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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bling (옹알이 )방언 기도를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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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ANATHA
2021. 7. 17.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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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은 어떤 영적 체험이 있으신가요? ( I )
지난 겨울 휴가를 지나며 동료 선교사들과 이러저런 대화 끝에 “현대 방언이 비성경적, 비진리” 라는 이야기를 하자 한 선교사님은 대뜸, “선교사님은 어떤 영적인 체험이 있으신가요?”라고 질문을 하였다. “체험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 는 식의 논지였었다.
사실 예수를 믿고 체험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여기 질문의 요지는 방언같은 영적 카리스마틱 직접 체험을 묻는 것이었다. 소위 옹알이 기도방언을 한다는 분들은 이것이 성경적이 아니라고 하면, 대부분 뭔가 다른 의견에 대해 배우려는 것 보다는 “체험도 없고, 신앙도 없이 머리로만 판단하여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 마귀의 도구, 너나 잘 믿어라! 빨리 성령님께 회개 해라!” 라고 단죄하고 역공하기에 급급함을 본다.
새로운 사역지 우간다에 도착하여 한 주 정도 수도인 캄팔아에 머물며 여러 기관에 인사도 하고 리써치를 하였다. 그런데 밤마다 인근 교회에서 앰프의 보륨을 최대로한 앰프소리, 찬송 소리와 기도 소리가 진동을 하였다. 물론 모든 교회가 그러리라고 보지 않지만, 가는 곳곳마다 비슷한 현상이 많았다. 성령 충만한 예배 현장에서 치유, 방언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도대체 성령 충만이란 무엇인가? 과연 성령 충만한 예배 현장이라면 남들이 불편해하든 말든 잠을 자든 말든 상식 밖의 행동이나 소리를 맘대로 질러도 되는가? 성경 어디에도 그런 성령님을 찾을 수 없다.
모든 종교에 나름대로 치유가 있고 방언 현상이 있다. WCC에서도 성령을 통해 연합을 강조하고 카톨릭에서도 방언, 성령쇄신운동을하고 카리스마틱 기독교 목사들과 연합하여 함께 피정을 하고, 이슬람이나 불교도들도 치유를 하고 방언을 하고, 조상숭배와 기독교를 섞은 아프리카 독립교회도 황홀경에 들어가 몸의 떨림, 알아들을 수 없는 Babbling 옹알이 방언기도가 기본이다.
최근 방언을 잘 하는 한 동료 선교사가 "선교사님은 기도를 얼마나 오랫동안 하세요?" 라고 물었다. 실제 내 삶에 기도 생활이 약점이 나에게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도대체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를 얼마나 오랫동안 해야만 하는가? 예수님이 뭐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가?
“예수께서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6:7)
여기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쐐기를 박으시고는 “저희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는데, 말을 많이 오랫동안 해야 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저희를 본 받지 말라 구하기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8)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너희는 저희를 본 받지 말라!” 라고 아주 강한 톤으로 확실하게 쐐기를 박으신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일 지라도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meaningless Babbling,옹알이) 방언에 빠질 수 있고, 본받을 가능성을 우려하고 철저히 경계한 말씀이다.
현재 고신, 총신, 합신, 통합등 보수 교단 교회와 교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대부분 다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이 Babbling 을 일반 방언 기도로 정당화하고 전혀 문제가 없는 것처럼 교육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고린도교회를 초토화시켰던 동일한 영적 진리 문제로,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고 있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고린도 교회에 침투하여 하나님의 기도 방언 은사라며 혼란에 빠뜨렸고 현대 교회에 침투하여 하나의 은사로 자리 잡은 Babbling방언기도가 바로 예수님이 친히 제자들에게 경계하신 그것이 아닌가? 방언의 바른 진리를 찾기 위해 노심초사 37년 간의 노우호 목사의 연구나 바른 믿음(Good-Faith)에 귀한 글을 계속 기고하시는 여러분들의 노력은 참으로 위대하고 귀한 일이다.
I. 주석 설교를 통해 방언기도가 비성경적임을 발견하다.
나는 20대 때 이 방언 기도를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라는 청년회 헌신예배 총신 출신 강사의 설교에 대해 “성경에 어디 그런 내용이 있는가?”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 때문에 청년 회장직, 집사직을 내려놓고, 정들었던 교회를 떠나야만 했던 아픔이 있다. 이 정답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이 문제와 씨름을 하였지만 찾지 못하다가 사도행전부터 시작한 전장 주석 설교를 하면서 나름대로 그 해답을 발견하였다.
사도행전 7장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 충격을 받은 후로 좀 벅차지만 매 주일마다 성경을 한 장씩 첫 절부터 끝 절까지 주석 설교를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어느 주일 고린도전서 13장 14장을 이르러서 우리 말 성경의 “방언“이라고 일률적으로 번역한 용어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경에서 방언의 은사는 문자 그대로 일상 언어의 은사이지 어떤 다른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전혀 없다.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을 할 때 당시 공용어라 할 수 있었던 헬라어나 로마어 등을 제외한 약 4000여 다른 방언을 가진 미전도 종족들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방언의 은사를 받아 그 방언의 은사를 사용하여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Language School이든 유학이든 선교지의 종족 언어를 공부하여 선교지로 떠나는 것이 사실이다. 신약 정경(Cannon) 계시가 완성되기 이전인 사도바울 당시에는 성령이 필요에 따라 방언과 통역의 은사를 직접 주셔서 공동체에서나 필드에서 복음을 증거했다고 보는 것이다.( 고전14:18,26,39)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침투하여 혼란을 야기했던 것은 통역을 세우면 얼마든지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방언(Languages)이 아니라 알아듣지 못하고 통역도 안되는 Babbling 기도 방언, 즉 이방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동일한 기도 현상으로 하나님과 기도자만이 직통한다는 아주 신비한 Babbling 방언기도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기도를 하지 말고 본받지 말라” 경계하셨던 이방 기도의 행태가 고린도교회에 침투하여 참 방언(Languages)의 진리를 혼란에 빠뜨렸던 것이다.
II. 그러면 이방인들의 Babbling 방언 기도는 어떠한가?
불교의 문화권에 있는 한국 교회는 타종교의 영성이 어떠한지에 대한 상식을 공부해 볼 필요가 있다. 저들은 기도라는 말보다는 "진언(眞言), 주문(呪文), 신주(神呪), 밀언(密言)...“등으로 불리운다. 의미가 있지만 그 뜻을 중요시 여기지 않고 그냥 염송(염불, 특정 단어를 반복)할 경우 그 소리의 신비한 파장이 있다고 믿는다. 그 파장, 즉 에너지를 몸과 마음으로 느끼면 그것이 주력, 뛰어난 위신력이 있어 자성불이 되어 신비하고 영적인 공덕, 능력을 가져온다고 믿는다. 간추려 말한다면 현실의 액란(液卵)을 소멸하고 수행 중의 장애를 극복하며 마음을 잘 조복하고 계율을 능히 지키며 佛法을 잘 받들어 우주정신과 합일, 무장무애, 신심견고, 구경열반, 해탈의 경지인 열반(涅槃)에 이른다는 것이다.
