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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를 무론하고 부모된 자로서 가장 큰 고민은 자녀의 양육 문제일 것이다.
단순히 먹이고 입히는 문제부터 학습과 상급학교 진학과 진로문제에 이르기 까지
우리네 부모들이 고민해야 하는 문제가 너무나 많다.
아이를 잘 키우는 문제에 대하여 개념과 방법론에 관한 서적은 무수히 많지만
어느것 하나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이마다 타고난 기질과 성품이 다르고
그들을 양육하는 부모의 기질과 성품이 다르며 부모의 교육정도와 직업, 경제력,가족구성원,생활하는 지역등
개별차가 워낙 크기때문에 통계와 경험 만으론 단정지어 이렇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누군가의 경험을 통해 그럴 수도 있겠구나 라는 자녀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나는 나의 경험이 그리스도인 부모와 특히 교회에서 많은 사역을 감당하는 부모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아이들을 통해 더욱 낮아지는 훈련을 하게 되었고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끊임없이 각성하며 주님앞에 나아가게 되었다.
나에게는 94년생 딸아이와 2001년생 딸아이가 있다.
첫째아이가 태어나고 4살까지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26평 아파트도 장만하였고 누가 보든 예쁘게 사는 가정이였다.
그러나 97년 IMF 가 터지면서 회사는 부도가 나고 보증섰던 것이 문제가 되어 끝없는 수렁에 빠져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나에게는 안면마비가 왔고 장골염으로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결국 아파트를 처분하고 10평 짜리 지하를 얻어 이사를 했다.
남편과 나는 그동안 살아온 어느때 보다도 가장 처절한 기도를 했던것 같다.
도무지 길이 없었다.
가는 회사마다 문을 닫고 일한 월급은 떼이고 나는 몸이 너무나 아파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형제들과 친지들은 외면하였고 하나님 말고는 의지할 대상이 없었다.
주님 어떻게 해야하나요?
주님은 남편을 부르셨다.
청년시절부터 있었던 부르심에 대하여,
여러가지 수많은 영적 체험들에 관하여 멘토로서 이끌어 줄만한 신앙의 선배가 없었고
후원해줄 가족이 없었던 남편은 그동안 사명을 잊고 있었다.
나와 결혼해서도 남편은 사명에 관한 이야기를 한적이 없었으며
나 또한 사모의 길을 꿈꿔 본적도 없었다.
왜냐하면 부모님의 사역을 보면서 나는 그것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었고
나에겐 사명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과거가 어떠하든 하나님의 강한 부르심과 섭리는
결국 우리의 삶을 바꿔놓았다.
남편의 신학공부가 시작이되었고 나이가 있는지라 신학을 시작하면서 바로 전도사 생활도 함께 시작하였다.
사실 나는 청년때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신학과가 아니고 유아교육과 였지만 전도사 고시를 보고 전도사 자격을 갖고 있는 상태여서
남편과 함께 전도사가 되었다.
그 와중에 2001년 둘째 딸아이가 태어났다.
난 너무나 힘들었다.
34살이라는 나이와 좋지 않은 건강상태에서의 출산,열악한 생활 환경과 너무나 적은 수입.....
지하에서 5년을 살았다.
벽은 온통 곰팡이가 피어 시커멓고, 비가오면 벽으로 빗물이 타고 내렸다.
2년의 전도사 생활동안 월급은 한번도 받지 못했다.
교회제정이 어려워서..
남편은 원래 기계설계기술자였다.
간간이 아르바이트가 생기면 일을 나갔고, 나도 부업과 외판업등 가능한 일들을 찾아서 했다.
큰아이가 3학년이었던 어느날
함께 외출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난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이는 조용히 말했다.
" 엄마 사랑하는 척 않해도 돼"
나는 순간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아니 무엇인가 훔치다 들켜버린것 같았다.
힘들다는 이유로
바쁘다는 이유로
나는 큰아이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아니 이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든 사람인양 그렇게 허덕이며 나만 생각 했었다.
그런데 힘든 세월은 큰아이에게 고스란히 삶으로 스며들어 그늘로 자리잡았다.
함박웃음으로 밝게 웃으며 우리에게 기쁨을 주던 아이였는 데
어느새 무표정하고 말없는 아이로 내 앞에 서 있다.
아! 하나님!
어찌하나요.
이 아이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한 저의 죄를 어찌하나요.
그 날 이후로 나는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 감정을 표현했다.
엄마가 너를 사랑한단다. 수백번이라도 말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어색하다.
