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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순교신앙
이사례 권사(이기풍 목사 딸)
[선교편]
사탄이 우굴거리고 사신 우상만을 섬기며 암흑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이 나라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사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에 미국선교사들을 통하여 복음의 빚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복음을 알게 된 후에 영안이 열리어 회개한 후에 예수를 믿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신 하나님께 먼저 영광과 감사와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한국에 성령의 불이 불기 시작했던 1907년에는 아버지가 평양신학교 제1회로 갓을 쓰고 7명이 졸업을 하게 되었던 해였습니다. 이 때에 독노회가 조직이 되었고 제주도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교장이셨던 마포 삼열 선교사가 졸업생들을 향하여 누구가 제주도에 선교사로 가겠는가?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이 발언에 모두 숙연해졌고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한 채 묵묵히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즉시 대답을 못했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제일 어려운 문제는 자기가 제주도 바다에서 죽느냐 사느냐의 생사의 문제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주 적은 돛단배를 타고 노를 저어 갔기 때문에 조류가 심한 추자도 부근에서 파선이 되어 사망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마음속으로는 제주도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을 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가슴속에서는 복음의 불이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던 청년시절에 무자비하게 교회를 박해하고 선교사의 턱을 돌로 쳐서 피 흘리게 했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눈물로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고 구원함을 받은 후 완전히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어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도 감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라면 자기의 목숨을 기꺼이 바치겠다는 순교의 신앙이 아버지의 가슴속에 꽉 차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결심을 했으나 어머니의 의견을 들어 본 후에 결정하기 위하여 즉시 대답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제주도 선교사 파견문제를 들은 후부터 아미 제주도에 가기로 결심하고 이 문제를 놓고 순교의 신앙을 주시라고 열심히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서 모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심히 통분히 여기시며 "왜 우리가 가겠다고 대답을 하지 않고 왔습니까? 우리가 가지 아니하면 누가 저 불쌍한 영혼을 구원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갑시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 다음날 마팻 선교사님께 우리가 가기로 결심했다는 말을 하자, 마팻 선교사님이 너무나 감격하여 우셨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이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보다 먼저 성령세례를 받은 후 순교신앙으로 자기의 몸을 분토와 같이 버리셨던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한국인 최초 제주도 선교사 이기풍 목사와 윤함애 사모
