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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은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혼자 된 것은 아니죠. 그를 지지해주는 스탈린 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측근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인간적 신뢰관계를 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스탈린이 이들을 어디까지 믿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이들 또한, 특히 말년에는 스탈린과의 관계에서 항상 두려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순서는 죽은 순서입니다. 나이는 한국식 나이고 내용은 주로 영문위키 + 제가 읽는 책들에 기반했습니다.
처음으로 죽은 것은 세르고 오르조니키제입니다. 1886년에 태어나 1937년에 52세로 죽은 그는 그루지야에 태어난 스탈린의 동향 친구라고 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스탈린과 매우 친밀했고 당 내에서 인품과 영향력이 높기로 유명했습니다. 중공업인민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경제 분야에서 막대한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당시 스탈린 파벌 내의 온건파였으며 당 내에서 몰로토프와 충돌하다가 그의 측근인 퍄타코프가 숙청당한 뒤 자살합니다.
아이러니하게 그의 장례식 때 그를 기리는 연설을 한 사람은 바로 몰로토프였습니다. 몰로토프는 심지어 장례식에서도 그를 비판했고 둘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나빴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사후 소련 관료제 내의 거물이었던 중공업인민위원회는 산산조각 납니다.
내무인민위원회, 공포의 NKVD의 위원장으로 근무한 예조프는 1895년에 태어나 1940년에 46세로 죽었습니다. 제대로 된 당의 사업을 맡은 건 집단화를 맡을 때였습니다. 집단화 때 부농과 부르주아 전문가(테크노크라트)들과 싸우면서 이들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고 이 때 당내 급진파로 확 쏠렸습니다. 교육 문제에 대해 대학 폐지론을 강력하게 주장했다가 온건파들에게 몰매를 맞습니다. 1933년 숙청을 수행하는 데 두각을 나타내 당통제위원회 의장이 되었고 1935년 당 문서 확인, 1936년 당 문서 교체 사업을 진두지휘했습니다. 후에 NKVD 의장인 겐리흐 야고다가 지노비예프-카메네프 재판 때 온건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자 스탈린의 지원 하에 NKVD 의장을 꿰차고 예조프시나, 대숙청을 단행합니다. 그러나 대숙청이 끝나고 그는 스탈린에게 팽당해 1940년에 처형당했습니다.
공산당이 예조프의 기록을 많이 없애버려서 많은 것이 오리무중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으로 죽은 건 안드레이 즈다노프입니다. 예조프와는 다른 방식이었지만 이 사람도 당내 급진파의 거두였습니다. 당내에서는 교육, 이념, 문화 쪽을 담당한 사람으로 레닌그라드 당의 대표였습니다. 레닌그라드를 지역기반으로 삼아 중앙위 정치국, 서기국, 조직국에 올라갔고 후에 중앙위 선전선동부 부장, 러시아 최고 소비에트 의장에 올라갔으며 전후에는 코민포름을 맡기도 합니다. 그러나 코민포름에서 스탈린의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경질되었고, 평소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바람에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1896년에 태어난 즈다노프는 1948년 53세에 심장병으로 죽게 됩니다. 그의 사후 그의 권력기반이었던 레닌그라드 공산당은 즈다노프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베리야와 말렌코프에 의하여 숙청의 칼바람을 맞습니다.
1899년에 태어나 1953년에 55세로 죽은 라브렌티 베리야는 예조프의 후임으로 NKVD를 지휘했습니다. 경찰과 비밀경찰을 지휘했고 대조국전쟁 시에 적대그룹을 숙청하는 걸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비밀경찰의 힘은 너무 컸기에 그만큼 견제가 많이 들어오는 자리였죠. 스탈린 사후 서방 세계와의 평화공존, 발트 국가에 동유럽 위성국 수준의 자치 허용, 농업 및 경공업 개혁을 제안했으나 당 내 반대파에 밀려서 첩자로 몰려 숙청당합니다.