이미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와 너무 멀어져 버렸다.
엄마가 아이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이렇게 어색하다니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인가.
유아교육과를 졸업하고 큰아이 임신해서 까지 유치원 근무를 했는 데
난 얼마나 위선적이며 강팍한 사람인가.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딸아.
엄마가 너를 정말 사랑한단다.
엄마를 용서해다오......
곰팡이 가득한 집에서 5년을 사는 동안
아이들은 천식과 아토피로 고생을 했다.
특히 큰아이는 천식때문에 응급실도 자주가고 학교 결석을 많이 해서 수업일수가 부족할 정도였다.
우선 이사를 하기로 했다.
월세를 더 내더라도 아이들에게 좋은 환경을 주고 싶었다.
보증금 800만원에 월 35만원 월세 집을 얻었다.
2층이라서 햇볕도 잘 들어오고 방이 두칸이라 아이들만의 방을 따로 줄 수 있었다.
아이들은 너무나 좋아했다.
우선은 자신감을 좀 얻은것 같았다.
집이 넓어지니까 마음도 한결 편해지는 것 같다.
나는 큰아이가 학교갈때 문 앞에서 뽀뽀를 해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이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마음의 거리를 좁힐 수 없을 것 같아
아침마다 입에 뽀뽀를 해 주었다.
아이도 처음엔 어색해 했지만 나중에는 자기가 문앞에서 뽀뽀해달라고 기다린다.
자연스럽게 스킨쉽도 늘어났다.
말 수가 적고 내성적인 성격이 내 탓인것 같아 늘 마음이 아프다.
작은 아이는 돌연변이다.
무지하게 말도 많고 사교성이 좋아 온 동네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한마디로 씩씩이다.
사람을 좋아하고 말하는 것을 좋아해서 누구를 만나던 3분이면 친구가 된다.
그런 작은 아이에게도 아픔이 있었다.
2층으로 이사할 무렵 남편의 사역지가 집 가까운 교회로 옮겨 졌다.
처음에는 간사로 활동하다가 목사 안수를 받고나서
교육목사로 사역을 했다.
규모가 작은 교회라서 4년을 사역하는 동안 평균 50만원의 사례비를 받았다.
처음에는 남편과 내가 함께 유초등부를 맡아서 사역을 했고
중고등부가 생긴후에는 남편은 중고등부를
나는 유초등부를 맡게 되었다.
왜 그렇게 바빴을 까?
주일학교 모임, 교사 모임, 심방, 친교모임, 예배.....
교회에서 모임이 있는 시간이면 집사님아이들 몇명과 우리아이둘이 함께 우리집에서 놀도록 했다.
다행히 큰아이가 다른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나이라서 집사님들도 우리집에 자기 아이들을 맡기기 원했고
우리 큰아이가 아이들을 잘 돌보아 주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사역을 핑계로 너무 자주 아이들 끼리 있도록 했고
그것이 아이들에게 어느날 부터인가 스트레스가 되었다.
작은 아이가 5살이던 어느날 부터인가 아이는 매일 밤 엄마와 같이 자고 싶다고 떼를 썼다.
아이들은 따로 자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남편은 아이를 나무랬고
아이는 점점 더 심해 졌다.
큰아이로 인한 경험 때문에 나는 작은아이를 눈여겨 보기 시작 했다.
작은 아이의 행동이 점점 이상해 졌다.
벽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기도 하고 눈의 촛점이 흐려보일 때도 있고
유난히 안절부절 하며 불안해 보일때도 있었다.
밤마다 작은 아이는 아빠와 전쟁을 했다.
성격이 급하고 불같은남편은 아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아이가 엄마를 너무 밝혀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을 했다.
2006년 12월에 섬기던 교회를 사임하였다.
개척할만한 어떤 준비도 없었지만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으로
2007년 8월 6일 수요일날 첫예배를 드림으로서
남편과 나는 단독 사역을 시작하였다.
매일밤 우리 부부는 교회에 가서 기도를 했다.
개척교회니까 사람도 만나고 전도도 하고 여기저기 뛰어야 할것 같은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요구 하셨다.
밤에 잠을 자려고 누우면
잠이 오지않아 뒤척이며 밤을 꼬박 세우기를 며칠...
기도를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밤마다 남편과 함께 교회에 가서 12시 기도회를 했다.
어느날 밤
이날도 기도를 하기위해 교회에 갔다.
그런데 작은 아이가 울면서 전화를 했다.
" 엄마 나 무서워"
작은 아이의 말이 예사롭지 않다.
