 신앙생활에도 해당됩니다. 미사는 단순히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넘어서 하느님과 한 몸을 이루는 성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혼인 계약을 맺은 신부이고 특별히 성체를 영하면서 그 분과 한 몸을 이룹니다.
어떤 계약에나 서로 간에 지켜야 할 계약조건이 있습니다. 어느 한 쪽에서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계약은 파기되고 맙니다.이런 의미에서 혼인도 하나의, 아니 어쩌면 가장 중요한 계약입니다.
예수님은 신부를 위해 목숨을 바치심으로써 그리고 신의를 저버리지 않으심으로써 하실 의무를 다 하셨고 지금도 하시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과연 그분께서 내려주신 혼인계약 조건을 잘 지키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혹 어쩌면 그 혼인 계약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즉, ‘사랑’이 우리가 지켜야 할 혼인조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혼인한 부부가 서로 신의를 지키며 살다가 집에서 다시 만나야 하는 것처럼, 미사를 드리러 오기 이전에 해야 할 의무를 충실히 하였는지 먼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용서 못한 사람이 있다면 먼저 용서를 하고 미사에 참례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마치 신의를 저버리고 몸만 집에 들어와 사는 것과 같이 우리의 신랑인 그리스도께 모욕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있는 채 성체를 영하면 그 분과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을 모욕하는 것이고 그 성체는 그의 영혼과 육신의 독이 되게 됩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죗값은 반드시 치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저는 이것을 연옥과 연결시키고 싶지만, 어쨌든 죄를 지으면 그 죗값은 반드시 치러져야 합니다. 그 죗값은 이 세상에서부터 치러지고 그래서 죄를 지으면 이 세상에서부터 이미 하느님나라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를 지으면 절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합니다. 그들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믿고 지키지만 그것과 관련된 것들은 지키지 않습니다. 형제들에게 화를 내고 미워합니다. 큰 죄는 사실 다 작은 것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현재로 말하면 이들은 형제에게 해야 할 사랑의 의무는 하지 않으면서 전례에만 열심히 참례하며 스스로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음 미사의 준비는 바로 이전 미사가 끝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사랑하는 삶 자체가 바로 다음 미사 때 온전히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화해의 속 뜻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께 예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를 하라고 하십니다.
부모를 찾아뵈러 가기 전에 형제와 먼저 화해를 하라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하느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기도는 충실히 하면서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사랑은 소홀히 하는 것은 안 된다는 뜻입니다.
바벨탑 얘기가 담고 있는 뜻이 여러 가지이지만 이런 면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늘에 닿으려고 탑을 높이 쌓다가 이웃과의 소통이 단절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느님은 저 위에 계시어 거기까지 기어 올라올 수 있는 사람과 만나주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사랑이시기에 사랑의 관계 안에 계시는 것이지요.
그러니 당신을 만나려면 단절된 관계를 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화해하라고 하신다고 화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내가 스스로 화해하려고 해도 화해가 되지 않습니다.
잘 지내자고 찾아가 악수를 했는데도 화해가 되지 않습니다.
和解, 이 한자어의 뜻을 잘 보면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
和하려면 먼저 解를 해야 합니다.
화해란 다 풀어버리고 잘 지내는 것인데 그와 잘 지내기에 앞서 내 안의 풀 것을 다 풀어야 합니다.
무엇을 풀어야 합니까?
미움의 감정.
분노의 감정.
복수의 감정.
질투의 감정.
서운한 감정.
한 마디로 내 안의 모든 惡感情을 풀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악감정을 갖게 한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악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나를 봐야 합니다.
그에게 나의 감정 해소를 책임지우지 말고 나의 감정은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우리가 분노할 때 나에게 그렇게 한 사람에 대해 분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는 나에 대해 더 분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를 향하는 분노의 화살을 그에게 돌렸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여 이제 우리는 그런 말에 서운했던 나의 옹졸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 말에 상처받았던 나의 허약함을 진정 강인하게 해야 합니다.
그의 계략에 넘어갔던 나의 허술함을 극복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전에는 그로 인해 내가 악감정을 가졌으나 이제는 그로 인해
넓어지고,
강해지고,
성숙해져 더 이상 그에 의존하지 않고 나를 진정 사랑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 대신 하느님 사랑으로 충분하여 그와 상관없이 진정 행복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나의 삶에서 그를 배제하고 오직 기도만 하며 하느님과만 잘 지내려던 나에서 이제 그와도 잘 지내고
그와 함께 하느님께 기도하고 그와 함께 예물을 봉헌하러 가는 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화해와 예물
배미애 수녀님
수도회에 입회해 지원기와 청원기를 보내는 동안 몹시 미워했던 자매가 있었다. 그것 때문에 신혼처럼 달콤해야 할 수도 생활 초반을 매우 어둡고 활기 없이 보냈다. 그러면서도 내 감정을 한 번도 솔직히 나누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자매와 밤늦도록 서로의 느낌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서로에 대해 좀 더 알게 되면서 화해가 시작되었다. 날아갈 듯한 자유로운 마음,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강하게 경험했던 자유로운 느낌이었다.
