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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만양병설 조작’ 주장은 ‘율곡전서’ 판본 무지서 비롯 | |
이덕일씨 ‘노론사관 비판’에 오항녕씨 반론 | |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9회 ‘노론사관에 일그러진 조선후기사’(7월8일치)에 대해 충북대학교 우암연구소에 있는 역사학자 오항녕씨가 비평을 보내왔습니다. 순조때 ‘이문정→이문성’ 잘못 교정
‘주류학계를 쏘다’란 제목으로 역사학계에 던진 이덕일 소장의 문제제기를 보면서, ‘용기’라든가, ‘용감하다’라는, 어느덧 우리가 한켠으로 치워버리고 있던 가치나 기개를 떠올립니다. (아시다시피 이덕일의 사관은 저런 기개하고는 별 관계가 없죠.) 그러나 이덕일 소장의 대전제인, ‘식민사관과 연결된 노론사관이 주류학계’라는 주장부터 학계 현실과 다르다는 점을 확인해야겠습니다.
첫째, 본의가 애매하긴 하지만 대체로 ‘노론사관’이라면 노론이 주도적 정치세력이었던 조선후기를 좋게 평가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조선후기를 당쟁과 공리공담에 물든 정체기라고 선전했던 ‘식민사관’과 배치되게 마련이므로 둘이 결합하기 어렵습니다. 둘째, 80년대 이후 현재 학계는 대체로 자본주의맹아론-실학으로 대표되는 근대주의적 해석이 주류입니다. (아무리 바보라도 제살 깎아먹는짓은 안하는 법이죠.)
지금은 덜 하지만, 송시열 같은 서인-노론 인물을 연구하면 ‘노론’이라고 하거나, 성리학을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수구(守舊)’ 취급을 받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오항녕 교수는 소위 수구하고는 거리가 100만광년 머신 분입니다. -_-)당장 저만 해도, 근대주의를 벗어나 조선후기를 연구하자고 한다거나, 충북대 우암연구소 전임연구원이라는 ‘죄’로 서인-노론 출신이 아니냐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ㅠㅠ)그래서 유성룡이나 허목을 연구하면 남인 출신이냐고 반문하면서 허탈하게 웃곤 합니다.
그러니 정작 ‘주류학계’의 입장에서 보면 황당하겠지요? 이덕일 소장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잠잠한 것은, 역사학자들의 문제의식이 부족한 데도 이유가 있겠지만, 애당초 이 소장이 엉뚱한 곳을 쏘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말을 좀 상소리로 바꿔 보면, 학자들이 이덕일의 주장을 반박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는 말도 되지요.)아무튼 그 성찰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몇 가지 견해를 적어보았습니다. ‘이 문성’과 ‘이 문정’
먼저 십만양병설이 조작이라는 주장부터 보겠습니다. 이 소장은, 십만양병설의 근거는 이이의 문인인 김장생(金長生)이 편찬한 ‘율곡행장’ 뿐이고, 광해군 때 편찬된 <선조실록>에는 나오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이 주제를 다루면서 1948년 발간한 이병도의 <조선사대관>(朝鮮史大觀)을 인용하였듯이, ‘이병도 박사’를 매개로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이 연결되어 있다는 게 이덕일 소장의 관찰인데, 이 문제는 따로 논의하겠습니다.-이 문제는 초록불님 이글루만 가서 검색만 좀 해봐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십만양병설을 떠올리며 유성룡이 했다는, ‘이 문성은 참으로 성인이다.’라는 말을 조작의 증거로 들었습니다. ‘문성(文成)’은 이이의 시호이고, 유성룡은 이이의 시호를 내리기 17년 전에 세상을 떴으니, 행장이 조작이라는 것이지요. 이덕일의 이 주장 기억하라고 했지요?
헌데, 이항복이 쓴 이이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을 보면, ‘이 문성’이 아니라, ‘이 문정(李文靖)’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이의 시호는 ‘문성’이기 때문에 이항복이 잘못 쓴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항복 역시 이이가 시호를 받기 6년 전인 광해군 10년(1618)에 세상을 떴습니다. 그렇다면 이항복이 쓴 이이 신도비문마저 후일 누가 조작했거나 아니면 뭔가 사연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다시 확인해보니, 같은 김장생이 쓴 행장이라도, <율곡전서>에 실린 행장에는 ‘이 문성’이라고 되어 있지만, 막상 김장생의 자신의 문집인 <사계집(沙溪集)>에는 이항복의 신도비문과 마찬가지로 ‘이 문정(李文靖)’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찌 된 일일까요?
