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롯의 밤 (외 2편)
신달자
홀로 와인 반병을 마셨으니 나는 지금부터 미쳐도(島)에 닿는다 양(量)의 선을 넘으면 언제나 저미는 핏줄을 안고 운다
아버지는 큰 부자였지만 주색잡기로 쫄딱 망해 고향 쫓겨나 서울 변두리 살며 누울 때도 고향 바라보며 눕는다고 했던 아버지
어느 날 술 한 잔 마시고 "고향 떠나 10년에 청춘은 늙어어" 울던 아버지 그 눈물 아버지 피같이 내 가슴 위로 흘렀지
아버지 바람나 집에 뜸할 때 술로 배를 채우며 울어 울어 울었던 어머니 불현듯 마당 가운데 서서 아리랑을 살 찢어지게 부르다 쓰러지는 미친 여자 그 모습 아직 나를 발광하게 만드는데
나의 성장에는 빈 공간이 없어라 누구도 볼 수 없는 공간마다 젖은 손수건이 무겁게 흔들거려 아버지 어머니 눈물 지금까지 따라왔어라
빈 와인 병을 들고 가슴을 치며 연분홍치마가 봄바람에…… 애간장 저미는 내 노래가 방울 방울 눈물방울 ‘연분홍치마’를 몇 천 번을 불러도 기다리는 남자는 오지 않고
오늘 밤도 취한 나를 두고 봄날은 간다
책을 듣다
손끝과 발가락 끝으로 형체 없음이 지나가요
지나가고 있어요 지나가는 걸 느껴요
처음엔 울림이 내 몸을 두드리고
그 두드림이 더 깊이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지금은 울림마저 다 놓아 버리고 그냥 느껴요
느낌도 지워 버려요
다만 귀만 열어요 종이 언어 언어의 그림자 행간
두드림 소나기 의문 공감의 너울에 귀 기울여 봐요
태반에서 지금 이 순간까지의 길이 확 뚫려요
들려요 그 리듬으로 내면으로부터 세상까지의 길이 보여요
생은 경청으로 더 더 넓어져요 귀는 더 소곳해지지요
들으면 보여요 보이면 살아나요
다 내리고 다 가지면
손끝 발끝의 착지에 힘이 가요
몸이 따뜻해져요.
푸른 잎 하나 완전히 벗은 몸으로 다만 푸른 잎 하나 들고 수술대 위에 누웠습니다 다 버렸지만 푸른 잎 하나는 손에 꽉 쥐고 있었습니다 전신 마취에 나는 사라지고 내 몸에서 삼겹살 일 인분쯤 칼에 잘려 나갔습니다 내가 가장 아끼던 부위의 살이었습니다 반으로 절개된 살점은 얼마나 그리움에 진저리를 칠 것인가요 따뜻한 입술이 그리운 곳에 피로 범벅된 낭자한 칼들과 바늘이 놀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푸른 잎 하나를 그대로 들고 수술대 위에서 회복실로 다시 입원실 침대로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온몸에서 푸른 잎하나가 이미 자녀들처럼 온몸을 덮어 나는 아무것도 잃은 것 없이 절개된 인생에서 깨어나고 있습니다
—시집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2023. 4 ------------------------ 신달자 / 1943년 경남 거창 출생. 197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간절함』 『열애』 『북촌』 등. 저서 『고백』 『너는 이 세 가지를 명심하라』 『나는 마흔에 새의 걸음마를 배웠다』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