1881년에 태어나 1969년에 89세로 죽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는 국방인민위원회 의장으로 적백내전의 영웅이었습니다. 스탈린의 측근으로 군부를 제어하려고 노력했으나 겨울전쟁 때의 지휘 문제로 일선에선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스탈린 사후 최고 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을 역임했으나 이미 권력 뒷선으로 물러나 있었습니다. 이미 찬밥이라 오히려 위험해서 아예 밑바닥까지 털린 동료들보다는 사정이 나았지만, 어쨌든 그도 1961년 공산당 중앙위에서 쫓겨나고 1969년에 죽습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1894년에 태어나 1971년에 77세로 죽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카가노비치 밑에서 정치생활을 시작한 그는 후에 모스크바 시 당의 당서기로 근무했고 모스크바 지하철 건설을 맡았습니다. 후에는 모스크바 주의 당서기로 승진했죠. 제2차세계대전 때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정치장교로 복무했고 이 때 빛나는 커리어를 쌓았습니다. 스탈린의 측근으로 올라가 즈다노프 사후 빈자리를 채우면서 베리야와 말렌코프를 견제할 인물로 떠오릅니다. 스탈린 사후에는 권력투쟁에서 승리하여 최고지도자에 올라 개혁드라이브를 펼쳤으나 당 내의 반발로 1964년 은퇴합니다. 무기력하게 살다가 1971년 죽습니다.
안드레이 안드레예비치 안드레예프(...)는 1895년에 태어났습니다. 스탈린의 심복으로 교통인민위원회 의장으로 근무했었습니다. 스탈린의 수하로서 역시 다양한 활약을 펼쳤으나 1952년 농인이 되어 사실상 정치계에서 은퇴하게 됩니다. 1971년에 77세로 죽었는데 당시 지도부인 브레즈네프, 코시긴 등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니콜라이 불가닌은 1895년에 태어나 1975년에 81세로 죽었습니다. 모스크바 시 당에서 근무하던 그는 1937년 대숙청 덕택에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인민위원회 의장이 되었습니다. 그 후 제2차세계대전 때 군사 관련 행정업무로 커리어를 드높이고 스탈린에게 발탁되어 정치국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후에 흐루쇼프와 몰로토프 간의 권력 투쟁 시절에는 애매한 포지션을 취했습니다. 몰로토프가 털리고 잠시 공직을 유지했지만 1958년 중앙위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 후 러시아 남부의 스타브로폴로 가 그 곳의 인민경제회의 의장으로 좌천되었으나 1960년 아예 연금생활자로 물러났고 75년에 조용히 죽었습니다.
아나스타스 미코얀은 1895년에 태어나 1978년에 죽었습니다. 아르메니아인이었죠. 캅카스의 공산당에서 활동한 그는 일찍이 스탈린과 오르조니키제와 친분이 있었습니다. 1923년에 중앙위에 올라왔고 나중에는 정치국으로 올라와 주로 식량문제, 외국과의 무역을 맡았습니다. 이 때 가정용 요리책 편찬 사업을 지휘하기도 했고 헨리 포드와 만나서 미소 경제 교류 확대에 대해 이야기 하기도 했습니다. 전쟁 시에는 역시 스탈린을 도와 각종 행정 업무를 맡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 파일럿으로 참전한 아들을 잃기도 했습니다. 스탈린 사후 권력투쟁에서 흐루쇼프를 지지하였고 20차 공산당 대회에서 최초의 반스탈린 연설을 행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줄곧 흐루쇼프를 지지하여 요직에 있었으나 브레즈네프가 흐루쇼프를 밀어내자 조용히 은퇴하게 됩니다. 상당히 불명예스러운 취급을 받았던 흐루쇼프와 달리 미코얀은 그래도 후배들이 레닌훈장을 주는 등 어느 정도 예우를 해줬습니다. 흐루쇼프의 장례식에 화환과 애도의 편지를 써서 보냈고 7년 뒤 1978년에 84세로 자연사합니다.
