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화장실에 들어간 여자
여자가 남자 화장실에 들어갔다. 담배꽁초가 삐딱하게 고개를 꼬고서 마치 고급관리 본부인이 첩을 째려보듯이 눈총을 쐈다.
그 문화원은 화장실이 각각 하나씩뿐이다. 여자 화장실은 30여 명이 이용하니까 미어터지는 데 비해, 남자 화장실은 직원 두 사람만 들락거리니 하릴없이 늘 비어 있다. 여자 화장실 앞은 항상 시끄럽고 번잡했으며 수선스러웠다.
화장실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일은 차라리 곰보 얼굴에 분칠하고 말일이지 열불이 난다. 이런 내 성질머리를 눈치 챈 듯 굳게 닫힌 남자 화장실 문짝이 아무도 모르게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스리슬쩍 이용하면 될 게 아니냐는 기발한 발상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클로즈업되었다.
그날은 집에서부터 결심하고 갔다. 아니나 다를까. 시민의식이 높은 교양 있는 여인들이 화장실이 맞붙은 좁은 복도에 가래떡을 뽑아 놓은 것처럼 일렬로 쫙 서있다. 보거나 말거나 등을 꼿꼿이 펴고 남자 화장실 쪽으로 당연히 걸어갔다. 손잡이를 비틀어 문을 확 연다. 겉으로 보기엔 대담해 보이겠지만, 사실은 심장이 쿵덕쿵덕 뛰었다.
촉수 낮은 전등 빛이 좁은 화장실 벽을 싹 핥는다. 혼자 사는 남정네 방에 몰래 들어온 것 같아 움찔해진다. 이러다가 노크 소리가 나면 문을 열고 멋쩍게 눈을 마주치며 나가야 할 것이다. 우선, 핸드백을 걸어놓고 보자.
벽걸이는 고리가 부서져 나가고 밑동만 부스럼딱지처럼 붙어 있다. 남자는 핸드백이 없으니까 벽걸이에 관심이 없는가. 어디에다 핸드백을 놓아야 할지 두리번거리다 휴지를 뜯어 양변기 물통 위에 깔고 핸드백을 올린다. 바닥으로 와락 떨어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신경이 자꾸만 핸드백 쪽으로 간다. 남자는 달거리를 안 하니 휴지통도 없다. 휴지통이 없으니 오히려 깔끔하긴 하다. 최소한의 필요로만 채워졌다. 화장실에서만큼은 남자가 여자보다 단정하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 휴지통에 화장지를 버려온 습관이다. 양변기 속에다 휴지를 던지려고 하니 왠지 막혀버릴 것만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휴지를 손아귀에 으스러지도록 쥔다.
뻔하고 통속적인 말이지만, 계략이 많은 남자는 눈퉁이에 생달걀 굴려가며 아등바등 살아주던 부인이 세상을 먼저 하직하게 되면 이곳에 들어와서 배시시 웃는다지. 시대는 변했다. 변해도 엄청나게 변했다. 남자가 퇴직금을 타서 부인에게 안겨주고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면 여자가 화장실에 들어간다지. 은밀히 미소 짓다가 엄지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을 뻥 튕기며 소릴 지른다지.
“자기 멋쟁이!”
만약 우리 집 남자가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버린다면…. 볼 일도 안 본 채 밑도 끝도 없는 생각에 빠져든다. 우리 집 남자는 퇴직금도 이미 다 써버렸으니 ‘자기 멋쟁이’라고 좋아할 팔자도 못된다. 창피한 일이지만, 우리 집 운영권과 경제권을 남자가 쥐고 있다. 나는 그저 밥이나 하고 빨래나 했지 무엇 하나 내 힘으로 할 생각을 안했다.
가령, 전화가 고장 나도 고칠 생각을 안 하고, 전기가 나가도 몇 날 며칠이고 촛불을 켜놓았으면 켜놨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외진 산골에 살면서 가스가 떨어지면 가스통도 갈아 끼우지 못한다. 동그라미가 다섯 개만 넘어가면 인지하지 못해 은행 일도 못 본다. 그 흔하디흔한 운전도 못 하니 혼자서는 꼼짝달싹 못하는 신세이다.
따지고 보면 세상 물정에 우둔한 아내 때문에 우리 집 남자는 자동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정확하고 빈틈없이 철두철미한 사람이 되었다. 세상을 손금 보듯 꿰뚫어보는 남자 덕분에 이 몸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무능의 대표이사로 자태가 더욱 뚜렷해지는 것이다. 남자가 없으면 밥 먹고 살기도 어렵고 욕먹고 살기도 어려울 것이다. 어느 날 홀연히 이 남자가 내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공포를 남자 화장실이 은근히 조성하는 듯했다. 사지에 힘이 쪽 빠지고 몸이 부르르 떨린다. 한 됫박 물주전자를 눈에 부은 듯 쌍 눈물이 오줌처럼 줄기줄기 흐른다. 휴지를 북 뜯어 코를 탱 푼 다음 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제 내 촉수는 빳빳한 담배꽁초가 놓인 엑조틱한 재떨이에 꽂힌다. 꽁초는 손만 대도 불이 화끈 붙을 것만 같이 기세가 팔팔하다. 길바닥에도 공원에도 널브러진 담배꽁초가 오늘따라 미묘한 의미를 부여하며 가까이 다가온다.
삐억삐억 담배 피우는 남자를 상상해 본다. 도넛 모양을 만드느라 입을 오므렸다가 숭숭 뿜는다. 긴 꼬리를 흔드는 삼등초의 푸른 연기가 허공을 떠돌다가 흩어진다. 볼때기가 우묵하게 들어가도록 양껏 빨아들였다가 가느다랗게 뿜어낸다. 담배를 손가락 끝에 끼고 공깃돌 굴리듯이 굴리다가 손톱이 닳도록 빤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담배 연기만도 못한 세상이라고 투덜댄다. 때로는 절망이 소멸해서 담배 연기가 되고 때로는 눈부신 희망이 소멸해서 담배 연기가 된다. 언젠가는 자신도 담배 연기처럼 허공을 떠돌리라 생각한다.
그래, 이 세상 어디를 아등바등 찾아가 보아도 돈 안 들고 편안한 곳은 화장실뿐이다. 잠간만이라도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거나 어딘가 사람이 찾을 수 없는 것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을 때 남자는 아무도 없는 완벽한 나만의 방에서 담배를 피우는지도 모른다. 변한 것 같아도 변하지 않고 바뀐 것 같아도 바뀌지 않는 남자. 때가 되면 직장에서 물러나 할 일이 없어 세월 흐르는 것을 아쉬워해도 잘난 체하는 순발력 하나는 녹슬지 않는 존재이다. 가장이라는 애상(哀傷)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어 여자로 하여금 모성본능을 발동케 하는 남자를 나는 좋아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변기에 물소리도 그치고 화다닥 깨는 몽롱의 망상들, 빛의 속도로 오가는 디지털 감정 속에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빨리 나가야 한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남자 화장실을 나온다. 여자 화장실 앞에는 아직도 예의 바른 여인들이 줄에 매달린 염소처럼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뚝심 큰 남자래도 남자는 여자 화장실에 못 들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