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사여귀(視死如歸)
죽는 것을 고향에 돌아가는 것과 같이 여긴다는 뜻으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이다.
視 : 볼 시(見/5)
死 : 죽을 사(歹/2)
如 : 같을 여(女/3)
歸 : 돌아갈 귀(止/14)
(유의어)
시사여생(視死如生)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대문 밖이 저승이라'고 했다. 사람 목숨이 그만큼 덧없다. 왕이나 거지나 죽음은 모두에 공평하게 다가온다. 사람은 어차피 한 번 죽게 마련인데 쓰임에 따라 이룬 일에 따라 태산홍모(泰山鴻毛)의 차이가 있다고 했다.
구차하게 목숨을 빌다 개죽음을 당하는 탐생파사(貪生怕死)도 있고, 영광의 최후를 맞아 영원히 추앙받기도 한다. 적탄을 맞고도 왜군을 물리치고 승리로 이끈 충무공(忠武公)이 바로 죽음으로써 살아난 필사즉생(必死則生)의 삶을 살았다.
죽음을 여기기(視死)를 마치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으로 안다(如歸)는 이 말도 용감하기는 마찬가지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옳은 길을 향하여 돌진하는 용사들이 떠오른다.
중국의 고전 곳곳에 이 말이 사용됐다. 먼저 여불위(呂不韋)가 빈객들의 지혜를 모은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사절(士節)을 보자. "어려운 일에 임해서는 이익을 잊고, 생명을 돌보지 않고 의로움을 행할 때는 죽음 보기를 마치 편안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긴다(臨患忘利, 遺生行義 視死如歸)." 죽음으로 보답하는 선비들의 절개에 대해서 강조했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관중(管仲)에게 관리를 뽑으면서 조언을 구했다. 관중은 청렴한 사람에 형벌을 관장하게 하고, 공손한 사람에게 접객을 맡겨야 한다며 잇는다.
삼군을 지휘하고 진영을 만들어 병사들로 하여금 죽음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바라보게 하는(三軍既成陣 使士視死如歸) 성보(成父)란 공자가 제일이라고 추천했다. 그러면서 관중은 패왕(覇王)이 되려면 역시 자신을 등용해야 한다고 자신만만했다. 한비자(韓非子) 외저설(外儲說) 좌하에 실려 있다.
열자(列子)에 나오는 시사여생(視死如生)도 죽음을 삶과 같이 보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똑 같다. 부(富)를 가난과 같이 여긴다는 시부여빈(視富如貧)의 대구로 중니(仲尼)편에 등장한다. 사람이 죽은 후 비로소 평가가 제대로 된다는 개관사정(蓋棺事定)이란 말은 두보(杜甫)의 시구에서 왔다.
떵떵거리던 삶을 산 사람이 오명이 만대에 이르고 이름 없던 삶을 살다가 유방백세(流芳百世)인 사람도 있다. 우리의 오늘을 있게 한 구국선열들과 적과 싸워 목숨을 바친 전몰장병들은 후자의 사람들이다. 나라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장병들을 자그마한 규정에 의해 섭섭하게 대우한 사례가 종종 드러난다. 특혜를 바란 희생은 아니라 해도 우대는 많이 할수록 좋다.
삶과 죽음에 대한 단상
부고장이 날아왔다. 살만큼 살다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은 죽음이 오히려 축복으로 여겨지나, 아직 갈 때가 되지 않은 분들이 가니 안타갑다. 그래서 잠시 삶과 죽음에 대하여 자신과 대화를 해 보고자 한다. 삶과 죽음은 서로 의지해 있는 것이 아닌가?
죽음이 없으면 삶도 의미가 없고, 삶이 없으면 죽음은 아예 존재할 수가 없다. 태어나서 죽지않는 사람이 없고,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늘 보고 경험한다. 그 만큼 죽음은 우리 삶에 친숙한 한 부분이다.
과거 삼국지를 읽다 보면 시사여귀(視死如歸)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그 책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로 이해 되었으나, 지금은 죽음을 당연히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는 마음으로 이해된다.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듯이 죽음을 맞이 하니 두렵거나 피할 이유가 없다.
열자(列子)는 "삶과 죽음은 축복이다"고 했다.
可以生而生, 天福也.
可以生而不生, 天罰也.
사람으로 태어나 산다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복이요. 살아야 함에도 살지 않는 것은 하늘의 벌이다.
可以死而死, 天福也.
可以死而不死, 天罰也.
죽어야 할 때 죽는 것은 하늘의 복이요. 죽야야 할 때 죽지 않는 것은 하늘의 벌이다.
제 아버님을 하늘 나라로 보내고 슬픔에 잠겼을 때 열자가 한 위 말이 떠올라 당장 '고아가 되었습니다'는 제목으로 망부가(忘父歌)을 쓰며 열자의 위 글을 인용하였다.
제 고향 후배가 어린 시절에 아버님을 여의고 엄격한 조부모님과 헌신적인 어머님의 가정교육을 받고 자랐다.
조부님은 마루에서 반듯이 앉아 낮 잠을 자듯이 죽음을 맞이 했다고 한다. 당시 조모님은 가족들에게 일체의 곡(哭)을 못하게 하고, 소복(素服; 흰옷)을 입고 춤을 추셨다고 한다. 인생을 달관한 분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죽음을 두려워 하거나 죽음뒤로 도망가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축복으로 맞이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삶과 죽음의 천도(天道)가 아닌가 생각한다.