엉뚱한 사람을 쏜 선무당 -계속 예의 바르게 이덕일을 상대하고 계시지만 이 소제목에서 본좌의 분노가 느껴지십니다. ㅎㄷㄷ
그런데 이이의 시장(諡狀)을 지은 이정구(李廷龜)도, 십만양병설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이 문정(李文靖)은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했던 겁니다. 시장을 짓는 사람이 본문에서 당사자의 시호를 잘못 기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문정’은 실수가 아니라 뭔가 이유가 있는 기록이라는 말이라고 보는 편이 더 상식적입니다. 열쇠는, ‘이 문정’이 이이가 아니라는 데 있었습니다. ‘이 문정’은 바로 이항(李沆)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우왕ㅋ굳. 이덕일은 결국 엉뚱한 해석을 한 셈이 되었습니다.(지난 연재 참고)
이항은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진종(眞宗) 때의 명신(名臣)입니다. 송나라가 거란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자, 이항은 나라가 너무 편안하면 오히려 화근이 된다고 걱정합니다. 그리고 가뭄이나 홍수가 나면 꼭 진종에게 보고하여 일부러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항이 세상을 뜬 뒤, 진종은 나라가 태평하다는 것을 믿고 궁궐을 짓고 간신을 등용하는 등 국정을 어지럽혔습니다. 그러자 이항의 옛 동료였던 왕단(王旦)은 뒤늦게 이항의 선견지명을 인정하면서, ‘이 문정은 참으로 성인’이라고 칭찬합니다. 이후 이 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서 상투어가 됩니다. 그러니까, 유성룡은, ‘이이는 참으로 이항 같은 선견지명이 있는 성인이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백지원이라는 희대의 ㅄ이 자기 불쏘시개에서 변이중 화차를 만든 변이중의 비문에 '뜻을 펼치지 못하였다.'라는 것으로만 변이중이 기술자라 조선에서 대접받지 못했다는 희대의 드립을 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문의 '뜻을 펼치지 못하였다.'는 이 '이문성은 참으로 성인이다.'라는 말보다 더한 상투어로 그런 표현은 비문에 널리고 널렸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백지원의 개소리와 달리 변이중은 계속 벼슬자리에서 녹봉 받고 일하며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항복의 신도비명, 이정구의 시장, <사계집>에 실린 이이 행장은 모두 잘못 쓴 게 아니며, 유성룡의 말에 나오는 ‘이 문성’, 아니 ‘이 문정’이,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조작하기 위하여 김장생과 송시열이 기록을 날조하였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 문성’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이덕일 소장이 ‘조작’의 증거로 인용한 <율곡연보>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순조 14년(1814)에 간행된 <율곡전서>에는 ‘이 문정’이 아니라, ‘이 문성’으로 나와 있습니다. 현재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웹서비스를 제공하는 판본도 이 판본이기 때문에 거기에도 자연 ‘李文成’으로 나와 있습니다. 저와 이덕일 소장이 당초 근거로 한 자료가 바로 이 판본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조 25년(1749)에 간행된 <율곡전서>에는 ‘李文靖’으로 되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순조 14년판 <율곡전서>의 교정자가 이이의 시호가 ‘문성’이라는 건 알고, <율곡연보>에서 말한 ‘이 문정’에 대한 고사는 몰랐던 까닭에 ‘문정’이 틀린 줄 알고는 ‘문성’으로 덜컥 고쳤던 겁니다. 결론:사료에는 여러 판본이 있으니 몽땅 읽어보는게 학자적 자세
역사학자의 아포리아
선조 7년(1574), 이이는 황해감사로 부임하면서, 이원익(李元翼)을 군관(軍官)으로 수행하여 군적(軍籍. 요즘의 兵籍)을 정리하게 하였는데, 이후 황해도의 군적이 전국에서 가장 잘 정비되었다는 평을 듣습니다. 그런 이이가 선조 16년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십만양병’을 주장하는 것이 과연 그렇게 어색한 일일까요? 국방부장관이 국군정예화를 주장하는 것이 어색한 일일까요? 특히 이이는 특산물을 거두어들이는 공안(貢案) 개정을 주장하여 대동법의 물꼬를 틉니다. 비록 광해군과 대북세력에 의해 좌절되기는 했지만, 이원익은 이런 이이와의 인연으로 후일 광해군 초반 대동법 논의를 주도했던 것입니다. 이이의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보듯이, 민생과 국방, 모두 그의 개혁론에서 뗄 수 없는 구성요소였습니다.
