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번아웃이 왔을 때,
이렇게는 더이상 안되겠다는 생각에
훌쩍 바닷가로 떠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바다를 보며 조개구이를 먹고 싶다고
생각한지 몇년만에 드디어 번아웃을 핑계로 소망을 실현에 옮긴 것이었죠.
손님이 몰릴 시간을 피해서 갔음에도 야외석은 거의 만석이었고,
못내 아쉬웠지만 사람들 너머로 바닷가를 봐야하는 야외의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혼자서 조개구이를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소주를 깐지 30분정도 흘렀을까?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전망좋은 자리에 거센 비바람이 들이닥치며 수많은 커플들이 혼비백산 자리를 뜨기 시작하더니,
5분도 안 되어 야외석에는 저 혼자만이 달랑 남게 되었습니다.
저는 왜 묵묵히 계속 앉아있었느냐?
마침 구석진 제 자리에까지는 비가 들이닥치지 않더라구요.
폭우가 쏟아지고 바람은 시원하게 불어제끼는 어느 여름밤 바닷가.
분명 제일 안 좋은 자리였는데, 어느순간 명당이 되어버린 구석진 자리에서
그렇게 밤바다를 바라보며 조개구이와 빗소리를 안주삼아 술을 마셨습니다.
흥겨웠습니다. 그 순간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어요.
그 때 저는 우산이 없었습니다.
다 먹고나서 어떡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저는
계산을 하면서 사장님께 혹시 남는 우산 있으면 저에게 파실수 없겠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아휴 혼자 오셔서 비바람 속에서 소주 까신 분한테 어떻게 돈을 받고 남는 우산을 판담?
그냥 드릴께. 나중에 또 놀러오셔요.~'
그렇게 우산대가 150도로 휘어진 비닐우산을 선물받았던 그 날 밤을 저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추억하기
심리학자들은 똑같은 돈이라면,
물건을 구매하는 것보다 경험을 구매하는 쪽이
더 가심비가 높다고 설명합니다.
만족스러움이 마음 속에서 더 오래 간직되기 때문이죠.
친구들과 술 한잔 할 때,
안주거리로 삼는 일은 대부분 과거의 즐거웠던 추억들이지,
과거에 샀던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는 안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런가하면,
커플과 사랑에 대한 연구들에선,
헤어지지 않고 좋은 관계를 쭉 유지하는 연인들의 특징 중 하나로
수많은 추억거리들을 공유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즐거웠던 추억이 관계에서 훌륭한 완충제 역할을 해 줄 수 있다는 거에요.
사이가 안 좋을 때, 상대방과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 때의 감상이 떠오르며 아련한 마음이 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안타까운 건
우리는 즐거웠던 경험들을 의외로 쉽게 잊어버리곤 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망각의 동물인고 하니,
임상심리학의 연구들에선,
사람들이 약을 먹는 걸 하도 까먹으니까,
약을 그냥 눈에 보이는 곳에만 진열해놔도
약을 챙겨먹는 횟수가 유의미하게 증가하는 것을 발견해내었습니다.
즉, "리마인더"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뭔가가 있다면, 계속해서 상기시킬 수 있다는 것이죠.
즐거웠던 추억은 언제고 그것을 기억해낼 때,
우리에게 예전 그 순간의 감흥을 되돌려서 선사해 줍니다.
그 때만큼의 강렬한 감정은 아닐지라도,
우리 기분을 좋게 만들기에는 충분할만큼의 아련한 심상이죠.
예전에 좋아했던 영화나 노래들을 우연히 다시 보거나 듣게 되었을 때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그 때의 아련했던 추억들이 다같이 되살아나는 것이죠.
그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의 그 시절만 간직할 수 있었던 로망과 감수성들
결국 중요한 건,
그 때 그 좋았던 순간을 다시 기억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므로,
추억이라는 선물을 제대로 만끽하기 위해서는 "리마인더"를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것이 관건입니다.
뭐가 있을까요?
사진, 비디오, 일기, 기념품,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 등등
그리고, 그 리마인더를 내 눈에 보이는 곳에 진열해놓는 것이 중요하겠죠?
사진이나 기념품들을 창고 속에 처박아두기만 한다면,
우리는 분명 고달픈 현생을 사느라 그 보석과 같은 추억거리들을 망각해버리고 말테니까요.
몇일 전에 스트레스를 잔뜩 받고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제일 싫어하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혹시나 싶은 마음에 차 트렁크를 열었는데
수많은 잡동사니들 사이 저기 구석진 자리에 우산대가 150도로 휘어진 비닐우산이 하나 파묻혀 있었습니다.
아......
불현듯 몇년전 여름밤 바닷가의 추억이 소환되고 저는 잠시 아련한 감상에 젖어있었어요.
'휴. 조개구이가 먹고 싶네. 오늘도 힘내 보자.'
기분이 괜찮았습니다.
그 날은 추억이 서려있는 낡은 우산을 발견한 운수 좋은 날이었죠.
※ 무명자 블로그 : https://blog.naver.com/ahsune
첫댓글 왜 눈물이 나져?ㅠ..
사진첩 꺼내 봅니다
감사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모든 글을 좋아했지만, 특히 이번 글은 정말 좋네요.
너무 좋은 수필을 본 듯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글이 좋네요 좋아. 내용이 훌륭한건 물론이고 마음에 여운을 남기는 글 입니다.
조개구이가 땡기는 글입니다 ^^ 덕분에 추억을 파일로만 저장하지 말고 출력해놔야겠다는 그리고 주변에 둬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
매번 글 잘 보고 있지만, 이번 글은 다른 감성이 느껴지는 예쁜 글이네요.
삶이 퍽퍽해질 때 리마인더를 꺼내 힘을 좀 내봐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정말 좋은 글이네요.
특히 즐거웠던 추억이 관계에서 훌륭한 완충제 역할을 해 준다는 얘기는 매우 공감이 갑니다. 물건보다는 경험이 가심비가 좋고, 이를 리마인더 될 수 있게 해줄 필요가 있다!!!
아이들과 사진을 좀 비치 해놔야겠어요!
진짜 좋은 글입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저도 추억을 먹고 사는 사람이라 너무 와닿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매번 무명자님 글 정독하고 있는데 이번글은 뭔가 더 와닿네요. 지금 저에게 가장 필요한 내용이라서 그럴까요?ㅋㅋ좋은글 감사합니다.
무명자님의 좋은글 덕분에 힐링하고 갑니다~~
아침일찍 일어나서 제일처음 만난 기분좋은 글이네요
글이 너무 좋네요. 공감이 됩니다.
또 하나 배우고 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