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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정신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첫째는 다 귀찮아서 자신을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민폐나 끼치며 사는 사람입니다.
사회에서 보자면 일도 안하고 먹고 게으름만 피우며 부모의 돈으로 산다든가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부류를 배짱이와 같은 사
람들이라고 합니다.
며칠 전에 한 아들이 어머니에게 보험을 들고 어머니를 청부살인하도록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는 물론 배짱이보다도 못하
지만 남에게 피해만 준다는 것에는 같습니다. 그 어머니는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영영 걸어 다닐 수가 없게 되었고 앞으로 먹
고 살길도 막막하다고 합니다.
또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신발가게 주인이 어린이를 성추행하고 아들과 함께 사체를 태워서 버린 일도 있었습니다.
사실 나라에 도움이 되도록 뽑아놓은 국회의원도 술자리에서 여기자를 성추행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본인은 술집 여자인지
착각하고 그렇게 했다지만 손자까지 있을 나이에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몇 년 전에는 돈을 안 준다는 이유로 부모를 흉기로 찔러 죽이고 집을 불 지르고 사고로 위장하려했던 어떤 폐륜아도 있었습니
다. 백억 대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식 하나 올바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당한 일이었습니다.
뉴스를 조금만 보고 있어도 많은 범죄자들과 사건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할
지라도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할 텐데 피해를 주고 사는 사람은 꼭 있게 마련입니다. 그 숫자가 많지는 않을 지라도 어떤 사람은 적
게 어떤 사람은 많게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살고 있으며 이런 사람은 사회에서 없으면 더 좋을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런 부류는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성당에서 보더라도 자신도 제대로 신앙생활 하지도 않으면서 남도 못 나오게 하고 죄짓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같이
주일날 놀러가자고 하고 술을 늦게까지 마시게 하여 다른 사람 가정도 불안하게하고 그렇게 성당활동을 잘 하고 있는 사람도 하
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반드시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만약 봉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올바른 정신으로 하지 않으면 이런 부류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레지오를 하더
라도 남편 이외에 거기에 마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한다든가 간부를 해서 사람들을 부려보는 것이 소원인 사람이 있어
서 그런 목적으로 한다든가 놀러 다니는 것이 좋아서 2차 주회를 위해서 한다든가 활동도 하지 않고 회합도 나오지 않으면서 간
부들을 속 썩인다던가 하는 사람들도 명목상으로는 봉사활동을 하고는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그 단체에 그리고 크게 보아서는 교
회에 피해를 주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 다음은 개미과에 속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개미는 열심히 일은 하지만 자신만을 위해서 하지 남을 위해서는 희생을 하려하
지 않는 사람의 유형입니다. 배짱이가 개미에게 아무리 와서 추운 겨울이라 먹을 것이 없으니 조금 달라고 하더라도 개미는 배짱
이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생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면서 배짱이를 돕지 않습니다.
세상에 사는 대부분이 이런 사람에 속합니다.
전철에서 거지를 보더라도 일이나 하지 왜 저렇게 빌어먹고 있느냐고 하면서 눈을 흘기지만 돈을 주지는 않습니다.
빌어먹고 사는 사람들을 볼 때 속인다고 생각하고 또 줘 봐야 술이나 마약을 한다고 주기를 꺼려합니다.
주려고 하다가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창피해서 선뜻 내어주지를 못하고 그냥 지나쳐버립니다.
‘내가 먼저 잘 살고 남도 도와야지’ 하면서 자신을 위로하지만 결국 인간은 만족할 수 없는 존재기에 그런 마음으로는 죽기까지
누구도 도울 수 없습니다.
나, 내 가족, 내 것 만을 먼저 챙깁니다.
가끔은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그 보답을 받을 것을 계산하고 있습니다. 친구나 이웃에게 선
물을 주는 것도 이런 계산 안에 다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특별히 피해주는 것은 없을지라도 도움 되는 것 또한 없습니다. 적당히 이기주의적이고 사람들에게 피해주지
않는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주는 사람들을 무척이나 욕하고 과민반응까지 보입니
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성당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최소한의 의무만 하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적당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입
니다. 대부분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천국에만 들어가면 되는 것이니까 적당히 소죄는 짓더라도 대죄는 짓지 않고 주일미사만 간
신히 나오는 신자들일 것입니다. 교회 입장에서 보면 이런 사람들 또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입니다. 물론 본인이야 하느
님나라 들어가는 것이 큰일이겠지만 말이죠.