장자 내편(莊子 內篇)
大宗師 2-1 태어남도, 삶도, 죽음도 모두 축복이다
死生 命也 其有夜旦之常 天也.
죽음과 삶은 숙명이니 밤과 낮이 일정하듯이 하늘의 이치일 뿐이다.
人之有所不得與 皆物之情也.
그것은 사람이 어찌 할 수 있는 바가 없으며 모든 것은 사물의 실정일 뿐이다.
彼特以天爲父 而身猶愛之 而況其卓乎.
저 사람들은 하늘을 아버지로 여겨 몸으로 그것을 사랑하는데 하물며 그보다 더 뛰어난 道임에랴!
人特以有君爲愈乎己 而身猶死之 而況其眞乎.
사람들은 임금을 자신보다 더 뛰어나다 여겨 목숨까지 바치는데 하물며 그 참된 道임에랴!
泉涸 魚相與處於陸 相呴以濕 相濡以沫 不如相忘於江湖.
샘이 마르면 물고기들은 땅 위에 모여 서로 습기를 뿜어 물거품으로 적셔주지만 강과 호수 속에서 서로를 잊고 있던 때만은 못하리라.
與其譽堯而非桀也, 不如兩忘而化其道.
마찬가지로 요 임금을 칭송하고 걸 임금을 비난하는 것은 둘 다 잊고 그 道에 동화되느니만 못하다.
夫大塊載我以形 勞我以生 佚我以老 息我以死.
자연은 나에게 육체를 주어 우리로 하여금 삶을 영위하기에 수고롭도록 하며, 늙게 함으로써 우리를 편안케 하고, 죽음으로써 우리를 쉬게 한다.
故善吾生者 乃所以善吾死也.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삶을 잘 영위한다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의 죽음을 잘 맞이하는 것이다.
죽음과 삶은 숙명이니 밤과 낮이 일정하듯이 하늘의 이치일 뿐이다. 그것은 사람이 어찌 할 수 있는 바가 없으며 모든 것은 사물의 실정일 뿐이다. 저 사람들은 하늘을 아버지로 여겨 몸으로 그것을 사랑하는데 하물며 그보다 더 뛰어난 道임에랴! 사람들은 임금을 자신보다 더 뛰어나다 여겨 목숨까지 바치는데 하물며 그 참된 道임에랴!’
우리가 태어남과 죽음을 이해하고, 태어남과 죽음에 대한 문제를 해결한다면 우리 삶에서 모든 문제가 사라진 지복(至福; 그 위에 더 없는 행복)의 삶을 살게 된다. 태어남도 축복이고 죽음도 축복임을 알면 우리의 삶 또한 모든 문제가 사라진 축복일 뿐이다.
태어남도 자연(自然)일 뿐이고, 죽음도 또한 자연(自然)일 뿐임을 알면 우리의 삶 또한 있는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이 된다. 사람들은 하늘을 숙명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거역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하늘을 주관하는 道를 어찌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道란 우리가 태어남도 삶도 그리고 죽음도 축복임을 아는 것이요, 우리가 태어남도 삶도 그리고 죽음도 자연(自然)임을 아는 것이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지만, 지금의 세상에서는 대통령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다만 하찮기 그지없는 자신의 신념(信念)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어리석은 자들은 간혹 있다. 그런 부질없는 신념(信念)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데 세상 만물의 운행을 주관하는 道에 있어서랴!
도(道)란 무엇인가? 道란 곧 자연(自然)이다. 우리 자신이 있는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이 되는 것이 곧 道이다. 우리 자신이 자연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갖고 있는 마음(觀念) 때문이다. 우리에게 마음(觀念)만 없다면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자연으로 보게 된다. 그런 상태가 바로 道인 것이다.
‘샘이 마르면 물고기들은 땅 위에 모여 서로 습기를 뿜어 물거품으로 적셔주지만 강과 호수 속에서 서로를 잊고 있던 때만은 못하리라. 마찬가지로 요 임금을 칭송하고 걸 임금을 비난하는 것은 둘 다 잊고 그 道에 동화되느니만 못하다.’
사람들은 큰 어려움에 처하면 서로를 도와주고 격려하며 그 고난을 이겨내기 위하여 애쓰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런 고난이 없을 때 서로를 모르고 살았을 때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옛날 사람들은 세금으로, 전쟁으로, 탐관오리의 약탈로 먹을 것을 뺏겨 굶어 죽는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의 세상에서는 굶어 죽은 사람은 없다. 사람들에게 굶어 죽는 경우가 없다면 실질적인 어려움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유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런 상황을 어려운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런 상황을 몸으로 받아들여 즐길 수 있다. 우리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고난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우리 자신에게 힘든 것이고, 우리 자신이 처한 상황이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즐거울 뿐이다.
우리 자신이 세상임을 알면 세상 모든 것에 즐거운 일만 있지만, 우리 자신을 세상에 맞추면 우리 자신은 모든 것이 괴로울 뿐이다. 요 임금은 나라를 달 다스린 성군(聖君)이고, 걸 임금은 폭정을 일삼아 나라를 멸망시킨 폭군(暴君)이다.
