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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17 주일오전예배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산다’
성경/ 롬1:17
오늘 말씀을 천천히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기쁜 소식
‘복음’은 다른 말로 하면 기쁜 소식, 좋은 소식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나에게 진정한 기쁜 소식인가요? 지금 실현되기를 바라는 가장 바라는 좋은 소식이 무엇입니까?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쁜 소식, 곧 복음이 있습니다. 요즘은 증시가 아주 불안한 상황이라고 하는데, 주식 투자자들에게 기쁜 소식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투자한 주식 종목이 연일 상한가를 치고 있다는 소식일 것입니다. 현역군인에게 가장 큰 희소식은 무엇입니까? 전역일 것입니다. 회사원들에게는 승진이나, 생각지도 않았던 성과급 보너스 지급 같은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불치병 환자에게는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특효약이 개발되었다는 소식보다 반가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좋은 소식은 코로나가 종식되었다는 소식일 것입니다. 마스크 벗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기가 간절히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진정 기쁜 소식인가?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가 말하는 좋은 소식은 무엇입니까?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 용서받고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원수관계에 있던 자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사람들에게 복음으로 다가올까요?
우리는 지난 주에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던 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예나 지금이나 복음은 사람들에게 거리끼고 미련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이 복음이 믿어집니다. “(고전 1:22-24)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사람들에게 믿기 어렵고, 미련한 것이라 여겨지는 것을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바울은 그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오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었습니다. “(딤전 1: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고 과거를 고백했습니다. 스스로는 그것이 가장 하나님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정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고 가로막는 길을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똑똑한 머리로 그리스도를 대적했었기 때문에, 자기의 최선이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였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아무런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부르시고 은혜의 그릇으로 사용해 주셨습니다.
복음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의
이렇게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되는 근거는 이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안에 나타났기 때문에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거고, 그래서 자기는 이 복음을 한 없이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가 도대체 무엇인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는 다양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성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의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성품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자체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만유의 주인으로서 마땅히 다른 인격적 존재들에게 요구하시는 의입니다. 이 의가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의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진노의 대상이 됩니다. 하박국선지자는 하나님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합 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시편기자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 5:4-6) [4]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5]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6]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 하나님의 의는 주시는 의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가지신 의이고, 두 번째 하나님의 의는 상대방에게 요구하시는 의이고, 세 번째 하나님의 의는 주시는 의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인 인간에게 베푸시는 의를 말합니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이 죄인들을 미워하시고 싫어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에 나와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서서 예배할 수 있는가? 죄인들보다 자신은 훨씬 의로워서인가?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 5:7)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자신 안에는 의가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음을 절감하며 애통하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믿고 의지하려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로움입니다. 그를 은혜로 용납해 주십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였을 때 이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의라고 할 때에는 이 세 가지 범주가 존재합니다. 가지신 의, 요구하시는 의, 베푸시는 의입니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거룩함의 의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른 관계의 공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하나님 앞에 서는 자는 거룩을 요구받습니다. 레위기의 핵심이 이것입니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거룩하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의로움을 요구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이 요구 앞에 다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에는 율법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 외에’라는 말은 율법과 상관없이 나타난 것이라는 말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전체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율법 이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제시되었는데 이미 구약시대에도 이 믿음으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약시대는 율법을 잘 지켜 구원을 받고, 신약시대에 와서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복음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구약시대에도 구원을 얻는 방법은 믿음으로라는 것입니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을 의인으로 보신 것은 그가 의로워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게 보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나타납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함
이렇게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 이유는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이고, 이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처음 말하는 믿음과 나중에 말하는 믿음의 성격이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한다고 했는데 앞에서 말하는 믿음과 뒤에서 말하는 믿음이 같은 말이라면 아무 의미없는 말이 되고 맙니다. 믿음에서 출발하며 믿음을 목표로 한다는 것인데 보다 성숙하고 완전한 믿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성장과 성숙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단순히 성도가 하나님을 믿어 죄인이 의인 취급을 받는 세 번째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의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 믿으면 모든 죄 용서받고 천국간다는 것이 복음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르뱅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로운 결정을 강조하는 알미니안 주의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칼빈주의를 뒤섞어놓은 것이 아르뱅주의라는 신조어입니다. 내가 믿었으니까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생각하면서 내구 이후 무슨 짓을 하더라도 천국은 당연히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의에는 세 가지 범주의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가지신 의, 요구하시는 의, 베푸시는 의입니다. 그중 첫 번째, 두 번째 의미는 이제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시는데 우리는 거룩하지 않습니다. 절망할 수 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에게 예수의 십자가 은혜로 거룩을 주십니다. 하지만 이것이 복음의 전부가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 동의가 아니라 깊은 신뢰요, 함께 함입니다. 믿음은 더욱 성숙한 믿음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이 믿음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 바울사도가 예를 들었던 하박국선지자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예