마지막 부류는 꿀벌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꿀벌은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사람들에게 꿀을 주어 다른 이들에게도 이득을 주는
꼭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마더 데레사가 죽었을 때 인도에서는 국가에서 큰 슬픔의 날로 정하고 대대적으로 장례를 치르게 하였습니다. 물론 인도는 힌
두교가 주 종교인데 다른 나라의 그것도 다른 종교의 수도자를 그렇게 크게 인정해줄 수 있었던 이유는 마더 데레사가 꿀벌과 같
은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인도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은데 마데 데레사는 그런 이들을 예수님을 돌보듯이 돌보아
사회에 크게 기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면서 살아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저 자기 사는 것도 바빠 다른 사람을 돌볼
여유가 없는데 어떻게 마더 데레사와 같이 꿀벌형 인간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도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1. 누구나 꿀벌 형 인간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유익이 되는 훌륭한 사람들이 되는 것이 특별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그런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봉사를 할 수 있게 태어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린 아기가 부모를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
겠습니까? 어린 아이는 말썽 부리지 않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봉사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봉사를 해야 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기도 언젠가는 커서 부모가 될 것이고 똑 같은 봉사를 하
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아기가 부모의 이러한 희생으로 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먹고 즐기기만 하려하고 가정을 꾸려
도 책임지려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정말 배짱이과이고 사회에서 없어져야 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봉사를 받았으면
봉사를 해야 하는 의무도 동시에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처음에는 예비자로 시작합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는 없습니다.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고 다시 냉담을 하려고해도 전화해주고 관심 가져주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 받은 우리들은 반드시 누
구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도움 없이 세례를 받은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교리 봉사자가 있었을
것이고, 대부, 대모도 있고, 교육 분과 구역 반원들 혹은 레지오 단원들의 도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교회와 성직자 수
도자들의 도움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세례 받은 사람들이 자신들은 그런 도움을 받고 아무도 봉사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정의롭지 못한 것일 것입니다. 물론 대죄만 안 짓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해도 하느님께 많은 칭찬은 받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커서 키워주신 부모님의 은덕만으로도 부모님을 봉양해야 할 의무를 지는 것처럼 믿음도 갖게 해 주신 교회에
감사하기 위해서라도 무슨 봉사라도 해야 하는 것이 도리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렸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도움만 받으며 컸습니다. 12세에 성인식을 하고 나서야 부모님을 위해서 일을 거
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이가 30이 될 때까지 가정을 위해서 키워주신 부모님의 은덕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족을 위해서만 사
셨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특별하게 이웃을 위해 사셔서 어떤 것에 기여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인
식이 되기 전까지는 배짱이의 시절, 또 성인식을 하고 30이 될 때까지는 개미의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30이 넘
자 이제 꿀벌의 삶으로 나아가야 됨을 직감하시고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활을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꿀벌 형 인간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부르심이고 의무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셨기 때문
에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서 다만 무엇이라도 조금 기쁜 일을 해 드려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엄연히 살신성인의 정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도 이런 삶을 사시기까지는 30년의 세월이 필요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정을 버리시고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을 위해서 당신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고 수난
을 받으심으로써 모든 인간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그 누구도 구원받으실 수 없었으니 이런 꿀벌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필연적으
로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사회가 다 이기주의적인 사람들만 있고 교회가 다 이기주의적인 사람들만 있다면 그곳은 틀림없이 삭
막한 곳이 될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도 사제나 수도자가 되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유럽교회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사
제와 수도자의 수가 매우 줄었고 지금 계신 분들도 이삼십 년 후면 다 돌아가실 분들입니다. 사제가 없으니 미사해줄 사람도 없
고 그렇게 영적 지도자가 없으니 신앙생활도 점점 시들해지고 또 그러다보니 성소자는 더 줄어들고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
이고 그렇게 교회는 끝나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누구나가 다 사제로부터 세례를 받았는데 아무도 사제가 되려하지 않는 것에서
이렇게 엄청난 결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다 꿀벌의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명령하셨기 때
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무엇이 완전한 사람입니까? 자기 할 일만 하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전혀 안 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같이 살신성인
의 정신으로 자신을 희생하여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 완벽한 삶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완전하신 하느님이셨고
완전하신 인간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삶이 완전한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봉사를 받으러 오시지 않았고 오히
려 봉사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완성은 바로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봉사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입니다
.