오늘 복음의 시작은 자기 형제를 무시하거나 함부로 하지 말라는 가르침에서 시작해 제단에 예물을 바치기 전에 원한을 품은 형제가 생각나면 먼저 그를 찾아가서 화해하고 예물을 드리라고 한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 사는 가족·친지·수도회 회원·친구들이 우리가 가장 사랑하면서도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바치려고 준비한 예물은 무엇인가? 그것은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재능과 선물이 아닐까? 재능을 활짝 꽃피울 때는 언제일까? 사랑받고 사랑할 때, 곧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울 때다. 우리 마음 안에 미움이 가득할 때 삶의 활기는 시들고 재능과 선물은 위축되기 마련이다. 화해는 자유를 위한 선택과 결단이다. 자유로운 결단이 우리를 더욱 풍요로운 삶으로 초대한다고 복음은 말한다. 하느님이 각 사람에게 부어주신 축복의 선물은 그때가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감사와 찬양의 예물로 빛을 낼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뜻
류충희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율법 이해를 다룬 여섯 가지 ‘대립명제’(마태 5,21-48) 중 첫 번째로 ‘화해’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유다인들은 탈출기 20장 13절과 신명기 5장 17절에 기록된 “살인하지 말라”는 금령 때문에 살인을 범하지는 않았지만 형제를 미워하고 욕하는 행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문자화된 율법 규정만을 좇다보니 정작 글로 씌어지기 이전의 하느님의 성스러운 뜻과 의로움을 놓치고 만 인간들의 어리석은 행위들을 예수님께서는질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금령을 더 심화하여 형제에게 분노하고 욕하는 것조차 금하셨습니다. 어떠한 율법도 그 안에 담겨 있는 정신이 사라지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성전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려 할 때 형제에게 원망을 품게 한 일이 생각나면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나서 제사를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이 되새겨보아야겠습니다.
어떤 한 형제님께서 식사를 위해서 레스토랑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주문을 하는데 맞은편에 있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자기를 향해서 환한 미소를 짓는 것이었어요.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담당하는 웨이터에게 후한 팁을 주었지요.
웨이터는 간만에 손님에게 받는 후한 팁이었습니다. 기분이 너무나 좋아졌기에, 이 좋은 기분을 가지고서 복권을 한 장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이 복권이 글쎄 1등에 당첨된 것입니다. 최고의 날이었습니다. 너무나 기분이 좋았던 이 웨이터는 집으로 향하면서 한 명의 불쌍한 걸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갑 전체를 이 걸인에게 던져 주었습니다.
걸인 역시 최고의 기분이었습니다. 사실 그날따라 아무도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푼돈이 아니라 지갑을 통째로 주는 사람을 만나다니요. 이 걸인은 오랜만에 가게에 들러서 맛있는 음식 재료를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로 오랜만에 먹게 되는 음식을 떠올리니 너무나도 행복했지요.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주 불쌍한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강아지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이 강아지의 처지를 보니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맛있는 음식꺼리를 구입했으니, 이 강아지와도 함께 나누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강아지와 함께 집으로 왔고,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었습니다.
강아지 역시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오랜만에 대접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그날 밤이었어요. 이 집 건물에 글쎄 불이 난 것입니다. 강아지가 가장 먼저 불이 난 것을 알았지요. 강아지는 무섭게 짖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강아지의 소리를 듣고서 아무런 희생자 없이 불이 난 건물에서 무사히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밖으로 무사히 나왔던 꼬마 아이 중에 한 사람이 장차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네요.
이 이야기의 시작은 바로 한 아가씨의 환한 미소였습니다. 그 환한 미소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결코 우리들이 추구하는 거창한 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 것이 아니었지요. 내 이웃을 향한 작은 관심과 작은 사랑이 모두를 변화시킬 수 있으며, 이로써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분명히 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예물 봉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웃 형제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우리들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요? 내 이웃에 대한 자그마한 사랑도 전혀 실천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으로부터 커다란 은총과 사랑을 받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욕심은 아닐까요?
자그마한 관심과 사랑. 이 정도로도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문제는 그 정도의 관심과 사랑도 없었던 우리들의 한없는 욕심과 이기심과 무관심이라는 것이지요. 욕심과 이기심과 무관심이 관심과 사랑으로 바뀌는 날, 이 세상은 주님 보시기에 참으로 좋은 세상으로 다시 변화될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보세요.
오드리헵번이 아들에게 들려준 글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너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야 하며,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져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회복을 바라는 이가 먼저
허찬란 신부님
싸움판에서 “잘못한 사람은 저 사람인데, 왜 당신이 나서서 참견이냐?”며 따지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왜 그렇듯 나서서 고통받으시고 수난하셨을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시켜 주시려고 그러셨던 것입니다. 화해를 시키는 중간자의 입장은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화해는 누구든 잘못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다시 빨리 원상태로 돌리길 바라는 이가 먼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족한 나의 삶에 들어오셔서 나를 구원으로 이끄십니다.
그것이 바로 내게 쏟아주신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잊고 삽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을 항상 기억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기 위해선 매일 죄를 성찰하고 양심을 청소해야 합니다.
옛날부터 저희 사제들은 미사의 시작 때에, 그리고 잠자기 전 하루의 일을 반성하며 성찰하는 것을 배웠고 또 그것을 실천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싸움과 사소한 시비가 있을 당시에는 내가 떳떳했다고 생각되던 일들도 다시 돌아보며 뉘우치게 됩니다. 특히 잠자리에 들기 전, “주님, 이 밤을 지켜주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하고 성호를 그으며 잠을 청하지요. 이렇게 하루를 마감하는 사제의 삶 안에서 오늘 복음은 특별히 더 깊이 와닿습니다.