1890년에 태어난 몰로토프는 일찍부터 볼셰비키에 들어가 활동했습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활동한 그는 프라브다를 맡았고 스탈린이 페트로그라드에 돌아왔을 때는 사이가 아주 험악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레닌의 귀환 이후 스탈린과 매우 친해져 그의 최측근이자 소련의 사실상 2인자로 지냈습니다. 1921년에 서기장이 아직 별 볼일 없는 자리일 때 서기장 일을 해보기도 해서 사실 서기장만 놓고 보면 스탈린의 선배입니다(...) 그 후 중앙위에서 활약하며 1930년 소련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올라갔습니다. 당 내 급진파의 거두로 오르조니키제와 갈등했으며 결국 승자는 몰로토프였습니다. 1939년부터는 외무인민위원회 의장으로 소련의 외교를 맡아 테헤란, 얄타 등에서 연합국의 거두들과 함께 전후 세계의 기초를 쌓은 사람 중 하나입니다. 스탈린이 반유대주의 정책을 펼칠 때 유대인인 아내를 굴락에 보내기도 했는데 찍소리도 못 내기도 했습니다. 스탈린 사후 소련 정치의 거물로서 몇년 간 활약했으나 흐루쇼프와의 권력투쟁에서 패해 엄청나게 중요한 자리인 몽골 대사로 파견되었습니다. 1961년에 흐루쇼프가 다시 강력한 반스탈린 운동을 전개하자 한 번 더 피를 봐 아예 공산당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탈린 시대 자신의 역할에 대해 한 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전해지며, 중소 국경분쟁 때 사석에서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하는 마오의 말이 옳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스탈린의 딸에게는, "너의 아버지는 천재였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적당히 복권되어 조용히 연금 타며 살다가 고르바초프 시기인 1986년에 97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윈스턴 처칠은 전쟁 기간 몰로토프와 많은 회담을 했는데 "뛰어난 능력을 가진 무자비한 냉혈한"이라고 평했으며 외교 업무를 처리하는 데는 천재적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말렌코프는 1902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동거녀(평생 혼인 등록을 안 했다고 합니다)가 레닌과 건너건너 아는 사이라 공산주의자로서 커리어를 쌓기 좋았습니다. 내전 후 공산당 활동에 열심이었고 1920년대 스탈린에게 발탁되어 중앙위 조직국원으로 입성합니다. 조직국에서 당의 문서 관리 사업 등을 담당했습니다. 숙청에도 개입되었고 후에는 예조프를 몰아내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1941년에는 정치국으로 들어옵니다. 대조국전쟁 기에는 국가방위원회에 들어갔습니다. 군항공기과 핵개발을 담당했고 이 때 권력의 최상층부에 진입합니다. 스탈린 사후에는 장관회의 의장(구 소련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되었으나 후에 흐루쇼프와의 권력투쟁에서 패해 실각합니다.
1961년 당에서 쫓겨나고 카자흐스탄의 우스티 카메노고르스크의 수력발전소 관리소장으로 좌천됩니다. 1988년에 87세로 죽었으며 말년에는 정교회에 감화되어 성직자로 살았습니다. 훌륭한 성가대원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마지막은 라자르 카가노비치입니다. 그는 1893년에 태어났으며 20대부터 공산당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내전기에도 공산당에서 일했고 투르크메니스탄의 무슬림 반란을 진압하기도 했습니다. 20년대에는 스탈린에게 정치적 충성을 보내면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제1서기로 일했습니다. 부하린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비판자이기도 했습니다. 28년부터는 모스크바로 돌아왔고 30년대에는 정치국원으로 당의 핵심에 진출했습니다. 대숙청 기간 동안에는 "강철 라자르"로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형인 미하일 카가노비치가 정치적으로 공격당해 자살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2차세계대전에는 캅카스 전선에서 근무했고 전후에는 스탈린의 측근으로 우크라이나에도 파견되었고 여러 인민위원회 의장을 역임했습니다. 스탈린 사후에는 장관회의 부의장이었고 권력의 최상층부에 있었으나, 그의 후배였던 흐루쇼프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고 사실상 권력을 잃었습니다. 그 후 우랄의 칼륨 공장으로 좌천되었습니다.
1961년에는 아예 공산당에서 출당되었고, 모스크바로 돌아와 연금생활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30년을 더 살아서 1991년 7월, 그가 거의 평생을 헌신했던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기 5개월 전에 99세로 죽게됩니다. 그는 사실상 최후까지 남아 있던 "볼셰비키"였습니다.