원래 “주문(呪文)”이란 주술적인 힘을 가진 글귀를 이르는 말로 불교 외에도 각 종교마다 특정한 효력을 발휘한다고 여겨지는 독특한 주문이 있다. 그러나 불교의 진언은 근본적으로 무명을 타파하고 열반을 증득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의 주술적 주문과는 격을 달리하여 명주(明呪)라고 명명한다. 자주 드라마 같은데서 등장하기 때문에 한국 사람이라면 초등생도 다 알고 흉내를 낸다. 예컨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염불), “수리수리마하수리수수리사바하”(요술주문)인데, 방언역시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기에 동일한 부류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신18:11) 복술자, 무당, 신접자, 초혼자 등 주술적인 직업을 가진 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이들의 가증스런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
고린도전서 14장 설교를 준비하면서 방언을 하던 우리 교회 Micle 전도사에게 방언을 한 번 해보라고 하였다. 마침 토요일이었고 창고에서 자전거 타이어를 고치는 중이었다. 주절주절 숨도 안쉬고 자랑스럽게 잘했다. 그 다음 주일 날 강단에서 고린도교회의 방언을 설명하기위해 “마이클전도사!, 어제 했던 Babbling다시 해봐라.”고 하였다. 똑같은 소리로 방언의 은사라며 주절거렸다. 아마 오래전부터 카리스마틱 교회에서 학습한 방언이었다.
“방언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다 비우고 다 쫒아내라. 그리고 100번 할렐루야를 시작하라.”
방언을 학습하는 자들도 이방종교인들과 비슷한 이런 행태가 엿보인다. 어떤 분의 간증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100번도 하기 전에 육체는 이 땅에 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이 땅이 아닌 구름 위를 날아가고 있고 광명한 빛이 저를 감싸고 있으며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가 한 박자 늦게 들리고 하울링이나 소리가 늘어지게 들리는 현상을 경험했습니다. 그러고 일어나서 주변을 걷는데 바닥을 걷는 느낌이 아닌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고 뭔가 새로운 촉감과 황홀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관상기도나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황홀경에 들어간다는 것이 이것으로 보입니다. 이 광명하고 아름다운 현상을 내면으로 볼수 있다는 것이 엄청 신기했지요. 그리고 이 현상은 1시간 정도 계속 이어지고 끝나갈 무렵 온몸에서 주최할 수 없는 진동과 온몸에 꿈틀거림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쿤달리니 현상을 말하는데요. 이때 이상한 말을 하거나 계속 웃거나 울거나 하는 것 같은데 저는 계속 웃었습니다. 아마도 토론토 블레싱도 이 비슷한 현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정리하면 마음을 비우고, 할렐루야 100번하고, 황홀경에 들어가고, 황홀경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고, 그것이 1시간 정도 지속되고, 그러면서 온몸이 떨리고, 계속 웃음 나오고. 황홀경이 끝이 나면서 온몸이 춥고 떨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방언기도 학습도 안했는데 어느 날 기도 하는 가운데 이상한 Babbling이 튀어 나온 경우는 어떻게 볼 것인가? 이런 경우도 역시 그 마음과 영 속에 동기가 Babbling이 어떤 형태로든 이미 자리 잡을 수 있는 동기 유발이 되어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방언의 해석에는 두 관점이 팽팽하게 맞서 있다. 방언의 참 진리를 찾아가는 것은 주님 오실 때까지 끝없는 논쟁이 계속될 것이다. 선택은 분명하게 각자의 몫이다.
III. 성령의 방언, 방언기도가 아닌 언어(Languages)은사가 계속되는가?
과연 이 시대에도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성령의 방언, 언어(Languages)은사가 계속되는가? 아니면 중단 되었는가? 이것은 고린도전서 13장의 해석 이슈인데 역시 두 관점으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어느 날 이 방언 문제로 이야기하는 중 한 선교사님이 말하기를 “어떤 교포가 자기는 한국 말을 모르는데 한 목사님이 한국말 설교를 하는데 영어로 잘 알아들었다”는 간증이 있다는 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렇다면 종족 언어를 공부 하지 않고 현재 선교 필드에서 선교하고 있는 선교사가 과연 몇 명이라도, 한 명이라도 있는가?” 되물었다. 그런 통계가 전혀 없다. 방언의 은사가 있다면 선교사들이 언어 공부한다고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필요 없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다면 소위 Babbling(옹알이)기도 방언(방언이라고번역해서는안됨)을 어떻게 봐야하는가?
나는 하나님께 직통한다는 신비적인 Babbling 기도가 기독교 영성이 아닌 이방 종교 영성의 침투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우려 한 바 있었고, 노우호 목사는 그의 37년간 임상 검증에서 Babbling 방언은 100% 거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총신 이상원, 서철원 두 교수는 "오순절 방언은 단회적 표적방언이고, 길흉을 점치는 예언은 구약의 가르침에 위배되고 소위 지금 일어나는 Babbling 방언기도, 방언들 중에 성령에 의한 방언이 전혀 없다고 일방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아직 그런 경우들을 만나지 못하였을 뿐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아주 조심스런 평가를 한다. (참조: “성령사역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http://reformednews.co.kr) 고린도교회의 영적 혼란과 현대 교회의 영적 혼란의 상관성을 살피기 위해서는 먼저 고린도교회의 지리적, 역사적 형편을 고찰하는 것이 순서이다.
IV. 고린도교회의 지리적, 역사적 배경
고린도는 올림픽게임(Olympic Games)과 이스미안게임( Isthmian game)발상지로 유명한 도시이다. B.C.146년에 파괴되었고 AD 100년경 로마의 씨져(Caesar)에 의해 재건되었고 그후 로마로부터 많은 로마의 자유민이 정착하였다. 이에 그들의 노예들, 그리스인들이 들어왔고 유대인들은 비지니스의 붐을 타고 이곳에 들어왔다. 고린도라는 뜻 자체가 “방탕과 부도덕” ( Corinthianize"means drunken debauchery and immorality)의 대명사였을 정도로 죄악이 팽배한 도시였다. 사람들은 아프로디테(Aphrodite, 로마의 美의 여신 Vinus에 해당) 신전에서 사랑의 여신을 숭배하였고 남녀가 서로 어울려서 광란의 섹스 파티(Sex party)를 벌리는 예식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회 상황에 처한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났다고 하지만 옛 생활은 믿음에 따라 거듭나지 못하였고 그만 영적 혼란 속에 성장을 멈추고 있었다.