이웃, 또 다른 나
이동훈 신부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나름대로 열심한 신앙인이었다. 수백 개나 되는 실천조항을 만들어 놓고 철저히 지키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가?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는 2퍼센트 부족하다고 하신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율법 정신이었다. 예수님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뿐 아니라 속마음까지도 챙기신다. 살인하지 않는 것뿐 아니라 살인의 원인이 되는 미움과 성냄, 무시하는 말까지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성을 내고, 미워하고 무시하는 대상을 두고 ‘남’이 아니라 ‘자기 형제’라고 하신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성을 내고 화를 내고 무시하는 대상은 ‘남’이 아니라 같은 피를 나누어 가진 형제라는 것이다. 나의 일부라는 말이다. 그래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19,19)고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리라.
자본을 최고의 우상으로 삼고 있는 무한경쟁 사회에서 이웃은 더 이상 형제가 아니다. 딛고 일어서야 할 대상, 적인 것이다. 나의 생존을 위해서는 미워하고 화를 내고 무시하고, 심지어는 살인까지 저지르면서 살아가는 무서운 세상이다. 자녀들에게 무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기를 안겨주기 위해 고액과외를 하고 조기유학을 보내 파행적 가정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만의 생존법을 배워가는 자녀들이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고사하고 부모를 제 몸처럼 사랑하며 공경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나 할까? 만일 우리가 계속 그렇게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을 나무랄 수 없을 것이다.
최현욱 신부님
사순 제1주간 금요일이라는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면서 먼저 여러분들의 주변을 한번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여러분들에게서 상처를 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은 없는지, 여러분들이 함부로 내뱉은 말로 인해서 속으로 울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여러분 주변의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리면서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원망하는 사람, 내가 힘들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 나를 울게 만든 사람이 아니라 나의 말이나 행동으로 원망을 품게 만들고, 힘들게 하고, 울게 만든 사람이 없는지 말입니다. 누군가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혹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떠오르지는 않습니까? 오늘 아침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바로 그러한 사람들과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그 사람들에게 가서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라고 하십니다.
방금 들은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것,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마태오 복음 23장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삶이 어떤 것인지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르치는 일은 잘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실행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사랑의 삶을 직접 몸으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율법의 정신인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알맹이가 빠진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고 질책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즉,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말을 잘 한다고 하더라도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율법학자나 바리사이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실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고 한 말을 너희가 들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고, 바보나 멍청이라고 하고, 이웃 사람을 비난하고 헐뜯고 업신여김으로서 그들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하고, 울도록 만들지 마라. 그리고 그렇게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용서를 청하고 화해해라.”
다시 한 번 우리 주위를 돌아봅시다. 가까운 가족에서부터 친구들, 그리고 이웃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리면서 내가 다가가서 용서를 청하고 화해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다음이 아니라 바로 오늘 그들과 화해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로 지금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를 하늘나라로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절을 잘 보내기 위해
이회진 신부님
얼마 전 우연히 길에서 아는 수녀님을 만났습니다.
근무하는 성당으로 돌아가는 길이어서 차로 모셔다 드리는데, 수녀님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시던군요.
1년 전에 제가 수녀님께 이야기한 첫 세례 때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는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신다는 이야기를 성당 예비자들에게 했더니 그 가운데 한 자매가 나중에 당신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수녀님, 정말 하느님께서 세례 때의 첫 기도를 꼭 들어주시는가봐요.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저도 마음속으로 하느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때 저의 집에 차가 필요해서 ‘하느님, 차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꼭 들어주세요.’ 하고 기도했거든요. 그런데 정말 며칠 전에 차가 하나 생겼습니다. 시숙네가 새 차를 사면서 쓰던 차를 저희에게 그냥 주었거든요. 그런데 수녀님 이럴 줄 알았으면 새 차를 하나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할 걸 그랬어요. 그랬으면 중고차가 아닌 새 차가 하나 생겼을 텐데 말이예요.”
사순절을 보내며 많은 경우 사람들은 이 사순절이 음식을 적게 먹고, 술을 줄이며, TV를 적게 보며 절제의 생활을 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순절을 보내는 다른 방법은 더 많이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약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가 더 많이 기도할 수만 있다면, 사순절 기간 동안 음식이나 술이나 우리 마음을 끄는 것을 줄이는 것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더 하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사순절을 더 온전하게 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음식을 절제하는 것은 가난한 이를 돕기 위한 것이고, 술을 적게 하는 것은 집에 일찍 들어가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한 것이고,
TV 보는 시간을 줄이는 것은 하느님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 혹은 사순절을 잘 지내기 위해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인가? 혹은 끊어야 할 것인가? 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우리 역시 여전히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율법에 메여 있는 것이고, 여전히 악을 미워하라는 율법에 메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을 너머 형제들에게 성을 내는 것조차 바보라고 부르는 것조차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혹은 사순절을 잘 보내기 위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가에 관한 것을 넘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더 기쁘게 할 수 있는가? 를 기억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느님께 더 큰 어떤 것을 청하는 것이 인간적인 마음임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먼저 하느님이 우리에게 전해주신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오늘 우리가 바치는 사순의 희생과 보속 역시 하지 말아야할 어떤 규칙이라기보다 어떻게 하느님 당신과 다른 이의 기쁨이 되는 것이지 우리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과 자신의 더 큰 기쁨을 위해 오늘을 봉헌합니다.