봉사를 받는 인간은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장애인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그들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저보다 훨씬 위에 있고 하느님나라에서도 저보다 다 높은 곳에 앉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는 사람들에게 봉사를 받
습니다. 왜냐하면 봉사를 받아야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봉사를 받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으
로든 육적으로든 봉사를 받지 않고 오히려 봉사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봉사하는 삶이 완전한 삶임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
다. 지체 장애인이 봉사를 제대로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온전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봉사를 하고 있다는 말은 그만큼 그리스도의 삶과 완전에 가까워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꿀벌의 삶을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꿀벌의 삶을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이는 선택사항이 아니고 의무입
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하느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랑은 그러나 이기주의가 아닙니다. 따라서 개미의 삶을 산
다면 이기주의임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지 않는 것이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도 받을 수 없습니다. 꿀벌의 나
라에서는 꿀벌만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선교차원에서 생각해봅시다. 대부분의 천주교신자들은 단 한명도 선교를 못해보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선교는 사랑입니
다. 길가에서 차에 치이려고 하는 사람을 구해주는 것은 생명을 구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선교는 영원한 생명을 구하는 일입니
다.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갈 수 있지만 나의 한 마디로 인해서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는다면 얼마나 큰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지옥
으로 떨어져 영원한 죽음으로 가는 것이 뻔한데도 말하기 부끄러워 성당 나오라는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면 사랑이 없다는 뜻입
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선교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교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기 때문
입니다.
마찬가지로 봉사도 하나의 선교차원입니다. 선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 봉사는 없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선교입니다. 사랑이 없
는 사람은 선교도 할 수 없습니다. 봉사는 이 선교라는 사랑의 실천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서 행하는 봉사도 하나의 선교이고 사랑의 실천인 것입니다. 사랑의 실천도 안 하면서 예수님을 살아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잘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봉사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
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은 일년에 40명도 입교시켰다고 합니다. 그냥 가게에오는 사람에게 “찬미예수님!”하며 인사했고 그 인사
에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성당으로 인도만 해주었는데 일년에 40명이었다고 합니다. 만약 이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 40명
은 기회를 얻지 못하여 평생 성당에 오지 못하고 많이 숫자가 구원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분은 정말 꿀벌과 같
은 삶을 사시는 것이고 하느님으로부터 합당한 상을 받으실 것입니다.
2. 봉사의 에너지는 성체와 성경으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에 있습니다.
몸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잘 먹어야하고 운동을 해야 하고 스트레스가 없어야합니다. 잘 먹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성체와 성
경을 먹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해야 그 안에 살아계신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성체와 성경을 함께 먹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미사참례입니다. 훌륭한 봉사자가 되기 위해서는 미사참례를 열심히해야하는 것입니다. 만약 미사참례를
못하는 사정이라면 성경이라도 열심히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에너지가 없이 몸이 허술한데 어떻게 봉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육체의 운동을 영적으로 말하면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몸은 움직여야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에밀레종을 잘 보존하
기 위해서 박물관에 갖다놓았더니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그 종을 칠 때보다 더 균열이가고 안 좋아졌다고 합니다. 물론 직
접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경험으로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몸도 잘 안 움직이다 운동을 갑자기 하게 되면 병이올
수 있는 것처럼 항상 적당한 운동을 해 주어야합니다. 영적으로도 자꾸 묵상을 하지 않으면 그 통로가 막혀서 점점도 하느님과
의 단절이 오게 됩니다. 묵상도 매일매일 꾸준히 해 주어야하는 것입니다. 머리도 쓰지 않으면 침해에 걸리게 됩니다. 그래서
노인 분들이 고스톱도 하고 돈 계산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스트레스를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요? 제가 볼 때는 성체 조배하는 것입니다. 운동을 해도 되고 영화 관람을 해
도 되고, 뭐 각자의 여러 가지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겠지만 저는 성체 앞에 죽치고 앉아있는 것이 저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
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스트레스를 쌓이게 합니다. 그러나 성체 앞에 앉아 있으면 성체에서 좋은 기운이 나와서 저의 모든 스
트레스를 깨끗이 씻고 새 기운을 불어넣어 줍니다. 왜냐하면 성체에서는 아직도 피와 물이 흘러나와 인간의 죄를 씻고 성령의 좋
은 열매를 맺게 하기 때문입니다.
