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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4 : 4 나를 판단하실 이
고전 4 : 4 나를 판단하실 이 -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
바울은 모든 판단을 주님께 맡겼다.
사탄의 큰 전략의 하나는 하나님 일꾼들의 힘을 빼어 하나님의 일을 잘하지 못하게 한다.
낙망은 큰 시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말을 너무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충성해야 한다.
1]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업적을 판단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일체 귀를 닫고 산다는 뜻이 아니다. 나를 자책하게 하여 절망에 빠지게 하는 소리나, 나를 들뜨게 하여 교만하게 하는 소리를 듣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자신을 점검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자책하여 스스로 자신을 절망에 빠뜨리게 하지도 않고, 스스로 자신을 높여서 교만에 이르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만 생각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앞 절에서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라고 말한 이후 자신의 허물없음을 스스로 언급한 것이 궁색한 변명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롬 7: 19에 기록된 바와 같은 죄인의 고백을 염두에 두고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 롬 7: 19 -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도다.
바울은 원치 않는바 악을 행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만 했다.
그런데도 자신을 책망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칼뱅(Calvin)은 '책망할 것이 없다'는 것은 전 생애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의 직분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라이트푸트(Lightfoot)는 본 절을 단순히 가상적인 진술로 취급한다.
바울은 사실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에 빠진 자들을 책망하기 위하여 하나의 가정적인 전제를 제시하였다.
양자는 모두 나름대로 근거가 있으나 지도자의 직분과 권위를 설명하는 본 절에서는 전자가 보다 타당한 것이라고 본다.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사도적 사명을 수행하면서 태만이나 과오(過誤)를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Lenski).
2]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바울에게 있어서 의롭다함을 받은 '칭의'의 개념은 언제나 수동태로 나타난다.
본 절의 '의롭다 함을 얻지'의 헬라어 '데디카이오마이'(*) 역시 '디카이오오'(*, '옳게 여기다')의 수동태로서 의롭다고 판결하시는 그리스도의 판단을 시사하고 있다.
사도의 직무에 충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자신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고백은 철두철미하게 '이신 득의'에 근거한 것으로 자신의 충성도를 자랑하거나 비하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심판자이신 그리스도의 권위를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이 이행한 일을 정직한 것으로 판단하지만 심판자는 그 심령을 감찰하시고 판단하신다.
* 잠 21: 2 -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3]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인정하시는 것이다.
본 절에서 바울이 궁극적인 최후의 심판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점검한 것은 복음의 사역자 된 모든 시대의 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할 삶의 태도이다.
복음의 사역자는 스스로 책망할 것이 없는가를 살피는 삶 가운데서 칭찬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5절).
따라서 우리는 본 절에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초월성(超越性)과 모든 판단의 근거를 그리스도께 두는 바울의 겸손한 신앙 인격을 엿볼 수 있다.
바울은 사람의 판단을 크게 여기지 않았다. 우리가 사람의 이런저런 판단에 너무 마음을 쓰면 주의 일을 힘 있게 할 수 없다. 바울은 심지어 자기 자신도 자신을 판단치 않으며 스스로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한다.
성도는 범사에 양심적으로 살아 자책할 것이 없어야 한다. 바울은 모든 판단을 주님께 맡겼다. 우리가 바울처럼 행하면 어떤 환경 처지에서도 낙망치 않고 주의 일을 담대히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사탄의 가장 큰 전략의 하나는 하나님 일꾼들의 힘을 빼는 일이다. 낙망은 큰 시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말을 너무 의식하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며 충성해야 한다.
대개의 나라에는 삼심(삼심) 제도가 있다. 지방법원이 있고, 그 위에 고등법원, 최종적으로는 대법원이 있다. 우리를 판단하는 법정도 셋이 있다. 하나는 인간 법정이요, 다른 하나는 양심의 법정이며,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법정이다.