“주님, 당신의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아멘.”
"과거가 아닌 현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중요한 건 지난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삶입니다. 초발심의 자세를 잃지 않고 사는 게 중요합니다. 과거에 아무리 잘 살았어도, 지금 못 살면 과거 잘 살았던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 말씀도 단연 현재의 삶에 초점을 둡니다.
오늘 1독서 에제키엘 예언서에 “버리고 돌아서서”란 말이 유독 눈에 띄었습니다. 무려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실천적 회개의 중요성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악인도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살 것이며, 그가 과거에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다 합니다. 그러나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하면 그가 실천한 모든 정의는 기억되지 않은 채 그는 자기가 저지른 죄 때문에 죽을 것이라 합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죄악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는 길만이 살 길이요, 사순시기에도 잘 들어맞습니다.
매일 매일이 죄악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와 새롭게 시작하는 날입니다. 지금 잘 살아야지 과거 잘 살았다는 것은 별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는 어떤 기득권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 역시 우리에겐 새로운 도전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 말하는 의로움 역시 철저한 사랑의 실천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직접 살인은 물론 간접 살인이라 할 수 있는 형제들에 대한 분노, 형제들을 ‘바보’나 ‘멍청이’ 라 내뱉는 간접적인 살인과도 같은 일체의 욕설들 뚝 끊으라는 말씀입니다. 생각이나 말, 행동 모두가 순수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결국은 마음의 순수로 귀착됩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생각도, 말도, 행동도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바치는 예물 역시, 원망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형제와 화해한 후 돌아서서 예물을 바쳐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한결같이 주님은 먼저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구체적 사랑을 실천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십니다. 결코 하나같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도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오시는 좋으신 주님은 죄악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선 우리 모두에게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새 마음과 새 영을 선사하십니다. 아멘.
화해
훈일 신부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갈등과 분쟁입니다. 이런 갈등과 분쟁과 미움이 일어나는 근본이유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않고 자기중심으로만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는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죄만 들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갈등과 분쟁은 결국 나와 이웃을 파멸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 우리는 화해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화해한다는 것은 평화를 되찾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빚을 탕감하고, 증오를 사랑으로, 두려움을 신뢰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가장 주된 이유는 우리와 하느님의 화해를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신비를 통해서 이를 완성하셨고, 이제 두려움은 갔으며 우리는 그분의 완전한 사랑을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화해는 뉘우치는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누구의 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화해는 죄의 두려움에서 시작합니다. 죄의 결과가 얼마나 두려운지 깨닫는 삶을 통해서 다가옵니다. 이 거룩한 두려움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미움이 싹트는 것을 막는 것이고 그것이 죄와 죽음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화해가 일어나는 구체적인 모습은 우리가 손상시킨 것이나 상처 낸 것을 회복시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를 들어,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 자신의 실수를 먼저 인정하고 그것을 회복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다른 이들의 화해를 위해서 중개자가 되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화해와 평화의 사도가 될 것입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왜 내 안에 그 ‘몹쓸 인간’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무리한 요구를 우리에게 하고 계신다는 느낌입니다.
“형제에게 절대로 성내지 마라.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바보라고 부르지도 마라. 최고의회에 넘겨질 것이다. 멍청이라고도 부르지 마라.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평소에는 성인군자 같은데, 한번 ‘욱’하는 마음의 불길이 솟구치면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는 사람들을 가끔 봅니다. 심호흡과 더불어 단 1분만 마음을 가다듬었어도 될 일인데, 그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평소에 따놓은 점수, 그 한 번에 다 까먹습니다. 내가 많이 오버했구나, 하는 생각에 평상심에로 돌아가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주 마음을 다스릴 일입니다. 특히 화가 솟구치는 순간, 그 감정을 긍정적으로 표출할 줄 아는 자기만의 방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수행자의 당부처럼, 흔들리는 마음 앞에서도 “조용히 생각하십시오. 생각을 조용히 하십시오.” 그 어떤 외부로부터의 충격에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도록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야말로 성덕에 도달하는 지름길임이 분명합니다.
다음의 일화를 한번 들어보십시오.
“두 승려가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바라보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한 사람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우겼고, 다른 사람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6祖 혜능이 말했다.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오. 다만 당신들의 마음일 뿐이오’”(존 CH 우, ‘선의 황금시대’ 참조).
분노의 원인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 내면의 불안정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 내면이 평화롭고, 고요하며, 안정되어 있다면 그 어떤 외부로부터의 억압이나 무시, 소외 앞에서도 자유로울 가능성이 있습니다.
쉽게 화가 나고, 또 자주 우울해지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욕심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욕심을 버리고, 기대로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비웠다는 마음조차 한번 비워보십시오. 뜻밖의 평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찾아올 것입니다.