요 임금의 선정(善政)과 걸 임금의 폭정(暴政)과 같은 역사적 기록을 거울삼아 우리의 삶에 반영하면 우리 자신이 보다 나은 삶을 사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지복(至福)만이 존재하는 참된 삶을 사는데 턱없이 부족하다. 차라리 그런 역사적인 기록을 모두 잊고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마음(觀念)을 버려 참된 나(眞我, 靈我)를 찾으면 오직 지복(至福)만이 존재하는 참된 삶을 살 수 있다. 그것을 道에 동화된다고 하는 것이다.
‘자연은 나에게 육체를 주어 우리로 하여금 삶을 영위하기에 수고롭도록 하며, 늙게 함으로써 우리를 편안케 하고, 죽음으로써 우리를 쉬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삶을 잘 영위한다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의 죽음을 잘 맞이하는 것이다.’
부모의 몸을 빌려서 자연은 우리에게 육체를 주었고, 비록 수고롭지만 우리의 삶을 잘 영위하게 하였고, 늙게 함으로 편안하게 하였으며, 죽음으로써 우리를 쉬게 하였다. 그렇게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의 우리의 삶에는 조금의 모순도, 조금의 번뇌도 없다.
그것이 우리의 참된 삶이라는 것을 알면 우리에게는 태어나는 것도 축복이요, 사는 것도 축복이며, 죽는 것 또한 축복으로 맞이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참된 삶이다.
태어나서 잘 살다가, 죽음을 잘 맞이하는 것이 우리 삶의 본질(本質)이고 그것이 순생(順生), 즉 제대로 사는 참된 삶인데, 우리는 욕심으로 살면서 번뇌에 휩싸이고, 죽음이 두려워 피하려고 하는 역생(逆生), 즉 거꾸로 사는 거짓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죽음을 축복된 것으로 맞이하면 욕심과 온갖 번뇌로 우리의 생생한 삶을 해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죽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몰라 죽음을 두려운 것으로 여긴다면 우리의 축복되고 생생한 삶은 온갖 번뇌로 휩싸이게 된다.
장자(莊子)가 말하는 道에 동화된 삶, 즉 참된 삶은 바로 죽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태어남과 삶, 그리고 죽음이 모두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육신인생은 종교를 믿어도 죽고, 안 믿어도 죽는다
지구촌에 육신을 가진 인간은 마음이 간헐적으로 공포로 불안하기 때문에 소원을 이루게 해주는 전지전능하다는 신불(神佛)을 믿어온다.
그 가운데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주장하는 불교가 있고, 천당에서 영생과 복락(福樂)을 주장하는 기독교, 천주교가 있고, 알라신을 믿는 종교도 있다. 그 외도 우매한 대중을 혹세무민(惑世誣民)하여 돈 빼앗는 사이비종교도 부지기수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육신을 가진 인간은 종교를 믿어도 운명의 때가 되면 죽음을 맞게 되고, 종교를 안 믿어도 역시 운명이 정해진 때가 되면 어김없이 죽고 만다는 것이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은 불교 진리의 하나이다.
따라서 모든 경(經)들을 믿고, 읽고 간절히 기도를 해도 지구의 모든 남녀는 타고 난 정명(定命)에 의해 살고 죽어갈 뿐이다.
다만 우리 육신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것이 마음이요, 생각인데, 기도로써 희망의 기도를 하면, 신불(神佛)이 아닌 나 자신의 미음이 기적을 만들어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이지만, 지구촌의 인간의 복락(福樂)은 영원한 것이 절대 아닌 일장춘몽(一場春夢)과 같이 허무할 뿐이다.
종교는 왜 믿어야 하는가?
종교를 믿으며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좋은 복락을 받는 것은 첫째, 육신을 조종하는 마음이 안심입명(安心立命)되어 있어 어떠한 인생의 고난이 닥쳐와도 극복하는 마음이 되어있다.
둘째, 언제인가 때가 되면 닥쳐오는 죽음에 대하여 마치 고향에 돌아가듯 시사여귀(視死如歸) 하는 각오를 가지고 인생을 산다는 것이다.
셋째, 인과응보가 반드시 있다는 업보사상으로 인생을 살기 때문에 영원하지 못한 황한 탐욕 때문에 스스로와 가족과 이웃과 사회를 죽이는 악행을 하지 않는다.
부자이건 가난하게 살건 종교를 바로 믿고 살면, 추악한 인생, 추악한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전국 교도소에서 고통을 받고, 또 사형선고 속에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수형자는 전지전능한 신이 감옥에서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닌 수형자 자신이 만든 인과응보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확철대오(擴徹大悟) 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지구상에 모든 종교 가운데 유대인들이 창안한 종교에서 가장 지구촌의 남녀들을 기만해 온다.
첫째, 천지창조설이 얼마나 거짓이고, 황당한 것인가의 근거를 세계적 물리학자들이 논거(論據)로써 밝혀낸 지 오래이고, 천체 물리학자들이 오래전에 천동설(天動說)이 아닌 지동설(地動說)을 밝혀내어 주장한 지 오래인 것이다.