인간의 법정은 사람의 외적 조건을 가지고 판단하므로 정확하지 못하다. 열 길 물속은 볼 수 있어도 한 길 사람의 속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판단은 편견과 당파심이 있어 그릇된 판결을 내릴 수 있다.
인간의 양심은 사람의 판단보다는 정확하다. 그러나 양심에 대해서도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다. 사람의 양심이 귀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양심이 타락하고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침반은 항상 남과 북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 곁에 방해되는 조건이 있으면 그 바늘이 기울어진다.
양심의 바늘도 물욕이나 권력에 대한 욕심, 정욕에 대한 미혹이 있으면 그 영향을 받아 왜곡되기 때문이다.
여러분! 우리는 이웃의 나를 향한 충고에 귀를 열고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충고를 도무지 못 듣는 사람은 성숙할 수 없다. 잠언에 보면, 아름다운 충고의 축복에 관한 교훈이 얼마든지 있다. 이웃의 비판에 귀를 기울여 들을 줄 아는 귀는, 복된 귀다.
잠언서에 충고를 ‘모사’라고 개역 성경은 번역했다. 이 ‘모사 counselor’라는 단어가 우리 말 뉘앙스로는 아주 안 좋게 들린다. '모사'라 그러면 무슨 나쁜 일을 꾸미는 사람처럼 들리지만, 성경에는 ‘모사 상담자가 많으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라고 했다.
내 약점을 알면서,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따뜻하게 내 마음을 열고 나를 세워줄 줄 아는 이런 충고자, 이런 격려자, 이런 모사 counselor 친구들을 가진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이웃의 충고는 필요하다. 이웃의 객관적 관점에서, 내 인생에 대한 내 사각지대를 진단하고 비판해 줄 때 우리는 겸허히 귀를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단지 참고 사항일 뿐 내 인생에 대한 마지막 판단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이 잘못될 수가 있는 것처럼, 종종 이웃들의 나를 향한 판단도 거기에 편견이 있을 수 있다. 나를 향한 이웃의 판단, 그것은 결코 마지막 판단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이웃을 판단 할 때도 그래서 참 조심해야 한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성경은 그래서 판단의 악을 경계한다. 판단 때문에 서로 관계가 깨어지기 쉽다. 판단에는 항상 편견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도 심히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틀림이 없다. 하나님은 겉을 보지 않고 속을 보시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람의 행동을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그 동기까지 보고 판단한다.
우리는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다윗 왕이 밧세바와 간음을 했다. 그 죄를 가리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게 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 그를 회개토록 하였다.
내 삶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신 바로 그 분, 나를 창조하신 그 분, 나를 섭리하시는 그 분, 마지막 날 나를 심판하실 그 분, 그 분이야 말로 가장 완벽하게 그리고 가장 정확하게 그리고 가장 공정하게 나를 판단하실 주님인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그 판단의 마지막 때를 정확하게 그 분은 정하고 계신다. 그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그 분이 친히 여러분과 저를 판단하실 것이다. 그 때가 가까워오고 있다.
하나님의 판단은 현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이 있다고 증명한다.
* 계 20: 12-13 - 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 죽은 자들
* 계 20: 5 -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죽은 자'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 인류 전체를 의미한다(Beasley-Murray).
Ⓑ 첫째 부활은 오직 순교자에게만 제한함으로 본 절에서 나타난 죽은 자는 불신자들과 순교하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들이다(Mounce).
Ⓒ 첫째 부활을 그리스도에게만 충성을 다한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본 절에 나타난 죽은 자는 오직 하나님을 대적한 불신자들을 의미한다(Ladd, Johnson).
세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죽은 자들이란 바벨론의 모든 백성을 말한다.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아 하나님의 말씀인 하나님의 생명을 버리고 짐승들이 주는 선악과를 먹었으니 모두 다 죽은 자들이다. 이들은 생명책(生命冊)인 성경에서 자기들의 생명(生命)을 찾지 못했으니 자기의 이름들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2) 무론 대소하고
(3) 책들이 펴있다.