“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 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 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라고 (고전 6:8-10) 라고 바울은 아주 강하게 지적한다.
바울은 이런 도시에 1년6개월 머물면서 목숨을 걸고 개척하여 첫 고린도교회가 탄생하였다. 바울이 다른 도시에 복음 전도를 위해 떠나면서 에베소에서 만났던, 학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출신, 성경에 탁월한 웅변가요 설교자인 유대인 아볼로가 제 2대 목회자로 부임하였다.(행 18:24) 아마 바울의 시원찮은 설교에 졸리고 갈증을 느꼈을 교인들은 가슴을 후련하게 하는 아볼로의 웅변에 매료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크게 성장하던 이 교회에 아볼로파, 게바파, 바울파, 그리스도파로 파당이 일어났다. 아볼로는 이런 분쟁을 수습하지 못하고 깊은 상처를 안고 고린도교회를 사임한다. 그후 바울이 아볼로에게 고린도교회에 다시 돌아갈 것을 강청하였지만 결국 사양한 것으로 보인다.(고전16:12) 고린도전서를 쓰기 전에 고린도 첫 서신을 먼저 한번 보냈었는데 그 첫 서신은 없어졌고(고전5:9), 후서까지 3편을 그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수습할 목적으로 썼는데 바울의 심정을 묘사한 대목을 보면,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전4:21)라고 하는 대목에 그 교회의 심각성이 잘 반영되어 있다. 고린도전서를 통해본 이 교회의 문제점은 분열(1:10-4:21) 부도덕( 5:1-6:20). 결혼 오류(7:)자유의 남용과 오류(8:-11:)성찬오류( 11:) 은사의 오류(12:-14:) 부활의 오류(15:) 금전에 대한 오류( 16:)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것은 별 문제가 없는데 방언 은사에 대한 번역상의 오류와 아직도 해석상의 문제를 안고 있으며 아마 주님 오실 때까지 평행선을 달릴 것 같다. 소위 Babbling 신비 방언기도 옹호론과 무용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고린도 전서의 역사적 상황과 집필 이유를 생각한다면 성경 관찰자는 성경을 읽을 때 평면적인 시각으로 읽는 것보다 상황적 시각으로 드라마틱한 톤을 바꿔 읽을 때 더 잘 실감나게 내용을 파지 할 수 있다.
V. 상황적 문체적 시각으로 성경읽기
고전14:5, 과장법(hyperbole): “나는 너희가 전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 여기보소! 바울이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지 않소?“ 그러나 고전12:30,” 다 방언을 말하겠느냐?“라고 하였다. 여기 서두에 이 말을 꺼낸 것은 진정한 은사를 강조하고 다른 것(Babbling 기도방언)에 대항하기 위해 꺼낸 표현이다.
고전14:7~8, 유추적 비유법: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 당신이 누가 방언을 한다고 할 때, 참 언어 방언이라 할 지라도 의미를 이해 못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 하물며 의미없는 Babbling 방언이라고??? 생각 좀 해봐라!
고전14:9, 유추적 비유법: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Babbling방언한다? 어디에? 허공(虛空)에.” “Babbling신비 직통 기도한다? 어디에 어떻게?”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도 모르고 아마도 반복적으로 "예수는 저주할 자, Jesus is anathema!" (고전12:3)를 했을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가졌던 무지, 감정, 미신의 장벽 때려 부수기를 계속 시도하고 있다. 신자는 성령 은사의 목적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데 그 목적이 있음을 바르게 깨닫고 인식해야한다.
고전14:13, 풍자법: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통역이란 두 다른 언어 사이에 의사 소통을 말하는 것인데, Babbling 기도방언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하는 것으로 통역이 필요 없는 데도 불구하고 사도바울께서는 “통역해봐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뭘까? 그것은 통역을 세워 검증하라는 것이라기보다는 Babbling기도방언은 기도도 아니고 언어 방언의 왜곡임을 신랄하게 꼬집는 대목이다.
고전 14:14-15, 가정법 조건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For if I pray in an unknown tongue, my spirit prayeth, but my understanding is unfruitful." (KJV) 영문법의 “If"는 가정법 조건절로 의심스럽거나 사실이 아닌 것을 표현한다. 여기 ”my spirit“은 'spirit,' 'breath,' or 'wind, the inner feelings 을 뜻할 뿐 결코 성령(Holy Spirit)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카리스마틱 해석자들은 여기 "My spirit prays” =“The Holy Spirit prays” 로 해석한다. 이 구절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기도 방언 예찬자인 한 고신 목사는 내 펫북 칼럼에 코멘트하기를,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다 안다면 방언 기도는 필요 없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탄식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방언기도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 그 기도가 의미 없는 소리나 음향인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가 영으로 하는 그 기도를 내 마음이 하게 되기를 원하시므로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게 될 그날 천국에서는 방언도 예언도 그칠 것입니다.”
부언하자면 보통 방언기도 주창자들이 공식처럼 흔히 하는 말인데,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가르쳐 주시는 기도가 바로 방언기도라고 정의한다. “마땅히 빌 바를 모르면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 때까지 계속 방언 기도만 해라. 방언 기도는 성령 자신이 말할 수 없는 탄식의 기도이다. 주님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게 될 그날 천국까지 방언 기도 이상무!” 라고 말한다. Babbling 신비 기도 방언 옹호의 정당성을 위한 그럴 듯한 변명이지만, 그렇다면 방언 기도 못하는 사람은 영으로 기도도 못하는 불쌍한 자들이 되고 만다. 그런 불쌍한 처지를 벗어나려고 기를 쓰고 Babbling기도 방언 이든 귀신 방언이든 뭐든 받으려고 환장하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본문으로 되돌아가 그렇다면 “My spirit” 이라는 의미가 “ The Holy Spirit”이란 말인가? 그것은 얼토당토않은 난센스요, 거짓을 참인 것처럼 정당화시키려는 궤변일 뿐이다. 왜냐하면 계속 이어지는 가정법의 결과를 보면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성령님이 기도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결과 “내 마음은 열매가 없다!”( “but my mind is unfruitful."). 결코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성령이 탄식하며 기도하는 데 열매가 없다는 것은 그의 속성 면에서 논리가 전혀 맞지 않는다. 결국 이 말씀은 Babbling 기도가 신비적 성령의 기도가 아니라, 소위 신비적 기도 방언의 치명적인 약점을 분명하게 노출시키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봐야 한다.