잘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한다고 해도 스트레스가 있다면 몸이 안 좋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요즘 대부분들 병명을 보면 “신경성...
무슨 병” 이라는 진단을 자주 듣습니다. 신경성 위장염, 대장염, 여러 질환들... 이런 것들이 스트레스에서 오는데 그 스트레스를
잘 해소시켜주지 못해서 발생합니다. 매일 꾸준히 성체 조배하는 사람치고 스트레스 쌓여 다니는 사람 없습니다. 문제는 필요할
때만 찾고 꾸준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영적인 차원으로 치료해야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 준비도 없이 봉사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에제키엘 3장
1 그것을 보이시고 그분은 "받아먹어라. 너 사람아, 이 두루마리를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가서 이것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일러 주어라."
2 내가 입을 벌리자 그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주시면서 그분은
3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내가 주는 이 두루마리를 배부르게 먹어라." 그리하여 그것을 받아먹으니 마치 꿀처럼 입에 달
았다.
4 그분이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어서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예언자가 되는 것도 하나의 봉사입니다. 하느님께서 에제키엘을 예언자로 파견하시기 전에 두루마리를 받아먹으라고 하십니다.
이 두루마리는 성경을 의미합니다. 먼저 성경을 먹지 않고서는 봉사할 에너지도 어떤 봉사를 해야 하는지도 사람을 만나서 무슨
말을 전해야하는지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봉사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준비가 바로 성경을 배부르게 먹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것이 들어있으면 좋은 것이 나오고 나쁜 것이 들어있으면 나쁜 것이 나옵니다.
개신교인들을 한 번 보십시오. 성경으로 철저하게 무장되어 있습니다. 한 번은 밥을 먹으면서 시끄러워서 보았는데 교회에 나
올 수 있도록 어떤 사람이 가르쳐주는데 먼저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고 성경을 펴 놓고 가르쳐주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평신도들
도 성경에 정통해있고 봉사를 하더라도 성경에서 시작 할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경을 이제는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참 좋은 현상이고 성체가 없는 개신교에 비해서 우리가 성경까지 강조하게 된다면 훨씬 좋은 효과를 얻을 것
입니다.
개신교인들은 성경으로 철저하게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봉사의식이 투철합니다. 복음 말씀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것
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라는 것이 매우 깊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다른 노력보다는 먼저 성경을 잘 알도록 교육해야 합니다. 성경을 알고 이해하게 되면 봉사자가 저절로 나올 것입니다.
아무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보고 아무리 봉사하라고 해 보아야 먹히지가 않는 것입니다.
본당 내에서 체계적인 성경공부가 이루어져야하고 몇 사람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라면 다 성경을 읽게 하
고 공부를 하게하고 성경을 배우게 해야 합니다. 영적인 말씀으로 충만해지면 두려움도 없어지고 봉사할 마음도 살아나게 됩니
다.
3. 봉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하는 처지라면 그런 사람이 봉사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병
에 걸려 누워있거나 다른 사람을 의지해야만 서거나 움직일 수 있다면 봉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봉사를 받아야 하는 사
람입니다. 봉사하기 위해서는 홀로 설 수 있는 능력을 먼저 키워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서시기 위해서 광야에서 사십 일간 홀로 지내셨습니다. 말도 한 마디 하지 않고 사람도 만나지 않고 그저 별
과 동물들 벗 삼아 기도만하셨습니다. 꿀벌이 되기 위해서 먼저 홀로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하심입니다.
만약 내가 홀로 있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면 그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그의 희생물이 되고 맙니다. 참다운 사랑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외로움을 없애기 위한 필요성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혼인을 할 때도 서로간의 외로움을 상대방이 없애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막상 혼인하고 살다보면 혼자 있을 때보다
도 더 큰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인간의 외로움은 어차피 인간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육체는 채워질 수 있어도
영혼이 느끼는 외로움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주위에 있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과 있을수록 더 외로워집니
다.
