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엽낙지 一葉落知] ㅡ단풍ㅡ 천수를 다하고 미련없이 떨어지는 가을 단풍. 자연은 땀의 보답으로 잎에게 오색 물감을 들여준다. 비바람을 인내하며 열매를 맺게 해 준 장본인에게 주는 선물이다.
어느 생명체나 젊었던 시절은 있게 마련이다. 청춘도 해묵으면 늙수레 해지는 건 당연하다. 늙음도 반갑지 않은데 하루하루 소멸되는 시간이 아쉽다. 잎과 가지가 이별하는 가을로 접어들면 삶에 대한 애착이 더 느껴진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건 당연한 세상사의 이치다. 생명을 잇는 열매가 저절로 열리는 게 아니다. 씨앗에 담긴 산전수전은 한 편의 소설이다. 네 계절이 마냥 따뜻하지 않다.
산사의 스님은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르고 염불 삼매경에 빠진다. 잠깐 왔다 가는 가을을 잊는다. 나뭇잎의 색깔이 어느새 바뀌었다. 아차하는 순간 가을은 저문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는 멀리 떠나지 않아도 단풍을 즐길 수 있다. 명산 찾아 발품을 팔아 본다.
영오의 전원주택이 있는 블루로드길 후포리로 주말 여행을 떠난다. 2박 3일 동안 말 동무할 래원과 태흥이 함께 했다. 하늘과 망망대해가 마주하니 쪽빛에 눈이 부시다. 사철 푸르디 푸른 울진. 노송의 고장은 온통 푸르름이다.
단풍 대신 청청한 솔밭에서 가을을 만끽한다. 전국에서 소나무가 제일 많다는 경북 울진은 금강송의 고장이다.
가을엔 눈요기가 많다. 첫날은 단양 온달유적지와 1500만여 평의 봉화 백두대간수목원에 들렀다. 단풍은 간간이 보인다. 날렵한 호랑이들은 느린 걸음으로 가을을 즐긴다.
ㅡ청어람靑於藍ㅡ 둘쨋날은 소나무 군락지로 나섰다. 보부상 주막에서 막걸리와 메밀전으로 간식삼아 점심을 대신하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10km 거리의 임도길을 반시간 달렸다. 지난 여름 장마로 도로가 훼손되어 주차장 앞은 길이 끊겼다.
70도가 넘는 가파른 산길을 1시간 가까이 걸었다. 짐승의 배설물이 자주 눈에 띈다. 2014년 보호수로 지정된 14미터 높이의 600년 넘은 노송이 능선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금강송 군락지에는 수 백년 된 노송들이 많다. 대왕송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전율이 느껴진다. 울진군 서면 소광리 산 11번지다.
좀체로 걸음하기가 어려운 곳이다. 오후엔 임도길 출입문을 잠근다. 네 번이나 다녀온 영오의 덕분에 천년송을 본다.
태흥은 노송 앞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연거푸 올린다. 나도 따라 했다. 친구가 바라는 소원이 건강이다. 기氣를 듬뿍 받은 듯하다.
바람이 실어다 준 세상의 소리를 노송은 다 들었으리라. 망양 휴게소에서 벽에 걸린 대형 사진으로 본 모습 그대로다.
조선 창건 무렵에 솔은 세상과 인연을 맺었다. 보고 또 보며 두 손 모아 장수하길 간절히 기도한다. 아직도 청청하다. 이후 1천년을 견딜 기상을 품었다.
솔의 가을은 언제인가! 방금 산천수에 목욕한 듯 붉그스레하고 깔끔한 자태가 성스러운 솔의 모습이다. 숨이 멎을 만큼 한참을 끌어 안았다.
ㅡ붙박이ㅡ 조선 문인 내암來菴 정인홍鄭仁弘의 왜송矮松 시 한수 옮긴다. "짧고짧은 외로운 솔이 탑 서쪽에 있는데/ 탑은 높고 솔은 낮아 가지런하지 않네/ 오늘날 외로운 솔이 작다고 말을 마소/ 솔이 자란 다음날엔 탑이 외려 작으리 (短短孤松在塔西 塔高松下不相齊 莫言今日孤松短 松長他時塔反低)." 내가 좋아하는 싯구절이다. 카톡에 이미지 사진으로 올려놓고 읽는다.
노자老子가 깨달음을 주는 한마디. "하늘은 길고 땅은 영원하다. 천지가 길 수도 있고 오래일 수도 있음으로써 제 욕심을 내세워 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능히 길이길이 오래 살 수가 있다."
도덕경의 천장지구天長地久는 솔을 두고 한 말 같다. 설령 솔이 베어져도 명찰의 대들보로 쓰여 천년을 함께 할 재목이다. 송정승松正丞이다.
궁벽窮僻진 자리에 붙박이로 꼿꼿이 서서 온갖 풍상을 겪으며 천 년을 버티는 솔 앞에서 무슨 말을 건넬까.
은근과 끈기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무언으로 전하는 솔. 자연의 질서를 읽는다. 인내를 배운다. 솔 한 그루가 만권의 책이다.
지위나 재물, 명예를 탐하지 않음으로써 천수를 누린다는 계시를 준다. 금수강산이 통째로 배앗겼다 되찾은 모습을 체험했다.
솔이 바람과 빗소리를 들으며 우여곡절의 역사를 품고 있다. 눈을 감고 솔에게 무언의 소리를 듣는다.
하산길에 씨를 떨군 빈 솔방울 3개를 손에 쥐었다. 매일 보면서 성찰하기 위해서다. 위세를 부리며 백 년도 못 넘기고 떠날 초라한 내 인생이 가련하고 서글프다.
애써 친구들에게 대왕송을 보여 주려는 영오의 마음을 읽었다. 600년을 인내한 솔정승들을 어루만지며 하산했다.
마지막 날 태백 '시장실비집'에서 한우로 점심 밥상을 받았다. 함백산과 태백산 줄기는 단풍 절정이다.
정선 정암사淨菴寺(월정사 말사) 적멸보궁, 수마노탑을 보지 못하고 스쳐 지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천 한솔집에서 생선찜으로 만찬 후 서울로 달린다. 2020.10.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