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린(逆鱗)
무릇 용이란 짐승은 길들여서 탈 수 있다.
그렇지만 용의 목 아래에는 지름이 한 척 정도 되는 거꾸로 배열된 비늘, 즉 역린逆鱗이 있다.
만일 사람이 그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용은 그 사람을 죽이고 만다. 군주에게도 마찬가지로 역린이란 것이 있다.
설득하는 자가 능히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그 설득을 기대할 만하다.
『한비자韓非子』 「세난說難」
용의 몸에 붙어 있는 81개 비늘들 중 딱 하나, 목 아래에 거꾸로 붙어 있다고 하는 비늘. 이 비늘을 건드리면 용이 날뛴다고 하는 일종의 급소.
유래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법가사상서 한비자 중 역린지화(逆鱗之禍)의 고사. 여기서 용은 나라의 왕이나 직장상사 같이 전권이 있는 지배층/윗사람을 의미하며, 그 사람의 눈에 들어서 실세가 되면 올라탈 수 있는 것이다. 역린이란 단어의 의미는 많이 확장되어 윗사람의 약점(아킬레스건, 콤플렉스, 흑역사) 혹은 윗사람이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권한을 뜻한다. 점점 의미가 확장되다 보니 이제는 윗사람이란 의미는 거의 퇴색되고 동등, 또는 하등한 지위이더라도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리는 경우에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역린은 용의 약점부위이며 누군가 이 역린을 건드리면 용은 그 역린을 건드린 사람을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반드시 죽인다고 한다.
역사적으로도 군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개혁정치를 추진하다가도 민감한 사항에까지 칼을 들이대는 바람에 왕의 분노를 사게 되어 결국 비명에 간 개혁가가 한 둘이 아니다. 아주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조광조. 토사구팽 당한 경우도 있지만.
서양에서 딱히 역린 전설은 나타나진 않지만, 드래곤의 몸에 딱 한곳 비늘이 없다는 이야기는 있다. 하지만 이곳을 건드린다고 날뛴다는 이야기는 없고, 그냥 찔러 죽인다. 사실 서양에서는 드래곤 뿐만이 아니라 유사하게 '권력'을 상징할 수 있는 대형 괴수들(거인 등), 심지어 신이나 신족조차 대개 이런 약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용과 드래곤이 별개인 것처럼 이런 전설도 각자 따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역린과 약점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그것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완전히 다르다. 역린이 '죽기 싫으면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이지만 드래곤의 약점은 '살고 싶으면 기필코 찔러야만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관련된 이야기를 보아도 확연히 차이가 나며 동양에서의 역린보다는 아킬레스건과 비슷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애초에 서양의 드래곤과 동양의 용은 그 대접이 조금 다르기에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양쪽 다 인간을 뛰어넘은 힘을 가진 강력한 초월적인 존재이지만, 동양의 용은 이무기가 오랜 고행 끝에 여의주를 얻어 각성한 신성한 존재로 신에 비유되는 반면, 드래곤은 재앙과 같은 존재로 인간의 적에 가깝다. 둘의 생김새도 달라서 동양의 용은 뱀에 팔다리와 뿔이 달리고 개처럼 튀어나온 주둥이를 가진 형상이다. 즉 동양의 용은 신성한 성수로 떠받드는 존재이며 서양의 용은 사악한 마수로 맞서 싸워 극복할 존재에 가까운 것.
요즘엔 굳이 이런 상하관계가 아니라도 어떤 사람이나 물건에 대해 함부로 건드리거나 논란거리가 될 만한 민감한 주제를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인다. 누르면 발작한다고 해서 "발작버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건드린다면 키보드 배틀은 물론이고 현피까지 해야 될 수도 있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