어머니는 황해도 안악 중골에 윤진사의 딸로 태어나 불행하게도 15세때 초학병(말라리아)에 걸려 18세때는 뼈와 가죽만 남고 움직일 수도 없게 되어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을 때 언더우드 선교사의 전도를 받은 김채봉씨가 어머니의 방에 들어와 열심히 전도를 하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마음의 평안을 찾게 되고 구원의 기쁨으로 날마다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어느날 새벽에 기도하고 있을 때 흰옷을 입은 사람이 전지로 어머니의 몸을 비추는 순간 시체와 같았던 어머니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게 되었습니다. 먹지 못하였던 음식도 먹게 되고 힘을 얻게 되어 한 달에 한 번씩 황해도 안악에 전도하러 오는 마포 삼열 선교사를 찾아가서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몇 달 후 세례를 받게 되었고 이 광경을 본 동리 사람 중에 외할아버지에게 양코베기가 처녀의 몸에 손을 대었다고 고자질을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외할아버지는 파평윤씨 가문을 망쳤다고 당장 가위로 처녀의 귀한 머리카락을 중과 같이 잘라 버렸습니다. 외출복을 빼앗고 방속에 강금을 시켜버렸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밤 울면서 전도의 문을 열어 주시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강금 당한지 일주일이 지난 후, 밤에 기도하다가 잠깐 잠이 들었을 때 "담을 파라" 라고 하는 주님의 음성에 감짝 놀라서 즉시 나가 호미를 찾아 새벽2시에 밖에 나가서 삼일동안 담을 판 것이 겨우 개가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 뚫렸습니다. 어머니는 석달 그믐날 머슴의 옷을 빌려 입고 얼굴에 거뭇거뭇하게 숯덩이로 칠한 후 남자로 분장을 하였다고 합니다. 성경책 한 권을 허리춤에 묶고 방에서 나가기 전에 간절한 마음으로 감사기도를 드리고 밖으로 나오셨다고 합니다. 3일 동안 파 놓았던 개구멍으로 겨우 빠져나가서 낮에는 남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밤에는 남의 집 바캍 아웅이에서 웅크리고 밤을 지새웠다고 들었습니다. 평양을 향하여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무서운 밤길에도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며 순교신앙으로 모든 고난을 끝까지 참아, 드디어 15일만에 평양에 도착할 때는 발에 동상으로 피가 나와서 하얀 버선에 벌건 피가 물들었다고 합니다. 내가 어릴 때 어머니의 이 슬픈 이야기를 들으며 동네 아이들이 어머니를 보고 "야! 거지야!"하고 돌을 던졌다는 말을 듣고 너무나 억울해서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의 성함은 윤함애셨고 옛날 미국 선교사님중에서 논문을 쓸 때 "윤함애와 개구멍"이라는 제목으로 써서 학위를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몇 달전 극동방송에서 오전 6시20분, 경건의 시간에 '어머니와 개구멍' 의 사건이 방송되는 것을 듣고 너무나도 깜짝 놀랐습니다.
어머니는 내강외유에 성숙된 신앙인으로서 말할 수 없이 겸손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순교신앙으로 평양에 도착했을 때 마팻 선교사님의 기쁨은 말할 수가 없었고, 즉시 게일 선교사님댁(의사)양녀로 6년동안 생활을 하는 동안에 '아기 받는법'을 철저하게 배우셨다고 합니다. 평양 숭의여학교를 1회로 졸업한 후 마팻 선교사님의 중매로 아버지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양에서 인천까지 걸어오신 후 인천에서 조그마한 종선을 타고 군산을 거쳐 목포까지 오는 동안에도 풍랑을 만나 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목포에 어머니를 머물게 한 후 아버지가 먼저 1908년 2월달에 제주를 향해 떠났습니다. 평양에서 듣던 말대로 추자도 부근에서 조류에 휩쓸려 적은 배가 산산조각이 나버려 아버지는 깨어진 배 조각을 두손으로 꼭 움켜쥐고 하루 반 동안을 표류하셨다고 합니다. 제일 어려웠던 시간은 밤인데 아무 물체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바다 위에서 추운 것도 참을 수 있고 배고픈 것도 참을 수 있었으나 잠 오는 것을 참기가 심히 어려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밤하늘을 쳐다보며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계속하다보니 먼동이 트고 밝아올 때 추자도에서 구사일생으로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제주도의 상륙하게 되었으나 아무도 반겨주는 사람이 없었고 평양사투리 때문에 대화하는데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으셨다고 합니다. 예수라는 말만 꺼내면 "설러 버려, 설러 버려, 야가기 끊어지겐" 하고 도망을 가 버렸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대원군께서 천주교신자들 일만명을 학살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학살을 당한다는 인식 때문에 도망을 가 버렸던 것입니다.