둘째, 예수님의 어머니에게 전지전능한 유일신이 공식 결혼하지 않고 사통(私通)해서 독생자(獨生子)를 낳았다는 주장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주장으로 인류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예수님이 전지전능한 유일신의 독생자라면, 어찌 십자가에서 34세의 나이로 비참하게 죽도록 하나님이 방치했을까?
예수님은 내일로 닥쳐오는 예정된 죽음의 잔을 피하기 위해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새워 울며 하나님께 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독생자를 구원해주지 못했다.
넷째, 왜 유대의 신(神)인 여호와가 천지창조를 했다고 주장하는가? 현 로마 교황 프란체스코는 대부분 문맹자 투성이인 2천년전에 만든 비과학적인 성경은 이제 20세기에 맞는 새로운 '과학적인 주장과 근거가 두렷한' 성경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해서 지구촌에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나는 불경도 새로이 결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은 종교를 빙자하여 일확천금(一攫千金)하려는 사기꾼들은 아니었다. 진리를 위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너무도 가난한 수행자의 모범을 보이신 분들이다.
그런데 세상의 인간들은 가난한 수행자의 부처님과 예수님을 팔아 황제 노릇인 교황 노릇도 하고, 권력과 부를 추구한다.
언제부터인가, 피땀 흘려 번 돈을 바치면서 민중들은 종노릇을 자처하고 있기도 하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태양이 일시동인(一視同仁)으로 광명과 열량을 공짜로 주어오는 것을 알면서도 먹고 똥 싸는 인간은 재림주라고 칭송하고 경배하고 공양물을 버치면서 태양은 존중하지 않는 크나큰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우리 태양계에 하나님은 태양이라는 것을 통찰해야 한다.
한국사회에는 일확천급(一攫千金)하려면 사이비종교를 만들어야 한다는 유행어가 나돈 지 오래이다.
사이비 종교를 만들고, 성경을 제 마음대로 해석하여 교주자신이 재림주라고 주장했다가 나아가 하나님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만용까지 자행하고 다다익선(多多益善)으로 헌금으로 대졸부가 되어 세상을 농락하고는 어느 날, 저승사자에 멱살 잡혀 끌려가기를 반복해 오고 있다.
역대 교주가 죽진 않은 이가 없다. 자칭 재림주 노릇을 해온 이들은 방하착(放下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A라는 인물도 노욕(老慾)을 부리지 말고.
과거 또 하나의 재림주라고 자처했던 A의 검은 돈의 비자금이 정치계와 법조계 쪽에 흘러 들어갔다는 항간의 비아냥도 있다.
그런 인물인 B도 용인해 주었다. 이들을 가호해주던 정치인들, 사법부 종사자들이 있었다면, 추상같은 천주(天誅)같은 응징도 있어야 마땅하다.
끝으로, 내가 믿는 진리 가운데 굳이 하나를 주장한다면, '육신의 인생에는 종교를 믿어도 결국은 죽고, 안 믿어도 결국은 죽고 만다'는 것이다. 다만 믿는 자는 안심입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죽은 인간의 부활과 영생은 절대로 없다. 영생이 없다는 근거는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의 처형당해 보여주었지 않은가.
민중의 기만하고 돈을 수탈하듯 하여 정부와 여당에 상납하고 민중에 황제처럼 군림하던 소위 자칭 재림주라는 자들은 물론이요, 여타 사이비종교의 수사는 물론, 기존 종교계의 대졸부(大猝富)인 대도(大盜)까지 철저히 수사하여 민중이 피땀 흘려 먹고사는 사회가 올바를 사회라는 것을 명명백백히 밝혀 주었으면 소원한다.
사회정화를 바라는 언론들, 사회정의를 세우는 검찰, 경찰에서는 더 이상 한국사회에 사이비종교들이 선량한 민중들에 돈 빼앗고 목숨을 빼앗는 혹세무민의 시대를 끝내 주었으면 바란다.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줄리언 반스는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잘 알려진 영국 작가라고 한다. 그의 작품의 대부분은 소멸, 노년, 자살, 사별 등 죽음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된다고 한다.
생전 처음 줄리언 반스의 책을 접하면서 솔직히 제목에 이끌려 이 책을 읽게 되었음을 인정한다. 4백 페이지에 달하는 내용의 상당 부분이 저자인 줄리언 반스 자신과 가족, 친구, 죽음을 주제로 저자가 불러들인(?) 예술가들에 관한 일화로 채워져 있다.
20대 때 무신론자였던 그는 60대로 넘어오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도 믿지 않는 불가지론자가 되었단다. 그는 매일 죽음을 생각하며, 때로 죽음이 극화된 절체절명의 악몽에 시달리기도 한단다. 가족의 죽음과 역사 속 위인들의 경구를 통해 죽음을 깨닫고 죽음을 대하는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다.
'홍당무'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쥘 르나르는 "죽음과 마주할 때 우리는 어느 때보다 책에 의지하게 된다"고 말했는데 그런 이유로 줄리언 반스는 작가와 작곡가 들이 남긴 기록들을 파헤치게 되었다고 한다.
아서 케스틀러의 <죽음과의 대화>에서 "난 한 번도 죽음을 두려워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죽어가는 것을 두려워했을 뿐이죠"란 말에 죽기 전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 했던 자신의 부모님처럼 될까 봐 두렵다는 고백을 한다.