이때 작은아이가 7살이었다.
나는 기도를 마무리하고
남편보다 먼저 집으로 왔다.
아이는 벌써 많이 울었나보다.
아이의 잠자리를 봐주고 옆에 같이 누워서 아이를 안아주었다.
"엄마 ,
나 하고싶은 말이 있는 데 얘기 들어줄수있어?"
개척을 준비하느라 분주해서 한동안 아이와 얘기를 길게 못했던것 같다.
"그래 해봐. 오늘 밤은 엄마가 너 잠들때 까지 옆에 있을께"
아이는 너무나 좋아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작은 아이는 자기의 머리속에 다른 아이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애가 자꾸 이상한걸 시키고 그걸 하지않으면 몸을 괴롭힌다는 것이다.
그애가 언제부터 있었냐고 물으니까
5살 부터란다.
어느날 인가 엄마랑 자고 싶다고 했다가 아빠에게 많이 혼나고 나서 그 애가 머리속에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애는 작은 아이에게 엄마와 자고싶으면 자기가 시키는 데로 하라고 했다.
밤마다 울게 하고 떼를 쓰게 하고 그러더니 점점 강도가 심해졌다.
욕실에서 까치발 뛰기를 시키기도 하고
문틀의 먼지를 손가락으로 찍어 먹으라고 시키고
손바닥으로 벽을 문지르라고 시키고
몸을 비틀도록 시키고...
처음에는 작은 아이가 재미있어 했단다.
마치 친구처럼 그렇게 그애와 대화를 하며 놀았고 시키는 데로 따라 했다.
그런데 점점 그 애가 난폭한 것을 시키기 시작했다.
작은 아이는 두렵기도 하고 그렇게 하면 않될 것 같기도 하고 해서 그 애의 말을 거부하면
그애는 우리 아이의 몸을 괴롭혔다.
마치 온 몸이 전기가 오르듯 찌릿 찌릿 했다고 한다.
작은 아이가 그애를 거부할 수록 더 심하게 괴롭혔다.
그런데 오늘 결정적으로 그 머릿속 아이가 작은 아이에게 무서운 협박을 했다.
자기 말을 않들으면 너의 엄마를 죽이겠다고...
그래서 작은 아이는 너무나 무서워 나에게 전화를 했고
결국 이 일을 알게 된거다.
왜 진작 이야기 하지 않았냐고 하니까 엄마 아빠가 너무 바쁘고
또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는 것이다.
이 어린 아이가 악한 영의 장난에 얼마나 힘들 었을 까
그것도 3년 가까운 기간동안 악한 영에게 조종 당하며 협박 당하는 동안
이상한 행동 한다고 엄마 아빠 한테 혼나기만 하고........
그 두려움과 답답함을 어린 아이가 혼자 견뎌내며 겪었을 고통을 생각 하니
울음이 터져나왔다.
손이 떨렸다.
가슴이 미어졌다.
어떻게 기도한다는 부모가 악한 영이 자기자식을 농락하는 것도 몰랐을 까....
너무나 마음이 아팠고 한편으론 악한 영의 짓이 너무나 괘씸했다.
당장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했다.
악한 영을 꾸짖고 나가라고 명했다.
작은 아이는 머리속 아이가 회리 바람속에 날라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보인다고 했다.
작은 아이에게 악한 영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도록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아이가 잠들 때 까지 안아 주었다.
남편이 기도를 마치고 돌아왔다.
나는 작은 아이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 했다.
이야기 하는 동안 눈물이 계속 흘렀고
이야기가 끝나자 남편은 통곡을 했다.
아이가 겪었을 고통과
부모로서 아이가 악한 영에게 당하고 있을 때 그것을 알지못한 것과
목회자로서 가정에 악한 영이 장난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과
그리고 가장 마음 아픈것은
악한 영에게서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남편과 나는 한동안 말을 못했다.
그날 밤은 그렇게 날이 밝았다.
다음날 부터 우리는 가족모두가 작은 아이를 위해 기도하며 따뜻한 안식을 주고자 노력했다.
혼자있게 하지않고 최대한 마음이 편해지도록 했고
악한 영과 대적할 수 있도록 힘을 주었다.
남편이 교회에서 작은 아이를 품에 안고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보았다.
작은 아이가 5살때 매직파마로 단정하게 단발머리를 했었는 데
그 단발 머리를 하고 퍼데기로 인형을 등에 업고 있었단다.
그래서 남편은 등에 있는 인형을 버리라고 야단을 했고 작은 아이가 울며 떼를 쓰다가 인형을 버렸다.
