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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말쯤 난 민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지금부터 2018년 12월 31일까지 50권의 책 1질(그림이 조금 있는 120페이지 정도의 초등학교 역사 보조 도서 줄글 책)을 다 읽을 수 있겠어?” 나의 이 질문에 대한 민채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아빠 지금부터 한 달 동안 어떻게 그렇게 많은 책을 다 읽을 수 있겠어? 난 낮에 테니스도 치고 시간이 없어~.” 난 그날은 더 이상 민채에게 이 제안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또 그 다음 날 다시 민채에게 그 제안을 말했다. 민채의 대답에서 어제보다 약간씩 누그러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그래도 반응이 전날이랑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다. 난 약간 강하게 민채에게 숙제를 내듯이 이야기를 해 봤다. 민채는 싫어하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난 “도전을 해서 성공하면 아주 좋은 경험이 되고, 좋아하는 테니스를 잘 치려면 책도 많이 읽어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또 남자친구들이 학교에서 말로 놀리는 것(내가 보기에는 인기가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일단은 남자애들이 놀리는 것을 민채는 귀찮고 싫어함)에 대응을 하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도 했다. 나의 여러 날에 걸친 설득에 민채는 일단 도전을 해보기로 했다. 나도 처음에는 성공할 것이라 생각을 한 것은 아니고 그저 어릴 때부터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이면 좋을 것 같았다. 솔직히 이런 도전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하기에 나도 피곤하고 힘들다. 하지만 실패를 하든 성공을 하든 민채에게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사실 가난한 시골에서 자란 난 어릴 때부터 책을 읽은 적이 별로 없었다. 우리 엄마도 그저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말씀은 많이 하셨을 뿐이다. 그래서 시골학교에서 내 시험성적은 늘 중상정도였다. 실제로 농번기에 바쁘면 평일을 물론이고 주말에도 일을 도와야 했다. 좁은 슬레트 지붕의 우리 집에는 읽을 책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에서 빌려 읽을 수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 정도로 내가 철이 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읽는 습관도 들이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상태가 크면서 지속적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어릴 때 책읽기에 소흘했던 나는 학교에 다니며 시험을 치는 내내 느린 글 읽기 속도로 인해 고생을 많이 했다. 주어진 시간에 시험지 지문을 모두 읽을 수가 없었다. 핑계 일수도 있지만 누가 내게 이런 것에 대해 가르쳐 준 적도 없고 어디서 어떻게 배워야 하는 것도 몰라 당시에는 어찌 할 바를 모르며 걱정만 하다가 허송세월을 보냈던 것 같다. 지금은 책 읽기 속도가 보통 수준은 되지만 그래도 만족할 정도는 아니다. 적어도 우리 애들은 나 같은 시행착오를 격게 하고 싶지 않았다. 민채에게 이런 시도를 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처음에 민채는 약속했던 책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마법천자문, Why 시리즈 같은 만화책만 읽으려 했다. 그래서 이 시도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집에 있던 약간 어려운 만화책인 만화 삼국지를 읽으라고 했다. 처음에는 만화라고 좋아했지만, 이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고, 내용도 생소하며, 등장인물도 많이 나오니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만화라서 그런지 그럭저럭 삼국지를 읽으며 책상에 앉아 있기는 했다. 이때 민채랑 삼국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고, 내게 삼국지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한 것 같다. 