올라서려고만 발버둥치지 말고 가장 밑바닥까지 한번 내려가 보십시오. 가장 미천한 일은 언제나 내 몫이려니 마음먹어보십시오. 마음이 홀가분해질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사람은 자기가 마음먹은 만큼만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큰 욕심을 버리고, 지나친 기대도 버리고 아주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기 시작하면, 의외로 삶이 편안해지기 시작합니다.
한 착한 수련자 형제가 이런 생각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수도생활, 저는 너무 잘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수도원에 들어와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어찌나 행복한지, 나 혼자만 이렇게 행복해서 되나, 하는 걱정과 죄송스러움을 안고 매일을 살아갑니다. 돌아보면 하느님께서는 제게 얼마나 많은 것을 주셨는지, 모든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매일 하얀 백지 같은 또 다른 오늘을 선물로 주십니다. 여유 있게 기도할 기회를 주십니다. 형제들과 담소할 수 있는 기회, 기쁜 마음으로 노동할 수 있는 기회, 천진난만한 얼굴로 뛰어놀 수 있는 기회, 저를 성장시키기 위한 선물이 분명한 형제들과 함께 살게 해주신 하느님께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강도 높은 수업, 집중적인 양성과정이 계속되는 팍팍한 수행생활에 힘겨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순간순간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살아가는 형제다 보니 단조로운 수도생활, 모든 것을 공유하며 사는 데서 오는 불편함, 인간관계 안에서 오는 갖은 상처 앞에서도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화는 상대방에게 발산하지만 머지않아 그 화는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와 또 다른 상처를 입힙니다. 화를 내는 자신을 괴롭힙니다. 고통이 지속됩니다.
결국 ‘마음 바꾸기’ 작업이 필요합니다. 왜 하루 종일 내 안에 ‘참 나’가 살지 못하고 그 몹쓸 ‘인간’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까? 자기 내면의 주인공, 내 감정의 주체는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설 수 있도록 언제나 지지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분노의 표출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면 끝도 없는 고통과 상처만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무거울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기도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지겠습니까? 인간관계가 제대로 형성되겠습니까? 건강이나 제대로 챙기겠습니까? 그 상태에 머무는 순간은 결국 불붙는 지옥에서 고생하는 순간입니다.
율법의 출발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복음의 처음 부분에서 들려오는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엄청난 압박감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어떤 면으로나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비교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배운 것으로나 사회적 지위로나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을 가르치고, 민족의 정신을 지켜오던 사람들과 달리 하느님에 대해서는 그저 고개 숙이고 빌 줄만 알던, 그리고 정해진 율법의 굴레에 맞춰 의무만을 성실히 지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들이 하늘나라에 가기란 불가능한 것이라는 말씀과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데 하늘나라의 조건을 다 알고 있는 듯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산다는게 도대체 가능하기나 하겠습니까?
이런 경향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살펴보면 하느님에 대해 진리를 가르친다는 사람들과 그것을 평생 배워야 하는 듯 여겨지는 사람들이 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흐르는 생각들 중 하나는 하느님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하늘나라 문의 열쇠를 쥐고 있는 듯 여겨지기에 한쪽이 일방적으로 존중받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배워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가르치는 사람보다 훌륭히 사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거나 혹은 건방지거나, 불손한 생각 정도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은 율법이나 어떤 정해진 진리의 가르침보다 훨씬 더 우리 생활 가까이에 있어서 누구나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알게 해 줍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생각해보면 율법이라는 무시무시한 기준을 갖다 댈 필요도 없이 누구나 율법의 근본 정신대로 살아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율법에 적혀 있는 가장 커다란 죄라 할 수 있는 ‘살인’을 예로 들어 설명하십니다. 율법에는 ‘살인하지 마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살인’은 대죄입니다. 그러니 그 죄를 지으면 하느님 앞에서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에 제시된 살인만이 죄가 아니며 자신의 형제와 같은 가장 가까운 이를 욕하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이 ‘살인’이라는 율법에 해당되는 죄를 짓기 전 그 죄가 남을 시샘하고, 미워하는 아주 사소한 욕심에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 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옳게 살지 못한다면 이란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로써 생각지도 못할 엄청난 기준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런 커다란 죄를 짓게 되는 계기를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조심 시켜주시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마주 대하기 전 그분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를 잘 준비하게 하십니다.
또한 어떤 면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의 속뜻을 설명해주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살인하지 마라에서 살인이란 율법은 사실 사람의 생명을 소홀히 여기는 것에서 출발하고 또 그것 역시 살인과 마찬가지라는 가르침이 숨겨진 듯 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훨씬 더 가깝게 있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더 생각하고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록 우리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자격으로는 못할지 모르지만 삶으로는 충분히 그들보다 옳은 사람이 될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갈등과 원한
강희수 수사님
내 삶 안에 갈등과 원한 관계가 만들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대부분 그 상처와 갈등을 생각하지 않고 잊어버리려고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지냅니다. 그까짓 것 과거지사로 돌려놓고 가급적이면 직접적인 접촉이나 충돌만 피하면 얼마든지 재미있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알고 있습니다. 원한을 품고 있는 나에게 더 큰 상처가 된다는 것을.
그런 상황 속에서 다만 내 안에 깊이 곪아가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예물을 바치는 것으로 그 모든 행위를 보상받으려 하거나 없애버리려 합니다. 그러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것이 끝날 수 있을까요?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시고 화해한 순간은 죽음 앞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살겠다고 한 저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도전입니다.