몽테뉴는 "죽음에 반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한시도 놓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에 줄리언 반스는 "다른 이에게 죽는 법을 가르쳐준다면, 기실 사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한시라도 놓지 않는 것이야말로 지금 삶을 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하 생각하는 것을 스스로 습관화해야 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예기치 못한 때에 엄습해온다는 일은 없어야 한다. 우리는 두려움과 친해져야 하며, 그 한 가지 방법은 글로 쓰는 것이다. 난 죽음에 대해 글을 쓰고 생각하는 게 나이 든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사람들이 좀 더 빨리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어리석은 실수를 할 확률도 줄어들 것이다.
- 쇼스타코비치 -
죽음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나에겐 어떤 의미일까? 죽음에 관심을 가진다는 건 자기를 벗어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예전같이 않은 체력을 느끼며 아픈 데가 점점 많아질 때... 이러다가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성큼 다가올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지인들의 부고장을 받았을 때... 우리는 이럴 때 생전 하지 않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문득문득 떠 올리면서도 우리 중 일부는 천년을 계획하고 있다. 죽음은 나의 몸과 영혼이 분리되어 영혼의 의지대로 나의 육신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육신은 시간이 흐르면 결국 노화로 인해 그 기능이 다할 것이다.
아무리 현대 의학 기술이 나날이 발전한다고 해도 모든 장기를 다 대처해 나갈 수 없다고 본다. 결국 육신의 유한함을 깨닫는 순간... 세상을 보는 눈,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데 물질에 대한 욕심과 자식에 대한 집착 같은 것들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면 죽음은 진정한 자유의 시작일까? 죽지 않고 자유를 만끽할 수는 없는 것일까?
삶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버릴 수 있는 마음가짐이라고 본다. 물질과 명예 같은 보잘것없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심지어 육신과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마저 자유로워 질 때 비로소 죽음을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루하루 의미 있게 살고, 욕심을 비우면서 내일 사과할 일들은 처음부터 하지 않고, 감사하다는 말은 내일로 미루지 않고 즉시 감사해하면서 살고자 한다. 새삼 영화 속 명언을 다시 한번 떠 올려 본다. 오늘 현재(the present)는 소중한 선물(present)임에 틀림없다.
▶️ 視(볼 시)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볼 견(見; 보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示(시)는 신이 사람에게 보이다, 見(견)은 눈에 보이는 일이라는 뜻으로 視(시)는 똑똑히 보이다, 가만히 계속하여 보다, 자세히 조사함으 말한다. 見(견)은 저쪽에서 보여오는 일, 視(시)는 이쪽에서 가만히 보는 일을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視자는 '보다'나 '보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視자는 示(보일 시)자와 見(볼 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갑골문에서는 示자와 目(눈 목)자가 합한 형태였다. 여기서 示자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을 그린 것으로 '보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보이다'라는 뜻을 가진 示자에 目자가 결합한 視자는 '신이 보이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단순한 의미에서의 '보다'나 '~로 여기다', '간주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視(볼 시)는 ①보다 ②엿보다 ③보이다 ④간주하다 ⑤맡아보다 ⑥본받다 ⑦성(姓)의 하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살필 찰(察), 살필 심(審), 조사할 사(査), 검사할 검(檢), 볼 감(監), 벼슬 감(監), 바라볼 조(眺), 보일 시(示), 볼 견(見), 볼 람(覽), 볼 관(觀), 볼 열(閱), 나타날 현(顯)이다. 용례로는 빛의 자극을 받아 눈으로 느끼는 것을 시각(視覺), 눈이 가는 방향을 시선(視線), 눈으로 봄과 귀로 들음을 시청(視聽), 눈의 보는 힘이 미치는 범위를 시야(視野), 눈이 보는 힘이 미치는 범위를 시계(視界), 돌아다니며 실지 사정을 살펴 봄을 시찰(視察), 물체의 존재나 형상을 인식하는 눈의 능력을 시력(視力),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를 시정(視程), 사무를 봄을 시무(視務), 존재나 있는 값어치를 알아주지 아니함을 무시(無視), 경계하기 위하여 미리 감독하고 살피어 봄을 감시(監視), 주의해서 봄이나 자세히 눈여겨 봄을 주시(注視), 가볍게 봄이나 가볍게 여김을 경시(輕視), 착각으로 잘못 봄을 착시(錯視), 가까운 데 것은 잘 보아도 먼 데 것은 잘못 보는 눈을 근시(近視), 먼 데 것은 잘 보이고 가까운 데 것은 잘 보이지 않는 시력을 원시(遠視), 눈을 돌리지 않고 똑바로 내쏘아 봄을 직시(直視), 간섭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음을 좌시(坐視), 눈길을 주어 한동안 바라보는 것을 응시(凝視), 돌아다니며 보살핌을 순시(巡視), 업신여기거나 냉대하여 흘겨봄을 이르는 말을 백안시(白眼視), 안중에 두지 아니하고 무시한다는 말을 도외시(度外視), 따뜻하고 친밀한 마음으로 본다는 말을 청안시(靑眼視), 백성을 제 자식처럼 여긴다는 말을 시민여자(視民如子), 죽음을 삶같이 여기고 두려워하지 아니한다는 말을 시사여생(視死如生), 죽는 것을 고향에 돌아가는 것과 같이 여긴다는 뜻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한다는 말을 시사여귀(視死如歸), 보고도 보지 못한 체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시약불견(視若不見), 보기는 하되 보이지 않음을 이르는 말을 시이불시(視而不視), 우물 속에서 별을 본다는 뜻으로 우물 안에서는 겨우 몇 개의 별밖에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 사사로운 마음에 가리우면 견해가 한 편에 치우치게 됨을 이르는 말을 정중시성(井中視星), 열 사람의 눈이 보고 있다는 뜻으로 세상 사람을 속일 수 없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십목소시(十目所視), 범이 먹이를 노린다는 뜻으로 기회를 노리며 형세를 살핌을 비유하는 말을 호시탐탐(虎視眈眈), 눈으로 먹고 귀로 본다는 뜻으로 맛있는 것보다 보기에 아름다운 음식을 좋아하고 몸에 맞는 것보다 귀로 들은 유행하는 의복을 입음을 이르는 말을 목식이시(目食耳視) 등에 쓰인다.