고전14:15, 결론: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I will pray with my spirit, but I will also pray with my mind" I will pray with the spirit , and I will pray with the understanding also." 직역하면, “내가 하나님께 기도(말)를 할 때 그것은 나의 속(내 영, 내 속사람)으로부터 시작 한다. 역시 나는 나의 두뇌 (마음)를 사용하여 이해하면서 기도한다. 내 영(inner being)으로 노래할 것이며 역시 마음(understanding)으로 노래한다.“ 라고 번역할 수 있다. 현대 기도방언 주창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당시 고린도교인들 중에 황홀경에 빠져 Babbling 신비 노래를 하곤 하였지만 바울은 단호하게 옳지 않다고 꼬집는다. 신자가 자기가 아는 익숙한 (한국)말로 진심으로 기도하고 말하고 찬양하는 그것 자체가 바로 주님께 영으로 기도하고, 영으로 괴로워하고, 영으로 노래하고,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다.
고전4:19, 냉소법: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5마디 말을 하는 것이 10000 마디 Babbling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왕상 18:27-29, 시 2:1-12)5>10000그리스 수학에서 가장 큰수. (USA, 《10¹⁸》; Europe 《10³⁰》無量大壽, "그래도 아쉬운 뭔가 가 있다고? 산수의 기본이라도 안다면 이제 Babbling 방언 게임 그만두셔!" 고전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Brothers, Stop Being Children In Understanding; Grow Up.") "제발 어린 아이짓 그만해! " "예수 처음믿을 때, 몰랐을 때는 그럴 수 있지." "해가 가고 달이 가는데도 이방인들이 하는 영성을 흉내내? 이젠 그만해!"라고 한탄하며 꾸짓는 사도의 절규를 이 장에서 발견해야 한다. 그 후 사도 바울은 아마 직접 고린도교회를 찾아가 영적 혼란 수습의 일환으로 검증 절차를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고린도전서14장 26절 이하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고전 14:27~28, 냉소와 풍자: 여기서 방언 검증의 원칙을 말하는데 상당한 냉소와 풍자가 있는 표현 방식이다. 여기서 바울은 정경이 완성되기 전 당시 상황에서 "통역"의 여부를 아주 중요한 방언 분별 및 시행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통역 은사가 없다면,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다면, 만일 모니터링 시스템이 없다면, 아무도 자기 방언을 통역할 수 없는 방언 즉 Babbling기도방언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Keep silent in church and speak to himself and to God!!!”(풍자) 즉 Babbling 기도방언이라면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런 방언을 하지 말라!"고 책망한 것이며, ”내 자신에게 또는 하나님에게 말하라“는 것은 권장이 아니라 풍자적으로 아주 강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도바울은 당시 고린도 교회의 방언 현상에 대해 유독 방언 (languages)에 대해 통역(Translator)을 세워 검증(verification) 절차를 밟으라고 명령한다. 그 만큼 그 교회를 어지럽게 했던 것이다. Babbling방언기도는 본래 의미가 없으니 통역 할 필요도 없고, 검증할 필요도 없이 방언이 아니지만 실제 바른 언어 방언(Languages)의 은사라도 할지라도 교회 공동체의 질서와 건덕을 위해 통역 은사자를 세워 검증하라고 하였다. 아마 바울은 방언의 은사뿐만 아니라 통역의 은사까지 다 소유한자로서 고린도교회의 방언 현상을 정확하게 통찰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데 항간에 어떤 교인들이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방언을 말하였지만 그것이 마귀의 방언인지, 성령께서 주시는 방언인지 아무도 분별하지 못했던 상황을 바울은 꼬집는다.(고전12:3)
결론적으로,
개인적으로 이 은사와 구원 문제는 사실상 별개로 결부 시킬 필요가 없다. 기본적으로 Babbling을 "방언"이라는 단어로 번역한 그 자체가 오류이고, 착각은 자유이지만 신비한 Babbling을 한다고 더 영적 깊이가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아직도 하나님 아버지의 속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뭔가 이상한 떼를 쓰는 영적 어린 아이 짓이 아닌지, 마음을 오푼하고 주관적인 체험을 객관적인 말씀의 검증을 통해 분별하는 것이 성숙한 지혜이다. 문제는 바른 방언인지 아닌지 통역 은사를 받은 사람을 세워 모니터링을 해서 분별해야 하는데 과연 오늘날 그런 바른 통역 은사자들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Google 번역(translate)에 들어 가면 단어는 물론 문장까지 100개국 정도의 언어 번역이 가능한데 아마 머지 않은 장래에 지구촌의 모든 언어가 인터넷상에서 통역이 될 날도 멀지 않았다. 신자의 영적 성숙은 말씀과 기도의 경건 생활을 축으로 하지만 반지성주의(反知性主義)는 결코 아니다. 자신의 Babbling 신비 기도라는 것을 성령께서 직접 선물로 주신 양 옹호하려고만 하지 말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명했던 것처럼 그 말씀의 명령에 순종, 어찌하든 검증하여 영을 분별하는 은혜를 덧입기를 힘써야한다. (요일4:1-2)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비판하고 아주 강하게 책망했던 것처럼 현재 Babbling 방언 기도에 대한 본질적 진실을 정직하게 탐구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방언 (Languages) 은사의 진리가 얼마만큼 왜곡되어 있는지, 그 해석이나 문제점에 대한 비판과 논쟁은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런 탐구는 이제 본격적으로 교단별로 연구위원회가 설치되어 정리를 할 필요가 있고, 각 신학교에서 보다 더 깊고 활발한 탐구가 불타오르기를 바란다. 아무튼 Babbling 신비기도의 강력한 효과로 인해 방언의 잘못된 번역의 오류와 왜곡된 해석을 바로 직시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 Babbling( a unknown tongue) 신비 기도라는 것은 분명히 언어 (방언, tongues)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방언의 은사라고 명명하고 마치 방언의 은사인 것처럼 행세를 하는 것은 두말할 여지없이 하나님 말씀의 왜곡이며 구태여 은사라 말하고 싶다면 방언의 은사로 볼 것이 아니라 “Babbling 옹알이 신비 기도 은사”로 따로 분류할 필요가 있다. 특히 오늘날 이 Babbling 신비 기도가 이방 종교의 영성과 동일한 맥락을 가지고 있거나 건강치 못한 은사주의, 다원주의, 에큐메니즘의 종교 통합의 한 전략적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도 간파해야 한다.
