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디건, 포근한 니트와 ‘무능한 귀족 장교’의 이름]
오늘날 ‘카디건’은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는 일상적인 옷이다. 앞이 트여 있어 입고 벗기 편하고, 따뜻하며, 포근한 이미지를 갖는다. 그런데 이 옷 이름의 주인공인 카디건 백작(Earl of Cardigan)은 역설적으로, 영국군 역사에서 무능과 허영의 상징처럼 남은 인물이다. 패션의 역사 뒤에 숨어 있는 이 아이러니를 따라가 보면, 19세기 영국 귀족 장교 계급의 민낯이 드러난다.
카디건은 원래 크림전쟁(1853~1856) 당시 영국 장교들이 방한용으로 입던 앞이 열린 울 니트 조끼에서 출발한다. 제7대 카디건 백작 제임스 브루더넬(1797~1868)이 이 옷을 즐겨 입으면서, 후대에 그의 작위명 ‘카디건’이 앞여밈 니트 상의를 통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심지어 전해지는 일화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어느 날 그가 난로 앞에 서 있다가 연미복의 긴 ‘꼬리' 부분이 불에 그을려 떨어지자, 아예 꼬리 없는 짧은 니트 재킷을 만들게 되었고 이것이 카디건의 원형이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허영 많은 귀족 장교 카디건의 이미지를 덧칠한 전설에 가깝지만, 어쨌든 ‘편한 앞여밈 니트’라는 개념은 이 시기부터 굳어졌다.
처음의 카디건은 오늘날처럼 다양한 형태가 아니라, 앞이 트인 니트 조끼 정도를 의미했다. 20세기 들어 여성복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 머리를 망가뜨리는 풀오버 스웨터 대신 앞여밈 카디건을 애용하면서 대중적 의상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고, 이제는 남녀 모두에게 친숙한 옷이 되었다.
하지만 ‘따뜻한 이미지’를 뒤집어 보면, 그 이름의 주인공은 전혀 따뜻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돈으로 계급을 산 귀족 장교, 제7대 카디건 백작
카디건 백작 제임스 브루더넬은 태어날 때부터 상류 귀족이었다. 당시 영국군에는 ‘지위 구매(purchase of commissions)’ 제도가 있어, 돈 많은 귀족은 실력과 무관하게 높은 장교 계급을 살 수 있었다. 그는 바로 이 제도의 대표적인 수혜자였다.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던 그는, 거액을 지불해 기병 연대의 지휘권을 차례로 사들였다. 워털루 전쟁을 겪은 노련한 장교들이 즐비했던 시대에, 실전 감각은 부족하지만 금력과 작위를 가진 귀족이 연대 지휘관 자리로 내려앉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영국군 총사령관 힐 경은 그를 두고 “지휘에 본질적으로 부적합하다”고 평가했지만, 귀족 사회와 왕실의 후원 덕에 카디건은 주요 보직을 유지했다. 이 시점부터 이미 그는 무능한 귀족 장교의 전형으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사소함에 집착한 오만함: ‘블랙 보틀 사건’
카디건 백작의 진짜 문제는 실전 경험 부족이 아니라, 사소한 규율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권위적 성격이었다.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 바로 기병 연대에서 벌어진 ‘블랙 보틀(black bottle) 사건’이다.
그는 장교 식탁에서 서민적인 흑맥주(포터)를 금지했다. 그런데 어느 날 손님이 모젤 와인을 마시고 싶어 하자, 한 장교가 이를 검은 병에 담아 내놓았다. 모양이 포터 병과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카디건은 장교가 자신의 명령을 무시했다고 판단했고, 즉시 체포와 징계를 시도했다.
이 사건은 결국 상부 보고와 군법회의로까지 번졌고, 총사령관은 카디건의 행동을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지위와 인맥 덕분에 실질적 처벌을 받지 않았다. 사소한 병 모양 하나로 부하를 괴롭히는 지휘관, 이것이 카디건의 평판을 고착시킨 또 하나의 계기였다.
결투, 법적 기술, 그리고 운 좋게 빠져나온 유죄
카디건은 자신을 비판한 퇴역 장교와 결투까지 벌여 상대에게 중상을 입혔다. 기소되었지만, 기소장에 적힌 이름 철자가 약간 틀렸다는 순전히 절차적 오류 덕분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체포되면서조차 "내가 그 놈을 맞췄다”며 자랑스러워했다고 기록된다.
이쯤 되면 그의 성격이 어떤 유형이었는지 분명해진다.
역사적 참사 ‘라이트 브리게이드 돌격’의 중심에 서다
카디건 백작의 이름을 결정적으로 역사에 남긴 사건은 1854년 발라클라바 전투, 즉 유명한 ‘라이트 브리게이드 돌격’이다. 영국군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가장 많이 논쟁되는 전투다.
총사령관 래글런 경의 애매한 명령, 지휘관들 사이의 불화, 부정확한 정보가 겹치면서 라이트 브리게이드는 정면에 러시아 포병이 빽빽이 들어선 계곡으로 돌격하고 만다. 돌격을 실제로 지휘한 이는 카디건 백작이었다.
약 670명이 돌격해 절반 가까이가 사망·부상당하거나 포로가 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테니슨의 시 '라이트 브리게이드의 돌격'이 전쟁의 ‘용기’를 미화했지만 실제 전투의 속살은 무능한 지휘 체계가 불러온 재앙에 가까웠다.
카디건은 돌격을 선두에서 감행했지만, 포대 돌파 이후 깊이 관여하지 않고 빠르게 이탈한 점이 문제로 남았다. 후퇴 명령도 내리지 않아 후방 병력의 추가 희생이 컸다는 비판도 뒤따랐다. 전투 후 그는 자신이 끝까지 용감히 병사들과 함께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밤을 발라클라바 항의 호화 요트에서 보냈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그는 개인적 용기는 있었지만 지휘관으로서의 책임감은 부족했다는 평가를 피하영국 본토에 귀환한 카디건은 언론과 대중으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았다. 테니슨의 시가 여론을 고조시켰고, 빅토리아 여왕도 그를 초청해 전투 상황을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전쟁기록과 장교들의 회고록이 공개되자, 그의 과장과 허영, 실전에서의 한계가 드러났다.
그럼에도 그는 귀족사회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며, 스스로 만든 영웅 이미지를 끝까지 관리한 사람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즐겨 입는 카디건은 편안함, 따뜻함, 실용성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 이름은 전쟁의 참사를 막지 못한 무능한 귀족 장교의 이름에서 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의 전술적 실력도, 군인으로서의 명예도 아니라, 단추 달린 니트라는 일상의 옷이다.
포근한 옷 하나에 얽힌 이 역사는, 때로는 패션이 정치와 전쟁을 건너와 생긴 부산물임을, 그리고 이름 하나에 시대의 그림자가 숨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제7대 카디건 백작 토머스 브루더넬(James Thomas Brudenell, 7th Earl of Cardigan, KCB, 1797년 10월 16일 ~ 1868년 3월 28일)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