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른국수
우리는 때어나 죽을 때까지 음식을 먹는다.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에도 조금 전까지 눈물을 뿌리리던 그의 관 앞에 퍼질러 앉아서 사랑하던 이의 피처럼 시뻘건 육장을 떠 먹는 독한 종자들이다. 퉁퉁 부은 눈을 한 채로 무얼 먹는다는 것은 이토록 섬뜩한 일이다. 자식을 앞세운 어미가 충격으로 눈이 멀면 멀었지 굶어 죽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예술에선 먹는 행위를 탐욕과 욕망의 키워드로 내세우지만 일상에서 다른 기준 다른 척도로 재단해야 한다. 일테면 엄숙함.
지난 달 강원도 횡성에 있는 예버덩 문학의 집 개소식에 참석 했다. 작가들의 축하 말이 끝나자 사회자가 문학관 뜰로 우리를 내몰았다. 그곳에 공연이 마련되었는데 모시 한복을 곱게 입은 여자가 잡풀 무성한 뜰로 자박자박 걸어 나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정악을 처음 들었다. 소리는 관능적이리 만큼 황홀했다.
공터 같은 문학관 뜰에서 나는 왜 어린날 어머니 심부름을 자주 가던 혜자네 국수집을 떠올린 것일까? 그 한적한 국숫집 안 마당을 검은 차일 아래 줄줄이 내걸린 새하야 국수 다발 기다란 장대에 나란나란 펴 넌 국수는 멀리 보면 뽀얀 광목처럼 보이기도 했다. 국수 다발이 바람에 흔들리듯 여자으이모시 치마 나부끼더니 국수를 한 젓가락 머금은 듯한 입 새로 신음 같은 영묘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입속 점막을 애무하던 국숫발을 한꺼번에 빨아 당기듯 몸 안의 소리를 쭉 빨아 당겨 한숨처럼 토하는데 정말 지 매료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안 그래도 나는 뭔가에 잘빠지는 성향인지라 그 날 정악에 중독되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여며야 했다.
그러니까 내가 하는 국수는 정악의 사촌쯤 되는 것으로 매우 관능적인 음식이란 얘기다. 인간이 파스타나 면을 흡입하기 좋아 하는 이유는 모유에 대한 아련한 추억 모성 결핍과 연관이 있다. 김숨의 소설 '국수'의 주인공은 성격이 냉골 같은 여자다. 여자에겐 자기를 키워준 계모가 있다. 아이를 낳지 못해 이혼당한 뒤 아버지를 만나 재혼했지만 식모살이를 위해 들어온 사람처럼 잔뜩 기죽어 지낸다 어린날 여자는 계모가 끓여준 국수 가닥을 숟가락으로 뚝뚝 끊어 죄다 쏟아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계모의 국수는 손으로 만든 국수에 달랑 양념장 하나만 곁들이는 소박하다 못해 궁상맞은 국수다. 국수 위에 쇠고기 고명이나 달걀 지단이 얹어있는 대도 그랬을까?
인공수정으로 어렵게 임신한 여자가 배속의 아이를 사산한 뒤에도 계모는 국수를 끊여 주었다. 이상하게 도 이번에는 궁상맞은 그 국수를 한 그릇을 달게 받아 먹었다. 세월이 흘러 계모가 설암에 걸리자 여자는 계모에게 그 부드러운 국수를 끊여주기 위해 밀가루의 반죽을 시작한다. 소금이 물에 녹기를 기다리다. 야박스럽울 만큼 조금씩 물을 부어가며 밀가루를 뒤적인다. 밀가루가 축축하게 손에 젖어들고 엉기는 시간을 견딘다. 여자는 양푼에 들붙으려는 밀가루를 손가락으로 악착스레 긁어내며 생각 한다. 계모처럼 차지고 끈기 있게 반죽하려면 얼마나 손복이 저리도록 이겨대야 하는 걸까? 석녀인 계모의 운명을 자신이 그대로 닮는것 아닐까 ? 여자는 증오심을 가지고 반죽을 누른다. 꾹꾹
국수 끓인 뒤 양념장이 고루 섞이게 면을 뒤적여 계모 앞에 내놓는다. 국숫발이 저가락에서 서너 가닥 말려 올라오지만 계모는 그 국수를 삼키지 못한다. 여자는 계모가 먹기좋게 숟가락으로 국수를 뚝뚝 끓어 주며 묻는다. 내가 전에 국수를 쏟아버려 서운하지 않았는냐고? 냉골 같은 의붓자식을 키우느라 차라리 도망가지 그랬느냐고? 계모는 서운한 게 하나도 없다고 한다. 왜냐? 계모는 손국수를 끓이는 사람이니까 의붓자식인 여자와도 언젠가는 국수 반죽처럼 차지게 엉길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까? 이처럼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체인 국수가 잔치음식으로 쓰이는 건 당연한 이치 김숨의 소설에 나오는 국수는 대구 10미 중 하나인 누른 국수다. 충청도 출신인 김숨이 미처 몰랐거나 언어의 추상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국수라는 제목을 달았는지도 모른다.
대구 서문시장 국수골목에 가면 '누른국수' 또는 '누른국'이라 써붙인 가게가 즐비하다. 예날엔 좌판에 여러사람이 엉덩이 붙이고 먹었다. 콩가루를 살살 부려가며 반죽한 국숫발로 끓인 누른국수는 씹을 것도 없이 목으로 훌렁 넘어간다. 부드럽기로는 국수 중 최고다 요즘은 세태에 맞게 호박 고명도 슬금슬금 올라오지만 양념장만 넣어야 담백하고 고소한 맛을 제대로 즐길수 있다. 대구는 '누른국수' 못지 않게 '건진국수'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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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靑泉 池古瓮
첫댓글 오늘 이슬비도 내리는데, 애호박 고명에 맛있는 양념간장을 겻들인 국수를 안식구에게 주문 해 볼까나! 감사
그래유 그보다 홍두깨로 밀어서 만든 칼국수가 더 맛있을 텐데
하찮은 음식인 국수지만 이렇게 엉킨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습니다. 감사
그래서 난 칠푼이 되었지만 어찌 이리 하나의 주제로 이렇게 실감나게 글을 쓰는 이런 진솔한 작가들이 참 부러워유
한 그릇 "국수"에 얽힌 우리네 조상들의 숱한 에피소드. 緣과 恨 그리고 情까지를 상징하는 이 일화 한 토막, 좋은 글 감사
저는 풀대국수는 먹어 봤어도 누른국수는 아직 안 먹어봐서 언제가 대구가면 서문시장 찾아가 먹어봐야지 누른국수 맛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