목사님은 어떤 영적 체험이 있으신가요? ( I I )
25년 전 선교사 초기에 남아공에서 예수영화를 통해 초중고 학교를 순회하며 약420여회 복음을 전하였다. 어느날 아침 이미 약속된 한 초등학교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출발을 하였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예고 없는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열악한 시골학교라 교실 칸막이를 뜯고, 책상을 모두 밖으로 들어내고 걸상을 다 채운 후, 까만 비닐로 유리창을 다 막고 스크린을 설치한다. 마지막으로 발전기를 돌려 영화를 상영하게 되는데 비가 계속 온다면 문제가 커진다. 차를 몰면서 좀 불평스런 말로 소리질러 기도했다.
“하나님! 오늘 이 학교는 특별히 믿음 좋은 교장이 학부형들까지 다 초대하여 멋진 복음 잔치를 준비하고 있는데 비가 오면 어떻해요? 엘리야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셨지요? 이 정선교사가 엘리야만 못한 게 뭐가 있나요? 당장 비를 멈춰주세요!”
제정신이 아니지만 아주 건방지게 화를 내면서 기도하였다. 우리 차가 학교에 도착할 무렵 비가 멈췄고, 학부모들과 아이들이 모두 예수 영화를 보고 복음을 듣고 결신하는 기쁨의 시간이 지나자 다시 억수 같은 소낙비는 계속 되었다. 즉시 현장에서 응답을 체험한 기도였지만 나는 두 번 다시 이런 기도를 하지 않는다. 성숙하지 못한 기도일지라도 우리 주님은 들어주실 때가 있는 것 같다. 요즘은 기도가 간단하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합력하여 선(좋은 것)으로 바꿔치기 해주실 줄 믿고 지혜주심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나의 기도 스타일이다. 목사님은 영적 체험이 있으신가요? 라는 글을 쓰면서 기도에 대한 몇 가지 단상을 정리하였다.
I. 한국교회에 침투한 이방 영성의 기도 파편들
Babbling 옹알이 방언 기도(방언이 아님)가 효과적으로 하나님께 직통하는 신비적인 효능(?)이 있다면 아마 우리 주님이 솔선수범하여 본(本)을 보여 주시면서, 또는 샘플을 주시면서, “너희들도 기도할 때 나 처럼 옹알이 기도하라”고 했을 것이다. 십자가 수난을 앞 둔 심각한 상황에서도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눅22:41~42)라고 기도하셨다. 함께 동행 했던 제자들이 그들의 분명한 의사소통 언어(言語)로 알아들을 수 있었고 후에 복음서의 기록으로 선명하게 남길 수 있는 기도를 하였다.
미국 교회는 교단 별로 이 Babbling기도 방언에 모니터링를 하여 비성경적인 현상에 대해 공식적인 금지를 하는 등 그 문제점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다. (P. Robertson, The Final Word ) 특히 보수계의 대표격인 죤 맥아더는 진작부터 이 방언의 무용론을 외쳐왔다.
현재 한국교회나 신학교는 전체적으로 어느 교단을 막론하고 Babbling 방언기도 예찬론 또는 옹호 동조론이 절대 대세이다. 이에 반대하는 말을 하면 성령을 훼방 죄, 교만 죄, 방언의 은사를 주신 성령 무시 죄, 지식으로만 판단하려하는 율법주의 판단죄... 등등 여러 죄목으로 아예 이단의 굴레를 씌우려고 한다. 성령의 지혜주심과 귀를 열고 닫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방언 검증을 하라”고 하신 동일한 하나님 말씀 앞에 오늘도 Babbling 신비방언 기도자들은 순종하든지, 불순종하든지 취사선택을 해야 함은 피할 수 없는 성령하나님의 명령이다. 이 Babbling 방언 기도가 하나님께로부터 인지, 사탄으로부터인지, 심리현상이나 습관적인 기도인지 고민하려고 하지 않으려는데 그 이유를 영적 병적 중독 현상으로 진단한다. 차제에 한국 기독교 안에 침투한 몇몇 이방 영성의 기도 파편들을 모아 보았다.
A. 영빨, 기도빨
“언니, 기도원에 다녀왔어.”
“그래 기도빨 잘 받았나?”
“내 기도 빨이 먹혀”
“그 목사님 영빨이 남달라”
“영빨 충만”
방금 한국에서 아내에게 걸려온 카톡의 한 대화였다. 소위 영적 은사로 인해 일어나는 방언, 치유, 축사 같은 기적적 현상을 표현하는 완곡어법으로 받아 넘기기에는 너무 노골적이다. 기도에 대해 어떻게 배웠으면 저런 말이 술술 입에서 나오는지 기가차고 매가차고 순사가 칼을 찰지경이다. 영빨이니 기도 빨이 다 뭔가? 영력이 넘치니까 영빨(발)이고 약효가 빠른 보약과 같이 기도의 효험이 좋아 기도빨(발)이라고 말한다.
“그 스님의 영빨이 대단하셔”
“기도빨’
“영빨 타임”
“영빨산“
”영빨기도원“ 과 같은 말들은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나 이방종교의 영향권에서 흔한 말이지만 결코 성경적인 말이 아니다. 이런 표현은 다 이방 종교인들의 표현법이요 하나님의 거룩을 더럽히는 말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저질스런 말들을 삼가해야한다.
B. “하나님이 나에게 말했다”는 직통계시화법(直通啓示話法)
작년 말 선교사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차안에서 잘 아는 교회의 부흥 강사로 왔었다는 분의 설교 테이프를 잠시 들었다. YWAM 김미진 간사라는 이분도 역시 말끝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했다“라고 특유의 직설 화법이 귀에 거슬렸다. 마치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게만 특별한 비밀 정보를 제공해줘서 그렇게 했더니 성공(成功)을 했다는 그런식이었다. "기도 해보고~" ... 기도가 무당 수준이다.
항간에 직통 계시를 말하는 ”예수전도단(YWAM) 선교사들의 특허품(特許品)” 으로 마치 신앙의 상대성이 적용되는 것처럼 말하고, 그의 말에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다는 듯이 그럴듯하게 말한다. 만약 이에 문제점을 제시하려한다면 마치 하나님의 메시지의 권위를 깎아내리거나 문제 삼거나 하는 듯한 죄책감을 일으키게 하고, 나는 들었는데 상대방은 너는 왜 듣지 못하나 하는 우월감(優越感)을 은근히 과시한다. 하나님 말씀이 오늘 여기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는지 깨달음을 적용하는 것은 문제없지만 그것이 마치 나에게만 직접 말하는 직접 계시인양 인상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직접 계시 화법을 빙자하여 자기 의를 과시하는 허세(虛勢)의 한 수단일 수 있음에 경계해야 한다.