그런데 퍼데기를 꼭 쥐고 놓지 않길래 결국 그것도 버리도록 했다.
환상중에 작은 아이는 퍼데기를 벗어버리고 만세를 불렀다.
남편은 기도중에 환상을 통해 작은 아이를 괴롭혔던 악한 영과 싸운 것이다.
그 후로 작은 아이는 차차 안정을 찾았다.
밤마다 우는 것도 없어졌고 이상한 행동도 조금씩 사라졌다.
버릇이 되어버린 행동도 있지만 그것도 천천히 고쳐나갔다.
가끔 물어보았다. 그 머릿속 아이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 지...
어쩌다 나타나기는 하는 데 자기가 무시를 하니까 이젠 안나타난단다.
2008년에 지하로 다시 이사를 했다.
개척교회를 하다보니 제정이 없어서 보증금을 줄여야 했다.
300만원에 월세 30만원짜리 지하 단칸방이지만 처음 지하로 이사 갔을 때하고는 많이 다르다.
10여년 동안의 연단과 고통가운데 우리는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누릴수 있는 평안을 얻었다.
바람하나 없는 잔잔한 호수처럼 우리 가족은 그렇게 모든 상황에서 자유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은 작은 몸으로 모든 연단을 부모와 함께 겪어냈다.
나름의 체험을 통해 믿음이 성장하였고
아이들은 빨리 주님이 오시기를 고대한다.
이 세상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주님나라에 대한 소망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기 스스로의 신앙을 든든히 하기 위해 노력한다.
하나님 나라는 부모의 믿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믿음으로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일반적인 아이들이 누리는 일상도 누리지 못하고
많은 부분을 포기하며 자라고 있지만
자기들은 너무나 행복하다고 당당하게 말할수 있는 아이들이다.
올해 내 생일날
큰 아이가 기도를 하면서 우리가정에 태어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말에 너무나 기뻤다.
나는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이 많았었고 나름 공부도 많이 했다.
그래서 주일학교를 섬길때 젊은 집사님들이 나하고 얘기 하기를 좋아했다.
공부를 잘하게 할려면 어떻게 하고
아이와 의사소통은 어떻게 하고
형제간에 어떻게 균형을 잡아주고
특기를 어떻게 살려주고
자존감을 어떻게 키워주고
가능성을 어떻게 발견하고.........
그래. 아이를 키우려면 다 중요한 이야기다.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주일학교 사역을 하고
부모 카운셀링을 했던 지난 날이 너무나 부끄럽다.
어쩜그렇게 어리석었을 까.
우리의 아이들을 돌아보자.
알마만큼 신앙인으로서 서 있는 지.
사단은 우리의 아이들을 집어삼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우리가 바쁘다는 이유로
사역자의 가정이니까
교회를 잘 다니고 있으니까
내가 기도 많이 하니까......
라는 생각으로 아이들의 개인적 신앙에 대하여 소홀할 수 있다.
또
학교와 학원, 시험공부, 진학, 진로문제가 더 시급한 문제로 여겨 질 수 있다.
그래서 그것들이 더 구체적으로 아이들의 삶 전반적인 문제로 자리잡아
신앙의 문제를 심각히 생각할 겨를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하라.
주님이 곧 오신다는 것을 ....
우리의 아이들이 학원에 매여있는 동안에
컴퓨터 게임에 빠져있는 동안에
이성친구와의 교제에 몰입되어 있는 동안에
대학의 술문화에 젖어 휘청거리는 동안에
좋은 직장을 찾아 이리 저리 헤매는 동안에
돈 많이 버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목표가 되어버리는 동안에
주님은 호령나팔 소리와 함께 준비된자를 부르러
이땅에 오신다.
나는 기도많이하고 준비되었다고 치자.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좋은 대학,
좋은 직업,
출세, 명예,부귀를 좇아가도록 교육받고 있는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기적이며 반 도덕적이며
불법을 동원해서라도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면 된다고 배우는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모든 것을 다 얻고도 주님나라에 가지 못한다면
생명책에 그 이름이 녹명되지 못한다면
불쌍한 우리의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부모들이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주님의 말씀처럼
자녀를 위하여 울라.
최종적으로 가야할 나라.
아버지의 나라.
곧 다시 오겠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정말 곧 오실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되었는 가?
당신은 당신의 아이들이 지옥에 가도록 그냥 내버려 둘 것인가?
부모들이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주님 곧 오신다.
주님 다시 오십니다...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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