그러다가 1달 50권 책 읽기를 시작했다. 처음 10일 정도는 5권도 읽지 못했다. 난 마음이 조급해졌다. 물론 중간에 기말고사가 있어 충분히 읽을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민채에게 “몇권이나 읽었어?”라고 물어보면 민채의 대답하는 표정에서 “읽기 싫어~”라는 대답을 먼저 느낄 수 있었다. 그 표정이 민채의 현재 마음일 것이고 그게 계속 되면 정해진 기간 안에 모두 읽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12월중순으로 넘어오며 기말고사도 끝나고 책 읽을 시간도 많아졌다. 난 이쯤에서 뭔가를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냥 두면 실패할 것이고 그러면 민채는 책 읽기에 흥미를 가지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웃으며 약간 다그치듯 이야기도 해 보고, 어쩌다 하루에 1권을 읽은 날은 하루종일 테니스를 쳐서 피곤할 건데 “우리 민채 대단해~” 라고 이야기 하며 안아주기도 했다. 그러면 민채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운지 손가락으로 “V”표시를 하며 좋아했다. 그렇게 조금씩 민채의 책 읽기 진도를 체크하며 민채의 표정이나 말투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당시의 내 결론은 다그치는 것(물론 웃으며 했다.)보다는 칭찬이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민채에게는 이게 맞는 것 같았다. 책을 조금 읽은 날에도 며칠 동안 칭찬만 해보았다.(물론 내 속마음과는 약간 달랐다.) 그러면 민채는 좋아했고, 난 민채에게 “책 읽는 것이 재미있지? 민채는 책 읽는 것에 재능이 있는 것 같아~”,라고 일부러 더 칭찬하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또 책을 조금 많이 읽은 날에는 “역시 우리 민채야~, 조금 힘들지만 책 다 읽었을 때를 생각해 봐~” 등 긍정적인 칭찬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가 토요일 어느 날에 컨디션이 괜찮았는지 3권 정도 읽은 날이 있었다. 그 날도 낮에 테니스를 쳐서 그런지 자러 가기 직전 민채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보였지만 민채의 눈과 표정에서는 밝은 빛이 보였다. 그래서 재미삼아 민채에게 말했다. “오늘 책을 많이 읽어서 눈과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 같아~, 눈이 부셔서 얼굴을 볼 수가 없네~”라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이 말은 의도한 것이거나 미리 생각한 것은 아니고 민채를 본 그 순간에 무의식에 가깝게 순간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민채는 내 말이 약간 과장된 장난인 것으로 느꼈지만 그래도 정말 기뻐했다. 표정에서 그 것을 알 수 있었다. 말로는 “아빠 장난치지 마~”라고 했지만 표정에서 좋아하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좋아하는 것 같아 몇 번을 더 옥신각신 장난치듯 이야기했다. “민채 얼굴에서 빛이나~, 너무 밝아서 볼 수가 없네~” 내가 보기에는 실제로 책을 많이 읽은 그 날에는 민채의 눈과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검고 깊은 눈동자에는 총기가 있고 얼굴에는 자신감이 보였다.
그 날 이후로 어느 순간부터 민채가 약간 바뀌기 시작을 했다. 이제 저녁을 먹고 나면 그냥 자기방으로 가서 책을 읽고 있다. 읽으라는 이야기를 안 해도 그냥 방으로 가서 읽고 있다. 그러다가 잘 시간쯤에 민채방으로 가서 난 장난치듯 이야기했다. “얼굴에서 빛이 나서 그런지 방이 너무 밝아서 눈부셔서 들어갈 수가 없네~, 오늘 책 많이 읽었지? 얼굴에서 나오는 빛을 보니 알겠는데~”라고 이야기 했다. 그러면 민채는 나를 보고 “아빠 놀리지 마~”라고 웃으며 말했다. 물론 표정에서는 이 말을 좋아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웃으며 손으로 “V”표시를 한다. 요즘 민채가 책을 많이 읽는 것은 방에 들어간 시간이나 씻으러 나온 시간을 보면 알 수 있다. 중간에 과일을 준다고 들어가 보면 그냥 같은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고, 문을 열어도 평소처럼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지도 않았다. 방에서 자거나 조는 것이 아니기에 책을 많이 읽은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오늘 몇 권 읽었어?” 라고 물어보면. 민채는 “3-4권 읽었는데~”라고 대답했다.