이들 자료가 모두 서인 중심의 기록이므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기록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역사학자들은 종종 무력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텍스트’로서의 자료에 대한 문제는 역사학의 오랜 아포리아(難題)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 사료를 엮고, 상식과 합리적인 판단을 공유하면서, 진실에 더 가깝게 다가가려고 역사학자들은 노력합니다. 저의 비평도 그런 노력의 하나로 받아들여졌으면 합니다. 이렇게 분명 본문에 썼는데도 한겨레 댓글란에서 오 교수가 서인쪽 기록만으로 모든 걸 본다고 하는 양반도 있었죠. 그 전에 기사부터 제대로 읽으라고 하고 싶습니다.
반복되는 ‘날조’와 ‘조작’
조선후기가 왜곡의 유력한 증거로, 이 소장은 김장생의 ‘송강행록’을 들었습니다. 이 역시 시기를 잘못 본 데서 온 오류였으며, 김장생이야말로 이덕일 소장에게 느닷없이 매도를 당한 경우입니다.
이 소장은, 김장생이 날조했다는 근거로, ‘유성룡이 위관(委官:수사책임자)을 맡아 이발의 노모와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기록, ‘정철이 유성룡에게 왜 노모와 아이까지 죽였느냐고 따졌다’는 기록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소장은, 이발의 노모와 아들이 형벌을 받은 날짜는 선조 23년(1590) 5월 13일인데, 당시 유성룡은 어머니 이씨(李氏)의 장례 등의 이유로 조정에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있지도 않았던 유성룡이 추관을 맡아 사람을 죽였다고 김장생이 왜곡하였고, 이는 유성룡에게 허물을 뒤집어씌우려는 의도였다고 이덕일 소장은 주장한 것이지요. 여기도 기억하라고 말씀 드렸죠?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발의 노모와 아들들이 국문을 받다가 죽었을 시기는, 이 소장이 말한 선조 23년이 아니라 한 해 뒤인 선조 24년 5월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5월 경이었기 때문인지, 이 소장이 연도를 잘못 본 것이지요. 김장생의 기록처럼, 선조 24년(1591) 4~5월경 추국의 위관은 유성룡이었고, 5월 어느 무렵에 위관이 다시 이양원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때 정철은 이 해 윤3월에 이미 파직을 당한 상태였습니다. 파직 당한 정철은 5월에 진주(晉州)로 유배되려다가, 선조가 아주 변방으로 옮기라고 명령하여 강계(江界)로 유배를 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철이 추관을 맡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발 어쩌고 하는 기록은 기축옥사 때 일이 아니라 기축옥사 1년 후의 일이었다는 겁니다.
또한 정철과 유성룡이 나눈 대화의 의미도 이 소장의 주장과 상당히 다릅니다. 김장생이 쓴 송강행록을 보면, 이 소장의 말처럼, ‘유성룡이 이발의 노모와 어린아이까지 죽였다’고 한 듯한 기록이 있습니다. 김장생은, 정철이 유성룡에게, ‘이발의 노모와 어린 자식을 공은 어찌하여 죽였습니까?’ 하고 물었다는 기록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뒤의 기록을 읽어보면 다릅니다. 정철이 이렇게 묻자, “유 정승이 말하기를, ‘공이었다면 그들의 죽음을 구할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이 ‘나라면 구했을 것입니다’ 하자, 유 정승이 말하기를, ‘그럴 수 있었을까요?’ 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결국 문맥은, 이 소장의 단정과는 달리, ‘유성룡이 이발의 노모와 어린 자식을 죽였다’고 한 것이 아니라, ‘유성룡이 이발의 노모와 어린 자식을 구하지 못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오 맙소사! 저 위의 이문성 운운과 마찬가지로 이덕일은 사료에서 '보고 싶은 부분'만 취사선택하여 근거로 쓴 것이었습니다!! OTL
특히 김장생이, ‘유성룡과 이양원 등 또한 그 노부인과 어린 아들을 어찌 살려 주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결국 구해 주지 못한 것은 당시 형편이 그러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데 이르면, 실제 행록의 논지와 이덕일 소장의 해석이 얼마나 다른 느낌과 맥락을 보여주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유성룡에게 허물을 덮어씌우려는 말인지, 유성룡의 입장도 헤아려야 한다는 말인지는 삼척동자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개안습을 봤나 ㅠㅠ
이덕일 소장이 ‘노론사관’에 의해 왜곡된 조선후기사의 사례로 제시한 자료를 검토한 결과는 좀 허망하기까지 합니다. (제대로 허망합니다 교수님 ㅠㅠ)허망하다 못해 무슨 다른 의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제가 그런 왜곡을 걱정하는 이유는, 이미 그런 류의 ‘날조’와 왜곡이 낳은 결과를 식민사관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정책도, 이념도 없이, 권모술수와 음모로 점철될 조선후기사-이것이 식민사관이 주입하려던 표상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런 표상이 이덕일 소장의 글에서도 여지없이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이 소장의 시도가 논쟁의 물꼬를 트려고 했다는 점에서 언뜻 한 걸음 나아간 듯이 보이면서도, 조선후기사의 다양하고 역동적인 면모를 밝힌 학계의 연구와 문제의식보다 두어 걸음, 아니 서너 걸음 뒤처져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이덕일은 노론사관과 연결된 식민사관을 비판한다 어쩌니 하고 거창하게 나섰지만, 결국 스스로 이미 식민사관의 덫에 철저히 빠져 있던 셈입니다. 그리고 현 기득권에 대한 불만(이것도 좀 무지가 작용하긴 합니다.)은 역사에 대한 무지와 섞여서 조잡하고 어리석고 하찮기 짝이 없는 허튼 정의감9맹자에서 빌려오면 '수오지심')을 만들어 내어 일제 식민사관의 당파성론, 정체성론을 우리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덕일은 그거에 제대로 편승하고 있고요.