▶️ 死(죽을 사)는 ❶회의문자로 죽을사변(歹=歺; 뼈, 죽음)部는 뼈가 산산이 흩어지는 일을 나타낸다. 즉 사람이 죽어 영혼과 육체의 생명력이 흩어져 목숨이 다하여 앙상한 뼈만 남은 상태로 변하니(匕) 죽음을 뜻한다. 死(사)의 오른쪽을 본디는 人(인)이라 썼는데 나중에 匕(비)라 쓴 것은 化(화)는 변하다로 뼈로 변화하다란 기분을 나타내기 위하여서다. ❷회의문자로 死자는 '죽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死자는 歹(뼈 알)자와 匕(비수 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匕자는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死자를 보면 人(사람 인)자와 歹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시신 앞에서 애도하고 있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해서에서부터 人자가 匕자로 바뀌기는 했지만 死자는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모습에서 '죽음'을 표현한 글자이다. 그래서 死(사)는 죽는 일 또는 죽음의 뜻으로 ①죽다 ②생기(生氣)가 없다 ③활동력(活動力)이 없다 ④죽이다 ⑤다하다 ⑥목숨을 걸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망할 망(亡)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있을 존(存), 살 활(活), 있을 유(有), 날 생(生)이다. 용례로는 죽음을 사망(死亡), 활용하지 않고 쓸모없이 넣어 둠 또는 묵혀 둠을 사장(死藏), 죽음의 원인을 사인(死因), 죽는 것과 사는 것을 사활(死活), 사람이나 그밖의 동물의 죽은 몸뚱이를 사체(死體), 죽음을 무릅쓰고 지킴을 사수(死守), 죽어 멸망함이나 없어짐을 사멸(死滅), 죽어서 이별함을 사별(死別), 죽기를 무릅쓰고 쓰는 힘을 사력(死力),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서로 저버리지 않을 만큼 절친한 벗을 사우(死友),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거나 목숨을 내어 걸고 싸움 또는 그 싸움을 사투(死鬪), 죽음과 부상을 사상(死傷), 수형자의 생명을 끊는 형벌을 사형(死刑), 태어남과 죽음이나 삶과 죽음을 생사(生死), 뜻밖의 재앙에 걸리어 죽음을 횡사(橫死), 참혹하게 죽음을 참사(慘事), 쓰러져 죽음을 폐사(斃死), 굶어 죽음을 아사(餓死), 물에 빠져 죽음을 익사(溺死), 나무나 풀이 시들어 죽음을 고사(枯死), 죽지 아니함을 불사(不死), 병으로 인한 죽음 병사(病死), 죽어도 한이 없다는 말을 사무여한(死無餘恨), 죽을 때에도 눈을 감지 못한다는 말을 사부전목(死不顚目), 죽을 고비에서 살길을 찾는다는 말을 사중구활(死中求活), 죽는 한이 있어도 피할 수가 없다는 말을 사차불피(死且不避), 죽더라도 썩지 않는다는 뜻으로 몸은 죽어 썩어 없어져도 그 명성은 길이 후세에까지 남음을 이르는 말을 사차불후(死且不朽),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라는 말을 사생지지(死生之地), 다 탄 재가 다시 불이 붙었다는 뜻으로 세력을 잃었던 사람이 다시 세력을 잡음 혹은 곤경에 처해 있던 사람이 훌륭하게 됨을 비유하는 말을 사회부연(死灰復燃), 죽은 뒤에 약방문을 쓴다는 뜻으로 이미 때가 지난 후에 대책을 세우거나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말을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죽고 사는 것을 가리지 않고 끝장을 내려고 덤벼든다는 말을 사생결단(死生決斷), 죽어서나 살아서나 늘 함께 있다는 말을 사생동거(死生同居), 죽어야 그친다로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말을 사이후이(死而後已) 등에 쓰인다.