12월 중순을 넘어서면서 낮에 계속 테니스를 치고도 책을 3-4권 정도 읽으니, 이제 민채는 책 읽는 것에 조금 재미를 붙인 것 같았다. 2018년 12월 20일 경에는 책을 그만 읽고 빨리 자라고 다그치는 날이 좀 더 많아진 것 같았다. 그러면 민채는 “조금만 더 읽고 잘게~, 책 읽는 거 너무 재미있어~”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은 애들을 키우는 부모로서 참 듣기 좋은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라고 속으로는 말을 하고 싶다. 하지만 초등 저학년인 민채가 수업을 마치고 낮부터 18시까지 테니스를 치려면 밤에 잠을 충분히 자야 한다. 그래서 11시 이전에는 꼭 재우고 8시까지 하루 9시간은 꼭 잠을 자게 하려고 노력을 했다. 어느 날부터 이제는 민채에게 책을 그만 읽고 자라고 해도 몰래 자기방에 들어가서 우리가 약속한 책을 읽기도 했다. “이 책은 너무 재미있고, 또 줄글 책 읽는 것이 너무 재미있다”고 내게 말을 했다. 이렇게 말하면 난 또 대답을 해야 한다. “응~ 민채는 책읽기에 재능이 있고, 책을 읽으니 더 예뻐 보인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민채 스스로 알아서 열심히 읽으니 우리가 약속한 50권은 생각보타 빨리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읽은 책 숫자도 금방금방 늘어나기 시작했다. 밤에도 읽고 싶은 만큼 읽도록 그냥 뒀으면 본격적으로 재미를 붙인 이후에 다 읽을 때까지 아마도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민채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늦게 자서 피곤한데 낮에 운동을 무리하게 하면 부상의 위험도 있고 성장기 어린이에게 늦은 잠은 별로 좋지 않다. 민채가 정말 열심히 책을 읽을 때 내게 이런 말도 했다. “아빠~ 책 읽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 해~?” 사실 이런 부분을 민채에게 이해시키고 일찍 재우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다.
민채는 12월 27일 저녁에 50권 읽기를 성공했다. 민채도 기뻐했고 나도 기뻤다. 난 민채에게 “우리 귀염둥이 잘 했어~, 대단한 어린이야~, 아빠는 민채가 성공할 줄 알았어~” 등 당시에 할 수 있는 칭찬은 모두 한 것 같다. 그리고 먹고 싶은 것을 물어보니 민경이와 민채 모두 “치킨~”이라고 말했고, 약간 늦은 시간이지만 치킨을 사줬다. 민채는 기뻐하며 아주 잘 먹었다. 먹는 모습을 보는 것도 기쁘지만 그 기쁨 이상으로 오늘은 내게 큰 의미가 있고 아주 기쁜 날이다. 지금쯤이면 초등학생인 민채는 그 날을 잊었겠지만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이 날은 기쁜 날로 기억 될 것이다.
이후에도 민채는 집에 있는 이런 저런 책을 계속 많이 읽는다. 그리고 읽고 싶은 책은 메모해 두면 같이 도서관에 가서 빌리거나 거기에도 없으면 사주겠다고 말했다. 난 이런 책 읽는 습관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앞으로도 칭찬을 적절히 잘 활용하려 노력했다. 또 쉴 때는 놀리 듯 장난도 쳐 주려고 하고 있다. 그러면 민채는 아주 크게 웃으며 약간 격하게 반응하는데 그것도 재미있다. 그리고 민채가 읽은 것을 내개 이야기 해 줄 때는 잘 들어주려고 노력한다. 가끔은 맞장구도 일부러 과하게 쳐주기도 해야 한다. 그리고 궁금한 것을 물으면 가르쳐 주기도 하다가 귀찮고 힘들면 인터넷이나 사전을 찾아보라고도 다그치듯 이야기 했다. “사전이나 인터넷에서 찾아봐~.” 모르는 것은 스스로 찾아보는 습관을 어려서부터 들여야 한다. 솔직히 직장생활을 하는 아빠로서 이렇게 하는 것이 내게 힘에 부칠 때도 있다. 핑계 아닌 핑계로 내가 책을 읽을 시간이 부족하다. 이건 평소에 애들의 행동이나 말투 등 사소한 것도 관심을 가지고 봐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즐거워서 하는 일이라서 나도 모르게 오늘도 하고 있다.
솔직히 우리 애들은 공부를 썩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초등 고학년인 민경이도 피아노나 태권도 학원을 보내는 등 예체능을 제외하고는 교과 과목 학원을 보내지도 않고, 민채는 테니스를 배운다고 그 마저도 보내지 않는다. 하지만 책을 읽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하려고 나름의 노력을 한다. 그 방법이 맞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교과과목 학원을 보내게 될 것이지만 초등학교에서 만큼은 그냥 스스로 하도록 놔두고 싶다. 이제 초등고학년인 민경이에게도 책 읽기 미션을 내 보고 같이 해봐야 할 것 같다. 자매지간에도 선의의 책읽기 경쟁을 하면 서로에게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