C. 선포기도
남아공 East London 시의 한 중심가 어느 가정 교회에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특별 기도집회가 열렸다. 나이지리아에서 왔다는 흑인 목사는 “Satan! go out in the name of Jesus!”를 하루 종일 방언하듯 외치는 기도하면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떠들었다. 두란노에서 발간한 “선포기도“라는 이책은 Steven Furtick이 쓴 책이다.
"기도의 무기력증을 걷어차고 대담하게 기도하라."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도록 기도하라"
"하나님의 크신 역사에 참여하라. 불가능은 있다 그러나 불가능은 없다!"
"이 시대의 여호수아가 되라!"
“태양아 너는 기드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수 10:12)라고 예시한다.
어떤 분은 선포기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은이 마음 움직일지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관계가 온전케 될찌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관계가 온전케 회복되었음을 선포하노라! 선포기도를 하루에 3~4번 정도 했습니다. 선포기도가 제게는 힘들었습니다. 이제 이 말씀을 듣고 하루에 100번 이상 선포기도를 할 것입니다. 더 확신가운데 할 수 있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저에게 행하실 놀라운 이루심을 간증하러 다시 오겠습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로 선포하라.“
이것은 조용기 목사의 ”4차원의 영성“에서도 이미 이야기한 바 있듯이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을 믿음의 언어인 4차원의 레마(Rhema)로 선포하면 그 믿음의 선포(宣布)가 꿈을 성취(成就)시켜준다고 믿는다.
한번은 ”축복 씨크릿“ (1. 선포의 법칙 2. 바라봄의 법칙 3.감동의 법칙)이라는 글을 계속 올리던 베트남의 김치복 선교사와 한번 펫북 논쟁을 벌였었다. 이것은 나의 20대의 신앙생활을 통째로 사로 잡아먹어버렸던 변태 심리학 그 자체이다. 비성경적, 비윤리적, 비양심적, 비신앙적으로 흘러가면서도 세상적 욕망충족(慾望充足)이라는 실제 눈에 보이는 매력(魅力) 때문에 돌이키기 힘드는 중독성 마력(魔力)이 분명히 있다.
D. 주여 3연창 (連唱, 連呼)
오래 전부터 한국교회에 왜 큰 소리로 “만세 3창”처럼, “주여 3창”을 하고 통성기도를 들어가는 것이 보통 기도의 관례이다. 죠킹이지만 한번 부르면 별 효과가 없고 세 번이 효과적이라면 10번이고 100번이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항간에 혹자는 다니엘서 9장19절에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의 구절과 성부, 성자, 성령님의 3위 일체를 각위(各位)마다 지칭하여 부르는 것이라고 하는데 정당한 근거라기보다는 억지에 불과하다. 이것은 자칫 바알 선지자들이 발람을 부르거나 무당들이 펄펄뛰면서 신을 부르는 주문처럼 무속적 미신적(巫俗的,迷信的) 행위가 되어 소위 강신(降神)을 부르는 종교적 절규로 비칠 가능성이 있다. (왕상 18:26-29) “은밀한 중에 기도하면 은밀한 중에서 들으신다”는 주의 말씀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 (마 6:6-8)
E. 통성기도
아프리카 교회도 이 통성기도를 아주 좋아한다. 한번은 통성기도가 자칫 기도의 혼란을 준다고 판단하고 우리 교회의 공적인 예배에서 통성 기도를 배제하였다. 그 대신 한꺼번에 3~4명을 지정하여 기도 제목을 각각 따로 주어 대표 기도를 하도록 하였는데 처음에는 통성기도에 익숙해졌던 분들 중에는 돌림 대표기도가 신이 덜 난다고 불평하는 교인들도 있는 것을 보았다. 1907년 길선주 목사의 평양 대부흥운동 때 시작됐다는 이 기도 스타일은 주여 3창 이후 바로 이어지는 기도 형태이다. 주로 저녁과 새벽 집회에서 많이 이루어지는 기도 양식인데 " Korean prayer style, One cord prayer"라고도 한다.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이 명박 대통령이 무릎을 꿇고 통성기도에 참여하는 뉴스가 전파를 타고 구설수에 올랐던 기도이기도하다. 이곳에서 통성기도에 처음 참석한 한 초신자는 엠프의 큰 음악 속에 신자들이 손을 들고 큰소리로 울부짖는 기도에 쇼킹하여 다시는 그런 집회에 가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들을 적이 있다. 이 통성기도를 할 때 남의 기도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경쟁적으로 남보다 더 큰소리로 자기 소리만 들리게 해야 하는데 그럼 목소리가 적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남이 듣든 말든 자기 기도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이기적(利己的)인 생각으로 뭉친 사람은 별문제 없겠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배려를 하는 사람이거나 남의 큰 목소리에 스트레스를 받아 목소리가 아예 기어 들어가 버리는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떠드는 데서 집중 기도 훈련을 하여 믿음이 강해져야 엑스터시에 빠지기도 하고, 방언기도도 받고 다른 은사도 받는다고들 하는데 성령님이 이렇게 요란한 것을 더 좋아하시는 분이신가? 나만의 생각일까?
II. 주님은 비디오를 주지 않고 책(written revelation)을 주셨다.
이 시대는 영적으로 혼탁한 시대이다. 최근 “천국에서 돌아온 소년”(”The Boy Who Came Back From Heaven”)의 저자 알렉스 말라키(Alex Malarkey)가 “천국 얘기는 내가 만들어 낸 것” 양심선언을 하였다고 한다. 2004년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한 알렉스는 충돌시의 충격으로 전신마비가 되었다. 사고로 2개월간의 혼수상태에서 천국을 체험했던 경험을 담은 책 “천국에서 돌아온 소년”을 그의 아버지인 케빈 말라키와 공동저술 하여 한 때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었다. 알렉스 말라키는 “나는 죽지 않았었고, 천국에도 가지 않았다. 내가 천국에 갔었다고 말한 것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쓸 때 나는 성경을 한번도 읽어본 적 없다. 사람들이 거짓된 이야기로 이익(利益)을 얻었고 거짓이 계속되었다. 성경을 충분히 읽어야 한다. 성경만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람이 만들어낸 것은 그 어떤 것도 무오할 수 없다. 이 책이 계속해서 판매되고 있는 것이 수수께끼 같고 괴롭다.”라고 뉴스를 탔다. (http://www.christiantoday.us/)
이 기사는 약 25 여년전 국내외에 “내가본 천국”이라는 간증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펄시 콜레(Percy Collett)를 떠올리게 하였다. 당시 펄시콜레를 초청하여 집회를 했던 그 교회는 그의 비성경적 황당한 내용 때문에 집회를 완전히 망쳤다는 소문이 떠돌았었다.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거짓 지도자들이 온갖 거짓으로 중상 모략하여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뒤흔들면서 그의 가르침과 리더십에 의문을 갖게 하여 교회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었다. 그 심각성이 이루말 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철없는 어린애 같은 교인들을 위해, “무익하나마 (useless)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 하리라.” 라고 고린도교회의 영적 혼란을 수습의 일환으로 무려 14년간 꼬불쳐 숨겨두었던 영적 체험을 아주 조금 털어 놓는다. (고린도후서 12:1~5) 아마 하나님은 바울이 복음 때문에 받을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고난에도 좌절하지 말고 그의 미션을 수행하라고 격려하기 위해 직접 하늘나라의 상급의 단편을 미리 보여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전 총신 교수였던 신성종 목사는 “내가 본 지옥과 천국”을 간증하고 다닌다. 꿈을 꾸는 중에 영적 체험을 했다고 한다. 천국과 지옥을 보고 간증한다는 그의 태도에서 이미 사도 바울과 같은 지도자의 기본자세와 거리가 한참 멀다. “테레사 수녀가 천국에 있다.”는 그 한 마디만 봐도 그의 간증은 가짜 배기이다.
