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놀라게 미국인 친구의 조심성
지난 주였습니다. 한 미국인 사진작가와 작품을 작업하면서 작품 설치 동영상을 한 박물관에 보내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동영상 분량이 길어 이메일로 보내기 힘들 것 같던 차에 저는 '유튜브(www.youtube.com)'에 올려 링크를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 는 의견을 냈고, 그녀는 좋은 생각이라며 찬성했습니다. 저는 그녀를 위해 YouTube(구글) 사이트 가입란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름, 거주 국가, 우편 번호, 생일, 성별뿐인 유튜브 가입 절차
구글 가입? 무서워서 못 하겠어.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가입을 해야할 지 말 지를 고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를 묻자, 왜 이렇게 많은 정보를 전송해야 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너무나 단순한 가입 절차였습니다. 기껏해야 거주 국가, 이메일 주소, 생일, 성별 정도 뿐이지만 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성별을 여자 대신 남자로 넣고, 생년월일을 엉뚱한 년도(1월 1일)로 넣고서야 가입을 끝냈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 왜 정보를 거짓으로 적는 거야? 혹시 네 부모님이 변호사이다 보니 개인 정보 공개에 조심스러운 거야?"
- 뭐 그런 이유도 없잖아 있겠지. 그런데 무섭잖아.(But, it's creepy.)
-무섭다고?(얘가 왜 이래? 장난 하나?)
그녀는 자신의 생일과 이메일 주소를 공개하는 것에 무섭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의미 심장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 이 회사(유튜브)가 내 개인 정보 절대 다른 곳에 공개 안하는 거 맞지? 너 확신할 수 있어?
- .....(황당)....
저는 그 질문에 자신있게 '응!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야.' 라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는 툭하면 인터넷 사업자가 수집한 정보를 타인에게 팔거나, 실수로 유출되는 사건이 심심찮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대기업마저도 말이죠. 이렇게 공개된 개인 정보는 금융기관 해킹, 광고 전화, 타국인의 국내 사이트 가입 등 전방위적으로 악용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지마켓 뻘인 미국의 아마존. 배송을 위한 주소/신용카드 정보를 요구하지만,
주민등록번호(SSN)는 절대 요구하지 않는다. 덕분에 한국인들도 손쉽게 가입하곤 한다.
이메일, 주소 정보가 전부인 미국 인터넷
하지만, 미국의 경우 개인 정보의 수집은 위의 예처럼 기껏해야 이메일 주소, 성별 정도에 한정됩니다. 집 주소나 핸드폰 번호도 함부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요구하더라도 필수 입력 사항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미국에서도 우리나라의 주민등록번호와 흡사한 사회보장번호(social security number)가 있지만, 이는 통신사 전화 개통이나, 관공서에서 서류 조회등 한정적인 경우에 단발성으로만 사용되며, 이러한 경우에도 '왜 사회 보장 번호가 필요한지에 대해서..' 라는 설명을 넣어 고객의 불안감을 없애려 노력합니다.
휴대폰 가입의 경우엔 신용정보 확인이 필요하다.
당연한 것이지만 왜 주민번호를 요구하는지 친절히 도움말을 링크해놓는다.
(애플 아이폰 가입 화면 모습)
뼛속까지 공개해야 하는 한국 인터넷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어떨까요? 최근엔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많은 웹 사이트에서 주민등록번호, 집 주소, 핸드폰 번호를 요구합니다. 게다가 인증코드를 핸드폰에 발송하여 정확한 입력을 하지 않으면 본인 확인을 해 주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이런식으로 수집된 정보는 결국 그들의 데이터베이스에 고스란히 저장되고, 아무리 이용 약관에 개인 정보를 조심스럽게 다룬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그 회사의 어떤 직원이 흑심을 품고 어떻게 할 지는 사실 아무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정부는 그러한 부분에 대한 제한 조치를 하기는 커녕 인터넷 실명제를 해야 한다고 아이핀 등의 서비스를 도입해 더더욱 개인 정보를 인터넷에 등록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스팸전화? 거의 없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미국에 5년동안 거주하면서 불필요한 광고 메시지나 전화를 받은 일이 거의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하루에도 5-10차례 날아오던 대출, 부동산, 경품 관련 문자나 광고 홍보 전화를 기껏해야 한 달에 5건 이하로 받습니다.
가입 1단계부터 주민등록번호를 토해야 하는 국내 포털 사이트.
3년 징역이라고 겁을 주지 말고, 애초에 요구를 하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휴대폰 인증, 또 다른 소외 계층을 만든다.
주민등록번호나 휴대폰 인증이 문제인 이유는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해외 거주 한국인, 혹은 한국 내 거주 외국인들은 이러한 웹 사이트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인증할 핸드폰이 없거나, 주민 등록 번호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핸드폰 없이 사는 사람들도 종종 볼 수 있는데, 그러한 사람들은 서비스 이용에 엄청난 제한을 받게 됩니다. 도대체 국가가 휴대폰을 지급하는 것도 아닌데, 왜 휴대폰 번호가 있어야 사용 가능한 서비스를 만드는 걸까요?
미국 최대의 포털 서비스 구글. 몇몇 특정 서비스(쇼핑 등)를 제외하면
추가 정보 입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트위터나 페이스북등 외국 사이트에 자유롭게 가입합니다. 하지만, 거꾸로 미국인들이 싸이월드, 네이버 등에 가입하고 싶다면 어떻게 될까요? 한글 읽을 수 있어도 가입을 못 할 것입니다. 미국에서 사용되는 운전면허증이나 신분증을 팩스로 보내 일주일 정도 기다리고, 국제 전화로 상담원과 통화할 불편을 감수할 수 있다면 모를까요. 국내 인터넷 산업이 파죽지세로 성공하다가 하락세를 겪은 이유 중 하나는 주민등록 번호와 핸드폰 등 무분별한 개인정보 요구도 한 몫 하는것이 분명합니다.
정부 차원의 조치 필요
아마도 기업에서는 이런 답변을 내 놓을 것입니다. 개인 정보를 거짓으로 입력하고 악용하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서라고 말이죠. 하지만, 이메일 인증만으로 서비스를 쓰는 사람이 가입한 사람이 맞는지는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ip주소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유사시엔 그 정보를 토대로 문제가 있는 사람을 잡을 수 있습니다. 결국 주민등록번호, 휴대폰 번호 요구는 기업체가 더 많은 개인 정보를 수집해 자신들의 목적에 맞는 용도로 이용하겠다는 것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여러분이 가입한 웹 사이트를 잘 살펴보세요. 기껏해야 게시판의 글만 읽고 뉴스를 읽기 위해서 주민등록번호와 휴대폰 정보를 기입하지는 않으셨나요? 무분별한/불필요한 개인 정보 공개를 원하는 기업은 소비자가 나서서 반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