신앙생활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삶의 변화가 요구됩니다. 새 삶을 살기 위해서는 새로운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삶이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내 몸은 욕구에 길들여져 골수 깊은 곳에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계속 나를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려면 수없이 넘어야 합니다.
새로운 삶을 향한 첫걸음은 용서라는 것을 체험합니다. 지난날 나에게 아픔을 주었던 나와 이웃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먼저 나 자신을 용서합니다. 그래서 더욱 기도합니다.
더 옳게 사는 법을 따라...
박상대 신부님
8가지 참된 행복의 길을 훈시하는 것으로 시작된 산상설교는 예수님의 도래로 세워지는 하느님나라의 백성이 될 자격조건과 지침을 제시한다.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하느님 백성의 자격조건은 모세의 율법(모세오경)과 예언서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따르고 지키는 일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주신 율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손수 돌판에 새겨준(출애 31,18) '십계명'이고, 다른 하나는 십계명에 딸리고 관련된 수많은 규정들과 법령들이다. 후자(後者)에는 하느님께서 직접 모세를 통하여 주신 것도 있고, 조상들에 의해 덧붙여 만들어진 규정과 전통들도 있다. 여기에 예언서의 말씀도 같은 비중으로 중요한 것으로 유다인들은 생각한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이를 잘 따르고 지켰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아야 하느님나라를 차지하고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옳음과 의로움을 인정하신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요구되는 것은 그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구별되어야 할 것은 율사와 바리사인의 '옳음'과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더 옳음'이다. '더 옳음'이 원급(原級) '옳음'의 비교급(比較級)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원급과 비교급의 관계와 차원을 완전히 넘어서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더 옳음'의 깊은 뜻은 다른 데 있다는 말이다.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옳게 사는 것은 사실이나 그들의 옳음은 그들만의 생각에 기준을 둔 것으로서, 결국 율법의 자구(字句)에만 매인 것이다. 예수님에 의해 새로이 요구되는 '더 옳음'은 하느님의 뜻에 기준을 둔 것이며, 율법의 정신을 파고드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에도 하느님 계명의 근본정신은 분명히 있다.(신명 5,32-6,25) 그러나 그 근본정신이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옳다는 행실'에는 빠져 있음을 예수께서 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근본정신을 다시 심어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5,17)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행실이 우선 소금과 빛의 실제적이고 상징적인 기능을 모두 수행하는 것이 되기를 요구하신다.(5,13-16) 그런 다음 '더 옳게' 사는 방법을 6개의 대당명제(5,21-48)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제시하신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된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근본정신을 밝히는 것이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다. 6개의 대당명제는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6개의 대당명제 중 첫 번째의 대당명제에 해당한다. "살인하지 못한다."(출애 20,13) 살인죄를 범한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반드시 자기 목숨으로 그 죄 값을 치러야 한다.(출애 20,12-17) 이것이 구약의 율법이다. 따라서 옳게 사는 방법은 이 율법을 잘 지키면 된다. 그러나 더 옳게 사는 것이 요구된다.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옳게 사는 것인가? 더 옳게 사는 것은 율법을 다 지켰다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그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그 기준은 예수님의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는 역설적인 도식 속에 숨겨져 있다. 율법에는 '살인'이 '재판'(사형)에 해당되지만, 예수께는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만으로도 살인과 같은 '재판'(사형)을 받아야 한다. 더 나아가 '바보'라는 욕은 '중앙법정'에 넘겨지며, '미친놈'이라는 폭언은 '불붙는 지옥불'에 던져진다는 것이다.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사형의 죄 값을 치러야 하는 마당에 '바보'나 '미친놈'이라는 폭언에 대하여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어도 십계명은 여전히 유효하다. 허나 '더 옳게' 사는 방법으로 요구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제5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에 결코 귀를 막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사람이 사람을 죽일 때 아무 이유 없이 죽이지 않음을 알고 계신다. 그렇다고 모든 성냄과 폭언이 살인을 몰고 오는 것은 아니다. 살다보면 형제에게 화도 내고 욕도 하고 폭언을 일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화가 욕이 되고 욕이 폭언되며, 폭언의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보통 자기제어능력을 상실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을 내기 전의 단계인 마음속의 원한까지도 사전에 풀기를 바라신다. 형제에게 원한을 품은 마음으로 제단에 바쳐지는 예물을 하느님께서는 바라지 않으신다. 예물은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행위의 결과보다 그 행위를 촉발하는 마음속의 의도와 원인이 더 중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사순시기는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때이다.
스키를 배우고 싶어 하는 할아버지께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주위의 걱정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으로 스키를 배우겠다고 선포를 하셨고, 코치를 찾아가서 개인지도를 받아가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습니다.
어떤 분이 할아버지께 스키를 얼마큼의 실력에 도달할 때까지 타고 싶으시냐고 물었지요. 이 물음에 할아버지께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스키를 잘 타고 싶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모두들 그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어떤 분은 ‘노망드셨나 보다’라는 말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의 실력은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었습니다. 다들 할아버지의 실력에 깜짝 놀라면서 그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 대답은 아주 간단했어요.
“목표를 높게 잡으니 훈련에 집중하게 되고, 집중해서 훈련했더니 실력이 늘었어.”