제주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한라산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꼭 한달이 걸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집집마다 문을 열어 주지 않기 때문에 때때로 마굿간에서 잘 수 밖에 없었고 먹을 것이 없어서 흘러내리는 물을 마시며 칡뿌리를 씹어 보았으나. 결국 영양실조로 쓰러졌다고 합니다. 다행히 목사의 신분을 몰랐기 때문에 장정 네 사람이 들것에 실어 오랜만에 사람이 자는 방에 들어오게 되어 의식에서 깨어 날 때 기쁘셨던 그 마음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주도에서 제일 처음 열매로 이 집주인인 해녀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1909년 5월달에 제주도의 큰 홍수가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복개공사를 해서 길이 되었지만 제가 어릴 때 만해도 관덕정 옆의 큰 냇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홍수로 인해서 급류에 떠내려오는 돼지떼들 혹은 고리짝등이 떠내려오는데 큰 통나무를 부여 잡은 채 40대나 되어 보이는 여인이 떠내려오는 것을 양쪽에 늘어서서 구경하던 제주도 주민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깝게 바라만 보고 있을 때 아버지가 옷을 다 벗어 던지고 속바지만 입은 채 물에 뛰어 들었습니다. 그 순간에는 아버지가 죽는 것을 각오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물에 뛰어들자 있는 힘을 다하여 통나무를 언덕으로 밀어 부쳐 사람들의 손에 땀을 쉬게 하는 순간 이 여인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야소교목사라는 자가 과히 나쁜 사람이 아닌 것이 인식이 되자, 조금씩 교회 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어머니 역시 묵묵히 수많은 산모들을 위하여 희생적으로 봉사하게 되자, 하나 둘 교회로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특별히 죽은 사람의 시체처리(장례)를 하고 나면 꼭 예수를 믿게 되는 일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한성 신문사건 때 박영효 대감이 아니었더라면 돌로 맞아 죽을 뻔했었고 기타 여러 가지 헤아릴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을 순교신앙으로 극복해 나아가 13년 동안에 크고 적은 교회 9개처를 개척하셨고 영흥학교와 유치원을 설립하신 후 육지로 나오게 되셨습니다.
2차 선교때 제주도에 내가 3세 때 가서 10세 때까지 있었기 때문에 7살 가량 되었을 때 추억이 가끔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가 새벽기도에 가셔서 아침식사 때가 되어도 오시지 않으면 제가 종종 아버지를 모시러 교회에 가곤 했습니다, 어느날 아침 문을 열고 교회에 들어 섰을때 강대상을 부여잡고 아버지가 큰 소리로 우시면서 기도하시던 음성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바듸의 은혜 감사합네다. 나는 죄인중에 괴수외다" 라고 우시면서 기도하셨기 때문에 나도 신발장 옆에 쭈구리고 앉아서 아버지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눈물이 글성한 채 아버지의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던 그 때의 광경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육지에 나와서 벌교라는 시골교회에 와서 무만동, 잣고개, 낙성, 낙안 이렇게 다섯군데를 두루 다니면서 새벽부터 밤까지 전도하기 위하여 이마을 저마을을 두루 돌아 다니셨습니다. 그 때 아버지의 교통편은 짐을 실을 수 있는 아주 낡아 보이는 헌 자전거였습니다. 그 시절에는 길이 자갈밭이 되어 수시로 자전차 타이어가 펑크가 나서 으레히 펑크를 때우는 고무와 공기를 집어 넣는 기계가 꼭 실려 졌었습니다. 벌교 교회 목사관은 서편에 있는 산꼭대기여서 눈이 많이 올 때는 언제나 길가에 기다리고 있다가 가파른 언덕에 올라 갈 때는 자전거를 뒤에서 밀어드리는 것이 저의 큰 일과중에 하나였습니다.
우리집(목사관)은 산꼭대기에 있었고 대문이 없었습니다. 수시로 소록도에서 나온 환우들이 어머니를 찾아 왔습니다. 우리집 뒤안에는 이 분들의 국그릇, 밥그릇, 수저, 젓가락등 다섯벌이 들어 있는 보퉁이가 걸려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제일 반가워 하셨던 손님들은 이 환우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동리에서는 우리집을 환우들의 식당이라고 불리웠습니다.
아버지가 57세때 어머니가 47세때 저를 나으셨기 때문에 제주도에서 5살 때 아버지의 환갑을 지냈고 벌교에 오실 때는 거의 70세에 가까우신 나이셨습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길을 걸어 갈 때는 어디를 가나 "이 아이가 손자냐?" 라고 하는 말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슬프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해서 아버지 등뒤에 돌아가 가끔 눈물을 닦을 때가 많았습니다.