저는 외로움을 좀처럼 잘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때 제 생일파티에 많은 사람들이 케이크를 사와서 함께 노래 부르고 또
그것을 제 얼굴에 뭍이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때는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주는 줄 알았습니다. 결국 저는 홀로 세면대에서 기
름기 있는 케이크를 닦아내야 했고 나와 보니 그들은 저 없이도 웃고 떠들며 잘 놀고 있었습니다. 나를 축하해주러 온 줄 알았더
니 자기들끼리 열심히 케잌 뭍여가며 놀고 결국은 생일자가 어떤지 관심도 없이 자기들의 기쁨을 찾으러 온 것이었습니다. 어차
피 일반적인 사람의 심리는 서로 자신의 외로움을 채우고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제 주위에는 언제나 친구가 많았었는데 고등학교 때 한 번 제가 한 아이와 싸움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주먹다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친구들이 모두 상대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싸움을 무척 잘하는 아이었고 제가 무모하게 덤볐다고 생
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친구들이 저의 편을 들어줄 줄 알았는데 결국 잘나가는 아이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보고 매우 배신감
을 느꼈고 ‘세상엔 결국 나 혼자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가족도 친구도 누구도 이 고독감을 해소해줄 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친구에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는 자신의 개신교 다니는 친구에게 들은 대로 저에게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 그 말인 즉, ‘예수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어떻게 외로워할 수 있느냐?’ 입니다. 물론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같
았지만 저는 그것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사람들로부터 저의 외로움을 채우려했던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로
부터 저의 외로움을 채우려는 시도를 멈추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항상 나와 함께 계심을 상상하고 기도도 드
리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이후로 외로움을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주 당연하고 단순한 것 같
지만 어차피 홀로 설 수 있게 되니까 외로움도 느껴지지 않았고 더 신기했던 것은 이 때부터 저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제 사람들을 나의 외로움을 채우려는 필요로 만나려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외
로움을 채우기 위해서 나를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가을이 오면 왠지 옆구리가 시린 것은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여자가 필요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나를 사랑해주는 여자
가 있다는 것이 여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같이 술도 먹고 밥 먹을 때는 쌈도 싸서 먹여주고 함께 쇼핑도하고 즐거웠습니다. 그
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불안감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어쩔까?’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전화를 받지 않
으면 옛 남자와 만나는 것은 아닌지 나에 대한 애정이 떨어졌는데 일부러 그냥 그렇게 대해주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서
로 사랑의 고백을 듣더라도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 결혼해서 함께 살아도 이 사람이 나만을 완벽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믿기가 힘들 것 같았습니다. 믿기 어렵다는 것은 사랑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결국 여자도 언젠가는 나를 떠나갈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고 나의 마음을 온전히 채워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인간이 육체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보다 보이는 사람의 애정에 더 쉽게 끌리기는 하고 많은 위로도 되지만 완전히 나를 채워줄 수는 없는 것입
니다.
저는 다시 하느님께 제 자신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로 하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성서도 묵상하고 그분
의 것이라면 계시건 뭐건 닥치는 대로 읽고 그분을 더 알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분을 알게 되고 아주 조
금이라도 사랑하게 되면서 외로움이라는 것은 자취를 감추어버렸습니다. 오히려 홀로 있는 시간이 더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그분의 존재를 잊게 되기 때문에 더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 이 때부터 이웃에게 봉사
할 수 있는 거구나!’를 깨달았습니다. 그 이전에는 성당에서 봉사를 하더라도 결국은 제 만족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제 개인적인 목적이 조금이라도 있었기 때문에 봉사가 올바른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올바른 봉사를 하기 위해
서는 먼저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젠 이웃이 저를 더 행복하게하거나 외로움을 채워주는데 필
요하지 않기 때문에 참으로 이웃에게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을까요? 바로 광야에 나가서 기도하는 길이고 산으로 올라서 홀로 하느님과 일대일 대
면을 할 수 있도록 기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 일간 홀로 머무신 것입니다. ‘홀로 선
다’ 는 의미는 정말 홀로 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선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어떤 누구도 홀로 살아갈 수 없습
니다. 홀로 태어나서 홀로 살 능력도 없고 영혼도 마찬가지로 누가 잡아주지 않으면 언제나 휘청거립니다. 휘청거리면서 홀로 설
능력도 없으면서 누구에게 봉사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홀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함
께 계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홀로 하느님과 만나서 자신을 채울 능력이 되어야 봉사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기도 할 수 있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음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기도 하
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만으로 하려고 하기 때문에 어떤 일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사람의 교만을 그렇게
더 키워주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기도하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개인적으로 기도할
수 있는 능력들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이라도 일주일이라도 아니 영원이라도 하느님만 있으면 충분할 수 있
도록 고독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남의 도움 없이 홀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4. 육체를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봉사할 수 있습니다.