나이의 많고 적음으로 일의 결과가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또한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일의 결과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 점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만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때로는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열정이 없고, 꿈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요? 바로 몸은 젊지만, 마음은 늙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좀 너무하다 싶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사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해서 ‘바보, 멍청이’ 등의 속된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러한 말을 하셔서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까요? 바로 작은 것에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말부터 하나씩 바꾸어서 주님께서 원하는 모습으로 변화될 것을 촉구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정도쯤이야 뭐 어때?’, ‘편하게 대충 대충 살자.’ 라는 생각으로 안일하게 행동하고 말합니다. 그 결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웃들에게 아픔과 상처를 전해주고 있으며, 내 안에 열정과 꿈이 점점 사라지게 되어 앞서 말씀드린 마음이 늙은 사람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면서 그 말씀대로 살아 간다면, 인생의 나이와 상관없이 진리를 위해서 자기 몸을 던지는 진정한 젊은이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겠습니까? 젊은이입니까? 노인입니까?
젊은 마음으로 삽시다.
성공하는 남자는 밥 먹는 것만 봐도 안다(‘헤럴드생생뉴스’ 중에서)
성공하는 남자는 밥 먹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서울의 소문난 한정식집 ‘봉우리’대표 이하연씨의 성공남 찍기는 확률 90%이상이다. 성공할 확률이 높은 ‘싹이 파란’ 남자를 찾고 있는 미혼녀라면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남자의 성공 남자의 향기’(시대의 창)에서 그가 꼽은 성공을 예약하는 남자의 태도, 특징은 분명하다.
▶자기중심이 확고하더라.(한마디로 목표나 비전이 뚜렷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좋은 정보를 수집하고 즉각 실행에 옮긴다. ▶모두 시간을 관리하는데 탁월하다. ▶필요할 때만 사람을 찾지 않는다. ▶일이 재미없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30분 먼저 도착하지 제 시간에 오지 않는다.(상대방을 미안하게 하는 것은 주도권을 잡는 일이다) ▶언제 어디서든 읽을 수 있도록 책을 놓아둔다. ▶낯선 만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유능한 인재들한테 기댈 줄 안다. ▶어깨를 나란히 하는 친구가 많다.
그들의 대화법은 어떤가.
처음 보자마자 대뜸 반말하는 남자라면 성공을 기대하지 않는 게 낫다. 처음엔 조심하지만 한두 번 본 다음에 불쑥 말을 놓는 남자도 마찬가지다. 성공하는 남자는 늘 상대를 예의바르게 대한다.
▶광고 카피같은 서론. ▶상대를 불쾌하게 하지 않는 말. ▶결론 유도.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마음 얻기. ▶솔직하게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태도는 남자의 성공을 담보한다.
스타일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외모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하연씨는 그가 만난 성공한 남자들 중에는 뚱뚱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에게선 뚱뚱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장점으로 비쳤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에게 맞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뚱뚱하다는 콤플렉스를 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가꿀 줄 아는 센스이자 상대방을 매료시키는 점이다.
사람마다 자신이 꼭 해보고 싶은 것, 그러나 아직 하지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 하고 싶은 것이 평생가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지요. 그러면서 우리들은 불가능하다는 생각과 함께 포기합니다.
저에게도 그런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피아노 배우는 것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 피아노 치는 아이들을 보면서 저도 꼭 배우고 싶었지만, 결국 ‘도레미파솔라시도’가 어디에 있다는 것만을 배우고는 끝났거든요. 그리고 지금 다시 시작하고 싶지만 ‘이제 늦었지 뭐……. 이렇게 나이 먹어서 무슨 피아노야~~’라는 생각으로 포기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지요. 피아노 치는 사람을 보면서 부러움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아주 깜짝 놀랄만한 말을 하나 듣게 되었습니다. 글쎄 지금은 은퇴하신 인천교구의 원로 신부님 중의 한분이 피아노를 배우고 계신다는 것이에요. 그것도 바이엘은 아미 다 마치고, 벌써 체르니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3시간씩 연습을 하다 보니, 2달 만에 이 단계까지 오게 되었다는 말씀을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그리고 앞으로의 꿈이 연주회를 갖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칠순을 넘기신 분. 그러나 아직도 배울 것이 많다고 하시면서 더욱 더 힘차게 사시는 원로 신부님을 보면서, 아직 이렇게 젊으면서도 불구하고 ‘할 수 없다’면서 포기했던 제 자신이 얼마나 부끄럽던지 몰라요. 어쩌면 내가 늦었다고 포기하는 순간에 ‘한 번 더’라는 생각으로 매달렸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나를 만나지 않았을까요?
우리들이 존경하는 사람,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세요. 그들은 어떠한 상황에 있어도 좌절이나 포기를 몰랐던 사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의 능력은 무한하시지요. 따라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그분께서 우리의 간절함을 보시고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나약하고 부족한 우리들과 함께 하심으로써 우리가 원하는 바를, 아니 그보다도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해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문제는 스스로 한계를 짓는 우리들의 나약한 마음이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포기하는 우리들의 모습에 안타까워하시며 항상 최선을 다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율법박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도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실 그들의 겉모습은 최선을 다하는 신앙인의 모습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많이 기도했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단식과 극기의 모습을 보여주었지요. 그런데 그들보다 더 능가하지 않는다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 말은 곧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당신처럼 끝없는 사랑을 베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며, 용서를 해야 한다면 하루빨리 용서하라고 하시지요.