심판을 받기 위해 보좌 앞에 선 자들에게는 두 종류의 책이 펼쳐져 있다. 여기서의 두 책 중에서 행위를 기록한 책이 믿는 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행위를 기록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불신자들의 행위만을 기록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Johnson).
① 생명책
단수. 구원의 책. 소수. 이 세상에서 수많은 책 가운데 생명책은 성경밖에 없다.
'생명책'은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과는 달리 하나님 백성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다.
* 출 32: 32-33 –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3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
* 단 12: 1 -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 눅 10: 20 -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 빌 4: 3 -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이 책은 오직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만이 열 수 있는 책이다.
* 계 3: 5 -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 계 13: 8 -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 계 21: 27 -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에게 충성한 자들만이 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암시한다(Ladd).
② 다른 책
⒜ 행위를 따른 책들
복수.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인간의 행위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진다.
⒝ 심판의 책.
첫 번째 책은 단 7: 10을 반영한 것으로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이다.
* 단 7: 10 -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③ 기록된 대로 심판.
두 책, 즉 인간의 행위가 기록된 책과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함으로 구속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 사이에는 인간의 행위와 믿음이라는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상 아무런 문제가 발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위는 그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Johnson). 성경은 멸망 받을 자들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하나님의 심판 기준은 성경에 기록된 공의(公義)대로 행하신다.
(4) 죽은 자들을 내어준다.
① 바다. - 매장되지 않은 시체가 있던 곳.
당시에 시신이 매장되지 않았다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상징했다.
* 왕상 13: 21-22 – 21 그가 유다에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외쳐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22 돌아와서 여호와가 너더러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 하신 곳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셨으니 네 시체가 네 조상들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 왕상 14: 11 -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가 성읍에서 죽은즉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즉 공중의 새가 먹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하셨나니
* 렘 8: 1-2 – 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그의 지도자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주민의 뼈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2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그 뼈가 거두이거나 묻히지 못하여 지면에서 분토 같을 것이며
반대로 버려져 있는 시신을 매장하는 것은 가장 친절한 행위이며 신앙의 행위로 인정되었다. (Beasley - Murray). 이런 상황에서 바다에서 죽은 시체의 부활은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부활하며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② 사망과 음부.
'사망과 음부'는 죽음의 영역을 묘사하는 것으로 죽은 자들의 실재와 사람들이 죽음 후에 맞이하게 되는 상태를 나타낸다(Johnson).
'사망'은 전쟁, 기근, 역병 그리고 야생 짐승에 의해서 당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악을 상징한다(Beasley-Murray).
'음부'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하데스'(*)는 중간 상태에 있는 영혼들이 거하는 장소로 나타내기도 하며
* 행 2: 27, 31 – 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31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의롭지 못한 자들이 죽은 후에 가는 곳으로 나타내기도 하고
* 눅 16: 23 -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무덤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 계 6: 8 -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이러한 음부에 대해서 혹자는 단순히 죽은 자들이 거하는 처소라고 주장하나(Kiddle) 불의한 자들이 죽은 후에 가는 곳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다음절에서 의인화된 사망과 음부가 영원한 형벌을 받아 불못에 던져지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사망과 음부'를 지배하시며 통치하신다(Beasley-Murray).
* 계 1: 17-18 –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본문에서 '바다와 사망과 음부'가 죽은 자들을 내어 준다는 것은 흰 보좌에 앉으신 이가 심판하실 때에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육체로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을 시사한다.
(5) 행위 심판 - 자기의 행위대로.
본문은 앞 절의 반복이다. 흰 보좌 앞에 펼쳐진 책, 즉 모든 사람이 행한 행위에 관해 기록한 책대로 보좌에 앉으신 이는 그들의 행위를 심판하신다. 백 보좌 앞에서 책(冊)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