바울 사도는 로마서 1장 17절 말씀 마지막에 하바국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기록된 바의 말씀이 하박국서의 말씀입니다. 하박국 2장 4절 말씀, “(합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을 좀더 풀어 설명하면 이런 말씀입니다. “세상은 늘 교만하고 부패하고 거짓이 판치는 세상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선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나온 배경은 이렇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주님이 오시기 약 600여년 전의 사람입니다(BC586년 예루살렘 함락, 유다 멸망). 이때는 북이스라엘은 이미 망하고 없고, 남유다도 외세의 위협을 받으며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놓여있을 때였습니다. 유다는 왕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타락할 대로 타락해 있었습니다. 시대가 어수선할수록 악인이 더 활개를 치고 득세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선지자로서는 참 독특하게 하나님께 항의를 합니다. 크게는 두 가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항변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지금 유다 내에 많은 악인들이 악을 저지르고 있는데 왜 심판을 안 하십니까?”하는 것이었습니다. “(합 1: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내가 바벨론을 들어서 유다를 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합 1:6)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이 갈대아 사람이 바로 바벨론 제국 사람들을 말합니다. 유다의 큰 죄악을 주변 강대국을 사용하여 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박국선지자가 또 하나님께 항의를 합니다. “아니 하나님, 어떻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상대적으로 의로운 사람을 벌하시는데 악한 바벨론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합니다. “(합 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지금 하박국선지자가 유다는 의롭고 바벨론은 불의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인생은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 하나님의 겉으로나마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과 관계있는 백성은 의로운 백성입니다. 그런데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지었기로서니 더 악하고 뻔뻔한 자들의 악행을 사용하셔서 징계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을 벌하기 위해 이 무자비하고 더 포악한 바벨론제국을 일으키시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악한 자를 심판하기 위해 더 악한 자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묻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대답을 요약하여 말하면 이것입니다. “바벨론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을 것이고 참된 믿음은 결국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합 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고 전제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반드시 때가 되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아주 더딘 것 같지만 정확한 때에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합 2:17) 이는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죽인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안의 모든 주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 결국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하게 될 것입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유다를 침략하여 멸망시킨 것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악한 욕망을 더 채우기 위해서 주변 나라들을 정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 다른 민족들에 의해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합 2:13-14) [13]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나라들이 헛된 일로 피곤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 아니냐 [14]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 모든 악한 자들조차도 결국 하나님만이 영광스럽고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날이 결국 오게 될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지금 그들의 욕심을 사용하여 잠시 유다를 징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악인은 악인대로 쓰임이 있고 의인은 의인대로 쓰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을 자처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나를 순종의 도구로 의의 도구로 드리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잠잠할 수밖에 없습니다. “(합 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성전은 하나님의 뜻이 가장 잘 나타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세상 가운데 정말 무력한 듯이 보이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이런 상황들을 죽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합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세상은 늘 교만과 속임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정직하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잘 살고 권세를 부리며 사는 세상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만하게 사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인이란 의로운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므로 하나님이 의의 옷을 입혀주신 자를 말합니다. 의롭게 되는 근거가 믿음입니다. 의인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치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의인은, 세상이 아무리 혼탁하고, 정의가 뒤틀리고, 나라가 풍전등화일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입니다. 의인은 현실을 보고 사는 자가 아니라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고야 마실 것입니다.
하박국은 이 사실을 비로소 깨닫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합 3:17-18)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나님께 감히 항변을 하던 하박국 선지자의 입에서 감사와 기쁨의 찬송이 터져나옵니다. 지금 하박국이 사는 세계에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걱정했던 문제들이 해결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박국의 심령 가운데는 파도처럼 밀려드는 희망을 엿보게 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이 한마디 말씀이 절망에 빠졌던 그가 다시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희망의 근거가 하나님께 있는 사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 보십시다. 바울사도는 로마서 1장 16절에서 자신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그 복음이 그것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에 대해 17절에서 말씀하기를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믿게 된 자는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집니다. 그리고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삶, 즉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으로 완성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자에게 주시는 구원과 관련된 희소식입니다. 예수 믿으면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다거나, 병에 안 걸린다거나, 사업에 성공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 있음과 없음을 판가름하는 기준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복음을 확고하게 믿고 의지하는 자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람은 또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세상은 갈수록 요동하고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온갖 유혹과 회의가 넘쳐난다 해도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견고하게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 유튜브에서 연예인 오윤아씨의 신앙간증을 보고 참 느끼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의 삶에 닥친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과 불행이 있었습니다. 특히 심한 자폐증세를 가진 아들 때문에 지금까지도 수많은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하지는 그것이 오윤아씨에게 온전히 하나님을 붙들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시련이 닥칠 때마다 간절한 기도로 이겨나갔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불행한 일이지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기회가 되고 온전히 하나님 바라보게 된 것을 진솔하게 고백하며 감사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많은 자폐아를 가진 부모들에게 큰 용기를 주고 소망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는 평신도이고 연예인이라는 많은 제약 가운데서도 깊은 영적 세계를 가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분이 우리의 완전한 신앙의 모델은 아닐 것입니다. 나름대로의 연약성과 불완전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성경역사상 믿음으로 살았던 신앙의 영웅들을 열거한 이후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히 12:1-2)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이 믿음의 원본이십니다. 완전한 모델이십니다. 그 예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 많은 신앙의 인물들이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박국 선지자와 같이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삶의 곤고함 가운데서도 진정 우리 인생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삶에서 결국 무엇이 남겠는가, 무엇이 남아야 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에게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내 인생이 만난 최고의 기쁜 소식이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불확실성의 시대 살면서 확신 있게 사는 방법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고 기쁜 소식입니다. 믿음에서 시작해서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 믿음으로 사시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찬양: 세상 흔들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