▶️ 如(같을 여, 말 이을 이)는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동시에 음(音)을 나타내는 계집녀(女; 여자)部와 말을 뜻하는 口(구)로 이루어졌다. 여자가 남의 말에 잘 따르다의 뜻이 전(轉)하여, 같다의 뜻과 또 음(音) 빌어 若(약)과 같이 어조사로 쓴다. ❷회의문자로 如자는 '같게 하다'나 '따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如자는 女(여자 여)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여기서 口자는 사람의 입을 그린 것으로 '말'을 뜻하고 있다. 如자는 여자가 남자의 말에 순종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부권 중심의 전통사회에서 여성의 순종을 미덕으로 삼았던 가치관이 낳은 글자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본래의 의미는 '순종하다'였다. 하지만 지금은 주로 '~와 같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어 쓰이고 있다. 그래서 如(여, 이)는 법의 실상(實相)이란 뜻으로 ①같다, 같게 하다 ②어떠하다 ③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닿다 ④좇다, 따르다 ⑤가다, 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⑥당연히 ~하여야 한다 ⑦맞서다, 대항하다 ⑧비슷하다 ⑨어찌 ⑩가령(假令), 만일(萬一) ⑪마땅히 ⑫곧, 이것이 ⑬~과, ~와 함께 ⑭보다, ~보다 더 ⑮이에, 그래서 그리고 ⓐ말을 잇다(=而)(이)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어떤 대상이 변함이 없이 전과 같음을 여전(如前), 이와 같음을 여차(如此), 얼마 되지 아니함을 여간(如干), 사실과 꼭 같음을 여실(如實), 어떻게 하는가 하는 것을 여하(如何), 왼쪽에 적힌 내용과 같음을 여좌(如左), 이러함을 여사(如斯), 일이 뜻대로 됨을 여의(如意), 있어야 할 것이 없거나 모자람을 결여(缺如), ~만 같은 것이 없음을 막여(莫如), ~만 못함을 불여(不如), 혹시나 설혹을 혹여(或如), 어떠함을 하여(何如), 뒤섞여서 어지러움을 분여(紛如), 뜻하지 않은 사이에 갑자기를 홀여(忽如), 3년과 같이 길게 느껴진다는 뜻으로 무엇을 매우 애타게 기다리는 것을 이르는 말을 여삼추(如三秋), 얇은 얼음을 밟는다는 뜻으로 몹시 위험함을 가리키는 말을 여리박빙(如履薄氷), 거문고와 비파를 타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부부 간에 화락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여고금슬(如鼓琴瑟),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이 일이 썩 쉬움을 일컫는 말을 여반장(如反掌), 바람이 귀를 통과하는 듯 여긴다는 뜻으로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태도를 일컫는 말을 여풍과이(如風過耳), 새가 하늘을 날기 위해 자주 날갯짓하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배우기를 쉬지 않고 끊임없이 연습하고 익힘을 이르는 말을 여조삭비(如鳥數飛), 여러 사람의 말이 한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한결같음을 이르는 말을 여출일구(如出一口), 시키는 대로 실행되지 못할까 하여 마음을 죄며 두려워함을 이르는 말을 여공불급(如恐不及), 물고기가 물을 얻음과 같다는 뜻으로 빈궁한 사람이 활로를 찾게 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여어득수(如魚得水),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하고 사모하는 것 같기도 함을 이르는 말을 여원여모(如怨如慕), 개미가 금탑을 모으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근검하여 재산을 축적함을 이르는 말을 여의투질(如蟻偸垤), 천금을 얻은 것 같다는 뜻으로 어떤 일을 이루어 마음이 흡족함을 이르는 말을 여득천금(如得千金), 강을 건너려 하는 데 마침 나루터에서 배를 얻었다는 뜻으로 필요한 것이나 상황이 바라는 대로 됨을 이르는 말을 여도득선(如渡得船),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보듯이 환히 앎을 일컫는 말을 여견폐간(如見肺肝), 아주 작은 고을을 콩 만 하다고 비유하는 말을 여두소읍(如斗小邑),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과 같은 뜻으로 무슨 일을 하는 데 철저하지 못하여 흐리멍덩함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여수투수(如水投水), 물고기가 물을 잃음과 같다는 뜻으로 곤궁한 사람이 의탁할 곳이 없어 난감해 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여어실수(如魚失水), 얼굴의 생김생김이나 성품 따위가 옥과 같이 티가 없이 맑고 얌전한 사람을 일컫는 말을 여옥기인(如玉其人), 나는 새가 눈앞을 스쳐간다는 뜻으로 빨리 지나가 버리는 세월의 비유를 일컫는 말을 여조과목(如鳥過目), 발과 같고 손과 같다는 뜻으로 형제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깊은 사이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여족여수(如足如手), 원망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호소하는 것 같기도 함을 이르는 말을 여원여소(如怨如訴), 한 판에 찍어 낸 듯이 조금도 서로 다름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여인일판(如印一板), 앓던 이가 빠진 것 같다는 뜻으로 괴로운 일을 벗어나서 시원하다는 말을 여발통치(如拔痛齒), 한쪽 팔을 잃은 것과 같다는 뜻으로 가장 믿고 힘이 되는 사람을 잃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여실일비(如失一臂),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다는 뜻으로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것과 같이 하늘로 비상하여 더 큰 일을 이룬다는 의미를 일컫는 말을 여호첨익(如虎添翼) 등에 쓰인다.
