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지막 꿈
김 상 립
수필 쓰는 일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내가 수필로 호구지책을 삼는 것도 아니면서 마음을 두고 살아 온 긴 세월을 생각하면, 그것은 이미 뗄 수 없는 내 생활의 한 부분이다. 지난 수십 년간을 오직 수필만을 고집하며 쉬지 않고 달려 왔으니, 어떤 이유를 내세우기보다는 내가 좋아서 스스로가 해왔던 일이었다. 뒤돌아보면 글을 쓰며 견뎌냈던 인고의 시간이나, 글이 잘 써지지 않아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던 숱한 날들이 이제는 도리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어디 그 뿐인가! 한 편의 작품을 구상하며 느꼈던 기쁨이라든지, 작가라는 이름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 다 써놓고 맛보게 되는 만족감 같은 게 뒤섞여 여러 색깔의 즐거움도 있었다. 만물이 잠든 시간에 미쳐 완성하지 못한 원고를 뒤적이다 보면, 마법의 양탄자를 타듯 글을 타고 평소 내가 가고 싶어하던 곳을 훨훨 날아 가기도 했고, 타임머신에 실려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학창시절로 돌아가 그리운 친구들을 다시 만나기도 했으니 신통하기만 했다. 이렇게 수필이란 글쓰기를 통한 내 마음의 여행이었고, 그런 여행 재미에 힘든 줄도 몰랐다.
인종 중에 영혼이 가장 맑다고 알려진 인디언의 창조어록을 보면 ‘사람마다 여행 길은 서로 다른 것. 이 다른 여행에서 얻은 자기만의 소중한 체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굳이 그런 글귀를 빌리지 않더라도 사람이 한 세상을 살아가며 각기 다른 삶 속에서 얻어진 지식이나 체험, 사색 등을 정리하여 글로서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행위는 매우 소중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독특한 자기만의 체험을 어떤 자세나 방법으로 독자들에게 알리느냐가 관건이 되리라 본다.
말하자면 미사여구로 화장을 시켜 내 놓거나, 밋밋한 맨 얼굴 그대로를 보일 수도 있을 게다. 또 자기의 감정을 순화시키지 않고 액면대로 전달할 수도 있을 것이요, 타인을 내세워 자신의 말을 대신하도록 꾸며서 쓸 수도 있을 터이다. 또 사회적 체면을 고려하여 적당히 뺄 것은 빼고 말하거나, 일부러 자기를 들어내려 부풀려 쓰기도 할 터이다. 만일 이렇게 서로 다른 표현으로 전달된 작가의 체험이나 생각을 독자들이 이해하고 공유해 주기만 해도 수필가의 입장은 훨씬 나아지리라 본다. 그러나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독자들은 작가의 고뇌를 이해하려 노력하면서까지 글을 읽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 동안 적지 않게 발표했던 내 작품에서만 봐도, 늘 나의 기대치와는 다른 반응이 나타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기야 내가 속 마음을 진솔하게 들어내 보인다고 해도, 무작정 독자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까닭도 없다. 나에게는 재미있는 일이거나 감동적인 체험이라 해도, 타인에게는 시큰둥한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몹시 분노하여 가슴 치는 일도, 작가가 지나치게 흥분 한다고 지적할 수도 있겠지. 사람마다 살아가는 길도 다르고, 생각과 행동마저 천차만별이니 충분히 감안 해야 할 반응이다. 그런데도 나는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은근히 독자들의 폭 넓은 공감을 기대했으니, 스스로 실망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고 말았다.
이 세상 어떤 뛰어난 스승이라도 수필 잘 쓰는 법을 정확하게 손에 쥐어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수필의 기초만 배우고 나면 혼자서 부지런히 공부하고, 계속 써가는 가운데 스스로가 터득해야 할 과업일 것이다. 내가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수필쓰기에 전념 하지 못하고, 이름만 수필가였지 수필가인척 하고 살았던 게 아직 양심에 찔린다. 이런 모양의 수필가로 산 날이 꽤 길어지다 보니 어느새 퇴직을 맞았고, 그 후로 수필에 올인 한다는 각오로 밀고 나갔지만, 그 동안 쌓여진 밑천이 빈약한 탓에 마음만 바빴지 별다른 성과도 없었다.
요즈음 와서는 나이 탓으로 자연히 신체적 활동력도 떨어지고 심리상태도 위축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야 겨우 수필을 쓰는 이유도, 나아갈 길도 어림잡을 수 있게 되었으니 글을 좀 더 쓰고 싶다. 또 이렇게 무리를 해서라도 글을 쓰려는 이유는 쓰고 있는 작품을 통해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일 말고는 내 존재를 달리 인식할 방법이 없다는 얘기다. 솔직히 말해 글쓰기여행은 아직도 남아있는 나의 생명 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으로 얼마 간의 시간이 내게 주어질는지 알 수 없어도, 끝까지 글 쓰기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으면 무척 다행이겠다.
하지만 현실은 하루 하루가 달라진다. 컴퓨터 화면을 보고 있으면 얼마 못 가 눈이 흐릿해지고, 손에도 쥐가 자주 일어나 펜을 잡고 글씨를 제대로 쓸 수가 없다. 의자에 앉아 있으면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엉덩이도 아프고 등 짝과 양쪽 어깨가 욱신거려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또 한가한 저녁을 만나 글을 좀 써보려고 자리를 잡으면 그만 초저녁 잠이 쏟아진다. 이런 형편이니 얼마 못 가 마음과 몸이 완전 따로 놀 판이다. 만일 그럴 때가 찾아 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래도 내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은 몸뚱이는 냉정하게 버려두고, 생각만이라도 끌어안고 글쓰기 여행을 계속하는 독한 선택을 해야겠다.
이렇게 탄생시킨 수필은 마음 속의 글로써 실체화가 불가능할 것이니, 독자들은 내 글 내용을 알 수도, 읽을 수도 없을 것이지만,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작품이 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한 문장이 완성되는 대로 내 영혼에 한 글자씩을 마치 석수가 바위에 글씨를 파듯 그렇게 전력을 다하여 새겨 넣으려 한다. 설령 조각한 작품이 한 편에 불과하면 어떻고, 단 몇 줄이면 또 어떠랴? 법정스님께서도 ‘영혼은 불멸의 존재’ 라 했다. 나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있다. 언젠가 다시 이승에 오게 된다면, 나는 영혼에 새겨진 그 글들을 반드시 찾아내어 원고지에 옮길 것이다. 이것이 수필을 두고 꾸고 있는 내 마지막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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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을 쓰는 일 말고는 내 존재를 달리 인식할 방법이 없다"는 말씀은 박경리 선생님께서 사마천을 생각하며 글을 썼다는 말씀과 일맥 상통하는 말씀입니다. 저 역시도 깊이 공감 합니다.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일이 글쓰기 말고 도대체 뭐가 있겠습니까?
별 볼일 없는 나를 드러내고 인정 받고 공감을 얻어내는 일, 그 위대한 존재의 이유.
글을 통해서 이해한 남평 선생님의 삶을 존경 합니다.
감명, 감동,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수필을 향한 순정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애정. 애착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수필에 쏟는 남평선생님의 그 열정 높여 높여 봅니다.
그 꿈, 반드시 이뤄가시리라 여깁니다. 늘 강녕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