꿀벌은 열심히 날아다니며 꿀을 모읍니다. 개미도 마찬가지지만 게으름을 피우지 않습니다. 자신의 육체에 지는 사람들은 봉
사하기는 틀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꿀벌이 되시기 위해서 40일 동안 기도만 하신 것이 아니라 단식도 하셨습니
다. 이는 자신의 육체를 죽이는 노력을 한 것입니다. 마귀가 돌이 빵이 되게 해 보라고 예수님을 유혹했지만 예수님께서 그것
을 할 능력이 없어서 하시지 않으셨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느님이고 모든 능력이 있는데 원죄까지도 없는 자신의 육체를 죽이
는 훈련을 그렇게 강하게 하셨으니 이미 죄의 맛을 알고 있는 우리들의 육신을 죽이는데 얼마나 더 큰 훈련을 해야 할
지 가히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신도 육신으로 얻는 즐거움도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인데 왜 육체를 학대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주위
에 자신의 육체적 즐거움만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을 조금만 둘러보아도 자신의 육신을 만족시키는 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
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편하게만 사시려고 생각하셨다면 누구를 구원하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실 때부터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까지 결코 자신의 편함을 찾지 않으셨습니다. 춥고 냄새나는 마구간에 태어나셔서 딱딱한 나무 말
밥통에 뉘여 지셨고 결국에는 딱딱한 나무 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육신을 죽이는 고통이 없으
면 아무에게도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봉사를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봉사하러 오
셨다는 삶의 증거입니다.
저는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하고 사람과 먹고 마시는 것, 텔레비전, 스포츠, 인터넷 등 보통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저도 좋아합니
다. 그러나 그런 것에 시간을 빼앗기다보니 저절로 늦게 일어나게 되고 게을러지게 되고 그래서 기도시간도 줄어들고 죄도 짓게
되고 신자들을 위해서 준비해야 할 강론도 그냥 생각나는 대로 하게 되며 미사도 빨리 끝내버려야 하는 그런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방에서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하지 않기로 했고 그랬더니 시간도 많이 늘어나고 신자들을 위해
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성인들의 극기에 비하면 비교할 수도 없는 것들이지만 이렇게 작게
나마 내 육신이 좋아하는 것을 절제하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은 봉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먹고 마시면 배가 풍만해지고 그런 상태면 기도나 묵상이 전혀 되지 않고 강론이나 강의를 해도 힘이 없어지고 맹맹해지기
만 합니다. 저는 육체를 죽이면 죽일수록 또 다른 힘이 솟아나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님인 것입니다.
성령님은 육체의 욕망과 반대입니다. 우리는 봉사를 성령의 힘으로 해야지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해서는 어떠한 성과도 거두
지 못합니다.
제가 가끔 복지시설에 가서 봉사를 하다보면 그런 일에 직업적으로 봉사하는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복지사들인데 그들은 직
업이기 때문에 그런지 장애인들이나 노인들을 어떤 때는 물건처럼 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물론 저도 그런 일을 하다보
면 환자들에게 화가 날 때도 있지만 기술도 더 좋은 그들이 그러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들은 가끔 나이가 들었든 어리
든 때릴 때도 있는데 그 무서움에 환자들은 말을 잘 듣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더 봉사를 능률적으로 잘 할 수도 있습니다.
목욕하는 것, 관장하는 것, 옷 입히고 밥을 먹이는 것 등, 매우 능률적으로 합니다. 그러나 환자들이 느끼는 것은 그렇지 못합니
다. 좀 잘 못하더라도 사랑이 있는 사람을 더 원합니다.