물론 이 책임이 이 소장 개인에게 있지 않습니다. 2009년 한국사회의 천박한 정치와 책임의식 없는 학문 수준의 반영일 것입니다. (이 말은 굳이 쓰실 필요가 있었냐는 생각이 듭니다.
끝으로, 당색을 떠나, 조선 시대를 이끌어갔던 학자, 관료, 정치가들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분들이 아니었음을 상기하고자 합니다. (알아보지도 않고 글이나 댓글 쓰며 교양서를 학술서라 착각하며 거기에 나온 후대의 단편적인 평가, 주로 식민지 시대에 형성된 평가를 근거로 엉뚱한 소리 하는 사람들보다는 훠얼씬 낳습죠.) 무엇보다도 조선 인민들이 사이비를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가졌던 자부심과 긍지라는 가치는 절대 날조와 왜곡을 기반으로 해서는 유지될 수도 없고 애당초 만들어질 수도 없는 그런 종류의 것입니다. 문득 우리의 얄팍한 안목으로는 당분간 조선 문명의 진수에 다가갈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누군가 저의 예감이 틀렸다고 위로해주었으면 합니다. 본좌께서 조선의 힘을 쓰시니 뭇 교화가 이루어지고 있으니 예감은 틀리시고 계십니다. ㅠㅠ |
그러니까 본문 요약을 해 보겠습니다.
1.이덕일이 주장한 율곡전서의 앞뒤가 맞지 않는 장면의 '이문성'은 율곡 EE가 아닌 송나라 때 인물이었다.
2.유성룡은 '이문성은 참으로 성인이다.'를 상투적인 어구로 사용했을 뿐이다.
3.이덕일은 순조때 율곡전서 판본만 보고 왜곡을 주장했지만 율곡전서는 여러 판본이 있다.
4.게다가 추가로 노론 까려고 꺼낸 기록은 기록 전체를 보면 전혀 그런 기록이 아니었다.
5.결론:이덕일은 엉뚱한 곳을 잡은 선무당에 비유될 수 밖에 없다.
이 반박기사로 이덕일은 물론 이덕일을 믿는 사람들은 경악하게 됩니다. 지난 회에서 이덕일이 근거로 내세웠던 사료들은 죄다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되거나 이덕일이 해독을 잘못 한 것들이었으니 말입니다. 좀 조심스레 말씀을 드려 보지만, 이덕일이 이런 식으로 전면적인 공세를 받은 적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오 교수의 반론에 반박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사이비 신세가 되어 버릴 것은 분명한지라,
이덕일은 다음 회에서 재반론을 시도합니다.
사견:이덕일은 그래도 박사학위까지 받은 정식 역사학자이건만 백지원 같은 자와 동급의 추태를 부렸다는 것은 저걸 다시 보고서야 깨달았습니다. 보고 싶은 자료만 찾아 취사선택하여 글 쓰는 것은 뭇 유사역자학자들의 행태와 다를 것이 없지 않습니까?
결론:이덕일은 박사학위 논문과 그 이후 쓴 근현대사 연구 빼고는 전혀 믿을만할 학자가 못된다.
아 진정한 학자의 자세다..... 화학 얘기면 나도 이런거 잘 할수 있는데(....)
오 정말 잘 읽었습니다 !!!
우와 출근길에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정녕 학자의 모습 ㄷ ㄷ
글감하고 갑니다....이덕일씨 한방 먹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