첫댓글 99세로 죽다니;
1년만 더 살면 100세 찍고 러시아 제국 -> 소비에트 연방 -> 러시아 연방 다 보고 죽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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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철이도 그렇게 굴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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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서 참 여러 생각 들더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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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치매라 ㅠㅠ 드라마틱하게 소련 해체될 때 잠시 제정신으로 돌아오셨으면 대단했을 듯
@첝 33333333
@첝 이 글이 쓰여진 목적은 사실 카카노비치이긴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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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전기에서는 크레믈의 늑대라고도 하더군요
역시 능력으로 보나 지위나 인품으로나 이 업계(스탈린의 정치적 부하업계)에서는 몰로토프가 갑인듯. 스탈린의 천재성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중 하나, 아니 단연 가장 잘 이해한 사람 아니었을까 싶네요.
본인도 극단적으로 사람을 불신하는 성품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다시 보니 만년은 참 쓸쓸하네요들. 이야말로 역사무상 인생무상이렷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건 결코 아니지만 가장 큰 감정 감회를 느끼는 정서는 쓸쓸함입니다. 폐허나 고택을 좋아하는 것도 그래서 그런거고...
스탈린이라는 존재와 엮이면 다들 쓸쓸하게 끝나는 것 같아요. 30-40년대를 화려하게 불태우고 60년대에는 다들 연금생활자;
@첝 그렇지 않아도 결국 삶이란건 쓸쓸한 것
@앙겔루스 노부스 모든 삶은 쓸쓸하다 그러나 어떤 삶은 더 쓸쓸하다
말렌코프가 말년에 정교회 성직자로 전직했던줄은 몰랐네요. 80년대 소련에 대한 사람들이 가진 회의가 꽤나 컸었던 모양...
그 스탈린 밑에서 정상까지 올랐던 사람이 저정도로 떨어졌으니 회한이 상상할 수 없었겠죠
정교회성직자? 소련시절에 교회나 모스크에 대해 정부가 어떤 정책을 취했는지 거물 공산당원이 성직자가 되다니
70년대부턴 그냥 방임했어요
즈다노프(주다노프)는 그냥 스탈린 사후 권력다툼에서 패배한 인사 A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한국철학사 책에서 이름이 나오면서 중공-북한 유물론 사관이 이양반이 만든걸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설명한 걸 보고 놀란 기억이 있네요. 어쩌면 흐루시초프 뺴곤 위 인물들 중에 현재의 중공-북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람일지도...
아무리 그래도 몰로토프인 것 같기는 합니다만.. 스탈린과 집필도 몇 번 같이 하기도 했으니 잔뼈굵은 이론가였음은 틀림 없죠
@클박클박 본지 오래되서 기억이 잘 안나네요...
보통 히틀러의 측근들은 엄청 많이 알려져 있는데에 반해, 스탈린의 측근들은 베리야, 몰로토프, 보로실로프밖에 알려지지 않았는데 정말 많은 인물들을 알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런데 스탈린 시기, 볼셰비키당의 '선전장관' 은 누구였는지 혹시 아십니까?..ㅇㅇ... 프라우다가 선전을 담당했다곤 하지만, 프라우다가 인명은 아니니...
괴벨스에 필적하는, 스탈린의 선전장관이 누군지 궁금하네요
딱히 없었던 듯 싶은데... 스탈린을 제외하면 개인의 능력으로 돌아가는 체제는 아니어서 말이죠
판타지보다 더한 인민락원!
말렌코프가 말년에 정교에 몸을 맡겼다니...흠좀무로군요 저도 처음 알아갑니다
저 상황 된다면 뭔들 못하겠습니까 소련 제국의 최고점에서 저리 빠르게 몰락했는데 ㅠㅠ
그리고 저는 항상 몰로토프가 '최후의 1인'인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80년대 중반에 복권되고 다시 원로대접 받을 때 눈물을 줄줄 흘렸다는 그 이야기의 임팩트가 너무 세서 그랬나...
카가노비치가 만약에 정신이 온전해서 회고록 같은 걸 남겼다면 정말 재미있었을 텐데요. 일전에 소련 외상이었던 그로미코의 회고록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글라스노스트 시기에 덧붙인 내용은 그 이전에 저술했던 부분과는 어조가 확연히 달라지더라구요
하지만 고참 볼셰비키가 그런 걸 남긴다는 건 본인에게도 그렇고 아무래도 여러 모로 무리겠죠?
@Civrious 아마 알고 있는 비밀이 너무 많았겠죠..