이태리에 있을 때 꼬톨렝고라고 하는 복지시설에서 일하셨던 한 수사님은 사랑으로 환자들을 돌보셨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좋아졌다고 합니다. 사랑이 사람을 고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인데 사랑은 자신의 육체를 만족시키려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나옵니다. 오히려 자신의 육체를 미워한다면 많은 사랑을
이웃을 위해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 저의 집 옆에 살던 아주머니도 성추행하려고 하는 젊은 사람에게 저항하다가 칼에 찔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음란한
것을 보다가 자신도 자신의 육정에 못 이겨 삶을 망치고 만 것입니다. 육체적 욕망은 절대로 만족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만
족 되었다면 다음번은 더 큰 쾌락으로 채워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점점 더 그 요구하는 것이 커지고 결국 사람을 파멸로 이
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육체를 죽이는 것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요?
다른 종교에서도 이런 종류의 극기를 많이 합니다. 가톨릭이 이런 면에 있어서는 매우 관대한 편입니다. 단식이라 하면 우리는
하루에 한 끼 굶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낮 시간 동안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그 기간도 매우 길다고 합니
다. 우리야 단 일년에 단 이틀밖에 없습니다. 금요일 날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는 하나, 회나 매운탕 등 더 좋은 것을 먹기도 합니
다. 이런 종류의 극기는 필요 없습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자신의 육체를 미워하여 고통스럽게 해야 자신의 육체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전에는 70세가 넘은 노인이 시설의 아이들을 돌아가며 성추행한 사건이 크게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육체적 욕망은 자신이 알
아서 죽이지 않으면 나이에 상관없이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의 주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배가 부르면 교만해지고 생각이 둔해지고 죄를 지을 가능성이 커집니다. 육체는 만족시켜주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극기에 목
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극기를 통해서 이웃사랑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육체는 마치 금붕어와 같습니다. 예전에 집에 어항이 있을 때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는 금붕어에게 아주 작은 양의 먹이만을
떨어뜨려 주었습니다. 금붕어들은 그것들을 금방 집어먹고 남은 것이 없나 찾아 헤맸습니다. 저는 ‘잠깐 저렇게 조금 먹고 어떻
게 버티나?’ 생각이 들어서 어머니가 없을 때 먹이를 많이 쏟아 주었습니다. 금붕어들은 배가 터질 듯이 되었고 어항 물도 매우
더러워졌던 것 같습니다. 이것을 본 어머니께서 금붕어들은 주는 대로 다 먹기 때문에 배가 터질 때까지도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아주 조금만 주면 균형 잡힌 몸매로 깨끗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지만 많이 주면 많이 줄수록 만족하지 못하고 죽는 것도 모르고
먹는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어 보이지만 이것이 인간의 육체와 똑같습니다. 인간의 육체도 만족을 모릅니다. 이것을 채우면 더 큰 것을 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음란한 그림을 보다보면 동영상이 보고 싶고 동영상을 보다가 돈 주고 경험하게 되고 그러다가 그런 삶에 중독
이 되고 그것도 만족하지 못해서 변태가 되든지 살인자가 되든지 합니다. 어느 정도에서 끊어주어야 하는데 그 일이 바로 종교가
하는 일입니다. 만약 둑에 구멍이 났을 때 가장 막기 쉬울 때는 처음에 구멍이 조그마할 때입니다. 더 커진다면 손을 쓸 수 없는
상황까지 가게 됩니다. 따라서 아예 아주 작은 것부터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위해서 여자를 음탕한 눈으
로 쳐다보기만 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금붕어에게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양만큼만 먹이를 주어야하는 것처럼 인간도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만큼만 채워주
어야지 더 채워주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어차피 육신은 죽으면 땅 한 평도 차지하지 못합니다. 살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만큼만 육신을 채워주는 것이 병드는 일이 없도록 하는 길입니다. 너무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를 많이 하면 눈이 나빠지는 것이 당
연합니다. 너무 먹기만 하면 살이 찌고 너무 게을러지면 몸이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꼭 필요한 만큼만 육체를 채울 수 있도록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벌써 큰 영성의 진보를 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올바로 이웃을 위해 봉사할 수 있
는 것입니다.
5.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
이렇게 봉사를 하고 나서는 다른 사람에게 알리거나 다른 사람이 그렇게 못한다고 다른 사람들을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 그
런 봉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신중히 비밀을 지킬 필요가 있습니
다.