▶️ 歸(돌아갈 귀)는 ❶형성문자로 帰(귀)의 본자(本字), 归(귀)는 통자(通字), 归(귀)는 간자(簡字)이다. 追(추; 따라가다)의 변형과 婦(부)의 생략형인 帚(추)로 이루어졌다. 고대(古代)에는 처가(妻家)에서 일정 기간의 노동을 한 후 새색시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돌아온 데서, '돌아오다'의 뜻이 되고, 전(轉)하여 '시집가다'의 뜻으로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歸자는 '돌아가다'나 '돌아오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歸자는 阜(언덕 부)자와 止(발 지)자, 帚(비 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갑골문에서는 단순히 阜자와 帚자만이 그려져 있었다. 여기서 阜자는 '쌓이다'라는 뜻의 堆(언덕 퇴)자가 생략된 것이다. 이렇게 '쌓이다'라는 뜻을 가진 堆자에 帚자가 더해진 것은 집안에 쌓인 먼지를 쓸어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사실 歸자의 본래 의미는 '시집을 가다'였다. 아마도 시집간 여자가 집안일을 한다는 뜻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문에서는 여기에 止자가 더해지면서 '돌아가다'나 '돌아오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歸(귀)는 ①돌아가다, 돌아오다 ②돌려 보내다 ③따르다, 붙좇다(존경하거나 섬겨 따르다) ④몸을 의탁하다 ⑤맡기다, 위임하다 ⑥마치다, 끝내다 ⑦시집가다 ⑧편들다 ⑨맞다, 적합하다 ⑩모이다, 합치다 ⑪선물하다, 음식을 보내다 ⑫자수하다 ⑬죽다 ⑭부끄러워하다 ⑮몸을 의탁할 곳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돌아올 회(回)이다. 용례로는 외국에서 본국으로 돌아감 또는 돌아옴을 귀국(歸國), 본디의 처소로 돌아옴을 귀환(歸還), 집으로 돌아감 또는 돌아옴을 귀가(歸家), 사람의 마음이나 사물의 돌아가는 형편을 귀추(歸趨),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옴을 귀향(歸鄕), 끝을 맺음을 귀결(歸結), 재산이나 권리 따위가 특정한 사람이나 단체에 속하게 됨을 귀속(歸屬), 돌아가 몸을 기댐을 귀의(歸依), 적이 굴복하고 순종함을 귀순(歸順), 돌아와 닿음을 귀착(歸着), 돌아오거나 돌아가는 길을 귀로(歸路), 객지에서 부모를 뵈러 고향에 돌아감을 귀성(歸省), 한 군데로 돌아감을 귀일(歸一), 집으로 돌아가 쉼을 귀휴(歸休), 서울로 돌아오거나 돌아감을 귀경(歸京), 집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함을 귀양(歸養),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옴을 귀래(歸來),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귀사(歸思), 숙박 집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옴을 귀숙(歸宿), 황천으로 돌아감이란 뜻으로 죽음을 일컫는 말로 귀천(歸泉), 흙으로 돌아감이라는 뜻으로 사람의 죽음을 일컫는 말로 귀토(歸土), 여자가 이혼을 하고 친정으로 돌아옴을 대귀(大歸), 마음을 결정하고 돌아감을 결귀(決歸), 향하여 감이나 따라감을 적귀(適歸), 함께 돌아감을 동귀(同歸), 작별하고 돌아감을 고귀(告歸), 신부가 처음으로 시집에 들어감을 우귀(于歸), 본디 상태나 자리로 다시 돌아감을 복귀(復歸), 도로 돌아오거나 돌아감을 회귀(回歸), 벼슬을 내어 놓고 돌아옴을 체귀(遞歸),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정벌한 뒤 전쟁에 쓴 마소를 놓아주었다는 옛일에서 온 말로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귀마방우(歸馬放牛), 헛되이 돌아감을 일컫는 말을 귀어허지(歸於虛地), 처음에는 시비 곡직을 가리지 못하여 그릇되더라도 모든 일은 결국에 가서는 반드시 정리로 돌아감을 일컫는 말을 사필귀정(事必歸正), 죽는 것을 고향에 돌아가는 것과 같이 여긴다는 뜻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시사여귀(視死如歸), 구슬을 온전히 조나라로 돌려 보낸다는 뜻으로 흠이 없는 구슬이나 결점이 없이 완전함 또는 빌렸던 물건을 온전히 반환함을 일컫는 말을 완벽귀조(完璧歸趙), 옳지 않은 일에 부화뇌동 함을 이르는 말을 난만동귀(爛漫同歸), 잎이 떨어져 뿌리로 돌아간다는 뜻으로 모든 일은 처음으로 돌아감을 이르는 말을 낙엽귀근(落葉歸根), 넷이 결과적으로 하나를 이룸을 일컫는 말을 사귀일성(四歸一成), 삶은 잠깐 머무르는 것이고 죽음은 돌아간다는 뜻으로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잠깐 동안 머물러 있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죽는 것은 본래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는 말을 생기사귀(生寄死歸), 나이를 먹어서 머리털이 희어져도 학문이 성취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백수공귀(白首空歸), 합심하여 같은 목적으로 향함을 일컫는 말을 일심동귀(一心同歸),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옴을 일컫는 말을 조왕모귀(朝往暮歸), 가는 길은 각각 다르나 닿는 곳은 같다는 뜻으로 방법은 다르지만 귀착하는 결과는 같음을 일컫는 말을 이로동귀(異路同歸) 등에 쓰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