공립학교 순회 예수 영화를 상영하면서 과연 이 사역을 주님이 받으시는지 궁금하였다. 학교를 컨택하고 날짜를 정하고 정규교과시간을 특별활동으로 할애 받아 복음을 전하는 역동적인 사역이지만 아무리 애쓴 다해도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면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전도를 마치고 시원한 나무 그늘에 차를 파킹하고 잠시 눈을 붙였다. 하얀 옷을 입은 누군가가 아주 부드럽고 감미로운 팔로 나를 번쩍 안고 하늘로 훨훨 올라갔다. 이 황홀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종의 사역을 기뻐 받으신다는 확신을 더 갖게 되었지만 나는 더 이상 그런 꿈을 원치 않았다. 주관적인 영적 체험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이 임하여 받은 것임으로 틀림없이 하나님이 주신 방언 Babbling이라고 금이야 옥이야 붙잡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이방 종교 영성에도 얼마든지 있다는데, 만약 그 Babbling이 사탄이 준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요한 사도는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고 하였다.
여기는 시험하라는 말은 검증(檢證)하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사도바울도 고린도 교회의 방언 현상, Babbling이든 Languages이든 통역을 통해 모니터링을 함으로 철저히 검증하라고 명령한다. 항간에 방언Babbling 옹호자들 가운데 한결같이 이런저런 변명을 하면서 검증(檢證)하라는 하나님 말씀의 명령을 거역하기도하고, 또 다른 편에서는 Babbling 무지로 속아 허비된 세월을 개탄하며 쓰레기처럼 버리는 두 반응이 보인다. 주관적으로 본 것, 체험한 것은 자신만의 어떤 확신도 줄 수 있지만 자칫 그 확신 때문에 말씀의 분별력을 상실하고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데 방해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코 비디오를 주지 않고 그 책을 주셨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III. 이른바 Babbling 신비 옹알이 방언기도, 이것을 방언의 은사라고 해야 하는가?
나는 오래 전부터 방언의 해석이 여러가지 이유로 상당히 비성경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정리할 기회가 없었다. 이른바 Babbling 신비방언기도, 이것을 방언이라고 해야 하는가? 은사라고 해야 하는가? 그 문제가 무엇인가? 붓 가는대로 쓰기 어려운 잇슈를 나름의 체험을 섞어가면서 여기까지 왔다. 이미 여러 목사님들의 각고와 영적 통찰력으로 많은 성경적인 자료와 임상 실험의 자료를 내놓았고 여러 바른 믿음을 탐구(探究)하는 선각자들의 용기있는 비판이 많이 있다. 이 자료들이 모두 완벽한 자료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현장 임상실험 연구는 박수 받을 만하다.
이제 한국 교회가 응답을 해야 할 차례이다.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은 그 교회 전통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현 한국 교회는 보수니 진보니, 개혁주의니 뭐니 할 것 없이 이 카리스마틱 파도 속에 휩쓸려 고린도교회의 침몰 직전의 안타까운 상황을 방불케 하고 있다.
이 잇슈는 두 형태로 첫째로 언어(Languages)의 은사가 주님 재림하는 그날까지 성령의 직접 터칭이나 임파테이션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 그 하나이다. (고전13:12) 그런데 웬일인지 성경이 말하는 방언, 진짜 언어(방언, Original languages) 은사는 논외로 어디론가 아주 멀리 사라지고 언어가 아닌 옹알이 Babbling 기도 은사가 이 언어 (방언)의 은사를 대표하는 양 그 자리를 꿰차고 있다.
즉 계시적 표적이었던 방언이 (고전14:22) 오늘날도 동일하게 일반화되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거기에서 가끔 (신)사도 (New Apostles)아저씨들도 출현하여 사도들이 했던 것과 같이 동일한 이적, 표적의 역사가 나타나 사실 성경적 표준이나 마찬가지라고 큰소리를 치는 입장이다. 방언 예찬자들은, “보라, 세계 교회가 다 시들어 가는데 현재 양적으로 부흥하는 교회, 뜨거운 영적 역동적인 신자들, 교회들은 전 세계적으로 단연 카리스마틱 교회 뿐" 이라고 말하고 또 아무리 성경말씀만 강조해봤자 성경만 가지고는 안 되고 두날개, D(G)12, 셀, 알파코스 등 뭔가 직접 눈에 큰 그림으로 보이는 화끈한 것을 해야 생동감 있는 목회, 성공적인 목회를 유지하는 목회적현실(牧會的 現實)이라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성경 기록 계시, 정경(cannon)의 완성으로 그 절대성(絶對性). 충분성(充分性). 최종성(最終性)으로 문제의 표적 방언의 은사는 끝이 났다고(고전13:8) 주장하는 양측이 팽팽한 접전을 벌리고 있다. 외국어 방언 은사가 오순절 때처럼 갑자기 임하냐 아니면 교회 방언 학원이나 체면술사에게 공부해서 하면 안 되는가? 은사는 구해야 하지만 표적 은사를 구한다고 문제가 되는가? 어떤 표적이나 기적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계시적인 정경을 대치해도 된다는 말인가? 성령 하나님이 신자에게 기적으로 인도하시는가 아니면 성령의 감동으로 된 그의 말씀으로 인도하시는가? 바울은 방언 금지라고 푯말을 간단히 써 붙이면 될 것을 왜 그렇게 길게 설명했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질문이 멈출 줄 모른다.