우리가 포기하는 것들은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지금 포기하려는 순간에 주님을 초대해 보십시오. 전지전능하신 그분께서 못하실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포기하지 맙시다.
세상에서 가장 짧은 동화('좋은 글' 중에서)
세탁소에 갓 들어 온 새 옷걸이한테 헌 옷걸이가 한마디 하였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말길 바란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 하시는지요?"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자기의 신분인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 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란다"
요즘 갑곶성지를 찾아주신 분들은 제게 항의를 하십니다. 왜 강아지들을 차별 하냐고 말이지요. 사실 한 마리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풀어 놓았고, 또 다른 한 마리는 줄에 묶여 있거든요. 누가 보아도 차별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사연이 있습니다.
원래 이 두 마리의 강아지는 모두 풀어서 키웠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의 문제가 생겼지요. 우선 동네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쓰레기봉투를 뜯어 놓는 것입니다. 또한 성지 앞에는 강화 역사관이 있는데, 그 안에는 애완견이 들어갈 수가 없어요. 하지만 풀어 키우는 저희 집 강아지는 개구멍을 통해서 역사관 안에 들어갔고, 그 안에 각종 흔적을 남겼던 것이지요. 따라서 동네 사람들과 역사관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성지에 와서 이 두 마리의 강아지를 제발 좀 묶어 놓으라고 항의를 하더군요. 결국 그 뒤로 강아지들은 줄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2월 7일에 암컷 강아지가 아기 다섯을 낳았고요, 아기 강아지들을 위해서 풀어 놓았지요. 물론 공평함을 주장하는 저는 형평성에 맞게 수컷 강아지도 풀어 놓았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한 마리는 돌아다니는데, 자기만 묶여있으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에서 커다란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수컷 강아지에게 암컷 강아지가 경계심을 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기회만 되면 무는 것이었어요. 아마 자기 새끼를 보호하기 위한 본능이 아닌가 싶더군요. 그래서 제가 수컷 강아지를 묶어 두면, 암컷 강아지도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수컷 강아지를 묶어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 수컷 강아지가 더 이상 물리지 않도록 했던 저의 조치였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저의 행동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항의를 하셨던 것입니다.
제가 이러한 항의를 받으면서, 아마 주님께서 받으시는 항의도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주님의 뜻은 전혀 모르면서,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성급하게 던지고 있는 우리들의 항의들. 그러한 항의들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얼마나 답답하실까요? 다 우리들이 잘 되라고 하는 것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지금 힘들고 고생스럽다고 따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들을 다시금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잘 되라는 말씀을 또 한 번 해주십니다.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하지만 우리들은 이런 모습을 간직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간직하기보다는, 오히려 주님께 따지기에 급급하지요.
‘주님,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왜 저런 사람을 제게 보내서 저를 이토록 힘들게 하십니까? 그런데 이런 사람을 용서하라고요? 아니 제가 먼저 가서 화해를 하라고요? 제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데요?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합니다. 저는 못합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남을 미워하면 할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 사람을 내가 미워한다고 나의 바램처럼 그 사람이 잘못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내 마음만 지옥처럼 복잡하면서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바로 지옥처럼 변하는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이제 주님의 뜻을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뜻을 앞세워 주님을 답답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사순시기는 주님을 닮는 시기라고 하지요. 그런데 지금 내 모습은 얼마나 주님을 닮았을까요?
주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주님의 뜻이 다른 사람을 향한 판단, 미움, 단죄가 아님을 잊지 맙시다.
아름다운 하루의 시작(작가 미상)
소리는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소리는 냄새로 알 수도 없습니다.
소리는 손으로 만져볼 수도 없습니다
소리는 혀로 맛볼 수도 없습니다
소리는 오직 귀로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눈을 감고 들어야 잘 들립니다.
이 아침, 사랑하는 사람에게 목소리를 전해보시면 어떨는지요!
향기는 코로 맛볼 수 있습니다
향기는 만지거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향기는 혀로 맛볼 수도 없습니다
향기는 촉감 없이 눈을 감고 코로만 느껴야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 해맑은 아침, 좋아하는 꽃향기에 취해보는 건 어떨는지요!
아름다움은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만지거나 코로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아름다움을 감상하려면
향기도 멀리하고, 감촉도 멀리하고, 맛도 멀리하고,
오직 눈으로만 봐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꽃은 바라만 볼 때가 아름답습니다.
메밀꽃은 보기엔 아름다운데 향기는 지독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깨끗한 눈으로 바라보는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꽃의 감촉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코로 맡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맛으로 알 수도 없습니다
꽃의 감촉은 오직 만져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촉은 눈을 감고 향기도 멀리하고 만짐으로써 느껴야 합니다.
꽃은 감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꽃은 향기로 말하는 것입니다.
꽃은 아름다움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꽃은 느끼는 것입니다.
진리도 이와 같습니다.
진리는 발전하는 방식이 따로 있습니다.
진리는 직접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꽃의 향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경험으로 맛보는 것입니다.
볼 것은 보고, 들을 것은 듣고, 향기로운 것은 향기로 맡는
아름다운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