[순교편]
이기풍 목사
벌교에 와서 5학년때부터 신사참배 바람이 거세지게 되었습니다.
4월29일 천장절날 전교생이 신사에 가서 훈육선생님이 신사로 향하여 경례하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우리집에 구호가 "죽어도 신사에 절하지 말라" 였기 때문에 저는 반드시 서 있었고 전교생은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혔습니다. 물론 학교에 돌아와서 직원실에 불려 갔습니다. 너는 급장의 책임이 있는데 건방지게 왜 신사에 절하지 않았느냐? 라고 큰 소리로 야단을 쳤습니다. 저는 어렸지만 "성경 말씀에 하나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로 씌어 있기 때문에 죽어도 절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훈육선생은 더욱 화가 나서 아무래도 이 아이는 '불온사상을 가진 집아이'라고 야단을 치더니 그 후에 경찰에 연락을 했는지 쌀 배급도 주지 않아서 감자만 먹으며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했습니다.
아버지의 죄목은 3가지였습니다. 첫째, 신사참배 거부 둘째, 미국 선교사와 같이 전도를 했기 때문에 스파이라고 불리웠고 셋째로, 묵시록을 전문적으로 설교할 때마다 일본은 곧 망한다. 라고 강대상을 치며 말씀하셨기 때문에 셀 수 없이 경찰서에 연행을 당했습니다.
특별히 1934년 초에 노년기에도 불구하고 전남 여수 남면 우확리 교회에 부임하셨습니다. 이 섬을 기점으로 하고 돌산, 안산 등 5개처의 섬을 배를 타고 다니시면서 순교신앙으로 복음전파를 하셨습니다. 하필, 우확리교회 목사관 뒷산에 신사가 있어 동네 사람들이 신사참배할 때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죽음을 각오하고 집에서 기도만 하고 계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신사참배하는 날은 으례히 여수 경찰서에서 나와 아버지 손에 수갑을 채우고 1시간을 배를 타고 가서 여수경찰서에 강금을 당하셨습니다. 이 시기가 대동아 전쟁 말기였기 때문에 종교 탄압은 점점 심하게 되었습니다.
1940년 11월 15일 새벽 2시에 순천노회 산하 목사님들 17명이 일제 검거 당했습니다. 16명의 목사님들은 순천 경찰서에, 아버지만은 17호 죄수로서 여수경찰서에 구금을 당하셨습니다. 이 때 아버지 연세는 72세였고 국가법에 의하면 70세 이상은 구속할 수 없는 법규였으나 17명 목사중에 제일 악질분자로 인증을 받고 여수경찰서에 2년간 무수한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아버지가 뼈와 가죽만 남은 시체와 같이 되고 식음을 전폐하고 위험한 상태에 직면하게 되자 여수경찰서에서 죽였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광주형무소로 이감할 때까지 잠깐 집에 있으라고 아버지에게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이대로 경찰서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완강히 고집하자 아버지를 개처럼 경찰서 밖으로 끌어내어 아버지는 눈물을 머금고 임시 가석방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미국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추방을 당할 때 순천역에 배웅하러 나온 목사는 아버지 한사람 뿐이었다고 하니 아버지를 최고 악질로 치고 모든 서류를 갖추어 광주형무소로 보내려고 했으나 1942년 6월 20일날 오전 8시에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노년기였기에 광주형무소에 가지 못하고 75세에 순교하게 된 것을 어머니는 못내 아쉬워 하셨습니다. 한국교회가 순교신앙으로 헌신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때 죽었던 영혼들이 살아나고 이 사회가 복음의 빛으로 밝아지리라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아버지의 생년월일이 1865년 12월 23일로 발표가 되었었으나 호적등본에 1868년 11월 21일로 기록이 되어 있어 이 지면을 통하여 정정합니다.
(창골산 봉서방 카페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