성경은 분명하게 방언 언어(Languages)의 은사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sign, 증명, 증거하는 도구나 수단)”적인 은사라고 깨끗하게 정의한다. (고전14:22) 당시 지중해 연안에 4000여 공용어 방언이 산재하는 미전도 종족을 향해 복음을 외치는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이 때를 따라 입을 열어 역사하셨을 것으로 본다.
그러면 지금도 그런 역사가 있는가? 앞으로 어떤 성령의 특별 역사가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역사적으로 또는 구체적인 세계 선교계에 그런 정보나 통계를 찾기 힘들고, 선교사를 훈련할 때 성령의 직접적 터칭에 의한 언어 은사 체험이 아니라, 선교필드의 언어학교(Language School)에서 일정기간 기본 공용 언어 훈련을 기본으로 하는 것은 선교사 훈련의 기본 상식에 속한다. 결국 취사선택(取捨選擇)은 각자의 몫이다.
바른믿음(http://www.good-faith.net)
첫댓글 관찰자님
자신의 글 올린것을 한번보세요.
대부분 좋지 않는 글입니다.
너무나 좋은 글도 많이 있는데 이러한 글만 올리네요.
그이유는 이것만 보인다는 뜻입니다.
다시말하면 삶도 신앙도 이것만 보인다는 것입이다.
그리도 이러한 삶과 신앙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살하거나 폭행이나 하는 사람들의 글을 보면 비판적인 글이 많아요.
좋은 글을 올리세요.
그러면 관찰자님이 좋은 것이 보이고 성공하는 것이 보이고 은혜가 보입니다.
그러면 보이는데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 보이느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보이는 것으로 삶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절대 보이지 않는 것은 쫓아갈수없어요.
좋은것 성공이 보이면
이것을 따라가고
실패 비판 정죄가 보이면 이것을 따라갑니다.
성공과 좋은것이 보이지 않으면 절대 따라갈수없어요
한번 바꾸어보세요.
삶이 달라질거예요.
참 불쌍하네요.
어떤 말이 좋은지 완전 막혀서 듣지 못하네요.
사탄이 가려서 보지못하고 사탄이 잡혀서 사탄이 원하는것 좋지않는것만 보네요.
자신앞을 보지못하는 영적인 눈봉사.
너무 불쌍한 사람이네요
정신차리쇼!
마귀에게 끌려다니지 말고
@관찰자 정말 불쌍하네
자신이 어디로 가고있는지 모르고
관찰자님을 위해서 이러한 말을 하는데.....
좀 상처 치유 받아보시는게 좋을것 같아요.
너무 불쌍해요안타까운 마음뿐이네
도와줄려고해도 받지도 못하고
장래에 인생은 뻔히 보이고...
@관찰자 누구에게나 함 물어보죠
누가 잘못되었는제
누가 사탄에 끌려다니는지....
함 한영혼 살리려고하는데...
안타까운 마음 뿐이네
@사무엘 지옥가기전에 마귀방언 버리고 제정신 차리시오
@사무엘 예수 믿는다고 살아있는게 아닙니다. 말씀을 깨달아야 죽은 자가 살아나지요. 말씀대로 행하며 선교한다는 자들일수록 죽은 자들입니다.
@사무엘
랄라라 방언을 옹호하는 걸보니
님도 본인의 치부를 가리기 위함이
아닌가요?.
성경은 진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님들은
진리가 아닌 모조 방언을 가지고
진짜라고 우기고 있지요
참으로 웃긴 일이 아닐수 없는
것입니다
토론을 하지도 못하고 논리도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남말하듯이 함부로 말하는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봅니다
님이야말로 성경의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 하는 무지한 상태라는 것이죠
깨달음 증거 논리를 가지고 토론에
참여해 줄것을 부탁합니다
@주님내안에 ] 제77차 성령에 사로잡힘, 예언 임파테이션 은사전이 세미나

작성자:사무엘작성시간:2019.09.12 조회수: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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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차 성령에 사로잡힘, 예언 임파테이션 은사전이 세미나
성령에 사로잡힘을 통한 강력한 예언 은사 임파테이션
기간 : 2019년 9월 23일(월)오후 2시~ 26일 (목) 오후5시까지
원래 이런 사람입니다
영업에 지장있으니까 계속 복사댓글 붙이는겁니다
@주님내안에 왜 방언이 가짜이고 사탄인지 말씀로 말하면 내가하지
@주님내안에 관찰자님
자신의 글 올린것을 한번보세요.
대부분 좋지 않는 글입니다.
너무나 좋은 글도 많이 있는데 이러한 글만 올리네요.
그이유는 이것만 보인다는 뜻입니다.
다시말하면 삶도 신앙도 이것만 보인다는 것입이다.
그리도 이러한 삶과 신앙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살하거나 폭행이나 하는 사람들의 글을 보면 비판적인 글이 많아요.
좋은 글을 올리세요.
그러면 관찰자님이 좋은 것이 보이고 성공하는 것이 보이고 은혜가 보입니다.
그러면 보이는데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이 보이느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보이는 것으로 삶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절대 보이지 않는 것은 쫓아갈수없어요.
좋은것 성공이 보이면
이것을 따라가고
실패 비판 정죄가 보이면 이것을 따라갑니다.
성공과 좋은것이 보이지 않으면 절대 따라갈수없어요
한번 바꾸어보세요.
삶이 달라질거예요.
참 불쌍하네요.
어떤 말이 좋은지 완전 막혀서 듣지 못하네요.
사탄이 가려서 보지못하고 사탄이 잡혀서 사탄이 원하는것 좋지않는것만 보네요.
자신앞을 보지못하는 영적인 눈봉사.
너무 불쌍한 사람이네요
@사무엘
랄라라 로로로 다다다
뭔뜻인줄은 알고 하는 겁니까?
성경에 뜻모르는 방언 단체로
하라고 하나요?
사람들을 랄라라 귀신에 씌어놓고
율법의십일조로 뜯어먹는 방식은
사탄마귀종이 아니면 할수 없는
짓이죠
@주님내안에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고전14:2)
방언은 하나님께하기 때문에 사람이 알아들을수없다고하는데요
이 말씀을 어떤 말씀인지 말해보세요
@주님내안에 참 불쌍한 사림이네요.
사탄이라 이러한 말씀은 절대 보이지 알을 겁니다.
말씀에서 율법은 무엇이라고 했는지 말해보세요.
못할거구 엉뚱한 말만 할것이다 뻔하다
사탄이라 말씀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말씀으로 말하라고하면 절대 못한다.
사탄이라.
이러한 사탄은 남을 비판만한다.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기때문에
이것이 사탄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