보이게 하는 봉사는 오히려 봉사를 해 놓고도 그 사람에게 피해를 줍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더라도 골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하라고 하시고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최후의 심판 때에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들에게 해 준 것으로 심판하시리라 하시며 의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
을 주었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으며,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 돌보
아 주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 때 “의인들은 자신들이 언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이 가장 보잘것
없는 형제들에게 해 준 것이 곧 당신께 해 준 것이라고 해도 그들은 기억을 잘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바라고 해 준 것
이 아니고 그들이 한 일들을 다 잊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착한 일을 했다면 잊으십시오. 그것이 가장 좋고 모든 것을 기억하시
는 하느님께서 나중에 다 갚아주실 것입니다.
만약 부모님께서 자녀에게 “내가 너에게 해 준 밥값이 얼마 얼마이고 옷값이 다 합산하면 얼마이고...” 라고 따진다면 참 가족
으로 보기 어려워 질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지 그것을 기억하거나 사람들에게 알리거나 하는 것은
참 사랑의 의미를 감소시키는 것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은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아야 참
다운 사랑의 의미가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사랑 자체의 목적이 아닌 다른 의도가 있으면 그 사랑은 변질된 것입니다. 따라
서 부모님께서 자녀에게 해 주신 모든 것들을 잊을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자녀를 사랑했기 때문이고 어떤 사람이 자신이 한 것
을 꼬치꼬치 계산한다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 선행을 한 것임으로 참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 중에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단식과 십일조 등을 잘 했다고 자랑했고 세리는 죄인이라고 용서만 청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은 몸을
낮추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판단에 집착하는 이유는 자신이 마음 안에서 하느님께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
입니다. 즉, 하느님께 죄를 지어 하느님께서 나를 올바로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사람들로부터라도 그 인정을 다시 얻으려
는 보상심리에서 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다 인정해주고 성인이라 칭송해도 하느님께서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입니
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양심적으로 올바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그나마 인정을 받고 있다고 느
끼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다른 인정을 얻으려하지 않기 때문에 더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죄
는 사람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반면에 의인들은 참다운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해도 하느님께
서 나를 알아주시니 난 그것으로 만족이야!’ 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종이 할 일을 다 마치고 난 다음에는 그저 “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라고만 말하라고 하십니다.
그런 봉사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도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누구도 자신이 한 선행에 대해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강과 시간을 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은 봉사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잘 하지 않는다고 그들을 비판합니다. 이것도 봉사를 참다운 정신으로 하
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이 봉사를 잘 하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그것을 알아주실 것이고 그 사람은 이것으로 만족하면 됩니
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비판하게 된다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우월하게 무엇을 하고 있다는 자만심을 갖기 위해
그 일을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종은 자신의 일만 충실히 하면 됩니다. 일꾼을 관리하는 것은 주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
일뿐입니다. 봉사가 교만만 키워주는 것이 되서는 안 됩니다. 봉사의 유일한 원동력이자 목적은 ‘사랑’이 되어야하는 것이
고 다른 의도는 다 변질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봉사하거나 재물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내가 한 봉사로 인해서 언젠가 이 사람
이 나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거나 보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봉사 또한 하느님 눈에는 기쁘게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갚을 수 없는 가장 비천한 사람들을 찾아가 봉사해야 합니다.
그들이 갚지 못해야 하느님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봉사는 이렇게 사랑으로 하는 것이고 사랑은 비밀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우
리는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에 들려고만 하면 될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께서는 비천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비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
생님이셨습니다. 그것도 작은 소명은 아니지만 가장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했기에 그의 가치가 더욱 커질 수 있었
던 것입니다.
그녀는 모든 이들 안에서 특별히 가나한 이들 중 가장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했고 그리스도께 해 드린다는
생각으로 봉사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참된 봉사란 무엇이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참된 봉사는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의무이고 이웃사랑의 실천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참된 봉사를 하셨던 그리스도께서 모든 봉사자들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섬기러 오셨지 섬김 받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님을 밝히셨습니다. 우리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
니다.
높아지려고 하면 낮아질 것이고 낮아지려고 하면 높아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이 세상
에서 어린이와 같이 가장 낮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머슴처럼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된다면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사람이 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듯이 우리들도
서로의 머슴이 되어 이웃을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첫댓글 저희 본당 신부님들께 강론으로 들은 내용을 다시 한 번 복습하고 갑니다 ...긴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사랑 가득한 날 되십시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